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른한 봄날의 꿈


박영순 시장실의 회의 열기가 뜨겁다. 다가올 여름에 사상 최대의 전력난이 우려되자 서울시의 전기공급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데,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할 거라고 담당자들이 걱정한다. 전력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서울시가 전력을 확보할 방법은 전력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요즘 수도권 밖 지역정부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경기도와 협의해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산업이나 자원을 조정하지 않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을 줄이거나 단가를 높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발전소들을 전부 지방에 크게 짓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박영순 시장이 나서서 박본혜 대통령과 통화를 했지만 연방정부 역시 비리나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지역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인 전력회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전력난 걱정에 마음이 심란한데, 박본혜 대통령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걸 서울광역시정부(연방국가로 전환된 뒤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역시가 되었다)가 공개지지하고 서울시민의 찬성여론을 유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가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박본혜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온갖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이득이 없다보니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다. 확실한 지원책을 미리 제공받고 난 뒤에야 해당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식이다. 국방은 연방정부의 소관이라 밀어붙일 만한 일이지만 제주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육지와 분리․독립하겠다는 제주도지사의 당선은 연방정부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지사는 연방정부의 분명한 지원이 없다면 과거 중앙정부에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과 손을 잡고 따로 협조체계를 꾸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도지사는 앞으로 제주도내 공문서에서 표준어와 제주어를 똑같이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차차 표준어 사용을 줄이겠다고 하니 제주도에 가는 연방공무원은 제주어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연방정부가 해군기지 공사를 밀어붙이다간 제주공화국이 수립될 것 같다.


제주도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한국은행과 별도로 화폐를 만들겠다며 충남은행을 설립했다.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묶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한다. 충남은행의 설립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지원금에 목을 매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으로 충남은행은 중앙통화와 지역화폐를 환전하며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리고 충청남도는 도시와 농촌,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발전정책을 수립하겠다며 관련 법령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연방정부로 전환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역정부들은 ‘지역주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과거 수도권으로의 초집중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정부에게 연방기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정부들이 수도권을 포위하는 전략을 공동으로 세우고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영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간혹 드러났다). 연방주의는 각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필요들에 따라 서로 연합하는 것이기에, 지역간의 연대는 더 강화되었다. 또 지역정부의 법률(연방국가가 되면서 조례라는 말이 사라졌다)이 연방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다보니 지방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고 법원도 따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이 자기와 맞는 지역을 선택하며 여차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고 하니, 지역권력도 주민들의 요구에 더 민감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이 서울보다 지역에서 내려지자 주민들도 자기 지역의 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정부와 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연방국가로 전환되면서 주민소환권이 강화되고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더 작은 규모의 대안을 모색하는 주민자치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공공정보를 공개해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 왜 연방주의인가?


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발전소와 전력공급회사가 있는데, 2000년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는 공기업인 발전소가 민간회사에 매각되면서 전력가격이 폭등하면서 시작되었다. 엔론이라는 회사가 그 주역인데 가격을 장난쳐서 두 군데의 전력공급회사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터지자 나중에 미연방정부도 개입했는데, 한국이라면 중앙정부와 한수원이 좌지우지했을 일이다. 한국처럼 의사결정이 집중되면 그만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힘이 약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다.


캘리포니아주 사태처럼 시민의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캐나다의 경우 퀘벡주는 두 차례나 연방정부와 떨어져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이지만 퀘벡주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데도 퀘벡주의 뜻이 연방헌법이나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퀘벡주는 1980년과 1995년 두 번 분리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1980년에는 분리독립 찬성비율이 40.44%, 1995년에는 찬성비율이 49.42%에 달했다. 그 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과 독립을 반대하는 자유당의 업치락뒤치락 선거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되면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리고 2014년 9월 18일에는 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는 것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율 44%로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외쳤던 ‘프리덤’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대표 없이 세금만 부과하는 현재의 체제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투표는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분리․독립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자유의 열망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의 형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퀘벡주나 스코틀랜드처럼 분리․독립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연방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연방주의 논의는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것이고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시선을 이제 구체적인 지역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연방주의를 실현할까?


지난 2015년 3월 5일 ‘시민이 만드는 헌법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선언문에서 한국의 낡은 헌법이 사회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나서서 직접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발족 당일 대토론회를 열고 지방분권과 국민주권, 사법정의, 권력구조개혁 등을 요구했다. 참석하지 못해 토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이나 분권형 국가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연방주의로 가려면 개헌이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제도의 지위가 법률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연방주의 개헌이 되면 국회나 청와대가 지방자치제도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


사실 그래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고, 기득권층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진행된 지방자치 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시키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외치면서 행정단위를 광역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발상도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도 비슷한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을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분권이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공사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제는 분권보다 더 분명한 연방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층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방국가가 수립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머레이 북친은 『다음 세대의 혁명(The Next Revolution)』(2015년 번역 출간예정)에서 미국이나 유럽공동체(EU) 등에서 드러나는 연방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연방국가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시민이 국가를 통제할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북친은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인민의회들(popular assemblies)이 소환할 수 있는 대리인들을 지역과 지방의 연맹의회로 보내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연방은 지역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은 국가주의를 강화시키는 국가선거보다 지역정부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지역정부가 국가와 의회에 맞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권이나 연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국가통치를 구성하는 주와 국가 차원의 선거활동과 지역차원의 선거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우려한다.


북친의 주장을 한국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연방주의를 실현할 전략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일단 청와대나 국회는 연방으로의 전환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외에는 연방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방법이 없는데 국민투표를 부여할 권리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이중권력을 구성해서 그림자 정부를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의 공식화되지 않은 자치질서를 짜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생산/소비의 망을 강화시켜서 농부가 도시인의 밥상과 공장/사무실의 급식을 책임지고, 도시인이 농촌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도시인이 농촌의 삶을 지지하고 산업이 농촌의 기술을 지원하면 어떨까?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켜가야 실제로 연방으로의 전환이 된 후에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언론을 끊고 지역언론을 살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수도권 중심의 담론을 차단하면 어떨까?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키려면 다양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한데, 도서관이나 다양한 시민공간 등이 그런 역할을 맡으면 어떨까? 시민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연방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서로 손을 맞잡을 때에 실현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4. 연방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사정과 필요,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정책, 그것도 수도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정책들이 많다(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지역사회가 ‘지역주권’을 가지고, 그런 지역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대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시민들에게 자율성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성도 준다.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다보면 그 지역에 맞는 삶의 형식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모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몫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자치가 활성화되면 헛되이 사용되는 자원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일에 관심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지방정부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접촉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많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야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정치적인 힘이 생길 수 있다.


지역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상호의존하며 자치와 자급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런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소이다.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공적인 장을 확장하는(公有) 공공성(公共性)은 지역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무대로 삼는 운동주체의 등장과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신문을 만들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거나 방송국을 만들거나 민중의 집과 비슷한 공유공간을 만들거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연방주의는 그런 다양한 실험들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한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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