풀뿌리자치연구호 이음의 출판기념회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요즘 머릿 속을 떠도는 이야기들을 대충 정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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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두 쓴 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나눠 쓴 책에 대해 제가 발제라는 걸 하려니 좀 어색하기도 하네요. 아마도 전체 기획을 한 것과 다른 분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제게 떠넘긴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이미 제가 발제를 한다고 다 나갔으니 몇 자 적어라도 가야 할 듯해서 글을 끄적거려 봅니다.

예전에 이음이 냈던 책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가 지방자치제도와 더불어 풀뿌리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담았다면,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는 조금 더 정치적인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올 6월의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탓도 있지만 풀뿌리의 실험들이 공동체를 의미있게 바꾸려면 정치영역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것도 있지만 뭘 해도 참 안 바뀔 것처럼 느껴지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단지 정치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정치에 염증을 내는 사람들에게 함께 정치를 하자고 말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 저는 두 가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지역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나름대로 한국사회는 역동적인 변화를 거쳐 왔고 민주화 속도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냉소적일까?

그와 관련해 저는 두 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 일반에 대해 수동적인 이유는 능동적이려 할 때마다 끊임없이 억눌려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제 관심은 지난 100년 동안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의 노력이 어떻게 좌절되었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라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는 사람들의 저항의지를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시절부터 많은 노력을 해왔고 그런 체계가 우리 사회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바뀌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교육이겠지요. 새로운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교육이 식민지 교육의 방식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해괴한 논리로 경쟁의 속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강해질수록 더불어 살려는 의지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은 우리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TV 개그코너의 표현을 빌린다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는 정치의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젠 이정도면 되었지라는 잘못된 자족감(특히 정치엘리트들의!!)도 그런 수동성에 한 몫을 하겠지요. 지금까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지나치다면 지금껏 많은 것이 변했다라는 말도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도가 변한 건 맞지만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제도가 열려진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지고 있습니다. 소위 민주정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사회, 경제, 문화적 지표를 따져보면 오히려 우리 사회는 후퇴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탓이라고 꼭 집어 얘기하긴 어렵지만 그 탓이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어렵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지요.

또한 노력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바꿔보려 할텐데 내가 약하다고 여기니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약하니 저 더럽고 부패한 인간들에게 지배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긍심이 짓밟히고 너덜너덜해져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민주주의는 무의미한 제도가 될 뿐 아니라 위험한 제도가 되기도 합니다.

위험한 제도가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냉소가 냉소로만 끝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 나서면 다른 사람이 나설 때 격려하고 북돋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서는 사람을 시기하고 경멸하고 왕따를 시키는 거지요.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이 시스템을 지키는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거지요.

최근 옆 나라 일본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쏟자는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삶이 이 모양이라는 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쿄 히비야 공원에 텐트를 친 젊은이들은 구걸을 받지 않고 일하면서 당당하게 살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본 젊은이들의 조직화에 열심인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빈곤에 맞서다』(검둥소, 2009)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와 ‘어차피 헛일이다’ 사이를 연결하는 활동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활동이 사회 전체에 퍼지면 정치도 빈곤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더욱더 관심을 갖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무관심한 채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고 싶다. 빈곤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마코토만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하지메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하지메는 일상적인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얘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억눌려왔던 자신감과 자긍심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떨까요? 최근 지방선거와 관련된 논의들을 봐도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으니 소위 야권이 단합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연합공천을 하면 최소한 1석이라도 건질 수 있겠지, 연합논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니 일단 모든 지역에서 다 공천을 내놓고 협상을 해야지, 풀뿌리정치와는 그리 상관없는 생각들이 여러 매체들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거 자체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선거만을 바라보면 정치라는 영역이 아주 좁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정치가 선거밖에 없습니까? 정당이 있고 시민단체가 있고 여러 가지 자원활동이 있고 시민들과 함께 일을 모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습니다.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에 실린 많은 사례와 내용들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중요하지 않으니 관심을 끊어라가 아니라 선거가 중요한 만큼 우리 일상의 정치화, 페미니스트들이 얘기하듯이 개인적인 것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상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볼 뿐 아니라 그 권력을 변형시키는 사람들의 자발성도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그렇게 자꾸 좁게만 해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을 바꾸더라도 그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제가 최근에 재미있는 생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두레와 계같은 공동체 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걸 저는 18세기 정도로 봅니다. 농업기술도 발달하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잉여도 생기고 상업도 활성화되는 거지요. 이런 사회의 발전이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든든하게 하고 공동체 조직은 그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18, 19세기에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던 건 아마도 이런 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저항을 꿈꾸기만 했다면 이제는 함께 저항할 사람들과 조직이 있는 거지요.

더구나 이런 조직들은 ‘회의’라는 걸 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따로 정치시간을 빼야 하지만 이런 조직들에서는 일상이 곧 정치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꼈을 겁니다. 즉 정치문화가 형성된 거지요. 그 힘이 폭발한 게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과 종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20세기는 바로 이런 믿음과 자발성, 공동체를 짓밟고 해체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가 그러했고 군사독재가 그러했습니다. 단지 파괴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고 대체하려 했지요. 일종의 ‘가짜 공동체’를 만들어 전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관변단체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을 따로따로 떨어뜨려 놓고 경쟁의 법칙을 강요했습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정치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정치문화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과정이 없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장의 문화가 사라졌다면 다시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프레이리나 알린스키, 함석헌, 장일순같은 분들이 왜 그토록 교육이라는 걸 강조했을까,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배움이라는 걸 강조했을까, 저는 그 이유를 바로 이런 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공동체가 실체로 존재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의 틀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이상을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며 단단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거짓 공동체가 아닌 진짜 공동체가 가능하겠지요. 사람 일에 시간을 쏟지 못한다면 저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풀뿌리정치가 실현되려면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관점,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삶을 바꿔야 풀뿌리의 정신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안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시대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때론 격하게 부딪쳐야 하겠지요. 하지만 끌려가는 시대정신이 아니라 내가 끌고가는 시대정신을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수다 떨며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지요. 뭘 바라셨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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