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린비노조분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아주 즐겁게...
몇가지 해프닝이 있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 불쾌지수가 높고 같은 공간에서 지리한 신경전을 펼쳐야 하는 그린비노조는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힘겨운 싸움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하나씩 매듭을 지어가면 좋을 것 같고,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이 싸움에 관심을 가진 건 단순하다.
부당한 이유로 징계를 받은 노동자가 있고, 내가 그곳과 책을 냈다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이다.
제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내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는 노동자들과 손을 잡지 못한다면 멀리 있는 곳과는 더 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노동과 생산을 얘기하는 게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대의적인 명분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부조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번 고개를 돌리면 또 고개를 돌리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무엇이 승리일지는 모르지만 그 싸움이 싸우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남는 걸 보고싶다.
그러면서 나도 힘을 얻고 싶다. 우리가 믿고 싸우는 바가 옳을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지 않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기에 우리도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정말 고마운 건 힘겹게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사실 이 싸움에는 무엇이 승리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노조의 단협이 승리한다해도 여전히 출판사의 실권은 그들에게 있을 터이니.
가장 궁극적인 대안은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이 어느날 선물처럼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지리한 싸움을 겪으며 서로의 관계가 더 단단해지고 그 싸움을 함께 할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런 터전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는다.
자기 노동의 결과물에 자기 이름조차 싣지 못하는 이 소외된 상황이 사라져야 주체적인 노동이 시작될 거라 믿는다.
땡땡책협동조합 역시 이런 싸움이 하나씩 승리할 때 자리를 잡아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싸움이 꼭 이겼으면 좋겠다.

우리가 얼마나 큰 힘을 실어줄 수 있겠나.
힘들 때 옆에서 잡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고.
다음주까지 그린비출판사 분회에 따뜻한 말, 함께 하자는 말 많이 건네주면 좋겠다. 그러면 단체협상도 힘을 얻지 않겠나.
힘을 모으면 좋겠다.
너와 나, 우리를 위해...

그린비출판사분회 블로그: http://blog.jinbo.net/gblu/ 


한편으로는 인권을 강화시킨다는 조례들이 하나둘씩 제정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되고 있지만 학생들의 인권이 향상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외려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만 전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은 강제로 철거되고 있고, 어느 작업장에선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거나 밀려나고 있다. 인권도시가 논의되고 있지만 도시의 중요한 공적 공간들은 하나둘씩 사유화되고 있다.

 

지금껏 인권도시나 인권조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인권기본조례나 인권 관련 조례들이 기존의 다른 조례들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조례와 자기입법


작년에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된 인권 관련 조례들을 아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일단 그런 조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제도를 사용할 마음을 먹을 텐데, 주민의 몇 % 정도가 조례를 알까? 그리고 인권기본조례의 대상은 이미 권리를 누리는 사람보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일 텐데, 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있는가? 또한 인권을 침해하고 있거나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조례를 알고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있을까?

 

이런 과정이 마련되려면 적극적인 ‘공지(公知)’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인권기본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 광고판에 실리나? 시민들이 자주 오가는 시장이나 마트에 공지되나? 차별받는 대상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 조례가 제정되었음을 공표하나? 홈페이지에 공지를 띄우거나 플랑카드 몇 장 걸어놓는 것으로는 시민들이 제도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제도를 안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조례들이 규정하는 인권의 내용은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 등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을 들춰본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배우는 한국사회에서, 보장보다는 박탈을 먼저 경험하는(대부분의 학교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인권은 참으로 먼 얘기이다. 그리하여 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얘기이고, 실감을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양 몸에 잘 맞지 않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례안의 공개가 아니라 조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팜플릿이나 동영상 등이 필요할 텐데, 그런 과정이 제대로 준비되고 있나? 주민참여에 관한 여러 조례들이 시민들의 언어로 구성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는 인권기본조례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특히 인권조례라면 더욱더 시민들의 문화와 가치를 고려해야 할 텐데, 표준안이나 잘 알려진 사례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조례가 자치법규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있다.

 

인권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다. 정부는 보호와 증진의 의무를 가지고 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시민의 몫이다.

 

 


인권위원회와 주민참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조례안들은 인권위원회를 전문가와 활동가들로 구성하도록 규정한다. 그런데 외부의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해당 지역사회를 정말 전문적으로 알고 있을까? 어떤 공간, 어떤 사건이 주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강화시킨다는 점을 외부인이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인권감수성이나 인권의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라 지역주민들이 계몽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인권이 좀 특수한 분야일 수도 있다. 대중의 상식이 편견과 선입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인권을 강요할 힘이 제도에서 나오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도가 시민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설령 억누른다 하더라도 제도는 ‘분리’나 ‘격리’의 방법을 쓸 수 있을 뿐 ‘통합’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려면 서로간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최후의 방법으로 분리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당사자들의 선택이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에서도 예산처럼 전문분야에 어떻게 일반 주민들을 참여시키는가라는 물음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어찌 보면 바로 그런 물음 때문에 주민참여예산제도는 평범한 시민들을 지역회의나 예산위원회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공공예산의 활용을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여기려면 나와 우리가 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기본조례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울시학생인권조례가 표류하는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도는 권한을 가진 사람(한국의 경우 대부분은 장長)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조례가 법률의 하위개념인 상황에서 조례의 힘은 법률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제한된 것이니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례는 원래 취지대로 조금 더 자기입법의 과정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럴 경우 조례는 사문화되어 없어질 수 있지만 자기입법의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인권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그 사람들이 참여과정을 통해 인권에 관해 ‘공적으로 사유하기’를 기대한다면, 교육 이후에 역할을 주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며 자신의 편견을 깨우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우리 지역사회에 누가 사는지, 뭘 하며 먹고 사는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주민참여예산제나 사회적 경제, 마을만들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권기본조례는 이런 다른 조례들과 어떤 연관성을 만들어가고 있나? 그런 사례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부분을 통합적으로 다룰 기관이 없고 행정체계가 이런 복합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마을만들기와 참여예산제가 따로 또 같이 가야 하는데 대부분 분리되어서 진행되고 있다. 허나 일은 사안별로 따로따로 진행되더라도, 인간의 삶은 통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도시와 관련된 정책이나 제도들은 민(民)의 활동을 흉내 내지 않으면 좋겠다. 거의 대부분의 인권조례안이 그렇지만 민간이 이미 하고 있는 영역을 관이 복제할 필요가 있을까? 지방정부가 인권과 관련된 정책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민간이 할 수 없는 영역, 예를 들어 청소년 노동기본권을 강화시키려면 청소년들을 교육시킬 게 아니라 행정구역 내에 있는 사업장의 책임자들을 소집해서 교육시켜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인권이 향상될 수 있다. 이렇게 편의점이나 작업장 등의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감수성이 바뀌어야 실질적으로 지역 내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데, 이는 지방정부의 몫이 크다. 진정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지방정부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강, 2005년)에서 공적 영역의 몰락과 정치의 사유화를 비판한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공적 공간이 분리되어 게토화될 때 시민의 삶 역시 몰락한다. 과거에는 공적인 이데올로기가 사적인 것들을 식민화시켰다면 지금은 “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사적인 관심과 걱정, 추구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몰아버리면서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는 게 바우만의 생각이다. 이런 공적인 것의 사유화는 참여 역시 매우 사적인 활동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참여는 매력적이지 않다. 공적인 삶이 사라진 세계, 공공영역이 몰락한 세계에서 참여는 점점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으로 변한다. 더구나 무한경쟁,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는 참여를 낭비로 만든다.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 삶이 기본이고 사적(private)이란 타자의 부재, 타자에게 드러나고 들려지는 경험을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사생활을 먼저 챙기도록 교육받고 훈육되어져 왔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과정이 철저히 개인화되고 한정된 자원을 놓고 무한경쟁하는 사회에서 참여는 거부된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참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사람들이 참여를 꺼린다는 지적은 이런 구조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어떤 혁명을 뜻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공통성(the common)을 확보하는 것일 수 있다. 서로를 대면하고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세계가 사라진다면, 공통성은 사라지고 참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는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온 공공성(公共性)의 재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권기본조례는 공적인 삶의 재구성, 공공성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공공성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민에게 강요하거나 보장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외려 사람들의 관계가 관행과 규범, 도덕으로 묶일 때,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의식할 인권은 확립될 수 있고, 정부의 제도는 때때로 그런 관계성을 침해하고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이 일방적으로 규정해온 공공성에서 민의 주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지금 중요하다고 본다.

몇일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그린비출판사분회 성명서(http://www.twitlonger.com/show/llvqjd)와 그린비출판사의 호소문(http://greenbee.co.kr/blog/1798)을 읽었습니다. 노조는 "회사의 권한 남용과 억압적 태도에 우려를 표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이에 출판사는 " 노동조합의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인 태도에 회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기에 누구의, 어떤 태도가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명서와 호소문에서 몇 가지 쟁점이 드러났고, 이에 대한 회사 측의 충분한 설명이나 태도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노조의 성명서는 "전체 회의가 사라졌고, 인트라넷에 자유로운 댓글 및 게시글을 쓰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출퇴근 기록기가 설치되었고, 분 단위 임금 삭감 통보에 이어 징계가 논의되었습니다. 사전 설명 없는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이 이어지는가 하면, 노동통제가 강화되고 이전에 비해 급격하게 달라진 새로운 편집프로세스도 직원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도입되었습니다. 사무실 이전에 따른 환경 변화, 명절 선물 폐지, 생일 선물 폐지 등 지면상 다 나열하지 못한 무수한 근무 조건이 한꺼번에 후퇴했습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출판사의 호소문에는 이런 지적에 대한 설명이 없고 대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노동자가 "그린비가 독자와 필자들과 함께 모여 소통하고, 인문학을 함께 공부하는 커뮤니티로 만들고자 했던 웹사이트에서" " 그린비의 주요 필자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대표이사에게 '표현의 자유'와 '노동자의 관점'을 운운하며 공격한 사태가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둘을 연결시키면 이 문제가 불거지고 난 뒤에 노조가 발표한 노동조건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출판사는 "9시 출근, 6시 칼퇴근. 주5일 근무에 야근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라고 밝히지만 노조의 문제제기는 출판사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설령 업무량이 적다손 치더라도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일방적이라면 그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는데 노동조합이 더 많은 걸 가지기 위해 회사를 '협박'한다고 보기에는 정황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노동자가 업무상 과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해당 업무에 대해서는 징계위원회에 출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당 노동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상습적인 근무태도 불량'이라고 합니다. 그린비출판사는 타임체크기를 설치하고 5분 이상 지각할 경우 징계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동자를 칼출근, 칼퇴근 시키기 위해 타임체크기를 설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계를 설치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도 자본주의 기업이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딱히 더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안 그러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칼출근, 칼퇴근이 좋기야 하지만 출판업의 특성상 편집자가 회사를 나서는 순간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이 당사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3. 업무에 관한 부분에서도 출판사의 징계사유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업무 과실로 인한 금전적 손실은 분명한 사실인데 "고성 및 불손한 태도", "직장질서 문란 행위"라는 사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노동자가 직장 상사(호소문에 나온 대로 편집장과 디자인팀장)에게 고성을 지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직원이 관리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를 까요?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단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로 도입된 프로세스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 문제가 있어 지적을 한 거라면, 그런 문제제기는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문제제기를 태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건 올바른 논쟁방식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동자는 회사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되나요? 부당한 일이 있어도 그냥 참고 조용히만 말해야 하나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더구나 '불손한 태도'나 '직장질서 문란'이 징계 사유로 올라온 건 참으로 유감입니다. 불손함과 문란은 상하질서를 전제한 말입니, 노동조합의 주장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좀 불손해지면 안 되나요? 문란해지면 문제일까요?^^ 

 

4. 회사측이 노동조합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출판사는 호소문에서 "누구보다 단체협약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활동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업무상 부주의와 직장질서 문란에 대한 징계과정을 빌미로 회사측을 비난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한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징계마저도 악의적인 선전으로 물타기하려는 그런 행태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린비가 출간하는 책들의 성격을 볼모로 마치 '노조'를 탄압하는 회사로 몰아가는 노조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조합원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울러 노동조합이 기업 운영과 관련된 권한을 공유해야 그 기업을 민주적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김상봉 교수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권합니다). 왜 노동조합이 그런 부분에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리고 왜 노동조합이 단체협약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노동조합이 팽팽한 대결을 지향할 수도 있지요. 그린비가 출간하는 책들이 진보적이라면, 출판사가 내부에서 자신의 관점을 실현하는 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5.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자와 편집자는 동반자라고 봅니다. 도판이 빠진 책임은 일차적으로 편집자에게 있겠지만, 필자 역시 이차적인 책임을 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함께 교정지를 검토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리고 편집자는 필자가 넘긴 원고에서 오탈자만 찾는 기계적인 역할만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책이 출판되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편집자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 책임이 온전히 편집자의 몫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궁금증이 있기에 출판사의 호소문 만으로는 "밝은 눈으로 그린비를 지켜"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린비출판사에서 책을 낸 필자로서 출판사와 노동조합이 현명하게 이 문제를 풀어가면 좋겠습니다. 좋은 인문사회과학서적을 많이 출판하는 그린비출판사가 책 만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도 그런 관점을 실현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거의 결성되지 않은 출판계에서,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출판계에서 그린비출판사가 좋은 모범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려면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그린비출판사에서 책을 낸 필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주시하면 좋겠습니다.

이 글에 댓글을 남겨주시면 입장을 같이하고 함께 지켜보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2013. 4. 30.

                                                                                                         하승우 제안드림...

1.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간디의 나라로 익숙한 인도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지난 2013년 2월 20, 21일, 약 1억 명의 인도노동자들이 정부의 신자유주의 조치에 대항해서 48시간 동안 총파업을 벌였다. 인도 전체 인구가 약 11억 명이니 그중 1/10이 파업에 참여한 셈이고,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파업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대체 누가 이런 거대한 파업을 이끌었을까? 인도에도 여러 노조연합체들이 있는데, 이번 파업에는 노동조합의 규모와 상관없이 석유, 은행, 보험, 통신, 광산, 운송, 보건, 농업 등의 대다수 노동조합들이 힘을 합쳐 총파업에 나섰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함께 많은 지역의 시장, 상점, 관공서, 학교, 은행, 보험사들이 문을 닫고 파업에 동참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차량이 불에 타거나 공장에 불이 나기도 했다.

 

성자같은 이미지의 나라 인도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시간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인도는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주요한 산업을 국유화했고 협동조합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다. 1904년 협동조합 신용회사법이 제정되고, 국가의 주요한 경제계획에도 협동조합과 관련된 내용이 반드시 포함될 정도였다. 그런데 1991년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인도는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다. 인도정부는 기존의 정책을 바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협동조합에게 저리의 자금을 제공했던 정책도 폐지되고 협동조합은 취약계층의 고용을 창출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했던 사람이 지금의 만모한 싱 총리이다. 싱 총리의 구조조정으로 경제는 회생되는 듯 보였지만 사회양극화는 매우 심각해졌고, 인도 농가는 몰락하고 있으며,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소득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파업 전인 2012년에도 총파업이 있었다. 외국유통자본이 51%까지 지분을 가질 수 있는 대형유통점의 설립 허가와 유류 가격 인상을 반대하는 5천 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2. 총파업은 성공했을까?

 

이번 총파업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루피)가치가 폭락하는 반면 기름/가스값이나 곡물/채소값이 엄청나게 뛰는 생활고를 문제삼았다. 그리고 우량한 공기업을 민간기업에 매각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들은 물가인상에 대한 통제,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사회안전조치 강화, 모든 노동자에 대한 연금과 물가수당 지금 등 10가지 개혁조치를 정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인도정부가 이 총파업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인도정부는 이 총파업이 국가경제를 악화시키고 국민을 분열시킨다며 비난했고, 이 파업에 국가보안법 적용을 검토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정부는 불통(不通)이다.

 

그래도 2014년에는 인도의 총선이 있다. 싱 총리는 이미 2012년 말에 총선에 대비해 젊은 층을 대폭 임용하는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고, 2013년 1월부터 주(州)정부나 군청 등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빈민층 은행계좌에 직접 정부보조금을 입금해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미 선거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2012년 말, 인도 5대 공업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 구자라트 주의 총선에서 극우 성향인 제 1야당 인도국민당(BJP)의 모디가 3선 연임에 성공하며 2014년 선거를 노리고 있다. 구자라트 주의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은 전체 182석 중 115석을 차지해 여당인 국민회의당을 2배 이상 앞섰다. 2014년 총선에서 BJP가 승리하면 구자라트가 총리를 맡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인도의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의회 선거(연방하원 545석 중 가장 많은 80석 차지)서는 사회주의 정당인 사마지와디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했고, 불가촌 천민을 대변하는 국민사회당이 2위, 여당인 국민회의당은 4위를 차지했다.

 

심각한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했던 정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그렇지만 그 대안이 극우성향의 정당으로 몰리는 건 인도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공산당을 비롯한 인도의 기존 좌파들은 현정부와 비슷한 성장주도의 전략을 계획함으로써 차별화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인도는 한국의 미래일까?

 

어쨌거나 인도의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을 벌이며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맞서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어떤 상황일까? 전국의 장기파업 사업장을 살펴보면, 흥국생명과 코오롱 노조의 파업일은 이제 3,000일에 다가서고 있다. 영남대의료원과 콜트콜텍의 파업은 2,000일을 넘어섰고, 재능교육 파업은 곧 2,000일을 넘긴다. 쌍용자동차, 쓰리엠, 유성기업 등 장기파업장들이 줄을 잇는다. 해결방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철탑에 올라간 최병승, 천의봉씨의 철탑투쟁은 160일을 넘어섰다. 160일이면 5달을 넘는다. 철탑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다. 봄이 오면 철탑에서 내려올 수 있으려나...

 

인도의 사례에서 보이듯 전체적인 경제흐름과 협동조합의 현실은 무관하지 않다. 한국도 외환위기를 겪으며 구조조정을 받아들였고, 경제는 성장하지만 사회양극화는 더욱더 심각해지는 모순이 불거지고 있다. 실질임금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고... 하지만 총파업은커녕 이런 흐름에 맞서는 시도들도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다.

 

인도의 총파업에서 우리의 어떤 미래를 엿볼 수 있을까?


- 한반도 전쟁위기는 거품인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정전협정은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線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適對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며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는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남북은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전쟁행위를 중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문에는 중국, 북한, 미국이 서명했고, 한국은 서명하지 못했다. 즉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도 한반도 내의 전시작전권은 한국정부에게 있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 협상을 거쳐 2015년 전시작전권을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을 예정이지만,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의 준비가 없으면 이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와중에 지난 3월 14일 북한은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혔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다른 협정들과 달리 정전협정은 특성상 쌍방이 합의하여 파기할 성격의 협정이 아니며 어느 일방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백지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미 양국은 “상호 합의한 정전협정에 대해 특정 일방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철회할 수 없다”며 반대의견을 밝힌 상태이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계속되어온 한반도의 긴장이 깊어지는 상황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유엔 차원에서 대북결의안이 채택되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사실상 조선정전협정은 지난 60년 동안 지속해온 미국의 체계적인 파괴행위와 그를 비호·두둔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부당한 처사로 이미 백지화되고도 남은 상태였다”고 비난했다. 이어 한국과 미국이 키리졸브 훈련과 독수리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진행하자 군사도발행위로 규정하며 전쟁불사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 최고사령부 대변인은 "우리도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음이 없이 임의의 시기, 임의의 대상에 대하여 제한없이 마음대로 정의의 타격을 가하고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 대업을 이룩하자는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 하원은 정전협정 무효화를 선언한 북한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한 날 포털 업체의 검색어 1위는 화장품 업체의 50% 할인 소식이었다. 아산정책연구원이 3차 핵실험 이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불안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35.7%였다. 그러면서 ‘안보불감증’이 확산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 안보불감증에서 평화감수성으로

 

그런데 ‘안보불감증’이라는 말은 정권이 자신의 생명 연장이나 여론 전환을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국방이나 안보라는 영역을 정부의 고유영역으로 묶어 놓고, 정부가 제기하는 사안들에 시민들의 무조건적인, 어느 면에서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말이 안보불감증이었다. 따라서 그런 틀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이미 어떤 편견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9․11 테러 당시 미국정부가 그런 문제에 얼마나 무능했는가를 지적한다. “부시 행정부가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선택한 가장 긴급한 작전은, 미국을 테러리스트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대체로 성공했다.” 그리고  사실상 부시정부의 애국법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를 통제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안보불감증이 아니라 평화감수성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은 평화 역시 타인과의 적대나 대결이 아니라 연대와 공감을 통해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경계로 갇히지 않는 감수성을 일깨우고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적대나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평화감수성은 길러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남북한의 문제 역시 적대나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해결하려면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심과 살림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동향 7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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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협동조합연대는 누구인가?

2013년 1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협동조합연대’ 창립총회가 열렸다. 대표 발기인으로는 한국협동조합연구소를 만든 황민영 씨를 비롯해, 팔만대장경연구소장 종림 스님, 홍성덕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조정현 신부, 이길재 전 농수산TV 회장, 오영숙 전 세종대 총장, 박계동 전 국회 사무총장, 배일도 서울지하철노조 초대 위원장, 김애실 마중물연대 공동대표, 조윤명 전 특임장관실차관, 이갑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등이 참여했다. 한국협동조합연대는 앞으로 협동조합 운동의 육성과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 아이템 개발, 창립지원 컨설팅, 교육 및 운영 지원 등 협동조합을 위한 민간지원사업을 펼칠 예정임. 특히 사회적 소외계층과 공적 부문에 협동조합을 건설해 시장경제와 조응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둘 계획이라 한다.

이날 행사에서 박계동 사무총장(前 국회 사무총장)은 “우리 민족의 피에는 협동조합의 정신이 살아있다. 혹자는 협동조합이 서구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호혜적 이타주의에 입각하여 공동체 정신을 키워왔던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보면 협동조합은 우리에게 맞춤운동 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두레’로 두레운동은 보릿고개를 넘고 새마을운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에너지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날 행사에는 축사자로 고흥길 특임장관과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수석 등이 참석했다.


- 한국협동조합연대와 제 2의 새마을 운동

3013년 3월 9일, 임헌조 한국협동조합연대 이사와 <데일리안>의 인터뷰(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328222)를 보면, 기사 제목은 “박원순의 협동조합, 관주도하며 볼로냐 꿈?”이고 “좌파들의 독무대 폐단”, “선거에 이용할 생각이라면 수천개가 생겨나도 제역할 못한다”는 자극적인(?) 부제가 붙었다. 인터뷰 내용에서는 국민이 잘 모르는 상황에서 “관이 나서 주도한다면 지금의 서울시처럼 좌파 조직에만 협동조합을 몰아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서울시가 인가한 협동조합들을 대다수 좌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고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 실무팀에 희망제작소나 아름다운 가게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아울러 반값식당을 반시장주의라고 보는데, “더 큰 문제는 좌파 내부에서 협동조합을 선거조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한 점”이라고 함. 임헌조 이사는 “협동조합을 좌파가 장악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협동조합에 대해 올바른 의미를 규정하고 발전시키기보다 조직화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며 “민주당 원외 지구당 협의회장이 당원에게 협동조합을 홍보하고 있고, 민주노총 등에서 제안서 형태로 발표돼 통용된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임헌조 이사는 “국민 다수는 모르는 채 일부 좌파 활동가만 알고 있는 협동조합이 자라나고, 수혜를 받은 활동가들이 국민 속에서 협동조합이 아닌 사상을 이식시키는 폐단으로 이어진다면 앞으로 수년 내 우리 사회에 협동조합이 수천개가 생겨나도 결코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헌조 이사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사무처장을 맡았던 사람으로 2013년 설 특사 55명에 포함되어 특별복권되었다. 2008년 대통령선거 때 뉴라이트전국연합 홈페이지와 신문광고로 이회창 씨를 비난하고 이명박 씨를 지지하는 글을 올려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람이 한국협동조합연대의 이사를 맡은 것으로 그 단체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터뷰가 한국협동조합연대 전체의견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의중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연대는 <한국협동조합기업연대>에서 명칭을 바꿨고, 제 1차 협동조합 전문가 초청 간담회 후원을 300여개 보수 성향 시민단체로 구성된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 맡았다.

이런 배경에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의 ‘창조 경제’와 ‘제2의 새마을운동’ 논의가 있다. 2013년 2월 14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제 18차 간사단 회의에서 안상훈 고용복지분과위원은 실업 해결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창조경제를 시장경제에서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제까지 개념을 확장시”키자고 제안하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 공동체적인 경제주체들을 활성화시키는 ‘두 번째 새마을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공동체를 지원하겠다는 취지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인사에서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의 미덕이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운동의 확대를 읍면동 조직을 갖춘 새마을운동중앙회가 맡고, 이를 위해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위상과 조직을 정비하겠다고 인수위 관계자가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농림수산부도 2월 16일 인수위 업무보고 때 “제 2의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지난 2011년부터 추진 중인 `함께 하는 우리 농어촌 운동'을 '제2의 새마을 운동'으로 확대 개편”해서 “농어촌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주민들 스스로 역량을 결집해 마을의 발전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수위는 복지 분야, 예를 들어 노인과 장애인시설 등을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도록 하는 규정을 완화해 민간이 운영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두 흐름에서 공통된 지점, 즉 ‘두레’에 대한 강조를 찾을 수 있다. 인수위와 한국협동조합연대 모두 두레를 정신으로 지목했고, 박계총 사무총장은 “두레운동은 보릿고개를 넘고 새마을운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에너지 원천”이라고 말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두레를 언급했다. 이는 창조경제의 방향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협동조합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예측할 수 있다. 정부가 보장하지 못하는 일자리나 복지, 안전 등을 협동조합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고 정부는 자원을 지원하되, 새마을운동중앙회나 한국협동조합연대가 이런 지원을 받을 주요한 창구가 될지 모른다. 반면에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일궈온 단체들이 2012년 12월 6일 만든 ‘한국협동사회경제연대회의’는 들러리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듯 싶다.

 <모심과살림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동향' 7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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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는 행정구역개편, 실제로는 지방자치의 퇴보

이명박 정부가 행정구역 개편을 공식 의제로 만든 시기는 2009년 8월이지만 그와 관련된 논의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중앙정부-광역자치단체-기초자치단체-읍면동’으로 이어지는 지방자치구조를 실제 인구 규모와 생활권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논의를 받아들여 2009년 국회 특위를 만들고, 2010년 10월,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지방행정체제개편위원회가 신설되어 2012년 6월 30일까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기로 했지만 시기가 늦춰져 2013년 5월까지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지방분권 강화’에 관한 개편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달리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런 흐름에 냉소적이다. 현실적으로 단체장들은 행정구역이 조정될 경우 자기 지역이 사라지고 선거구가 변할 거라 우려한다. 그래서 1994년에도 시․군 경계를 조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례로 생활권이 괴산군 청천면에 속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일부 마을을 괴산군에 편입하려하자 경상북도가 반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박근혜 정부도 행정구역 개편 문제를 추진중이다. 유정복 행정안전부(안전행정부로 이름을 바꿀 예정임) 장관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주민들의 편의, 국가 경쟁력, 지역의 정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종합적으로 감안해 합리적 개편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서 자치구 의회 폐지론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지방행정체제 개편추진위원회( http://www.clar.go.kr/ )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자료집을 보면,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지방분권 강화’라는 그럴싸한 명목을 내세웠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단체장과 지방의회 둘 중 하나를 임명제로 바꾸거나 폐지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참고자료] 2012년 4~5월, 지방행정체제 개편위원회가 실시한 38개 시군 통합에 관한 여론조사결과

구분

통합안

자치단체

응답(%)

1

수원-화성-오산

수원

61.7

38.3

오산

67.4

32.6

화성

42.4

57.6

2

안양-군포-의왕

안양

79.9

20.1

군포

59.7

40.3

의왕

40.3

31.5

3

의정부-양주-동두천

의정부

63.1

36.9

양주

51.8

48.2

동두천

71.7

28.3

4

동해-삼척-태백

동해

60.4

39.6

삼척

58.3

41.7

태백

49.5

50.5

5

속초-고성-양양

속초

85.8

14.2

고성

24.2

75.8

양양

34.6

65.4

6

음성-진천

음성

71.5

28.5

진천

36.2

63.8

7

괴산-증평

괴산

88.4

11.6

증평

12.9

87.1

8

논산-계룡

논산

79.5

20.5

계룡

22.3

77.7

9

전주-완주

전주

89.4

10.6

완주

52.2

47.8

10

군산-김제-부안

군산

61.1

38.9

김제

48.7

51.3

부안

51.8

48.2

11

목포-무안-신안

목포

85.7

14.3

무안

47.6

52.4

신안

47.1

52.9

12

구미-칠곡

구미

68.3

31.7

칠곡

63.8

36.2

13

창원-함안

창원

42.6

57.4

함안

75.7

24.3

14

진주-사천

진주

71.1

28.9

사천

35.7

64.3

15

통영-거제-고성

통영

63.3

36.7

거제

24.4

75.6

고성

52.9

47.1


- 당신들의 지방자치..

앞서의 자료집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도를 광역자치단체로 계속 두되, ‘광역행정의 중심기관으로의 기능 재정립’, ‘국가기능의 도 이양 확대’, ‘도 기능의 시․군 이양으로 행정계층간 기능의 적정 분배’, ‘사무 중복 해소’ 등에 중점을 둔다.

2)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풀뿌리 지방자치 강화, 주민의 민주적 참여의식 고취,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주민자치회에 실질적 권한 부여’, ‘인구 등 지역 여건을 고려한 주민자치회 운영의 자율성 보장’, ‘시범실시 및 단계별 추진’에 중점을 둔다.

3) ‘지방분권 강화’: 21개 부처, 5,145개 기관의 ‘특별지방행정기관 사무의 지방 이양’, ‘교육자치와 지방자치의 연계․통합’, ‘자치경찰제 실시’에 중점을 둔다.

그런데 추진위의 안은 ‘특별시 자치구’의 경우 ‘구청장 직선, 의회 미구성’에 방점을 두고 ‘의회 구성, 구청장 임명’, 현행 유지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즉 구청장 직선제나 지방의회 구성 중 어느 하나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 안에 따르면 서울시의 구청장 직선제나 구의회 구성 둘 중 하나가 폐지된다.

그리고 광역시 자치구․군 개편안의 경우 시장이 구청장․군수를 임명하고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방안이 1순위이고, 2순위가 특별시처럼 구청장․군수 직선,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방안이다. 이건 지방자치제도 부활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주민자치회 모델은 읍․면․동에 주민대표들의 의결기구와 공무원으로 구성된 기존의 동사무소를 통합한다는 방안일 뿐이다. 그리고 자치경찰제도도 예산의 이관과 권한 부여 정도이지 주민들이 경찰의 장을 선출하는 방안이 아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1991년 지방의회 부활 이전으로 시대를 되돌리겠다는 발상이다. 마치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때로 되돌아가는 발상이다. 이를 지방자치제도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방자치에서 지방주권으로

2012년 11월 강원발전연구원의 김승희, 김진기, 김주원 연구원은 “지방자치에서 지역주권으로”라는 정책메모를 발표했다. 이들 연구진은 ‘지방’에서 ‘지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앙에 종속된 지방이 아니라 지역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고, 지방자치에서 지역주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역주민의 주권의식 회복을 위한 캠페인, 오․남용되고 있는 용어 바꾸기(예를 들어, 경기도지방공무원을 경기도 공무원으로), ‘지역화’와 ‘지역주권’에 대한 철학 공유, 지역교육을 통한 지역리더 양성과 지역공동체 복원, 법률과 제도의 정비, 강원평화특별자치도 설치 등을 제안했다. 그리고 강원도는 2013년 1월 28일 자치실현과 지역주권 회복을 위해 ‘지방’이라는 명칭 대신 ‘지역’이라는 명칭을 쓰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2012년 11월 17일, 제 7회 지리산문화제 때 열린 지리산포럼에서는 지리산 자락 5개 시 군(구례, 남원, 하동, 함양, 산청)을 묶어 지리산특별자치도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지리산과 관련된 각종 개발공약들을 각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막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특별자치도를 만들어 그와 관련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자는 주장이다.

지방자치제도의 취지를 살린다면,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체계를 일방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자치체의 특성이 반영되도록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진행방향은 ‘개편’을 표방하지만 ‘개악’이 될 가능성이 높아, 주의를 요한다.

용인시 수지구의 느티나무도서관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으며 간단한 소감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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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명회를 다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더군요.
그만큼 많이 궁금하고 할 말도 많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건 내용보다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멋지고 찬란한 비전보다는 어떤 내용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 그 과정에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그 '시점'을 왜 함께 고민할 수 없었던건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긴 시간이었지만 참여했던 분들의 궁금증이 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설명회 때 읽으셨던 그 문서도 결국 공개하지 않는 거군요. 지금까지도 올라오지 않은 걸 보면요.

절차적인 문제는 없다고 하셨지만 정말 그런지는 잘 따져봐야 하겠지요.
재단이고 공공도서관이니 지켜야 할 절차가 아마 있을 겁니다.
저는 절차에 밝은 사람이라 차차 그 문제를 잘 고민하고 따져보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세상 사는 데 그런 게 없을 수 없겠지요.
허나 어디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우리가 왜 이 자리에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느냐고 선을 긋는 순간, 대화는 무의미해집니다.
마치는 순간에도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못을 박으시더군요.

느티나무의 역사는 자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들을 검토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 왜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었는지, 저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은 어떻게 만들어 진걸까...

어쨌거나 설명회는 끝났고, 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은 다시 잠잠해 지겠지요.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저부터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느티나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하게 되겠지요.
예전에는 느티나무가 있어 참 행복하다는 얘기를 했지만 이제는 느티나무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하겠지요.
얘기를 하면서 계속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할 이 상황을요...

사회과학강독회는 다음 주에 회원들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입니다.
독서회는 계속하겠지만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는 회원들의 판단에 맡길 생각입니다.
느티나무도서관의 독서회로 남을지, 아니면 다른 정체성을 가질지...
아마도 느티나무도서관 북카페에서 했던 제 개인적인 모임들도 장소를 바꾸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외부의 다른 자리에서 느티나무도서관재단이나 도서관 분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반갑게 인사하지 않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시구요.^^;;

느티나무와는 2008년 9월의 장서개발강좌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수지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에도 느티나무와의 인연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1년 느티나무도서관재단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사회과학강독회를 만들어 좋은 분들과 즐거운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계속 마음에 남겠지요.

안타까운 작별인사를 전합니다.

한나 아렌트 강좌


● 강좌 소개
... ... ...
이 강좌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읽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각자 스스로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지금도 아렌트는 많은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학자이다. 아렌트를 읽고 소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렌트의 보수적이며 복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렌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어 있고 여전히 번역 작업 중이라는 사실은 아렌트의 이론이 우리 사회를 크게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온건한 측면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렌트의 저작은 불온하다. 그녀는 근대사회에 대한 전위적인 비판가인 동시에 우리의 정치적 무력함을 불편하게 드러내 주는 저술가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가스실로 줄지어 걸어 들어가는 의지 없는 나약한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좌는 아렌트 이론을 통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해보고 아렌트적인 해결책, 혹은 아렌트의 지향점들을 급진적인 이론으로 구성하려 한다.
늦은 밤 예쁜 카페에서 나즈막히 아렌트 구절을 읽으며 불온한 생각을 속닥거리는 강좌이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도 너무 맘 편히 오지도 마시길...


● 소개
- 권정우: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정치사상을 전공했으며,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렌트로 인해 불온한 동시에 불안한 삶을 즐기다 못해 사랑하게 되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중에 있으며, 정치적 공론장, 도시, 생활정치, 민주주의의 직접행동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
- 하승우: 학교를 관두고 여러 공부모임을 꾸리고 강연을 다니며 생활한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삐딱한 시선의 소유자이다. 한때 ‘도끼’라는 섬뜩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직접 만나보면 참 선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아나키즘, 풀뿌리민주주의, 직접행동 등에 관심이 있다.


● 공부모임 일정: 4월 8일부터 매주 월요일

1강 왜 지금 아렌트인가?(4/8): 하승우, 권정우
: 지금 우리 시대에 아렌트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렌트가 기존의 정치이론에 던지는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아렌트가 구사하는 정치개념의 특별함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
keyword: 독특성, 탄생성, 활동적 삶, 판단, 공론장
하승우, 『민주주의에 反하다』(낮은산, 2012)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그린비, 2012)
존 홀러웨이, 『크랙 캐피탈리즘』(갈무리, 2013)

2강 아렌트의 삶과 사람(4/15): 권정우
: 아렌트의 이론을 형성하고 있는 맥락(context)을 우선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독일계 유대인, 하이데거, 나치, 전체주의, 강제수용소, 미국, 망명, 이스라엘, 아이히만. 아렌트와 관련되어 있는 20세기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아렌트의 이론 형성의 영향을 살펴보겠다.
keyword: 나치, 히틀러, 하이데거, 이스라엘, 아이히만, 벤야민, 야스퍼스, 브레히트
한나 아렌트, 홍원표 역,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2010, 인간사랑).
사이먼 스위프트, 이부순 역,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2011, 앨피).
엘리자베스 영-브륄, 홍원표 역,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 사랑을 위하여』 (2007, 인간사랑).

3강 아렌트와 전체주의의 이해(4/22): 권정우
: 전체주의의 문제는 아렌트에게 학문적 대상이 아니라 그녀가 떠안은 짐이었다. 또한 나치즘이라는 하나의 사례로서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경향으로서의 전체주의를 아렌트는 언급하고 있다. 즉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현실 정치와 인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전체주의의 경향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keyword: 전체주의, 총체적 지배, 강제수용소, 군중(mob), 대중(mass)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전체주의의 기원』 (2006, 한길사)

4강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대중사회(4/29): 권정우, 하승우
: 대중(mass)의 등장은 근대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대중사회는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과 상통한다. 대중의 문제는 곧 현대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아렌트는 대중을, 무세계적(worldless)이며, 고립되어 있고, 자발성을 박탈당한 채 정치로부터 도피한 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아렌트가 보고 있는 대중과 사회에 대한 분석은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상실되어 있고 결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틀이 될 것이다.
keyword: 대중, 사회, 가계(hosehold), 사적 소유, 무세계성, 고립, 외로움, 자발성, 공통감각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역, 『전체주의의 기원』 (2006, 한길사)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5강 노동의 정치, 제작의 정치, 행위의 정치(5/6): 권정우
: 아렌트는 노동, 제작, 행위로 이뤄지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위계가 전도되어 있다고 본다. 전도되어 있는 활동의 위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것은 아렌트 이론의 주요한 문제제기이다. 아렌트는 정치를 정의할 때,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나 먹고 사는 필요의 영역을 채우는 노동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타인을 전제한 행위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4강에서는 행위로서의 정치란 무엇인지를 아렌트의 논의를 통해 살펴보고,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개념과 개념이 갖고 있는 현실적 함의를 지적하게 될 것이다.
keyword: 노동, 작업, 행위, 정치적인 것, 필요의 영역, 복수성, 자유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6강 대중에서 정치적 인간으로(5/13): 권정우
: 그렇다면 무세계적이며 박탈된 존재인 대중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가 선사하는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공적 영역은 어떻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용기’, ‘용서,’ ‘약속’, ‘새로운 시작’이라는 아렌트적 개념을 통해 정치의 새로운 미래를 조망해 본다.
keyword: 용기, 용서, 약속, 시작, 판단, 자유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정치의 약속』 (2007, 푸른숲).
한나 아렌트, 서유경 역, 『과거와 미래 사이』 (2005, 푸른숲).

7강 공적 행복의 추구: 혁명과 평의회의 경험(5/20): 권정우
: 6강에서는 미국 독립혁명 당시의 타운 미팅과 같이 혁명 과정 안에 우발적으로 등장했고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자발적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 볼 것이다. 그 경험들은 1871년 프랑스의 코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1954년 헝가리의 레떼, 1980년 5월의 광주로 이어지며 정치적 행위의 장을 활짝 열었다. 아렌트는 인간들의 개별적인 덕(virtue) 자발성을 공적인 영역에서 꽃피우게 한 평의회의 경험을 연방 원리, 공동세계의 구성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keyword: 혁명, 자발성, 평의회, 소비에트, 레떼, 연방 원리, 공동세계
한나 아렌트, 홍원표 역, 『혁명론』 (2004, 한길사).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8강 아렌트로 본 한국정치(5/27): 권정우, 하승우
: 아렌트의 이론으로 현재의 한국정치를 진단하며 강의를 마간하는 시간! 각자가 한 편의 정치 에세이를 쓰고 이를 서로 공유하며 한국의 정치현실에 관한 공론장을 구성한다.


● 장소: 어쩌면사무소(약수동 4번 출구. http://probable.kr/contact)


● 시간: 오후 7시 30분~ 9시 30분.
- 뒷풀이는 알아서들 하시오!!


● 참가비: 정규직 노동자(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는 노동자) 10만원(더 내도 상관없음), 비정규직 노동자(한 달 살기에도 삶이 팍팍하다) 6만원(강좌 날에만 담배 한 갑, 맥주 한잔 아끼고 공부합시다), 활동가/청년백수/전업주부/대학생/기타 하루 살기도 삶이 팍팍하다 4만원(정 힘들면 가능한 만큼만 내시길).
- 어쩌면사무소의 음료는 직접 구입해 드세요. 참가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 참가인원: 어쩌면사무소의 규모상 15명
- 입금한 순서대로 접수함


● 입금계좌: 우리은행 146-503204-02-001 (예금주: 권정우)

 맨 날 똑같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몇일 전, 동네에 걸려있던 선거벽보를 누가 찢었다. 딴 일엔 굼뜬 경찰이 재빨리 출동했고, CCTV에 잡힌 용의자를 체포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지원금 부족에 불만을 품고 찢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급자가 아닌 나도 선거벽보를 보면 가끔 찢고 싶을 때가 있다.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슴이 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선거에는 ‘소위’ 진보후보가 세 명이나 되는데, 가슴이 전혀 안 뛴다. 한 명일 때도 가끔 벌렁거렸던 가슴이 세 명인데도 죽은 듯 잠잠하다. 그냥 선거 공탁금만 떠오른다. 세 명 합치면 11억인데, 아깝다, 돈을 쓸 때는 팍팍 써야 하겠지만 이런 판에 왜 팍팍 써야 할까, 뭐 이런 생각.

 

그런데 이 판이 이렇게 된 것에는 우리만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대통령 후보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우리를 지지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자들이 사람들이 모이면 올 만도 한데, 그들은 오지 않는다. 사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 표가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오지 않는다. 까놓고 말하면, 사실 아닌가. 우리는 ‘소위’ 진보후보를 찍을 사람들이 아닌가. 오지 않을 거라, 우리를 대변하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오지 않는다고 욕한다. 왜?

 

우리 편이 당선될 가능성이 낮다면, 선거에서는 편을 바꾸거나 같은 편을 먹는 것이 상식인데, 또 우리는 그러지도 못한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자세이다.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니 맨 날 만나는 사람들 말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 편이 늘 부족하다고 한탄한다. 이런 이율배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거는 맨 날 똑같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사실 선거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건 선거 이후이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그 사람이나 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편, 저 편 논의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만 한 명 달랑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라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러니 통 크게 우리가 몰표를 줄 테니 노동부나 복지부 전체를 우리한테 넘겨라, 뭐 이런 수를 쓸 수는 없을까?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통령이니 그 정도 약속을 받으면 우리 몫을 걸어볼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하고 그 때 웃고 울기에 이후를 보지 않는다. 누가 당선되면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아무런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기에 선거가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늘 익숙한 공간을 헤맨다. 그러니 선거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맨 날 그 편이 그 편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고 까면서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알기에 기득권층은 선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심지어 별 수 없이 자신들을 지지할 거라는 사실도.

 

그것은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마찬가지이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국외로 튈 수도 있지만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안다.

 

그러니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한 치도 바꿀 생각을 못 하는 그런 냉소주의를 버리고 헌법을 바꿀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가 또라이라고 욕하지 말고 그들이 준거로 삼을 헌법을 우리 뜻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어차피 열심히 세금 내봐야 4대강 사업이나 토건사업에 쓸 텐데, 그런 몫을 주지 않고 우리가 나눠서 잘 쓰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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