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가 어느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자금을 폭로하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섰을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관심이 뜨겁다. 광고나 서평 하나 제대로 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판매고가 10만부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삼성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삼성특검이 어이 없이 끝나고 이건희 회장이 사면을 받고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으로 돌아다닐 때까지 10만의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용철 변호사가 배신자, 매국노로 욕을 먹고 그의 양심선언을 도왔던 신부님들이 한직으로 물러날 때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태안주민대책위의 성정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삼성반도체의 박지연씨가 23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지 금서(禁書)에 대한 유혹일까? 어떤 이유로 문제의 책이 잘 팔리는 걸까? 사람들은 삼성의 실체를 잘 몰라서, 그래서 그 실체를 공부하려고 책을 사보는 걸까?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읽는 걸까?



공화국을 꿈꾸는 왕국의 국민들


아직도 한국을 공화국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공화국이라 부르기에 이 나라는 너무나 불공평하다. 가진 놈들이 더 무섭다고 이 나라의 부자들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삼성그룹만 해도 CJ그룹, 새한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까지 따지면 대상그룹, LG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한 가족이다. 이런 가족관계는 삼성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게도 일상이다. 가족관계로 서로에게 보험을 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일이 생기면 즉각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정부가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상식이 될만큼 둘의 관계는 끈끈하다. 시민들의 관계가 평등해야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이런 부조리에 분노해야 할 터인데, 우리 사회의 풍경은 아주 차분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삼성의 성공을 시기해서 일부러 흠집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부패를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부패를 인정하더라도 그런 부패가 삼성만의 일도 아니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우려면 그 정도의 부패는 어쩔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는 ‘준비된 선수들’도 있다. 삼성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삼성을 비호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자문교수라는 은밀한 관계를 통해, 때로는 사외이사라는 공식직함을 통해, 때로는 기업의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의 돈을 받는 지식인들이 적잖이 많다(경향신문 취재팀이 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보면 그 점이 잘 묘사된다).

예를 들어, 서울대 사회학과의 송호근 교수는 어떨까? 그는 삼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한국인의 평등지향적 심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문화,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망이 “삼성전자를 세계 50대 기업에 진입하게 만든 경영 기법과 노력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하고, 다른 재벌들은 놔두면서 유독 삼성만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한다(송교수에게 이 책을 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냈는가라고 물으면 그것도 평등지향적 심성 탓일까?)(송호근,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심지어 삼성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나서서 삼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기도 한다. 삼성이 최고의 기업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 그래서 너무나 위험한 사람들이 삼성에 대한 공격을 막는데 앞장선다. 심지어 삼성에게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우리 기업’이라며 슬쩍 돌아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그 끈적끈적한 논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 방어하더라도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은 부패이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시민들의 덕성이 공동체에 생명력을 계속 공급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한 법과 규칙을 따르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공화국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부패는 시민들의 덕성을 타락시키고 법과 규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법을 피하는 방법이 ‘능력’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공화국은 부패한 왕정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공화국 시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왕국의 신민들은 자기 환상을 깨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위험한 경험주의


어떤 사안을 비판하다보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는 반박을 듣곤 한다. 어찌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면 어쩌란 얘기인가?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런 얘기는 심각한 폭력이기도 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미 현실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금 현실이 다른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사상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경험주의(ideological empiricism)라고 불렀다. 지금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런 경험주의는 새로운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상으로 만든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믿는 인간을 ‘일차원의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 부르며 이런 인간형을 벗어날 힘을 예술에서 찾았다. 긍정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부정의 언어,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는 시의 언어가 그 힘이다(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었고, 시의 언어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문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주는데 열중하고 때로는 가족이라는 낭만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래 이게 현실인데 어쩔 거냐’ 아니면 ‘엄마, 아빠, 가족찾기’이다. 현실을 뛰어넘어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통계자료와 조작된 언어들을 사용하는 세련된 글만이 경험주의의 승인을 받는다. 하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계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통계와 사회과학의 언어들이 표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접할수록 우리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불신하고 냉소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옛말이고 머리와 가슴 모두가 싸늘하게 식은지 오래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4월일이 되어서야 내부 게시판에 반박글을 올리고 그룹블로그(
www.samsungblogs.com)를 새로 만들어 공식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듯이 근거없음의 연속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충분한 입증자료가 있다”, “국가기관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다”라는 예상된 답변들이 나온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숫한 거짓말들이 뒤흔드니 누가 감히 도전하겠는가?


이계삼은 사상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현실주의를 질타한다. “오늘날 이 어이없는 현실이 현실로서 승인되는 것은 아마도 쇼조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인간성에서 본성(nature)의 영역,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천부의 감각이나, ‘상식’이라는 이성적 현실감각, 혹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감각,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분노’와 같은 자연스러운 야생의 정서가 거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거세한 이른바 ‘현실주의’의 압도적인 질주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모든 파행의 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계삼, '우리들의 현실주의, <녹색평론> 2010년 3/4월호)


삼성을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머리로 제아무리 삼성을 생각하고 삼성가의 비리를 추적해도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활이 삼성에 젖어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중요하다. 고작 불매운동으로 그 거대한 삼성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미 이 현실에 포섭되어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들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무모한 일로 보였는지.



삶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사상가 톨스토이(L. Tolstoy)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서 현재의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너는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네 생활을 폭력이 아닌 사랑 위에 세워야 한다."(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위대한 인생>)


그런 점에서 삼성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삼성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불매운동을 한다고 삼성딱지가 붙은 상품을 모두 버리고 다른 재벌가의 신상품을 살 필요는 없다. 새로운 상품을 사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도 불매운동의 한 방법이다.


현명한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삼성그룹의 비자금과 이건희 일가의 수입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삼성전자제품이나 삼성의 의류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실적을 보면 레저부문이 약화되고 급식 및 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사업부의 실적이 10.9%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푸드’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일이 몇몇 사람이나 몇몇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으로 노력할 때 재벌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GMO FreeZone만이 아니라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매를 넘어 자급(subsistence)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불매와 자급의 틈을 메우는 힘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소비자생협들이 대기업의 유통망을 벗어난 삶을 가능케 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삶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벌 없이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협동의 힘을 실현할 때 다른 삶은 현실이 된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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