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라는 화두를 품고 살다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사실 아나키스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점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체제인 한국에서 무(無)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비(非)현실을 넘어 반(反)현실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자명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강제적인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강권주의’로 받아들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인 억압 모두에 반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 독점된 자본,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 가부장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고, 아나키즘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로는 아나키즘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무정부주의라고 부르면 아나키즘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체제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체제를 내면화하고 있고 그것을 지탱하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나키즘을 단순한 상부상조의 사상이나 이타적인 사상으로 해석할 수 없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이타적인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외려 아나키즘은 자기 안의 생명력의 근원을 인식하고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사람들, 내가 알고 가지고 품고 있는 것이 온전히 내게만 속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것을 더불어 누려야 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나키즘의 이타성은 진정한 자아에 대한 고민, 자신이 가진 에너지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된다. 개인주의에서 공산주의까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나키즘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 함께 묶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당신은 의사이다.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찾아와 왕진을 부탁한다. 허름한 빈민가에 위치한 그 남자의 좁은 집엔 노동에 지쳐 쓰러진 부인과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 과로와 빈혈에 시달리는 그 여성에게 푹 쉬고 잘 먹으라는 처방을 내릴 건가? 다음 날 잘 차려입은 하인이 와서 당신에게 왕진을 부탁한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도착하니 첫눈에 딱 봐도 햇볕을 쬐지 않고 너무 일을 하지 않아 파리하게 시든 부인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어떤 처방을 내릴 건가? 당신이 병을 고치는 의사라면 그 병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얘기한다. “만약 당신이 진실한 인간이라면, 만약 당신 안의 동물성이 아직 지성을 말살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만 해. 약간의 좋은 생활과 지적인 발달이 환자와 질병의 반을 감소시켜줄 것이다.’ 약은 악마에게나 줘라! 신선한 공기, 좋은 음식, 과로하지 않을 것―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의사란 직업은 기만과 술수에 불과하리라.”

 

이 글에서는 비슷한 사례들이 반복된다. 땅을 빼앗기고 찾아온 소작민에게 변호사인 당신은 뭐라고 충고할 것인가? 기타 등등... 지금 한국의 상황은 이와 다를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실존적인 고민에서 자유로운가? 당신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역사 속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고민을 통해 탄생했다. 유명한 역사가 신채호도 이 글을 읽으며 고민에 빠졌고 아나키즘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인사과에 근무하는 당신에게 명예퇴직을 시킬 사람들을 고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변호사로 일하는 당신에게 비리경찰/검찰을 변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과학자로 일하는 당신에게 4대강에 운하를 만들 방법을 고안하라는 제안이 떨어졌다. 정보통신업을 하는 당신에게 SNS를 감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이것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당위의 물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인간이고 너는 누구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의 물음이다.

 

나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이와 같은 고민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개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단지 우두머리만 바꿀 뿐이다.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가리는 또 다른 의미는 아나키즘이 임금제도와 사적 소유권, 대규모 공장노동, 지나친 도시화를 반대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우두머리 없는 사회는 왕이나 대통령의 목을 벤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존엄하게 일하고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만 아나키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 무정부주의라는 표현은 그런 삶에 대한 강렬하고 치열한 욕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작은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권력이 없어져야 하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사상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와 전 지구의 변화를 꿈꿨고, 지구상의 단 한 명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바쿠닌의 얘기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혁명의 불씨를 지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꼼뮨들의 꼼뮨을,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꿈꿨다.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건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꼼뮨이었다. 꼼뮨에서 인간의 자아와 자유는 제한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아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꼼뮨들의 꼼뮨을 통해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억압적이지 않고 존엄한 노동질서를 만들며, 더불어 살고 함께 누리는 관습과 문화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이 꿈꾼 세상이었다.

 

사실 크로포트킨은 왜 작은 공동체들이 지속될 수 없고 실패하는가라고 물으면서 종교적인 규율이나 소수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공동체들이 결코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자율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꼼뮨은 작아야 하지만 그것이 폐쇄적이거나 물리적인 거리로 측정될 수는 없다.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이 연방주의를 궁극적인 대안이라 봤던 건 공동체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인가? 내가 누구 옆에 함께 서 있는가에 따라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고 활동가, 혁명가일 수도 있다. 기득권층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눈엔 테러리스트로 보일 것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눈엔 희망으로 보일 것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우리를 위해 싸우는 아나키스트는 불의를 받아들이고 굴종하느니 차라리 부딪치고 깨지는 삶을 택했다. 그게 테러라면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이다. 그것도 아주 극렬한...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이 투표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잣대는 그 행위의 의미이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에 도움이 된다면 투표도 가능하다. 하지만 투표로 세상에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투표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다양한 사회활동과 동일한 무게를 가지는 수준에서 투표는 유효한 도구일 수 있다.

 

정당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집권’정당은 아나키즘의 비판대상이다. 하지만 권력을 해체하려는 ‘분권’정당, 연방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은 어떨까? 아나키즘이 정파와 정치활동을 비판했지만 그 비판의 근거는 정치 자체, 정치가 이루어지는 세계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정치라는 가상의 관계가 덮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 냉혹한 경쟁의 이해관계가 가리고 있는 서로 보살피는 관습의 세계는 아나키즘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정당활동은 그 세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사람들의 연합과 자율성을 지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정당이 사람들을 이끄는 전위를 자처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강권일 뿐이다.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는가? 행동하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이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이미 세상은 좋든 싫든 어떤 방향으로건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굴러가듯이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내가 원하고 뜻하는 바대로 세상이 움직이면 좋겠지만 그건 이 세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겹치고 부딪치며 결정되기 마련이다.

 

아나키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의 억압적인 세상과 단절하고 더불어 자유롭게 살기 위한 삶의 방식이자 더불어 사는 생활의 대안이라고 답하련다. 연방주의와 공유와 협동의 경제, 자유롭게 연대하는 개인들의 연합체가 바로 아나키즘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매력적인 사상이기에 숱한 오해를 받아온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정말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국가나 자본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나? 아나키즘은 외부에서 힘을 끌어오는 삶이 아니라 내 속의, 우리 안의 힘을 활용하는 삶을 원한다. 즉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복지를 이루는 방식이 문제이다. 한 번도 약자의 것인 적 없었고 그의 것일 수도 없는 국가가 갑자기 착해지리라, 사악한 자본이 인간의 얼굴을 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령 그런 양보가 이루어지더라도, 기득권의 선의에 기댄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국경일과 휴일에 따라 일하고 쉬며, 대중매체의 보도에 따라 세상을 읽고,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 열광하고, 공장과 사무실의 지시에 따르는 우리들의 삶은 수동적이다. 반면에 아나키즘은 능동적인 삶을 지향한다.  나는 광주와 강정, 배제되고 억압받는 시공간을 살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신뢰하며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며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내 속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없이 삶을 살겠다고, 더 이상 국가와 자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신념이다. 무한경쟁과 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은 가장 강력한 반대인 셈이다. 그래서 가장 무시되는 사상이기도 하고 가장 두려운 사상이기도 하다.

 

사상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아나키즘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율성이다. 좌와 우 모두에서도 인간의 자율성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존엄한 인간이어야, 이미 존엄한 인간은 아닐지라도 존엄해지려는 열망을 품은 인간이어야 자율성을 논할 수 있다. 이건 자신 속에서 나와야 한다. 쓸모없는 인간, 잉여가 아니라 각자가 고유한 가치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선거 때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벗어나 내가 꿈꾸는 사회를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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