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불안』(에이지21, 2009)이라는 책의 제목은 참 기이하다. 모두가 불안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시대에 저자인 폴 호켄Paul Hawken은 불안과 축복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불안』은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런데 책의 원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약간 드러난다. 보통 ‘blessed ignorance’라는 표현을 ‘모르는 것이 약’으로 번역하듯이, 원제목인 ‘blessed unrest’는 ‘불안한 것이 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호켄은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인류의 삶의 불안해지는 만큼 그 위기와 불안을 바로잡으려는 다양한 운동들이 자연스레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않거나 믿지 못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현실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지구를 살리는 아래로부터의 면역운동

 

불안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듯 호켄은 생태계 파괴에 맞섰던 브라우어와 카슨,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했던 파크스와 소로,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던 부족민과 이름 없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기업을 감시하는 ‘파수꾼 단체Keeper group’, 기업과 프로젝트, 제도, 지역을 감시하는 ‘감시 단체Watch group’, 현장에서 직접 환경을 보호하는 ‘친구단체Friends organization’,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방어꾼 단체Defenders’, 기업광고나 홍보기업의 숨은 진실을 폭로하는 ‘문화방해자Culture jammers’, 슬로우 푸드운동, 사회적 기업 등 수많은 운동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사용한다. 세상이 위기에 처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운동들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켄은 이런 운동들이 몸에 침입한 병균을 치료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면역체계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병에 걸리면 몸이 알아서 치료를 시작하듯이, 이런 다양한 운동들은 정치적인 부패나 경제적 질병, 생태계 파괴와 같은 지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몸이 하나이나 팔과 다리, 가슴 등의 역할이 다르듯이, 이 운동 또한 각자가 관심을 두는 중점적인 의제에 따라 지구상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러면서도 이런 운동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접속되어 불공정이나 부조리에 맞서는 힘을 더욱 늘리고 있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에 맞설 만큼 때로는 그 힘이 강력해지기도 한다.

과거의 경직된 운동과 달리 이런 운동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시민들의 필요와 지식에 의존해 삶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는 흐름,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흐름,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을 존중하고 그 흐름에 힘을 더하고 있다. 호켄은 이 운동이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모든 인간에 대한 공평함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형태가 제각각이지만 호켄은 이 운동들이 환경보호, 사회정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토착문화라는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얽혀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환경보호운동은 지구를 죽이는 병적인 정책에 대한 인류의 면역반응으로, 사회정의운동은 가족과 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제적/법적 병원균에 대한 면역반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유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만 자연과 사람이 함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기에 토착문화는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호켄은 이런 세 가지 큰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라고 본다.

운동의 형태가 작고 다양하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다. 호켄은 그런 회의적인 평가가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이런 운동이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고 사람들이 운동에 깔린 다양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미 수많은 운동이 실제로 활성화되고 있고 그러면서 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 고든 무어, 클린턴 같은 강자들도 기부금을 내거나 재단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면역체계가 강해져서 지구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호켄이 책 뒤에 붙인 부록은 이런 가능성이 단지 공상일 수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다만 호켄은 “면역반응이 현재는 아주 많이 불완전해서 많은 실패를 거듭할 것”이고 “어떻게 함께 작용해야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인정한다. 인간의 면역체계가 질병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듯이, 이 운동도 분명 실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켄은 이런 운동이 성공하려면 ‘자아인식능력’, 즉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함께 모여 행동해야만 인류는 불안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행동, 소비행태를 바꾸는 과정에서만 자치와 시민의 힘은 치료되고 복원될 수 있다.

 

 

대안은 무수히 많다!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위기들을 두려워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로 나서자고 주장하는 점에서 호켄의 얘기는 충분히 귀담아 들음직 하다.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호켄만이 아니다. 가령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는 『직접행동』(교양인, 2007)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을 소개하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에 주목한다. 호켄이 아래로부터 다양한 운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핀다면, 카터는 지구화라는 현상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이 어떻게 직접행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다룬다.

그리고 리처드 스위프트Richard Swift는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이후, 2007)에서 권력의 중앙집중화로 무기력해진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심각해진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한 방법이 바로 ‘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생태민주주의가 개인의 욕망과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단초가 될 것이고 남반구 전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중의 노력이 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을 것이라고 스위프트는 기대한다.

각기 다른 개념에 주목하지만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 모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불안을 벗어나려는 풀뿌리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과 그들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지구의 파괴를 막고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리라 기대한다. 허울 뿐인 세계화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에 매달렸던 헛된 꿈보다 지역의 고유성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삶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대안의 부재보다는 대안에 대한 냉소나 무관심이 우리의 삶을 더욱더 위태롭게 한다.

 

 

여전히 이념은 필요하다!

 

그런데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는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해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인다. 카터가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하려 하고 스위프트가 자유민주주의를 강한 민주주의로 대체하려 한다면, 호켄은 그 질서에 강하게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켄은 운동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토대를 다진 하이에크의 사상을 공진화coevolve의 관점에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부조리하고 왜곡된 정치/경제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다양성만 강조하는 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최상은 아니기 때문에, 자아인식능력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성장할 수 있다. 좋은 활동들의 리스트가 자동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피하려 하기에 호켄은 세계화가 작은 문화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다양성을 장려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가령 환경보호론자와 토착민이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맺어 “환경보호단체는 정치적 캠페인 조직경험이나 정부 및 언론동원능력 등 자원을 제공하고, 원주민단체는 조상들이 살아온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라는 명분을 제공한다”면 환상의 콤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 이런 국제적인 역할분업이 분명 초국적기업의 나쁜 영향을 가로막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분업은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끔 한 세계의 불평등한 지배구조 자체를 바로잡지는 못한다. 즉 지금 당장은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평생의 건강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축복은 아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고 불안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풀뿌리 민중의 투쟁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힘을 모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가권력과 초국적 자본의 힘을 없애고 생명의 힘으로 삶의 터전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듯하다. 가속화되고 있는 파괴의 흐름을,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삽질을 막으려면, 적절한 시간에 저항의 힘이 살아나야 한다. 호켄은 생태학적 복원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치워주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과정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사라진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듯이, 한번 파괴된 생태계는 쉽게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인간의 면역체계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념을, 전일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이데올로기에 집착해 다양성과 활력을 상실한 건 사실이지만 역사를 거치며 누적되어온 그 희망은 여전히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오래된 희망에 새로운 기를 불어넣고 살리는 건 단순히 낡은 틀을 부여잡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한다(한국의 경우도 맑스주의가 풍미했던80년대 이전의 다양하고 풍부했던 지적 전통과 다양한 운동들을 다시 평가하고 되살려야 한다).

물론 호켄이 이 점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호켄 스스로도 웬델 베리의 말을 인용하며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패턴을 위한 해결책solving for pattern’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는 축복의 길잡이가 될 좌표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념의 시대는 아직 가지 않았고 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지행네트워크의 첫 책이 나왔다.
다른 삶을 꿈꾸며 이명원, 오창은씨랑 함께 공간을 만든지 벌써 2년이 지나갔다.
그 2년의 세월 동안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하며 나눴던 고민들이 이 책에 담겼다.
출판사의 책소개가 조금 거창해서 부담을 느끼고, 책 앞 오창은씨의 지행 소개가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런 꿈을 꿨다는 생각도 든다.

책의 제목은 2007년 겨울에 진행했던 청년특강의 제목 '아닙니다,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을 땄다. 원제는 너무 길어 책에 들어가기 힘들어서리...^^;;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이 '강렬한' 추천사를 써 주셨다. 보통 추천사는 책의 내용이나 필자들에 관한 얘기를 하기 마련인데, 김종철 선생님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을 추천사에 담아주셨다. 정작 지행 얘기는 맨 마지막 문단 뿐이라는..ㅎㅎ
http://jihaeng.net/home/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453

맨 마지막 에필로그는 내가 썼다.
'지식협동조합을 제안한다'는 글인데, 아직 분명하게 구상이 잡히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안 형태의 글을 써봤다.
지행의 앞날도 지식협동조합이라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형태로 잡힐 듯하다.

어쨌거나 다소 두꺼운 책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고 그만큼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김남곡 지음, 『진보를 연찬하다』(초록호미, 2009년)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직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지만 우연히 선생님 책을 접하고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었기에 그 고마움을 전할 겸 무작정 글을 씁니다.

요즘 들어 대체 진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한때 진보적인 민족작가라 불렸던 황석영 씨가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다니고, 자신을 진보적이라 주장하던 사람들이 생전 그렇게 비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미화하거나 정치적 기회로 삼고. 그런 모습을 보며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대체 무엇인지,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걸 유연함이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원칙을 버린 변절이라 비판해야 할지, 그런 혼돈 속에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이 꼭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위 진보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때 간혹 당혹스러움을 감축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기가 진보적이라 믿는 걸까, 그리고 최소한 자신이 말한 바는 지키며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진보적이라 불리는 정치세력들이 보이는 그 강한 배타성과 고통의 불가능,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좋다는 생각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당혹스러움과 혼란에 빠져있던 터라 선생님의 책이 반갑고 고마웠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답함을 많이 풀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연찬(硏鑽)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서로 맞서려는 방식의 토론이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방식이 아니라, 단정(斷定)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함께 규명해가는 방식”인 연찬은 “누가 옳은가를 서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함께 물어가고 끝까지 규명해가는” 것이라 하셨지요. 나는 선이고 반대편은 악이기에 서로 말을 섞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섞지 않는 게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소통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도 맑스나 엥겔스같은 사람들의 ‘원전’에 맞춰서 모든 걸 판단하려 들었지 소통의 자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찬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연찬방식이야말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특정한 사상이나 실천을 고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굳어져서 완고한 것은 진보가 아니다. 진리를 향해 고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는 말씀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하셨지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 보수, 시장을 규제하는 국가의 역할을 진보라 부르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궁극적 진화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해 낙관적이며 그것을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단히 혁신하려는 ‘열린 사고’의 실천을 ‘진보’라고 부르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여러 가지 글을 모은 책이라 하지만 글 전체에 그런 연찬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질과 의식, 제도와 자아,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물질적 생산력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혁명이 서로 보완․조화되는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열려는 치열한 고민이 앞서 가는 선배님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더불어 선생님은 진보적인 제도와 의식을 실천할 방법도 알려주셨지요. 선생님이 진보의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알려주셨지요. 첫째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도록 그 경계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정하는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 둘째는 자연과 조화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 물자를 넉넉히 해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발전시키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셋째는 의식을 혁명해서 다른 사람을 침범하는 행동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정리하자면 제도, 물질, 의식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하고 선생님은 세 번째 의식이 가장 중요한 진보의 조건이라 지적하셨습니다. 더불어 분노와 증오보다 사랑과 협동을 통해 점점 더 삶의 범위를 넓혀가는 변화가 진보라는 지적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방법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건 보수만이 아니라 분명 진보에게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유로운 개성의 신장을 바탕으로 한 평등사회로서 주로 연대․공존․상생의 상호작용이 내용으로 되는” 횡적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소유의식과 차별의식에 바탕을 둔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에서 찾으시더군요. 이런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협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동료들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우리 사회의 운동가들이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로 진실한 인간, 진실한 사회를 원한다면 자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 또한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특히 저는 그런 횡적인 삶의 방법으로 공동의 ‘마을지갑’을 만들자는 말씀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마을의 가족들이 일해서 얻은 것 중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남는 이익을 마을지갑에 넣어 모은다는 생각은 참 좋았습니다. 야마기시회의 공동체원리와 비슷하지만 우리 전통과 맞닿아 있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듯 연찬과 다양한 접합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더 분명하고 풍부하게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연찬이 중도(中道)를 향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름의 삶을 통해서 진리 그 자체도 ‘중도’(中道)요, 진리에 이르는 길도 ‘중도’라고 생각하고”,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도, 한 사람의 관념계의 변화도 바로 이 ‘중도’를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인간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을 갖춘다면 서로의 공통분모를 키워 좌와 우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맡을 기반을 만들 것이라 기대하셨지요. 그러면서 이런 “새로운 진보와 보수의 연대, 인간화의 길과 선진화의 길의 연대, 세계화의 길과 지방화의 길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기에 의식적으로 선진화와 인간화를 합쳐 중도를 찾으려 하신 듯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선진화’가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을 더욱 개선하는데 강조점을 둔다 하더라도, 성숙한 시민의식, 즉 ‘상생 협력’의 의식을 결코 경시할 수 없고 경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 ‘인간화’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고 ‘인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삶과 의식에 그 강조점을 둔다 해도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들을 결코 경시하거나 배척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진보나 보수가 각각 최선의 길이라고 여기는 ‘인간화’와 ‘선진화’의 길이 사실은 크게 다른 길이 아니라는 공동의 자각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이 선진화와 인간화가 서로 배치되거나 대립하는 목표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침투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될 때 상생과 협력의 대통합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보수는 지속가능한 번영을, 진보는 실현가능한 새로운 문명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숨은 선생님의 속뜻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생각이 단순히 좌와 우를 뭉뚱거리자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압니다. 아마 남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를 강요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신뢰’라고 여기시기에, 신뢰 없는 우리 사회에 신뢰와 희망을 만들기 위해 먼저 몸을 낮추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세상의 변화란 게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기에 그렇게 주장하신 거라 믿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자본주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선진화도 인간화와 만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거겠죠.

선생님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무시하진 않지만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끊고 인간을 생명없는 기계로 만드는 ‘악마의 맷돌’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온 바입니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이란 것이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좋은 생산’이나 협동의 경제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흉내를 내고 협동을 이용할 수 있을 지언정 그 정신을 자본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물론 연찬은 옳고 그름을 미리 정하지 말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물어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참됨, 사람을 죽이는 참됨이 가능하지 않듯이 그 연찬에도 어떤 ‘결의’가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듯을 품는가에 따라 묻고 답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얼마 전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함께 오체투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작 하루를 지내고 그에 관해 얘기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오체투지를 하며 진정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은 보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아스팔트조차도 이마를 대고 있으니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지더군요. 아스팔트에 누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가슴이 뭉클했던 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지구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지구의 숨통을 틀어막고 살을 파내어도 당신은 이렇게 모진 우리를 떠받치고 있구나,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껴안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생명, 지구와 함께 연찬의 장을 펼쳐야 하겠지요.

그리고 저는 좋은 생산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자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진화 담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강화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함께 누리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급할 수 있어야 자치할 수 있는데, 선진화는 그런 자급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97년 IMF 외환위기 전에 약 50% 정도였는데, 지금은 70%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바람이 불수록 의존도는 심해지고, 한미FTA가 실현되면 그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선진화와 인간화가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진보가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런 당위가 빛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는 이념적인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가 선생님의 말처럼 단지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요?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고 그들이 온갖 죄를 저질러도 사면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국가를 동원해서 자기 이익을 취할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더구나 보수라면 적어도 자기 전통과 자주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져야 할 텐데, 이 땅의 보수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합리성(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을 따르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미국과 하나 되는 걸 더없는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이 땅의 아이들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어도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무슨 보수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입니다. 오랜 시절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특권을 가지려 그들은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화물연대> 故박종태 씨가 요구했던 건 건당 920원하는 배달수수료를 30만원, 3만원도 아니고 단지 30원 인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요구했던 건 수 억원의 보상금이 아니라 다른 곳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극단적인 내몰림이었고, 그 결과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망루에 올랐다 공권력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야만을 그대로 둔 채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기득권층을 내버려두고 진보만 변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물론 선생님의 말처럼 분노와 증오만으론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동일한 차원에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 십년 살아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 망루에 올라간 부모가 까맣게 탄 시체로 돌아오는 걸 보는 사람들, 아침에 깨워서 보낸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 아들이 분노와 증오를 품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 생명을 그 파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라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구조화된 폭력이 존재합니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구조의 문제가 있고 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분노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구조와 그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기득권층에 더욱더 분노하는 게 오히려 문명의 역사를 여는 길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그런 극단을 바로 잡아 중도의 길을 열어 가리라 기대하시지만 그건 그냥 희망사항일 듯합니다. 아시겠지만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자들 역시 분명한 자기 이념 없이 기득권층에 빌붙어 떡고물이나 주워 먹으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이 조화나 협력처럼 누구나 좋아할만한 단어가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그 극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더욱더 분노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내세운 알리바이를 깰 수 있지 않을까. 청년들이 한다면 욕을 먹을 말들을 원로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중도를 얘기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하겠지만 극단을 고집하며 사도(邪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새로운 대안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아쉬움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조세희 선생님같은 분이 계셔서 아쉬움을 달래곤 합니다. 2005년 농민대회가 열리던 날에도, 2009년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현장에도 선생님은 달려와 우리 사회의 야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언이 있기에 우리는 그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단단하게 제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부대껴야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연찬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남주 선생님이 자신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사상은 “썩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고, 그렇기에 사상의 머물 곳은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나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도 아니고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진보는 보수가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진보가 배워야 할 것은 보수의 싱크탱크나 여론몰이 전략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마음에 깃든 ‘진심(眞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꿈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꿈꾸는 자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마 선생님과 저도 서로 연찬할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논하며 맺었던 말을 그대로 남깁니다. “이상 두서없이 선생님의 글을 함께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뜻을 오해했거나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 저의 부족함 탓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건필하십시오.”

사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는 환경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조금씩 바꾼다. 사상의 본뜻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겠으나 그 뜻이 드러나는 방식과 강조점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이것을 ‘변화’라 얘기하기는 어렵겠고 일종의 ‘접목’ 또는 사상을 현실에 ‘접붙이는’ 과정으로 봐야 할 듯하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스트의 삶을 봐도 그런 접붙이기가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성장을 보며 반전평화운동을 강조했고 그런 군국주의 성장을 방치했던 무능한 의회주의를 반대하며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생디칼리즘을 자기 신조로 삼았다. 이런 성격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빠른 산업화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출현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개화에 앞장섰던 만큼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은 선진 제국의 문물과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사회의 봉건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령 왕조나 군벌, 보수적인 유교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노장사상이나 고대 사상이 강조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류스페이는 전통사상과 아나키즘을 뒤섞어 중국식 아나키즘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신세기파 역시 서구 문물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충(忠)이나 효(孝), 족(族)을 강조하는 중국 전통과 단절하려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아나키즘의 상호진화론을 수용했다. 민족주의는 한국 아나키즘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것을 한계짓는 요소이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대동사상을 비롯한 민족주의운동과 손을 잡으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국가나 민족을 부정하는 성격이 약화되기도 했다. 신채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 신채호가 뜻한 바는 분명 왕이나 특정 인물의 나라가 아니겠으나 조선의 의미는 우리가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렇게 조금씩 나라마다 그 특성이 다르기는 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으르렁 거리던 시절에도 아나키스트들은 국경을 넘어, 애국심이라는 틀을 넘어 서로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실천을 공유했다. 인상적인 구절을 소개하면,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일본 아나키스트의 활동, 일본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 혁명가들, 아나키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조직들, 상하이노동대학이나 푸젠성 농촌자위운동에 참여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활동 등이 그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초국가주의 연대의식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45쪽)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역사가 뒤엉켜 있기에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모색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이 있다. 식량, 에너지, 생태 등 식민지/제국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민중이 공동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아시아의 민중이 상호부조를 실현하며 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 방법은 있을까? 만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지난 6월 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 13회 인권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장소사용을 허가했다 취소하고 경찰이 무대설치를 방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화제는 개막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개막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용산만이 아니라 흑석동, 성남 등 전국 곳곳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4구역에서만 약 47조원의 엄청난 이윤을 볼 수 있으니 힘 있는 자들은 악착같이 개발을 하려 든다. 세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발계획, 그들을 위협하는 용역깡패, 용역의 불법적인 활동을 묵인하는 공권력, 한국사회에서 40년 이상 반복되어온 야만이다. 철거촌은 한국의 게토이자 수용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에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풍경을 기록한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이 살인마가 평범한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했다고 보면서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생각 없이 법과 명령을 따르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재판정에 세운 것이 일종의 정치쇼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비극의 책임은 아이히만만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과 그들의 이웃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와 협력해서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내고 심지어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과 이웃들이었다. 아렌트는 이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나치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나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을 보았다. 철거민들을 끌어내고 방패로 찍는 전경들, 6명의 죽음을 책임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찰과 그들을 사면한 검찰, 그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히만이고 우리 시대의 무사유를 대표한다.

그와 함께 나는 우리 각자의 아이히만도 발견했다. 그 이웃들이 유대인을 외면했듯이 우리 역시 함께 살던 주민들이 철거민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일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인하지 않았던가.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부조리를 거부할 인간 최후의 권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았던가. 아직 시신을 모시지도 못한 유족들의 절규에 귀를 막지 않았던가.

강력한 야만의 힘을 꺾으려면 우리 자신이 문명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희망이 우리 내부에서 싹틀 수 있도록 인간이길 포기하지 말고 고통받는 타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되묻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이런 부조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지를 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농부들, 지주가 밀을 먹을 때 정작 자신은 짚을 씹는 농부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다. 넝마를 입고 비단과 벨벳을 짜는 노동자들, 우리가 바로 다중(multitude)이다. 공장의 소음이 순간 멈출 때, 우리는 성난 바다처럼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가리라.…매일매일 고통을 겪고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다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에워싸고 삼킬 수 있는 바다이다. 우리가 그럴 뜻만 품는다면, 정의를 이룰 순간은 오고야 만다.”

위의 글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이 1880년 《반란자》라는 잡지에 실은 ‘청년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부나 권력을 얻기 위해 의학과 법학, 과학 등을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크로포트킨은 함께 혁명가로 살자고 호소한다. 당신은 굶주려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겨 먹어라 얘기하는 의사가, 그리고 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소작인들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예고 없는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얘기하는 법관이 되려 하는가? 크로포트킨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감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수치스럽게 권력과 부를 좇지 말고 청년의 힘과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다중 속으로 들어가자고 호소한다.


크로포트킨의 호소는 어떤 이론을 따르는 주장이 아니었다. 크로포트킨 자신도 청년기에 귀족의 명예와 학자의 명성을 모두 버리고 러시아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크로포트킨이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와 그가 하필이면 아나키스트로 살려고 결심했던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크로포트킨을 혁명가의 길로 이끈 것은 지식이 공유되고 민중이 그 지식을 배울 기회를 가진다면 그들이 많은 창조적인 행위들로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위스 쥐라연합에서의 경험과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나키즘을 선택했고 평생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자서전』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이론을 구성하고 또 그 앎이 어떻게 삶으로 실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 ‘청년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쓴 자전적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은 그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위인전’이 결코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얘기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이 겪던 비참한 현실을, 끓어오르던 혁명의 기운을 꼼꼼히 기록했다. 특히 그가 러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보고 겪은 이야기들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돕는다.

『자서전』은 《애틀랜틱》이라는 잡지에 1898년 9월부터 1899년 9월까지 연재했던 내용을 고친 글이다. 당시에 크로포트킨은 『어느 반란자의 이야기』(1885), 『빵의 쟁취』(1892), 『들판․공장․작업장』(1899)같은 책을 냈고, 『상호부조론』(1902)의 일부를 《19세기》라는 잡지에 쓰며 유럽의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엘리트로 태어난 삶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엘리트가 독점하던 것을 다중과 나누는 방식으로 다중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자서전』은 1899년부터 그가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사망한 1921년까지 약 22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그동안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1917년 6월 크로포트킨은 고향을 등진 지 약 40년 만에 러시아로 돌아갔다. 당시 정부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 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크로포트킨은 고향으로 내려가 남은 생을 보냈다. 레닌에게 보낸 편지나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자서전』은 가장 논쟁적인 시기를 담고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허나 크로포트킨이 보내는 호소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파고든다. 용산참사나 사회적 양극화같은 구조화된 부조리가 다중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사회에서 청년들은 무엇을 좇고 있는가? 『자서전』에서 우리는 뛰어난 지성만이 아니라 다중의 고통을 나누고 그런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청년의 영혼을 목격할 수 있다.



오늘은 일요일, 온 가족이 모여 장을 보러 간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올라가니 마트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식을 하고 물건을 고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삑삑거리는 계산대를 지나 짐수레를 가득 채운 침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이다.

이렇게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하는 장면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슈퍼맨이 일한다는 슈퍼마켓, 좌판과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인 재래식 시장과 달리 대형할인마트는 그 휘황찬란한 근대성을 자랑한다.

세계 최초의 대형 할인마트는 1962년에 생긴 미국의 월마트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993년 11월 이마트가 처음 문을 열면서 대형할인마트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수와 판매액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 전체 소매시장에서 대형마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16.6%로 추정되고 있다(더구나 이마트, 홈플러스 상위권 회사의 점포수가 161개로 전체 할인마트의 47.1%, 매출액은 12.7조원으로 할인마트 매출액의 54.1%를 차지한다). 수치로 보면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채 400개를 넘지 않는 대형할인마트가 한국 전체 소매시장의 16.6%를 차지하고 있다니 엄청난 일이다.

사람들은 왜 대형할인마트를 찾을까? 대형할인마트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대형할인마트는 싸다?

 

맞벌이 부부들은 주말에 한꺼번에 장을 보기 위해 대형 마트를 찾는다. 이른 새벽까지도 문을 열고, 늦은 시간이면 김밥이나 초밥, 반찬거리가 몇 백원씩 할인되니 어찌 아니 좋을쏘냐.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의 값은 밖에서 사는 것보다 싸고 물건이 워낙 많아 돌아다니지 않아도 웬만하면 마트에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시식코너에서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한 때는 인터넷에서 마트에서 밥을 공짜로 먹는 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방해를 받지 않고 물건들을 서로 비교하며 살 수 있으니, 공간도 비좁고 물건도 많지 않은 소형 가게와 비교하면 대형 마트가 소비자에게 훨씬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외부와 단절된 환한 조명과 경쾌한 음악까지 틀어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대형할인마트들은 매장에 진열하는 품목을 꾸준히 늘리며 공간의 복합화를 추진해 왔다. 이제는 단순히 먹거리나 가정용품같은 생필품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의류매장이나 전자제품코너같은 공간들을 갖춰서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한다. 이제는 기름을 넣는 주유소 기능까지 대형할인마트들이 한다고 하니, 마트에 들리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없을 정도이다.

대형할인마트들은 직접 공장이나 산지와 거래하며 중간유통마진을 없애서 할인된 가격에 상품을 제공한다고 한다(어떤 대형마트는 자기 매장보다 더 싼 가격으로 파는 곳이 있다면 신고를 하라고 할 정도이다). 싼 가격에 상품을 제공하니 누군들 마트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가격을 곰곰이 따져 보면 대형할인마트에서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의 가격이 농산물의 가격보다 훨씬 싸다. 왜 그럴까?

앞서 봤듯이 대형할인마트는 몇 안 되는 기업이 많은 매장을 내며 소매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무기로 중소기업이나 공장에게 낮은 가격을 강요한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 파는 물건이 똑같지만, 마트는 슈퍼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상품을 공급받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86%는 불공정거래를 경험했지만 거래를 중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참는다고 한다. 마트의 싼 가격은 중소기업을 희생시킨 대가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싸게 살수록 부모님의 월급봉투도 얇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농산물은 공장의 물건처럼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산지의 가격을 아무리 낮춘다 하더라도 농산물의 가격은 협상하고 강요해서 결정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직접 생산한 농산물이나 주변 농가의 것을 가져와서 파는 재래시장의 가격이 마트의 가격과 비슷하거나 싼 경우가 많다. 가끔 농산물 할인행사를 해도 그건 신선도가 떨어진 농산물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마트는 한 가정이 필요한 만큼 작은 단위로 상품을 팔지 않거나 작은 단위일 경우 비싸게 가격을 매긴다. 그래서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면 언제나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을 사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품 하나하나의 가격은 싸다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돈을 쓰게 만든다.

그러니 대형할인마트의 할인은 중소기업이나 농민의 몫을 빼앗는 ‘착각’이거나 과소비를 하게 만드는 ‘환상’일 뿐이다.

 

대형마트와 웰빙

 

<지식채널e>의 ‘구멍없는 구멍가게’는 대형할인점과 동네 구멍가게를 비교한다. 대형할인마트가 늘어날수록 경쟁력 없는 작은 구멍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2001년 이후 1만 1,400개의 구멍가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멍가게를 애용하는 한 할아버지는 소주 1, 2병 사러 마트 갈 수도 없고 왕창 물건을 살 돈도 없다며 “조금 비싸지만 구멍가게는 외상도 되고”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더 비싸게 물건을 사야 하는 이 가혹한 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대형할인마트의 서비스가 구멍가게보다 더 좋을까?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의 서비스가 대형할인마트보다 나쁠까? ‘말만 잘하면 공짜’라는 말처럼 구멍가게에는 주인과 손님의 ‘흥정’이 있었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부족한 주머니를 넉넉한 인심으로 채울 수 있었다. 마트에 홀로 놓인 전자저울 대신 구멍가게에는 주인의 ‘눈대중’이, 부족한 사람에겐 한 가지 더 얹어주는 ‘마음’이 있었다. 자주 들리는 ‘단골손님’은 후한 대접을 받았고 때로는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의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구매하는 곳이 아니었다. 구멍가게는 가게에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꽃이 피는 공간. 추운 겨울날이면 난로 주위에 모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얘기부터 마을일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구멍가게의 역사를 장식했고 구멍가게는 관계를 만드는 공간이었다.

이제 구멍가게가 사라지면서 단골과 흥정, 외상이라는 말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대형할인마트는 인심을 저울로, 흥정을 정가로, 단골을 포인트로 대체한다. 그 속에는 살가운 관계가 숨을 쉴 공간이 없다.

더구나 한꺼번에 많기 사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마트에 가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차를 몰고 마트에 가고 그러다보니 주말이면 마트 주변 도로는 온통 주차장으로 변한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변하면 그 매연은 마트가 위치한 곳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들이마셔야 한다. 그러니 그 편리함도 다른 것을 희생하고서만 얻을 수 있는 장점이다. 그런데도 대형할인마트의 서비스가 구멍가게보다 더 나을까?

김재인의 『대한민국 경제 빈곤의 카운트다운』(서해문집, 2008)에 따르면, 대형마트 하나가 생기면 약 150개의 점포가 사라진다고 한다. 대형 마트가 350개 정도가 되니 약 5만 개의 점포가 사라진 셈이다. 이렇게 대형할인마트는 동네의 구멍가게들의 문을 닫고 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없앤다.

그래서 2008년 3월 5일에는 <대형마트 규제와 중소상인 육성을 위한 지역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대형마트 입점 규제(인구수와 재래시장과의 거리를 고려할 것), 대형마트 영업 규제(중소상인에게 영향을 주는 품목 제한, 오후 8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 규제), 처벌규정 강화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형할인마트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형할인마트에서는 누가 일을 할까? 마트의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거나 물건을 진열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심지어 마트는 직접 고용하지 않고 외부의 용역회사에서 필요한 인력을 데려다 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2007년 6월에 시작된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후마니타스, 2008)는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내 아이들만큼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살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가 대형할인마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이고 그 비율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대형할인마트의 수가 늘어날수록 중소기업이나 농민, 구멍가게의 희생이 늘어나고,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형할인마트가 전체 소매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날수록 그런 악순환을 막을 가능성도 줄어든다.

얼마 전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같은 대형할인마트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팔겠다고 밝혔다(심지어 어느 마트는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표기해 판매하기도 했다). 마트들은 저마다 가격을 낮추는 가격경쟁을 벌이며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고 있다. 이윤을 늘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고 팔려 한다는 점에서 미국산 쇠고기와 대형할인마트는 동일한 논리에 서 있다.

우리 삶을 바꾸는 변화를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마트보다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를 찾는 것에서부터 조그만 변화는 시작된다.



얼마 전 청와대는 한 달에 한번이나 격주에 한번씩 ‘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라는 코너로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연설을 한다고 밝혔다. 인터넷과 웹 2.0의 시대에 대통령은 왜 케케묵은 라디오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방송사의 PD들이나 언론단체들은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말 좀 하겠다는데 왜 난리를 치며 반대할까? 도대체 라디오가 뭐 길래?

 

괴벨스의 입

 

세계 최초의 라디오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무선으로 전신 신호를 주고받는 단순한 기계였다. 라디오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보통 독일의 마르코니(G. Marconi)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 테슬라(N. Tesla)가 처음 발명했다. 한때 발명왕 에디슨(T.A. Edison)과 일을 하기도 했던 테슬라는 마르코니보다 먼저 라디오를 발명하고 1897년에 미국 특허를 출원했지만 1904년 마르코니에게 특허권을 빼앗긴다(에디슨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받았던 좋은 이미지와 달리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탄생한 라디오는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벨스(P.J. Goebbels)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독일 나치당의 선전장관으로 활동하던 괴벨스는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라디오를 활용했다. 나치는 독일의 모든 가정에 라디오를 보급하고 그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와 자신들의 계획을 국민들의 귀에 반복해서 불어넣었다(나중에 괴벨스는 세계 최초로 정기TV방송을 시작했고 올림픽을 그 기회로 삼았다).

당시의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 불렸다. 괴벨스는 “우리는 방송중계를 통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취자에게 우리 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조형적인 그림을 전달해야 한다. 지도자의 연설을 준비하는 도입 연설을 언제나 내가 맡아 하면서, 청취자에게 우리 대중집회의 마법과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요아힘 C. 페스트 지음, 안인회 옮김, 『히틀러 평전』, 푸른숲, 723~724쪽). 라디오는 연설만이 아니라 각종 집회의 분위기도 그대로 각 가정으로 전달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마치 나치당의 집회에 와 있는 것처럼 함께 호흡하며 흥분과 전율에 몸을 떨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진실처럼 들리듯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괴벨스가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한때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을 무조건 잡아가고 가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거짓말 탓이었다. 심지어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때조차도 국민들은 독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년병들이 그 거짓 승리를 위해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그렇지 속지 않았다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패배한 전쟁에 내보낼까).

라디오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효과는 또 다른 사건으로도 증명되었다. 1938년 10월 미국 CBS방송국의 PD였던 오슨 웰즈(O. Welles)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자신이 쓴 『화성침공』이라는 드라마 대본을 방송했다. 외계인의 침입을 알리는 속보가 나오자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나거나 총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사건은 라디오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시켜 줬다.

그래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원하는 바대로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라디오를 이용했다.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의 귓속으로 바로 전달할 수 있으니 누군들 그 힘을 이용하고 싶지 않을까? 인터넷의 시대에 좀 구리긴 하지만 라디오를 이용하려는 권력자의 발상은 이런 의도를 담고 있다.

일본의 작가 요시미 슌야(吉見俊哉)는 『소리의 자본주의』(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에서 그 의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가 소통보다 일방적인 주장을 전하며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아가 사회적 현실의 성립을 거의 전면에 걸쳐 점령해버렸다”는 점은 분명하다(25쪽). 라디오를 통과한 소리는 장소를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세계를 동질화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매개이자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인 ‘소리의 자본주의’를 구성했다(45쪽).

 

당신의 취향, 라디오

 

영화 <아는 여자>에서 이연(이나영 役)의 취미는 라디오 듣기이다. 이연은 말 그대로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고 휴식을 취한다. 버스기사나 택시운전사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작은 즐거움을 준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는 상품과 초대권이 뿌려지는 행운의 장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정겨운 얘기가 공유되며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운과 기억을 통해 라디오는 아직 살만한 현실이라며 사람들을 ‘위안’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정겨운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며 위로한다.

그런데 그렇게 긴장이 풀어지면서 슬그머니 광고 메시지가 끼어든다. 텔레비전과 달리 라디오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해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흘러나오는 전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노래와 사연을 고르고 왜 그런 물건을 상품으로 주는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냥 라디오의 ‘수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다.

피카르트(M. Picard)는 그런 수다가 사물 속에 깃든 신성(神性)인 ‘침묵’을 파괴한다고 얘기했다. 잡스러운 소리를 생산하는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인간의 모든 느낌, 의욕, 지식이 라디오에 의해서 생기고 인간 자체가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격체가 된다.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생긴다. 라디오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느낀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사람 혹은 일거리를 필요로 하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침묵의 세계』, 까치, 201쪽)

라디오가 전달하는 많은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고, 의미 있는 말조차 수다에 묻혀버린다. 결국 “라디오는 인간을 더 이상 말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길들인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인간을 당신으로부터,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따라서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뜻이다.”(같은 책, 209쪽)

 

볼륨을 높여라!

 

그런데 이런 라디오도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이크를 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라디오는 전혀 다른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예술가 찰리 채플린(C. Chaplin)은 자신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라디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히틀러를 꼭 빼닮은 주인공은 히틀러 대신 마이크를 잡고 괴벨스의 입을 통해 자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비행기와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연결 시켰습니다. 이러한 발명의 진짜 의도는 인간의 선함에 전 지구적 형제애와 우리 모두의 화합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내 목소리가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 퍼져나가 인간을 고문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제도에 희생된 수백만의 절망하고 있는 남녀노소에게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채플린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에서 자유의 나팔수로 변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강제로 입막음을 당한 사람들은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신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그 논리에 도전하는 발신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 <볼륨을 높여라>에 등장하는 마크(크리스챤 슐레이터 役)도 발신자의 입장에서 위안이 아니라 ‘비판’을 가한다.

캄캄한 지하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 고등학생 마크는 디제이 ‘해피 해리’로 변신한다. 마크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세상과 학교, 가족, 친구들에 대한 불만은 무형의 전파를 타고 비슷한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마크의 독백은 학교 친구들의 호응을 얻으며 어느새 ‘해적방송’으로 성장한다. 진실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무선라디오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도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열정을 잃어버린 락가수 최곤(박중훈 役)이 조그만 도시의 라디오 DJ를 맡으면서 마을에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최곤이 DJ 역할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으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일방적으로 방송을 내보내던 라디오는 어느 순간 마을의 소식통이 되고 사람들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라디오는 잡스런 소리가 아니라 의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전파법이 개정되어 소출력라디오방송이 허용되면서 한국에서도 마을라디오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마포 FM>이 대표적인 예이다(http://www.mapofm.net). 마포 주변에서 FM 100.7Mhz에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 있는 <마포 FM>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와 함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L양장점’, 여성주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꽃다방’, 장애인들이 마이크를 잡는 ‘함께쓰는 희망노트’, 노점상인들을 위한 ‘희망마차’ 등의 프로그램은 그 성격을 잘 보여준다.

라디오 자체는 비어 있는 물건이다.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파시즘의 매체로, 아니면 민주주의의 매체로도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침묵을 파괴하는 소외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을 기르는 공동체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라디오스타는 누구일까?



국가 없는 삶은 어떨까?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원천봉쇄와 언론의 왜곡, 순종적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촛불은 꿋꿋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촛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그 안타까움은 이명박 정부가 계속 시민들의 요구를 거부하며 버틴다면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옛날 같으면 어금니 꽉 깨물며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혁명’을 일으키자고 외쳐볼 만도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도 지났다. 비폭력을 외치는 목소리는 단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저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우리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과거보다 더 나은 인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혁명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과제를 풀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는 아직 여러 장의 카드가 남은 있는 듯한데, 이쪽은 정부와의 협상이나 정치세력의 조직화라는 애매한 카드만 남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과제를 속 시원히 풀어줄 대안적인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찾기도 어렵다. 옛 길은 포기되었건만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으니 이 막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막막함은 우리의 인식이 기성의 정치논리에 길들여져 있어서 생긴다. 우리의 상상력이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은 그리 막막하지 않다. 이미 저들은 물대포와 경찰특공대, 폭력진압까지 일삼은 허약한 권력일 뿐이다. 아니 저들은 권력이라고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초등학생들까지 “쥐를 잡자 찍찍찍”을 외치는 상황에서 저들은 이미 권위를 잃어버린 폭력, 폭력밖에 가지지 못한 공권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조건 폭력에 똑같이 힘으로 맞서고 누르려 하는 건 어리석은 시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권력을 넘어선 상상력이다.

 

국가라는 짐승 안에서 살아남기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은행나무, 2006)는 상상력의 별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에하라는 이명박 정권 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개(展開)해봐”라며 누구에게나 들이대는 우에하라의 거침없는 발언이 흥미롭지만 정말 나의 공감을 끌어낸 것은 책 전반에 깔려 있는 세계관이다.

우에하라는 국가에게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라는 우에하라의 얘기는 단순하지만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국가에 요구하고 국가로부터 어떤 확답을 받아내려 할까? 권력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해 왔으니 이제 그 지긋지긋한 믿음을 버릴 때도 된 듯한데, 아직 의식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에하라는 이런 우리들에게 타협하지 않는 불복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익숙한 상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보일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반복해서 부를 게 아니라 그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나가 국가라는 짐승을 길들여야 한다. 우리 안에 갇혀서는 짐승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밖으로 나가 짐승을 굶기면 그 놈도 말을 듣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문을 열고 나가는 방법은 뭘까? 국가폐지를 목표로 삼는 정치조직을 만들거나 이념을 구성하면 될까? 하지만 국가를 없애겠다던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는 단순히 조직이나 이념만으로 국가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다. 어떤 완성된 청사진을 가지고 현실을 그에 맞춰가는 방식으론 이제 사회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방향에 맞추지 말고 각자가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국가 없는 삶을 대비해야 한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살면 된다.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라는 우에하라의 외침은 권력에서 벗어난 실질적인 변화의 잠재력을 말해준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는 말은 그런 개개의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더구나 이 변화의 과정은 유쾌하다. 촛불집회가 이미 증명했듯이, 저항과 즐거움은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다. 분명한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즐거우면 사람들은 계속 저항에 나설 것이다. 어린 지로가 우에하라의 삶을 이해할 수 없어도 “춤을 추다보니 이게 또 무지하게 즐거웠다. 국가는 없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의식적인 선전이나 선동이 아니더라도 함께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레 서로의 삶이 녹아들고 대안이 뭉쳐질 수 있다. 엠마 골드만이 말했듯이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망설인다. 국가 없이 과연 살 수 있을까? 국가가 없으면 무질서와 혼란이 우리 삶을 위협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물음은 학습된 상식일 뿐이다. 국가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더 평화로운 삶을 누렸다. 『남쪽으로 튀어!』는 그 삶을 ‘유이마-루’라고 부른다. “‘유이마-루’라는 건 서로 품앗이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예전부터의 풍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요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집도 섬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해 지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야에야마 땅에 온 뒤로 사람들이 귀찮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주던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이곳이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사유재산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섬사람 모두의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두레와 품앗이 같은 좋은 전통이 있고, 아직도 그런 전통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 국가와 결별하는 것이 홀로 남겨지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헤어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

‘단지’ 소설일 뿐인데, 그 얘기에 너무 흥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같은 얘기를 조금 다르게 얘기해 보자.

 

다중과 함께 세계공화국으로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의 『다중』(세종서적, 2008)은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는다. 낯설었던 ‘다중’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건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정치주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실제로 이번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제국의 시대에 권력은 한 국가가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작용하고 그 정점에는 초강대국 미국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는 거침없이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있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사막화와 같은 생태계 파괴 역시 국경선을 넘어섰다. 이런 세계에서 한 국가의 권력자조차 마음대로 끌어내리거나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물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지배하는 권력은 언제나 피지배자들의 동의나 복종에 의존한다. 주권의 권력은 따라서 언제나 제한된다.” 이미 제국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다중의 삶 역시 국가주권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여전히 유효한 다중의 무기는 “노예상태에 놓인 자신들의 지위를 거부하고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위협”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전 민족을 이끌고 이명박 정부에서의 탈출을 도와줄 모세가 필요할까? 네그리와 하트는 모세가 아니라 내부의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다중이 그런 역할을 스스로 맡으리라 본다. 심지어 그런 다중의 저항은 제국의 주권까지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자율적으로 구성할 것이라 그들은 예상한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해도 다중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아마 네그리와 하트도 한국의 촛불집회를 봤으면 틀림없이 놀라자빠졌을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잠재력이야말로 차이를 소통하고 공통된 것을 생산하려는 거대한 일렁거림이 아닌가. 촛불을 서울광장으로 제한하려는 해석들이 있지만 사실 촛불은 서울광장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 밝혀졌고, 심지어 전 세계에서도 밝혀졌다. 그리고 촛불이야말로 하나로 뭉쳐지면 큰 불꽃을 이루지만 실은 제각기 다른 불꽃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촛불이야말로 최종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국민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복종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저항의 불꽃은 낡은 세계를 불태우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특히 네그리와 하트는 “저항의 변화 형태들과 경제적․사회적 생산의 변형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을 강조하며 저항주체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는 ‘비물질 노동’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문제해결, 상징적․분석적 과제들 그리고 언어적 표현 등과 같이 일차적으로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이나 “(미소를 지으며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 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비물질 노동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비물질 노동의 생산양식과 다중의 저항양식이 결합하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리라 본다.

현재 촛불집회는 스스로 학습하며 대운하, 민영화, 공영방송 등으로 자신의 의제를 확장하고 있지만 기륭전자, 이랜드, 미조직 노동자와 같은 여러 다양한 저항과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아마도 “협력적 의사결정과정, 대등하게 결합된 친연집단들(affinity groups) 등등의 다양한 중요한 실험들”이 아직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한계는 단지 촛불집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촛불집회의 동력을 대의민주주의로 흡수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들은 자신들이 의제를 제안하고 제한하려 한다. 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보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그런 주장이 왜 뒤쳐진 것인가를 잘 지적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대의민주주의가 “다중을 통치(정부)에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하는 두 가지 모순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다중을 제국에 묶어둔다고 비판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에게 “민중의 지배라는 통제된 소량의 약을 주고 이에 의해 다중의 무시무시한 과잉을 예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을 제국의 내부로 포섭하려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정치 시스템의 전환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다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라는 우에하라의 외침은 운동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국가주권의 틀에 갇히지 말고 새로운 틀을 구상해야 한다.

이왕 지르는 거 국경선을 벗어나 원대한 뜻을 품어보는 것이 좋겠다. 세계공화국, 얼마나 그럴싸한가. 이미 18세기에 칸트(I. Kant)가 『영구평화론』에서 그 터를 닦기도 했으니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니 가능/불가능을 논하기가 어렵고,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찍어먹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에서 국가사회주의나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넘어설 대안으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이념을 제안한다. 고진에 보기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도 더불어 약해지자 자유주의나 종교 원리주의가 판을 치는데 이를 바로잡을 선택은 바로 어소시에이션이다.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려는 운동”인 어소시에이션을 오래된 미래로 제안한다.

『남쪽으로 튀어!』의 유이마-루처럼 어소시에이션은 호혜의 원리에 바탕을 둔 대안사회를 지향한다. 이 이념은 이미 맑스(K. Marx)와 프루동(P. Proudhon)이 공감했던 것으로 화폐와 자본주의에 맞서 “대체통화, 신용, 그리고 생산-소비협동조합(어소시에이션)의 연합”을, 대중을 약탈하고 재분배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국가에 맞서 세계공화국을, 민족이라는 거짓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네이션에 맞서 자유의 상호성을 주장한다.

고진은 이런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이 칸트에서 이미 드러났다고 얘기한다. 그 사회는 바로 “칸트적으로 말하면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사회”이다. 그리고 실제로 칸트는 “상인자본의 지배를 거부한 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을, “그 이후에 출현할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이즘의 핵심을 파악”했고 국가들이 그들의 주권을 양도함으로 “‘영구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연합을 제창”했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다중의 힘이 생산양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면, 고진의 이념은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현실을 이상으로 인도한다. 규제적 이념은 우리가 조금씩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런 이상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꿈 없는 인간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설령 실현되지 않는 꿈이라 해도 꿈이 있기에 인간은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와 달리 고진은 다중의 잠재력에만 의지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진은 네그리와 하트가 국가의 독자성을 무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중의 자기소외로서 있는 국가는 다중이 자기통치하는 것에 의해 지양될 것이라는 아나키즘의 논리입니다. 여기에서는 국가의 자립성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다중의 반란은 국가의 지양보다 국가의 강화로 귀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국가는 그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전략은 내부의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외부에서 지양하는 힘, 즉 “국가를 ‘위로부터’ 꼼짝 못하게 하는 시스템”을 요구한다. 그래서 고진은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위로부터의 운동을 연계시키는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를 주장한다.

이제 촛불도 이런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넘어 자급과 자치의 삶을 강화시킬 대안경제를 구상하고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며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상호성의 체계를 구성하면 어떨까? 이미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 생활협동조합과 지역화폐의 실험은, 지역의 풀뿌리공동체의 실험들은 그런 맹아를 품고 있으니 전혀 허황된 얘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국가주의 틀에 너무 오랫동안 사로잡혀 왔기 때문에 외부로 운동을 확장하고 글로벌 커뮤니티, 글로벌 어소시에이션을 구상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어쨌거나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자세가 갖춰진다면 촛불의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다중의 능동적인 저항과 자본=네이션=국가를 대체하는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이제 꿈을 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

 

땅에 뿌리내리기

 

김종철은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녹색평론사, 2008)에서 공생공락의 삶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대안의 삶을 사는 건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사안을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태의 핵심을 직시하고, 우리가 정말 지향해야 할 ‘선진사회’란 대체 무엇이며,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사색할 줄 아는 비판적 능력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능력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일상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네그리나 하트, 고진과 달리 김종철은 그런 일상적인 변화 속에서 땅과 농민의 존재를 강조한다. 좋은 세상이란 스스로 밥을 차려먹고 스스로 결정하는 세상이고, 그런 세상의 가장 바탕이 농경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옹호하거나 옹호하려고 하는 가치들은 본질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농경문화라는 근본 토양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 평등한 관계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욕구, 노동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의식, 개인적 자율성, 자치와 자립, 비폭력주의, 협동과 연대, 상호부조와 보살핌 등등, 아무리 인간정신이 경멸을 당하는 짐승스러운 상화에서도 우리가 끝끝내 옹호하고자 하는 이러한 윤리적 덕목들은, 따지고 보면,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형성되고 확립되어온 마을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트고 강화되어온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진처럼 NAM이라는 어소시에이션을 새롭게 만들고 네그리와 하트처럼 비물질 노동과 조응하는 새로운 운동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래되고 소박한 원리이다. 단지 농경이 먹거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농경문화는 일 만년 이상 인류가 생활해온 삶의 방식이고, 농민들의 삶은 그 자체가 서로 보살피고 협동하는 관계를 구성하고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농촌공동체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버리지 않고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개인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왔다. 농업을 산업의 하나로 보고 부가가치만을 논하는 시대에 김종철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땅을 옹호한다.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자본이나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념을 대지 않아도 ‘대동(大同)세상’, 즉 “사람들이 밥을 같이 먹는 세상, 즉 한 식구로 사는 세상”이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다. “혈연, 지연, 부족, 인종, 종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위를 따지지 않고 그냥 세상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는 세상”,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밥을 함께 먹는 세상, 그것이 바로 대안사회이다.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

더구나 이제는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후손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일찍이 간디는 “지구는 모든 사람의 기본욕구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곳”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장기적인 지속성의 토대 위에서 차별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고 그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농업중심의 순환적 생활방식에 토대를 둔 사회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척결해야 할 것은 세계의 ‘낙후된’ 사회의 가난이 아니라, 세계의 ‘선진’ 사회의 풍요로움”이라는 말은 언제나 풍요로움과 선진화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농촌공동체에 바탕을 둔 생태적이고 소박한 순환사회만이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세대의 대안적인 삶도 보장할 수 있다.

물론 자본과 국가는 끊임없이 이런 대안을 거부하며 우리의 삶을 압박할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충돌, 침략은 우리 삶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의 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런 침략은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지 결코 민중과 민중 사이의 대결일 수는 없다는 가장 근본적이되 흔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의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우리의 삶을 꾸준히 살고 대안을 실현하면 된다.

우에하라가 또 다른 삶을 찾아 떠나면서 지로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그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살자. 그러면 언제든 새로운 관계를 만날 수 있다. 김종철의 말처럼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까.


마을과 코뮨을 논하다

 

하승우

 

조한혜정 지음 《다시, 마을이다》(또하나의문화, 2007년)

조한혜정 외 지음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또하나의문화, 2006년)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년)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난 뒤 공간을 보는 법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시선이 높이 올라가야 전방 15도 정도였고 땅바닥을 보며 걷거나 가야할 목적지로 빨리 걸음을 옮기느라 바빴다. 하지만 요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주민자치센터나 마을도서관, 놀이터, 공원, 학교, 복지관 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단독주택이 어느 정도 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밝은지 살피느라 걸음이 늦다. 가끔 지방에 내려가야 할 때도 한 시간 정도 미리 내려가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시선의 변화가 많은 얘깃거리를 줬기에 좋았지만 요즘은 버거울 때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마을 풍경이 불편해서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모습과 내용의 시설물들, 차도가 넓어지는 만큼 줄어드는 인도와 그만큼 위험해지는 보행자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아파트와 삶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 문을 닫는 구멍가게들...

얼마 전 전셋집을 구하러 서울 바닥을 헤매며 든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가급적이면 아파트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집에 살고 싶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그런 동네들을 찾기도 했지만 좁은 골목엔 어김없이 재건축조합 공고나 조합장 선거 공고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 예정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라면 ‘토박이’라는 말은 곧 사전 속의 단어가 될 듯하다.

물론 남쪽의 농촌과 어촌으로 내려가면 아직 시골도시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의 고즈넉함에는 북적거리는 생명의 기운이 없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인근의 대도시로 떠나고, 주름진 사람들과 거리만이 사라질 날을 예감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비전(요즘 귀가 따갑게 듣는 단어이다)을 가지고 있을까?

 

 

‘다시 마을’에서 ‘어떤 마을’로

 

《다시, 마을이다》는 조한혜정씨가 신문이나 잡지에 썼던 칼럼과 대안교육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짧은 글들을 모았고 글재주 있는 사람의 글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다(반면 사건에 관한 통찰은 있지만 ‘깊이’ 얘기하지 못한다). 하자센터라는 대안교육의 브랜드를 만들었고 성미산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 도시형 대안학교운동을 벌이며 느꼈던 고민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제목은 마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은 교육을 다루고 있다. 물론 대안교육은 대안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대안교육의 문제는 마을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아이들이 미래의 시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연관성은 더 깊어진다(아이들이 ‘미래의 마을주민’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안교육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공간을 나누고 돌보며 살아가는 사례들도 늘어나고 있으니 이 책의 제목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조한혜정씨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고 삶의 안정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마을에 주목한다. 책을 살펴보면 조한혜정씨는 성미산 공동체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성미산 주민들이 만든 생활협동조합과 학교, 아이스크림 가게, 반찬 가게, 차병원, 마을방송, 마을축제 등은 지역운동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노인들이 골목길 이곳저곳에 모여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있고, 수시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잘 알기에 함께 있음으로 안전한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사를 가지 않고 가게도 자주 망하지 않아 단골이 되는 그런 마을이 후기 근대적 주거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을로 가는 방법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대안교육이든 마을만들기든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고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사회를 파헤치고 무한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세력은 시장과 자본이다. 저자는 “국가와 시민이 힘을 합쳐 자본이 독점해 가는 학습 영역을 탈환해 와야 할 때”이고 “대안교육계는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아래 그간의 교육적 실험을 체계화하여 널리 공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저자는 도로가꾸기와 건물세우기로 변질되고 있는 정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을 “놀라운 일”이라 평가한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한국의 국가권력이 시장과 손을 맞잡고 땅덩어리를 파헤치고 교육을 망가뜨려 왔다는 건 상식이라 믿었던 터라 저자의 논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언론매체에 실린 글이고 연설문처럼 대상을 염두에 둔 글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에 실린 글만으로 조한혜정씨의 생각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나의 궁금증을 많이 풀어줬다. 이 책의 1부는 2005년 봄의 「돌봄과 소통이 있는 가족문화와 지역사회를 위한 심포지움」을, 2부, 3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다뤘다. 그래서 2, 3부도 《다시, 마을이다》와 연관성을 갖지만 가장 연관된 내용은 1부이다.

1부는 ‘돌봄사회’를 핵심주제로 내세우고 “집중적 권력과 배제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쟁사회에서 포용과 소통의 원리가 주도하는 ‘따뜻한 근대’”로 이행할 방법을 가족과 대안학교, 마을에서 찾고 있다. 조한혜정씨만이 아니라 발제자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체가 한창 진행 중인 후기 근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돌봄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특히 “남성 이익을 대변하는 억압적인 지배기구”로 국가를 파악하던 기존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를 “여러 행위 주체들의 네트워크로 보면서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형성에 참여를 할 준비”(조한혜정)를, “여성운동을 통한 여성결사체의 정책 참여”, “성별적인 돌봄 규범과 실행이 일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바꾸는데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책적 접근”(허라금)을 강조한다.

사적인 영역이 다시 정치화되고 있고, ‘돌봄’에 대한 강조는 그 경향을 대표한다. 과거에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공사영역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허무는 방향이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방식이 사에서 공으로 뚫고 나가는 것, 즉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방식은 사적인 영역 자체를 정치화하는 방향으로, 돌봄을 국가의 재구성원리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이런 방향전환은 국제결혼, 이주의 여성화라는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나는 돌봄의 가치가 중요하고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얘기, 키테이(Kittay)가 제안한 ‘돌봄의 사회적 책임의 원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나 제도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가 없다.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가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면서 ‘돌봄’이라는 탈근대적 사유가 근대적인 복지국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자발적인 결사체들의 역할에 개입할 경우 기존의 자율적인 활동이 제한을 받는다. 이 점은 돌봄의 일종인 지역아동센터가 제도화되면서 ‘공부방’의 역할이 애매해졌다는 점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국가는 시설중심의 과시하는 사업,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사업을 지원하기 때문에,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운동의 의미도 퇴색되기 쉽다.

그리고 근대이든 후기 근대이든 국가의 폭력성, 특히 한국 국가의 폭력성은 여전하다. 국익을 빌미로 농민의 삶과 농촌공동체를 무참히 짓밟고 경쟁력을 핑계로 시장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는 한국의 국가권력에 왜 참여하고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나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책이 주장하는 돌봄의 가치가 단순히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돕는 게 아니고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에 근거한 행복한 삶과 사회”(사토 마나부)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와 어울릴 수 없다. 통치이건,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이건 국가권력의 속성은 내부를 동질화하고 획일화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돌봄의 가치와 국가의 속성은 일치될 수 없다.

국가는 결코 마을을 만들 수 없다. 국가는 마을의 구역을 정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며 마을 안에 건물을 세울 수 있지만 그 마을의 자율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을의 자율성과 자치를 인정하는 순간 국가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자율성과 자치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 마을은 마을일 수 없기 때문에 마을과 국가는 공존하기 어렵다.

《다시, 마을이다》와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마을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지 못한다. 마을이 필요하고 마을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만 그 주장을 실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뮨주의 선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코뮨주의, 우정과 기쁨의 공동체?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수유+너머>에서 펴낸 책이다. <수유+너머>는 국내에 스피노자,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을 알리고 노마디즘, 유목민 등의 개념을 유행시킨 바 있다. 이 책은 <수유+너머>가 10년 동안 준비한 이론적 노력의 결실이자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발표 160주년을 맞이하는 선언이다.

10년의 연구성과가 축적된 탓인지 낯선 개념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자신의 언어로 얘기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여전히 기계나 감응, 지층화같은 낯설고 어려운 개념들이 보이지만).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6장부터는 코뮨주의 선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철학적 정리이다(이진경, 고병권이 예전에 했던 작업들처럼 다른 사상가들의 입장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글들이다).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을 코뮨주의라는 하나의 줄기에 꿰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완성에 저항하는 사유이고 실천”으로서의 코뮨주의라고 주장한다. 코뮨주의는 완성된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는 유연한 틀로 제시되고, 그 내부는 적대의 정치를 넘어선 우정의 정치학, 사적 소유로부터의 ‘떠남’과 ‘탈주’, 타자성을 추방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우정의 관계를 맺는 구성의 정치학 등으로 채워진다. <수유+너머>의 코뮨주의는 과감하게 국가에서 떠나 “자본과 국가에 의해 추방당한 광범위한 지대에서 코뮨적 삶의 방식을 구성”하려 한다.

코뮨을 건설하기 위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고병권씨와 이진경씨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고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선언한다. 이제 우리 삶의 곳곳이 코뮨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 코뮨은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어서고 분리와 경쟁이 아니라 공생과 공-조(共-調), 협조에 바탕을 둔 공동체이다. 적을 없애기 위해 내부의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이질성과 타자에 문을 연 우정과 환대의 관계, 코뮨의 활동에 참여하는 한에서 구성되는 공동체, 리더나 중심을 제거하지 않고 각각의 영역이 모두 중심이고 능력을 가진 공동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는” 공동체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기에 저자들이 들으면 어리석다 나무라겠지만 이런 코뮨을 현실에 세우기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많은 내용을 몸과 마음으로 소화하려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좋은 내용임을 인정하지만 멀게 느껴진다.

사실 코뮨을 얘기하기 위해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쓸 필요가 있을까? 어려운 얘기는 하나도 없지만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 선생은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마음(능력이 아니다)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우리시대의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 사회와 삶을 파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찾는 길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고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우정과 환대를 얘기하지 않아도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고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하는 마음,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이고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 마음, 고수레와 까치밥, 까마귀밥을 남기는 마음은 자연의 생명체와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코뮨을 얘기하지 않아도 “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그들이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살고 있는 능구렁이도 우리집을 지켜주는 집지키미가 된다”는 마음은 이미 코뮨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코뮨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이미 잃었고 생존경쟁과 독식의 욕망만이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의 희망은 살아있나?

 

국가는 신자유주의 현실에서도 잘 살아남았고 오히려 자기 기능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런 ‘국가약화의 신화’는 국가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사상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비판을 감소시킨다.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에서 엘린 메익신즈 우드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이 세계화에서 이득을 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세계를 조직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드는 “참으로 효과적인 반대투쟁을 하려면 자본의 힘이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국가 안의 중심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마을은 국가 없는 곳이 아니라 국가가 지배하는 곳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을이나 코뮨에 관한 논의들은 이런 현실을 자꾸 비켜가려고만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자치는 스스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자급할 수 없는 사회는 자치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마을을 세우고 특이성이 서로 리듬을 이루는 사회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 외부에서 존재하려면 자급이 가능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조차 자급하지 못하는 마을이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앞서 살핀 논의들 어디에도 이런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농민공동체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을은 어떻게 자치를 할 것인가? 나라의 자치만이 아니라 마을의 자치를 위해서도 자급의 문제는 반드시 고민되어야 한다.

대안은 더 밑바닥에서 나올 수 있고 이미 현실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현실에 대한 대안이 어느 순간 대안 없음으로 바뀐 건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안이 현실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현실 속에서 대안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우리들만의 대안으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퍽퍽하기 이를 데 없는데 대안을 외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잘 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진보에 대한 냉소를 넘어 진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건 그런 분리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사로잡아야 한다.

탈선하고 탈주한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 이 세상에 소금처럼 귀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마을이 주류가 되려 하거나 벗어남으로 그친다면 그 소금은 소금일 뿐 세상을 이롭게 하는 물질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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