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7, 국토교통부는 제 3차 신규택지추진계획(신도시 3기 계획)을 발표하고 고양시 창릉과 부천시 대장 등을 추가입지로 지정했다. 이로써 정부가 2018913일에 발표했던 수도권 30만호 공급계획은 완료되었다. 국토교통부는 신규택지까지 지하철을 연장하고 간선급행버스체계(super-BRT) 등의 교통대책도 함께 발표했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30만호의 주택이 추가공급되니 수도권의 인구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2016년부터 1천만명 선이 무너져서 2018년은 약 976만명이고, 경기도의 인구는 2003년부터 1천만명 선을 넘어서 2018년 약 1,307만명이다. 서울시에서 빠진 인구가 경기도로 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에 2018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인천광역시의 인구를 합하면 약 2,579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9.77%를 차지한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의 전체 인구 대비 수도권 인구 비율 47.43%보다 2.34%, 121만명이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 주택이 부족해진 걸까? 정부는 주택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공급한다고 하지만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2022년까지 수도권 주택수급은 안정적이다. 그러니 신도시 3기 계획은 2022년 이후의 공급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분권형 국가와 충돌한다. 개헌안이 합의되지 않았지만 청와대가 제시했던 헌법개정안은 제 1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고 명시했다. 이미 한국은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국가이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데, 수도권 집중을 강화시키면서 분권을 표방한다니. 차라리 비수도권을 포기한다고 말하면 솔직하기라도 할 텐데, 정부는 다른 한편으론 분권과 균형발전을 얘기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데도, 어떤 정권을 막론하고 마치 이것이 가능한 것처럼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불가능한 두 마리 토끼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균형발전의 실체는 비수도권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토건정치이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토건정치,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한국의 정치는 전형적인 토건정치이다. 토건국가는 토건업과 정치권이 서로 뒤를 봐주며 재정을 낭비하고 기득권을 보호하는 부패한 국가이자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위기를 심화시키는 위험국가이다. 그리고 토건정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며 이런 토건국가를 더욱더 강화시키는 정치이자 성장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정치이다. 뭐라도 개발하면 삶이 좀 나아지겠지, 라는 주민들의 막연한 기대는 토건정치가 만든 세계관의 결과이다. 문제는 개발의 이익이 주민들에게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 설령 돌아간다해도 개발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는 점, 이런 부작용을 시작할 때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웠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기대는 대규모 사회기반시설(SOC)과 같은 토건사업보다 일자리와 소득을 통해 분배에 방점을 두리란 점 때문이었고, 우려는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론에 기반한 경제정책이란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나가면서 기대는 크게 줄어들었고 반면에 우려는 커지고 있다.

제주도민들의 반대에도 강행되는 제주 제2공항, 울릉도와 흑산도의 공항, 24조원 규모의 23개 예비타당성면제사업 허용 등 2년을 경과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대규모 개발사업들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 시작된 사업은 아니라고 해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사업들이 분별없이 추진되는 상황은 초기의 주장을 의심케 만든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201928일에 열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오찬 간담회에서 예타 제도는 유지돼야 하지만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 전략사업을 발굴하고 적극지원해서 지역경제를 도약시키고 국가균형발전의 원동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213일 부산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을 언급했다.

동남권 신공항이 무엇인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200510월에 영남권 시도지사들이 동남권 신공항을 만들자는 공동건의문을 올렸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에 관한 검토를 지시했고,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이를 선거공약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사업타당성이 부족했기에 2010년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지다 결국 20113월에 신공항 사업은 경제성 부족으로 백지화되었다. 그렇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신공항만큼 좋은 선거공약은 없다. 그래서 신공항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공약으로 발표되었지만 2016년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2018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이 가덕도 신공항을 또 꺼내면서 불이 붙었고,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언급했다(후보 시절에 신공항을 언급하기도 했다).

왜 그럴까? 동남권 신공항은 건설비용이 7조원~8조원 정도 되는 대형사업이다. 이 비용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은 누구일까? 가장 단순하게는 건설업자, 계약은 대기업이 하지만 실제 공사를 담당할 수많은 하청업체들, 이익을 노리는 투자사들, 타당성 없는 사업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중앙정치인과 지역정치인들, 사업주체인 국토교통부와 산하 공기업인 한국공항공사, 용역계약이나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교수를 비롯한 각종 전문가들, 떡고물을 노리는 지역언론사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는 자영업자들, 이해관계로 얽힌 각종 관변단체들 등이 이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이익이 분명한 만큼 동남권 신공항사업은 지금 진행되지 않아도 선거 때마다 계속 등장할 것이다. 엄청난 사업비를 투자하지만 이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지만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이 사업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지만 이렇게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내건 사업들에 대해서는 쉽게 비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대형개발사업들은 지역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지주나 건설대기업만 배불리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라리 주민들에게 현금으로 돈을 나눠주는 게 지역경제에 더 도움을 줄 거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업들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그건 이런 토건사업들이 경기를 부흥시키고 유권자들의 표를 모은다는 거짓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운동 출신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광화문 지하화나 서부간선도로와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마이스산업과 같은 대형건설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거짓신화를 실현하는데 시민들의 세금을 엄청나게 쓴다는 점이다.

 

2. 균형발전의 실체는 토건잔치!

 

노무현 정부는 2003년부터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이전 추진 방침을 발표하고 20071월에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전국 10개의 지방자치단체, 부산광역시(동북아해양수도-영도·해운대·남구) 대구광역시(지식창조 브레인시티) 광주광역시·전라남도(그린에너지피아, 나주시) 울산광역시(경관중심 그린에너지폴리스) 강원도(비타민시티, 원주시) 충청북도(교육·문화이노밸리-진천군·음성군) 경상북도(IT·BT드림밸리, 김천시), 전라북도(농업·생명허브, 전주시·완주군) 경상남도(산업자원거점도시, 진주시) 제주도(국제교류·연수폴리스)가 혁신도시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혁신도시사업은 157개의 중앙정부 산하기관, 3만명 이상의 임직원들이 해당 지역으로 옮겨가고, 도시개발비로 당시 화폐로 44조원이 투자되는 대형 국책사업이었다. 1단계로 혁신도시가 건설되고, 2단계로 산학연 클러스터가 조성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중앙정부, 지방정부, 지역주민의 합의를 통한 정책이라고 밝혔지만 중앙정부가 설계하고 지방정부가 자기 지역의 낙후함을 앞 다투어 호소하며 경쟁하는 방식이었다. 더구나 광역자치단체가 중심이 되면서 혁신도시의 입지를 두고 기초자치단체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원주시가 혁신도시로 지정되자 강릉시와 춘천시의 주민들이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주민들은 혁신도시 선정을 반대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국가균형발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지역내 격차에 대한 대책이 없었고, 혁신의 성과가 인근 지역으로 전파될 것이라는 당위적인 설명만 있었다.

또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 부추긴 것은 지역들간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5년 말까지 전국 10곳의 혁신도시 공시지가 상승률은 타 중소도시의 공시지가 상승률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진주 혁신도시를 포함한 전국 혁신도시 지구의 공시지가 상승률은 11.16%인 데 비해 중소도시 20여 곳의 공시지가 상승률은 4.44%에 불과했다. 혁신도시의 건설은 누구에게 많은 이득을 줬을까?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10곳의 혁신도시에서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람들 중 32%가 외지인이었고, 그들 중 42%가 수도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혁신도시가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도심지가 공동화되고 지역 내에서 구도심과 신도심간의 격차가 생겼다. 이러니 문재인 정부는 또 도시재생사업을 한다며 5년간 50조원의 예산을 구도심에 쏟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업이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지만 혁신도시 건설로 발생한다던 효과들은 과연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을까? 인구가 유입되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지방정부의 세수도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과연 실현되고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도 균형발전이 이렇게 강조될 이유도 없고 수도권 인구도 늘어날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제주도 서귀포시 서호동, 법환동 일원에 건설된 혁신도시는 건설비만 3,473억원을 썼는데, 9개의 공공기관이 이전될 예정이었으나 국토교통인재개발원, 국세공무원교육원, 국세청주류면허지원센터, 국립기상과학원, 공무원연금공단, 국세청 국세상담센터가 이전했고, 한국정보화진흥원의 경우 NIA글로벌센터만 제주에 만들어졌다. 이렇게 이전된 기관들만 보면 솔직히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이 기관이전에 따른 임직원 이주는 8개 기관이 모두 이전해도 743명에 불과했다. 혁신클러스트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도권 지방이전기업에겐 법인세소득세 6년간 면제, 이후 350% 감면, 지방세에서 취·등록세 면제, 재산세 10년간 100%를 감면한다는 특혜가 붙었지만 201512월 말까지 분양을 신청한 기업체는 10개 불과했다. 국제학교 설립, 외국 영리병원 유치, 전지훈련센터처럼 무리한 사업들만 늘어났다. 효과는 별로 없고 개발의 욕구만 더 강해졌다.

혁신도시정책을 이어받지 않았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탓일까? 그렇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균형발전을 빌미로 광역경제권 활성화, 30대 지역발전선도과제, 지역특화프로젝트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없었고 사실상 수도권으로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만든 제 4차 국가균형발전 5개년계획(2018~2022)지역 주도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목표를 세우고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 추진, 균형발전총괄 지표 개발 및 지역차등지원, 생활밀착형 SOC사업 확대, 지역발전투자협약(계획협약) 본격 추진,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개편, 지역혁신체계 구축을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지역발전투자협약으로 지자체가 지역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중앙정부와 협의 후 협약을 체결한 뒤 추진한다는 것이다. 걱정되는 점은 이런 계획이 지금까지 해왔듯이 대형개발사업을 부추기고 국공유재산까지 이런 개발을 위해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17개 시도별 역점과제를 보면 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간재편전략들이 빼곡하다. 2022년까지 1748천억원을 투입한다는 이 균형발전계획은 과연 비수도권 지역을 활성화시킬 대안일까?

 

3. 균형이 안 되면 압축?

 

마강래는 지방도시 살생부에서 현재까지의 균형발전정책을 작심하고 비판한다. 시작부터 마강래는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지방 중소도시들은 정부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조만간 이 문제로 인해 온 나라가 골머리를 썩일 것이라 단언한다. 실제로 많은 예산들이 균형발전, 지역활성화란 명분으로 지방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온 나라가 골머리를 썩일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지방소멸론, 한계마을, 인구절벽,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중앙정부는 토건정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강래의 주장이 기존의 논의와 가장 다른 점은 쇠락하는 도시들을 위해서라도 지방에 거점 대도시들을 키워야하고, 중앙정부는 이 대도시들이 수도권에 꿀리지 않을 만큼 커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것이 결론부에서 주장하는 압축도시’, ‘축소도시전략인데, 재정을 골고루 나누지 말고 집중하자는 논리이다.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지방 대도시 몇 개를 키우는 것’, 그리고 지방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상생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이것이 예산의 제약 아래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국토균형발전이라고 마강래는 주장한다.

기존의 균형발전론에 대한 비판이 나온 것은 좋은 일이다. 지금까지는 균형발전이 절대선처럼 얘기되어졌으니까. 하지만 이 비판이 제대로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주거 및 상업 등의 도시 기능들을 혼합하고 높은 밀도로 이용하게 하는 실천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밀도 높은 개발을 하고 복합적으로 토지를 이용하고 대중교통을 활성화시키는 전략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도 정치인, 기업, 언론, 대학, 각종 단체 등 온갖 이해관계자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뛰어드는 토건의 현장에서, 어디가 압축과 축소의 핵심지로 지정되어야 할까? 이미 세종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증명되지 않았나.

사실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잘 안 되었던 점은 아는 지 모르는지 지역사회를 지배해온 개발카르텔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재까지의 균형발전론이 보인 한계는 이론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요인이 컸다. 제 아무리 좋고 혁신적인 정책들도 한국에만 도입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이론적인 설계보다 정치적인 영향력 탓이 컸다. 지금의 기득권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압축/축소전략을 쓴다고 토건의 방향이 달라질까? 한국사회 대부분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토건 카르텔의 해체 없이 정말 다른 대안이 가능할까?

마강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이유로 계속 재정문제를 거론하는데, 국가재정의 진짜 문제는 인구감소로 인한 재정감소보다 부패로 인한 재정낭비이다. “끝도 없는 예산낭비는 큰 효과없는 시장활성화나 조형물보다 단체장들이 치적사업으로 추진하는 대형개발사업에서 비롯된다. 예산의 제약을 논하기 전에 지금까지 예산이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 같은데, 마강래는 어려운 과제를 피한다.

인구감소로 인한 공공서비스의 효율성 감소, 지방재정 위기, 고령화로 인한 중앙정부의 복지비용 증가는 최근 들어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이 아니다. 소위 전문가들이 각종 개발사업들의 연구용역사업, 예비타당성조사, 투자심사 등을 그동안 제대로만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사업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예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건 전문가들에게도 개발은 주요한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 저런 전략 제안하는 게 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장의 창출이다.

더구나 인구와 고용감소를 통해 위기에 접근하는 마강래의 방식은 사실 기존의 정부가 진행해온 균형발전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에 닥칠 문제는 재정악화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정치적인 의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201951일 영국은 기후변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에서는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이 제시한 그린 뉴딜정책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뉴질랜드에서는 제로탄소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전 세계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4. 균형발전보단 지속가능한 분권을!

 

한국의 토건정치가 여전히 기세를 부리고 있을 때 전 세계 청소년들은 개발과 성장을 멈추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라며 동맹휴업에 나섰고 한국의 청소년들도 기후소송단을 꾸렸다. 2018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 48차 총회에 모인 전 세계 과학자들이 치열하게 토론을 벌여 하나의 문서에 합의했다.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가 바로 그 문서이다. 이 문서는 현재 속도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될 경우 2030년에서 2052년 사이에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지구 온도가 1.5높아지고 온난화를 줄이려는 노력이 없을 경우 2이상 높아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1.52의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0.5의 차이가 생물종의 다양성과 질병, 가뭄, 태풍, 해수면 상승, 건강, 산업 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지구온난화의 효과가 전 지구인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 보고서는 소외계층, 토착민, 농민, 도서국가 등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대규모 기후난민이 발생할 거라 예측한다. 실제로 심각한 식량난은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지금 북한도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지구정치는 이렇게 기후변화에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데, 한국정치는 나 몰라라 토건정치이다. 그렇지만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상 한국도 이런 세계적인 대응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이 가장 먼저 손봐야 하는 것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높은 산업들인 에너지산업, 제조업, 건설업 등이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산업의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토건산업도 없애며 효율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지금 당장 정치의 과제이다.

현재의 에너지체계는 전국에서 에너지를 생산해서 수도권으로 송전하는 체계이다. 핵발전소 인근 지역들은 사고 위험에 시달리고, 석탄화력발전소 인근 지역들은 사고와 미세먼지에 시달린다. 태양열, 풍력같은 신재생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이런 시설들이 주민과의 협의 없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갈등을 만들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생산해서 다른 지역으로 송전하는 대규모 시설보다는 각 지역들이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사회가 지속가능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은 고준위핵폐기물처리장이라는 희대의 숙제를 풀어야 한다. 이용량에 따라 부담을 진다면 고준위핵폐기물처리장의 입지는 수도권이어야 한다. 새로운 토건사업의 기획, 토건에 쏠린 균형발전 이전에 에너지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지금의 에너지체계에 문제가 생기면 어디서부터 큰 어려움이 생길까? 에너지 위기는 자급력은 떨어지면서도 집중되고 집약된 곳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수도권과 경쟁할 수 있는 지역의 소중심지들을 만드는 전략은 건설도 문제이지만 그 유지를 위해 주변 지역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이미 소중심지들이 주변 지역 인구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체계를 확산시키는 게 정말 필요할까?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핀테크, 에너지신산업, 스마트시티, 드론, 미래자동차, 바이오헬스 등 8대 핵심 사업을 8대 혁신성장산업으로 성장하고 추진 중인데, 모두 성장을 전제한 산업들이다. 그런데 이런 성장에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는 어떻게 준비될 수 있을까? 정부는 이런 산업을 지역화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규제를 푸는 규제 샌드박스정책을 쓰고 국가혁신클러스트를 만든다고 하지만 정말 그것이 지역 특색에 맞는 산업을 만들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건 성장을 위해 만들어온 각종 산업단지와 농공단지 등을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재활용/재사용/자원순환 클러스터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떤 대안을 제시해도 그것을 토건산업으로 변신시키는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장산업보다 기성사회가 만든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산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균형발전을 빌미로 토건산업을 추진하고 막대한 국가재정을 낭비하는 것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각 지역이 지역에너지체계를 만들고 재활용/재사용산업을 활성화시켜 다양한 일자리를 마련하고 시설보다 사람에게 투자하도록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쉽지 않다. 선거제도 개혁을 비롯한 패스트트랙에 관한 합의는 험난하지만 예비타당성조사면제사업에 관한 협상은 놀라울 정도로 여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국회의원들이 선물보따리를 들고 지역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020415, 21대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시간이다. 그들은 어려운 과제는 다 피하고 손쉽게 개발공약들을 쏟아낼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미래세대의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히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제는 발전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당, 야당이 아니라 한국의 토건정치와 싸우고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사회의 핵심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전환 없이는 미래도 없다.

                                                                                                         하승우

자본주의 잔혹사와 연대의 전령

 

반가운 연대자, 아룬다티 로이는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을 들리는 사람이다. 로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벌거벗은 산과 죽은 강, 말라붙은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는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다른 저작들에서 그랬듯이,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에서도 로이는 생명을 갈아 이윤을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맷돌과 그 회전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 관해, 그들이 지키려는 생명에 관해 얘기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작가의 통찰력으로 해석하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잔혹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인도 카슈미르의 작은 사과 산지 쇼피안을 급하게 들렸다 나오던 로이는 희생자의 아버지에게 급하게 전해 받은 따뜻한 삶은 달걀의 전복적인 힘”(119)을 이야기한다. 온기가 남아 있는 삶은 달걀은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을 방문한 반가운 이에게나 건네질 수 있는 선물이고, 그 힘은 연대자만이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도 지지도 않았다는. 로이의 글에서는 이 작은 것들의 전복적인 힘이 느껴진다.

로이의 이야기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이런 참상들을 목격할 수 있으니. 다만 이 이야기는 인도인의 삶 속으로,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냐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제주도를 떠올렸다. 미군정과 국가폭력이 만든 4.3이라는 비극적인 참사를 경험한 땅, 끔찍한 비극 이후에도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관광지로 끊임없이 소비된 땅. 섬을 찾은 외지인에게 슬퍼도 웃기를 강요당하는 섬. 민주화 이후에도 발전을 빌미로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되고, 급기야 2006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와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합친 특별법이 제정된 섬.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고 양용찬씨는 나는 우리의 살과 뼈를 갉아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며 분신했다. 사람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며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양용찬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의식했을까? 제주도민들은 국제자유도시라는 비전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더구나 2006년의 특별법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이하 개발센터)라는 특별한 기관을 승인했다. 제주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들리는 면세점이 이 개발센터의 영업장이다. 당시 정부는 개발센터를 위해 내국인의 면세점 이용을 허용했고, 이로서 한 해에 면세점 수입만 5천억원 이상 거두는 대기업이 된 개발센터는 그 이윤으로 제주도를 난개발하고 있다. 신화역사공원, 헬스케어타운, 휴양형 주거단지, 국제문화복합단지, 영어교육도시 등 이름만 들어서는 그 성격을 알기 어려운 개발사업들이 하나둘씩 개발센터의 이름으로 추진되었고 개발센터는 대대적인 개발을 위해 싱가폴과 중국 등의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였다.

특이한 점은 개발센터가 오로지 국제자유도시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제주특별법에 따르면 개발센터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 147조에 따르면, “개발사업을 시행하려는 자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을 받아야 한다. 다만, 개발사업을 실행하려는 자가 국가 또는 개발센터인 경우에는 도지사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즉 개발센터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기업이다. 또한 제 164조 제 1항은 국가 또는 제주자치도는 개발센터가 과학기술단지의 조성, 투자진흥지구의 입주기업에 임대할 용지매입비의 융자, 토지 등의 임대료 감면과 그 밖의 개발사업에 드는 자금의 지원을 요청하면 최대한 지원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발센터가 개발계획을 세우면 국가와 제주도청이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개 기업이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고 마을공동체를 위협한다. 21세기 한국의 민낯인데, 육지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관심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가 비판하는 인도의 대기업 타타 그룹, 진달 그룹 등은 정부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까지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인도가 똑같지는 않다. 인도에서는 마오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으면, 개발에 반대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한국은 그 정도의 폭력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지만 용산참사 때 이미 경찰은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리적인 폭력의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둘의 방향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압도적 개발 규모 앞에선 그 어떤 반대도 무기력해진다. “길이 1500킬로미터에 너비 300킬로미터의 그 널따란 통로는 초거대 산업지대 아홉 곳, 고속화물 라인, 항구 세 곳, 공항 여섯 곳, 교차로 없는 6차선 고속도로, 그리고 4000메가와트급 전력공장을 포함하는 델리 뭄바이 산업회랑(이하 DMIC)과 연결될 것”(32~33쪽)이고, 그 프로젝트는 "1800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신도시 몇 곳이 건설될 것이라는 예측과, 그 지역 인구가 현재의 23100만 명에서 2019년에는 314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추산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7년 만에 말이다.”(33)

제주도에 제2공항을 지으려는 국토교통부나 제주도지사는 말한다. 2025년까지 관광객을 4천 5백만 명으로 늘리려면, 인구 1백만명이 되려면, 성산읍에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7년 만에 관광객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나고 주민이 1/3이상 늘어날거라 말한다. 하지만 공항을 지으려면 제주도의 오름을 10여개나 깎아내야 하고 천연동굴을 매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볍게 무시된다. 심지어 성산읍 주민들은 국토부가 제2공항 건설을 발표하고 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청의 산하기관인 제주관광공사의 조사에 따라도 제주도의 환경수용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관광객 2천만명을 넘어서면 혼잡비용과 폐기물처리비용 등으로 사회적 비용이 관광수익을 넘게 된다. 무비자 입국까지 허용하며 국외에서 관광객을 모으고 있지만 정작 지역경제나 도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무시된다. 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개발일까?

그리고 현지 주민들이 모르게 진행되는 인도의 공청회와 성산읍 주민들도 모르게 진행되는 제주도 제2공항은 얼마나 다를까? 지역 주민들의 생각도 묻지 않고 추진되는 온갖 개발사업들, 인도와 한국은 얼마나 다를까?

이렇듯 자본주의는 사람과 자연을 갈아 넣어 이윤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조용히 진행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 정책과 기업에 맞서고 있다. 강정마을의 4천일이 넘는 투쟁과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농성 1천일이 말해주듯 이미 끝나버린 압도적인 싸움처럼 보여도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그 존재는 늘 다른 존재의 등불이 된다그리고 언젠가는 로이의 말처럼 단테와다의 죽은 이들도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죽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죽은 토지, 죽은 강, 죽은 산, 그리고 죽은 숲속의 죽은 생물들이 청문회를 요구할 것이다.”(105) 산 자들은 이 요구들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하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요구를 준비할 연대의 전령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로이가 비판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이런 전령들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다. 지식인들이 주관하는 이런 저런 행사들은 많지만 죽어가는 것들 곁을 지키며 그 이야기를 전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가 자본주의를 돕고 있나?

 

로이가 저주하는 대상은 대기업, 초국적 자본들이지만 분노하는 대상은 바로 지식인들이다. 국가와 기업들은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멈추진 않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언론과 지식인들을 길들이고 그들을 위한 축제를 연다.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그 축제의 후원사들이 한 역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발 디딜 틈 없는 감옥들을 다룬 기사는 거의 없었다.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재판심리 가능한 범죄행위로 만드는 불법행위예방법과 차티스가르 특별 대중보안법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의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타타 철강의 의무공청회가 실제 그 소재지인 로핸디구다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자그달푸르의 지방행정관청 구내에서, 용역 방청객 50명과 무장경비대의 감시 속에서 열렸다는 사실 역시 다루어지지 않았다.”(36~37)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2016년에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제정을 막는다며 국회의원들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9일 동안 진행했다. 그런데 당시 반대와 개정 의사를 표명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테러방지법은 전혀 개정되지 않고 있다. 테러방지법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언론, 학자는 없다. 너희가 쓰면 위험하지만 우리가 쓰면 괜찮다는 식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당시 테러방지법은 테러를 예비 또는 음모하거나 그렇다고 의심할 이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국정원이다. 예를 들어, 테러방지법 제 9조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하여 출입국, 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전 또는 사후에 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로이가 얘기하는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범죄행위로 만드는 인도의 불법행위예방법과 의심을 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추적을 하는 한국의 테러방지법, 얼마나 다를까? 공포를 이용한 통치는 누구에게 이로울까?

로이는 정부와 기업이 시민단체와 활동가들도 길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민중이 더 이상 봉기하지 않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대가로 이들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받고 축제를 연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고 비판한다. 한 때 가난한 사람들의 구세주처럼 얘기되고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그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도 마찬가지이다(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라미아 카림의 가난을 팝니다』(박소현 옮김, 오월의 봄, 2015)에 적혀 있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쪽)고 비판한다.

대다수 비정부기구들, 특히 기금이 빵빵한 기구들의 임무는 기업의 전 지구화라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것이지 방해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말이다. 수십억 달러의 돈으로 무장한 이런 비정부기구들은 세계 곳곳에 침투해 혁명가의 재목들을 월급쟁이 활동가들로, 펀드(공익기금) 유치 전문가로, 지식인들로, 그리고 영화제작자들로 바꾸어놓고, 그들을 살살 달래서 정면대결을 피하게 만들고, 다문화주의, 성 평등, 공동체 발전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의 담론은 정체성 정치학과 인권의 언어로 쓰인다. 정의의 개념이 인권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비정부기구와 재단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개념적 쿠데타였다.”(59)

이는 로이만의 주장도 아니다. 피터 도베르뉴와 제네비브 르바론은 저항 주식회사: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황성원 옮김, 동녘, 2015)에서 전 세계의 많은 운동가들이 기업의 언어를 구사하고 기업이나 국가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부분들을 자기 검열하면서 한때의 저항이 저항주식회사로 화려하게 변신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그 증거로 운동이 기업의 원리와 방식을 받아들이고 기업형 모금 활동에 집중하며 운동이 브랜드화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안보와 안전을 내세워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하는 국가와, 삶을 사유화하고 개인화하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조직하는 시민사회운동의 힘은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운동이 프로젝트화되고 비영리를 내세우며 운동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이곳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시장이 통치하는 서울특별시를 보면 그 모순이 잘 드러난다. 한편으로 시민참여, 공동체, 혁신이 얘기되고 있지만 지한에선 도로가 뚫리고 터널이 만들어지고 지하광장까지 생긴다. 그런데 이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서울의 그 많은 단체들은,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옮긴이에 따르면, 로이는 이 책의 주제를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라 말했다 한다. 예전의 작동방식이 가혹한 착취였다면, 지금의 작동방식은 우리를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체제 속에 묶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등장하는 유령처럼 이제 밝은 빛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포근한 어둠에 안길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밤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며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밝은 성벽을 넘으려는 민중들을 통해 가능할지 모른다.

 

 

유령을 불러들일 안두릴은 어디에?

 

2011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99퍼센트 민중의 힘으로 1퍼센트 기득권의 힘에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로이는 오큐파이 운동을 지지하는 미국 뉴스쿨에서의 연설에서 스스로를 마개주의자와 뚜껑주의자로 소개한다. 불평등한 체제의 뚜껑을 덮을 뚜껑주의자, 고삐풀린 부와 재산축적에 마개를 꽂아넣을 마개주의자로서 로이는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건다.

첫째, 기업 교차소유를 금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기제조사들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해서는 안 되고, 채굴기업들이 신문사를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들이 대학에 기금을 대서도 안 되고, 제약회사들이 공공보건기금을 멋대로 주물럭거려서도 안 됩니다.

둘째, 천연자원과 물, 전력, 건강, 그리고 교육 같은 필수적 사회기반시설은 민영화될 수 없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주거, 교육 그리고 보건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넷째, 부자의 자녀들이 부모의 부를 물려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투쟁은 우리의 상상력을 다시금 흔들어 깨웠습니다. 자본주의는 어느새 정의라는 개념을 그저 인권이라는 뜻으로 주저앉혔고, 평등을 꿈꾸는 것을 불경한 행위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싸움의 목적은 체제를 수선해보겠다고 찔끔찔끔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갈아엎는 것입니다.”(149~150)

 

로이의 말대로 체제를 수선하는 것이 아닌 갈아엎는 전복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파괴되고 짓밟히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로이에겐 이 부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답답함에 로이는 책 곳곳에서 인권운동이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반자본주의 운동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엄청난 불의들을 인지하거나 어렴풋이라도 이해하기 위한 프리즘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개념적 쿠데타는 재단들이 페미니스트운동에 개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인도의 대다수 공식적페미니스트들과 여성단체들은 어째서 그들 자신의 공동체 내의 가부장제와 단다카란야 숲에서 강제이주를 강요하는 채굴기업들에 맞서 싸우는 아디바시 여성 혁명위원회 소속 9만 명의 여성들과 거리를 두려 하는가? 수백만 여성들이 소유하고 일하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은 어째서 페미니즘의 문제가 될 수 없는가?”(60)


지금 이곳 한국에서도 정체성의 정치와 전복적인 상상력을 연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이미 제정된 인권조례들이 폐지되고 같은 사회운동단체에서조차 갈래치기 당하는 상황은 혼란을 낳고 있다. 더구나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논리적인 가치판단을 방해하고 특정 언론매체의 영향력이 기본적인 사실확인절차를 압도하는 한국사회에서 체제의 전복을 꿈꾼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외려 한반도 평화라는 급진성이 통일대박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뒤섞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로이가 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디에 서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은 안두릴이라는 칼을 이용해 유령들과 거래하고 적을 물리친다. 산자의 절박함과 죽은 자의 속죄를 이어줄 힘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낮은 곳, 가장 엄습한 곳을 찾는 연대자의 눈에는 그 힘이 보일 거라 믿는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6, 제주도 지방선거의 성과를 두 마디로 정리하라면, 매력적인 대중정치인의 탄생과 팀선거 방식을 꼽겠다. 선거 때마다 녹색당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후보를 찾는 것인데, 제주녹색당의 후보선출은 시민참여경선인단을 모집하고 당원과 시민들이 함께 지방선거 후보를 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아마도 녹색당에서 처음 진행된 방식). 그 과정을 통해 고은영, 오수경, 김기홍, 세 명의 후보는 도지사후보, 도의원비례대표후보가 되었다.

관심 많은 녹색당 당원이라면 아마도 이 세 후보의 흥미로운 출마의 변을 읽었을 것이다. 고은영 후보는 이주민, 여성, 청년의 정치를, 오수경 후보는 평범한 엄마, 여성의 정치를, 김기홍 후보는 퀴어 정치를 내걸고 출사표를 던졌다.

본격적인 선거를 준비하러 제주공항에 내렸던 212, 고은영 후보가 올린 출마의 변 동영상을 봤다(https://www.youtube.com/watch?v=ayeLsIK_dEE). 공항에 앉아서 열 몇 번을 돌려본 것 같다. 보통 선거에는 후보자가 유권자들에게 뭘 해주겠다, 만들겠다, 세우겠다, 이런 공약들을 하는데, 고은영 후보는 이렇게 멘트를 시작했다. “도민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이런 후보를] 갖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호, ‘제주가 기다려온 녹색반전’. 그 순간 묘한 느낌이 왔다. 이번 선거 재미있겠는데.

그렇게 시작된 제주도의 선거는 이후 여러 언론매체들을 장식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남겼다.

 

대중정치인의 탄생!

 

대중정치인은 어떻게 탄생할까? 녹색당과 같은 소수정당은 대중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 자체가 없기 때문에 대중성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녹색당의 지지율은 2014년 지방선거 1.65%, 2016년 총선 비례득표율 1.04%, 유권자 약 50만명 중 녹색당을 아는 사람이 5천명 정도라는 말이다.

정당의 인지도도 낮으니 개인적인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후보로 나오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도 어렵고 그런 인물이 녹색당을 택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물론 고은영, 오수경, 김기홍, 세 후보는 제주녹색당의 공동운영위원장,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이었지만 이런 활동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578명의 시민경선단을 조직하고 그중 307명이 투표한 것은 선거 이전에 당과 후보의 인지도를 높이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녹색당의 후보들은 여전히 선거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현안을 부각시키거나 인지도를 높일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제주도 제 2공항 건설은 현안이었고, 제주녹색당은 제2공항을 반대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 왔다. 그리고 제주녹색당은 제 2공항 뒤에 도사린 국제자유도시라는 비전과 난개발을 주도하던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라는 핵심세력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제2공항, 제주의 난개발에 맞서는 여성, 청년 도지사후보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또한 제주녹색당은 원외정당과 정치신인의 TV토론회 참여를 배제하는 공직선거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고 TV토론회 참여를 중요한 방법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선관위와 방송사에 요구를 하고 있었다. KBS노조의 파업 때 적극적으로 연대한 것도 KBS제주의 토론회 참여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은영 후보는 선관위 토론회를 제외한 방송 4사의 TV토론회에 모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요망진 후보’(당차고 똑똑한 후보라는 제주 사투리)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시민경선에서 도지사 후보로 선출된 고은영 후보는 스스로는 아니라고 우길지라도 방송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gI7LRNeYGo).

오수경 후보는 라디오와 신문 인터뷰에, 김기홍 후보도 선관위가 주관하는 비례대표제주도의원선거 토론회와 인터뷰에 참여해서 역량을 뽐냈다. 그리고 제주도의 특성상 제주언론들이 제주녹색당에 관심을 기울였고 도지사 후보를 냈기 때문에 일일동정을 계속 실었다. 이렇게 선거에 참여하면서 제주녹색당의 인지도는 점점 높아졌다.

육지의 당원들은 모르겠지만 고은영 후보는 TV광고도 만들어서 내보냈다(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r3tKThOQmV4&fbclid=IwAR3M86LizAESwaACD902UFjCGKrRrQ2RLQEks7FUZ97cWhHPwQoSFyw3xvE&app=desktop). 돈이 없어 좋은 시간대에 길게 내보내진 못했지만 녹색당이 왜 선거에 나왔는지를 시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고은영 후보 득표율 3.53%, 정당득표율 4.87%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높아질 수 있었다. 기존 지지율보다 3, 4배 높아진 셈이다. 그리고 대중 정치인의 탄생이 가지는 효과는 새로이 가입하는 당원들은 선거를 치른 대중정당으로 녹색당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녹색당은 정당이다.

물론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신문사의 질의서에 답하고 TV토론회에 참여하는 건 준비한 만큼만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의 슬로건을 정하고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세부적인 자료를 준비하고 멘트를 짜는 건 후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몫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팀선거가 정말 가능할까?

 

제주녹색당의 선거운동본부는 현수막을 걸고 후보의 유세 동선을 짜고 질의서에 답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후보와 운동원들 끼니를 챙기고 유세노래를 만들고 율동을 짜고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서로 나누어 맡았다. 다른 정당이었다면 유급 선거운동원을 뒀겠지만 제주녹색당은 전원이 무급 운동원이었다. 아니, 무급이 뭐야, 각자 집에 있던 물품과 먹거리까지 싸들고 나왔으니 무급도 아니다. 서른 명 이상의 당원들이 품을 내고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짜내어 선거운동을 했다.

제주도만의 특별한 힘이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제주도는 아직 창당도 못한 지역당이고 당원의 수도 삼백명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있는 리더도 등장하지 않았다(트럭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포효하는 듯한 사진으로 기억되는 고은영 후보도 일상에서는 평범했다. 그러다 마이크만 쥐면 달라진달까). 팀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조건은 없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사람들을 뭉치게 했을까? 절박함? “제주를 지켜라 고은영, 녹색바람 기호 6번 고은영이라는 유세노래처럼 제2공항과 오라관광단지, 신화련 금수산장, 사파리월드 등 대형개발사업이 줄지어 대기 중인 제주도의 절박함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절박함을 가진 사람들은 원희룡을 반대한다며 문대림 편에 서기도 했다. 개발을 막으려면 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 않은가. 그러니 절박함만으론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일까? 어쩌면 녹색당의 강령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무슨 소리? 우리는 도토리이니까. 63일자 <한라일보>에는 각 캠프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원희룡, 문대림 후보 등의 캠프에는 중앙당 당대표, 국회의원, 지역방송 전 보도국장, 교수, 전 공무원 등이 자리를 잡았다고 소개되었다. 그런데 고은영 캠프는 개발과 차별을 반대하고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유쾌한 사람들로 꾸려졌다.”고 소개되었다. 당시 고은영 후보는 페이스북에 이 기사를 링크하며 당강령을 인용했다.

 

선거 5일째. 각 캠프를 다룬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딱 봐도 우리가 제일 재밌어!! (캠프 부심) 우리가 말하는 길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만드는 과정은 최선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드는 떡갈나무 혁명이며, 여러 무늬와 색깔을 지닌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주문을 외워보자. 사랑하는 비례대표 도의원 후보 오수경, 김기홍. 권일, 재홍, 경미, 순애, 선자, 경표, 신심, 승주, 용운, 성미, 진호, , 현정, 길훈, 가향, 민준, 다운, 화빈, 서윤, 영경, 원빈, 유경, 명환, 상범, 정향, 정희, 영인, 혜영, 경수, 현지, 바카재홍, 병기, 승우, 희창. 그리고 오며가며 함께 하는 수많은 당원들. 남은 8일도 잘 부탁해요 :)

 

도토리들, 선본 사람들이 선거 때 가장 많이 쓴 단어이기도 했다. 우리는 도토리들이다. 혼자 썩어가는 외로운 도토리가 아니라 혁명을 준비하는 떡갈나무 도토리들. 우리는 다가올 엄청난 변혁이나 위대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뭐라도 하고자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선 도토리들이었다. 그렇게 모인 도토리들은 한 가지 무늬와 색깔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었기에 다양한 역할분담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런 도토리들이 갑자기 출연한 것은 아니다. 제주녹색당이 지방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174월 부터였고, 그해 9월에 도지사 출마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당원 임시총회, 20182월에는 선대본 구성을 위한 정기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뒤 지난 7월에는 선거평가를 위해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즉 중간에 열린 수많은 작은 회의를 빼더라도 모든 당원이 참가할 수 있는 세 번의 총회가 선거과정에 있었고, 끊임없이 당원들에게 의견을 묻는 과정이 있었다.

이렇게 만난 도토리들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하며,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피켓을 들고 달려가며, 목이 쉬어라 기호와 후보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유세를 마치고 평가회의를 하며, 서로 건강을 챙기라고 한마디씩 건네며, 맛난 밥을 나누며 뭔가 이미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흥겨웠고 선거를 끝내며 눈물겨웠지만 결국 언젠가는 오고야 말 녹색반전의 시간을 도민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겠습니다.”라는 마지막 기자회견으로 선거운동은 끝을 맺었다(아쉬움에 가득 찬 당원들의 뒤풀이가 연일 이어졌지만).

우리가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끝은 아니다. 이 기운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을 테니, 그리고 선거 때 드러낸 제주도의 수많은 모순들이 갑자기 해결되진 않을 테니. 무엇보다 우리가 그렇게 순순히 사라지진 않을 테니.


1. 어떠한 폭력에도 맞서고 갈등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사회, 정치, 제도의 면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지킨다.


2. 정책결정과정과 정책집행에 모든 시민이 직접, 그리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3. 민중의 민주적인 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일한다.


4. 모든 종류의 인종주의, 외국인혐오, 남성 우월주의나 성별이나 성적 지향에 따른 배제와 싸우고 사회와 <포데모스> 내부의 평등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포데모스> 내부의 여성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키고 당의 모든 행사에서 보육서비스를 제공한다.


5. <포데모스>에의 가입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항상 열려 있다. 이는 세계인권선언과 민주적인 시민참여방법을 옹호하는 것이다.


6. 관점이 다르더라도 대화하고 합의를 추구하면서 모든 의견에 관해 정직하게 논쟁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7. 대의정치(자치구, , , 국가, 유럽의회 기타)로 나설 후보선출은 양성평등[원칙]에 따른 변경을 제외하면 명부를 공개하고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개예비선거(primary elections open)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고 그 결과는 존중되어야 한다. 중간에 탈당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선출된 정치인이 아니라면 <포데모스>의 당원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8. 선거 이전과 선거 이후의 정치연합은 어떠한 형태이든 대의제도 각각의 모든 단계에서 모든 시민과의 공개 토론을 통해 민주적으로 승인되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한다.


9. 모든 선출직 공무원은 오로지 대리인(representatives)으로 간주되고,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방법에 따라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 모든 결정들을 내리라는 요구를 받고 그것을 존중한다.


10. <포데모스>는 재정을 관리할 때 이윤을 추구하는 기관(institutions based on profit)의 금융상품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당연히 금지된다.


11. 정치가 사적인 이해관계를 돕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플랫폼으로서 포데모스를 만들기 위해 모든 선출직 공무원과 포데모스의 당직자들은 다음의 조항들을 받아들인다.


a) 보통 모든 정치인의 월급에 상한선을 두고, 정치인은 수입의 성격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재산을 투명하게 관리할 의무를 진다.


b) 보통 각 개인이 맡을 수 있는 공적인 역할은 제한되고, 이런 일에 대한 보상으로 개인이 받는 월급은 그 총액이 최저임금의 3배 이하여야 한다.


c) 대표나 공직으로 맡음으로서 얻게 되는 법적인 또는 물질적인 특권은 포기되고 어떠한 종류의 특별한 법적인 보호도 받지 않는다.


d) 임기 동안 투명성과 책임성을 위해 일한다.


e) 개인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결정을 내리거나 선출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서약은 해당 공직에 뒤따르는 이해관계를 부정한다. 시민총회(Citizen's Council)가 마련할 청렴의 규칙(incompatibility rules)은 윤리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으로서 약속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 규칙은 전국 규모의 정치조직의 회원이나 지부들이 당내의 주요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포함한다.


f) [정치]대리인으로서의 기능과 관련해 대리인의 활동이 특정한 이권과 연계될 수 있기에 공직을 맡은 뒤에 자신의 책임 하에 있던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10년 동안 금지되고, 전략적인 부문이나 국가경제에서 중요한 기업의 이사가 될 수도 없다. 그리고 공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는 세금혜택도 받지 못한다.


g) 폭행이나 범죄 때문에 고발, 소환, 기소당할 경우 공직이나 당내 지위, 공직후보직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은 권리보장위원회가 규정한 규칙에 따라 지켜질 것이고, 어떤 경우든 노동자의 권리나 생명권, 도시권에 반하는 부패나 금융범죄, 성희롱, 성폭력, 이상성욕, 아동학대 등의 범죄들도 항상 이런 경우에 속한다.


h) 포데모스의 당원이나 그 가족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회사와 공적인 협약을 맺는 것은 금지된다.


i) 공직이나 당직 모두 8년으로 제한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12년으로 연장될 수 있다.


j) 세속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특정 신앙이나 종교를 지지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인 체제를 위해 일한다.

 

이 보고서는 우고 차베스가 협동조합에 주목하며 사회적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하는 배경과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고 차베스에게 협동조합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의 중요한 한 기둥이었고, 협동조합정책은 특정 부문을 키우는 분리된 정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강화시키려는 미션이나 코헤스티옹(cogestión, 노동자통제기업), 풀뿌리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주민평의회(Consejos Comunales, popular council) 등 아래로부터의 힘을 강화시키고 시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베네수엘라의 경험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보려 한다.

 

베네수엘라협동조합운동연구(하승우,2015모심과살림생명협동연구지원공모사업결과보고서).pdf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변화의 거점으로 내세우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강조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기성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만을 좇고자 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풀뿌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아래, 지역, 민중, 이상과 같은 단어들은 풀뿌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풀뿌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연결되지 않은 아래는 없고 국가와 무관한 지역사회도 없으며 완전무결한 주체도 없고 이상이 무조건적인 진리나 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전형(典型)에 대한 부정,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삶의 재구성이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이다. 이 발제문은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이고자 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발제문의 내용은 풀뿌리운동 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니라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힌다.



1. 전형에 대한 부정, 공론장


한국사회에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지만 맥락이 뒤틀린 채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론장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에 진리와 선이 아니라 판단에 따르는 곳이고 의견(doxa)이 소통되는 장이다. 그러니 공론장을 통해서는 어떤 진리와 선에 이를 수 없고 그런 논의가 이데아(idea)를 자처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론장은 그런 장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보다 공론을 표방하는 여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찬반을 나눈 뒤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 설득하지 못하는 의견은 의견이 아닌 듯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아니 답은 분명히 있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 논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가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답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공론장은 전략적인 활용의 장이지 그 장 자체가 근본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전형의 부재는 한국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기준이 존재해야만 사물이나 사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니 전형의 부재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며 냉소한다. 그렇게 보면 전형과 냉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거부가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형 없음이 냉소로 이어진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새로운 논의의 시작이 아니라 변화의 불가능과 변절, 냉소로 이어진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그런 전형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주도, 아래로부터의 힘, 이렇게 명명되는 것도 일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실제로는 복구를 뜻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1)은 우리가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위가 아래를 규정하고 아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곳이 바로 중심이나 위일 수 있다. 시민이 무참하게 권리를 짓밟히지만 그들이 바로 주권자이듯이 어떤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 위, 아래는 뒤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위의 필요성 때문에 아래를 호명하는 것은 아래를 또 다른 전형으로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이래야 한다, 주민/시민을 조직하는 방식과 목적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은 풀뿌리의 역동성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풀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풀뿌리의 전일(全一)적인 인식틀은 위와 아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래를 강조하더라도 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위를 아무리 뒤흔들더라도 토대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풀뿌리는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위한 준비한다고 봐야 한다. 순환의 역동성, 그것이야말로 풀뿌리의 힘 아닐까?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다시 성장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진행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에서 그렇게 아래 위를 연결시키고 순환시키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나는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즉 자유의 공간을 틀 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헌법이라고 봤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논의들은 많지만 그 모든 걸 틀 지우는 헌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헌법 제 1조가 시민들 입에서 되뇌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명목상의 제 1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구성하고 누리기 위해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과 정치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얼마나 연계시키고 있을까? 헌법은 이런 질문들을 담는 그릇이다.


물론 헌법조차도 이런 전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했던 헌법의 지속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의 고정된 문장은 변화하는 해석의 흐름 속에서만 생동하는 것으로 남는다. 헌법은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완수되지 않은, 앞으로도 결코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시민권은 매 세대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소화되어야 하며, 그 실체도 지금까지보다 더 포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풀뿌리 공론장은 이런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를 일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제도나 경제제도가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할 어떠한 상태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통치형태들 중 하나가 아니라 통치의 목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계속 유지되어온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제이다.” 물이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듯이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고정되지 않는다. 내부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상태는 달라진다. 근본적이자 급진적인 풀뿌리의 민주주의 역시 이런 상태를 지향하고 이를 가능케하는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2.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연방주의


국가를 가장 근본적인 정치공동체로 보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국가주의(statism)는 식민지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어온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에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도 무력화되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연결된 강력한 관료집단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한다.2)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이런 국가체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아니, 이런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사회전환이 가능하다. 전환이 특정 영역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면 국가구조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연방국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재정과 정책을 운영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79.9%와 20.1%로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국세 비중은 계속 증가해 왔다. 

결국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지방정부가 그 예산에 기반해 사업을 집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연방주의는 이런 근본적인 부조리를 급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행정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중앙부처들은 각종 시행령과 지침으로 지방정부들을 통제하고, 지방정부들은 그런 통제를 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알리바이삼아 자신들이 대변해야 할 지역주민들을 속인다.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연방주의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통합/통일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을 은폐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모순된 국가체제를 지양할 수 있는 연방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국가주권의 강화보다 주권을 지속적으로 폐기하는 역할을 맡고 풀뿌리의 정치역량을 활성화시킨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이런 연방주의 국가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3. 삶의 재구성, 경제의 정치화


아이러니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의 중요성이 중산층 신화 속에 망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의제가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국가는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쟁의에 개입하며 자본의 양적 성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경제적인 자산은 재벌에게 집중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걸 뒤흔드는 재벌들의 힘도 커졌다. 그리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역시 커졌고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는 수도권으로 흡수된다.


민주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런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 삶의 재구성은 이렇게 식민지로 전락한 삶을 자립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연방주의 역시 이런 자립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립경제에 관한 단초를 박현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채는 『한국경제구조론』에서 “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하고, “경제발전의 추구는 민족주체적으로 한 민족의 민족주의적 요구, 민족의 자립과 민족주의적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경제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하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토착적인 것의 최대한의 활용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론의 모색에서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復權)이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동인인 인간의 창의․창발성에 서는 것이어야” 하고, “시장결락(market failure)에 의한 공해는 물론 경제제량만을 위한 무원칙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가져오는 생활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나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 재벌과 결탁한 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경제, 자립경제를 이뤄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박현채는 강조했다. 그렇지만 세계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조건 속에 농업을 놓고 농업과 중소기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던 박현채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로 실패하게 된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범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경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필요하다. 앞서 논의한 연방주의도 경제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기 위한 디딤돌이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 협력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킨다면 자립경제라는 목표는 헛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환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시민의 개입과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와해=지역자치의 활성화’가 아니듯 ‘독점의 해체=자립의 활성화’는 아니다. 각자의 삶의 규모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결정하며 그런 것을 공통의 과제로 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불안과 위험 속에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공통된 삶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이미 고용 자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앙드레 고르(A. Gorz)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선언을 함께 고려한다면, 임금노동제도라 불리는 임금노예제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임금제도는 노동력을 빌미로 인격을 구매하는데, 구매당한 인격은 스스로 삶의 규모를 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화, 자동화와 더불어 기업의 구매력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실업과 노동빈곤(working poor)이 정치를 경제화시켜서 인간을 생존욕구에 불타는 좀비로 만든다면,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경제를 정치화시켜서 죽어버린 좀비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관해 이런저런 우려들이 있지만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자유로운 정치공간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 같지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코뮨주의 원리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공유지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립된 생활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며 공유지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 본다면,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경제를 근본적/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1)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점차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였다. 이 과학 용어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했다. 별들의 회전 운동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새로움이나 격렬함이라는 특징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규칙적이고 합법칙적인 것을 의미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2)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은 하승우․권정우의 『아렌트의 정치』 참조.


1. 나른한 봄날의 꿈


박영순 시장실의 회의 열기가 뜨겁다. 다가올 여름에 사상 최대의 전력난이 우려되자 서울시의 전기공급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데,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할 거라고 담당자들이 걱정한다. 전력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서울시가 전력을 확보할 방법은 전력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요즘 수도권 밖 지역정부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경기도와 협의해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산업이나 자원을 조정하지 않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을 줄이거나 단가를 높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발전소들을 전부 지방에 크게 짓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박영순 시장이 나서서 박본혜 대통령과 통화를 했지만 연방정부 역시 비리나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지역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인 전력회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전력난 걱정에 마음이 심란한데, 박본혜 대통령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걸 서울광역시정부(연방국가로 전환된 뒤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역시가 되었다)가 공개지지하고 서울시민의 찬성여론을 유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가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박본혜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온갖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이득이 없다보니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다. 확실한 지원책을 미리 제공받고 난 뒤에야 해당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식이다. 국방은 연방정부의 소관이라 밀어붙일 만한 일이지만 제주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육지와 분리․독립하겠다는 제주도지사의 당선은 연방정부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지사는 연방정부의 분명한 지원이 없다면 과거 중앙정부에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과 손을 잡고 따로 협조체계를 꾸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도지사는 앞으로 제주도내 공문서에서 표준어와 제주어를 똑같이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차차 표준어 사용을 줄이겠다고 하니 제주도에 가는 연방공무원은 제주어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연방정부가 해군기지 공사를 밀어붙이다간 제주공화국이 수립될 것 같다.


제주도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한국은행과 별도로 화폐를 만들겠다며 충남은행을 설립했다.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묶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한다. 충남은행의 설립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지원금에 목을 매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으로 충남은행은 중앙통화와 지역화폐를 환전하며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리고 충청남도는 도시와 농촌,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발전정책을 수립하겠다며 관련 법령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연방정부로 전환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역정부들은 ‘지역주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과거 수도권으로의 초집중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정부에게 연방기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정부들이 수도권을 포위하는 전략을 공동으로 세우고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영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간혹 드러났다). 연방주의는 각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필요들에 따라 서로 연합하는 것이기에, 지역간의 연대는 더 강화되었다. 또 지역정부의 법률(연방국가가 되면서 조례라는 말이 사라졌다)이 연방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다보니 지방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고 법원도 따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이 자기와 맞는 지역을 선택하며 여차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고 하니, 지역권력도 주민들의 요구에 더 민감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이 서울보다 지역에서 내려지자 주민들도 자기 지역의 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정부와 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연방국가로 전환되면서 주민소환권이 강화되고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더 작은 규모의 대안을 모색하는 주민자치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공공정보를 공개해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 왜 연방주의인가?


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발전소와 전력공급회사가 있는데, 2000년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는 공기업인 발전소가 민간회사에 매각되면서 전력가격이 폭등하면서 시작되었다. 엔론이라는 회사가 그 주역인데 가격을 장난쳐서 두 군데의 전력공급회사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터지자 나중에 미연방정부도 개입했는데, 한국이라면 중앙정부와 한수원이 좌지우지했을 일이다. 한국처럼 의사결정이 집중되면 그만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힘이 약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다.


캘리포니아주 사태처럼 시민의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캐나다의 경우 퀘벡주는 두 차례나 연방정부와 떨어져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이지만 퀘벡주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데도 퀘벡주의 뜻이 연방헌법이나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퀘벡주는 1980년과 1995년 두 번 분리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1980년에는 분리독립 찬성비율이 40.44%, 1995년에는 찬성비율이 49.42%에 달했다. 그 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과 독립을 반대하는 자유당의 업치락뒤치락 선거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되면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리고 2014년 9월 18일에는 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는 것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율 44%로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외쳤던 ‘프리덤’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대표 없이 세금만 부과하는 현재의 체제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투표는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분리․독립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자유의 열망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의 형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퀘벡주나 스코틀랜드처럼 분리․독립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연방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연방주의 논의는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것이고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시선을 이제 구체적인 지역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연방주의를 실현할까?


지난 2015년 3월 5일 ‘시민이 만드는 헌법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선언문에서 한국의 낡은 헌법이 사회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나서서 직접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발족 당일 대토론회를 열고 지방분권과 국민주권, 사법정의, 권력구조개혁 등을 요구했다. 참석하지 못해 토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이나 분권형 국가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연방주의로 가려면 개헌이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제도의 지위가 법률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연방주의 개헌이 되면 국회나 청와대가 지방자치제도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


사실 그래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고, 기득권층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진행된 지방자치 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시키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외치면서 행정단위를 광역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발상도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도 비슷한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을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분권이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공사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제는 분권보다 더 분명한 연방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층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방국가가 수립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머레이 북친은 『다음 세대의 혁명(The Next Revolution)』(2015년 번역 출간예정)에서 미국이나 유럽공동체(EU) 등에서 드러나는 연방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연방국가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시민이 국가를 통제할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북친은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인민의회들(popular assemblies)이 소환할 수 있는 대리인들을 지역과 지방의 연맹의회로 보내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연방은 지역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은 국가주의를 강화시키는 국가선거보다 지역정부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지역정부가 국가와 의회에 맞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권이나 연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국가통치를 구성하는 주와 국가 차원의 선거활동과 지역차원의 선거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우려한다.


북친의 주장을 한국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연방주의를 실현할 전략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일단 청와대나 국회는 연방으로의 전환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외에는 연방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방법이 없는데 국민투표를 부여할 권리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이중권력을 구성해서 그림자 정부를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의 공식화되지 않은 자치질서를 짜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생산/소비의 망을 강화시켜서 농부가 도시인의 밥상과 공장/사무실의 급식을 책임지고, 도시인이 농촌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도시인이 농촌의 삶을 지지하고 산업이 농촌의 기술을 지원하면 어떨까?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켜가야 실제로 연방으로의 전환이 된 후에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언론을 끊고 지역언론을 살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수도권 중심의 담론을 차단하면 어떨까?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키려면 다양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한데, 도서관이나 다양한 시민공간 등이 그런 역할을 맡으면 어떨까? 시민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연방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서로 손을 맞잡을 때에 실현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4. 연방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사정과 필요,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정책, 그것도 수도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정책들이 많다(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지역사회가 ‘지역주권’을 가지고, 그런 지역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대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시민들에게 자율성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성도 준다.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다보면 그 지역에 맞는 삶의 형식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모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몫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자치가 활성화되면 헛되이 사용되는 자원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일에 관심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지방정부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접촉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많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야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정치적인 힘이 생길 수 있다.


지역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상호의존하며 자치와 자급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런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소이다.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공적인 장을 확장하는(公有) 공공성(公共性)은 지역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무대로 삼는 운동주체의 등장과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신문을 만들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거나 방송국을 만들거나 민중의 집과 비슷한 공유공간을 만들거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연방주의는 그런 다양한 실험들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한 체제이다.




2009년 2월에 금속노조에서 나온 정책연구보고서 「산별노조시대: 금속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이 만들어질 때, 연구진과 2008년도에 지역운동을 설명하러 공식적으로 한번 만났고,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 간부들이 모인 발표회를 할 때 비공식적으로 한번 참여했다. 그날 발표회 자리는 내게 오랜 시간 동안 당혹스러운 자리로 기억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 대부분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개입할 현장, 현안이 많은데 생뚱맞게 웬 지역사회? 지금 한가해요?, 이런 분위기였다. 2015년이면 7년째인데, 이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는 어떤 구체적인 개입전략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발전된 전략을 고민하고 있을까?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 다음 과정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1. 풀뿌리운동이란?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 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앙집중성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다. 주민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自治)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 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2. 풀뿌리운동의 현재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년)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년)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지역/시민단체 내부의 열악한 노동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은 노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3. 지역과 노동운동의 만남은 가능한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노동권을 지키는 마을 어때요?”라는 발제문(<인천 제 2기 주민자치인문대학 2014년 10월 17일)에서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운동을 평가하며 “우리는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언론에 있었다. TV에서는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학졸업자도 다수 지원했다고 떠들면서 환경미화원의 일자리가 고임금에 좋은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미화원은 고임금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미화원의 해고저지투쟁이나 민간위탁 반대투쟁의 절박함과 정당성이 얼마나 지역주민들에게 전달되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아직, 시민과 노동자들이 만나서 청소업무 민간위탁으로 인한 예산절감효과를 분석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의 폐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지역사회 시민들과 함께 던져보고 싶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케이블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 C&M투쟁을 평가하며 “희망연대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해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하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는 사업의 지원비로 내놓는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기획안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에 제출하고 심의를 통해 사업지원을 받게 된다. 송파시민연대는 희망연대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PVC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캠페인을 지역에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이들이 노동조합 존폐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는 적극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파 강동 지역에서는 석촌호수에서 이들을 위한 문화제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여 개최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C&M 노동조합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지역에서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지자 인터넷 기사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여 회사에게 압박을 하는 등 최근에는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더 구체적인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보며 김신범 실장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간접고용의 문제를 마을이 파괴되는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영업으로 뛰어들지만, 이 들 중 대다수는 망하고 만다. 망하는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우를 해 줄 리 만무하다. 고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최종 피해자는 나의 이웃이며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박영길 사무국장은 “마을과 노동, 마을에서 노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2014년 11월)라는 팜플릿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이웃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을에서 보면 그냥 똑같은 마을주민이다. 이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마을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직업적 차원에서의 노동자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하나의 공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은 노동자체가 이슈화되기 힘든 구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마을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는 게 진정 마을에서 노동을 만나는 것일까? 지역의 어느 사업장에서 파업이 있을 때 지지방문 가고 연대하는 것만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노동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까?”라고 묻는다. 우리 사회가 마을공동체나 지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지역 내의 필요노동이나 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영길 사무국장은 “경비아저씨라는 노동자를 아파트 마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경비아저씨에게 친철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는 게 아니라 직접 면접보고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라는 일부 관리업체에게 맡겨놓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아파트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주민대표자들이 고용하고 그들의 삶과 업무들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을에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고용하는 방식, 학교에서 급식조리종사자들을 학교 행정실에 맡기는 게 아니라 면접보고 그들의 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들을 학부모의 의무이자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제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필요 노동자들에 한해서라도 아파트 관리업체에게 맡기지 말고, 급식업체나 학교 행정실에 맡기지 말고, 주민자치센터에 맡기지 말고, 수많은 필요노동을 대행업체에 맡기지 말고 직접 대면하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립과 자치의 첫 출발점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두 운동의 주체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운동을 펼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운동 이전에 필요한 건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동자,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청소노동자나 학교급식조리노동자, 경비노동자, 택배노동자, 사회복지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들의 알바노동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노동자와 주민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가격이나 비용이 아닌 다른 언어로 지역사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영길 사무국장이 지적하듯이, 지역의 필요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고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최소한 그 노동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공통의 세계 위에 서 있다는 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자각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더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또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자영업의 비중이 높고, 자영업 내에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이 아주 열악하다. 이것은 개별 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자영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2012년 12월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의 「생계형 자영업 실태 및 사회안전망 강화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 전체 151만 1,154개 사업체 중 무려 139만 6,743개 사업체가 자영업자이고, 이중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 이하인 영세 자영업자가 전체 자영업자의 44.6%이다. 2014년 5월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는 569만8천명이고, 그중 415만2천명이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로 추산된다. 그리고 자영업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랜차이즈화되어 ‘갑질’에 시달리는 이들 업자들에게 노동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영업자들이 알바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더불어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영역이 기존의 시장을 변형시킬 때 노동운동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가령 직영되던 노동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바뀔 경우 노동운동은 반대 이외의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가? 기업이 폐업할 경우 노동자들이 인수하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해 노동운동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업운영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4. 같이 고민하고픈 내용들


- 공장과 사무실을 나오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이다. 노동운동에서 지역의 지역화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벗어난 노동운동이자 공장과 사무실을 포위하는 노동운동이다. 성공한 지역노조의 싸움은 지역단체들을 조직화한 싸움,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고 조직화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의 경험들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공유되고 있나? 사업의 공유말고 경험의 공유와 그 경험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험은 이루어지고 있나?

그런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강력한 연대보다 느슨한 연대이다. 조직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지역사회전략은 대부분 산별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신속하고 강한 연대를 전제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데,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그리고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미리’ 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은 주민/노동자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은데, 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관청과 학교 내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연대전략을 모색한다는 건 사업 중심으로 활동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인데, 주민들이 사업을 원할까? 그리고 주민들에게 금속노조의 사업을 주민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활동가는 얼마나 있을까?

또한 지역의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노동운동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 앞서 말했듯이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역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성장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운동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노동운동의 기본입장이기도 하지만 방법론의 면에서 공장/사무실/일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삶터에서도 그런 성장의 방법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을 대상화시켜서 주민들을 위해 펼치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이 뒤섞여서 서로의 삶을 고민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일으키는 공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서로의 일상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하게 만나고 있나?

그리고 연대전략이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의 틀이 보통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과를 남기고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거점’이라 부르려면 정말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준비는 되어 있나?

- 민중의 집이 주요한 지역화 전략으로 이야기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말 효과적일지 따져봐야 한다. 거점을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지역사회를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 집을 만들면 정말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될까? 차라리 괜찮은 자영업 가게들의 단골이 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식사하고 토론하고 오락을 즐기며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공간, 노동자들의 고립감을 극복시켰던 공간인데, 한국의 민중의 집이 그런 공간이 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간을 다양한 관계들로 채워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을 만들고 확장시키는 활동에는 많은 사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과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가 알바청(소)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면 어떨까?

이제 좀 진진하게 마인드프리즘 이야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늘 2명 중 계약직 노동자  중 1명이 해고, 사측은 계약 종료, 되기 때문이다.

이 한 명은 와락에서 정혜신씨와 함께 치유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마인드프리즘 노동조합은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


마인드프리즘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내세웠던 해고노동자의 치유나 사회적인 가치와 무관한 민낯이 드러난다.


몇 가지 궁금증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혜신 전 대표는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회사의 부채가 30억원 정도인데, 이 부채는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의사를 밝힌 올해 5월부터 누적된 게 아니라 회사 설립 이후부터 누적된 부채이다.

정혜신 전 대표는 얼마 전(2014년 12월 26일), 타이밍이 참 공교로운데,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마인드프리즘과 관계를 끊었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사를 인터뷰한 기자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정혜신 이명수 부부는 심리치유 전문기업 ‘마인드프리즘’으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아직도 겸직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완전히 접었다고 합니다. 이제 안산에서의 치유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의 치유에 모든 걸 거는 건 좋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마인드프리즘을 이끌어온 노동자들은? 왜 노동자들이 그 부채를 짊어지며 해고되어야 하나?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한 뒤, 노조의 성명서에 따르면, “지난 해 7월에는 직원의 1/3을 권고사직으로 감원하겠다는 통보가 있기도 했으며, 결국은  희망퇴직 형식으로 직원 28명 중 8명이 마인드프리즘을 떠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영진들은 그동안 마인드프리즘이 지켜왔던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는 가치를 훼손하며 일방적인 부서개편을 단행하고 소통을 거부했습니다. 급기야는 성과가 증명되어 계약갱신이 예상되던 심리치유 활동가에 대해서 계약종료 통보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한다. 6월 사임 이후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을 정혜신 전대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보통 이렇게 일이 진행되려면 이미 안이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와락으로 사회적인 명사가 된 정혜신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TV찬조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정혜신 전대표는 “해고를 당했다고 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 거냐, 사람들이 많이 묻더라구요. 사람의 고통이 여러가지가 있지만요. 사람이 진짜 억울하면요. 정말로 살아남기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그 억울함과 함께 세상 누구도 우리 고통에, 내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극도의 절망감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의 끈을 놓게 만드는 거죠.” 마인드프리즘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건가?

지금도 마인드프리즘 홈페이지에는 마인드프리즘 설립자인 정혜신 씨의 이야기가 걸려있다.

만일 이 문제를 피한다면 정혜신 전 대표도 억울함을 치유받아야 하는 노동자를 만든 당사자가 될 것이다.


둘째, 마인드프리즘에 투자를 했던 김범수씨와 그 투자를 통해 공동대표가 되었던 김화영 전대표는 이 문제에 왜 침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보통 투자라고 하면 투자에 따른 손실도 함께 부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카카오톡의 김범수 씨는 회사 지분 70.5%를 인수하며 친동생을 공동대표 자리에 앉히며 투자를 했다. 카카오톡의 투자를 받으며 마인드프리즘은 적자에도 사업을 계속 넓혔으니 이 적자분은 카카오톡에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김화영 전대표는 사임을 하면서 카카오톡 부채인 26억 5천만원을 책임지기로 하고 현 공동대표에게 지분을 양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 부채는 4억 정도인데, 그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이 부채가 직원들을 대거 해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일까? 김범수 씨와 김화영 전대표가 우리는 손을 뗐으니 상관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공동대표는 김화영 전대표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분을 넘겨준 사람들이 지분을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까? 더구나 현 공동대표인 김창성 씨는 김화영 전대표가 대표를 맡을 때 함께 들어온 사람인데?

심지어 김범수 씨는 2013년 정혜신 전대표와 ‘1000만 힐링 프로젝트’에 나선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돈이 아닌 사회공헌을 위해 시작한 일이다. 국민에게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은 없나? 결국 자기 기업 이미지만 좋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셋째, 현 공동대표는 사안을 해결할 의지가 있나?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현 공동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경영상 적자가 계속되던 중 사업 규모 대비 높은 인력 숫자 등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려고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 과정에서 팀장이나 직원 대표단과 협의했지 일방적으로 진행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따져보면, 희망퇴직은 현 공동대표가 취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에, 본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협의’하며 진행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지난 1월 6일 “ '계약직 고용 지속' 등을 요구한 직원들에게 서면 경고장을 발부하며 맞대응했다.”(<라포르시안> 기사) “마인드프리즘 사측은 지난 6일 직원들에게 "회사 직원들 간의 불신을 선동하고, 회사의 신인도를 훼손하는 등 복무규율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서면 경고장을 발부했다.”(<프레시안> 기사) 이건 사측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뜻한다.

현 공동대표는 마인드프리즘 창립 멤버인 박인정 씨와 김화영 전 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전 마케팅팀장이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김화영 전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대표이니,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영마인드만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혜신 전대표와 함께 마인드프리즘을 만든 박인정 대표는 어떤 입장일까?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 정말 공동대표라면 이 문제에 관해 박인정 대표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김 대표는 ‘이제 김범수 의장, 정혜신 박사, 김화영 전 대표 세 사람 모두 마인드프리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그게 더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까?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일방적인 구조개편을 받아들이면서도 회사를 지키려 하는데, 사측은 경영적자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해고를 밀어붙인다. 노동조합에게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는데, 누가 정말 마인드프리즘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걸까? 현 공동대표야말로 마인드프리즘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들이고, 정혜신, 김범수, 김화영 씨는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안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 볼테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정당해산결정을 내렸다. 4월 16일, 바다 속으로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던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2월 9일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시와 광역시의 자치구 기초의회폐지, 단체장과 교육감의 선거방식 개악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부사장은 항공기를 회항시켰고, 2013년은 남양유업, 서울우유 등의 ‘갑질’로 장식된 한해였다.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기에 의무휴업일 지정 및 영업시간 제한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4년 11월 10일 대학생협의 모범이던 세종대학교생협은 비리재단에 밀려 사업종료를 공지했다. 지난 5년간 국내 10대 재벌가문 자산이 430조원이나 늘어나 1,240조원에 달한다. 지금 국회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심의중이고, 12월 2일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165조원을 투자하는 지역발전 5개년계획, 소위 제2의 새마을운동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사회운동, 풀뿌리운동이 여러 성과를 거뒀다고 얘기되는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모습은 이렇다. 사회가 변했다고 자평하는 동안 고공농성, 철탑농성, 수십 일의 단식농성, 엄청난 손해배상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가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나?



1. 현실을 보며 드는 물음들


- 생활정치는 정말 생활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었나?

- 거버넌스는 정말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인가?

- 마을운동은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서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나?

- 사회적 경제는 진정 경제활동에서 이윤보다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나?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고 있나?

- 협동조합은 협동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있나?

- 시민사회운동은 수도권 중심을 벗어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도구가 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인가?

- 시민사회단체는 관료주의에서 자유로운가?

- 시민사회운동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 있는가?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나?



2.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쇳말


-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원론이 아니라 한국 현실에서 두 이념이 어떤 문제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밟아왔을까?

 

-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대중이 스스로 조직되며 삶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풀뿌리운동도 나름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가졌던가를 반성해볼 필요해볼 필요가 있다.

 

- 4주제 연구모임이 그동안 아나키즘, 생명운동, 에코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영성이라는 관점을 검토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각 관점이 같고 다른 면을 가지지만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열쇳말을 배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관계성: 전일성, 상호성, 부분과 전체의 연계성, 연방, 연대, 생산과 소비의 연계, 교감, 깨달음, 집단적 영성

- 다양성: 탈중심, 상호적 권리, 평등, 성찰, 중립성과 객관성 비판, 국가주의 비판

- 자율성: 자치, 자급, 자결권, 삶에 대한 책임의식, 자기 목소리, 임금제도 비판, 너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운동, 가부장제 비판

- 순환성: 성장 포기, 사용가치의 우선성, 공유, 사적 소유권 부정, 소농, 소비주의 비판

 

- 이런 것이 가능한 장으로서 마을, 공동체 등이 대안으로 얘기된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은 이런 열쇳말과 대립되는 구조이기에, 풀뿌리운동은 이를 넘어설 방법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옳다. 특히 한국사회의 국가와 자본은 훨씬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억압적이며 중앙화되어 있어서 풀뿌리운동과 양립하기 어렵다. 강력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대가 필요할 텐데,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실천을 보여줬나? 주민조직화, 생활정치는 마치 주민운동의 몫인 양, 생산과 소비의 조직, 협동운동은 마치 사회적경제 조직의 몫인 양, 서로 몰라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흐름을 자기 조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활용했을 뿐 그 몫 자체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 운동의 가짓수는 늘어나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데도 마치 지속가능한 것처럼 운동이 마취제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잡은 손 놓고 후려쳐야 할 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뭉뚱그리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정부나 재벌이 정서적으로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운동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가진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사례만 강조하지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운동과 사회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풀뿌리운동은 스스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사회운동가 개인의 영성을 형성하고 심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조직운영과 내용 방식에 대한 자각도.

 

- 한국사회에서 이런 키워드들은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풀뿌리운동은 이런 키워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그 활동 속에 이런 관점들은 얼마나 투영되고 있을까?

 

- 이런 관점들은 성장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환원주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데, 우리 운동 속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 시민사회운동은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장치를 가지고 있을까?



3. 다른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질문


- 제도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도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도 어느 순간 정치적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너무 분명하게 정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박원순 시정에서 시민단체가 이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풀뿌리운동의 거버넌스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협력과 파트너십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서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감시와 비판기능이 어느 순간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생활정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제도화되고 있다면, 그 가치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응당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자기만의 실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하려면 그것을 위한 제도 자체를 바꾸는, 경기규칙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실력을 쌓고 있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삶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생활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나? 풀뿌리운동은 노동운동에, 노동운동은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나? 주민/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틀로 만들고 있나? 운동이 추구하는 대안과 가치를 개인의 삶과 조직의 운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까? 활동가들은 자기 삶을 가치대로 변화시키고 있나? 위계적이고 관료화된 조직운영이 줄어들고 운영주체가 개방되어 늘어나고 세대나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운영방식이 확산되고 있나?

 

- 우리는 공유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가? 많이 얘기하는 네트워크도 일종의 공유물일 텐데, 적절히 공유되고 있을까? 관계성과 상호성을 실현하는 네트워크는 기성사회로 흡수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나?

 

- 집단화된 다수가 실질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끼리끼리의 정치, 끼리끼리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의 소통가능성이 낮아지는데, 이런 틈을 좁힐 방법을 개발하고 있을까?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이라는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만들고 있을까? 활동가 개인과 조직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할까?

 

-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면 주요 운동조직이 서울을 떠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공공기관도 이전하는데 시민사회조직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내부에 어떤 다른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듯 분열된 존재인데, 대중의 분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개인적인 고민들


- 제도가 문제라면 그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치력을 만들어야 한다. 홀로 그 몫을 담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동의하는 주체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활동가들조차도 정치를 갈등요인으로만 보고 회피하려하는데 갈등은 인간사의 당연한 요소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공동의 목적과 생활이 강화된다.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조절이 중요한데, 정치가 이 과정을 맡는다. 제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힘을 구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과정을 제도화로 넘기면서 그 제도가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길 기대하는 것은 운동이 무모함을 넘어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거나 스스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미흡한 점은 고쳐갈 과제이지 배제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관계성이 살아나야 한다.

- 살림살이가 무너지면 여유도 없어지고 참여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럴수록 공동의 대책을 마련하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이 없다.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각자의 부문운동으로 후퇴해서 딱 고만고만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말만 무성하지 그 말에 힘을 실어줄 움직임은 별로 없다. 주민/시민들에게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내놓지 않으니 곳간이 찰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고’,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과 다른 일이 분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고 생각해야 운동의 미래가 있다. 다양성은 그런 과정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거시적인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운동은 미시적인 운동을 무시하고, 미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운동은 거시적인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무시와 배제가 사라지려면 일단은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접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멋지고 폼나는 일, 외부의 사례보다는 자그마한 실천들이 중요할 텐데, 이런 일들이 각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역량을 쏟고 있나? 이런 일들이 여러 사업과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나. 자기 사업이나 사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조직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자율성은 나 혼자 살아남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 어느 순간부터 운동에서 가치의 지속보다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함을 알리바이로 덮어둔다. 평화박물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도 그냥 그렇게 무시된다. 강력한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된다면 우리 내부는 너무 허약한 것이고 기득권층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떠들고 그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들리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 다들 쉬쉬 하고만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야, 저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고정된 위계, 고정된 가치는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는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그 순환의 힘이 사회도 순환시킬 수 있다.

- 살림살이는 개인의 문제로 얘기되고 이는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어렵다.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이 있다면 공동의 대책이 필요한데, 그냥 개인의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에서 개인의 생활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도, 개인의 헌신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저임금이 활동가의 헌신으로 포장되고 활동가의 답답함이 실무자의 업무능력으로 평가되는 시점에서, 노동과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설 힘은 그것이 노동이냐 활동이냐를 따지고 규정하는 것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유물을 늘리고 그것의 민주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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