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이 지났건만 천안함이 침몰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고 남북한간의 긴장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긴장을 완화하는데 앞장서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이런 긴장을 부추기는 일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 김정일 추종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안함의 재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라며 천안함재건조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행히(?) <한기총>이 당장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침몰의 원인이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나더라도 무력응징만큼은 피해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무력응징을 제외한 모든 단호한 대응을 총동원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기총이 참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들은 공공연히 "김정일 단죄", "북한이 도발시 북한의 잠수정, 잠수함 기지를 공격", "한반도는 지금 총성없는 전시상황"이라고 외치고 있다. 평화의 사도여야 할 기독교인들이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이런 집회에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모순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간의 동서냉전이 한창일때, 미국에서도 종교인들이 '정당한 전쟁', '핵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곤 했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며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머튼 신부가 적극적으로 글을 쓰며 평화를 외치자 가톨릭 신부들이 머튼을 비판하기도 했고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대수도원장)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든 핵전쟁, 그리고 꼭 핵무기가 아니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도시와 인간과 국가와 문화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은 극히 중대한 범죄행위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상적인 도덕률에 의해서도 금지되는 행위"라고 믿었던 머튼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머튼의 평화론](분도출판사, 2006)은 그가 쓴 평화에 관한 여러 가지 글을 담고 있다.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한 머튼의 경고"라는 추천사처럼 머튼은 암울한 냉전 상황 속에서도 평화의 빛을 놓치지 않으며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무기를 써서라도 공산주의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어떤 무기가 있더라도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전쟁에서건 평화에서건 그리스도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머튼이 얘기하는 그리스도적 양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지닌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우리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말고 외부의 공산주의나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지만 우리 내부의 파시즘과 집단주의에도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파괴적인 전쟁무기가 아니라 "'성령의 칼'에 대한 믿음"과 "기도"이다. 이 양심과 믿음, 기도를 잃어버렸기에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에서 "예외적 폭력이 정상이 되었고 정상적 자비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머튼 신부는 짧은 17편의 글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이 전쟁을 지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요즘 한국에서처럼 전면전이 아니라 제한된 전쟁을 벌이면 어떠냐는 주장에도 머튼 신부는 전쟁을 소규모로 제한하는 것이 전쟁을 아예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제력을 필요로 한다고 꼬집는다. 그렇게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전쟁을 없앨 것이지 왜 제한전을 벌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
전쟁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려는 욕구와 태도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어떤 대가를 치뤄서라도 반드시 적국을 없애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머튼 신부는 이렇게 꼬집는다. "
우리가 자유와 권리와 인간적 진실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무책임한 행동과 흥청대는 삶과 돈벌이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게 무엇인가? 우리의 종교인가 우리의 물질적 부인가? 아니면 종교와 돈을 우리가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어서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한국의 종교계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 너머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튼 신부는 우리 속에 내면화된 "도덕적 차원에서의 거의 완전한 수동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사회적․정치적․군사적 영역에서의 악마적 능동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 당국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더욱 안이하게 판단하는 맹목적 믿음"을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머튼 신부는 신앙과 정치를 나눠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발언"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이 투표장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야만 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진리를 자기희생―오해와 불의와 비방과 심지어 투옥이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으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바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노동문제든, 인종 문제든, ‘제3세계 문제든, 국제문제든 간에 모든 영역에서 정의를 위해 쉴 새 없이 투쟁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은 우리 내면의 깊은 종교적 원칙과 부합되어야 한다. 신앙과 정치를 더는 별개의 영역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조금 위험한듯 보이지만 머튼 신부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랑과 평화라는 종교의 원리가 연대와 정의라는 사회의 원리와 무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머튼 신부의 뜻은 지금 한국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종교계의 입장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뜻은 한반도 전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 더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를 위협하는 다양한 흐름에 맞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켜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머튼 신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을 위해 아직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재빨리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좌파와 출파: 역사의 이단은 어떻게 등장하나?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과 『민중과 유토피아』(역사비평사, 2009)를 읽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역사학자 조경달은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이 자율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을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과 혼동”하면 안 되고 “민중이 자신들의 생활주의에서 비롯된 고유한 문화와 논리를 가지는 이상, 비록 지식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였더라도 그 운동에는 자율적인 측면이 많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증거로서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과 동학, 3․1운동 등 각지의 민중반란을 분석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조경달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근대사가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향해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조경달의 목소리를 빌리면, “유토피아와 현실의 국가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국가는 민중의 유토피아사상을 배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은 근대국가의 창설이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과거, 그리고 현재까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부터 제기되는 중요한 의문, 즉 민중의 입장에서 근대=국민국가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조선 근대사의 맥락에서도 제기해야만 한다. 아직도 통일국가를 실현할 수 없는 회한에 가득 찬 조선의 현실은 자칫하면 국민국가를 이상화理想化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러한 불행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조선은 유토피아로서 국가의 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민중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냉정히 바라보는 지평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경달은 『이단의 민중반란』에서 갑오농민전쟁을 꼼꼼히 분석한다. 최제우의 원시동학과 최시형의 정통동학이 만든 체계의 틈에서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의 이단동학이 자라고 민중들은 이에 열광한다. 조경달은 흔히 갑오농민전쟁의 성과로 알려진 집강소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제로는 ‘관민상화’의 산물, 즉 힘을 잃은 공권력이 반란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본다. 결론을 보면,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민중이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기는 했으나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다고 분석한다. “변혁의 주체를 단 한 사람의 초인적 진인=구세주에서 총체적인 민중으로 확대하고자 한 것이야말로 동학의 획기적인 면”이지만 국왕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근대에 저항하는 반근대적 변혁지향을 품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에서 다양한 정치적 계기들을 만나게 되는데, 조경달은 임술민란이 민란시대를 알린 신호탄이라 얘기한다. 조경달은 수령구조에서 소외된 몰락양반이나 향촌 지식인들이 ‘덕망가적 질서’를 갖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덕망과 정의감이 있는 사족이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들에 의해 향촌의 질서가 조화롭게 재생하기를 기대하는 심성”을 가진 민중이 이들과 함께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꿨다고 본다.


임술민란이 일어날 당시 전라좌도 3읍 암행어사였던 김원성金元性은 이런 보고를 남겼다고 한다. “호남(전라도)의 여러 읍에는 출파出波와 좌파坐波의 명맥이 있는데, 모두 향유鄕儒 가운데서 문자를 조금 해독하고 자못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관정官政을 살펴 득실을 논하고 시비를 말하며 잘못을 기꺼이 비방한다. 앉아서 지휘하는 자를 좌파라 하고,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경향京鄕으로 출몰하는 자를 출파라 한다. 이번 여러 읍의 소요는 (사람들이) 관리의 가혹한 정치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른바 수창자首昌者는 출파나 좌파와 같은 자들이다.”


흥미로운 기록이다. 반란의 수장인 출파와 좌파라. 이 구절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시대에 스스로를 좌파라 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중들 사이에서 조그만 권력을 가진 그들은 외국의 급진적인 이론을 수입하기에 바쁘고 권력을 비방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분주하게 일하며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하지만 좌파들은 ‘앉아서 지휘’하고자 한다. 자신들은 큰 판을 읽으며 마치 도박바둑을 두듯이 말을 움직이려 한다. 저만큼 떨어져서 보면 크게 읽을 수 있겠지만 가까이 가서 두루 살피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정통이 필요하지만 이단도 필요한 것은 현실의 층이 다양하고 사람들의 삶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며 온갖 동네에서 출몰하는’ 출파가 필요하다.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출파들은 곳곳에 반란의 씨앗을 심고 기운을 일으켰다. 출파와 좌파의 힘이 모이고 민중들이 함께 꿈틀거리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허나 모두가 앉아서 지휘하려 들면, 자연히 분란이 생기고 망할 수밖에 없다. 분란과 갈등이 생기는 건 부정적이지 않지만 앉아서 지휘하는 자들의 분란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좌파만 수두룩하고 출파는 거의 없거나 인정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이단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좌파들은 더불어 꿈꾸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걱정일까, 아니면 함께 하길 싫어하는 천성일까? 혼자 고고한 삶을 추구하다보니 ‘명망’은 높지만 ‘덕망’은 낮다. 똑똑하고 말을 잘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좌파가 하지 못한다면 출파가 그런 역할을 보완해야 할 터인데 좌파는 넘쳐 나지만 출파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거듭 반란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출파의 모습을 풀뿌리운동에서 본다. 풀뿌리의 힘이 강해질수록 이단의 힘도 강해지고 새로운 반란이 싹을 틔울 수 있다고 믿는다.


출판계에 불고 있는 ‘노무현 1주년’
[주목! 이 주의 책] ‘노무현이 꿈꾼 나라’ 외
2010년 05월 23일 (일) 00:12:00 민임동기 기자 gomdori@pdjournal.com

‘운명이다’ (노무현재단 지음 / 유시민 정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년을 맞아 관련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명이다〉는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한 ‘사후 자서전’입니다. 노 전 대통령 어린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고인의 솔직한 생각이 잘 정리돼 있습니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굵직한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노 전 대통령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간과 풍경’들이 이 책 한 권에 잘 집약돼 있다고 보면 됩니다. 기록을 일관된 문제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습니다.

   
〈운명이다〉는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여보 나 좀 도와줘〉가 노무현 전 대통령 초기 저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운명이다〉가 주는 의미는 상징적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자서전’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움을 느꼈습니다.〈여보 나 좀 도와줘〉와 〈운명이다〉가 발행된 시간 차이는 꽤 있지만, 고인의 생각과 가치관 등은 놀랍도록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운명이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룬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서거 1주년’을 맞는 시점에 〈운명이다〉가 주는 울림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문재인 외 / 오마이북)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는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문성근 문재인 이정우 정찬용 정연주 도종환 박원순 등 10명의 사람들이 노무현을 추억하는 책입니다.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담긴 시대정신을 되새긴 책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 때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정치인을 비롯해 언론인, 시민운동가, 배우, 시인 등 대중적인 지식인들이 ‘노무현의 가치와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 광주 등에서 열린 1기 ‘노무현 시민학교’ 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어서 대화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어체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평가 등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진보의 미래 그리고 시민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이 책의 저자들은 저마다의 의견과 해법을 내놓습니다.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건 ‘공통적’입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노무현’보다 ‘시민’인지도 모릅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 (이정우 외 33명 지음 / 동녘)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앞의 두 책 보다는 ‘학구적인 냄새’가 나는 책입니다. 고인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중단된 연구들을 ‘남아있는’ 학자들이 이어가자는 의미로 발간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앞서 발간된 2009년 11월에 출간된 〈진보의 미래〉 후속편이기도 합니다. 전작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꾸고 구상했던 ‘진보’에 대한 생각이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점에서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수십 명의 학자들이 ‘고인’의 구상과 물음에 대한 답인 셈입니다.

저는 〈노무현이 꿈꾼 나라〉와 같은 책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집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것도 좋지만 ‘그’가 이루려 했던 여러 정책과 구상들에 대한 평가와 한계 등을 학자들이 ‘후속작업’을 통해 이어가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집필자에는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지식인은 물론, 참여하지 않았던 학자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학자들까지 저자로 참여한 것이 눈길을 끕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참여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와 비판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해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언급된 화두와 이슈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을 형성하고 있네요. 우리가 아직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다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2명의 행동하는 지성들이 모여 현 단계 민주주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모색한 책입니다. 2009년 11월과 12월, 휴머니스트와 오마이뉴스 공동으로 민주주의 특강을 준비했는데 이때의 강의를 모아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김상봉, 김종철, 김찬호, 도정일, 박명림, 박원순, 오연호, 우석훈, 정희진, 진중권, 한홍구, 홍성욱 등 익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식인들이 강연자로 나섰습니다. 이들은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더 나은 세계를 향해서’ 시민들이 어떤 사유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지를 고민했습니다. 때문에〈다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 대한 저자들의 진단과 다양한 상상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그렇게 긴밀한 연관성이 없는 책인데, 읽다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1주년’ 관련 서적들과 내용적으로 무척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앞에서 소개한 책에 필자로 참여한 분들도 일부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많은 대중적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그만큼 비슷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하승우 유해정 지음 / 북하우스)

6·2 지방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 욕하시는 분이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는 “정치, 욕만 하지 말고 직접 해보자”고 주장합니다. 실제 이 책 곳곳에는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정보가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도시생활자들을 위한 정치 실전 매뉴얼’이라고나 할까요. 암튼 이 책, 여러 가지 면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사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무조건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만 하는 건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경우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적극적이고 현명한 정치 참여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정치제도에 도시생활자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부터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을 찍을까를 망설이는 유권자들에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고민이 앞서야 한다고 조언하는 식이죠. 대의명분이나 가치 이런 걸 떠나서 나의 욕구를 대변할 후보를 찾는 게 우선이라는 겁니다.

언론에서는 정치에 대한 비난과 저주가 판을 치지만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에서는 이런 부분은 잠시 논외로 합니다. 대신 당원이 되면 주로 무엇을 하는지, 후원을 하거나 자원활동을 해볼 만한 시민단체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고를지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론 만들기와 언론사에 제보하기, 정보공개청구하기 등의 짚어주기를 비롯해 동네 예산과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복지관 등에 직접 참여하고 또 부당한 정치에 맞서는 길도 소개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한 단계별 방법을 통해 당장 실천해볼 수 있는 가이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든 내용을 총 망라한 ‘백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시민의 역할과 권리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네요.



시민의 손으로 건강한 동네 일꾼을 뽑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책선거, 좋은 후보, 좋은 정책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만 공천 결과를 놓고 보자면, 결국 후보자 검증은 정당이 좌지우지 하고 그 뒤에는 국회의원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반면, 유권자들도 정치에 냉소적이다. 정치 참여를 색깔론으로 규정하고 좌파 또는 우파로 보는 시각은 물론 정치꾼으로 인식하는 시선은 생활정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한다.

밥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생활이 곧 정치지만 정치인, 유권자 모두 ‘먼 나라, 먼 얘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주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란다에 플라스틱 화분을 놓고 흙을 깔아 씨앗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정치참여를 실천하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도시생활자
활동가 부부가 펴낸 정치백서 화제

“도시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치솟는 전세값에 마음을 꺼멓게 태우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데도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돈은 술술 어딘가로 샌다. 열심히 사는데도 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질까?

나만 힘든 거라면 그럭저럭 참겠는데 우리 아이들의 삶도 행복하지 않다. 갓난쟁이들에게는 아토피가 끊이지 않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안전사고가 심심찮게 터진다. 아이들 갈 곳이 마땅치 않고,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느니,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도시 생활자로 살아가는 하승우·유해정 부부(수지구 상현동)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신개념의 정치실용서를 썼다.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 평론하거나 이론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적극적이고 현명한 정치 참여를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은 선거부터 정당 가입과 엔지오 활동까지, 여론 만들기부터 직접 맞서기 등 정치적인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들을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고민하면 정치가 시작된다는 기본을 되새기게 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고민이 시작되면 짜증나는 정치를 바꾸고 민주주의 곧 정치참여가 밥을 먹여주고 자존심을 회복시킨다고 말한다. 또 헷갈리는 각종 선거를 정리해주며 선거 후 정치인 모니터링 방법, 동네 조례 제정 방법, 마을 예산 쓰는 방법 등을 짚어준다. 또 정당 정치 활동 방법과 정당 공천 과정 매뉴얼이 안내된다. 이어 동네 예산과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복지관 등에 직접 참여하고 부당한 정치에 직접 맞서는 방법도 일러준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찾는 단계별 방법을 통해 생활정치 참여 실천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풀뿌리지방자치 활동을 하는 남편과 인권단체 활동가로 사는 부인이 함께 만들어 더욱 뜻 깊다는 하승우·유해정 부부는 “나와우리 가족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이 나라가 조금 더 정의롭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며 “내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가끔씩 마을 작은 도서관에 들러 책 읽는 모임을 만들고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 환경단체에 가입하는 생활, 네이버에서 콩메일을 보내거나 블로그에서 블로그씨의 질문에 답을 달면 생기는 콩 한개를 단체에 기부하는 것, 공동육아에 참여해 친환경급식을 하자는 서명을 하고, 생협 매장에 들러 유기농 빵을 사고, 시골 할머니들이 모여 지역재료 반찬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을 이용하며 재활용품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주말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원활동가로 사는 일…그것이 잠재된 정치의 싹이다.

세상을 바꾸는 도시생활자의 정치는 특별하지 않다. 이들 부부 역시 7월이면 태어나는 솔랑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살만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펴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우리 부부에게도 중요한 과정이다. 함께 하면 좋겠다.”



>> 하승우(40)는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정치를 접한지 이제 20년 이다. 정치를 공부하는 것보다 정치적인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주로 고민한다. 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아나키즘’ 등을 지었다.

>> 유해정(36)은
인권연구소 창, 인권재단 사람에서 활동하고 있다. 딱 3년이라며 시작한 인권운동이 어느새 10년을 넘었다. 벗들과 함께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면 꿈. 이권이 인권으로 둔갑하고, 노력과 열정이 쉬이 무로 돌아가는 세상이 안타깝고 버겁지만 꿈꾸며 행동할 때에만 희망과 행복을 품을 수 있다고 믿는다.


[Book pick-up] 정치가 밥 먹여 준다 정말로~ 515호

정치가 밥 먹여 준다 
정말로~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하승우, 유해정 지음
북하우스 펴냄
1만 3800원

 

Book mark 
‘찌질한’ 것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사는 건 얼마나 굴욕적인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거대한 부정에는 눈을 감으면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 소시민이 된다.
 (p. 65)  

 

       


대학에 다닐 때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이 부담스러웠지만,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전공 수업이 폐강되거나 수업의 질이 떨어질 만큼 많은 인원을 한 강의실에 몰아넣어도 그러려니 했다. 내 일인데 꼭 남의 일 같은 느낌…. 등록금은 ‘당연히’ 갖다 바치면서 자신이 대학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학점 관리, 동아리 활동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굳이 복잡한 문제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바뀔 수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욕하기도 귀찮아 냉소로 일관할 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를 읽다 다음과 같은 문장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처럼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이에 정치인들은 시민의 돈과 시간을 자기들 마음대로 쓴다. 국민의 세금을 마치 자기 집 곳간처럼 마음대로 빼다 쓴다. 그런데도 정치가 내 일이 아니라고?” 그 다음에는 이런 문장들이 이어진다. “만일 정치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라면 세금도 내지 말고 군대도 가지 말라. 열심히 일해서 왜 남 좋은 일을 시키나. 군대 가서 열심히 복무하며 왜 엉뚱한 사람들을 지켜주나?” 

 

 

 

정치가 뭐임?
선거철만 되면 ‘국민의 머슴’을 자처하며 선거판에 뛰어드는 정치인들. 그런데 당선이 되고 나면 ‘국민의 머슴’이 아니라 ‘국민의 상전’으로 군림하신다. 쌈박질에 큰소리는 기본, ‘니들이 잘 몰라서 그래’라며 오히려 국민을 가르치려 드신다. 게다가 어느 머슴이 시키는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주인 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가.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에서는 우리가 머슴들을 그렇게 거만하게 만들었으니 스스로 반성하며 이제 제대로 된 주인 노릇 좀 해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려면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할 게 아니라 아주 잘 알아야 한다. 이 책에는 정치인들에게 빼앗긴 국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담겨 있다.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 정당 가입, 엔지오(NGO) 활동,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를 활용한 여론 형성, ‘시민의 불복종’을 주장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직접 맞서기…. 어렵지 않다. 혼자 뛰어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테지만, 여럿이 힘을 모으면 변화를 위한 발판이 된다. “행복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의식이나 준법정신, 근면함과 성실함이 아니라 바로 정치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해결하는 과정이며, 나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행복의 조건을 실현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같은 마을에서 한편에는 재물이 썩어 넘치고 다른 편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잘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먹고살기 급급하다는 이유로 뒷전으로 미룰 게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게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란 말이다. 


평균 재산 35억원이라는 정치인들이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얼마나 가슴 깊이 헤아릴 수 있을까? 다른 세대에 비해 투표율이 눈에 띄게 낮은 20대를 위한 정책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려고 할까?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6월 2일 지방 선거에 현명한 한 표를 던지자. “그래도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지금 책을 접는 게 좋다.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고 평생 사장님이나 상사에게 치이고 평생 국가에 ‘삥 뜯기며’ 살아도 좋다면 말이다.” 이 문장들을 읽기 전까지 ‘삥 뜯기는 줄도’ 모른 채 살아왔다. 맙소사!

 

민주주의는 생활방식이자 삶의 과정이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에서도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민주적으로 살지는 못한다.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스스로 정치과정에 참여하려는 시민이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한다. 따라서 민주시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최근 한국사회의 중요한 화두도 민주주의이다. 선거로 대통령, 국회의원, 시장을 뽑는 한국에서 새삼 민주주의가 화두로 되는 건 민주시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가 민주시민의 등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자연스레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는데, 경쟁에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그런 성장이 어렵다. OECD 가입국가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하지만 가장 불행하고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무관심과 냉소가 생기기 쉽다. 대다수의 국민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고 4대강 사업을 찬성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에서는 민중의 지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라는 부제를 단 손석춘의 책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 2010)도 그런 목소리 중 하나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묻는다. “대다수 한국인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권자가 된 어느 날부터 투표를 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누군가에게 꼭 뒤눌려 살아가며 삶을 마감합니다. 씁쓸하게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그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일까요.”


청년들이 스펙을 쌓느라 정신을 놓아버린 시대에 지은이는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주권자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지은이는 “자기계발의 ‘제1과 제1장’이 왜 ‘민주주의 학습’인지, 민주주의의 빛깔을 묻는 게 왜 우리 개개인의 자아실현과 직결되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기에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 또는 법치라는 고답적이고 식상한 틀로 분석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난해한 이론을 다루지도 않”겠다고 얘기한다. 그런 원론적인 얘기보다는 “민주주의란 우리 개개인의 인생과 직결된 ‘삶의 문제’라는 데서 출발”하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생생한 보기를 들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풀어”가겠다고 얘기한다.


그래서인지 지은이는 먹고 사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 대화나 타협보다 싸움과 갈등이 필요한 이유 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지은이는 정치의식이나 주권의식이 저절로 생기지 않기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과 현상에 관해 공부하며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결론적으로 지은이는 7가지 습관을 익히자고 제안한다.


“1. 민주주의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진실에 눈떠라.

2. 사람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세력과는 싸워라.

3. 신문-방송의 틀을 벗어나 대화하고 토론하라.

4. 직업 정치인이 정치를 독점하도록 방관하지 말라.

5. 생계 차원을 넘어 창조적 경제생활을 하라.

6. 단 한 번인 자신의 인생을 주권자로 살아가라.

7.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연대하라.”

손석춘의 말처럼 몸에 익은 습관이 될 때에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아쉬움도 많이 느끼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독자에 대한 고려가 아쉽다. 정말 불안한 청춘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다면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들을 소재로 삼아야 할 텐데 그런 소재들을 보기 어렵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프랑스혁명, 동학농민혁명, 4월혁명, 80년 5월의 광주항쟁, 촛불항쟁 등 민주주의와 연관되는 주옥같은 사건들이 다뤄지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사건과 지금 현실을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건들은 청춘들에겐 ‘그냥 역사’일 뿐이다.


손석춘은 “민주주의를 굳이 자기계발의 맥락에서 제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 아는 이야기’로 여기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밋밋하게” 느낀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정말 다 아는 이야기일까? 현실을 사는 청년들은 밋밋해서가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니기에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김순천의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동녁, 2009)에서 학교를 떠난 한 소녀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는 아저씨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단다. “아저씨는 커서 된 게 그거예요?” 왜 이렇게 물을까? “할 말 없잖아요. 그쪽은 다 큰 거고, 우리는 크는 중이니까. 우리는 아직 꿈도 있고 나이도 어리잖아요. 아무리 눈에 안 좋게 보여도, 저희도 사람이니까 의견을 존중해줬으면 해요.”


그러니 진짜 문제는 청년들의 밋밋함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생각하는 청소년들을 학교 밖, 사회 밖으로 내몰고 냉대하는 기성세대의 관점이다. 청소년들이 민주적으로 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극히 성인 중심, 기성사회 중심이기 때문에 미래의 민주주의는 불안하다.


2010년 3월 10일, 대학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김예슬의 『김예슬선언』(느린걸음, 2010)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비민주적인 체제를 떠받쳐 왔다고 고백하면서 김예슬은 그 체제에서 벗어나 거부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반면에 기성세대는 이 선언에 묵묵부답이다. 그러니 자신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는 기성세대야말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김예슬의 얘기를 들어보라. “대학거부 선언 이후 많은 중고생, 대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지금 대학 1학년생들은 고교시절 촛불집회를 경험한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이 공통으로 호소했던 말이 있다. “명박산성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부모산성 뛰어넘기’에요.”


김예슬이 특별한 사람일 수 있지만 많은 대학생들의 자기고백이나 공감이 뒤를 잇는 걸 보면 이미 청춘들은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과거의 역사보다는 지금 그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혁명가’를 원한다. 새로운 혁명가들이 계속 탄생하려면 그들에게 책을 안겨줄 게 아니라 혁명에 쓸 무기를 줘야 한다.

인간승리로 연출되던 한 편의 드라마가 그 참혹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음모와 조작을 얘기하며 실날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결론을 완전히 되돌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집에 TV가 없는지라 나는 그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가 아니기에 줄기세포복제라는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 사실여부를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이야기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제라는 자연적 한계를 넘어선 인위적인 기술에 대해 우리는 왜 그리 열광했고 아직도 그 흥분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걸까? 과학적인 논쟁이어야 할 기술에 관한 논란이 왜 영웅과 역적이라는 경계에 갇혀버린 걸까? 왜 아직도 내가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걸까? 책 속엔 정말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현명함이 담겨 있을까?



대중은 왜?


줄기세포 실험을 위해 스스로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심지어 자신의 딸들에게도 기증을 권하겠다는 놀라운 발언들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약물을 복용하고 신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하는 난자기증은 어느새 도덕적인 이타성의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기증에 반대하거나 복제기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네 가족이라면…”이라는 위험하고 당위적인 가정과 ‘국익’을 앞세운 국가주의 논리 앞에서 그 비판의 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 지나친 애정은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열풍이 무참히 짓밟았던 가냘픈 인권의 논리를 떠올리게 했다.

대체 이런 열광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났을까? 소위 냄비근성은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유전적인 요인일까? 20세기 파시즘의 시대를 살았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이 물음에 답하는데 평생을 바쳤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얻은 듯하다. 라이히는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 그린비, 2005)이라는 발칙한 제목의 글에서 “6천 년이나 된 낡은 가부장적­권위주의적 문화를 재생산하는 오늘날 인간의 성격구조는, 자신의 내적 본성에 대항하여 그리고 외적인 사회적 불행에 대항하여 성격적으로 무장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얘기한다. 이 말에 따르면 무엇에 냉소하거나 열광하는 우리의 본성에는 그렇게 하게끔 만드는 어떤 구조적 요인이 잠재되어 있고, 그 요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이런 화두를 고민하던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6)에서 연구를 더 진척시켜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그 성격구조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즉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다 보면 몇 가지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한 수준에서 고만고만한 비판을 하는 한국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호쾌한 비판이 있고 지금 우리 사회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성과 관련된 얘기를 공개적으로 다루지 않으려는 한국사회, 그러면서도 성을 팔고 사는 행위가 묵인되는 한국사회, 제대로 된 피임교육이나 성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한국사회, 성적인 일탈이 온전히 개인의 성향 탓인 양 전자팔찌만 채우면 안전하리라 믿는 한국사회야말로 라이히의 분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릴 적부터 강요되는 성적인 불만족은 왜곡된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기에 성적인 억압이야말로 사회적인 억압과 열광의 자원이다. 라이히의 ‘성경제학’은 어려운 정치경제학보다 더 명쾌하게 변태적이고 기형적인 한국사회를 분석한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제자였으나 정신분석학계에서 배척을 받았고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나 공산당에게 버림받았던 라이히는 결국 미국 땅에서 미국연방수사국(FBI)이 아니라 식품의약국(FDA)에게 기소되어 감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쳐야 했다. 이런 경력에서 드러나듯 라이히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자신의 현실과 치열하게 맞섰으며, 도덕적 엄숙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당시의 좌파들도 강하게 비판했다. 라이히가 보기에, 파시즘의 성장은 그것을 가능케 한 심리적인 구조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기존의 자유주의 이론이나 맑스주의 이론들은 이런 심리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파시즘에 대한 원론적인 비판에 머물렀다. 즉 이들은 “대중들이 지닌 심리 구조의 본질과 그것이 유래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깨닫지 못했다. 자연히 좌파는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무능력한 좌파, 지금 우리 눈앞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리들이다.

또한 흔히 얘기되는 것과 달리 라이히는 파시즘이 대중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면서도 대중을 매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강한 희망을 품었던 민주주의자였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성장시킨 원동력이 대중이고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범죄자처럼 고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대중의 그런 열광은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억압 받아온,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본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라이히가 대중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이 대중을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파악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라이히는 대중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파시즘을 막을 수 있는 대중의 능동성이 살아나려면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라이히는 권력과 진실이 서로 대립한다고 보면서 국가의 해체와 사회적 자치야말로 대중의 역량을 부활시키는 핵심적인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대중에 대한 공포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상의 파시즘 이론가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똑같이 대중을 논해도 그 애정의 깊이가 다르다.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의 엘리트가 이끄는 사회변화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대중의 열광은 이성적인 설득이나 계몽적인 질타가 아니라 대중의 자율적인 결정과 책임의식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만족되지 못한 열정은 대리만족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리만족은 이제 그만!!!



자율적인 판단을 가로막는 교육과 정치

라이히는 독일 파시즘이 대중심리를 장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길들이려 노력했다고 봤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체계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고 타성에 길들여지는 법을 배운다. 가장 열려있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려야 할 시기에 청소년은 학교와 학원이라는 감옥에 갇혀 규율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러니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소통수단 역시 댓글 문화에서 드러나듯 개인의 왜곡된 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누리꾼의 세계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듯하지만 사실 그 강함은 판단의 왜소함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거리의 철학자’라 불렸던 김상봉은 『도덕교육의 파시즘』(도서출판 길, 2005)에서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성되는 존재이기에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도덕교육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세우고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의 도덕교육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따르는 민족,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였고, 그런 장치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도덕을 암기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김상봉은 “한국의 도덕 교과서의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우리는 그것을 주저없이 노예도덕과 파시즘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우리네 도덕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파시즘적인 이타성을 가르친다. 물론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남을 돕는 이타성이야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의 몸과 정신을 초개처럼 바치는 이타성은 파시즘의 주요한 자원일 뿐이다. 따라서 이타성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율적인 판단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상봉의 말처럼, “모든 자기부정은 보다 확장된 자기긍정을 위한 것이 아닐 때 그리하여 자기부정이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일 때, 그것은 노예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노예도덕은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넘어 실체화된 국가를 위한 희생과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변신한다.

특히 억압적인 노예도덕은 이질적인 목소리를 참지 못한다. 언제나 질서(뛰지 말 것)와 정숙(떠든 사람 이름적기), 통합(뭉쳐야 산다)을 강조하는 교육은 갈등과 시끄러운 토론,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정치야말로 만남과 토론을 전제하는 영역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서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인데, 한국의 교육은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철저히 차단하고 ‘중립성’을 칭송한다. 결국 중립이라는 명목하에 청소년은 자신의 의견을 가지지 않고 시키는대로 복종하는, 아니면 무조건 거부하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논리에 길들여지게 된다. 이처럼 한국에서 파시즘은 학습되고 있다.

어찌 보면 수능이 교육의 100%를 차지하는 한국사회는 노예를 양산하는 교육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사회학자 김덕영의 강력한 표현을 빈다면, “한국의 교육부라는 파쇼적 집단은 학생들에게 위에서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틀과 도식 안에 자신을 철저하게 가두라고 다그친다. 그리고 철저하게 복종하라고 다그친다. 교육부장관을 교주로, 교육방송을 성전으로, 수능강사를 성직자로 그리고 수능교재를 경전으로 받들지어다!”(『위장된 학교』, 인물과사상사, 2004)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수동적이고 자기억압적인 본능구조를 확립하는 것은 교육만이 아니다. 그 엄청난 진부함으로 언제나 강력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정치도 톡톡히 한 몫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에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를 공급하는 한국의 지식인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뉴(new)’, ‘신(新)’이라는 접두어를 달지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식상한 담론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새로움은 마치 권태로움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권태롭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어찌보면 그 권태로움이야말로 대중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기를 바라는 세력들의 치밀한 계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팩스턴(Robert O. Paxton)은 『파시즘』(손명희, 최희영 옮김, 교양인, 2005)에서 독재자의 이미지보다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위기감을 조장하고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몰락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극하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공동체를 정화해야 한다는 믿음, 타고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파시즘은 이런 감정적인 분위기를 자극할 뿐 아니라 냉정한 계산과 현실판단을 이용했다. 즉 “파시스트들은 중도파와 보수파의 무능력을 잽싸게 이용해 대중정치를 파악해 들어갔다. 명망 있는 거물들이 대중 정치를 경멸하는 사이, 파시스트들은 대중 정치를 이용해 좌파에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민족주의를 널리 선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파시스트들은 흥미진진한 정치적 볼거리를 만들어내고 능숙한 홍보활동을 펼쳐 대중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준군사 조직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대중의 규율을 잡았으며, 마침내, 승패가 불확실한 선거 제도를 없애고 가부만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로 대체했다.” 팩스턴이 분석하고 있는 파시즘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지지보다 정치적 “양극화, 교착상태, 내·외부의 적에 대항한 대중 동원, 전통적 엘리트층과의 공모”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팩스턴의 관점은 지금 우리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 파시즘은 멀리 있지 않고 현실의 조건은 이미 갖춰져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태나 냉소, 무관심이 아니라 자율적인 열정과 능동적인 관심이다.


균열과 희망찬 시도들

한때 라디오는 자동차와 함께 대표적인 파시즘의 선전수단이었다.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벨스는 대대적으로 라디오를 보급하고 그것을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독일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요시미 슌야(吉見俊哉)는 『소리의 자본주의』(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에서 그런 사회에서도 균열과 틈새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가 소통의 매체라기보다 일방적인 소리를,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아가 사회적 현실의 성립을 거의 전면에 걸쳐 점령해버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라디오를 통과한 소리는 장소를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세계를 동질화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매개이기도 하다. 라디오와 같은 매체는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인 ‘소리의 자본주의’를 구성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메이지 정부는 전신망과 유선전화를 “국민의 신체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규율 훈련용 미디어”로 이용했다.

그렇지만 요시미 슌야는 젊은이들이 이런 장치를 새로운 문화적 수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지역의 중심부에 설치된 방송국에서 각 가정에 설치된 스피커로 음향을 내보내는 유선방송 전화는 “젊은이들 중 전기 매니아가 하드웨어 측면을 리드하며, 지역의 전기점이 설비를 담당하고,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 그대로 촌락 공동체의 풀뿌리 운동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요시미 슌야는 전화가 “국가장치 뿐만 아니라 자생적 목소리 문화로도 기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은 무선 네트워크인 무선통신에 대한 분석으로도 이어진다. 20세기초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무선 라디오 붐이 일어나 아마추어들의 풀뿌리 전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즉 영화 <볼륨을 높여라>처럼 무선라디오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생겨난 라디오 클럽들은 서로 연계되며 “ 미국 전역을 뒤덮는 풀뿌리 정보망”으로 발전했고 “1916년, 민주주의 이념을 담은 메시지를 자신의 네트워크만으로 미국 전역에 전달하는 실험을 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볼륨을 높인다면 새로운 네트워크가 구성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런 사례에 주목하면서 요시미 슌야는 “19세기 이후 복제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오늘날에는 자명해진 방송이나 통신으로 대표되는, 모두 거리를 없애면서 국토나 지구를 뒤덮어가는 미디어로 일원화되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과학기술적인 장치 그 자체가 어떤 사회적 진보성을 담보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런 장치는 파시즘의 매체로도 또는 민주주의의 매체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과학기술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의 사용하는 인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나찌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던 20세기의 탁월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판단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7)에서 인간이 처한 새로운 상황을, 즉 “인간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자녀로 속하게 만드는 마지막 끈조차 제거하고자” 하는 과학기술을 우려했다. 그리고 자동화에 의한 노동 없는 노동사회, 인간 삶의 터전인 지구를 벗어난 우주로의 진출 같은 새로운 조건들도 판단의 과제로 제시되었다. 어찌보면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인간이 만들 수 있었던 이런 새로운 조건은 우리에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5)에서 아렌트는 우리 시대를 유서 없이 유산이 남겨진 시대라 명명했다. 즉 “상속인에게 무엇이 그의 정당한 소유인가를 명시하는 유서는 과거에 속한 것의 미래적 용도를 지정”하는데, 만일 유서가 없다면 그 무엇도 그 소유의 미래를 규정할 수 없다. 이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과거가 미래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주지 못하는 시대, 따라서 우리 스스로 과거와 미래 모두와 대면하며 우리 현실의 틈을 판단하고 과거와 미래 모두에게 진지하게 맞서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대중을 경계했지만 아렌트는 인간의 위대함을 믿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불멸을 위해, 기억을 통해 전승되는 이름을 위해 위대한 행위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근대적인 인간의 비극은 이런 행위의 우연성을 인간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이 자연적인 조건 속에서 행위할 뿐 아니라 그 자연조차 만들어 냄으로써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17세기 이래로 탐구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옮겨갔다. 자연히 그 형성과정을 탐구하는 ‘역사’가 중요해졌고, “역사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과정, 즉 그 실존을 인류에게 전적으로 빚지고 있는 유일하게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건국역사라는 말처럼 인간의 삶 역시 하나의 ‘만드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역사를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지만, 이 관점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재배치하거나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의 역사는 다양한 인간들이 어울려 내는 위대한 화음이 아니라 현재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재배치하고 미래를 조작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오만함이야말로 파시즘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렌트는 “행위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시작한 행위의 결과를 결코 예견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아렌트의 역사관은 역사를 빌미로 현재를 정당화하고 미래를 조작하려는 경향이 강한 한국사회에, 인간의 다원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려는 사회에 좋은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갑갑한 현실에서 아렌트의 책을 자꾸 손에 쥐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는 “인간과 세계의 실존 전체를 포괄할 수 없”고 “인간이 의지로 변화시킬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인간 이성의 범주는 “인간의 감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우리의 두뇌는 “지상에 속해 있고 지구에 한정되어 있다.” 유작(遺作)인 『정신의 삶』(홍원표 옮김, 푸른숲, 2004)에서 아렌트는 인간이 “현재라고 명명한 것은 희망 속에서 그를 앞으로 떠미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 대한 평생의 투쟁이며, 그가 확신할 수 있는 실재에 대한 향수와 회상 속에서 ‘과거의 적막’을 향해 그를 뒤로 밀치는 미래(그것의 유일한 확신은 죽음인)의 공포에 대한 평생의 투쟁“이라고 얘기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결정되는 것이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모두와 치열하게 맞서며 그 틈을 벌여야 할 시공간일 뿐이다.

절망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원대한 공상이 아니라 내 삶에서 소소하게 만나고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시인 김신용이 노래했듯이, “불면, 찢어질 듯 가냘픈 날개를 가진 나비가 그 드넓은 바다의, 죽음의 혀 같은 물결 위를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그 어떤 질긴 목숨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나래를 치는! 나래를 치는...... 그 비애의 힘”(『환상통』, 천년의 시작, 2005)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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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기획회의]라는 서평지에 쓴 글인데 최근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이 이 때와 비슷해서 다시 올려본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읽고 있다.
읽다보면 책의 내용과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이 어찌나 많이 일치하는지...
경제력의 집중, 정치적인 통제의 확대, 여론의 조작, 무의식적 욕망을 통제하는 장치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일차원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마르쿠제는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 모두가 오역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의 한 단락이 지금 우리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산업문명이 가장 발달된 지역에서 드러나는 총체적인 동원의 사회는 복지국가와 전쟁국가의 특징들을 가장 생산적인 형태로 결합한다. 예전 사회와 비교할 때, 이 사회는 진정 '새로운 사회'이다. 전통적인 문제들은 제거되거나 격리되었고 혼란스러운 요소들은 처리되었다. 주요한 경향들은 잘 알려져 있다. 대기업의 필요에 따라 국가경제를 집중하는 것, 정부가 그런 과정을 자극하고 지원하고 때때로 심지어 통제하는 힘이 되는 것, 이 경제를 전 세계적인 군사동맹, 금융협정, 기술지원, 발전계획의 체제에 연결시키는 것, 기업과 노동에서 블루칼러와 화이트칼라의 리더십 유형이 점점 동화되는 것, 서로 다른 사회계급들의 여가활동과 열망이 점점 동화되는 것, 학문과 국가의 목적 사이에 이미 확립된 일치점이 확장되는 것, 통합된 여론이 개인의 가정으로 침투하는 것, 침실이 매스미디어에 개방되는 것 등이다."

"The society of total mobilization, which takes shape in the most advanced areas of industrial civilization, combines in productive union the features of the Welfare State and the Warfare State. Compared with its predecessors, it is indeed a 'new society'. Traditional trouble spots are being cleaned out or isolated, disrupting elements taken in hand. The main trends are familiar: concentration of the national economy on the needs of the big corporations, with the government as a stimulating, supporting, and sometimes even controlling force; hitching of this economy to a world-wide system of military alliances, monetary arrangements, technical assistance and development schemes; gradual assimilation of blue-collar and white-collar population, of leadership types in business and labor, of leisure activities and aspirations in different social classes; fostering of a pre-established harmony between scholarship and the national purpose; invasion of the private household by the togetherness of public opinion; opening of the bedroom to the media of mass communication."

일차원적 인간의 출판년도가 1964년이니, 지난 36년의 시계는 거꾸로 흘러온 셈이다.
일차원적 사회에 관한 논의를 끝내면서 마르쿠제는 삐딱하게 사유하기(negative thought)가 어려운 이유를 언어의 조작주의(operationalism), 기능적이고 폐쇄적인 언어에서 찾는다.
시적 언어의 상실, 초월적인 예술의 언어의 상실이 이렇게 조작된 언어들의 지배를 불러왔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요, 현재의 사회적 현실이 우리의 규범이라는 경험주의라는 이데올로기(ideological empiricism)는 우리 시대 일차원적 사유를 대변한다. 오직 현실만이 영원할 뿐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런 사유를 넘어서야 대안을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현실을 꿈꾸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그게 대안이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르게 살 수 없다.

미숙씨가 쓴 [호모 에로스]라는 책을 읽었다.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어떤 책을 읽었으면 좋겠냐는 말에 역시 그 또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주제가 선택되었다.
한 친구가 고미숙씨의 [호모 에로스]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러자고 답을 했다.

사실 나는 고미숙씨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지나친 자기확신이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느꼈던 불편함과 몇몇 잡지 인터뷰를 보면서 느꼈던 뜨악함, 그리고 최근 [열하일기] 번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얘기들, 뭐 이런 것 때문에 좋아하진 않지만, 그 친구들이 좋아할 이유도 있겠다 싶어 한번 읽어봤다.

내가 나이를 먹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내용은 별로 없다.
내 사랑을 타인에게 투영하지 말고 내 자신을 찾아라, 과잉하지도 냉소하지도 말라, 자기의 몸과 정직한 대화를 나눠라, 몸의 감응력, 내공을 길러라, 뭐 이정도...

그런데 나는 책을 읽으며 자꾸 지붕뚫고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사랑과 에로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원론적인 주장이나 분석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그 다양한 변주에 대해서는 별반 내용이 없다.
마치 글로 배운 듯한 얘기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니 웃음이 날 수밖에...

사람의 손을 잡고 만지고 껴안고 키스하고 애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많은 에너지와 생각들,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을 만지고 느끼는 것 사이에 놓인 그 차이를 고미숙씨는 잘 모르는 듯하다.
정말 쿵푸하듯 열심히 에로스를 배운 듯한 느낌만이(왜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 책 제목은 에로스이지만 에로스에 관한 얘기는 없다. 아마도 고미숙씨는 에로스를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지 않는 '원나잇스탠드'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고, 설령 '원나잇스탠드'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하다.
그냥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대어 얘기를 풀어갈 뿐 실감나는 얘기가 없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미숙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사랑을 할땐 공부를 하라"는 얘기에선 웃음이 아니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랑을 할 때 세미나를 하라니, 이게 무슨 에로스적이지 않은 소리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고미숙씨가 인용한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라는 책을 진정 열심히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마음과 몸으로 나누는 그 많은 대화들이, 다양한 생활들이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울러 나는 평론가인 고미숙씨가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이라는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쪼록 사랑과 에로스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호모 에로스]를 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린다면, [호모 에로스] 역시 '쾌락 파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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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김상봉 선생님의 소개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삼성을 생각한다]의 서평을 쓰게 되었다.
삼성문제에 대한 고민이 서평이라는 틀에 갇혀 약간은 어정쩡한 글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용에 무조건 맞장구만 칠 수 없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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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강자들의 천국이다. 하나씩 따져 봐도 힘이 센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해서 한 가족으로 뭉쳐 산다. 삼성그룹만 하더라도 CJ그룹, 새한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들까지 따지면 대상그룹, LG그룹같은 기업과 중앙일보, 동아일보같은 언론사들이 엮여 있다. 이런 왕족들이 평범한 난장이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권을 행사한다. 간혹 왕족을 호위할 기사로 발탁되는 인물들이 있지만 피가 다른 그들이 왕족에 끼지는 못한다.


그리고 한국의 정부는 이런 왕족들을 보호하는 경찰 노릇을 한다. 왕족에 문제가 생기면 은밀히 뒷수습을 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면 즉각 병력을 투입해서 왕족의 재산을 보호한다. 그 대가는 쏠쏠하다. 가끔은 왕족의 혼맥에 끼어들 기회를 잡기도 하고 필요할 때 뒷돈을 두둑히 챙길 수도 있으니. 검사나 정치인의 자동차 트렁크에 현금으로 가득 채운 사과박스를 실어주는 장면이 자주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 정부의 부패는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왕족들과 정부가 한국을 말 그대로 말아먹고 있다. 2007년 10월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해서 주목을 받았던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는 그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갉아먹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양심과 냉소


부패가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의로운 ‘고백’은 힘을 얻기 어렵다. 고발이라고 하지 않고 고백이라고 한 이유는 한 기업의 불의(不義)를 조사한 기록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경험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성그룹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양심선언을 하고 난 뒤 자신이 겪었던 맘고생도 책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그도 왕족을 수호하는 기사들 중 한 명이었으니 맘고생은 그의 말처럼 “진정한 벗”을 얻기 위한 속죄의 과정이라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불의를 드러낸 사람들을 공격하고 조롱하는데 익숙하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그 힘에 시달렸고 반대했던 사람들의 최후를 봐왔기에 사람들은 거대한 불의에 함께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고발한 양심에 냉소를 보낸다. 일상의 사소한 악에 대해서는 흥분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이 왕족이나 정부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닫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못 본 척 해야 하는데 그 얘기를 자꾸 꺼내니 속마음을 들킨 듯 불편하다. 냉소의 참뜻은 난장이들의 패배의식이다.


하지만 이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침묵의 벽을 깨야 하고 그러려면 불의를 꼼꼼히 분석해야 한다. 직접 경험한 얘기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부피이지만 책은 술술 잘도 읽힌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황태자의 경영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쌈지돈 쓰듯 그룹의 자금에 손을 대는 왕족 이야기부터, 삼성 그룹을 실제로 움직인다는 구조본부가 저질러온 많은 부정과 잘못들, 그와 결탁한 권력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온다. ‘나는’이라는 주어로 이런 엄청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다보니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고백이 정 마뜩치 않고 고발을 원한다면 『삼성을 생각한다』보다 조금 더 두꺼운 부피인, 대안연대회의가 기획하고 여러 학자들이 함께 쓴 『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후마니타스, 2008)를 읽어도 좋다.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면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진다는 ‘삼성신화’의 허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발의 표현을 빌리면, “삼성재벌의 경제력이 증대할수록 삼성재벌의 불법․탈법행위들은 더욱더 대담해지게 된 것이다.” 냉소하는 우리가 그들을 그토록 오만하게 만들었다.



용서와 약속


2008년 이건희 회장은 유죄를 선고받자 수천 억원의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9년 말부터 경영 복귀 얘기가 언론을 타고 솔솔 나오더니 이제는 본격화되었다. 어쩌면 이런 수순은 미리 정해진 과정일 것이다. 그동안 국가는 이건희 회장의 죄를 사면하고 IOC유치위원이라는 직함까지 줘서 그런 분위기를 정당화시켜줬으니.


어떤 이는 그동안 잠깐 물러나 반성도 하고 재산의 일부도 기금으로 내놓았으니 이제 국가경제를 위해 용서하자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용철 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엄청난 착각이다. 삼성화재가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부당하게 빼돌렸던 보험금은 고객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스톡옵션으로 막대한 이익까지 얻었다. 2009년 1월 삼성 사장단 인사안에서 비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거나 승진했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뒤에도 놀라운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언론사들은 출판사 광고를 거부했고, 이 책을 다룬 서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책을 홍보하던 지하철 광고도 갑자기 사라졌고, <경향신문>이 삼성과의 광고 때문에 이 책을 다룬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거부하기도 했다. 삼성 장학생들이 지식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기획 보도를 내보낸 <경향신문>인지라 그 충격은 더한 듯싶다(그 이후 <경향신문>은 기자총회를 거쳐 이 일을 사과하며 독립언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어쨌거나 삼성이 진보적 신문이나 시민단체조차도 광고와 후원으로 통제하려 한다는 지적은 아직 한 치도 고쳐지지 않은 셈이다. 심지어 양심선언을 도왔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님들은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잠깐 수세에 몰려 수치스럽게도 평민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왕족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반성을 않는데 무엇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용서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굴욕이다. 용서는 동등한 사람들이 맺는 약속인데, 지금 우리는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이 태안 앞바다에 쏟은 기름을 전 국민이 모여서 닦았건만,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지난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건희가 범죄를 저질러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며 공개 문책하고 5년 동안 분과위원회에 참여할 권리를 정지시켰다. 범죄자를 사면한 정부와 그를 징계한 IOC, 누가 더 상식적인가?



재벌과 착한 기업


어떤 이는 왜 삼성만 괴롭히냐고 묻겠지만 제일 강하고 제일 나쁜 놈부터 매를 맞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삼성이 독박을 써야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재벌가들이 삼성과 다르게 그룹을 운영한다고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은 배임과 횡령 혐의로,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와 부당내부거래혐의로, 두산그룹의 박용성 회장은 분식회계와 횡렴 혐의로, 성원그룹의 전윤수 대표이사는 분식회계와 사기대출 혐의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은 보복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범죄자들이 기업들을 운영하고 국가는 이를 사면하고 시민들은 이를 묵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러면 왕족과 그들에 빌붙은 기사들이 떠나면 우리의 재벌이 착한 기업으로 변신할까? 광고 없이도 베스트셀러인 이 책이 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만 떠나면 재벌이 갑자기 착한 기업으로 변할 거라 믿는 건 엘리트의 ‘순진함’ 또는 ‘영악함’이다. 세상의 악은 몇몇 사람의 시나리오로 제거될 수 없다. 근본적인 악은 그것과 연결된 우리 일상을 바꿀 때에만 서서히 제거될 수 있다. 재벌 중심으로 짜인 경제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승자가 모든 걸 앗아가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변신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그 악과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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