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평 청탁이 자주 들어온다.
이번달에만 세꼭지가 들어왔다.
다른 원고보다 서평청탁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편인데, 원고 쓸 겸 책도 꼼꼼하게 읽고 책도 받고...^^

하지만 서평이 쉬운 글은 아니다.
나는 그런 부담감을 별로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저자와의 깊은 대화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을 담담하게 정리하는 편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이번달에 서평 때문에 읽은 책, 읽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국가처럼 보기]는 강추하는 책이다. [농민의 도덕경제]보다 재미있다.
[반자본 발전사전] 역시 참 좋은 책이다. 번역이 늦은 감이 있다. 물론 일찍 번역되었어도 요즘 사회 분위기상 많이 팔릴 책은 아니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는 좀 더 읽어봐야 겠다.
[정치의 발견]은 명쾌하지만 불편한 책이다. 아, 최스쿨(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들)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뭐 이런 우울함이 든다는...

서평 외에 느티나무도서관 장서개발강좌나 개인적인 관심사로 요즘 읽은, 읽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가난뱅이 난장쇼]는 [가난뱅이의 역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책이다. 하지메는 아직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참 크고 장한 일인데... 조만간 서평을 한번 써볼 생각이다. 가급적 다른 책과 묶어 쓰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을지 고민 중...
[민주적 공공성]은 강추하고픈 책이다. 역시 아렌트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도, 왠지 조금 더 보강을 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우리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하면 좋겠다는 책.

[식민지 공공성]은 흥미로운 책이다. 여러 명이 같이 쓴 책이라 들쑥날쑥한 면도 있지만 식민지 사회를 조금 더 내밀하게 볼 기회를 제공한다.
[도서관학 5법칙]은 약간 문화적 충격이다. 이 책을 쓴 랑가나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확 생길 수밖에 없는... 어떻게 그 시대, 인도에서 이런 생각을... 어쩌면 이 역시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뭔가 전 세계를 관통했던 기운일지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도 강추하고픈 책이다. 아, 통찰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관찰자의 눈높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책이다.

솔랑이는 무럭무럭 큰다.
이제 10kg에 육박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가끔 책을 읽고 원고를 쓴다.
육아를 통한 통찰력은 아직 잘 생기지 않는다.
책에 너무 익숙해서일까...
프레시안의 서평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아직 프레시안에 올라오진 않았는데, 연휴 때문인지 아니면 글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쓴 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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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아직 개발이 덜 됐어.” 그리고 얼마 전 여성계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보육은 이미 사실 무상 보육에 가까이 왔다”는 충격적인 발언에 이어 무상급식과 관련해 “대기업 그룹의 손자, 손녀는 자기 돈 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손자 손녀는 용돈 줘도 10만원, 20만원 줄 텐데 5만원 내고 식비 공짜로 해준다면 오히려 그들이 화가 날 것”이라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도 화가 났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다. 그들은 이 세계에 어떤 생명/사람이 사는지를 모른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면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그가 지닌 강한 힘을 의식하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의심하게 된다. 내게는 참으로 불편한 ‘복불복의 공정사회’가 그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 이 겨울에 어떤 이는 얄팍한 비닐천막에 의지해 농성장을 지키고 어떤 이는 35미터 높이의 고공크레인에 올라 있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치열한 몸부림이 힘 있는 자들의 눈에는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나 발전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피해로 비친다. 그래서 힘 있는 자들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철거와 벌금으로 맞선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까? 왜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던 사람도 힘을 가지는 순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할까?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는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스콧의 얘기를 정리하면, 그들의 눈은 숲이 아니라 팔 수 있는 나무만 보도록 맞춰져 있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위생 프로그램, 사회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아직도 애써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피부로 서서히 느껴지는 지구세계의 파멸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감추기 위해 힘을 가진 자들은 ‘복원’과 ‘살리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스콧은 그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적’ 생태를 만들기 위한 ‘삼림 복원’이 시도되어 뒤섞인 결과를 드러냈지만, 숲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을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인데,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다양성은 여전히 어려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눈앞으로 다가온 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스콧은 국가처럼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강한 시민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스콧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그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조금 식상할 수 있지만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듯이 우리가 기댈 곳은 역시 민주주의 뿐이다.


‘또 다른 경제가 가능하다’가 아니라 ‘또 다른 경제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던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처럼, 『국가처럼 보기』는 ‘또 다른 삶의 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고 스콧이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세계를 통제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사회질서를 합리적으로 바로 잡으며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욕망이, 스콧의 표현을 빌면 “행정적 질서화에 대한 열망”이 ‘아방가르드’나 ‘전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그럼에도 스콧의 얘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보는 법(seeing)’으로 설명하고,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를, 농민과 “전통적인 사람들”, TV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 나올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열정적인 책이 한국에서 차갑게 ‘소비’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언론사들의 서평을 보면 그들의 ‘책을 보는 법’이 드러난다. 《조선일보》의 서평은 이 책을 두 번이나 다루지만 소련의 집단농장 실험에 대한 비판, 외국의 국가공공사업에 대한 비판으로 다룰 뿐 지금 우리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서평은 박정희와 4대강사업을 비판하지만 정작 스콧에 강조했던 농민과 공동체, 전통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념의 틀을 뛰어넘어 삶과 그 터전을 지키려는 열정이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의 앎을 확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 넘어가면 안타까움이 궁금증으로 바뀐다. 책을 번역한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전상인 교수는 소위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념을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왕 시작된 4대강 사업이 100년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는 성과를 낳겠다는 꿈과 각오를 함께 다지면서 말이다. 문제는 시간도 아니고 예산도 아니다. 정답은 정성이다.”  “지역주민 대부분이 원하는 데다가 사법부도 적법하다고 판단한 4대강 사업, 그리고 당사자인 자동차업계가 환영한다는 한·미 FTA를 민주당이 '절대 반대'로 임하는 자세는 공당(公黨)의 몫이 아니다”라고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분이 스콧의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좀 생뚱맞다. 이런 관점이 바로 스콧이 비판하는 관점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자신이 동의하지 않지만 중요한 얘기니 알려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이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책의 본문과 각주 뒤의 ‘옮긴이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 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박사과정에 속한 김동완(현재는 박사다), 김민희, 김성연, 김예성, 여희경, 장지인, 정유진, 최민정은 이 책의 번역 과정에 참여했다.” “생애 최초의 번역 작업이 정말로 지긋지긋하고 힘들었”을 수 있지만 많은 대학원생들과 함께 했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듯싶다.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라는 책에서 권력과 지식의 유착을 비판하며 지식인이 연구라는 자신의 본령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분이, 사회 정의나 이념과 무관한 진리 추구를 부르짖는 분이 학생들과 함께 번역한 책에 자기 이름만 덜컥 올린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렇게 국가처럼 보는 분이 이로써 공직을 맡기 어려운 근거 하나를 만들었다는 점, 메마른 현실에 단비가 될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북한의 지배자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뛰어난 능력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권력을 독점하며 인민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 참 공허하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신도 참으로 공허하다.

예전에 경향신문 대담을 할때 김상봉 선생님이 북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식인은 진보적 지식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왜 그곳의 문제를 우리가 결정하려 드는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인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연대하고 도와주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네들의 삶을 우리가 결정하고 이끌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 탈북자 또는 북한이탈주민 또는 새터민, 기타 등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복잡하다해도 북한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뛰쳐나와 북한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의 정점에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듯하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좀 그렇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도서관 서가를 돌다 우연히 황장엽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이란 책을 발견했다.
예전에 봤을 수도 있지만 아마 부정적인 감정이 그 책의 존재를 무시했을 것이다.
더구나 출판사도 시대정신이고...
얼마 전도 황장엽이라는 이름을 먼저 봤다면 당연히 넘어갔겠지만 책의 표지가 없고 두껍고 낯선 하드카바의 책이라 슬쩍 꺼내봤다.
몇 페이지 읽다 좀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 싶어 대출해서 읽었다.

아, 그런데 이건 왠 일인가...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북한 최고의 이데올로그였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을 이처럼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도 민주주의에 관한 얘기를 고대 아테네나 공화주의같은 서구정신에 기대지 않고 풀어낼 수 있는 지식인이,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각주에 의존하지 않고 한달음에 써낼 학자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감탄하며 몇 일간 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의 편견을 비판하며...


이 책의 몇몇 핵심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경제생활이며 인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신문화생활이고 사회관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치생활이다.” 황장엽 선생은 정치의 기본개념을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협조성에서 찾는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재부를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따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는 자기의 생존과 발전의 근본요구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 방향에서 자기의 구성요인들을 결합시키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정치의 본질은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관리해 나가는 사회의 자체 관리기능이라는데 있다.”


“인간은 경제관계와 문화관계에 의거하여 경제생활과 정신문화생활을 하지만 경제관계나 문화관계 자체를 개조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경제나 문화 분야의 과업이 아니라 정치의 과업인 것이다.…경제관계나 문화관계를 개조하는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맺어지는 사회관계가 다름 아닌 정치관계이다.”


“정치는 고립된 개인의 생명을 위대한 집단의 생명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위대한 집단의 생명을 지니고 사는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며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살며 발전할 수 있는 불패의 힘을 안겨준다. 물론 개인은 집단의 생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 위대한 생명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고 하여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결합된 생명을 공유한다고 하여 결합된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생명과 생명을 결합시키면 생명력이 비상히 강화될 뿐 아니라 개인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생명과 생명이 결합되면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비상히 강화된다.”


황장엽 선생은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개인주의적 인본주의 사상이며 개인중심 민주주의 정치사상”이라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로 설명한다. “정의의 원리가 인간이 개인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면 사랑의 원리는 인간이 집단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규제하는 사회관계를 개변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에 속한다. 경제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정치의 민주화가 불가능하지만 정치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경제의 민주화가 완성될 수 없다. 세계민주화의 물질적 조건은 경제의 세계화를 통하여 마련될 수 있지만 세계민주화는 세계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협조와 결부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안전한 민주주의’를 원하게 만드는 세뇌를 당해 왔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기득권층은 민주주의를 가상현실의 정치논리로 만들었다. 모범시민이라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케이블TV로 중개되는 정치를 듣거나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직접 행동하는 건 금지되었다. 누구든 정치인을 비판하고 그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 장은 반드시 거리가 아니어야 했다. 왜냐하면 거리는 어떤 매개(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시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흥분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종로와 시청 앞 거리를 달궜던 시민들의 외침은 그런 모범시민의 틀이 깨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젊은 것들이 공부는 안 하고”, “니들이 뭘 알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모범시민들은 여전하지만,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거리의 민주주의와 직접행동


이런 분위기에서 68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다시금 조명을 받고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임스 밀러의 책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개마고원, 2010)는 그 뜨거웠던 나날들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은이가 스스로 고백하듯 이 책은 단지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 아니다. 지은이는 당시 운동을 이끌었던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역사를 복원한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속엔 당시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을 이끌던 사람들의 생각들,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과 사회운동단체에 대한 비판, 그들이 서로 드러냈던 차이들이 담겨 있다. 포트휴런선언, 미시시피의 프리덤 라이더, 마틴루터 킹의 워싱턴평화행진, 베트남 반전운동, 68년 미국 민주당의 시카고전당대회 등 굵직한 사건들이 알란 하버, 톰 헤이든, 리처드 플랙스, 폴 부스 등 활동가들의 삶과 맞물려 설명된다.


지은이의 관심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대학생들이 조직을 만들어 흑인거주지와 가난한 백인들의 동네로 들어간 이유이다.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불가사의한 정신적 봉기”였고 청년들은 허무감을 떨쳐내고 “더 자유롭고 더 정당한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할 것이라는 신념을 함께 공유하고, 그 믿음을 실현”해 갔다. 청년들은 난생 처음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경찰의 폭력에 노출되며 함께 세상에 관해 고민할 기회를 누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참여민주주의’라는 마법의 말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답이 존재했던 건 아니었다. 참여민주주의나 거리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사이자 실천을 통해 실현해야 할 이념이었다. 그것은 투표나 권력행위가 아니라 청년과 가난한 사람들의 우정, 토론, 행동을 통해 드러나야 할 정치적인 권리였다. 참여민주주의는 직접행동을 통해 꽃을 피웠다.



포트휴런선언과 김예슬 선언


저자는 그런 역사를 만들었던 잠재력을 1962년에 <민주사회학생연합>이 발표했던 ‘포트휴런선언’에서 찾는다. 포트휴런선언은 “우리 시대는 유토피아라는 전망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그 어떤 전망에도 열정을 전혀 내보이지 않고 있다”고 고백하며 “사람들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변화가 현재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틀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이 생활하던 “현실의 대학, 낯익은 대학은 악명 높은 ‘자기 내부로의 이주(inner emigration)’를 행한 사적인 인간들이 점령한 곳”이었다. 포트휴런선언은 더 이상 이런 정지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청년들의 선언이었고 청년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선언이 올해 초에 있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를 자퇴했다.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는,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는,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는 고백은 아픈 공감을 끌어냈다. 하지만 우리의 거리는 아직도 위험한 공간일 뿐 ‘불온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포트휴런선언이 ‘그래도 대학’이라는 비빌 곳을 찾았다면, 김예슬 선언은 우리 사회에서 ‘대학조차’ 비빌 언덕이 아니라는 현실을 드러냈다. 그러니 잔소리를 할 기회만 엿보던 꼰대들처럼 청년들, 20대를 탓할 이유가 없다.


왜 당시의 미국 대학생들처럼 정신적 봉기를 하거나 프랑스 고교생들처럼 거리로 나서지 않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지 못하는 건 경찰의 방패나 높은 부모산성만이 아니라 승자독식의 규칙을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비빌 언덕도, 언제나 자기 품을 내어주는 키다리 아저씨도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을 사는 청년들에게 ‘신좌파’의 열정을 전하기에 이 책은 좀 허전하다.



신좌파는 힘을 잃었는가?


이 책의 원래 부제는 “포트휴런에서 시카고점거까지(From Port Huron to the Siege of Chicago)”로 미국 신좌파운동을 포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 신좌파운동과 참여민주주의”라는 번역본의 부제는 좀 지나치다. 그리고 지은이는 인터뷰를 한 사람들 뒤에 숨어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간다. 지은이에 따르면, 참여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망, “공통의 관심을 공유한 우호적인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는 공동체”와 “현대의 삶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실험하는 매우 위험한 노력을 시도하려는 실험적인 집단”라는 전망, 서로 합의해서 공동으로 결정하려는 전망과 “모든 고정된 원칙과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발견, 즉흥적 창조, 예측할 수 없는 극적인 혁신”에 매혹된 전망 사이의 망설임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대항혁명”인 신보수주의에 제압되었다.


허나 신좌파운동은 그런 전망을 넘어선 면을 가졌고, 그건 미국에서도 그랬다. 켈너(D. Kellner)가 마르쿠제(H. Marcuse)의 유고를 엮어서 낸 『신좌파와 1960년대(The New Left and The 1960s)』(Routledge, 2005)에서 마르쿠제는 신좌파의 실패라는 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신좌파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맞지만 혁명을 자유의 영역으로 다시 정의했던 신좌파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60년대 이후 생산과 분배에서의 자기결정이나 공장점거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고, 신좌파의 새로운 문제제기, 즉 욕구와 만족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의식/무의식을 해방시켜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심층심리학)은 힘을 얻었다. 그런 점에서 마르쿠제는 실패라는 단어를 거부한다. 오히려 마르쿠제는 이런 경고를 남겼다. “과거에 좌파가 그랬듯이 신좌파는 후기 자본주의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에 희생되는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경향들은 위기가 확산될수록 더욱더 심각해지고 체제가 전쟁과 저항의 억압에서 자신의 출구를 찾게끔 만든다.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또 다시 파시즘의 필요성과 대결하고 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고전적인 양자택일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날 더욱더 절박해지고 있다.”

신문이나 주간지를 구독하지 않는 우리집에 2달에 한번 배달되는 잡지가 있다.
하나는 녹색평론이고, 다른 하나는 민들레이다.

이름도 이쁘다.
녹색평론, 민들레..
그리고 그 제목과 내용이 어긋나지 않고 충실하다.
녹색을 바탕에 둔 대안적인 패러다임과 진정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 대안의 고민.

그렇기에 나는 이 두 잡지만큼은 정기구독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내가 다니는 느티나무도서관에도 녹색평론과 민들레는 항상 비치되어 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고민...
사람들은 왜 이 잡지를 읽을까?
뭔가가 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 두 잡지의 공통점은 집요하게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내 머리 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두 잡지는 언제나 소수파이다.
다수파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기보다는 다수파가 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 이 두 잡지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성균관 스캔들]에 다소 무관심한 듯 매력을 풍기는 정약용 선생이 잠깐 등장을 했었다.
정조가 실제로 민중의 삶에 그토록 관심을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약용 선생은 평생 그런 관심을 지고 살았던 듯하다.
우연히 정약용 선생의 글을 접하고 그 공감의 깊이에 약간 감동을 했다.
[열하일기]를 좋아하는 쪽에서는 박지원을 띄우고 정약용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가려 한 게 아닐까?

일평생의 반을 귀양살이로 보내고, 6명의 아이 중 4명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삶, 그러면서도 민중들의 실제 삶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그의 삶.
그의 글을 읽다보면 한가로운 글재주로 잡히지 않는 마음과 몸의 무게가 느껴진다.
파리를 조문한다는 그의 글을 읽으며 또 한번 울컥했다.
굶어죽은 민중들이 파리로 변해 날라드는 것이니 파리를 잡지 말고 조문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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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년(1810) 여름에 엄청난 파리떼가 생겨나 온 집안에 가득하더니 점점 번식하여 산과 골을 뒤덮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엉겨 붙고, 술집과 떡집에도 구름처럼 몰려들어 우레 같은 소리를 내었다. 노인들은 괴변이라 탄식하고, 소년들은 분을 내어 파리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혹은 파리통을 설치해 잡아 죽이고, 혹은 파리약을 놓아 섬멸하려 했다.

나는 이를 보고 말했다.


“아아, 이 파리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굶어죽은 사람들이 변해서 이 파리들이 되었다. 아아, 이들은 기구하게 살아난 생명들이다. 슬프게도 작년에 큰 기근을 겪었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그로 인해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가혹하게 착취까지 당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시신이 쌓여 길에 즐비했으며, 시신을 싸서 버린 거적이 언덕을 뒤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신 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살이 썩어 문드러졌다. 시신에서 물이 나오고 또 나오고, 고이고 엉기더니 변하여 구더기가 되었다. 구더기떼는 강가의 모래알보다 만 배나 많았다. 구더기는 점차 날개가 돋아 파리로 변하더니 인가로 날아들었다. 아아, 이 파리들이 어찌 우리 사람들과 마찬가지 존재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마련해 파리들을 널리 불러 모으나니 너희들은 서로 기별하여 함께 와서 이 음식들을 먹어라.”


이에 다음과 같이 파리를 조문한다.


파리야, 날아와 이 음식 소반에 앉아라. 수북한 흰 쌀밥에 맛있는 국이 있단다. 술과 단술이 향기롭고, 국수와 만두도 마련하였다. 그대의 마른 목을 적시고 그대의 타는 속을 축여라.


파리야, 날아오너라. 훌쩍훌쩍 울지 마라. 네 부모와 처자를 함께 데려오너라. 이제 여한 없이 한번 실컷 먹어 보아라. 그대가 살던 옛집에는 잡초만 가득하다. 처마는 내려앉고 벽은 무너지고 문짝은 기울었다.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그대가 일하던 밭에는 가라지만 돋아 있다. 올해는 비가 많아 흙탕물이 흐르는데, 마을은 사람이 없어 황폐하게 버려졌구나.


파리야, 날아와 기름진 고기 위에 앉아라. 살진 소다리가 보기 좋게 구워져 있고, 초장에 파강회․생선회․농어회도 있단다. 그대의 굶주린 창자를 채우고 얼굴을 환히 펴라. 도마 위엔 남은 고기 있으니 그대 무리들에게 먹여라. 그대의 시신은 이리저리 높이 쌓였는데, 옷도 없이 거적에 둘둘 말려 있다. 장맛비 내리고 날이 더워지자 시신은 모두 이물(異物)로 변한다. 구물구물 솟아나 어지러이 꿈틀대며 움직인다. 옆구리와 등줄기에 넘쳐나더니 콧구멍까지 가득 채운다. 그러고는 허물을 벗고 훌훌 날아가는구나.


길에는 시신만 있어 행인들이 무서워하는데, 아기는 죽은 어미의 가슴을 더듬으며 젖을 빨고 있다. 산에 무덤을 만들지 못해 마을에 시신이 뒹군다. 구덩이에 널브러져 잡초가 우거져 있다. 이리떼가 와서 좋아 날뛰며 뜯어먹는구나. 해골이 뒹구는데 구멍만 뻐끔하다. 그대는 이미 성충이 되어 날아가고 껍데기만 남았구나.


파리야, 날아서 관아에 들어가지 마라. 관아에선 굶주려 여위고 해쓱한 사람을 엄격히 선발하는데, 서리가 붓을 잡고 자세히 살펴본다. 빽빽이 모인 중에 행여 한 번 뽑혀도 물처럼 멀건 죽을 겨우 한 번 얻어 마실 뿐이다. 게다가 묵은 쌀의 벌레들이 어지러이 아래위로 날아다닌다. 위세 부리는 아전들은 모두 돼지처럼 살쪘는데, 아무 공도 없건만 부화뇌동하여 공로를 아뢰면 수령은 가상히 여겨 견책을 않는다. 보리만 익으면 백성 구휼 그만두고 연회를 벌이는데, 북소리․피리 소리 울려 퍼진다. 아리따운 기생들은 교태를 머금고 빙빙 돌며 부채춤 추는구나. 그곳엔 음식이 풍성하게 있지만 그대가 먹을 수는 없단다.


파리야, 날아서 관리들의 객사로 들어가지 마라. 깃대가 우뚝우뚝 서 있고 창대도 늘어서 있다. 소고기국․도지고기국이 가득가득 먹음직하고, 메추리구이, 붕어찜, 오리탕, 기러기탕, 중배끼, 꿀떡에 문어오림도 흐드러졌다. 기분이 한껏 좋아 기생을 쓰다듬는데, 하인들이 큰 부채를 부쳐 대므로 그대는 그곳을 엿볼 수도 없단다. 호장은 부엌에 가서 요리를 살핀다. 숯불을 지펴 대며 왜(倭)쟁개비에 고기를 익히고, 수정과와 설탕물을 맛있다 칭찬한다.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무섭게 막아서서 배고파 호소하는 사람을 시끄럽다 물리치고, 객사에선 고요히 음식을 즐긴다. 아전들은 주막에 앉아 사람을 시켜 문서를 쓰게 해 역마를 통해 보고를 올린다. ‘백성들은 편안하며 길에는 굶주린 사람 없어 태평무사’라고.


파리야, 날아오너라. 살아 돌아오지는 마라. 그대 지각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걸 축하하노니 그대 죽었어도 재앙은 형제에게까지 미친다. 6월이면 조세를 독촉하며 아전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소리 사자의 포효처럼 산천을 흔든다. 가마솥도 빼앗아 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고 간다(92~93). 그러고도 부족하여 관가에 끌고 가 곤장을 치는데, 맞고 돌아오면 기진하여 병에 걸려 죽어 간다. 백성들은 온통 눌리고 짓밟혀 괴로움과 원망이 너무도 많지만 천지 사방 어디라 호소할 데 없구나. 백성들 모두 다 죽어 가도 슬퍼할 수도 없구나. 어진 이는 움츠려 있고 소인배는 비방이나 일삼는다. 봉황은 입 다물고 까마귀만 우짖누나.


파리야, 날아서 북쪽으로 가거라. 북으로 천 리를 날아 궁궐로 가거라. 임금님께 그대의 충정을 하소연하고 깊은 슬픔 펼쳐 아뢰어라. 어려운 궁궐이라고 시비(是非)를 말 못하진 마라. 해와 달처럼 환히 백성의 사정 비추어서 어진 정치 펴 주십사 간곡히 아뢰어라. 번개처럼 우레처럼 임금님 위엄이 떨쳐지게 해 달라고 하여라. 그러면 곡식은 풍년이 들고 백성은 굶주리지 않으리라. 파리야, 그런 다음 남쪽으로 돌아오려무나.

프레시안에 보낸 글인데, 제목이 바뀌었다.

가급적 예의를 지키려 한 글인데 제목이 바뀌어 좀 그렇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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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불편했다기보다는 내용을 다루는 방식과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누누이 강조해온 분이 이런 좋은 얘기를 왜 이런 문체로 썼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은 이후 고미숙 선생의 책을 읽을 때면 비슷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우린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너네는 왜 우리처럼 못 사니라고 쪼아대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았을 책을 굳이 읽고 서평을 쓰는 오지랖은 불편함을 전하고 다음번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수다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서평을 부탁받기 전에 알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책을 읽는데, 그 모임에서 고미숙 선생의 『호모 에로스』를 읽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에로스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감상문을 썼다. 책의 제목은 에로스인데 몸이나 에로스에 관한 구체적인 실화는 없고(심지어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고!) 난데없이 세미나 얘기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지붕뚫고 하이킥2>의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 편이 생각났다, 이런 감상문이었다. 그런데 출판사가 이 글에 새 책이 나왔다는 트랙백을 걸어 놨다(불편한 글에도 트랙백을 거는 출판사의 센스?).


사실 『호모 코뮤니타스』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다(이게 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호모 코뮤니타스』의 구성은 『호모 에로스』와 비슷했다. 요즘 세태에 대한 적당한 비판(주변 사람들에게 적절히 모은 정보들), 돈을 잘 벌고 쓰는 노하우, 돈에 대한 상상력, 에필로그이다. 두 책의 다른 점은 고미숙 선생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 세 사람의 글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 정도? 구성이 책의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리고 시리즈라서 구성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구성상 현실에 대한 재기발랄한(?) 비판이 달인의 노하우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부유한 삶이라는 헛된 꿈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이 책은 그 대안으로 학교에 다니지 말고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하라고,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과 더부살이하며 공동체를 꾸리라고 충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은 몇 권의 책을 읽는 세미나 시간에 나눴던 수다를 책으로 옮긴 듯하다. 물론 그런 수다의 내용이 소중하지만 그런 수다가 책으로 나오려면 적어도 몇몇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일상적 차원의 윤리나 실천”만이 아니라 “경제구조나 정책적 사안”도 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부모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식들이 기죽지 않고 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하에서”라는 현실진단이나 “이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아주 평균적인 행보다. 이 행보가 주욱 이어지다 보면 ‘쇼핑족들의 헤븐’이라는 홍콩까지 드나들게 된단다”라는 진단은 좀 당황스럽다. 수다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진단을 현실감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몇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면 조금 더 사회계층 피라미드의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 대안에 냉소하고 때론 대안을 증오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책의 좋은 얘기들은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의 여유로 그치지 쉽다.


예를 들어, 책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찬양하지만 사실 그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마치 몇몇 대안학교들이 ‘자기 아이들’을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놀고 예술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망을 반영하듯이. 하지만 가족을 거북이등껍질처럼 이고 살아 온 사람들에겐 “부모의 가난은 자식한테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말처럼 불편한 말도 없다.


격월간 잡지 《민들레》 69호에서 현병호 선생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에 대한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지독한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리라. 가난은 불편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아침에 배달되는 도시락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독거노인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끼니 걱정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게다.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무료 급식을 받아야 점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도 가난은 불편을 넘어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들의 탐욕 아니면 청승, 그들의 공동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강연료 얘기를 할 때이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강연료 얘기를 꺼내고 정신노동의 화폐가치를 얘기하며 “풋, 더 어이없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게 우연한 만남의 기회와 장을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책 곳곳에서 비노바 바베나 마하트마 간디의 얘기를 칭송하니 어리둥절하다. 바베나 간디도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그렇게 반응했을까?


이런 불일치가 실수로 느껴지지 않는 건 마쓰모토 하지메의 행동을 “화폐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고 얘기하면서 <수유+너머>가 보증금 1억에 월세 천만 원을 내며 돈이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하는 단체라고 자랑(?)할 때이다. 허나 일본에서 곧 헐릴 건물을 수리해서 활용하는 ‘아마추어의 반란’과 비교한다면 <수유+너머>는 이미 가난뱅이와 무관하다(오히려 서울 해방촌의 ‘빈집’이 하지메와 더 가깝다). 책을 읽다 문득 개그 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생각났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이 정도도 못하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잖아요, 그냥 청승이지.” 옛날 살던 옥탑방에서 길 건너편 래미안 아파트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에 수도파이프 얼어 터질까 걱정하며 주방창문 열고 담배 한 대 피는데, 저쪽에서는 반팔 입은 사람들이 거실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책에서 고미숙 선생이 예로 드는 대안은 좋은 세상이지만 <수유+너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의 세상이다. 그 공동체 밖의 세상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고 가끔 있더라도 언론에서 다뤄지는 기사처럼 매우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참고로 얘기하자면 한국에 분당시는 없고 <문탁네트워크>는 용인시 수지구에 있다). 자기 공동체의 단단함과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세계를 접하지 않고 자기 세계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유+너머>가 쪼개져서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지만 그 공동체는 여전히 자기만의 원리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수유+너머>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는 게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말을 가려서 쓰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족감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즐기는 건 그들의 자유이다. 허나 그런 공동체가 대안공동체를 자처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면 좀 불편해진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공동체들이 많아지는 건 분명 우리사회의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니 우리의 방식을 따르라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는 몰라서 못 사는 사람보다 알아도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될 때 운동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공동체는 공간 내에서의 차이와 증여보다 공간 밖과의 강한 충돌을 겪으며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독자로서 나는 그런 충돌에 관한 얘기가,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실패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더 궁금하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문부식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예전에 프레시안에 썼던 삼성불매운동 원고를 보완해 달라는 전화였다.
2편의 글을 썼는데, 조금 더 쓰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좀 해괴한 논리를 펴는 분이 있어 그냥 말았다.
잘 되었다 싶어 애기 보며 몇 자씩 꾸역꾸역 고쳐서 보내드렸는데 어제 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목처럼 굿바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김상봉 선생이 180매의 장문의 원고를 썼다고 하는데, 그 글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나저나 김용철 변호사는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두번째 봤을 때는 그 나름의 유머감각에 조금 즐겁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 삼성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논의의 시작이 되면 좋겠다.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가 쓴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의 '들어가는 말'(introduction)에서 강조되는 말은 민주주의의 급진성(radical)이다. 보통 러미스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대립관계를 설명한 사람으로 얘기되지만 이 책에서 러미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어야 하는 민주주의가 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렸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런 점에서 러미스의 얘기는 묘하게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중간계급이나 정당, 지식인, 엘리트들이 인민의 이름을 내세워 지배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러미스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 맑스주의나 자유주의 좌파가 이해하지 못한 그 혁명의 정치적 잠재력이 선거에 온 힘을 다 빼았겼기 때문에 급진성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선거로 몰아넣으려는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수많은 민중반란과 저항적인 사회운동에서 드러났던 많은 정치적 잠재력, 급진적인 민주주의는 지금 한국에서 선거의 틀로만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거에서 '소위 민주후보, 소위 좌파후보, 소위 시민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면, 인민들의 정치력은 '역시나' 어리석고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평가를 받아들인다면 인민들의 지배인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엘리트지배는 정당화된다. 러미스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한다.

또한 좌파/우파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 러미스는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지적한다. 러미스는 이 책을 필리핀에서 썼는데 자신이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필리핀에서 쓰는 것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러미스는 보수/진보가 과거의 합의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는 제1세계의 '현상유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의 민주화를 설명할 살아있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다루길 원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그 지역의 풍토나 문화와 무관한 제1세계식 민주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보급하려는 지식인, 엘리트들의 음모를 비판한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결국 제1세계를 본딴, 또는 제1세계 만큼의 경제발전을 이루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선진화 이후에나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풀고 난 후에나 정치를 얘기해야 한다. 이에 맞서 러미스는 민주주의가 삶의 양식이라는 점을, 일하고 생활하는 일상의 과정이 정치임을 주장한다.

아래의 글은 들어가는 말을 번역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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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980년대쯤 동료인 무로 켄지(Muro Kenji)는 가끔씩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Tsurumi Shunske)와 얘기를 나눈 뒤에 (여느 때처럼) 흥분에 들떠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참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 미국이나 소련, 일본,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남미, 어느 나라 어떤 시스템에서도 전복적이란 말야.” 민주주의에 대한 낡은/새로운, 단순한/복잡한, 확실한/모호한 생각은 나의 흥미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E. M. 포스터가 말했듯 두 번의 축배는 가능하지만 세 번은 불가능한 원리[민주주의]에 고취된 사람을 만나는 건 신기한 일이다.


거의 동시에 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잡지를 발간한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내용은 필자로 추천할만한 일본의 급진민주주의자를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급진민주주의자”에 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이웃집 소녀(혹은 소년)를 사랑하게 된 것과 조금 비슷한 경험이었다. 평상시에 알고 지내던 이 존재는 갑작스럽게 아주 새롭고 신선하고, 뭐랄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1960년대 초까지 미국과 일본 양국에서 결코 맑스주의자를 자처할 수 없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지만 맑스주의가 자유주의 국가나 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힘에 항상 의존했던 운동의 활동가였다. 이 시기의 운동정치에서 맑스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의 “좌파”라는 의미로, 즉 더욱더 “급진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 좌파 사이의 불편한 중간 지대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그래서 자유주의 좌파와 구별되기 어려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프랑스혁명에서 처음 사용된 좌파-중도-우파라는 공간적 은유는 말하자면 우리가 정치를 배열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이 둘 “사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분명한 정치원리가 없다면 타협이라거나 잡종이라는 평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쓰루미-무로 공식(“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은 이런 공간적인 이미지를 다시 배열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급진적인 입장 또는 급진주의 그자체로 여겨지면서 다른 모든 정치적 입장과 그 사이의 관계들도 새로운 조명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정치현실을 더욱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더욱더 비판적인 힘으로 민주주의 이론을 무장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구상한지 10년 이상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폴란드와 중국, 버마, 필리핀 같은 많은 나라들에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을 목격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동유럽의 정부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결국 소련정부도 무너졌다. 동시에 민주주의 이론의 영역에서도 새롭고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동안 제목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는 책들이 북반구 공업국가들에서 현상유지(status quo)의 미덕을 지루하게 반복하면서 호황기를 누려왔다면, 민주주의를 “급진적”
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세대의 이론가들이 등장했다. 조지 부시(George Bush)가 자신의 임기동안 민주주의는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레이건(Ronald Reagan)과 부시의 정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 관점에서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과 공유했던 이념적 틀을 비판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구성하거나 재발견하려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이 수년 만에 최초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논의를 도우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흥미롭게도 내가 필리핀의 제3세계연구센터에 있을 때, 미국과 일본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의 동료들에게조차 나의 연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필리핀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작업을 준비하러 필리핀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감춰진 선입견은 여기에서 작용한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면 아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배우리라는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나는 이런 식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요량으로 신중하게 필리핀 대학을 골랐다. 그러나 필리핀을 선택한 것이 결코 무작정 이루어진 선택은 아니었다. 1986년 2월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후 고작 1년이 지났다. “인민의 힘”은 역시 그리스어인 데모스(demos)와 크라티아(kratia)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인민의 힘, 즉 급진민주주의는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민들은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선거 결과가 존중받는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목숨을 걸었고, 부패하고 무장했으며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한 독재자를 나라밖으로 쫓아내고 권력을 빼앗았다. 나는 민주주의가 낡아 빠진 슬로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념이자 진정으로 중요한 원리, 인민의 열정과 헌신을 담은 원리로 자리잡은 공간에 가기를 원했다.


실제 상황은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질 즈음 공중의 분위기가 흥분과 급진적인 희망으로 불타올랐지만 1987년 봄까지 환멸에 빠졌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그러나 이런 환멸에도 민주주의에 관한 긴급하고 풍부한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무슨 일이 잘못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맑시스트들은 민주주의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해냈다는 데 놀랐고, 자유주의 좌파는 민주주의가 별일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관해 가졌던 생각이 약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이 시기는 행복하진 않았지만 지적으로 고무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예상하지 않았던 것을 배우게 될 거라던 나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필리핀 지식인들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발전(development)”이라 불리는 동일한 장벽에 부딪혔다.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의 갈등은 제3세계의 시각보다 북반구 공업국가의 시각에서 볼 때 더욱더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북반구의 공업국가에서 쓰인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제3세계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제3세계에 관한 언급은 정치이론과는 다른 “장”인 “지역연구”나 “발전경제학”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민주주의 이론이 전 세계의 문제라면 거센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제3세계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나는 필리핀에서 제3세계(혹은 자국 안에 제3세계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발전의 문제와 그것의 반민주주의적인 편견을 다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2장의 주제이다.


이 책은 어떠한 제도도 기획하
지 않는다. 내가 제도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기획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획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기획들은 정치적인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인간사(人間事)의 원리로 살펴보려 한다(이것은 사람들이 이 원리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만든 다양한 제도와 행위와는 다르다). 민주주의가 너무 자주 뒤섞이고 혼동되어 사용되다보니 우리는 마치 민주주의가 자유선거 혹은 인권의 법적보장, 노동자의 통제인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우리는 평화가 평화조약이고 정의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배심원 재판에 의해 보장되는 정의, 혹은 평화조약에 의해 지켜질지도 모르는 평화는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모든 경우가 아니라 몇몇 경우에만 진실로 증명되는 가설이다. 재판이나 조약과 상관없이 정의와 평화에 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가설의 상대적인 진실 혹은 성공을 판단할 수 있다. 비슷하게(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선거”, “법적 보장”, “노동자의 통제”도 가설들이다. 이들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원리들을 가능하다면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보자면, 이 책을 유토피아적인 이론에 관한 저작으로 의도하고 쓰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어떠한 기획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테이블 위에는 이미 많은 수의 훌륭한 민주주의 기획들이 있고 그것은 몇 년 전에 어떤 것은 수백년 전에 등장했다. 모든 대륙, 각 나라, 사실상 모든 형태의 제도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들 각각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요구하는 상이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북반구의 거대 자본 정치(big money politics)의 민주화는 남반구의 군부독재 혹은 플랜테이션, “사회주의” 관료제, 혈연 정치, 신권정치의 민주화와 다르다. 이러저러한 제도들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운동들은 제 나름의 방법들과 목적,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실제 현실에서 그 사람들이 투쟁해온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책이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단과 목적을 명료화하고 평가하며 비판할 몇 가지 기준을 제공하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운동들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작은 공헌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제도들보다 뛰어난 이유를 사실상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이 초래하는 결과를 연구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만약 누군가가 급진민주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 내가 가끔 사용하는 방법은 상상의 인물, 이상형의 급진민주주의자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은 연구주제들 중 하나이며 이후의 어떤 상황에서건 노련하게 증명하는 역할을 맡는 관계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이런 이슈와 관련해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이 되려 할까? 이 답에는 구속력이 없다. 누군가는 답을 알면서 다른 정치체제를 선택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논의가 성공한다면 다른 체제를 선택한 이들이 최소한 자신의 선택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의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 2002)라는 책은 도발적인 제목만큼 새로운 문제의식을 다양하게 펼쳐놓는다. 러미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현실주의에 메스를 들이댄다.


러미스의 말은 역사적이면서 논리적이고, 그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간결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낸다. 가령 경제성장이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되리라는 현실주의에 이렇게 답한다.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선진화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래서인지 러미스는 경제를 얘기하면서 끊임없이 정치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책의 제5장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에서 러미스는 자유로운 공공영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러미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자세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0년)라는 책보다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1996년)라는 책을 먼저 썼다. 러미스가 잡지나 책에 실었던 글을 모은 책인데, 이 책을 지금 후배와 함께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도 먼저 번역된 책만큼 흥미로운 주장이 가득하다(녹색평론사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래디컬 민주주의

2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발전(Antidemocratic Development)

3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계(Antidemocratic Machines)

4장 민주주의의 잘못된 전통(Democracy's Flawed Tradition)

5장 민주적인 가치(The Democratic Virtues)


결론의 제목이 사뭇 의미심장한데 페르세포네의 귀환(Persephone's Return)이다. 지금 3장까지 초벌번역이 진행되었다(가을까지 마칠 수 있으려나).


번역하면서 눈에 걸리는 흥미로운 부분들을 미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이렇게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민주주의’는 한때 인민의 언어였고 비판의 언어, 혁명의 언어였다. 인민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정당성을 덧붙이기 위해 민주주의를 훔쳐갔다. 이제 그것을 다시 돌려받아 그 비판적이고 래디컬한 힘을 되찾을 시간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꽤 가치있는 것이다. 말이 올바른 곳에 사용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은 신선하고 깨끗하고 진실해진다. 그 말을 계속 사용하려는 습관이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말로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를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던 역사가 위선과 배신의 역사와 겹치지만 어쩐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는 순결한 정치적 이상이다. 래디컬하게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품고 있다.”


“‘인민’을 정의하기(a). 민주주의는 보통 인민에 의한 지배로 정의되어져 왔다. 이 의미의 래디컬한 의미를 제거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노예와 여성, 특정 인종, 빈민, 어떤 다른 집단을 배제해서 우리가 “인민”으로 뜻하는 바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나라에서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인민권력”을 지지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인민”으로 부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급의 사람들,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의존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를 요청하지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데모스(demos)는 원래 시민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을 뜻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도 원래 그 계급의 지배를 뜻했다. 중간계급이 지배를 잘하건 못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의 지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간계급의 지배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와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을 알려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유형의 지배에 다른 말을, 즉 “민중선동가(demagogy)” 썼다. 민중선동가는 인민을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대변하리라 약속하며 대중적인 지지(=권력)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주로 비난할 때 사용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특히 민중선공가가 적절한 상황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약속의 대가로 어떤 이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중앙집권주의이다. 중앙의 통제는 투쟁 중인 정파에게 이로울 수 있고 심지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 유용성이 그것을 민주적이라 부르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는 “뜨거운 얼음”이나 “각양각색의 통일성”과 같은 표현이다. 당신이 단어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보통 민주주의는 지방의 특색(localism)에 좌우된다. 지방의 지역들은 인민이 사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권력을 주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 철학의 올바른 이름이 래디컬 민주주의라는 점이 이 책의 입장이다. 톰 페인(Tom Paine)이 우리에게 알려줬듯이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good sense)이다. 양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이 주장은 분명하고 무난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분석적으로 따져보면 이 주장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이 똑같은 방식으로 일치된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인민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좋아할 수 있으나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에 관한 그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인민이 세계의 객관적인 구조나 인간 지각구조나 인식구조로 민주주의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태양이 열을 발산한다거나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직선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다. 민주주의는 선택할 수 있는 생활양식이고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개념이 단순하다는 것이지만 급히 덧붙이자면 단순하다는 것은 거짓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그러나 일상언어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일상언어는 보통 사회과학과 철학의 전문화된 언어보다 다른 방식으로 더욱더 복잡하다. 기술적인 용어들이 특수하고 분명하게 규정된 의미들만을 가리키리라 가정된다면, 일상언어의 단어들은 일상언어 사용법의 무질서한 역사의 엄청난 복잡성을 지고 있다. 어쨌건 일상언어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이고 따라서 우리 양식을 만드는 언어이다. 민주적인 담론은 그것이 민주적이려면 이런 언어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적인 담론은 높은 철학수준이나 책을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데 쓸 수 있는 전문가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되지 않아야만 한다. 이것은 지적 능력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불가지론이라 생각하며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사유의 기획이 양식의 수준에서, 그리고 양식의 언어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양식의 언어는 민주적인 사상을 만드는 기획을 진행하는데 적절한 수단이고 수단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면 민주주의자일까?”


종종 우리는 효율적인 것이 생산하고자하는 효과에 의존해서 달라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까먹는다. 최소의 노력이라는 원리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리고 소외된 임금노동처럼 우리가 목적을 사랑하고 수단을 증오하는 상황에 가장 잘 적용된다. 이것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랑을 나누고 춤추고 이야기를 하고 숲을 산책하는 것처럼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얽혀있는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친구들과 운동하거나 맛있는 식사를 먹는다면 그것을 가능한 짧은 시간에 끝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이런 것과 비슷한 많은 활동들이 있고 적절한 시간동안 적절한 노력을 들이는 경우에만 가장 효과적인 일들이 있다. 이런 활동들은 대체로 어느 한편 때문에 나빠진다.”


자물쇠처럼 산업생산의 기계화 역시 인간관계의 물화이다. 산업혁명이 생산설비의 혁명 이상이라는 점은 상식이다. 즉 산업혁명은 일의 조직화에서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단지 새로운 기계가 새로운 작업방식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이 혁명은 새로운 기계가 일을 새로이 조직하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감소시키려는 의도로 설계되었음을 뜻한다. 나는 노동분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산업혁명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천이었다. 한 노동자가 도자기를 굽고 다른 사람은 농사를 짓고, 또 다른 이는 고기를 잡고, 옷을 짓고 나무를 패고 대장장이 일을 하는 분업은 각 노동자 또는 노동자들의 공동체나 길드가 예술적인 수준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한다. 이런 류의 전문화는 제조업의 물건보다 더 많은 양의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전문화는 전통과 노래, 이야기, 예술적인 감성, 장인의 자부심을 가진 특정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 평생을 그런 일에 바친 노동자는 숙련된 농부나 전문 도자기공, 전문목공이 된다.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그 사물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가르치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다. 춤을 추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섞이게 된다.”


많은 맑스주의자와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모리스를 낭만적인 공상가나 비과학적인 사람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의 과학에는 잘못이 없다. 모리스가 기술결정론자가 아닌 점은 분명하다. 모리스에게 기계와 기술은 인과관계에서 그것이 구현될 사회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와 기술은 그 사회의 기능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고 그 사회의 에토스(ethos)에서 특징을 띠게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회는 각기 다른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모리스에게 자유로이 일하는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노동의 기술을 선택할 것이고 이 기술은 노동자에게 최대한의 권한과 즐거움을 준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모리스를 공상가로 여긴다면 모리스는 분명히 맑스-레닌주의자를 어리석게도 핵심을 놓친 경제개발론자들이라 비난할 것이다.


정치는 인간이 그들의 집단적인 삶을 선택하고 함께 건설하는 활동이다. 이 선택이 선택이지 않다고 속이는 기술결정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자치수단 중 하나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반(反)정치적이고 반(反)민주적이다. 이런 물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치”는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정치적 환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즉 이 정치는 진정 중요한 선택―이 선택은 민중의 삶의 질과 그 공동체의 질서, 그들이 지배당하는 방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부차적이고 사소한 종류의 일들만을 결정하는데 집중한다. 이 정치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정치이고 전혀 정치가 아니다. 장소없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지금 세기에 우리가 계속 지불해온 정치적인 가격을 뒤흔들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진정 선택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선택할 시작할 것이다.”


기술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그 기술이 동반하는 정치를, 즉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량소비를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대량생산과 관리되는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공장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관리되는 과두정치와 사회적 불평등을 선택한다. 다른 한편 관리자와 노동자를 분리시키는 불평등과 대가와 도제를 분리시키는 불평등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관리자/노동자의 관계는 (맑스가 지적했듯이) 군대에서 장교/사병의 관계와 아주 가깝다. 아주 드문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는 결코 관리자가 되지 못하고 관리자는 결코 일을 하지 않는다.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자동차의 대량생산은 하나의 선택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기술“진보”의 혜택과 불가피성을 강하게 믿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자동차가 문명에 강요했던 엄청난 변화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고, 그러했다(예를 들어 정부가 철도와 다른 공공교통수단에서 고속도로 건설로 재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를 알았다면,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오염물질이 대기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가 고속도로의 자동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석유전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았다면 사람들이 엄청난 고속도로 건설에 찬성했을까? 이 세기가 끝나면서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와 일본의 토요타에서 어떤 삶이 선호될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자동차를 선택했을까? 글쎄, 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안다.”


내가 일본에서 온 학생들과 핸포드 핵저장소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이 시설을 둘러보며 짧은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히로시마의 날에 방문하도록 여행시간을 잡았다. 안내인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을 만들기 위한 핸포드의 충돌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과 그 폭탄이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핸포드와 리치랜드에서 벌어진 축하의식을 건너뛰었다. 전쟁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안내인은 원자력의 안전성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했다. 핵폐기물이 안전하게 매장되지는 않을지라도 위험기동안 세심하게 관리된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손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폐기물이 2만 5천년 동안 위험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누가 관리하나요?”

물론 미국 정부죠.”

당신은 2만 5천년 동안 지속된 정부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안내인은 화를 내며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고 대답을 거부했다. 분명히 그는 내 질문에 애국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는 내가 바보와 얘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핵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씩 자신들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안들에 참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안내인이 약간의 상식도 없이 내 영역인 정치의 장에 간섭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농부들이 기술과 사회적 목적간의 수단-목적 관계를 바로잡는 방법에 주목하자. 그들의 구호는 “생산성”이 아니라 “자립”이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가장 발전된 하이테크 농기구라면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도입하고 이런 농기구들이 어떠한 생산관계와 사회적 틀을 만들든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싶은 유형의 공동체(자립 공동체)로 시작하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농사기술을 찾았다. 이런 입장은 정말이지 도구를 통제하고 도구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설탕노동자나 쌀농사를 짓는 소농이 진정한 토지개혁 없이 이런 목적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정부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땅을 주는 걸 거부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그들은 네그로스에서 이런 실험들을 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지주들의 정부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자립하는 농부들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가장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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