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2.11.29 09:45

2주에 한번 월요일마다 동네 주부들과 사회과학강독회라는 모임을 가진다. 혼자서는 안 읽을 두꺼운 책 또는 어려운 책을 정해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다들 아이를 둔 부모인지라 어떤 책을 읽던 부메랑처럼 교육 이야기로 돌아가고, 모임 마치고 밥을 먹는 시간에도 주된 주제는 교육이다. 주로 학생이나 교사의 입장에서만 얘기를 듣고 생각했는데 이 모임에서는 ‘부모’의 입장, 특히 ‘엄마’의 입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밖에서는 엄친아다, 헬리콥터맘이다, 엄마들의 교육열을 비꼬지만, 정작 엄마들은 ‘우친엄(우리 친구 엄마)’에 대한 부담을 얘기한다. 우리 친구 엄마들은 이런 거 저런 거 해준다는데 엄마는 왜 그래?, 엄만 나한테 관심이 없어?, 이런 얘기를 아이에게 듣는다고 한다. 물론 부모 귀에 다른 얘기가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고, 비평준화 지역이고 이우학교가 있으며 조기교육, 입시교육 열기가 뜨거운 동네의 영향도 클 것이다. 그래도 이 얘기에서 느껴지는 결은 엄친아, 우친엄이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이고 서로가 서로를 옥죄고 자신을 갉아먹는 ‘절망의 알리바이’라는 거다.

강독회에서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도 읽고(선생님을 동네로 한번 모시기도 했고), 기타하라 마사키가 쓰고 우토 오사무가 그린 《현미선생의 도시락》을 읽으며 땅을 만지는 교육에 관해 얘기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은 자기 변화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만 변해서 뭐가 달라지냐, 대안이 있어야 마음을 고쳐먹을 것 아니냐는 알리바이의 그늘이 여전히 삶을 뒤덮고 있다.

 

누구나 가야 하는 대학에서 누구나 갈 수 있는 대학으로

 

얼마 전 이 모임에서 <어셉티드(accepted)>라는 영화를 봤다.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이고 DVD로는 출시됐는데, 번역된 영화제목은 <짝퉁 대학생>이다. 영화의 의미를 뒤집는 참 기묘한 제목인데, 어쩌면 우리 사회의 상식을 드러내는 제목이기도 하다.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으로 증명되었듯, 발언의 의미에 주목하지 않고 진짜/짝퉁이라는 틀로 논의를 몰아가는 경우가 많으니.

<어셉티드>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미국 내 어느 대학에도 합격하지 못한 바틀비는 친구들과 정신병원을 접수해 SHIT이라는 가짜 대학을 만든다. 그런데 부모를 속이기 위해 만든 대학 웹사이트(클릭하면 입학되었다accepted고 뜨는 대박 사이트!)를 통해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이 몰려들고 바틀비는 이들‘과 함께’ 대학을 운영한다. SHIT이 잘 운영되자 옆의 대학에서 ‘진짜 대학생’들이 몰려들고, 결국 그 대학의 총장이 SHIT을 불법교육기관으로 교육청에 고발한다. 그러나 교육청은 SHIT의 교육성을 인정하고 다시 문을 열게 한다. 좀 뻔한 줄거리이지만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교육과 사회에 대한 풍자가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그 재미를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SHIT(South Harmon Institute of Technology라는 그럴싸한 이름이지만 약자로 만들면 ‘제기랄’이라는 욕이다)은 하먼 대학이라는 유명사립대 옆에 있는데, 재미있게도 그곳은 원래 정신병원이었다. 정신병원에 대학을 세운다니 끔찍한 발상 같지만, 생각해보면 대학, 학교라는 공간이 사실상 정신병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유를 억압하고 감금하고 멍 때리게 만들고 때로는 약물까지 복용하게 만드는 곳이 학교 아닌가. 그러니 이건 풍자가 아니라 고발이다.

그리고 정신병원을 대학으로 만드는 역사를 일으킨 이는 달랑 4명이고, 이들은 특별한 능력자도 아니다. 이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건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대학에서 공부하려고 온 사람들과 그들의 등록금이다. 사실 한국의 비싼 등록금이면 어떤 학교든 못 만들까. 그리고 한국의 사립대처럼 따로 적립금을 모아둘 필요가 없으니 시설투자도 과감하다. 한때 유행어처럼 대학 만들기 참 쉽죠, 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대학에서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 역시 지극히 단순하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배우고 싶은 일을 서로 나누면 된다. 모두가 학생이자 교수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 하는 일, 내가 남에게 배우고 싶은 일을 칠판에 적어서 나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육과정이 만들어진다. 너와 나의 능력을 나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나거나 그 사람을 데리고 오면 된다. ‘새로움’에 현혹되어 내가 가진 능력을 버리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공부이고 교육 아닌가.

 

물론 새로운 실험이 시련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영화에서 SHIT이 진짜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학생들은 대학을 떠난다. 하지만 곧 그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교육이 진짜 공부라는 점을 깨닫고 SHIT를 지지한다. 경험의 힘은 편견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따분한 충고나 꿈나라 상상력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진행될 조그만 시도들이다. 인생은 새로운 가능성들로 가득 찼다는 점을 증명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주인공의 이름이다.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바틀비는 《모비딕》의 작가로 알려진 허만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다. 책에서 바틀비는 상대방의 물음에 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답한다. 좋다/싫다, 긍정/부정도 아니고 질문한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이 대답! 우리는 언제나 대안을 찾고 대안이 있어야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 스스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런 요구는 뭔가 부조리하다. 바틀비는 그런 부조리함에 부조리함으로 맞선다. 바틀비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절대적 불복종을 선언한다.

 

흥미롭게도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된 바 있는 존 테일러 개토는 ‘바틀비 프로젝트’를 주장한 바 있다.1) 시험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조용히 시험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전혀 어렵지 않다. 시험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고 싶지 않다’라고 쓰면 된다. 조직이나 위계질서를 만들지 말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시험지에 불복종을 선언하는 문구만 남기면 된다. 개토는 이 시도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이미 “대학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업”이기에 고객을 필요로 하고, 기업체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고.

 

허나 한국에서 바틀비 프로젝트가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한국의 대학은 단지 기업이 아니라 학벌을 재생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대접받는 우리 현실에서는 아무리 대안이 출현해도 그 대안이 또 다른 형태의 기준을 만들지 못하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대안을 표방한 것들이 또 다른 형태의 기준들을 실제로 만들어 왔다). 학벌을 위해 교육이 존재하고,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이나 미래의 생존도 학벌에 달려 있는 한국에서는 절대적 불복종도 알리바이를 깨기 어렵다.

 

그리고 바틀비에게는 그 스스로 풀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문강형준은 바틀비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다. 바틀비의 절대적 부정이 힘을 얻으려면 자신을 지킬 장소가 필요한데, 어떤 면에서 바틀비는 “행동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태도”를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필경사 바틀비》가 극단의 불복종인 자결로 삶을 마감했듯이, 그 불복종은 우리 안의 회의와 냉소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2) 뿌리내릴 땅이 없다면, 손잡아줄 동지가 없다면, 강인한 바틀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모임에서 함께 영화를 봤을 때도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공감도, 냉담함도 아닌 답답함이었다. 누군들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대학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을 직접 만드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대학이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가짜, 진품/짝퉁, 성공/실패라는 식의 이분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이 답답함은 풀릴 수 없다. 새로 대학을 만들어도 그 대학이 ‘좋은’ 대학이어야 한다면 그건 알리바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대학을 기대해도 그 대학이 다른 이의 손으로 세워져야 한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뿌리내림이다. 불안하고 공포에 떨지 않아도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감, 그건 내 속에 있고 우리 속에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 주체에게 맡겨준다면 답답함은 사라질 수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경쟁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능력을 믿는다면 알리바이의 힘은 약해진다.

 


혁명에는 육법전서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승훈의 《혁명을 기도하라》(문주, 2012)를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최근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가 순위다툼을 하고 있지만 그 책의 감동에서 쉬이 벗어나기 어렵다. 책표지엔 검은 예수와 체게바라의 사진이 겹쳐져 있다. 아나키스트 예수의 탄생, 혁명의 예언자 불온한 예수의 탄생이라니, 이보다 더 후끈할 순 없다.

 

서론만 읽어도 후끈 달아오른다. “이 책이 포착한 성서 속 예수는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그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독생자’,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차라리 그는 반란과 전복의 붉은 예언자였으며, 평화 대신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 온 자, 버려진 자들과 거친 황야를 주유하며 체제와 세상 모든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였다. 따라서 예수는 질서와 안녕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Pray) 그리스도가 아니라 맨발로 대지를 딛고 모든 체제와 권위를 뒤엎는 혁명을 기도(Attempt)하는 불온한 예언자였으며, 오늘날로 치면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어울리는 검은 메시아였던 것이다.” 할렐루야, 내가 기다렸던 holy anarchist의 출현이다.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는 종말을 앞둔 혼란기였다.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세력인 젤롯이나 시카리, 유대 율법을 철저히 따르며 제국에 대항하는 지식인 그룹인 바리사이, 그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며 집단이주운동을 이끄는 예언자 그룹인 카라이도 있었다. 예수는 예언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좀 달랐다. 예수는 지식을 내세워 교계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무장투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법률도,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마음과 삶, 관습, 삶의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전복”을 선포했다. 새로운 세상은 세계를 보는 눈을 뜯어고칠 때, 사는 방식을 바꿀 때 모습을 드러낸다. 회개는 그런 전복을 뜻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특정한 몸짓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생업수단을 버리고 기존의 사회적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거나, 세관에서 일어서거나, 가진 재산을 모두 남에게 나눠주거나,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다” 등의. 그리고 예수와 그 무리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들리는 곳마다 음식과 술을 요구했다. 엄숙한 탁발승들이 아니라 품바떼였고, 예수는 먹보에 술꾼이었다.

 

이런 무리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을까? 예수의 곁엔 언제나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렸다. 당시에 세금을 걷던 세리는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는 예언자 요한을 따라서 “체제에 부역하며 이득을 챙겨 먹는 이들은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들보다는 욕을 덜 먹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체제에 부역했던 자라도 체제를 버리고 함께 길을 떠날 몸짓을 하는 순간 그는 예수의 친구가 된다. 그것이 예수가 신의 왕국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세상을 사는 방법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꺼리는 자들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했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래서 그의 옆에는 거지, 여성, 죄인들이 모였고, 한승훈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노숙자,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예수 옆에 있었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공동체에서 유리된 사람들”과 함께 예수는 기꺼이 술꾼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한승훈은 그 혁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는 “메시아를 자칭했던 동시대의 다른 혁명운동가들과는 달리 민중봉기를 선동하거나 게릴라 조직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현재의 억압적인 권력자를 다른 권력자로 교체할 뿐이었다. 대신 그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실제로 와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거기에서는 기존의 가족이나 사회적 구별들이 소멸된다.…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한 것은 ‘정치혁명’이라기보다는 ‘사회혁명’이거나 ‘문화혁명’이었다.”

 

저자의 설명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책에서 묘사되는 예수의 모습과 그 활동은 다른 영역에도 얼마든지 투영될 수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는 무장투쟁을 외치는 젤롯들은 없고 권력 앞에서 목숨 걸고 권력을 조롱하는 카라이들도 없으니 우리가 비교할 대상은 바리사이이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유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통해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지배를 비판했지만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위계질서를 만들었고 수많은 금기와 의무를 강요했다. 이들의 사상은 거룩했으나 이들은 그것을 실천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상을 포기하면서 급진적 행동에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쉽게 변하지 않는 건 새로운 율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제국에 팔아먹었듯이 우리 역시 바리사이와 각을 세우며 다른 세상을 살려는 예수의 출현과 그의 활동을 믿지 않고 바리사이에게 공물을 바쳐온 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수를 따르는 몸짓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가 좀 궁금해졌다. 성경도 읽어보고 싶고. 혁명의 경전인 성경을 지금 가진 것을 더 공고히 누리려는 자들의 위안으로 만든 교회라는 조직이나 체제를 벗어난 삶이 체제 속에 안착되고 내면화 된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우리 시대의 예수가 분명 어딘가에 이미 살다는 예감도 들었다.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삶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일 것이라는.

 

물론 예수의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더 간악한 지배, 더 폭력적인 내몰림, 깨지고 부서진 관계들이 우리 시대를 장식한다. 사적인 공포가 공적인 장을 압도한다. 체제의 강력한 알리바이는 일상으로 스며들어 개인을 지배한다.

 

그래서 회개가,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뒤로 넘어져 본 사람들은 그 고통에 공포를 느낀다. 홀로 넘어졌을 때는 크게 다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이 있다면? 두 사람이 넘어질 때 꼭 잡아주겠다며 서로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간다면, 공포는 남아도 불안은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뒤로 넘어지는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믿게 되고 결국에는 뒤로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넘어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연대의 삶이 그렇게 실현된다. ‘함께 살자’라는 외침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을 그 실천은 앞으로 가자는 구호가 아니라 그렇게 뒤로 넘어지는 경험을 통해 다져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뒤로 넘어져본 사람들의 밥상공동체, 공부공동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삶을 그저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알리바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삶을 사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것, 그러고 싶지 않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그런 선언을 함께 할 사람들과 손을 잡고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시는 것. 재앙의 순간에도 서로를 믿는 것. 이것이 너무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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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12.05 16:41
[오늘의 문예비평] 겨울호에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몇 편의 영화를 묶어서 감상을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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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택된 실화와 만들어진 판타지

지난 7월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전 국민이 국가브랜드에 대한 인식을 갖고 말 한마디, 활동 하나하나가 국가 브랜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국가도 상품처럼 잘 포장해 팔 수 있다고 믿어온 만큼 이 대통령은 상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립적인 노사문화와 불법시위가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한국인들만큼 국가의 이미지를 의식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국민들은 드물다. 외국인을 만나면 미소를 지으며 혹 길을 몰라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한일전같은 국가 간 경기가 벌어지면 한민족의 뜨거운 열정을 과하다 싶을 만큼 보여준다. 그리고 밉든 곱든 정치인들이 권좌를 떠나면 다 용서하고 잘한 것만 기억하려는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다. 갑자기 좌측보행을 포기하고 우측보행을 하라며 지하철 역사를 뜯어고치고 에스컬레이터의 방향을 바꾸어도 글로벌 기준이라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세계적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 정도면 전 국민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극장에서도 한국인들의 좋은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한국의 컴퓨터그래픽 능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겠다던 심형래 감독의 <디 워>는 842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올해에도 <킹콩을 들다>와 <국가대표>가 각각 130만 명, 8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 여세를 이어 갔다. 그리고 쓰나미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연출해낼 수 있는 민족임을 보여준 <해운대>는 1,134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

그 중 <우생순>과 <킹콩을 들다>, <국가대표>의 흥행은 다른 영화와 달리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세 영화 모두 인기없는 스포츠인 핸드볼과 역도, 스키점프를 소재로 삼았기에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방’에서 꿋꿋이 자기 힘으로 ‘성공의 신화’를 만들었던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이니 어찌 감동스럽지 않겠는가. 더구나 국가라는 브랜드가 걸려 있으니 애국심 강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감동을 느꼈겠는가. 열심히 노력하면 국가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적당한 웃음과 감동으로 버무려주니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이 감동을 준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허나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감동일까?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어떨까? 똑같은 실화이고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여자하키 국가대표팀 중 6명이 아제르바이잔에 집단으로 귀화한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수백만 한국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까? 그 사실을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그리고 故장진영이 주연했던 <청연>(2005년작)이라는 영화가 친일논란에 휩싸였던 사실을 보면, 또 “Korea is gay”라는 말을 썼다고 2PM의 재범이 한국을 떠난 것을 보면, 우리는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실화이지만 모든 실화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가대표라는 브랜드를 붙이지 않은 실화도 수백만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실화와 다르게 <킹콩을 들다>에서 올림픽 동메달 출신의 코치와 영자의 올림픽 금메달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감동에도 일정한 수준이 있는 듯하다. 아니, 우리의 감동은 실화라는 사실보다 국가라는 판타지를 통해 미리 준비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을 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국민가수’라는 호칭만큼 ‘국민영화’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 과연 음반판매량이나 관객동원수가 그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술이 소비의 양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디 워>를 보는 동안 내내 하품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앞서 얘기했던 영화들이 모두 국가브랜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이니 이런 비판이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영화들에서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대정서를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어떤 ‘코드’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2. 헝그리정신과 꽃남, 사라진 중간계급

흥미로운 사실은 흥행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우생순>의 미숙(문소리 역)은 올림픽 2연패를 하고도 팀이 해체되어 대형마트에서 박수치며 호객행위를 하고 남편 빚을 갚으려 아이를 데리고 대표팀에 합류한다. <킹콩을 들다>의 영자(조안 역)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할머니와 사는 고아이자 총을 사지 못해 사격부에서 쫓겨나는 가난한 학생이다. <국가대표>의 주인공 흥철(김동욱 역)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이고 칠구(김지석 역)는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소년가장이다. 300만의 관객을 기록한 <거북이 달린다>(2009년작)의 필성(김윤석 역) 역시 형사라지만 사는 건 시골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돈과 권력을 이미 다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이 특유의 헝그리정신으로 자기 삶을 일궈야만 성공신화를 그릴 수 있으니, 단연 그들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TV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들은 의외로 하나같이 재벌집 아들들이다. 고급자동차는 진부할 정도이고 자가용비행기에 요트를 타고 옆집 가듯이 외국여행을 하는 최고의 상류층들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도 헝그리정신은 등장한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금잔디(구혜선 역)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를 둔 학생이기 때문이다. 자기 가게가 있으니 다소 재산을 가진 중간계급이라 얘기할지 모르지만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이 호프집이나 복집을 운영하던 분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사회에서 자영업은 이미 중간계급에서 밀려났다(그렇다면 금잔디도 잠재적인 도심 테러리스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오는 주인공이 가장 극적인 매력을 가지지만 영화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중간계급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할 법도 한데 흥행하는 영화에서는 그런 주인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허리라는 중간계급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노동빈민(working poor)이 3백만 명에 이르고 실업급여 수급자가 1백만 명을 넘긴 나라에서 중간계급을 얘기한다는 것이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교육비의 규모가 연 20조원을 훌쩍 넘는 나라, 학벌이 신분인 나라에서는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막혀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냉혹한 경쟁의 사회에서 중간계급은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공모델이 아니기에 그 가치나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1970년대에 씌어진 조세희의 글에서 열심히 일해 중간계급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꿈은 이미 부정되었다. 난장이 아버지와 대학생 지섭의 대화는 그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일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 102~103쪽)

어떤 이는 집이 사라지고 공장에서 쫓겨나 달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는데, 다른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 집씩 살아도 약 3년을 버틸 수 있다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무슨 중간계급인가(『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의 저자 손낙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집을 많은 소유한 사람은 1,083채를 소유하고 있다). 소득만이 아니라 부동산같은 자산까지 포함하면,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허리는 휘다 못해 부러지기 직전이다. 이런 사회에서 더 이상 중간계급은 판타지를 줄 수 없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에서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차라리 귀한 집 자제들이 쿨하게 사는 법을 보여주거나 그들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헝그리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회학자 신광영은 이런 중간계급의 몰락을 민주화의 효과로 본다.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중간계급이 향유하였던 경제적 풍요와 중간계급이 선호한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이상 중간계급이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계급은 이를 막아낼 아무런 조직적,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의 중산층이 보여주었던 보수성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중산층이 스스로 만든 결과이자,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이전에 형성되었던 1987년 체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중략)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중산층의 불안정은 더욱 커질 것이고, 더욱이 보호막이 없는 중산층의 몰락은 전 사회적으로 ‘꿈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중산층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제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과제가 되었다.”(신광영,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 을유문화사, 2004, 266~267쪽).

87년 6월항쟁에서 승리한 중간계급들은 7~9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지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느라 바빴다. 경제적 풍요를 빌미로 정치적 자유를 포기했기에 중간계급은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다. 적절히 국가와 타협하고 경제적 이익을 꾀한 것이 결국 자신의 미래를 가두어버렸다. 중간계급은 자신이 우리사회의 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제 한국사회에서 헝그리의 성공신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키다리아저씨와 같은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는 아름다운 인연을 꿈꿔야 하는데 정녕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꿈을 꿀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건 너무나 우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판타지를 갈구하고 영화는 그런 판타지를 채워주고 있다.


3. 다시 뛰자, 대한민국: 공정하지 않은 팀플레이

가슴에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쓰나미라는 비극적인 재난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 <해운대>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마음들이 하나씩 모인다면 우리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만으로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을까?

<해운대>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영화 <투모로우>(2004년작)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몇 명의 영웅이 아름다운 행보를 보인다고해서 결코 전 지구의 재난을 막을 수는 없다. <슈퍼맨>이 아닌 이상, 지구를 역회전해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다. 우리 사회를 바꾸지 않고서는 파국적인 재난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투모로우>는 초강대국에서 제3세계에 몸을 맡기는 피난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충격적인 자기고백, 바뀐 현실에 대한 자기선언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해운대>에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고백이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다.

물론 그렇다고 헐리우드 영화를 찬양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이야기도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구조대원이나 과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시민의 삶을 갉아먹는 저주받은 자본주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끔찍한 재난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린다는 사실은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에는 언제나 고만고만한 작은 악당들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에서는 가증스런 미소를 띤 큰 악당들이 노골적으로 이빨을 번쩍인다. 나오미 클라인(N. Klein)은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에서 과거의 군산복합체를 한층 능가하는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disaster capitalism complex)’라는 괴물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태풍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에서 자본가들은 고통보다 개발과 일확천금의 가능성을 보고, 쓰나미가 쓸고 간 자리에는 마을이 사라지고 호화 리조트와 관광시설이 들어선다. 사람들이 충격으로 혼란에 사로잡혀 있을 때 국가와 자본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기존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익을 꾀한다. 클라인은 얘기한다. “커다란 위기상황은 유권자들의 뜻을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경제기술관료’에게 국가를 넘겨준다.”(나오미 클라인(N. Klein),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20쪽)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도 자신의 책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상세히 묘사한다. “여기, 도심 한복판의 비즈니스 지구에, 유니온 가의 이제는 물이 마른 길바닥에…시체 한 구가 놓여 있다.…시간이 흐르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데도, 시체는 그대로 놓여 있다. 밤이 내리고, 다시 아침이 오고, 다시 낮이 된다. 그리고 또 다시 한낮의 땡볕이 크레센트시티의 죽은 시민을 내리쬔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미국의 주요 도시의 중심가 한복판에, 며칠 동안이나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결국 썩어서 냄새가 풍기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다. 뉴올리언스에 어서 오세요! 지금 막 종말이 닥친 뉴올리언스!”(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30쪽)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열심히 재난을 원한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몸을 던지며 생명을 구할 때, 자신들은 주판을 튕기며 이익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난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자신들이 세상을 장악할 것이라 자신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팀플레이’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한 팀으로 고통을 분담하자고 얘기하지만 그건 공갈빵처럼 속이 텅 빈 거짓말일 뿐이다. 기업소득이 증가하는데 개인소득은 감소하는 기이한 현상, 매출 상위 50대 기업의 순이익이 증가하는데 고용은 감소하고 비정규직은 확대되는 세상에서 고통분담을 얘기할 수 있을까? 현대자동차, 삼성, 두산, SK그룹의 회장들은 줄줄이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줄줄이 구속되거나 벌금형을 받는 나라에서 고통분담을 얘기할 수 있을까? 누구는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데, 인사청문회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장전입하는 능력을 자랑하는 곳에서 무슨 고통분담?

그런데도 우리 영화들은 여전히 팀플레이가 가능하니 다시 뛰자고 꼬드긴다. <우생순>에서 혜경(김정은 역)은 유럽식 핸드볼에 맞서는 ‘한국형 핸드볼’이 빠른 스피드를 기반으로 한 팀플레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전략 같지만 실제로는 선수 전부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악착같이 뛰어서 슛 찬스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단순한 전략이다. <킹콩을 들다>나 <국가대표>와 같은 영화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팀이라는 공동체의 환상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자신의 성깔을 죽여 가며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보이지만 집단을 강조하는 집단 승리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물론 서로 보살피고 돌보는 삶이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보살핌과 돌봄이 ‘최고’라는 목표를 위해 무조건 단결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구나 내 자신이 그런 목표를 정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내게 지워준 목표라면 어떨까? 그런 목표도 아름다운 승리를 위해 무조건 견디며 다시 뛰어야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 D. Thoreau)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강승영 옮김, 『월든』, 이레, 2001, 134쪽)


4.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

서로 보살피고 돌보는 삶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팀플레이를 나쁘다 매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방식을 우리의 것으로 맞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균동 감독의 <1724기방난동사건>(2008년작)은 3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실패했지만 흥미로운 영화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뻔하다. 사람 좋고 주먹 좋고 의리 좋은 것 하나로 마포의 명물이 된 천둥(이정재 역)이 우연히 만난 기생 설지(김옥빈 역)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가 하나. 설지가 속한 기방을 운영하며 조선 주먹을 통일하는 꿈을 꾸는 야봉파 두목 만득(김석훈 역)과 우연히 양주파 짝귀(여균동 역)를 맞짱대결에서 이기고 두목이 된 천둥의 대결이 또 다른 줄거리이다. 물론 천둥이 만득을 물리치고 설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조직도 모르고 싸움의 판돈도 한 냥밖에 내지 못하는 천둥이 많은 조직원을 거느리고 권력층까지 등에 업은, 186: 1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만득을 이길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천둥의 힘은 바로 자유로움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난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로움은 만득의 예상을 깨며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리고 <1724기방난동사건>에는 양념처럼 영조(백도빈 역)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는 세자라는 신분에도 천둥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자유롭기에 그들은 자유로이 규칙도 짠다. 싸움의 규칙을 짜기도 하고 치열하게 싸움을 하다 휴식을 하기도 한다.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하고 비겁한 승부에 대해선 부끄러워할 줄도 안다. 자유롭기에 천둥은 만득의 부하들의 공감까지 얻어낼 수 있다. 주먹밖에 없는 건달들의 싸움은 칼을 쥔 자들의 비겁함과는 다르다.

그런데 천둥의 자유로움은 그의 천성 탓일까? 자유로움은 어떤 사람의 타고난 취향일 수 있지만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 천둥의 옆에는 잔소리 해대는 할머니와 주책맞은 국밥집 기생, 마포 나루의 장사치들이 있다. 퉁명스럽고 거칠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씨 따뜻한 곰살맞은 사람들이다. 그런 관계의 가치를 알기에 천둥은 돈에 유혹되지 않고 집에 온 손님을 하늘처럼 모실 줄도 안다.

만득이 보낸 칼잡이에게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천둥이 다시 주먹 쥐며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관계가, 그를 보살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들도 떠나고 곶간 열쇠마저 빼앗겼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천둥은 만득과의 최후대결을 원한다.

이처럼 권력과 자본을 가지지 못한 변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권력과 자본의 은혜를 입거나 그 목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관계를 더욱더 강하게 다지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고 사회적 시장을 형성하면서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튼튼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국가’나 ‘착한 국가’가 과연 가능할까? 정권만 바뀌면 한순간에 국가의 성격이 바뀔까?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통령이나 국회로 상징되는 정치권력이 국가일까?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바뀌면 정말 우리의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정치를 실험실의 공학으로 여기는지 어떤 정책이 실시되기만 하면 다른 모든 조건이 자연스레 바뀔 것이라는 공상을 ‘소위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이 된 프랑크푸르트 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책만 뒤적거려도 서구의 복지국가 내에서 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왜곡되었는지에 관한 많은 얘깃거리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없이 서구의 복지국가가 가능했을까? 복지국가는 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났을까? 그런 점에서 짐 아이프는 복지국가가 사회의 대안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복지국가의 위기는 앞서 간단히 살펴본 네 가지의 정책전략[복지국가 옹호, 뉴라이트, 조합주의, 마르크스주의―인용자] 중 어떤 것을 사용하더라도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성장중심의 사회․경제․정치적 시스템―복지국가는 그 내부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은 한순간도 환경파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사회의 발전된 형태의 복지국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제 사회변동의 구조로서 (생태학적 관점에 기초한)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다른 구조, 다른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한다.”(짐 아이프(Jim Ife), 류해정 역, 『지역사회개발』, 인간과복지, 2005, 43쪽) 아이프는 복지국가의 장점이라 얘기되는 적절한 최저생계 보장, 사회적 불평등 감소, 공평성이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의 기밀성, 사회의 익명성, 관료주의 등이 강화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같은 책, 61쪽).

하지만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런 논의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국가에서 사는 시민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정책과 그 권력구조에만 관심을 둔다. 대중의 능력을 얕잡아 보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자비로운 시각이야말로 나쁜 국가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그냥 자신의 ‘목적 있는 삶과 가치’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리라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왜 그런 자신의 가치와 믿음이 우리의 미래이어야 할까?

<거북이 달리다>나 <국가대표>를 보며 어떤 이는 국가의 도움 없이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르치던 국민교육헌장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국가주의의 망령을 본다. 너무 노골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은밀해서, 그래도 국가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게 하는 그 망령.

그 망령을 떨치는 비법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국가나 시장이 정해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는 법을 익히는 것. 서로의 삶과 생활을 공유할 사람들을 모으고 스스로 대안이고 희망이 되고자 하는 삶.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고 타자와 더불어 그 희망을 키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풀뿌리의 힘이다.


5. 누군들 감동을 마다하랴

나도 사람인지라 영화를 보며 눈물을 지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되찾으며 승리를 따내는 감동의 드라마에 어찌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이 고아원 원장인가요?”라고 물으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식한 운동인 역도를 하겠다는 아이들을 보며 누군들 마음이 짠하지 않겠는가. 동메달 하나 땄지만 부상을 당해 무엇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사는 지봉에게 “선상님이 왜 아무 쓸모도 없데요. 이거 아무나 따데요? 열심히 운동해서 내 꺼 보란 듯이 내가 직접 딸랑께요.”라고 말하는 영자가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 제자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스승의 모습을 우리는 <킹콩을 들다>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4대 강을 살리겠다며 멀쩡한 유기농토를 물에 담그려 하는 삽질의 나라에서 우리의 감동은 지극히 위험하기도 하다.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를 인기종목으로 만들기 위해 집중투자를 하고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따지는 나라 한국에서 그런 감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전 국민이 비인기 종목 피겨스케이팅경기를 마치 야구경기처럼 기다리고 김연아 선수의 경기 후 인형이 비처럼 경기장으로 쏟아지는 광경을 보면, 세계신기록이라는 말에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다분하다. 팍팍 지원해주고 그래도 성과가 없다면 또 다시 나 몰라라 하는 곳이 바로 이곳 한국이 아닌가. 더구나 이제는 감동도 마케팅인 시대가 아닌가.

전 국민이 애청하는 TV 프로그램 <1박2일>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프로그램이 진정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복불복이여 영원하라,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강호동의 모습은 21세기의 한국판 『동물농장』이다. 이 농장에서는 남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으면 국가대표라는 위대한 호칭을 얻을 수 있다. 영화 <국가대표>는 아름다운 패배도 있다면 위로하지만, 그런 위로가 감동적인 것은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건 ‘아름다운’ 스키점프이지 아름다운 ‘패배’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이들에게 “13명 중에 13등을 해도 나는 네가 국가대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감동의 판타지에 갇혀 현실의 불이익을 받아들일 사람, 심지어 그 불이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려 하는 부모는 없다.

복불복 사회에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행복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도 여전히 공허한 느낌이 드는 건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거창한 논리는 필요 없다. 먹고사니즘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먹고사는 것만큼 신성한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처럼 한 그릇의 밥을 온전히 감사하며 먹고사는 행위는 그 속에 신성을 담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감동이 결코 채울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이 일상 속에 담긴 신성이다. 밥을 나누고 서로의 정을 나누는 삶이 없어도 국가대표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19세기 말에 이미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그 답을 슬며시 얘기했다. “인간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은 사랑도 심지어 동정심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대의식―본능의 단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이다. 이는 상호부조를 실천하면서 각 개인이 빌린 힘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각자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과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표트르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김영범 옮김, 『만물은 서로 돕는다』, 르네상스, 2005, 17쪽) 우리의 행복이 서로의 행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목표와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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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10.04 21:30

추석, 전 국민이 '고향'과 '가족'이라는 향수를 지니려 떠나는 시기이다.
타고난 것일 수도, 학습된 것일 수도 있는 그 향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든 걸음을 떠나게 한다.
우리 각시와 함께 조금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 튀김하고 전을 붙여 시간이 나서 추석 전날에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나섰다.
애초에 보려고 했던 영화는 아니지만 그 중에 골랐던 영화, <애자>
<오늘의 문예비평>에 써야 하는
원고 때문에 <국가대표>를 보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애자>를 보는 팀에 붙었다.
최강희라는 배우와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지라, 결심을 하는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정이입을 할만큼 줄거리가 탄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최강희라는 캐릭터가 잘 소화해낼 수 있는 영화였던 것 같다.
사실 영화 줄거리는 조금 빤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관계가 멀었던 엄마와 딸이 엄마의 병을 계기로 서로의 관계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어찌보면 명절에 어울리는 다소 구태의연한 영화였을지도...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둔 나로서는 두 팔 끼고 관람하듯 볼 수는 없는 영화였다.
나도 속을 썩일 만큼 속을 썩이며 살아왔고, 우리 어머니 역시 자기 인생의 남겨진 숙제로 내 결혼을 끊임없이 말했던지라...(이제는 그 숙제를 덜어드린 셈이지만...)

어릴 적 사고로 아들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길을 고집하는 딸의 이야기, 아들인 나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관계였다.
다만 나 역시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름 멍울이 생겼던지라 그럭저럭 감동을 받으며 약간 울컥하며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 가족이란 존재들은 무엇일까?
어떤 가족의 누구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세상을 산다는 건 정말 그렇게 외로운 것일까?
아니 어쩌면 외로움보다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기 위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를 형성시킨 그 관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버겁고 고통스러운 것일지 모르겠다.
그걸 드러내지 않고서는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그 잔인한 사실...
지금의 내 모습만으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그 명백한 사실...
명절마다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진부함과 또 다른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그 관계의 끈들...

영화를 함께 본 우리 어머니가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묻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있다라는 반응 외에는...
아마도 우리 아버지가 이 영화를 같이 봤다면 조금 더 집요하게 그 느낌을 물어봤을지 모르지만 어머니께는 그렇게 물을 수 없었다.

다 지나갔다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며 여전히 내 속에 그 멍울이 남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그 날을 생각했다.
나는 애자와 달리 반응할 수 있을까?
사람이란 누구나 한번 살다 한번 죽으니 애써 노력하지 말자, 가족이란 관계 역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너무 집착하지 말자 얘기할 수 있을까?
멍울을 터트리지 않고 내 얘기를 망자에게 전할 수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다.

조상들이 묻힌 산소로 향하다 우리 각시가 길에서 따준 감을 한입 베어무니 그 속엔 햇살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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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4.16 15:04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일본에 아주 독특한 청년이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친구들이랑 시위도 벌이고 지방선거도 출마하는 그저그런 '괴짜'리라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넘기려다 왠지 그 실체가 궁금해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쓰모토 하지메라는 청년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그 친구가 쓴 책이 최근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나 [습지생태보고서]처럼 일그러진 우리 현실을 독특하게 묘사하는 최규석 씨가 삽화를 맡았다는 사실을...

역시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한 유쾌한 표지(중간의 푸른 깃발엔 '캐백수 연대'라고 적혀 있다.ㅎㅎ)에, [습지생태보고서]의 출연진들을 다시 감상할 수 있다. 글과 삽화가 이렇게 절묘하게 일치되는 책은 아마도 당분간 찾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어쨌거나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우울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해야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자라는 낡은 주장을 한다면, [가난뱅이의 역습]은 유쾌하고 혁명적인 반란을 외친다.

책을 펴니 제 1창의 제목은 '여차할 때 써봄직한 가난뱅이 생활기술'이다. 방세를 아끼는 법부터 노숙하는 법, 차를 얻어타는 법, 입을 옷을 구하는 법 등 다양한 생활의 지혜들이 펼쳐져 있다. 가난을 궁색하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등을 치지 말고 공유하고 공생하며 살라는 교훈도 들어 있다.  이렇게 1장만 읽고 있으면 아이 찌질해라며 슬슬 짜증이 밀려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활의 지혜보다 하지메의 장기는 대학과 거리에서 펼친 반란에서 더 빛을 발한다. 하지메는 '호세 대학의 궁상스러움을 지키는 모임'에서 시작해 바가지를 씌우는 학생식당 분쇄 투쟁을 벌이고 궁상스러움을 없애려는 학교에 대항해 난로 투쟁, 찌개 투쟁, 술 투쟁, 갈고등어 암치 투쟁, 페인트 습격사건을 벌인다. 말이 투쟁이지 한잔 하면서 실컷 불평불만을 늘어놓다 취기를 빌려 총장실을 습격하는 막가파 학생들이다. 투쟁의 필수품은 쇠파이프나 화염병, 농성이 아니라 찌개나 고기와 술, 술판이다.

하지메의 이런 행동이 아주 엉뚱해 보이지만 내 눈에는 나름 진지하게 '판을 짜는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메는 멍석만 깔아놓고 주위의 가난뱅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유도하면서 자기 자신도 즐겁고 다른 이들도 즐거우니 이 얼마나 유쾌한 투쟁이냐. 그의 말을 들어보라.

당시는 저녁 시간 이후에 대학에 가면 언제나 누군가가 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고 있어서 곳곳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색다른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도 바비큐를 굽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잔 안 할래?”하고 말을 건네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으응, 이게 정말 바람직한 대학인 거다. 걸어다니기만 해도 친구가 생기니까!


이런 하지메의 투쟁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거리로 이어진다. 하지메는 이제 거리에서 노상 대연회나 찌개 집회를 열었다. 거리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끓이면 여기저기서 가난뱅이들이 나타나 이 축제에 동참한다. 따로 선동하거나 선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모여든 힘을 모아 중심가를 습격(?)하거나 크리스마스 분쇄 집회를 연다.

사람들이 상상만 했던 사건들이 하지메의 행동에선 실현된다. DJ가 시끄러운 음악을 틀며 시위를 벌이고, 집회 신고를 하고선 달랑 3명만 집회에 참여한다든지(3인 데모), 심지어 귀찮으면(?) 신고만 하고 집회를 열지 않는다(공포의 바람맞히기 데모). 생각해 보라, 집회장에서 열리지 않을 집회를 기다리는 경찰의 모습을...

대학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지메의 거리축제엔 음악과 춤이 빠지지 않는다.

소리를 중시하는 이유는 우선 우리가 즐겁게 하기 위해서지만 주변의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질서정연하게 데모를 해봐야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게 뭔 데모람. 모처럼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쌓이고 쌓인 불만을 터뜨리려고 작정했다면 틈만 나면 음향을 꽝꽝 울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교통을 마비시켜 조금이라도 세상을 들썩거리게 해야 보람이 있다. 이게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거다. 까불지 말라는 경고를 귀청이 떨어지게 알리려면 마냥 예의 바르게 굴 수가 없는 법이다. 대혼란 만만세!


이렇게 데모를 벌이다 하지메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길목 좋은 곳에서 때마다 사람들이 듣지도 않는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지메는 구의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온 동네의 가난한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다 모여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떠들어대며 축제를 연다. 놀랍게도 하지메는 이런 소란을 떨고도 1,061표나 얻어 공탁금을 회수(400표 이상)한다.

거리의 반란을 꿈꾸는 하지메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곳은 '아마추어의 반란'이라 불리는 재활용가게이다. 재활용 가게라고 해서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나 '녹색가게'를 떠올리지 마시라. 이들의 가게는 재활용 물품을 거래할 뿐 아니라 인터넷 라디오방송 기지(http://trio4.nobody.jp/keita/
)로, 술집으로, 무도회장으로, 다양한 반란의 공간으로 활용되니까.

의식적인 학습이든,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든 하지메는 가난뱅이들이 서로 연대해야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지역에서 연대하며 살아가자고 외친다. 용산 참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지역의 조그만 상점들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뱅이로 전락할 신세이다. 술집, 식당으로 이어지는 대형 체인점과 대형 할인마트의 공격을 받으며 자영업자들은 몰락하고 있다. 하지메는 재활용 가게만이 아니라 이런 작은 상점들이 공동체를 꾸리고 공동의 공간을 마련하며 살아가자고 외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하지메는 가난뱅이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낭비를  줄이고, 가난뱅이들은 "공유할 수 있다면 공유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고, "중고품을 사거나 필요없는 물건을 파는 행동이 곧바로 바가지 씌우는 경제에 대한 저항이 된다는 말이다! 동네 할머니가 “어머, 이거 왜 이렇게 싸”하고 중고 주전자를 사 가는 것이 반체제 행동이 될 수도 있다!"고 외치는 새로운 반란가이다.

하지메가 이런 기발하면서도 가난뱅이들과 함께 하는 전략을 제시했던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미국의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도 이미 60년대에 그런 전략을 많이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잔치인 클래식 음악회에 가서 방귀를 뀌며 그들을 위협한다든지, 도심지에 쥐를 풀어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을 알린다든지, 10원짜리를 매일 예금하면서 은행을 압박한다든지, 알린스키는 나름 그 시대의 쇼킹한 운동전략들을 만들어냈다. 아마 찾아보면 더 많은 기발한 운동방식이 있고, 한국에도 그런 기발한 사람들이 많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지메라는 이 시대의 청년이 가진 새로움은 분명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을 궁상스럽게 외치지 않고 부자들을 긴장시키고 압박하는 공격적인 개념으로 바꾼다. 우린 더이상 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 당신들이 짜놓은 경쟁의 규칙을 더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는 다분히 위협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가믄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

나는 그가 계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대학에서 거리로, 구의회선거로, 그의 반란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얼마전 마포 민중의 집에서는 그를 다룬 영화 [아마추어의 반란]이 상영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마쓰모토 하지메가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의 방문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가난뱅이들의 역습을 기대해 본다(설마, 재미 없게 강연회만 하고 돌아가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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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3.28 14:18

세상을 살다보면 참 우연히 일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어제 간만에 각시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씨네큐브에 갔는데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두 개의 영화를 놓고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둘 다 나름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러다 더 리더를 보기로 했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재미있게 봤었거든요.


빌리 엘리어트, 말이 필요없는 영화였죠.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면서도 당시 영국 광부들의 파업을 잘 담아냈던...





디 아워스는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디 아더스'라는 공포영화의 속편인 줄 알고, 공포영화 싫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는...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제 우리 각시도 똑같이 공포영화라고 말했다는...(ㅎㅎㅎ 역시 천생연분이군요) 







하여간 '더 리더'를 봤는데, 멜로 영화일 줄 알았던 영화가 나름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더군요(그런게 달드리 감독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더구나 최근 인권연구소 창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렌트 세미나와 완전히 겹쳐버렸어요.

길에서 구토를 하는 소년을 돌봐줄 정도로 정이 많은 여인 한나, 어린 소년의 호기심으로 그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15살 소년 마이클의 얘기가 영화 전반부를 차지합니다. 어린 마이클은 한나와의 섹스에 빠졌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세상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한나는 마이클을 그 또래들의 세계로 돌려주기 위해 짐을 싸서 떠나죠.

그렇게 헤어진 뒤 마이클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고,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한나는 자신이 감시하던 유대인 300명을 살해한 혐의(폭탄이 떨어져 불타는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군 혐의)를 받습니다. 그 지옥에서 탈출한 한 여인이 책을 쓰면서 그 책에 언급된 6명의 독일인이 재판을 받는데 그 중 1명이 한나죠. 여차저차해서 한나가 6명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지요.

그런데 재판에서 한나가 자신에 관해 얘기한 내용은 아우슈비츠의 소장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매일 수용소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정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내야만 했다. 나의 임무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인데, 문을 열어줬을 경우 그들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은 그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한나는 자신의 임무를 넘어서는 행위를 선택하지는 않았지요.

아렌트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가서 취재했던 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당시 나치의 법률 하에서는 전혀 범죄가 아닌 일을 했고, 공무원으로서 자신이 시킨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이히만이 심문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그가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죽게 되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더라도 그대로 수행했으리라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사람에게서 생각과 판단의 능력을 빼앗아가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을 불러오는가를 말하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정답같은 얘기이죠. 하지만 저는 달드리 감독과 아렌트의 의도가 이런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달드리 감독의 시각을 볼까요? 영화에서 한나는 자기 죄를 피하려 했던 나머지 5명과 달리 그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한나가 얘기하지 않은 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 뿐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한나는 무기징역형을 받게 되죠.

그리고 그 점을 알고 있던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한나에 대한 원망이든, 한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분노이든, 마이클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한나를 버렸던 거죠. 그리고 당시 독일 곳곳에 자리잡았던 수용소를 이미 알고 있었고 수용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알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도 한나를 처벌하면서, 또는 한나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모든 죄를 덮어버립니다. 최소한 한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왜 했는지 얘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할 판단력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덮어버리는 데에만 급급했죠.

그리고 한나는 재판을 하는 판사에게도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때 어떻게 했을 거냐고? 판사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혼자 힘으론 그런 결정을 반대하진 못했을 테니까요. 나치즘 하에서 그런 결정을 막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행위할까에 관해서는 판사조차도 자신이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한나의 위치에 가게 되었을 때 한나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특히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결정을 반대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때로는 양심이 뒤늦게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마이클은 양심(또는 사랑?)을 이기지 못해 이혼을 하고 옛날처럼 책을 녹음해서 교도소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한나는 그것을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마이클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한나는 삶의 활력을 찾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게 되죠. 가석방을 앞두고 교도소를 찾아온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일자리와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나는 목을 매어 자살을 택합니다(왜 자살을 택했는지는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는 '상처'였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남기는 몹쓸 상처...). 한나가 남긴 돈은 유대인 문맹퇴치기금에 한나의 이름으로 기부됩니다.

모두가 홀로코스트를 끔찍한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 누구도 수용소에 관해 기억하려 하지 않죠.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씁쓸히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마술처럼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이제 젊은 딸을 둔 아버지로 늙어버린 마이클이 딸에게 아버지의 삶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어쩌면 이 '소통'이 달드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지 모르겠네요.모두가 공범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과거를 얘기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그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만이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막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재판 얘기처럼 한국사회에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이 책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관한 보고서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는 책의 맨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아이히만은 재판이 끝난 뒤 아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잠깐 판단을 미루고요, 제가 보기에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얘기를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며 이 재판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죄를 물을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사건의 원인을 캐지 않고 그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 세계적인 쇼를 벌였다고 아렌트는 봅니다. 그러니 무능력, 즉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무능력함이 과연 아이히만만의 문제였을까요?

더구나 아렌트는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상류층들이 자기 민족을 어떻게 배반했는지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행정과 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희생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 공동체를 국가와 분리된 게토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켰던 유명한 유대인들([전체주의의 기원] 1권에서 얘기되는)은 유대인들을 지옥의 입구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상층 유대인들의 배신은 '구원'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면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다. ‘맹목적인 운명’에 따라 선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신성한 원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서류에 써서 그로 인해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뉘는 연약한 인간의 손을 인도할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러한 ‘신성한 원칙들’은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어 냈는가? ‘지부르[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한’ 사람들(즉 지도층 인사들)과 ‘아주 저명한 유대인’이라고 카스트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열심히 팔아서, 불쌍한 유대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세상의 지지를 받지요. 그러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 무시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영화에 잠시 비치듯이 어느 누구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그 고통이 컸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쁘리모 레비나 서경식의 글, 또는 솔제비친의 소설에서 엿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고통스럽고 아팠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마도 아렌트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고 난 뒤에 유대인 공동체들의 적이 됩니다.

아렌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비유합니다. 예수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이겨 예수를 처형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처형이 끝난 뒤 손을 씻으며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일까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선한 사람을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화를 보며,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가끔 91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희망의 말을 남깁니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인간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인간은 신이 용서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신과 같이’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 신도 ‘그와 같이’ 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자기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이다.



신은 인간에게 용서하는 힘을 줬다고 합니다. 한나처럼 누구라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집단적인 고백이 실제로는 그 죄를 은폐하고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렌트의 제자인 베이너의 말처럼 "아렌트에게 용서는 판단에 뒤따르는 것이지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아렌트는 용서야말로 아주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 내가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환원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니까요(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고통스러울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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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1.30 14:35

후카사쿠 긴지 감독, <배틀로얄 1> 2000년도 작품.

후카사쿠 긴지, 후카사쿠 켄타 감독, <배틀로얄 2: 레퀴엠>, 2003년도 작품.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이순애 엮음, 이홍락 옮김,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창작과 비평사, 1998.

 


영화는 시종일관 끔찍하고 피비린내 풍기는 장면을 보여준다. 인간의 생명은 잔혹한 생존의 룰 앞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영화를 보며 잔인하다 고개를 돌리는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가 아닌 현실을?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그런 생존의 룰이 지배하지 않는 천국일까? 영화에서처럼 무기가 주어지지 않을 뿐, 우리의 학교, 우리의 사회는 이미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아닐까?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 학생 80만 명, <배틀로얄 1>의 배경은 일본의 가까운 미래이다(우리에게는 얼마나 먼 미래일까?). 국가는 이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배틀로얄’이라는 법을 선포한다. 배틀로얄은 일종의 서바이벌게임으로 무작위로 한 반을 선택해 무인도에 집어넣고 3일 내에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한다. 이 게임은 목적은 단 한가지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이라는 규율에 복종하는 법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


<배틀로얄 1>의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 보자. “각자 성적이나 학점, 인사고과라는 무기를 가지고 최고가 될 때까지 싸워라. 만약 이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꿈꾼다면, 너는 배제될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네 친구나 동료를 꺾어라.” 폭력적인 얘기인가? 이미 우리 학교와 사회는 폭력적인 공간이다.


<배틀로얄 1>이 친구끼리 서로 죽이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드러낸다면, <배틀로얄 2>는 그런 체제에 도전하는 ‘테러의 시대’를 그린다. 1편에서 섬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나간 나나하라 슈야(후지와라 다쓰야 役)는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해서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고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의 어른들과 소수의 국가들이 전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마음대로 결정짓고 있다는 걸.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냐. 63억이란 인간들이 살아가고 63억 가지의 삶이 존재하고 63억의 평화, 63억의 정의, 63억의 전쟁과 악이 있다. 싸움 없이 얻어진 평화는 어디에도 없다! 평화의 뒤엔 수많은 피, 땀, 눈물이 스며 있지. 만약에 인간이 그 역사를 경시하고 잊게 된다면, 그런 평화는 개똥만도 못해. 일본, 중국, 북한,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쿠바, 콩고, 페루,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그라나다, 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수단,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고독하게 싸우는 전 세계의 아이들, 너흰 혼자일지 몰라. 하지만 이젠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마. 버려진 전 세계의 아이들, 함께 일어서서 함께 싸우자. 우리 지금 낡은 구두를 벗어 던지고 이곳이 아닌 더욱 먼 곳으로 달려나갈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뺏고 억압해 온 모든 어른들을 향해.”


이에 어른들은 ‘정의’란 이름으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정부는 전국에서 문제아들을 모아 슈야를 죽일 때까지 진행되는 게임에 투입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 끝에 아이들은 ‘모두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함께 총구를 어른들에게로 돌린다. 멀고 험하며 어두울지 알면서도,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모두들 앞으로 뛰어나간다.


긴지 감독은 억지스러울지라도 아이들을 모두 죽이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직 쌀쌀하지만 곧 봄이 오리라는 바램을 우리가 버리지 않듯이, 아이들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에는 길동무가 있다. 2편의 부제인 레퀴엠은 망자를 위한 미사곡이다. 슈야는 얘기한다. “살아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어간 친구들을 잊지 않는 것 뿐,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않는 것 뿐이야.” 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산자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때론 그 망자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릴지라도 이젠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할 친구가 생긴 것이다.



<배틀로얄 1>에서 한 마디 반항없이 규칙을 열심히 적는 아이는 소위 ‘범생’이다. 그 모범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떠올렸다. 책에서 쇼오조오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평화를 가르쳐야 할 학교가 어느덧 전쟁의 정당성을 설교하고 있을 때, 모범생들은 그 논리를 열심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소위 ‘비행청소년’들은 사고를 치며 자기들 방식으로 선생과 학교에,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쇼오조오는 바로 그 비행청소년들에게서 일본의 희망을 본다. “회의장이 아니면 회의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규격화된 우등생들과는 달리 불량소년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미친 소리든 진지한 회의든 할 수 있었”고 “그와같은 규격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참신한 발상을 낳는 그들의 지혜의 원천”(194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쇼오조오는 불량정신이 가져야 할 ‘불량의 윤리학’을 설파한다. “권력 및 그 밖의 것에 대한 비판과, 비판의 자유를 어느 때에나 허용하는 자유로운 관용과, 타인에 대한 공감”(202쪽)을 가질 때 불량은 하나의 윤리로까지 자리를 잡는다.


쇼오조오가 불량을 설파하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너무나 ‘정상적’이고 ‘안락’하기 때문이다. 쇼오조오는 일본사회를 보육기가 계단처럼 쌓아올려진 사회로 파악한다. “하나의 보육기로부터 다른 보육기로 옮겨질 때에는 지나치게 격렬한 경쟁시험이 부여”(18쪽)되고, “경험이 없는 ‘우등생’ 출신이 ‘우등생’이었던 시절의 자기도취만을 여전히 가진 채­아무런 자기비판도 거치지 않은 채­ 지배신분이 되어서 인간을 규격제품으로서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세칙 작성에 광분하고 있는 것”(186쪽)이 바로 일본사회이다.


사실 쇼오조오가 비판하는 일본 사회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느덧 체제의 규율에 길들여져 스스로 복종하는 상태, 쇼오조오의 말을 빌면 ‘자발적 예속’의 상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얄팍한 중산층이라는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때론 친구나 동료를 희생시켜서 자신의 안락함을 지키겠다는 자발적인 예속상태가.


쇼오조오는 그런 자발적 예속의 사회야말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가, 라고 묻는다. “격렬하고 끊임없는 유통․유동이 모든 형태, 대상, 사물을 삼켜버리는 세계이며 그와 같은 특질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한 그 사회는, 외견적인 깃발이 무엇이든지 간에 파국의 30년대를 ‘창립기’로 하는, ‘창조적’인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차원과 형식을 달리하는 새로운 전체주의가 아닐까?”(74~75쪽)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헌신의 대상이 국가일 때 국가주의가 생겨나고 회사일 때는 회사인간이 태어나며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한다.”(82쪽)


전체주의의 작동방식과 특징을 분석하면서, 쇼오조오는 전체주의와 맞서는 수단으로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경험(비행)과 그 속에서 활기를 띠는 이성을, 궁극적으로는 자기비판, 즉 “제도나 조직에 의해 강제되면 되는 대로 꾸역꾸역 허위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비참한 ‘자기비판’과는 정반대의, 사회의 정신을 자신과 더불어 재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본래적인 자기비판­역사에 의해 관철되면서 또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역사 그 자체를 바꿔나가는 상호주체적인 자기비판­”(207쪽)을 강조한다.


전체주의, 그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념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전체주의의 정당성을 학습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형 인간’이, ‘성공신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이렇게 모범을 강요하는 사회의 틀을 깨는 방법은 불량해지는 것이다.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짝다리를 짚으며 ‘불량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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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1.30 14:25


[라디오스타]를 보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그]를 다니는 친구가 이준익 감독을 인터뷰하고 난 뒤 그가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왕의 남자]를 보고 그다지 탐탁치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한번 더 훑어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각이라는 친구가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보다 훨씬 좋은 영화, 이준익 감독의 포스가 느껴지는 영화라고.

 

두번째 추천은 맞는 말 같다. [왕의 남자]보다 [라디오스타]는 분명히 더 좋은 영화이다. 그러나 첫번째 추천은 조금 실망이다. 그의 영화가 아나키즘을 반영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중앙권력에 대한, 권력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비현실적이다(물론 영화가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지만 내가 말한 부분은 다른 차원이다).

 

몰락한 가수왕이 강원도 영월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한 축의 이야기와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힘을 주는 한결같은 매니저의 우정, 그리고 양념처럼 들어가는 영월 사람들의 따뜻한 모습. 사실 이 스토리 라인만 봐도 지극히 비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영화가 가진 상식이다.

 

영화는 시골사람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사람 냄새나고 풋풋하고. 물론 서울보다 지방의 인심이 더 낫다는 건 사실이다. 허나 가수왕과 그 매니저보다 더 사람냄새나지 않는 인물들이 그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나마 인간의 냄새를 풍기던 영월 지국장마저 후반부로 갈수록 비인간으로 변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비현실적인 영화.

 

그리고 그 영화에서는 지역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들을 영락없는 그곳의 주민들로 만들어버린다. 서울과 지역의 괴리감과 현실감이 영화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라디오스타]보다 [꽃피는 봄이 오면]이 훨씬 더 현실적인 영화이고 사람냄새 나는 인간적인 영화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렇다고 [라디오스타]가 완전히 무의미한 영화는 아니다. [라디오스타]를 보면서 [소리의 자본주의]라는 책을 떠올렸다.

 

20세기에 라디오는 파시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나치는 독일에 국민형 라디오를 보급하고 라디오를 중요한 정치동원의 도구로 삼았다. 심지어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런 라디오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책이 바로 [소리의 자본주의]이다.

 


요시미 슌야. 송태욱 옮김. [소리의 자본주의](이매진, 2005)

 

슌야는 라디오의 파시즘적인 속성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슌야는 정보기술이라는 도구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분절을 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즉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 유통시키고 소비하려는 '소리의 자본주의' 전략이 있지만 그런 전략에 대항하는 전략도 바로 그 동일한 매체를 통해 발전한다는 얘기이다.

 

특히 슌야는 라디오 이전에 정보전달기능을 했던 전화를 사회학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유선전화를 방송설비와 결합시킨, 즉 각 가정에 스피커를 놓고 이를 전선으로 연결해 중계할 수 있는 유선방송전화의 기능에 주목한다.

 

"유선방송 전화는 기본적으로 지역사회 내부의 방송과 전화 네트워크다. 특히 초기에는 통화할 수 있는 범위가 커뮤니티 내부로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네트워크는 지역 내의 모든 지점을 순식간에, 게다가 가로지르면서 연결해감으로써 당시 농촌에서 운영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유선방송 전화는 적어도 발전 초기에는 촌 안의 젊은이들이 중심에 서고, 젊은이들 중 전기 매니아가 하드웨어 측면을 리드하며, 지역의 전기점이 설비를 담당하고,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 그대로 촌락 공동체의 풀뿌리 운동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게다가 탄생 뒤 유선방송의 변화는 이런 촌락 공동체의 유대를 한층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됐다."

 

[라디오스타]에도 나오지만 일방적인 송출 기능을 중단하고 쌍방향 소통기능을 담당하면서 라디오는 커뮤니티의 중심이 된다. 그야말로 라디오방송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된다. 외상값을 청구하고, 일자리를 찾고, 고스톱 방법을 묻는. 그야말로 생활의 이슈들을 공론화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라디오가 가진 또다른 중간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이다.

 

그리고 라디오는 이성적인 매체라기보다 정서적인 매체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처럼 종합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소리를 통한 청각적인 이미지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파시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힘 때문이다). 라디오가 뿜어내는 정서적인 연대는 지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국방송이 되고 난 뒤에도 그런 기능을 담당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전국방송은 '소리의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영월에서 전국방송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비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역시 [라디오스타]는 순진한 영화이다.

그러나 중간네트워크로서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희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마포FM]을 비롯해 관악구, 광주 등지에서 소출력 시민라디오가 계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슌야의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이 책의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이후 복제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오늘날에는 자명해진 방송이나 통신으로 대표되는, 모두 거리를 없애면서 국토나 지구를 뒤덮어가는 미디어로 일원화되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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