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는 '원순씨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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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현 정부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불렀다. 그동안 녹색, 공정, 공생처럼 좋은 말들의 의미를 줄줄이 왜곡해온 사람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측근들의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오고 '위키리크스'를 통해 부정한 외교가 들통 난 상황에서 현 정부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니. 개그라면 웃겠지만 진심이라니 기가 막힌다.

아직은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명박산성이 영원할 수는 없다. 비록 2008년 촛불의 행진은 명박산성에 막혔지만 이제 시민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용산 레아, 홍대 두리반, 4대강 공사 현장,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등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현실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움직임이다.

물론 짜잘하게 부딪쳐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냉소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통계 수치나 이론, 정책을 들먹거리며 자신을 믿고 '큰 거 한방'에 기대를 걸라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공한 사건(?)만을 기억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MB, JP, DJ같은 약자로 얘기되는 정치인과 사조직처럼 움직이는 정당들의 전유물로 얘기된다.

갑작스런 사건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군불이 없다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정치의 군불을 때는 방법을 다룬다. 한나 아렌트와 어빙 고프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골드파브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상호 작용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작은 것들의 정치>(제프리 골드파브 지음,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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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 1989년의 루마니아 혁명, 2001년 9·11 테러, 2004년 미국 내의 반전 운동과 대통령 선거 운동 같은 굵직한 사건들에서 일상의 정치는 변화의 물꼬를 텄다. 골드파브는 "구조적 조건들이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나타난 변화가 공유되고 공개되며, 그런 공유된 변화에 입각해 행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큰 거 한 방도 세상을 달리 보려는 자잘한 시도들이 쌓여야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골드파브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상호 작용에 내재한 자유로운 공적 공간의 중요성"을 간파하면 식탁, 책방, 살롱, 공장, 학교 같은 일상 공간이 정치의 장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공간에서 상황을 스스로 새로이 규정하며 시민들은 대안적인 정치의 싹을 키운다. 마치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시민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일상적인 유형, 즉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요소를 사실상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의 '가카'처럼 부조리한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하고 미디어의 입을 막으며 공식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식적인 공간에서는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믿는 척했지만, 식탁의 주위에서, 독립적인 책방에서, 살롱에서, 그런 강요된 관계는 의문시되었다." 의심받기 시작한 권력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시민들은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이 권력을 정의하며 대항 지식, 대항 권력을 형성한다.

특히 골드파브는 인터넷이 좌파 운동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얘기한다.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민주당의 하워드 딘과 <무브온>, 미국의 반전 운동을 예로 들며 골드파브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것들의 정치를 펼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서로 만났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올렸고, 서로에게 반응했으며,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행위를 조율했다. 그들은 상황을 재정의했다. 상황은 그들의 정의에 따라 변화했다." 이야기와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정치를 큰 정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물이다.

그렇다고 작은 것들의 정치가 곧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흔히 시민사회의 중요성이라는 통념으로 요약되는)가 권력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제도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동적인 운동들은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변화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출현하자마자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상황을 정의하는 힘은 제도화되지 않으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대안들이, 기존의 두 지배 정당 가운데 한 정당(예컨대, 민주당―옮긴이)에서 제도화된다면, 그와 같은 대안들은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제도화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장기적으로 생존하는데 핵심적인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제도화는 정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매우 다양한 사회 제도들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처럼 교육과 미디어 제도들은 특히 중요하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말로만 떠들지 않고 골드파브는 'deliberately considered'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민들과 소통하고 일상의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골드파브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꼼수다>의 유행과 '닥치고 정치'라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바로 작은 것들의 정치이다.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정치

이런 골드파브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정규군이 큰 것 같지만 어떤 때 가면 정규군을 다 동원할 수도 없어요. 쥐는 고양이가 잡게 생겼지 황소가 못 잡는단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신문에서라든지 잡지에서 못하게 되면 차 마시러 들어가서 다방에서도 얘기하고, 친구 만나 음식점에 가서 얘기하고, 기차 타러 가서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게 게릴라전 아니냐. 정규의 언론 기관은 아니지만, 정규의 언론 기관이 다 맥이 빠져서, 권력에 팔려서, 종이 돼서 할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다면 우리끼리 어디서든 만나는 대로 해야 돼."

함석헌의 이런 얘기는 이미 핵심을 짚었다. 그리고 골드파브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활동으로 함석헌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글과 강연에 매료되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한국의 시민들이 능동적이지 못해서? 한국 사회 시민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몇몇 스타를 낳을 뿐 긍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겠다는 인물들만 있었지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제도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정치인과 정당들, 시민 운동 활동가들조차도 작은 것들의 정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시민들의 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시민들이 직접 꿈을 꾸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촛불 집회의 끝물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편견과 망각의 정치'라는 글을 실었다. (☞관련 기사 : 편견과 망각의 정치) 3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원순닷컴이 한나라쩜 오알쩜 케이알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외려 그의 능력을 알기에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걱정스럽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없어도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게 서울 시장 당락과 무관한 박원순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냉소주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열정을 경험한 뒤에 돌아가는 곳은 억압적인 학교와 공장,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정치의 장에 가두는 사고야말로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학교와 공장, 가정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정치는 삶터의 장을 넘어 일터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은 작은 정치의 희망을 꽃피우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의 무덤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가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보자. 골드파브가 극찬하는 폴란드는 왜 민주 혁명 이후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렸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가 왜 시민들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 핵폐기물 처리장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는 정치 논리로만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골드파브의 글에서 그런 통찰력을 찾아보긴 어렵다. 정치는 내용이 아니라 틀만 짜야 하기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제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이제 정치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에, '삼성공화국을 해체하라'는 요구에 답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골드파브는 아렌트의 이론에 많은 점을 기대고 있지만 그녀가 현대 정치에서 감지한 위기감을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렌트는 근대와 현대의 차이를 핵의 발명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다루는 정치는 전쟁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할 뿐 아니라 자연 자체를 새로이 만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약속>에서 아렌트는 핵무기의 등장이 "정치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바로 그것, 즉 모든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가능성을 위협"하는 모순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아렌트는 정치와 진리를 연관 짓는 걸 거부하지만 정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모순을 핵의 발명에서 찾았다. 이것은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의 기반인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일정한 진리 앞에 서야 한다.

허나 골드파브는 이를 거부하는 듯하다. 골드파브는 책 제목을 따온 아룬다티 로이를 거론하며 "테러주의와 반테러주의에 대한 대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로서의 로이보다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를 참조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허나 나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만큼 반세계화 활동가로서의 로이(로이는 활동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도 좋아한다.

"만약 후세인 정권이 쓰러진다면 바스라 거리에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지 모른다. 그렇다면 만약 부시 정권이 무너진다면 세계 전역에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정의인가?

핵 발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의 정치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아직도 원자력의 신화를 믿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반핵(反核)을 지지해야 한다. 작은 것들의 정치, 제도 정치 모두를 위해서.
우리는 중앙집중화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시대가 정한 에피스테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중앙화된 것에 저항하는 지역화되고 경험적인 지식, 메티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방에 있는 출판사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한티재'라는 출판사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마도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과 무관하지 않을 출판사 이름이다.
[녹색평론]을 편집하던 팀이 대구에 남아 출판사를 꾸렸다.
대구에 가면 꼭 한번 들리고 싶은 '물레책방'과 더불어 지방에서 새싹을 틔우고 있다.
[근대의 아틀리에: 대구 근대미술 산책], [인문학을 만나다: 대구경북지역의 자생적 인문학 커뮤니티를 찾아서],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에 이어 [비아캄페시나]를 출간했다.

예전에 변홍철 선생님이 서울에 왔을 때 잠깐 만나기도 했는데...
예상대로, 기대만큼 좋은 책을 출간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비아캄페시나]는 무척 중요한 책이다.
"비아캄페시나는 부정의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산과 무역의 모델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소작농과 농민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재정적, 사회적, 문화적 위기로 고통 받는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건 우리는 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농민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에 노력해야 한다. 소작농과 소농인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 우리는 강력하고 단호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수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들과 인류를 위해 안전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생명과 문화 양자 모두의 다양성을 소중히 여긴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2000년 10월 3일 비아캄페시나의 '방갈로르 선언'"
이 선언에 비아캄페시나의 정체가 드러난다.
'한티재'이기에 이 책을 다룰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게 수도권으로 집중된 우리 사회에서, 지방의 출판사들이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티재'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사회의 메티스를 지켰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원고를 청탁받은 부산의 문예지 [오늘의 문예비평]도 그런 메티스의 보고이다.
왠만하면 지방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청탁을 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원고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프레시안'에서 서평을 청탁받은 [작은 것들의 정치]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원제는 The politics of Small Things: The power of the powerless in dark times 이다.
번역된 제목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과 관련이 있을까?
제목만이 아니라 내용도 그만 해야 할텐데 아직 읽지 않아 잘 모르겠다.
번역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 기대도 크다.


학기가 시작되어 다시 3과목을 진행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멘토는 현미선생이다.
낮은산출판사의 정우진씨가 보내준 만화책, 읽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선생이구나...
입과 말이 아니라 몸과 먹거리로 묵묵히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찾아서 읽게 되는 만화책이다.
현미선생의 삶 역시 메티스의 체현이다.

나는 메티스를 품은 지식인으로 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되는 하루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있다.

한 권은 내가 잠깐 들린 '현장'에서 언제나 '살고 있던' 조약골이 쓴 [운동권 셀레브리티](텍스트, 2011)이다.

용산의 레아, 홍대의 두리반, 강정마을, 내가 몇 시간 남짓 들린 곳에서 조약골은 살고 있다.
이 책은 그의 활동과 음악, 열정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그의 과거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좀 궁금하긴 하지만 제목과 동떨어진 내용은 아니다.
나중에 본격적인 서평을 한번 쓰겠지만 아쉬움은 '거리'이다.
자서전 형식의 글이 삶과 거리를 두긴 어렵겠지만 현장에서 사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이 담겨있었으면 훨씬 좋은 책이 되었을 것 같아 아쉽다.
그 치열한 현장이 날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의 시선만으로 정리되어 아쉽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좋아하는 길동무이며 탁월한 문화비평가인 문강형준이 쓴 [파국의 지형학](자음과 모음, 2011)이다.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인데 그가 미국에서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얼마나 열심히 읽고 듣고 보고 정리하며 사는지를, 미국에서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이곳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아쉬운 점은 그의 글에 '현장'이 없다는 점이다.
그가 보고 읽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드러내고 해부하지만, 현장에 사는 사람이라면 묵직한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얘기들이 길게 부연설명된다.
그가 한국에 돌아올 날을 기대하게 되는 건 그에게 다시 현장이 주어졌을 때 폭발할 날카로움 때문이다.

독자이기에 가능한 상상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이 하나로 섞이면, 현장과 비평이 하나로 섞이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듯 싶다.
아직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이기에 아쉽지는 않다.

김중미씨가 문정현 신부님의 구술을 받아 쓴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낮은산, 2011), [에코토피아]를 쓴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도 곁들여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아카이브 출판사가 보내 준 사진집 [사람을 보라](아카이브, 2001)는 감동적이다. 우리의 일상을 깨고 들어오는..

스테판 하딩의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와 에메 세제르의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그린비, 2011)을 읽고 있는데 묵직한 느낌이다(그런데 66페이지에 불과한 세제르의 책은 가격이 만원이다. 꽤나 어이가 없는 가격이다).
책 vs 책…그 피 튀기는 현장의 기록

[1주년 특집] 하승우, 서평으로 논쟁하다

기사입력 2011-07-29 오후 5: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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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서평은 독한 대화이다. '독한 대화'라는 말의 뜻은 이중적인데, 읽은(讀) 책에 관한 대화이자 책을 좀 독하게 평하는 대화라는 의미이다.

서평이니 책을 읽고 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며 꼼꼼히 읽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의 내용이 읽는 사람의 취향과도 맞아야 술술 읽히는데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고 또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을 읽어야 평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서평을 쓰는 사람에게는 책을 읽는 것이 하나의 취미이자 노동이다.

프랑스작가 다니엘 페낙이 <소설처럼>에서 독자의 10가지 권리에 포함시켰던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어서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는 서평을 쓰는 사람에게 인정되지 않는다. 서평을 쓰는 사람은 책에 대한 취향이나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독자가 작가는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서평을 독하게 쓰는 이유

나는 왜 책을 독하게 평하려 하는가? 원래 평(評)이라는 말 자체가 됨됨이를 따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사실 독하게 평하지 않을 거면 굳이 서평을 써서 다른 독자의 선택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옛날과 달리 인터넷 서점에 가면 출판사 서평들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책에 관한 기본 정보는 대부분 구할 수 있다. 그러니 책에 관한 기본 정보를 서평에서 다시 나열할 필요는 없고 어떤 관점을 가지고 책의 내용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의 서평이 다른 언론의 서평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 <책>(강유원 지음, 야간비행 펴냄). ⓒ야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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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철학자 강유원은 <책>(야간비행 펴냄)에서 서평자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감식자여야 한다고 얘기했다. "고미술품 감정가가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서 그 물건을 제대로 감정하지 않고 무조건 파는 사람 편만 든다면 당연히 그는 사기꾼"이기 때문에 서평자에게는 "그 값을 제대로 따져서 독자에게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서평은 그 책을 감정하는 제법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출판사 서평만이 아니라 일반 서평들도 책에 관해 좋은 얘기들을 늘어놓곤 한다. 출판사 서평이 책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찬사를 늘어놓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서평들이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용에 너무 공감해서 좋아하는 걸 말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왜 공감하는지에 관한 근거를 충실하게 제시해야 기뻐할 텐데 맥락 없이 좋아하는 글들이 간혹 있다. 한때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주례사 서평'도 제법 있다. 그런 서평을 보면 괜히 배알이 뒤틀려 글이 세게 나가기도 한다. (서평을 쓰는 이도 사람이다!)

사실 독하다는 게 꼭 책을 나쁘게 평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서평은 독자로서 저자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런데 서평을 책처럼 길게 쓸 수 없기 때문에 압축적으로 말하다보면 때로는 그 말이 좀 독할 수밖에 없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니 일부러 독하게 말해서 스트레스를 풀려는 게 아니다. 나도 책을 쓰는 사람이니 그런 악담이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내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한다(실제로 인터넷에서 내 글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을 읽고 마음 상하거나 불쾌해 하기도 한다). 그러니 일부러 악담을 하려는 건 아니고 오히려 평할 때 더 조심스럽다.

그래서 혹시 내가 책을 잘못 읽었을까 걱정하고, 그런 부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 책에 관한 다른 서평들을 찾아본다. 다른 서평을 읽으면 무의식적으로 그 논지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책을 다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다른 글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다른 서평의 내용을 받아들일 만하면 내 주장을 무리하게 서평에 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도 뭔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저자의 다른 책들도 훑어본다. 미리 읽어본 사람의 책이라면 좀 수월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일 때는 서평을 쓰는 게 중노동으로 변한다. 그래도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서평을 써야 좀 안심이 된다.

서평이 나만의 생각일까?

이런 부분들이 글을 쓰기 전의 준비라면,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가급적이면 이 책을 지금 읽는 이유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신간만 뽑아서 서평을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다루는 의미를 따져야 하고, 신간이라 하더라도 번역서일 경우 발간 일자가 틀리는 경우가 있기에 시점을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이유가 중요하기에, 서평을 쓰는 사람은 그 근거를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평을 쓰면서 고려하는 또 다른 점은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아니라 청탁을 받고 쓰는 서평의 경우, 나는 청탁한 사람의 '의도'를 따지는 편이다. 파워블로거를 비롯해 서평을 쓰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판에 굳이 내게 서평을 청탁한다면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 의도를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쭉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그냥 블로그에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서평만이 아니라 다른 원고도 마찬가지이다. 왜 굳이 이 주제를 내게 청탁했는지 물어보고 난 뒤에 글을 쓰겠다고 말한다). 물론 청탁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서평을 쓰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에 쓴 서평을 훑어보니 내 마음에 흡족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2010년 10월에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그린비 펴냄), 2011년 1월에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011년 4월에 최장집의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폴리테이아 펴냄)에 관해 서평을 썼다. 청탁의 의도도 있겠지만 세 권 모두 좀 독하게 평했다(스콧의 책은 저자보다 번역자에 초점을 맞췄다). 독하게 평하다보니 그 책의 내용을 충실히 다루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프레시안 books'의 의도에는 잘 맞췄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평은 좀 허전한 글이다. 그 주제에 관해 내 얘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저자의 입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평은 대화이지만 저자를 눈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쌍방향의 대화일 수 없다. 서평에서 저자의 깊은 마음속까지 간파하면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분들도 가끔 계시지만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그 이상을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읽은 책과 지금 읽는 책을 서로 대결시키는 교활한(?) 방법을 많이 택한다. 똑같은 사건이나 개념, 인물을 놓고 차이가 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런 비교를 통해 내가 말하고픈 바를 교묘하게 얘기할 수 있다. 남의 글에 빗대어 내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기 좋고, 독자도 책을 비교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결국 서평은 독백의 형식을 취하지만 다양한 의도와 목소리를 담을 수밖에 없다. 나의 관점을 드러내지만 그 관점이 책의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점에서 서평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서평을 통한 대화는 불가능한가?

서평을 쓰고 난 뒤에 내가 평한 것과 다른 식으로 평한 글을 접하곤 한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거 아니냐, 좋은 의도에서 썼으니 좋게 해석하자는 식의 글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누가 더 저자의 의도를 잘 따라갔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책 자체가 저자의 의도이니 그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따져야 할 몫이다. 그럴 거면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서평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서평은 저자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저자와 서평을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책의 편집자와 서평을 쓰는 사람들 간에도 논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책 자체를 놓고 따지는 논쟁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책이 나온 시점과 의도에 관한 논쟁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면 논쟁이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가 더 많은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한다.

1992년, 삐이잉 소리를 내는 모뎀을 통해 나는 ‘천리안’이라는 마법의 세계와 접속했다. 그 첫 경험은 정말 짜릿했다. 지금의 인터넷 문화와 비교하면 원시시대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이라면 몇 분안에 다운받을 영화를 열 몇 시간 동안 통화중 상태를 유지하며 밤을 꼴딱 새서 다운받던 기억, 인터넷 동호회라는 낯선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가 가장 열중했던 일은 무림동호회라는 곳에서 무협지를 열심히 다운받아 읽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남들이 아래한글로 쳐서 올리는 무협지를 공짜로 읽으며 그 세계의 매력에 푹 빠졌고, 댓글의 성원에 힘입어 코피를 쏟으며 무협지를 올리는 사람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저런 열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때는 인터넷 상의 토론에 열심히 참여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글이나 이미지에 곧바로 참견해서 답글을 달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그러나 인터넷 논쟁에 끼어들면서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한 느낌, 욕하고 까는 건 화끈하게 할 수 있지만 왠지 돌아서면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스윽 지나가다 발끈하며 개입하는 건 쉽지만 다른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공간이 인터넷이었다.


그 뒤 인터넷은 내게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공간이 되었다. 인터넷에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사람들과 소통하지만, 지금도 인터넷은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댓글에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론 분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축복받은 체력이나 끈기를 지니지 못했기에 키보드워리어의 삶을 살기도 힘들었다.


요즘도 인터넷을 쓰지만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가급적이면 사용시간을 줄이려 노력한다. 인터넷에 쏟을 시간보다 첫 돌이 다가오는 아이에게 쏟을 시간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청탁받을 때 좀 망설였다.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인데...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몇 번 들은바 있는데, 논객은 왠지 두렵다. 청탁을 받고 두 사람의 블로그를 보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곳이면 거의 대부분 댓글을 달고 트랙백을 거는 사람들인데,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않을까? 인터넷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두 사람의 논쟁글을 읽어보니 몇 마디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청탁을 받아들였다. 부디 인터넷에서 까이더라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 앞에 앉는다.



두 논객의 진검승부?


한윤형과 박가분은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받는 ‘이미’ 유명한 20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있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지지자(?)들도 꽤 많다. 이런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으니 인터넷 세상이 들썩거릴 만하다. 실제로 이 논쟁을 품평하는 글들도 제법 있다.


논쟁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두 사람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박가분이 자신의 블로그와 공동생활전선 블로그(공동생활은 참 좋은데, 꼭 전선이라는 말을 붙여야 했을까)에 최장집과 의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자칭 ‘최장집 3부작’을 올렸고, 한윤형이 이 글을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박가분이 한윤형의 글을 반박하고, 다시 한윤형이 반박하고, 박가분이 또 반박하고, 한윤형이 또 반박하면서 이 논쟁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대충’이라고 한 건 서로가 더 이상 이 논쟁에 관해 글을 쓰지 않겠다고 밝히며 다소 어정쩡하게 끝이 났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박가분은 ‘최장집 3부작’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집착하는 최장집주의자들의 논의를 “정당에 대한 이론적 물신주의”라 규정하고 이것이 정치적 냉소주의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있지 않다며 사회의 주요 모순(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구분하고 맑스주의 관점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아마도 이 글은 최장집 교수가 맑스주의를 비현실적이라 비판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박가분은 “대중 자신들이 스스로 억압해 왔던 급진적 요구들을 ‘봉기’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지지한다. 무기력한 냉소주의, “정책적 대안의 진정성과 호소력이 부족해서 그동안 실패”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진보진영은 ‘적대적인 모순’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 무능력한 좌파라는 딱지를 떼려면 “민주적 절차의 보장에 대한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에 직면한 민중의 급진적 요구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동원해내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양보 없는 실현을 ‘약속’하는 것”, “민주적 절차와 제도 전반을 ‘민중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겠다는 가장 급진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화끈한 글이다. 사실 박가분의 글을 읽으며 어디서 이런 친구가 등장했을까 궁금했다. 맑스, 레닌의 원전을 아직도 신봉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하지만 20대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불쑥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물론 박가분이 그토록 자신있게 맑스와 레닌을 지지할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과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서일 수 있다. 어쨌거나 박가분의 글은 최장집주의를 비판하고 봉기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지한다.


한윤형은 이 글에 관해 논평하며 최장집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라는 ‘컨텍스트’”에서 평가해 보자며 비판의 문을 연다. 한윤형은 박가분이 최장집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최장집 논의의 현실적인 가치와 논리적 일관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맑스주의 방법론을 무시하진 않지만 그 현실성을 평가하며 “정당론과 운동론의 무성의한 대립”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한윤형은 “진보신당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정당을 지지해야 할 계층의 사람들을 조직화할 ‘운동’이 부재하다는 것”이라 지적하며 “진보신당의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윤형의 글을 읽으며 참 조리있고 길게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빈틈을 찾아내어 적절히 찌르고 들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허나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를 다루거나 자신의 얘기를 담백하게 풀어가는 부분에서는 그 인상적인 날카로움이 좀 떨어지는 듯하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입장을 드러낸 뒤에 벌어진 논쟁이 논쟁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좀 미안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한윤형의 비판에 박가분은 다분히 감정적인 자세로 대응한다. 비판에 대한 반박이 울컥 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그냥 던져지는 문장들이 너무 많다. 두 번의 반론에서 박가분은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저 일군의 우아하고 예의바른 사회학도들에 대해 현장에 있는 저 교양없고(?) 맹목적(?) 좌파들이 터뜨리는 분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내가 탓하고 싶은 것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나은 환경에 있는 중간계급의 ‘교양 있는’ 좌파와 진보주의자들이 그러한 전망에 대해 가져왔던 ‘이론적-지적 태만’”이라고 얘기한다. 그냥 들으면 맞는 얘기이지만 ‘그런데 누구?’라는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일수록 그 대상이 분명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현장’과 ‘이론’의 대립각은 필요하지만 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분명하지 않음은 사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날 공산권 국가들의 파국적인 몰락과, 시민사회의 새로운 계급구성의 출현은, ‘자본’의 존재가 사회적 의제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가장 중요한 모순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도 실천 이전에 ‘사태를 밝히는’ 것이었다. 문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제가 근로대중에 대한 당파성에 기초해 있어야 할 진보(좌파)세력의 의제와 혼동되는 사태에 있었고, 내가 내 글에서 밝히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문제적인 ‘사태’였다.” “PT독재는 결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정확히 의회독재 속에서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적 합의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대중동원적 실천들을 의미한다.” “한윤형이 간과하는 것은 ‘계급적대’가 시민권이라는 일견 저 중립적인 제도적 틀 역시 가로지른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그냥 끄덕끄덕 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앞서 이론과 현장의 대립처럼 이분법적인 대립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기에 더욱더 애매해지는 부분이다(가끔 대가인양 하는 양반들이 맥락없이 큰 얘기로 툭툭 던졌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부르주의 민주주의와 진보, 의회독재와 PT독재같은 이분법이 우리 현실에 그대로 대입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근로대중’이라는 표현은 참 오랜 만인데, 어떻게 이런 단어를 쓰게 되었을까?). 이런 부분이 더 분명해져야 자신이 주장하는 ‘현장’에 더 가까운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한윤형의 반박은 이런 틈을 파고든다. “그의 글은 모든 문장이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으며, 핵심과 주변, 주장과 근거를 구분할 수도 없”다고 지적하며 박가분의 문제제기가 잘못된 현실분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촛불시위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다분히 추상적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주장 역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운동권이 정신을 차리지 않아 사태가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서술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뭐라 말하기 애매한” 관념적인 차원에서 논의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윤형은 “박가분은 스스로의 글의 정당성을 위해 타인의 내면의 공백을 구성해내는 경향이 강하다”고 꼬집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드러난다. 가령 박가분도 한윤형의 “남의 논지를 꼬는 버릇”을 지적하며 “나는 한윤형에게 저 서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안면의 냉소를 거두길 바란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음, 서로에게 대략 난감한 충고들이다. 정말 마음가짐을 바꾸길 바래서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확인사살을 하는 건지.


어쨌거나 이 둘의 길고긴 논쟁을 검색해서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 영민한 두 사람이 왜 이리 소모적으로 논쟁을 할까? 현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필요하지만 현실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글도 필요할 텐데, 왜 이리 인색하게 상대방의 글을 평가할까?


어떤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매우 소모적이었던’ 80년대의 사상투쟁(사투)을 닮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논쟁을 관람했거나 이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 두 사람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부추기는 것도 같다(사실 두 사람의 글에서 왜 ‘냉소주의’가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어야 하는지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다보니 냉소주의라는 쟁점은 한국정치의 ‘컨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더 지젝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텍스트’의 문제로 돌아가 버린다.


이런 의문을 품고 이런저런 블로그를 돌아다녔다. 박가분, 한윤형 두 사람의 논쟁을 검색해서 읽다가 그 글들에 트랙백을 건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블로그를 통해 이택광과 김우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과 그 논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 논쟁으로 비화되었다는 점도, 그리고 노정태와 홍명교, 조영일과 김영하 등 여러 논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인터넷 세상과 별로 친하지 않다보니 이렇게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논쟁이 상처로 끝나고 그 전투의 기록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점이다(어느 한 편의 블로그의 폐쇄나 이전!).


당연히 공론장(公論場)은 중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자기 얘기를 꺼내기 어려운데 인터넷이 발달한 곳에서는 인터넷이 중요한 공론장이다. 하지만 공론장이 활성화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서로간의 이해(理解)도 중요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이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바로 앞의 사람에게 무관심한 채 열심히 어느 곳에 있는 누군가와 소통하려 아이폰을 뒤적이는 사람을 바라보며 드는 느낌이랄까. 서로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는 하는 걸까? 우리는 왜 논쟁하는가?



인문학 키드와 인문학 오타쿠



두 사람의 논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읽으니 또 감탄이 터졌다.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칸트, 고진, 지젝, 아렌트, 바디우, 랑시에르, 버틀러, 라클라우, 라캉, 들뢰즈, 벤야민 등이 한칼에 정리된다. 낯설고 어려운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무척 탁월한 능력이다.


그런데 자신의 언어로 해명하지 못하다보니 ‘정리’는 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은 듯하다. 번역책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개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뜻을 알기 힘들게 꼬인 문장은 난감하다. 책을 읽고 정리한 인문독서 후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나오려면 독자를 고려해 내용을 다듬어야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를 분석한 글도 독서후기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단지 글의 형식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의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 글에서 박가분은 “인터넷상의 대중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머문다면 오늘날 ‘적이 누구인지’ 정세를 결정하는 ‘주요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한 첨예한 사유의 지평이 닫히고 만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정치’가 ‘정치적인 것’으로 다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을 구성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을 관용․불관용이라는 몰역사적인 풍경으로 환원하는 것의 징후에 불과하다”(435쪽)고 얘기한다. “인터넷 상의 대중 이데올로기”는 무엇이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은, “몰역사적인 풍경”은 무슨 말일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박가분은 설명하지 않는다. 어려운 말을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할텐데, 남이 풀다 남겨둔 낱말맞추기를 푸는 느낌이다. 말이 안 들어맞다보니 앞서 맞춰놓은 낱말을 다시 맞춰갈 수밖에 없다.


박가분의 글에서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좋아하는 인문학자에 대한 열광과 반대자에 대한 냉소가 너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랑과 열정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다보니 다른 쪽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 가벼이 여길만한 상대라면 가볍게 다뤄야 하겠지만 상대를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누르려는 경향도 보인다. 다른 사상가들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그나마 알만한 사상가인 아렌트를 가지고 얘기하자면, 사실 박가분의 아렌트 해석은 지젝의 해석을 모방한 것에 가깝다. 지젝의 해석을 모방했다는 점을 숨기지는 않으니 솔직하지만 지젝의 해석이 가진 문제점 또한 그대로 지니고 있다.


박가분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신자유주의와 연관짓는 지젝의 분석에 기대어 비판한다. “정치적 판단이란 ‘진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은 취미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견해는 정확히 쁘띠 부르주아들의 환상을 대변한다”(51쪽)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쁘띠 부르주아(오랜만에 보는 단어다!)의 환상을 대변한다니 무슨 소리일까? 다음 얘기를 들어보자. “스탈린식 전체주의도 나쁘다. 어쨌든 그것은 말 그대로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그녀가 대변하는 참여민주주의적 이상은 ‘더 나쁘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조류와 광기어린 전체주의적 폭력에 맞서 공론공간을 방어하겠다는 바로 그 제스처를 통해 그들이야말로 정확히 공론공간 그 자체의 고유한 정치적 성격을 희생시켜 버렸기 때문이다.”(53쪽) 박가분의 비판은 아렌트가 주장한 공론장이 다양성을 빌미로 자신의 정치성을 포기하고 정치행위를 “수동적인 의미체험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60쪽)고 비판한다. 결국 “이들 참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진짜 요망은 공론공간을 순수한 환상으로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러한 환상을 진짜로 유지시키는 사람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특수한 논리, 정체성, 경제적 판단을 곧바로 전 사회적 보편성과 일치시키려는 ‘유토피아적’ 기획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다(55쪽).


박가분이 비판하는 바는 아렌트가 정치적인 적대의 장을 순수한 의견교환의 장으로 전환시키고 정치와 진리를 분리시켜서 신자유주의 세력이 그 장을 장악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줬다는 혐의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적대가 없는 정치공간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고 특정한 세력이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걱정했다. 오히려 아렌트는 공감적 참여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시민불복종을 결사의 자유의 권리로 해석했다.


사실 박가분은 아렌트가 정치와 진리를 구별지으려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아렌트를 비판한다. 아렌트는 순수한 정치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함이 보장되는 다원적인 공간을 정치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 왜냐하면 공적 영역은 특정한 사람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해야 하는 인간 공통의 장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프롤레타리아라 하더라도 그 장을 독점할 수는 없다.


사실 현대의 유럽철학자들이 아렌트를 깎아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건 그만큼 아렌트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무게를 제대로 재지도 않은 채 내팽개치는 건 올바르지 않다. 박가분은 라캉을 비판하는 버틀러를 비판하면서 “만약 라캉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라캉은 자신의 성차 공식을 통해 이미 상징적 금지의 작인 자체가 성별화된 입장으로 분열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104쪽). 이 얘기는 박가분이 비판하는 아렌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아렌트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아렌트는 인류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났던 평의회를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환영하면서 노동자평의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평의회들이 새로운 주권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가분의 책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이다. 도구적 합리성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이미 인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도 박가분은 “물론 전쟁은 전 인류를 수단화하는 반인륜적인 범죄이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성을 통해서만 바로 그것에 대한 국제적 규제가 가능하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겪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우리는 희망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될 것이다.”(42쪽) 이것이 칸트를 올바로 해석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고, 이런 칸트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사실 ‘평화를 위한 전쟁’, ‘정당한 전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19세기 러시아 혁명가의 사고방식이 21세기 한국의 청년에게서 부활했다.


그 자신이 비판한 인문학 오타쿠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의 급진적 사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익숙한 언어가 개발되어야 그 말의 힘이 강해질 것 같다. 그리고 외국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은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이미 오류일 수 있다. 인문학 오타쿠가 아니라 인문학 키드가 되려면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



논객의 탄생과 현실주의자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텍스트, 2009)를 읽으며 감탄에 또 감탄을 거듭했다. 인물비평을 매개로 ‘자생적으로’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정치의 세계로 넘어간 고등학생이라, 참으로 놀랍다. 안티조선운동에 공감하긴 했지만 그 논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게 한윤형의 글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경력도 그렇지만 하나의 운동에 저토록 헌신적인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내며 인터넷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치있게 창조할 줄 아는 사람 역시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일찍 ‘결단’의 의미를 깨달은 한윤형의 모습은 좀 비장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 당시 다른 대학생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더 시키려고 할 테니 절대로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현실을 잘 꿰뚫고 있는 그이기에 자조적인 독백과 열정적인 주장이 책 속에 공존한다. 산전수전을 거치며 너무 일찍 늙어버린 한윤형은 이렇게 얘기한다. “당시의 나는 노빠들을 정말로 싫어할 만큼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사의 돌아가는 방식에 적당히 체념하고 그 전에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로선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90쪽)  회고록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가 20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여기저기서 내가 이미 겪은 것과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어떤 좋은 흐름들을 좌초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지겨우리만큼 반복적이었고 그 반복을 거부하려는 이들의 몸부림조차도 또한 반복적이었다. 기록에 대한 갈망은 내가 그 ‘사실’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일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 기억과 자료가 사라지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아직도 그 일을 시도해 보고 싶다. 아직도 종종 그 시절의 꿈을 꾼다.”(50~51쪽).


이미 너무 많은 사건을 겪었고 그 중심에 있었기에 그가 보고 듣고 겪은 바는 압축적이다. 한국의 압축성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면, 압축성장의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 그러니 그에게 필요한 건 ‘여유’인 듯하다. 세상을 책임지고 바꾸려는 의지를 잠시 내려놓고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세상이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 테니.


허나 열정을 포기하고 차갑게 식은 한윤형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논리’이다. 타고난 논리적 인간일 수 있지만 그는 인터넷 게시판의 논쟁을 통해 논리적으로 ‘단련’된 사람 같다. 인터넷 논쟁의 주요한 무기가 ‘발빠른 대응’이다보니 상대방의 글을 읽고 즉각적으로 논점을 파악하고 그 허점을 짚는 게 논쟁의 정석이다. 때론 상대방이 정말 얘기하고 싶은 바가 글 속에 정확하게 드러나지 못할 수 있는데, 그 점은 이해의 대상이기보다 비판의 대상이다.


그 자신도 이렇게 얘기한다. “게시판 논쟁 시대에 유용한 방식이기도 했지만, 나는 남들의 주장을 종합해서 나 자신의 주장을 만드는 편이었다. 여러 관점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 그들의 글을 유심히 보고, 그들 입장의 장점과 난점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주장 속에서 끼워 맞추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논쟁의 과정에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수용하는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진중권이 노빠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아 논란이 거세지면, 진중권의 진테제와 노빠들의 안티테제를 종합하여 내가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잦았다.”(91쪽) 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내공을 길러왔으니 그의 공력이 지금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논리의 내공이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려면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윤형은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정치적인 대안을 지니고 있지 않고, 사실주의적인 분석은 회의와 냉소의 늪에 빠진다. 하지만 나는 이 늪이 위험하기는 해도 섣부른 희망의 아편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에 취해 살아서는 안 되고, 제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하는 것”이라 얘기한다(95~96쪽).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는 그가 보는 세계를 너무 단편적으로 만든다. 단지 현실의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을 현실주의라 부르지 않는다면, 이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지금의 현실로 발전해 왔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세상에 말을 걸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허나 안티조선운동의 상처 탓인지, 그가 겪어온 민주노동당 분당, 김선일 사건 등의 영향 때문인지 한윤형은 그런 현실주의를 받아들이진 않는 듯하다. 나는 한윤형이 키보드워리어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해서 세상의 열정을 많이 느껴보면 좋겠다.



아름다운 논쟁은 없다!


지금 성공회대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학교 내의 행정직원들이 비정규직법안 때문에 해고되었는데, 밖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교수나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고 있다. 심지어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거나 때로는 학교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인간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을 가르치려 한다니. 나는 앞길 창창한 두 논객의 삶이 소위 진보적이라 ‘떠드는’ 지식인들과는 다르길 기대한다.


그리고 똑똑한 두 사람이 성장하기에 인터넷이라는 세상은 너무 좁다.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다리 건너면 하나의 세상이다. 좁은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니 영역을 좀 넓히고 시야도 다양한 방면을 향하면 좋겠다.


80년대 사회과학논쟁, 사회구성체논쟁이 현재로 의미있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원전에 대한 집착’ 탓도 컸다. 치열한 논쟁, 사상투쟁은 많았지만 교조주의나 개량주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마저도 이 땅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특정한 원전이 논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을 바꾸는데 현실이 주가 되지 못하고 현실을 해석할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원전이 주가 된다. 앞뒤가 뒤바뀐 논쟁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논쟁을 벌이다보면 왜 논쟁을 하는가라는 목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읽은 동화책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안경과 자기 마음을 보여주는 단추 얘기가 나온다. 남의 마음을 보는 게 엄청난 권력이지만 그 권력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나같은 소심쟁이들은 그냥 자신의 소심함을 보여주는 단추를 붙이고 사는 게 행복하다. 이 글을 쓰며 나는 행복했다.


 

I. 들어가며


스콧의 『The Art of Not-being Governed』는 정치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국사(國史)를 배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의 역사는 허구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속된 국사’는 불가능하다. 더불어 국사책의 지도도 허구이다. 단일한 국가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판단도 가능하다. 홉스나 로크를 읽을 때 든 의문과 비슷하다. 누가 국가를 만드는데 동의했던가? 암묵적인 동의(tacit consent)가 실제 역사적인 개념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단일한 국가주권은 가능한가? 단일민족-단일국가가 근대가 만든 환상이라는 점은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인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 인정하지 않는가? 스콧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응용한다면, 국가를 구성한다는 영토, 국민, 주권 모두가 근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 국가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II. 2장 국가공간: 통치와 징발의 공간


스콧이 보기에 모든 공간이 국가공간일 수는 없다. 국가가 등장하려면 왕가가 주민과 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로 집중시켜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 국가공간의 등장에 단초를 제공한 것이 인도네시아벼(padi)이다. 벼는 적은 인구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했고, 이로써 국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최대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벼의 생산주기는 일정해서 국가는 수확량을 예측해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즉 벼는 국가의 가독성(legibility)을 높이고 징발될 수 있으며 수송하거나 저장하기에도 쉬웠다. 따라서 벼보다 더 이상적인 국가작물(ideal state crop)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사회에서 국가형성을 막은 기본적인 장벽은 바로 거리였다. 식료품을 수송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육지보다는 해상수송이 더 수월했다. 육지의 국가는 보통 120km를 넘지 못했지만 해상수송은 거리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육지와 해상을 똑같이 1km로 표시한 근대의 표준지도는 매우 잘못되었다. 육지와 해상은 매우 다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를 가진다. 육지 내부도 마찬가지이다. 평지와 산, 늪, 습지, 숲은 구분되어야 하고, 국가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역(state space)과 국가통제에 내심 저항하는 지역(nonstate space)이 구분되어야 한다. 근대의 표준지도는 지방의 관행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륙국가보다 해상국가가 곡식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성(stateness)’을 갖춘다. 좁은 해협과 같은 전략적인 위치의 해상국가는 핵심적인 무역상품에 대한 통제, 즉 세금, 통행세, 압수 등을 통해 자원을 확보했다. 허나 이런 이점이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육지의 농업국가보다 훨씬 적의 수의 주민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농업국가는 수의 힘으로 해상국가를 제압할 수 있었다(마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시라쿠사가 해상국가인 아테네를 제압했듯이).


그런 점에서 벼 재배는 국가형성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벼 재배는 주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하는 강가에서 잘 되었다. 벼를 재배하는 심장지대가 크고 이어진 곳에서 강대국이 등장했다. 반면 고지대의 농업지대에서는 소국가(statelets)가 등장했고, 이들의 연맹이나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벼를 재배하는 핵심지대가 존재하는 대규모 국가에서도 왕가의 통제권이 전체를 관장하지는 못했다. 습지나, 늪, 고지대는 왕실과 가까워도 정치적인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고 조공을 바쳐도 그건 예속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공간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주거양식, 친족구조, 인종적인 자기동일성, 자급관행, 종교를 가졌다. 즉 이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이중 주권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21세기 국민국가의 표준인 야심 없고 단일한 주권은 소수의 곡창지대의 핵심부 외에 드물었다. Beyond such zones, sovereignty was ambiguous, plural, shifting, and often void altogether. Cultural, linguistic, and ethnic affiliations were, likewise, ambiguous, plural, and shifting(61).



III. 3장 인력과 곡물의 집중: 노예와 물을 대는 논


인적자원을 중앙집중화시키는 것은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 정치권력의 핵심요소였다. 이것이 치국(治國)의 첫 번째 원리이고 이 지역에서 식민지 이전 왕국의 모든 역사에서 mantra였다. 그리고 그런 국가공간을 만드는 것은 평평한 땅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한 땅, 통행할 수 있는 수로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간이 있는 곳에서 가장 쉬웠다.


허나 이런 공간들이 국가형성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물을 대는 논은 주민과 식료품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에 가장 편리하고 대표적인 방식들을 가리키는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쌀을 재배할 핵심지대가 없을 경우, 중앙집중화는 다른 수단들로, 예를 들어 노예화나 무역로에 대한 통행세, 약탈 등으로 이루어졌다.


비교적 땅이 풍부했던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은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확보할 수 있고 가족에게 유리한 이동경작을 선호했다. 그래서 인구는 분산되었다. 반면에 물을 대는 논은 인구를 밀집시켰고 상당한 양의 잉여를 보장하는 강력한 심장지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논이 있는 땅으로 이주했을 것 같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얘기이고 전쟁, 전염병, 수확량의 변동, 기근, 미친 군조, 내전 등은 주민들을 동요시켰다. 국가가 없었던 사람들의 평화롭고 점진적인 군집이라는 왕가의 기록은 허구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주장은 전쟁과 노예제, 억압이 국가를 만들고 유지함에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The accumulation of population by war and slave-raiding is often seen as the origin of the social hierarchy and centralization typical of the earliest states(67). 많은 왕가의 칙령들은 주민들을 강제로 정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래서 보통 땅보다 인간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래서 전쟁은 피비린내나지 않았다. 이런 논리는 원거리 무역보다 핵심적인 농업생산에 더 많이 의존했던 내륙의 농업국가에서 가장 강력했다. 땅보다 인간이 중요했고, 이는 단지 곡식의 수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전투에서의 승리도 생존한 포로들의 수로 판정되었다(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데올로기나 인종이 아니라 공물을 놓고 싸웠고 에게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은 노예였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 내륙지방의 지배자들은 GDP보다 ‘국가가 접근할 수 있는 생산(state-accessible product, SAP)’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The state-accessible product had to be easy to identify, monitor, and enumerate (in short, assessable), as well as being close enough geographically(73). 경작자에게는 이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국가에는 많은 보상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벼-국가(paddy-state)’였다. The superior productivity of wet rice per unit of land permits enormous population densities, and the relative permanence and reliability of padi rice, so long as the irrigation system is functioning well, helps ensure that the population itself will remain in place(74).


주요한 단일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독성과 징발을 위해 필요했다. 단일작물은 동일한 생산리듬을 가지고 토지가치도 하나의 기준에 따라 정해질 수 있으며, 이런 농업환경은 가족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보기』에서처럼 스콧은 가독성을 강요하는 정책이 국가형성의 지름길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혼합파종을 권하며 새로운 땅을 주기적으로 개간하는 이동농업과 화전농업은 국가형성의 적이었고(스콧은 화전농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주장도 근대시기에 만들어진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국가공간 외부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시키려 노력했다.


허나 이런 국가의 성격이 문화적 동질성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크리올 중심(The Creole Center)을 형성했다. 즉 these padi states were ethnically plural, economically open, and culturally assimilationist(82). 특히 다른 지역의 관리와 작가, 왕족을 포로로 잡은 경우 새로운 혼종 왕실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인적 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쉬운 동화와 빠른 이동을 선호했고 매우 유동적이고 침투할 수 있는 인종적 경계를 만들었다. 남부 버마의 두 개 언어를 쓰는 지역에서 인종적 정체성은 혈통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 주거형태, 인종적 정체성도 변화했다. 어느 곳에서나 인적 자원이라는 절대명령은 차별과 배제를 거부했다. 왕국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주민들을 끌어들일 때 그 왕국은 부득이하게 점점 더 세계주의적이 되었다. 흡수된 사람들의 다양성이 커질수록 본국의 문화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고, 사실상 그런 문화적 혼종성이 성공의 조건이었다.


그래도 국가공간의 주요한 주민들은 노예로 확보되었고, 모든 국가들, 특히 해양 국가는 노예에 기반한 국가이다. 노예는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cash crop)’이었다고 말해도 옳다.


그래서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 외에 다른 많은 방식들이 정치체제에서 등장했다. 부채노예(debt bondage)가 일반적이었고, 아이들은 팔렸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문화적으로 다른 구릉지대(hill) 주민들이었고 전리품으로 노예사냥이 인정되었다(그래서 구릉지대의 사람들은 유괴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노예무역의 규모와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지(valley)의 주민들은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의 재정착과 더불어 상업적인 노예사냥을 통해 늘어났다. 버마와 타이 모두 ‘노예국가(slaving states)’로 불러도 옳다. 노예사냥은 관리와 군인들의 전략적인 투자, 연합무역사업(joint trading venture)에 가까웠고, 약탈자들은 포로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곡물과 주거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포로들은 대부분 왕가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이자 신분의 기호로 인정되었다.

허나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벼-국가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기획이었다. 첫째, 재정적 가독성 때문이다. 주민등록과 비옥한 땅의 측량지도가 가독성의 핵심적인 행정도구인데, 이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왕실은 인적 자원과 곡식을 놓고 관리와 귀족, 성직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내부와 경쟁하지 않고 외부에서 사냥할 경우 소규모 노예사냥은 위험이 적은 반면 확보할 인력의 비율이 낮았고 대규모 전쟁은 수천명의 포로를 확보할 수 있지만 질 경우 왕가의 파멸을 불러왔다.


둘째, 자멸로서 국가공간(state space as self-liquidating)의 성격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많은 주민들을 포획해서 집중시킬수록, 주민들은 멀리 달아나려 한다. The heartland or core region of the padi state is the most legible and accessible concentration of grain and manpower.…the greater the pressure exerted on it, the more likely it would simply flee out of range or, in some cases, rebel(95).



IV. 나오며


스콧의 설명을 한국역사에 적용하면 몇 가지 흥미로운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민심이 곧 천심이다라는 유교적인 명제 역시 인적 자원을 통제하려는 왕가의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민심, 즉 노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부랑자를 단속하고 강제로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농을 확대시킨 것 역시 한국의 국가형성에 특징적인 지점이 될 수 있다. 농업의 확산과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관점은 뻔한 관점과 결론을 반복하는 한국정치를 흥미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프레시안에 쓴 서평이다.  

거의 수정되지 않고 올라갔고 맨 뒤의 문단만 짤렸다.
악의적으로 쓴 부분은 아니고 좀 걱정되어서 쓴 글인데 오해가 있었을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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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 강연을 풀이한 최장집 교수의 책에 관한 서평이다.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은 베버보다 최장집 교수에게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아렌트나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이론이나 합리성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고,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 정치관이 현실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니 굳이 베버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한국정치의 미래를 논하면서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이다. 최장집 교수가 최근 한국사회에 베버라는 유령을 부활시킨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은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최장집 교수가 다른 사상가들을 빼고 굳이 베버를 먼저 얘기하는 건 그에게 기댈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따지고 싶은 건 베버의 이론 자체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베버를 논의하는 ‘맥락’과 최장집 교수의 ‘판단’이다.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최장집 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은 사뭇 상식적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치인’이 필요 없다고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최장집 교수가 단지 좋은 직업정치인 몇 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책의 중심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의 동원기구(머신)와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런 오독을 온전히 독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최장집 교수가 “새로운 직업 정치가들이…직업 정치인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더없이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흘리기 때문이다.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인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듯하지만 그 정치인의 범주는 정당머신을 가진 정당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보면서도 그냥 정치인이라 얘기하니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필요성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 오해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더디다’와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하에서도 좋은 정치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체제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장집 교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관료화된 강력한 국가가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3자 관계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차이점을 가지지만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도자-대중의 관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민주주의는 지배양식이 아니라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형태이다. 말의 뜻 그대로 민중이 지배권을 가져야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제 아무리 좋은 정치결과를 낳더라도 민중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와 구분되는 건 민중이 정치인을 선택하는 만큼 그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탁월한 정치지도자를 쫓아낼 수도 있고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을 처형할 수도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정치체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형태라 불리는 것은 힘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 민중들이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런 공리(公理)를 무시한 채 정치를 설명하니 자꾸 헷갈린다.


최장집 교수가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자신의 구상을 ‘폴리아키’라 불러 오독을 막는데, 최장집 교수는 자기 구상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니 오독이 생긴다. 더구나 자기 얘기와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니 오독은 더욱더 심해진다. 그러니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최장집 교수인 것 같다.



한국시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한다?


독자의 오독이 있다면 최장집 교수의 오독도 존재한다. 최장집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경향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권력을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인간 행위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잘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이 부정적이지 않은가? 투표할 수 있고 선거가 치러지니 부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민주주의를 따진다면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4년에 한번 투표하는 날에만 정치공동체의 주인이 될 뿐이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공영역이 사유화되는 한국의 정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개발의 속도전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상황은 충분히 부정적이다. 감시와 벌금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활동가들에겐 지금의 정치가 꽤 부정적이다. 그리고 다른 통로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자고 얘기하니 아Q의 정신승리법이라도 쓰자는 것일까?


그리고 정녕 사람들이 권력을 부정적으로 ‘이해’할까? 오히려 사람들은 권력이 중요한 힘이자 자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권력이 아니라 부패이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탐욕과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감시이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오독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주장이 정치엘리트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엘리트들이 정치를 대신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같은 자율적 정치조직이 인민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베버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라니 그 판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장집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 듯하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대중의 관계,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타당하려면 시민은 부정되어야 한다. 미국식 정치관과 소련식 정치관이 매우 다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있다. 슘페터의 정치공학과 레닌의 전위당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국가기구의 관료화와 자본주의 시장 구조의 독점화가 가져오는 제약적 힘에 대응하면서 역동성을 만들어”내려면 정당머신을 가진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허나 베버가 지적했듯이,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지도자라 하더라도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할지언정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관료제는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평준화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좋은 정치는 쇠창살 안에 갇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진정 행복일까?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정치인들이 계속 독점해야 할까? 참여는 사람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공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밟으며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늘어날텐데 최장집 교수는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정치학자의 현실감각?


정치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을 얼마나 잡고 있을까? 최장집 교수는 2010년 9월 정치인 손학규 씨의 후원회장을 맡았고 얼마 전에는 손학규후원회 대표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한 몸 던져 지역주의를 깨트리려 했던 것처럼 손학규의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지지의 인사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장집 교수는 손학규 씨를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손학규 씨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뉴라이트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일원이었던 손학규 씨의 신념윤리를 높이 사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간의 행적을 보면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의미하는 책임윤리를 그에게 기대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도 왜 손학규일까?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왔음에도 뜬금없이 손학규와 노무현을 연장선상에 놓는 최장집 교수의 말은 자신의 책임윤리를 거스르지는 않더라도 신념윤리를 상당 부분 훼손한 듯하다(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행정직원들이 해고되었는데도 외부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윤리의 불균형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인데 이를 B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A가 아니었으니 무조건 A를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신념이 아니라 집착과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동시에 팔려는 사람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모두 팔려는 최장집 교수의 입장도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내려놓아야 입장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 책의 내용과 분량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시리즈와 비슷하다. 허나 판형이나 가격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이 훨씬 좋다. 불필요한 지면낭비를 줄인다면 훨씬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는 합리적으로 편집되길 기대한다.

 

2007년 11월, 내가 맡던 수업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해 얘기해줄 특강강사로 임재성 씨를 처음 만났다. 재성씨는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택한 이유와 스스로 총을 내려놓았던 사람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 학기에 학생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시간이었고 여러 학생들이 수업 후기를 남겼다. 모두가 그의 얘기에 공감한 건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는 학생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목소리가 듣는 상대를 고려하는 절제된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학생들의 곱지 않은 시선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했던 재성씨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섣불리 감동을 얘기했던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슬펐다. 그는 대체복무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36개월 합숙복무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섞인 한이 마음을 후볐다. 그리고 “그날 널 보내면서 정신 반쯤 나간 아버지”, “창살 안에서 삶은 달걀이랑 우유 맛있게 먹어주던 내 새끼”, “규정이 아니라면서도 허용한 순경 아저씨”라는 비극적인 풍경을 담은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울컥 눈물이 났다.


또 책을 덮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병역이란 주제 앞에서는 이성이 마비되는 우리 사회”에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로, 평화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마주하는 게 버거워서는 아니다. 재성씨는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신념의 성격, 거부하는 행위의 범위, 대체복무의 용인 여부 등과 같은 기준으로 병역거부를 구분하고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체제의 언어’로 병역거부에 접근하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그동안 체제의 언어로 병역거부를 논했던 건 아닐까? 그냥 싫어서 군대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미안하고 슬프고 부끄러워지기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재성씨는 우리가 이런 마음만 가지고 책을 덮기를 원치 않는다. 외려 자신과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사는 시민임을 강조한다. “감옥행까지 감수할 정도로 강고한 평화주의 신념을 가진” 투사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그는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평화의 언어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책은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 군대가 약한 나라는 망할지라도 군대가 없는 나라가 망한 경우는 없다. 내가 겨눈 총부리가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먼저 총을 내리려는 사람들, 폭력에 “마취되지 않는 감수성을 통해서 폭력의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시민들이다. 자신을 돕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모순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허나 가해의 기억이 병역거부를 평화의 권리로 인정하게 만들었던 독일과 달리 피해의 기억을 가지고서도 “더욱더 강력한 무장을 갈구하면서 병역거부를 범죄시”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비인도적인 무기로 분류된 집속탄을 비롯해 온갖 무기를 수출하며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서의 병역거부는 일상적인 삶보다 총체적인 거부와 대안적인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거부의 권리를 일상 속에 뿌리내릴 방법은 여전히 과제이다.


재성씨를 내게 소개했던 이조은씨도 병역을 거부하고 지금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우리 아들을 데리고 조은씨를 면회하러 가야겠다.


 

볼프강 작스와 여러 사람들이 지은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은 참으로 불편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온 말들이 실제로는 세뇌당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수준, 국가, 기술 등 뭔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디딤돌이라 ‘배워온’ 말들이 실제로는 우리 삶을 지배해 온 언어들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 당장 이런 말들의 의미를 바로잡고 새로운 말을 찾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는 이런 성찰의 기회마저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알지만, 지금 누리는 생활수준을, 또는 앞으로 누리려는 생활수준을 포기할 수 없기에 마음은 더욱 불편해진다.


이상기온과 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개발에 심취한 나라, 국민소득 몇 만불에 목을 매는 나라 한국에서 이 불편한 책은 너무 늦게 번역된 듯하다. 19명이 토해내는 말의 무게가 우리의 안락함을 쿡쿡 찌르지만 우리의 마비된 몸이 이런 자극에 반응할지는 의문이다. 허나 말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선택을 내려야 한다.



1. 계획된 파괴(발전)와 의도된 정치(경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엄마, 아빠의 아이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울음’이라는 한 가지 언어로만 표현하기에(다행히 요즘은 ‘웃음’으로도 표현한다) 아직까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내 판단으로 이 아이를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구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그래서 나는 인간복제를 믿지 않는다). 새로 탄생한 생명은 언제나 기존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니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오만함이자 엄청난 폭력이다. 온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서 꺼낼 수조차 없다.


인류의 비극은 이런 기준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자기 분에 넘치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희망은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빼앗고 세상의 다양함을 회복시키려는 사람들이 등장했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껏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예전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파괴적인 역사가 20세기에 시작되었다.


‘발전’의 뜻을 풀이하는 구스타보 에스테바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발전은 1949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그날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 이 문장이 눈에 밟혀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이 미국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발전과 저발전을 나누는 순간, 미국이 인류의 발전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순간 미국‘과는 다른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덜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선언으로 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다.


서구사회는 간절히 도움을 바란다면 기꺼이 뒤를 봐주겠다며 ‘키다리아저씨’를 자처했다. 반면 그 외의 사회들은 발전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외부의 구원에 매달려야 했다.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알리에르 대통령이 종글레이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한 말은 이런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몽둥이를 들고라도 국민을 낙원으로 몰고 가야 한다면 우리는 국민을 위해서 또 우리 다음에 올 후손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이 실현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은 은폐되었다. 즉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맞추려면 지구가 다섯 개나 필요하다는 점, 로스앤젤레스시에도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은폐되었다. 그러니 이런 변화가 자연스러울 리 없다.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속여서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야 이런 변화는 가능하다.


따라서 ‘발전하지 않을 권리’를 무시하고 발전권만을 강요하는 발전이데올로기의 힘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나온다. 경제발전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의 몫이기에, “정치적 구상으로서의 경제”라는 표현은 본질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경제발전의 원래 이름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파괴의 정치이다.


사막 위에 스키장과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세운 기적의(?) 두바이는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아카이브, 2010)에 따르면, 이미 두바이의 “국가와 사기업은 거의 일심동체가 되었”고 “두바이의 고위 관리자들은 정부의 핵심 직책을 맡는 동시에 알막툼이 지배하는 주요 부동산 개발회사를 경영한다.” 그리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식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상식과 달리 빈곤과 빈민이라는 개념도 원래는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pauper 곧 빈민의 대립항을 부자로 본 것이 아니라 potens 곧 세도가로 보았다.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은 자유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자유는 오직 세도가에 의해서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부는 내게 없는 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고, 돈의 힘이 아니라 돈 없이 살 수 없게 만들고 그 돈을 필요하게 만드는 힘이 가난한 이들을 지배한다. 그러니 빈부라는 개념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풀어야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 진보의 강박(기술)과 타자없는 관료주의(도움)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 파이를 키워도 더 나은 세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인간사회의 생산력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밥을 굶고 병들어 고통을 받고 추위에 몸을 떤다. 조금만 더 참으면 새로운 미래가 온다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미래일 뿐 실현되지 않는다. 진보가 내세우는 미래는 현재를 정당화시키는 ‘알리바이’이다.


그러니 자기 눈앞의 사람이나 사건을 방치한 채 열심히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진보이고,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면서 지구 반대편 소식에 몰두하는 것도 진보이다. 백 명이 일할 자리를 기계화시켜 다섯 명만 일하게 하는 것도 진보이고, 서울-부산을 오가는 시간을 몇 십분 줄이려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는 것도 진보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일들이 우리의 삶터와 일터, 생태계를 파괴해 왔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진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무한히 발전할 과학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대한다. 허나 이런 진보는 “모든 도덕적 제약과 윤리적 맥락으로부터 ‘해방된’, 오로지 지적이고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일 뿐이다.


오토 울리히는 이제 진보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어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공업체제의 효율성을 그렇게 칭송하고 공업기술의 높은 생산성을 그렇게 떠들어대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많이들 모르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은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여서가 아니라 이미 자연이 이룩해놓은 것을 약탈하는 방식을 통해서만(지구에 있는 이른바 자유재의 내부화), 또 자연에, 제3세계에,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떠넘기는 방식을 통해서만(오염물질과 쓰레기문제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비용의 외부화) 실현된다. 높은 생산성을 가졌다는 공업체제는 지구에 얹혀사는 기생식물인 셈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생식물도 그런 기생 식물은 유례가 없었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의 말처럼 과학기술로 무장한 인류가 메뚜기떼처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특별히 더 파괴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자체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지구를 폐허로 만든다. 이익에 눈 먼 기득권층과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고상한 중산층이 지구를 파괴하는 메뚜기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기생하고 있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전 세계로 수출한다. 도움과 원조가 이 수출품의 상표이다.


너무나 이타적인 그들은 눈 앞의 비참한 광경을 외면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왜, 그리고 어떻게 도와야 할까? 책을 읽으며 또 한 문장에 가슴이 울린다.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굳이 자기가 가난해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영혼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가난이 삶의 필수조건은 될 수 없지만 가난의 존재는 그 가난을 목격하는 존재들에게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 아주 단순한 그 윤리는 내가 누리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묻는다. 도움은 그런 윤리적인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발전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움은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물로 변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는 척만 해도 그것을 왜 주는지, 어떤 종류의 선물인지, 받는 사람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움으로 규정한다.” 이런 “도움은 자기 문명 곧 서구 문명의 업적을 살리는 노력으로 뻗어나간다.” 이 속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타자가 사라지면서 이런 타자들로 구성되는 공적인 공간도 사라지고, 그럴수록 도움은 “관료주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원빈과 안성기가 등장하는 국제기구의 광고는 아름다운 멘트로 채워지지만 그 실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폰트놋과 아이완디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를 이렇게 묘사한다. “유엔, 비정부기구, 외국 도급업체, 주요 구호기관 등의 일급 숙소와 사무실에 대한 수요는 토지 가치 인플레이션의 상당 부분을 조장하며, 고위 공무원과 군벌들의 전략적인 토지강탈도 자극하고 있다. 국제조직들은 높은 수준의 물리적 안전 뿐 아니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제1세계 수준의 사치를 추구한다.”



3.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요즘은 대안이라는 말처럼 식상하게 느껴지는 말도 없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대안들이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간 한국사회에서 대안은 쇼핑몰에 전시된 상품 같다. 대안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숙덕거리며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너희들이 우리의 대안을 가로막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한다고.


허나 『반자본 발전사전』의 글쓴이들은 생태학이나 지속가능성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생태담론을 걱정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1990년대부터 바야흐로 펼쳐지는 생태 관료주의 담론”은 “희귀한 자연 자원의 관리를 목적으로 삼는 생태학”을 내세우며 “지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생태학과 충돌”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프강 작스는 이런 흐름이 “지구상에 울긋불긋하게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새롭게 위협하는” “생태 식민주의”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글쓴이들은 대안발전이나 내생발전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에스테바는 이렇게 되묻는다. “추진력이 정말로 내생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다채로운 문화와 다양한 가치 체계에서 원동력이 나오는 것이라면 발전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가와는 무관하게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리라고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추진력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 제대로 따라가면 내생 발전이라는 개념은 온 세계를 하나의 문화 모델로 덮어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마련이므로 발전이라는 관념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다.”


사전이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개념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고 원래 뜻을 밝혀 준다. 발전은 “두 개로 나뉜 세계”이고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이며 자원은 “재생되지 않는 자연”이다. 그리고 평등은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이고 도움은 “세련된 간섭”이며 참여는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다. 진정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런 조작된 언어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요구를 드러낼 말을 찾고 직접 행동해야 한다.


이제 말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발전이데올로기를 없앨 방법은 “탈경제 운동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통제”이다. 그러려면 정치에 개입하는 주체의 범위나 그들간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 “공정한 분배의 규칙이 각자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땅에게도 땅의 몫을 주고 바다에게도 바다의 몫을 주고 숲에게도 숲의 몫을 주고 물고기에게도 새에게도 짐승에게도 각자의 몫을 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야 한다. 땅에게도 제 몫을 주려고 극도의 가난을 받아들인 공동체는 사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잉여’를 지키면서 공동의 부를 공유한 셈이다. 공동의 부에 대해 우리가 먼 옛날부터 가져온 생각과 환경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이제 막 또는 다시금 이해하려는 내용이 합쳐지면 정말로 새로운 ‘부’의 관념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나도 요즘 그동안 몰랐던 세계에 눈을 뜨고 있다. 우리 동네의 ‘거친 청년들’(?)이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뒤처진 친구들이다. 대부분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고 최후의 밑천이라는 몸도 별로 좋지 않다. 가족이나 사회의 보살핌은 딴 나라 이야기이고, 어릴 적부터 알바를 전전하며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온 청년들이다.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들은 ‘살처분’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산 생명을 땅에 파묻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제를 걱정하는 위선을 떨지 않는다. 배움과 기술에서 떨어져 있기에 이들은 날것의 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 친구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온전히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같이 밥 먹고 담배 피고 술 마시고 가끔 책도 읽으며 한마디씩 말을 섞는 게 전부다. 이 친구들을 ‘발전’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친구들이 스스로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가끔 그런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내 인맥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 친구들의 인맥에서는 너무나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데려와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서로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길 기대한다.


때로는 발전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가 이들의 성장을 참아주거나 기대하지 않기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폭력적인 우리 사회가 이 친구들의 마음에 새긴 상처들은 이들이 다른 선택보다 익숙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고 성장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건전한 사람들의 편견’은 이런 친구들이 없어져야 자신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폭력과 편견이 만나 이들의 곤경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허나 잘 만든 공장식 농장이 구제역 한방에 도살장으로 변하듯, 발전에 미친 사회는 퇴보 한방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수 있다. 그 지옥에서도 살아갈 힘을 가진 이들은 모범생이 아니라 바로 이 친구들이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징글맞게 살아야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삶의 다양성만이 사회를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나는 요즘 새삼스레 배우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권리, 학교에 다닐 권리도 중요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 학교에 가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는 점을 배운다. 모두가 서로에게 무한한 관심을 쏟는 따스한 사회에서도 혼자 앉아 고독을 즐길 벤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이제 익숙한 것에서 좀 벗어나면 좋겠다.

 
 
<정치의 발견>
박상훈 지음·폴리테이아·2011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넘쳐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치를 원한다는 얘기는 듣기 쉽지 않다. 그 점은 이른바 진보정당이 등장한 뒤에도 별로 달라진 바 없다. 그러나 정치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론 좋은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정치가 살아나야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발견>은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진다.

<정치의 발견>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보통 정치를 다루는 책은 자신의 논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이 책은 말하려는 바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정치는 현실 세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벌이는 활동이기에 정해진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에서 정치는 선거와 정당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제도와 조직을 민주적으로 만들고 퇴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지도자의 역할’, ‘정치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정치가의 리더십은 의사소통과 말의 힘을 통해, 일상생활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 발휘된다. 진보정치는 권력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권력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00쪽을 조금 넘긴 분량에 저자의 주장을 잘 담았다.
 
정치와 진보

또 다른 장점은 독자층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된 강의를 정리했기에, 독자층도 ‘진보파’이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진보파에 대한 불만과 충고를 과감하게 쏟아낸다. 목적만을 강조하는 진보파에게 이 책은 “좀더 정치적이고 좀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이성을 통해 경쟁”해야 하고, 무엇보다 진보적인 정치가는 “정치적 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인격적인 깊이를 갖춰야” 한다(미국의 사회개혁가 솔 알린스키와 정치가 버락 오바마가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진보파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진보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화두를 제안한다.

또한 이 책은 ‘정치’라는 단어에 실린 지나친 무게감을 좀 덜어낸다. 어쩌면 정치에 대한 지나친 흥분과 냉소는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 바라는 기대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란 비관이 빚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조금은 편해져야 그 단어를 편하게 가지고 놀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너무 무거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를 ‘발견’해낸다.

물론 이 책의 모든 내용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특히 3강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얘기되는 촛불집회 토론회에는 나도 참여했고, 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가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제도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진보정당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였다면 내 평도 여기서 그쳤을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얘기하기엔 나눠야 할 얘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싶은 점을 몇 가지 얘기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가 “매우 일면적일 수 있다”고 “하나의 의견 내지 주장”이라 얘기하니 비판적인 대화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현실주의와 편견

   
▲ <한겨레> 자료
첫 번째로 고민되는 점은 ‘정치란 무엇인가’이다.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책이 시작되는데, 정치 지평을 좁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정치에서 중요한 개념은 권력이고, 누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 책에서 논의되는 권력은 국가의 공권력이다.

막스 베버와 달리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정치란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in-between) 생겨나고 다양한 인간들 사이에 세계를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은 목적을 강요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사람들의 능력이고 다수의 시민들이 구성하는 공론장이다. 권력과 폭력의 차이점은 권력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점이고, 권력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능력이며, 정부만이 (공)권력을 가진다는 생각은 기득권층이 주입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시민사회’나 ‘정치적인 것’이 중요한 건 정치 지평이 넓기 때문이다(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번역된 샹탈 무페의 책도 그러하다).

두 번째 논쟁점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했는지는 이해된다. 사심 없는 정치, 권력을 잡지 않는 정치를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얘기가 필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을 순결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이자 공동체의 재화를 나누는 방식이라 본다면 정치와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 아니 분리돼서는 안 된다. 이런 기준과 가치가 없다면 정치는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의 과정일 뿐 가능성의 장이 아니다(“인간적 삶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살게 하는 것”이 진보라는 말도 도덕적인 판단을 필요로 한다).
 
통치와 민주주의

세 번째 논쟁점은 정당이다. 저자는 정당민주주의가 현대민주주의의 기본이고 “리더십 있는 정당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당이나 좋은 정치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런 정당이나 정치인이 강한 시민사회 없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보정당 사람들이 리더십 있는 정치인으로 거듭나더라도 그와 더불어 정치에 참여할 시민이 없다면 도루묵이다. 시민 없이 정치나 민주주의가 변화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지금껏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이 민주주의를 포기할 이유는 못 된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다.

대의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대의제도가 자신의 본령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 세계를 만들자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정치 세계와 생활 세계를, 정당 정치와 생활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쟁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통치의 정치학을 익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 통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봐야 할까?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2010)에서 통치의 관점이 진보의 이름으로 세계의 다양성과 시민의 경험적 지혜를 파괴해온 역사를 지적한다. 통치를 얘기하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와 멀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부록이 껄끄러웠다. "도시 재개발에 반대하지" 않고 용산 참사로 "도시계획자, 공무원, 법관, 경찰관들이 키워온 자부심"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는 저자의 정치학, 이런 일을 올바르게 결정할 "정부다운 자세"가 존재한다는 정치학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2006),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학교출판부·2007)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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