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까지 공부를 하리라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에는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과학자라고 답을 했고, 커서도 누가 소원을 물으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 답했다. 책읽는 것보다 손으로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고 수줍게 앉아 남의 얘기를 듣길 좋아하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상상하지 않던 일이었다. 소심하고 낯을 가리던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꿈꾸는 세상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나의 10대, 20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예를 들자면, 책값이라도 벌어보려고 여기저기 글을 쓰던 2002년, 대학원 석사시절 때 알던 선배가 ‘하니리포터’라는 인터넷신문에서 내 글을 읽고 미국에서 이런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네 석사 때 모습이 생각난다. ‘형, 나는 머리 쓰는 일보다 몸으로 때우는 게 적성에 맞아요’라고 사무실에서 나에게 이야기 했던 너인데 어떻게 머리 고생시키는 일을 하고 있구나.^^” 내 모습이 실제로 그랬으니 이 선배만 유독 생뚱맞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팔자에도 없고 꿈도 꾸지 않던 공부라는 길을 택했을까?

 

1. 억압된 자아와 갇힌 학문의 유사성

나는 부산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들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하는 엄친아들이었고, 나는 공부나 운동 모두 고만고만한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20등 정도가 내 성적이었고 공부 잘 한다는 말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책을 진득하게 오래 보지도 못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얄개 시리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만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니 시험 때마다 마음을 졸이기 일쑤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적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형들이 공부를 잘하니 쟤 머리도 좋지 않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근거 없는 낙관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명절은 지옥에 가까웠다!). 오히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계속 쫓아다녔고, 고등학교 생활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암기나 공포를 잊어보려는 일탈로 채워졌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2지망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공부는 내 관심 밖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형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시위현장에 가보고 운동권 가요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사회과학세미나’도 내 관심 밖이었다. 책이라면 전공책과 사회과학서적 어느 것에도 끌리지 않았고 나는 술 마시고 노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군인이 정치를 하던 심각한 시대였던지라 겉치레를 하기 위해 딴에는 심각한 척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 관심은 연애나 길거리의 사람들 삶에 있었다. 학교 가다 버스에서 내려 길거리 노점을 구경하고 집에 오다 시장 봐서 술 마시는 삶이 가장 행복했다.

 

어떤 일에서건 배우고 남길 점이 있듯이 그 시기에도 성과는 있었다. 잠깐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조직이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91년 5월의 경험은 역시나 나의 ‘그릇’이 아주 작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재미없는 성장기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런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내 자신을 아주 ‘작은 인간’으로 여겼고 주변의 환경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즉 내게는 나라는 ‘자아’가 없었다. 껍데기만 있지 영혼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의 학문이라는 것도 비슷했다. 학교에서건 세미나에서건 외국의 낯선 개념과 어려운 이론을 다루었다. 대학교의 정치학 수업은 서구의 민주주의 이론과 서양철학, 정당론을 가르쳤고, 사회과학 세미나 역시 맑스-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사, 사회구성체론 등을 다뤘다. 당시의 지식인 사회는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유물로만 봤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작고 약해서 외부의 강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학문의 내용은 낯선 언어로 채워졌고, 그런 어려운 언어는 언제나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렇게 보면 나와 한국의 학문 모두가 외부의 것에 갇힌 존재였다. 나는 자아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고 한국의 학문도 자기 기준을 잃고 갈팡질팡했다. 자신 안에서 성장의 기운을 찾지 못하고 외부의 것을 따라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만 찌우는 식용가축처럼, 나는 길들여졌고 한국도 그렇게 성장했다. 그 사육의 속도는 너무 빨라 갈매기 조나단처럼 다른 삶을 꿈꾸기 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는 또 다른 외부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아나키즘에 관한 책이었다. 폴 애브리치(Paul Avrich)라는 역사가가 쓴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와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이라는 두 권의 책은 검은 표지에 권위와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농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투박함과 생동감에 나는 매력을 느꼈다. 그때는 아나키즘을 이념이라기보다 ‘부정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에서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기 위한 철학으로 그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을 뒀다.

 

그 즈음인 1991년 3월, 낙동강에 페놀이라는 오염물질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생태위기를 목격하고 ‘한살림선언’을 접하면서 ‘녹색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 고민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선 언어가 주는 구토감에 우리 언어를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동학이라는 걸 처음 접했고 그 때는 사상보다 종교적인 관심이 약간 앞섰다. 내 속에 억압된 감정이 가끔은 민족적인 감정이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터지곤 했는데, 동학은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공부를 하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갑자기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대학원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선택은 한편으로 군대를 연기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지금껏 하지 않았던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아나키즘과 녹색사상에서 잠깐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지만, 또다시 세상의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선택과 선택을 거듭해야 했던 나는 왠지 모를 미련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접한 공부는 힘들었을 뿐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읽어야 할 글들 대부분이 영어였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번역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구상보다 어떻게 하면 저자의 생각을 잘 쫓아갈 것인가가 공부의 목적이었다. 영어책을 읽는 능력이 생긴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때 읽었던 책들은 지금 머리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학원 시절의 갑갑함을 덜어준 것은 학교밖 ‘한국정치연구회’라는 연구단체였다. 당시에는 이 단체가 진보적 학술운동을 추구했고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팀에 대학원생들이 모여 함께 글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공부도 공부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이 뒤섞였고 세미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뒷풀이 시간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이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지, 술잔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들이 새벽하늘을 밝히기 일쑤였다.

 

내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곳도 그곳이었다. 내가 실제로 공부를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속의 많은 고민들을 쏟아내면서 선배들에게 조금씩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어쩌면 뒷풀이 장소를 떠나지 않는 체력이 인정의 이유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 곳은 생애 최초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공간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무조건 외부의 조건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어렴풋했던 내 자아가 조금씩 뿌연 안개를 걷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할 즈음부터 하버마스(J. Habermas)라는 독일 사상가의 여러 책들을 한 권씩 읽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외부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공부를 하면서 ‘비판적 읽기’와 ‘거리두기’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런 만남과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모더니티(modernity) 비판’이라는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모두가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사는 세상에서도 사회가 바뀔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가능성을 추적하다 찾아간 시기가 서구의 68혁명이었고, 희망의 씨앗을 본 사람이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1세대라 불리던 마르쿠제였다. 마르쿠제를 연구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껄끄러워했고 특정한 계급이 사회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거부하던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마르쿠제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나와 외부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좁히고 싶었기에,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라는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 서로 대립한다고 여겨지던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의 긴장과 대립을 마르쿠제가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의도적으로’ 유지한다고 나는 봤다. 현실과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미적 모더니티가 유토피아적 지향으로 존재하면서 현실을 이끌고,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의 지향은 현재의 잠재력에 기초해 갈등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 그것을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 전략이라 정의했다.

 

기존에 없던 마르쿠제 해석이었기에 나는 마르쿠제의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내 구상대로 해체해서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에 관한 두 가지 내용들로 재구성했다(나는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그래서인지 논문 곳곳에 자리잡은 오타(제본한 뒤에 논문을 읽으면 그 전엔 절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 무더기의 오타를 발견하게 된다)에도 나는 아직까지 석사논문에 대한 불만이 그다지 없다.

 

그때 나는 최초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고, 책을 통해 저자와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모더니티가 사회를 완전히 삼켜버리지 않은 제 3세계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68혁명은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는 문명이라는 위선을 깨려는 서구 사회 내부의 시도였던 것 같다.

 

머리 속을 떠다니던 고민을 활자로 새기면서 나는 최초로 자아와 대면했고 그와 대화하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가끔은 거울을 보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는 내 속의 억압성이나 상처와 대화하면서 조금씩 그것을 깨달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상가의 고민을 통해 나와 외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조금씩 느꼈다 더구나 기존 연구를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하나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 남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며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 그것을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인정을 받는 것, 이런 경험들은 내가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들을 하나씩 만들었다.

 

2. 풀뿌리운동과의 만남과 성장하는 삶

석사학위를 받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집안 형편상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취직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왠지 석사논문을 썼을 때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그런 인정을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짜여진 학문의 틀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사는 직장생활보다 궁핍하고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제도화된 학문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음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언제나처럼 그 원인을 나 밖의 것에서만 찾았던 것 같다. 희망은 내 머리 속 이론으로만 존재했고, 가슴은 사람들과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미련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무리하게 시작했던 박사과정 생활은 냉소와 무관심으로 채워졌다. 아나키즘과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은 그런 냉소를 정당화하는 무기력한 이념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 때는 학과공부보다 그냥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빌려서 읽는 게 즐거웠다. 쇼핑하듯이 서가를 빙빙 돌며 책을 구경하다가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빌려서 읽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욕심 중 제일 큰 것이 책 욕심이지만 여건상 책을 살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매번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했다. 대학원 등록금도 비싼데 책이라도 왕창 신청해서 읽어야지 생각했고, 책을 가지지 못하는 욕심은 책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예전에는 책을 사서 읽고 독서카드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보고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야하니 컴퓨터에 책의 주요 내용과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일일이 타이핑했다. 필요한 책을 그때마다 볼 수 없어 불편했고 읽은 내용을 일일이 컴퓨터에 치는 게 참으로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된 책이 열 권, 백 권, 이백 권을 넘으면서 그 정리들은 내게 큰 재산이 되었다. 불편함은 어느덧 공부하는 ‘습관’이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정신은 자유로워졌지만 내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한국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한 책들이 거의 없다보니 사유의 힘은 지금 이곳보다 저기 먼 곳이나 이전 시대를 헤맸다. 그러다 2001년도 여름, 우연히 찾아간 풀뿌리주민활동가 워크샵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다소 투박하지만 체험으로 다져진 활동가들의 단단한 이야기가 내 머릿속 고대 아테네 광장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책에서 읽던 내용들을 운동과정에서 이미 몸으로 익혀 온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책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도 길이 존재하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때부터 소심함과 낯가림을 무릅쓰고 지역의 풀뿌리 단체들을 돌아다니며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면서 나는 희망의 구체적인 상을 그릴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의 중앙정치와 권력, 그것이 왜곡해 온 민주주의에 조그만 기대라도 품고 있었다면, 나는 그런 희망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덥석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삶은 참으로 묘하다.

 

구나 지역을 돌며 보고 들었던 활동가들의 모습은 내가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읽어 온 책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실에 없는 것이라 여겼던 판타지가 현실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상가 아이리스 영(Irish Young)이 얘기했던 소통민주주의(communicative democracy)는 생활협동조합 활동가의 삶으로 구현되었고, 하버마스(J. Habermas)의 공론장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방과 거리에서 나누는 수다와 생활로 드러났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철암과 부산 반송, 대전의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주, 울산, 대전의 참여예산제는 시민들이 예산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자기 몫을 다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안에서는 유채꽃으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 햇빛발전소로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전북 진안은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과 여러 사회적 기업들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성과 원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들은 지역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고, 대전한밭레츠는 지역화폐를 활성화시키며 관계의 그물망을 이어가고 있다. 나조차도 불가능한 꿈이라 여겼던 아나키즘의 공동체가 이미 우리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희망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었다. 다만 그것의 의미를 몰랐기에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말과 행위를 볼 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여러 사상가들과 그들의 핵심 개념들이 떠올랐다. 그런 희망의 힘과 직업병 덕택에 나는 손을 놓고 있던, 내게 의미없다 여기며 차일피일 미루던 박사논문을 쓰리라 마음을 먹었다. ‘풀뿌리 공론장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은 왜 풀뿌리가 희망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태어났다. 여러 활동가들이 몸소 보여준 그 희망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는 희망의 근거를 만들 뿐 아니라 그 희망을 더 부풀리기 위한 내 나름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풀뿌리운동을 사회운동의 한 흐름이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싶었고, 그것이 연구자로서의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앞에서 학문이라는 건 공허하고 얄팍할 뿐 아니라 때때로 경험지(經驗知)를 무시하는 오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왜 현장에 오냐는 질문을 계속 들어야 했고 낯선 시선을 견뎌야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과격한 말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을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다(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더구나 풀뿌리운동은 아이와 가족,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일상을 갖추지 못한 비혼(非婚),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인 지식인은 현장에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풀뿌리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본 희망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처음에는 풀뿌리운동의 활동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예산제도처럼 풀뿌리운동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연구자로 역할을 확대시켜 갔다.

 

그 과정에서 부딪친 또 다른 어려움은 현장에서 느낀 고민을 논문이라는 틀로 정리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풀뿌리민주주의나 풀뿌리운동에 주목하거나 그 의미를 밝히려는 연구는 거의 없고,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 사회주의운동, 민족주의운동을 논문의 틀에 담은 연구들은 있었지만 풀뿌리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배운 학문이란 유명한 인물이나 영웅, 사상가를 따라잡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공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유권자로서나 가치를 인정받을 뿐 그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못했고, 연구자들도 그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간혹 한나 아렌트(H. Arendt)나 니체(F. Nietzsche)를 만나고 나중에는 함석헌, 장일순같은 뛰어난 사상가를 만나기도 했지만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사람들을 하나의 논문에 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방식은 풀뿌리운동의 고민을 정리한 뒤에 그런 고민과 연관되거나 고민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박사(博士)란 것이 넓은 시야보다 좁은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요구받고 풀뿌리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운동의 의미와 사상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풀뿌리공론장’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박사논문의 목표를 수정했다. 서양철학을 기본논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 난처했지만 현장의 고민을 중심으로 그것을 재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목표를 제대로 충족시켰는지는 의문이지만 논문의 마지막 장에는 경기도 과천시의 풀뿌리운동 사례를 대입해서 현실과의 접점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박사논문은 아직도 치수가 어긋난 옷을 입은 사람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 풀뿌리활동가들에게 바치는 논문이었음에도 정작 활동가들은 서양사상의 개념들로 구성된 내용을 어려워했다.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나의 부족한 내공의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 내 목소리로 얘기하려면 논문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했다.

 

사실 애시당초 학문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시작했음에도 지금 우리는 책을 책으로만 대한다. 과거의 사상가들이 미래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책을 기록한 것은 아닐 터이니 우리는 과거의 지혜를 현재에 유추할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것에서 정답을 찾을 수는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답이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현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연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거나 허황된 미래를 예측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논문을 쓴다는 핑계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동안에도 현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며 소통하지 않으면 내가 의지해야 할 현실의 근거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활동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활동가는 자신이 맡은 과제를 성공시키는 과정과 그 결과로 평가를 받지만 연구자는 활동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기록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과제를 맡는다.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려면 그와 관련된 다른 연구나 책을 공부해야 하고 그에 맞게 활동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 둘을 모두 잘 하면 좋겠지만 하다 보면 어느 한 곳에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때는 그 짐이 버거워 추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독일의 작가 미카엘 엔데(M. Ende)의 소설 『모모』를 떠올렸다. 모모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도둑들은 그 지극히 평범한 능력을 가장 경계했고 결국 모모에게 지고 만다. 그런 모모를 생각하며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그래, 내가 얘기를 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듣고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자. 굳이 내가 답을 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자. 그러자 그토록 부족했던 시간이 아주 넉넉하게 채워졌고 내 삶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이런 믿음을 얻기까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허나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내 삶을 성장시키며 살게 되었으니 기쁠 뿐이다. 다만 과제는 남은 시간 동안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일이고 더욱더 기름지게 거름을 뿌리는 일이다. 믿고 바라는 것만큼 내 삶이 그렇게 움직이고, 그런 실천이 더 나은 공부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3. 서로 보살피는 삶과 지식인으로서 뿌리내리기

나와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외부의 사상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것들은 우리 내부의 차이이기도 하고 우리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외부는 중요하다.

 

다만 지금 우리는 거울의 매혹과 아름다움에 빠져 자기 모습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거울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만 드러나길 원한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아침형 인간’, ‘몸짱’, ‘짐승남’같은 틀로 자신을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삶이란 어떤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선하고 악한 것이 뒤엉켜 있다. 피카소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그 모습이란 여러 단면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형태이고 남들이 보면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조작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지 못한다면 내 삶을 살기가 어렵다. 시간도둑들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고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특히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 공동체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국가의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활이 서로 보살피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지 않고 안과 밖이 경계를 이루면서도 다양한 삶들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가령 옛날 집집마다 있던 마당은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하는 공간, 가정과 일터를 연결하는 공간, 가족과 마을을 연결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다양한 공간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었다.

 

물론 과거의 공동체를 무조건 이상적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연의 생명이 순환하듯이, 인간사회도 그렇게 순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것은 도시로, 조금 더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것은 농촌으로 가야 옳다. 다만 그 둘의 균형이 맞아야 순환이 계속될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균형이 무너져 있다. 무조건 도시가 좋고 편한 게 옳고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인정을 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런 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서 삶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불안하니까 우리는 자꾸 국가나 시장에 매달린다.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고 기업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길 원한다. 시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고, 국가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런 주장은 공허한 바람이고, 우리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듯이 국가와 시장은 한통속이다. 그들은 풀뿌리들의 삶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국가에 집착할까? 좋은 정치인, 좋은 정당이 우리의 삶을 지켜줄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 것일까?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유럽의 복지국가를 많이 얘기하지만 나는 복지국가가 진보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식민지를 가혹하게 착취했던 제국주의 없이 유럽의 복지국가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이나 조셉 폰타나(Josep Fontana)의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보면, 서구문명이란 착취의 흔적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소위 선진국들은 식민지의 민중들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몰아서 그들의 영혼을 빼앗고 하얀 가면을 씌웠다. 그들은 땅과 자원을 빼앗을 뿐 아니라 생활의 기반 자체를 파괴했다. 우리가 먹는 커피, 초콜릿, 설탕 등 일상 곳곳에 제국주의 지배의 역사가 숨어 있다. 여름철 폭우와 겨울철 폭설, 황사와 사막화 등 기후변화에도 그 지배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선진국들은 전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과 여성들에게서 많은 자원과 생명을 빼앗고 있다. 그런 역사와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가 그들의 길을 따라야 할까? 설령 우리가 그 길에 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기 위해 또 다른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의 풀뿌리 공동체를 짓밟아야 할텐데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식민지는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남모를 상처가 새겨져 있다. 흔히 이를 정신적 상처인 트라우마라 표현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식민지의 상처는 심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심리학자 파농(F. Fanon)이 말했듯이,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저항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고만고만한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히며 대리만족을 얻고 지배질서를 대물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를 버리라는 건 자신을 버리라는 것과 똑같다.

 

더구나 식민지의 경험은 우리에게 민족과 국가의 일치를 가져왔다. 공동체의 경계가 민족, 국가와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일시했다. ‘민족=국가’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국사를 배우고 군대를 다녀오고 스포츠경기에 열광하고 국민가수, 국민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국민임을 깨닫는다. 이런 경험의 공식을 깨지 못한다면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게 아나키즘은 이런 지배의 역사를 깨고 풀뿌리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식민지를 벗어날 중요한 방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남쪽으로 튀어』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념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념은 과거가 누적되어 현재로 흘러나온 흔적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45년 해방까지 일본과 한반도, 중국대륙을 넘나들던 사상을 아나키즘만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아나키즘이라는 하나의 실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했던 그 다양한 삶의 단면들일 뿐이고, 내게 그것의 이름은 대동사상이기도 하고 풀뿌리이기도 하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듯, 아나키즘도 하나로 굳어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웠으리라 믿는다.

 

설령 그 과정에서 이념의 흔적을 찾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세상을 바꾸리라 믿지 않는다. 삶으로 녹아들지 못한 이념은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 마을, 공장, 구청, 시청, 국회, 청와대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념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의 규칙에 쫓겨 우정도, 사랑도 모두 뒤로 미루는 사회에서 이념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념이 꽃을 피우려면 국가나 자본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서도 우리가 생활하고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옛날 마을 공동체에서는 과부나 고아, 장애인도 굶어죽지 않았다. 간혹 그렇게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마을 전체가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썩어가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 우리는 서로 아무 것도 나누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아 윤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환대의 사상가 피터 모린(P. Maurin)의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간단한 윤리조차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이념을 윤리로 다듬고 내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평생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러리라고 대답할 듯하다. 어차피 공부란 것이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일상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에도 가르침과 깨달음은 숨어 있다. 숨은 진리를 찾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도 아주 즐겁다. 그동안 떠도는 지식인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모모처럼 마을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에 내려가 지역의 고유한 지식을 몸에 익히고 싶다. 지금 한국의 지식사회는 서구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 중심이다. 서울로 수입된 학문이 지방으로 확산된다. 서울에서 인정을 받아야 소위 ‘전국구’로 이름을 내걸 수 있으니 지식인들도 서울로 입성하려 발버둥친다. 그래서 나는 수도권을 떠나고 싶다. 서울을 떠나야 내 속의 생각과 감정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는 우리 각시와 아이도 조금은 나은 환경에서 성장하리라 믿는다. 우리 가족이 도시의 무미건조하고 단절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런 감성과 생각을 익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쥔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쥘 수 없다는 점을 가족과 함께 깨닫고 나누며 살고 싶다. 내가 평생 해온 공부는 그렇게 나를 비추며 나를 이끌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작고 사소하지만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라는 화두를 품고 살다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사실 아나키스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점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체제인 한국에서 무(無)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비(非)현실을 넘어 반(反)현실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자명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강제적인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강권주의’로 받아들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인 억압 모두에 반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 독점된 자본,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 가부장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고, 아나키즘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로는 아나키즘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무정부주의라고 부르면 아나키즘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체제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체제를 내면화하고 있고 그것을 지탱하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나키즘을 단순한 상부상조의 사상이나 이타적인 사상으로 해석할 수 없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이타적인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외려 아나키즘은 자기 안의 생명력의 근원을 인식하고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사람들, 내가 알고 가지고 품고 있는 것이 온전히 내게만 속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것을 더불어 누려야 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나키즘의 이타성은 진정한 자아에 대한 고민, 자신이 가진 에너지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된다. 개인주의에서 공산주의까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나키즘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 함께 묶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당신은 의사이다.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찾아와 왕진을 부탁한다. 허름한 빈민가에 위치한 그 남자의 좁은 집엔 노동에 지쳐 쓰러진 부인과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 과로와 빈혈에 시달리는 그 여성에게 푹 쉬고 잘 먹으라는 처방을 내릴 건가? 다음 날 잘 차려입은 하인이 와서 당신에게 왕진을 부탁한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도착하니 첫눈에 딱 봐도 햇볕을 쬐지 않고 너무 일을 하지 않아 파리하게 시든 부인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어떤 처방을 내릴 건가? 당신이 병을 고치는 의사라면 그 병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얘기한다. “만약 당신이 진실한 인간이라면, 만약 당신 안의 동물성이 아직 지성을 말살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만 해. 약간의 좋은 생활과 지적인 발달이 환자와 질병의 반을 감소시켜줄 것이다.’ 약은 악마에게나 줘라! 신선한 공기, 좋은 음식, 과로하지 않을 것―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의사란 직업은 기만과 술수에 불과하리라.”

 

이 글에서는 비슷한 사례들이 반복된다. 땅을 빼앗기고 찾아온 소작민에게 변호사인 당신은 뭐라고 충고할 것인가? 기타 등등... 지금 한국의 상황은 이와 다를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실존적인 고민에서 자유로운가? 당신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역사 속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고민을 통해 탄생했다. 유명한 역사가 신채호도 이 글을 읽으며 고민에 빠졌고 아나키즘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인사과에 근무하는 당신에게 명예퇴직을 시킬 사람들을 고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변호사로 일하는 당신에게 비리경찰/검찰을 변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과학자로 일하는 당신에게 4대강에 운하를 만들 방법을 고안하라는 제안이 떨어졌다. 정보통신업을 하는 당신에게 SNS를 감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이것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당위의 물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인간이고 너는 누구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의 물음이다.

 

나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이와 같은 고민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개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단지 우두머리만 바꿀 뿐이다.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가리는 또 다른 의미는 아나키즘이 임금제도와 사적 소유권, 대규모 공장노동, 지나친 도시화를 반대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우두머리 없는 사회는 왕이나 대통령의 목을 벤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존엄하게 일하고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만 아나키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 무정부주의라는 표현은 그런 삶에 대한 강렬하고 치열한 욕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작은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권력이 없어져야 하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사상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와 전 지구의 변화를 꿈꿨고, 지구상의 단 한 명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바쿠닌의 얘기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혁명의 불씨를 지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꼼뮨들의 꼼뮨을,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꿈꿨다.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건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꼼뮨이었다. 꼼뮨에서 인간의 자아와 자유는 제한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아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꼼뮨들의 꼼뮨을 통해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억압적이지 않고 존엄한 노동질서를 만들며, 더불어 살고 함께 누리는 관습과 문화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이 꿈꾼 세상이었다.

 

사실 크로포트킨은 왜 작은 공동체들이 지속될 수 없고 실패하는가라고 물으면서 종교적인 규율이나 소수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공동체들이 결코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자율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꼼뮨은 작아야 하지만 그것이 폐쇄적이거나 물리적인 거리로 측정될 수는 없다.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이 연방주의를 궁극적인 대안이라 봤던 건 공동체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인가? 내가 누구 옆에 함께 서 있는가에 따라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고 활동가, 혁명가일 수도 있다. 기득권층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눈엔 테러리스트로 보일 것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눈엔 희망으로 보일 것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우리를 위해 싸우는 아나키스트는 불의를 받아들이고 굴종하느니 차라리 부딪치고 깨지는 삶을 택했다. 그게 테러라면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이다. 그것도 아주 극렬한...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이 투표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잣대는 그 행위의 의미이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에 도움이 된다면 투표도 가능하다. 하지만 투표로 세상에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투표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다양한 사회활동과 동일한 무게를 가지는 수준에서 투표는 유효한 도구일 수 있다.

 

정당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집권’정당은 아나키즘의 비판대상이다. 하지만 권력을 해체하려는 ‘분권’정당, 연방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은 어떨까? 아나키즘이 정파와 정치활동을 비판했지만 그 비판의 근거는 정치 자체, 정치가 이루어지는 세계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정치라는 가상의 관계가 덮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 냉혹한 경쟁의 이해관계가 가리고 있는 서로 보살피는 관습의 세계는 아나키즘이 구현되는 장소이다. 정당활동은 그 세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사람들의 연합과 자율성을 지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정당이 사람들을 이끄는 전위를 자처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강권일 뿐이다.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는가? 행동하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이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이미 세상은 좋든 싫든 어떤 방향으로건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굴러가듯이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내가 원하고 뜻하는 바대로 세상이 움직이면 좋겠지만 그건 이 세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겹치고 부딪치며 결정되기 마련이다.

 

아나키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의 억압적인 세상과 단절하고 더불어 자유롭게 살기 위한 삶의 방식이자 더불어 사는 생활의 대안이라고 답하련다. 연방주의와 공유와 협동의 경제, 자유롭게 연대하는 개인들의 연합체가 바로 아나키즘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매력적인 사상이기에 숱한 오해를 받아온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정말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국가나 자본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나? 아나키즘은 외부에서 힘을 끌어오는 삶이 아니라 내 속의, 우리 안의 힘을 활용하는 삶을 원한다. 즉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복지를 이루는 방식이 문제이다. 한 번도 약자의 것인 적 없었고 그의 것일 수도 없는 국가가 갑자기 착해지리라, 사악한 자본이 인간의 얼굴을 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령 그런 양보가 이루어지더라도, 기득권의 선의에 기댄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국경일과 휴일에 따라 일하고 쉬며, 대중매체의 보도에 따라 세상을 읽고,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 열광하고, 공장과 사무실의 지시에 따르는 우리들의 삶은 수동적이다. 반면에 아나키즘은 능동적인 삶을 지향한다.  나는 광주와 강정, 배제되고 억압받는 시공간을 살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신뢰하며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며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내 속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없이 삶을 살겠다고, 더 이상 국가와 자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신념이다. 무한경쟁과 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은 가장 강력한 반대인 셈이다. 그래서 가장 무시되는 사상이기도 하고 가장 두려운 사상이기도 하다.

 

사상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아나키즘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율성이다. 좌와 우 모두에서도 인간의 자율성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존엄한 인간이어야, 이미 존엄한 인간은 아닐지라도 존엄해지려는 열망을 품은 인간이어야 자율성을 논할 수 있다. 이건 자신 속에서 나와야 한다. 쓸모없는 인간, 잉여가 아니라 각자가 고유한 가치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선거 때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벗어나 내가 꿈꾸는 사회를 실제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상이니까.

조금 낯설지만 탈협동화(demutualization)협동조합의 법적 형식이 합자회사나 주식회사 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협동도 제대로 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무슨 탈협동화냐고 되물을 수 있다. 닥쳐올 것(아니, 이미 닥쳐왔을 수도 있는 것)을 미리 조망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

 

 

1. 해외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유럽의 협동조합들은 생산과 소비, 신용, 문화 등의 영역에 폭넓게 퍼져 있다. 세계가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은 신용조합이나 협동조합은행이다. 유럽의 조합원 수나 매출고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을 포괄하는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인 현대중공업보다 조금 적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는 8만 4천명으로, SK나 롯데보다도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리고 전 국민의 60%가 조합원인 스위스에서는 협동조합이 카르푸의 매장을 인수했고, 이탈리아의 볼로냐는 한국 협동조합 관계자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이런 소식만 들으면 호황기에 무슨 탈협동화를 논할까 싶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연구하는 갈러(Z. Galor)가 홈페이지(www.coopgalor.com)에 올려놓은 자료들을 읽다보면 협동조합의 부흥기 뒤에 협동조합 정체성의 변화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갈러는 전 세계 다양한 협동조합들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나타나고 그것이 소비자협동조합과 에너지협동조합에서 두드러진다고 지적한다. 갈러가 지적하는 주된 원인은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 부족이다. 협동조합이 탈협동화되어도 조합원들은 관심이 없거나 외려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지지한다.

 

물론 모든 문제가 조합원들 탓은 아니다. 조합원의 삶을 지지하거나 조합원과 함께 성장하지 않는 협동조합의 구조도 문제이고, 세계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나 초국적기업들과의 경쟁, 협동조합이 낡은 것이라는 편견같은 외부요인들도 탈협동화를 부추긴다.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이스라엘의 트누바(Tnuva)는 연계형 협동조합(secondary cooperative)으로 농업공동체인 모샤브(Moshavim)와 키부츠(Kibbutzim)가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트누바는 빠르게 성장했고, 각 조합의 지분과 가치도 높아졌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아니라 위원회가 트누바를 운영했고, 조합원들은 트누바의 성장에서 몫을 공유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낙농업을 하는 조합원들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고, 트누바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는 이스라엘의 대기업이 트누바를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에이팩스(APAX)사가 10억 달러(트누바의 실제 자산가치는 8억 달러 정도)를 제안하자 총회는 압도적인 비율로 지분의 매각을 결정했다(에이팩스사가 51%의 지분을 차지!).

 

갈러는 조합에 관심을 가진 조합원 그룹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탈협동화에 맞섰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어쨌거나 이런 전환의 결과 2011년 7월에는 트누바의 비싼 치즈가격 때문에 이스라엘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조직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협동조합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협동조합간의 연대도 좋지만 연계형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구조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는 1990년대부터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 확장전략을 펼쳐왔다. 그 결과 유통이나 금융부문의 자회사들 중 상당수가 협동조합이 아니고 해외의 현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조합원이 아니다. 이 역시 협동조합이 시장에서의 생존과 확장전략을 최우선으로 내세울 때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변화가 온전히 협동조합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갈러가 탈협동화의 외부요인이라 얘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정권의 집중’이다. 세계가 ‘1 대 99의 사회’로 전락한 것은 99%의 사람들에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이 계속 성공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분노하라’의 열풍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위기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2. 왜 협동조합은 번성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앞선 경험에서 받아들여야 할 시사점은 분명히 있다. 유럽 협동조합의 기본은 농민과 소상공인, 도시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위해 협동조합은 분권화를 추구했고 지역과 지방은행을 강화시켰다. 중앙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 퍼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급이 기본이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중앙이 개입했다. 중앙이 가서 판 깔아주고 컨설팅해주고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협동조합들은 자급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분권화되어 있어 유연하고 조합원이나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협동조합이 조직되는 방식은 어떤가? 수도권과 중앙 중심이고 그 구조가 집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에 관한 물음을 던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협동조합이 번성한 곳들, 즉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과 같은 나라들이 연방국가라는 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고용구조가 협동조합의 성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고 협동조합이 어떤 곳에서나 성공한다거나 외국의 모범사례를 따라 열심히 규모를 키우자고 주장하는 건 무책임하다.

 

사실 ‘뭉치고 힘을 키우면 이긴다’는 논리는 정신승리법에 가깝다. 과연 우리는 세계경제의 변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 슬럼프』에서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주도하는 탈정치화의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맥낼리는 얘기한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이 이러니 따라가자, 복지국가도 따라가자, 이런 식의 발상이야말로 낡은 편견이다. 이미 협동조합의 주류는 유럽에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구리모토 아키라 이사가 “아시아 협동조합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아시아의 협동조합은 소비자운동과 결합되어 시작되었다. 생협운동이 사회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생협운동이나 인도의 낙농협동조합 ‘아물’, 그라민 은행 등이 그 예이다. 이 기사는 정부의존에서 벗어나 조합원의 요구에 따르고 조합원이 지지하는 사업과 활동을 펼칠 뿐 아니라 사회의 공익과제를 담아내 협동조합의 존재 의의를 높여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삶에, 먹거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구성, 노동조건, 생활하며 겪는 다양한 문제들에, 다양한 사회운동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나?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은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인데 잊혀진 것이다. 협동조합운동은 살림운동이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물건은 낡아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새것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런 기억과 관계를 만드는 운동인데, 그걸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국가나 시장이 ‘향수’를 만들거나 그것을 소비하도록 강요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풍취를 만들지 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 가장 강력한 무기를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갈고 닦아 왔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예전에 한 간담회에서 우연히 황주석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분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만남 뒤에서야 황주석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 앞에서 뭐가 뭐라 떠든 것을 한참을 후회했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셔서 주워담지도 못한다. 지금 다시 황주석 선생님을 봬면 나는 여러 가지를 묻고 싶다. 그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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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서 생활하려면 다양한 서비스가 필요하다. 보통은 정부가 보육, 교통, 환경, 복지 등 다양한 서비스를 맡지만 관료주의가 생기면서 많은 예산에 비해 실제 주민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았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를 시장의 몫으로 넘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는 서비스가 지불능력에 따라 차별화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그래서 정부나 시장이 아닌 다른 영역이 사회서비스를 맡기자는 발상이 제3섹터의 출현을 불러왔다. 국가마다 그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제 3섹터는 민간기관이 비영리 활동을 펼치고, 공공부문이 영리활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중간지대’를 뜻한다.

 

발상은 그랬지만 그 이전부터 국가와 시장의 규칙에 지배당하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이런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3섹터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자치/자급조직의 입지를 강화시키자는 구상이기도 했다(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독점재벌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복지체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한국이다보니 1990년대부터 제 3섹터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외국사례를 소개하고 구상하는 수준에 머물다 자활사업과 사회적 기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2008년에는 한국노동연구원이 한국의 제3섹터를 경험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3섹터는 중간지대를 만드는 사회전략이고, 그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이야말로 사(私)와 공(公)의 중간에 있는 조직이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조직이지만 사회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바로 협동조합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이윤을 배분하기 때문에 비영리인 제3섹터에 속하기 어렵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하지만 외국과 달리 한국협동조합의 현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제3섹터의 성격과 충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협동조합운동과 제3섹터 논의가 다양하게 접목될 수 있다.

 

하지만 접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겹쳐지며 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글이니만큼 많은 논의를 하기는 어렵고 몇 가지 쟁점만 얘기해 보자.

 

첫째, 제3섹터는 권력과 화폐가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참여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성, 자발성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영역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영역에서 힘을 얻고 자존감을 회복한다. 이는 YMCA를 비롯한 다양한 생협운동, 협동조합운동이 목표로 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그런 제 3섹터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특히 한국처럼 정부와 시장의 영향력이 강할 뿐 아니라 그 둘이 결탁(정경유착)해서 사회를 지배하는 곳에서는 중간지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영향력 있는 몇몇 명망가나 단체들은 그런 영역을 개척할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로 그 영역이 확장될 수는 없다는 회의적인 비판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운동은 제3섹터로의 확장에 앞서 이런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을 넓혀왔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 정부와 시장의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규칙에 저항하며 그 영향력을 제 1섹터와 제 2섹터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가? 강정마을이나 삼성전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는가?

 

둘째, 협동조합운동이 제3섹터에서 활동하려면 자율적이어야 하는데, 정말 자율적인가? 물론 대부분의 협동조합이나 제3섹터가 그런 자율성을 유지한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정부와 국가는 좀 다른 개념이고 협동조합운동이 정부로부터 자율적일지는 모르나 국가로부터는 자율적이지 않다. 정부와 달리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다. 특히 한국의 국가는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통제체계를 만들며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방식을 관리해 왔다. 협동조합운동은 이런 국가로부터 자율적이고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관계와 삶들을 만들어 오고 있는가?

 

흔히 협동조합이 운동과 사업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고 얘기하는데, 수도권 문제, 국가규칙을 따르는 순응적인 삶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협동조합이 제 2섹터를 강화시키는 경제조직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거시적인 과제를 빼놓고 지역활동만 강조하다보니, 그보다 더 거시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제3섹터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여전히 관주도이다. 사회적기업 인증제도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국가는 대안적인 개념도 자신의 것으로 포획한다. 제3섹터의 활동을 ‘지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배’하려 든다. 그러니 대안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실제로 대안이라고 할 만한 사례가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동안 어떤 사례를 만들어 왔는가?

 

그런 점에서 <YMCA>의 협동조합운동이라면 좀 달라야 한다. 故황주석 선생이 이미 그런 틀을 닦아 놓았다.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에서 황주석 선생은 ‘시민생활나라’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시민생활나라는 참여와 자치, 자결과 협동을 중히 여기고 이로써 운영됩니다. 또한 시민생활나라는 연대를 중히 여깁니다. 나라 안의 연대, 나라 간의 연방을 형성하며 나라가 뻗어갑니다.” 중요한 말들이 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전략을 황주석 선생은 실천하셨다.

 

YMCA의 협동조합운동은 이 고민과 실천을 이어받아 지금 현실에 맞게 고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민 없이는 확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대안지식연구회 이름으로 <인문정치와 주체>라는 책이 지난 주에 나왔다.
거기에 실은 글인데, 3-1운동 기념으로 블로그에 올린다.
운동에 대한 기억과 인식이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구조를 바라보는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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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의 사건은 일제 식민지를 살아가던, 그리고 강압적인 권력에 억눌려 신음하던 많은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3․1운동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라 칭했다. 그리고 사상가 함석헌(咸錫憲)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우리는 3․1운동을 유관순 누나의 태극기 사건,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지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건,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사회운동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해석도 엇갈린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의혈(義血)은 조금도 막히거나 방해되는 바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비극을 겪었는데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자 씨의 역사를 알리는 사건이었을까?

 

 

1. 3․1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불리는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이미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화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첫번째 통감으로 부임했고, 각 부의 차관을 모두 일본인이 차지했다. 13도의 사무관도 일본인으로 대체되었고 한인 경찰 250명이 해임되고 일본인으로 대체되었다. 통감부가 모든 법관을 임명했고 사법권을 행사했다. 그러니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모두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일제에 대한 민중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해산된 군대의 군인들과 지방의 유림(儒林)들은 과거 외국군대가 침입하면 등장했던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라 무기를 들고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자 일본 통감부는 이런 저항을 철저히 억압했고 1909년 9월, 10월에는 호남지방에 보병 2개 연대를 파병하고 전함까지 동원해 의병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이처럼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은 매국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저항을 총칼로 억누르고 이루어졌다.

완전히 권력을 차지하자 일제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경찰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고 그들의 권한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헌병과 경찰의 수는 매년 늘어나 1910년 653개, 2,019명이던 헌병과 481개, 5,881명이던 경찰의 수는 1918년 9월 말이 되면 헌병대 1,048개, 8,054명, 경찰관서 738개, 6,287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그리고 그 수에서 드러나듯 일제는 경찰이 아니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다. 그러니 식민지의 일상은 치안이 아니라 전쟁상태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은 범죄를 단속하거나 첩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국경세관업무, 산림감시, 민적(民籍)업무, 검역․방역, 묘지단속, 노동자 단속, 일본어 보급, 농사개량, 도박 및 무속, 매음부, 풍속 단속 등의 업무까지 맡았다. 그러니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들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행정체계도 완전히 바뀌었다. 일제는 동학혁명, 의병봉기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자치적인 공동체가 식민지 통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각 도장관을 친일파로 임명할 뿐 아니라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지방제도도 바꿨다. 이미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는 마을 단위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의 역할을 폐지했고, 1914년 ‘도(道)의 치관할구역(置管轄區域) 및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名稱位置管轄區域)’에 관한 총독부령 제 111호는 12부 317군 가운데 전체의 37%인 1부, 121군을 통폐합하고 새로 1부, 24군을 만들어 12부, 220군으로 조정했다. 그 뒤에도 지방행정통폐합은 계속되어 1910년도에 68,819개였던 동리가 1916년도에는 29,383개, 1918년도에 28,277개 동리로 줄어들었고, 이는 자치적인 동리가 행정적인 면으로 흡수되는 것을 뜻했다. 이와 더불어 각 마을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던 마을이름도 ○○동이나 ○○리로 획일화되었다. 또한 총독부는 부군면을 통합할 때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을 면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로 흡수하려 했다. 일제가 추진한 행정체계개편은 중앙의 총독부와 지방의 면단위 통치기구가 수직적인 질서를 이루며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정체계만이 아니라 사법체계도 일제 권력을 위해 재편되었다. 1910년 12월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경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1911년도에 12,099건이었던 즉결처분은 1918년도에 71,279건으로 약 6배 가까이 증가했고, 처벌인원도 21,288명에서 94,640명으로 증가하여 4.5배 가량 증가했다. 그리고 1912년 3월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는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허용했다. 그러자 태형의 비중은 매년 증가하여 1916년에는 그 비중이 46%에 달했다. 이런 법률들에 따르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지배체제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 지배를 거스르는 학교나 언론은 모두 폐교되거나 폐간되었고, 일본을 칭송하는 어용신문인 경성일보 등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1913년의 ‘의생규칙(醫生規則)’은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 만들었고 의생면허도 20세 이상으로 2년 이상 의업에 종사한 자만을 대상으로 발급해서 상당수의 한의사들이 의료체계를 떠나게 했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대륙으로 진출할 정치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창 성장하던 일본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곳이자 일제의 상품시장 역할을 해야 했다. 무엇을 심고 기를 것인지도 총독부가 결정했고 한국의 공업은 억제되었다. 일제는 일본의 방직산업을 위해 ‘면화채종포(採種圃)’를 설치해 미국면화를 재배하게 했고 ‘종묘장관제(種苗場官制)’를 공포해 일본 종자를 강제로 배급했다. 모를 심을 종자부터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까지 매겼다. 뽕나무 재배를 강요하고 지세, 호세, 시장세,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이런 와중에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 사회에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했고 공유지를 박탈했다. 1919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했고, 많은 농민들이 소유권을 잃었다. 자기 땅을 농사짓던 농부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들은 그 소작마저 잃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었다.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땅을 빼앗고 부당하게 국유지로 편입시킨 땅을 1912년 10월 30일 ‘역둔토특별처분령(驛屯土特別處分令)’을 공포하여 동척(東拓)과 일본인에게 팔아 한국농민을 착취했다.

그리고 1910년 12월 ‘회사령’은 한국인이 “법률상·경제상의 지식·경험이 부족하여 복잡한 회사조직의 사업을 경영할 수 없고, 일본자본가 또한 한국 실정을 몰라 예측 못한 손해를 입을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즉 총독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사를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1912년의 ‘조선관세정률령’에 따라 수입상품에 대한 관세도 매우 낮았다. 1914년 5월에 공포된 ‘신농공은행령’과 ‘지방금융조합령’은 금융자본까지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17년부터 물가가 빠른 속도로 올랐고, 특히 쌀값은 1919년 1월에 거의 두 배로 올랐다. 이렇게 민생이 어려워지자 민중의 불만도 빠르게 늘어났고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한민족에게 자결권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황제가 1월 21일 갑작스레 서거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일제는 식민지를 수월하게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고 사람들의 일상을 철저하게 지배하려 들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단순히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해 조선왕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들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꿈꿨다.

 

 

2. 누가 어떻게 운동을 일으켰는가?

 

3․1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은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포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된다. 민족대표들은 마침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종의 장례식날인 3월 3일을 봉기일로 정했으나 일제의 눈을 피해 3월 1일로 그 날을 앞당겼다. 일본쪽 자료를 따라도 3월 1일부터 약 두달 동안 1,180회의 시위가 벌어졌고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내외의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정점을 이뤘던 3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는 하루에만 50~60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참여인원도 많아 서울에서는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지방에서도 만명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규모만큼 희생도 커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 경찰과 헌병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보통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의 노선에 따라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기록을 보면 아래의 <표1>에서 드러나듯이 폭력적인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표1> 각도별 투쟁양태(폭력․비폭력)(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6)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경북

경남

전북

전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3

14

2

2

 

 

2

 

 

 

 

 

 

 

2

8

4

3

1

10

6

 

3

1

3

 

3

1

18

48

35

13

1

 

3

 

3

 

2

6

 

1

4

 

2

7

3

1

3

 

 

 

10

2

2

 

 

 

2

1

1

1

6

1

10

3

7

15

7

8

19

2

8

38

15

 

2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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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10

 

 

5

 

9

2

 

13

24

4

2

1

4

2

1

 

6

 

2

1

 

39

90

3

8

5

7

24

11

7

11

5

10

2

8

 

23

10

19

11

1

15

1

1

14

1

13

1

2

 

9

8

9

4

5

3

1

 

12

 

10

 

 

 

23

15

17

34

10

25

4

13

26

5

17

1

9

 

2

1

1

1

 

3

 

1

 

 

 

 

 

 

 

 

 

 

 

1

 

 

1

 

 

 

 

 

2

4

 

7

4

2

2

13

9

1

1

 

4

 

 

 

 

 

 

 

 

1

1

 

 

 

 

 

 

 

 

 

1

 

 

 

 

 

 

 

 

1

 

 

 

 

1

6

 

3

 

 

 

 

7

0

56

14

27

14

9

34

1

4

27

15

26

12

5

14

38

12

11

6

19

8

4

0

21

8

18

5

2

51

127

23

38

50

32

72

27

45

83

61

71

54

44

21

20

142

31

22

 

69

60

230

112

61

199

9

2

 

2

1

18

244

166

778

비율

22.4

77.6

26.7

73.3

35.9

64.1

46.5

53.5

18.3

81.7

21.4

78.6

34.6

65.4

 

<표1>에서 드러나듯 3․1운동은 서울과 북쪽 지방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쪽의 운동은 잦아들고 남쪽 지방의 시위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그 운동의 형태는 각 지방의 상황에 따라 달랐고 때로는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를 불태우는 폭력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황해도 수안의 시위, 경기도 안성군 원곡․양성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의 시위를 ‘전국 3대 폭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시위에서 민중들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거나 경찰주재소를 방화하고 면사무소를 점거하거나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제 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다. 경기도에서만 경찰관서 17개소, 주재소 12개소, 군청․면사무소 35개소, 우편소 2개소 등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외에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경남지방에서는 경찰관서 15개소, 헌병분견소 7개소, 군청․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등이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81명이 사망했고 2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54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니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으로 3․1운동의 진행과정을 분석하기는 어렵다.

3․1운동이 시작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 고종의 사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작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계기였을 뿐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민중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이미 화약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가 3․1운동 이후 조사한 내용을 보면 그 불만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①일본인은 리비(理非)의 여하에 불구하고 즉시 구타하는 버릇이 있다. ②양반, 유생에 하등의 특권이 없음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③각종의 행정시설이 번잡한 일. ④산업의 장려는 민의(民意)에 반하고 또한 강제적인 점. ⑤제세(諸稅) 징수의 부담이 과중하고, 또 무엇에나 세를 과하는 그 고통은 오히려 한국시대의 폭정보다 못하다. ⑥부역(賦役)이 과중한 것. ⑦인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갖가지 공사를 하는 일. 관에서 멋대로 인민의 토지를 도로로 만들고 사후에 강제적으로 기부시키는 따위. ⑧공동묘지는 고래의 관습을 돌보지 않고 규칙을 발표하여 이행하였기 때문에 심적인 불평이 적지 않고 자연히 원망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⑨행정관리는 조선인을 대하는데 있어 압박으로써 임하고 오만, 불친절하며, 어쩌다 상응되는 사정에 대하여 의견을 말해도 흘려듣고 상관에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정상달(下情上達)이 전혀 불가능하여 민정을 개진(開陣)할 길이 없다. ⑩산업 장려에 대한 불평은 민도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일의 성공을 서두른 결과 일률적으로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인민의 고통이 심하다. 토지 없는 자에 뽕나무 묘목을 강제로 분배하고 대금을 받아내기 때문에 인민은 이것을 땔감으로 하여 대금을 지불하며, 혹은 죽은 묘목을 분배하고 대금을 독촉하거나, 가마니 제조를 강제하여 한 호(戶)당 1개월에 몇 매씩 만들어 내라고 엄명하여 독촉하기 때문에 인민 중 자기가 만들지 못하는 자는 부득이 매월 타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제납(提納)하고 있다. 이런 일을 호소해도 관리는 조선인의 말을 흘려듣는다. ⑪오늘날의 행정은 모두 규칙 뿐으로, 무슨 일에나 규칙에 위반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어 번루(煩累)를 느끼는 바 크다.”(이정은, 2009: 78). 따라서 3․1운동은 지도자에 이끌린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의지가 터져나왔던 운동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도 매우 다양했다. 식민지의 지식인만이 아니라 많은 농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했다. 아래 <표2>를 보면 그 다양함이 잘 드러난다.

<표2> 3․1운동 수감자의 계급․계층별 구성(3.1~5.31)(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38)

 

경기(서대문,인천)

강원

(춘천)

충남(공주)

충북(청주)

함남(함흥, 원산)

함북(청진)

평남(평양, 진남포)

평북(신의주)

황해(해주)

경북(대구)

경남(부산, 마산, 전주)

전남(광주, 목포)

전북(전주, 군산)

농민(일부지주포함)

884

(46.3)

81

(77.1)

325

(78.9)

119

(70.0)

502

(65.7)

54

(67.5)

761

(62.7)

289

(52.5)

623

(66.6)

698

(64.9)

408

(54.1)

80

(32.3)

145

(49.7)

4,969

(58.4)

노동자

125

(6.5)

1

(1.0)

3

(0.7)

1

(0.6)

20

(2.6)

2

(2.5)

47

(3.9)

13

(2.4)

12

(1.3)

59

(5.5)

25

(3.3)

12

(4.8)

8

(2.7)

328

(3.9)

지식인․청년학생

교사

학생

416

4

31

24

83

4

134

80

51

149

87

93

70

1,226

(14.4)

종교인

103

1

3

0

11

0

26

24

19

32

43

2

3

267

(3.1)

기타자유업자

57

1

12

8

21

3

30

20

40

23

40

12

16

283

(3.3)

576

(30.1)

6

(5.7)

46

(11.2)

32

(18.8)

115

(15.1)

7

(8.8)

190

(15.9)

124

(22.0)

110

(11.8)

204

(19.0)

170

(22.5)

107

(43.1)

89

(30.5)

1,776

(20.8)

상공업자

상업종사자

136

11

23

10

86

13

110

49

96

53

76

22

33

718

(8.4)

기타자영업종사자

31

2

2

1

9

2

31

27

38

10

8

5

7

173

(2.0)

공업종사자

98

2

9

3

26

2

19

22

29

36

22

7

8

283

(3.3)

265

(13.9)

15

(14.3)

34

(8.3)

14

(8.2)

121

(15.8)

17

(21.3)

160

(7.6)

98

(17.8)

163

(17.4)

99

(9.2)

106

(14.1)

34

(13.7)

48

(16.4)

1,174

(13.8)

무직자

61

(3.2)

2

(1.9)

4

(1.0)

4

(2.4)

6

(0.8)

0

(0.0)

55

(4.5)

27

(4.9)

27

(2.9)

16

(1.5)

45

(6.0)

15

(6.1)

2

(0.7)

264

(3.1)

1,911

(22.5)

105

(1.2)

412

(4.8)

170

(2.0)

764

(9.0)

80

(0.9)

1,213

(14.3)

551

(6.5)

935

(11.0)

1,076

(12.6)

754

(8.9)

248

(2.9)

292

(3.4)

8,511

(100.0)

 

<표2>에서 드러나듯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농민들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그 비율이 58.4%나 된다. ‘조선태형령’에 따라 감옥에 갇히지 않고 매를 맞고 풀려난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농민들의 참여비중은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지식인과 학생이 그 다음으로 20.8%를 차지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13.8%나 참여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비중은 3.9%에 불과하지만 당시 공장에서 노동하던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심지어 거지와 기생까지도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계급·계층적인 참여 외에 종교단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은 천도교와 기독교, 유림(儒林)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는 문중(門中)이 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따라서 3․1운동은 계급이나 계층, 종교의 구별 없이 전민중적인 저항을 조직했다고 얘기될 수 있다.

참여한 계층이 다양했던 만큼 시위의 방식도 다양했다. 길거리나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을 뿐 아니라 한밤중에 산봉우리에서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시위도 벌어졌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만세를 부르거나 인근 지역을 돌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세를 부르다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시위를, 학생들은 동맹휴학, 노동자들은 파업시위를 벌였다. 경남 창원의 경우 주도자들이 ‘십인장(十人長)’, ‘이십인장(二十人長)’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감고 시위 군중을 지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만세꾼은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어’ 원거리 시위에 참가하는 의도적인 시위군중인 동시에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봉기를 유도하거나 지역적 연계를 꾀하는 이른바 ‘바람몰이꾼’” 역할을 맡았다(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0). 그리고 시위만이 아니라 묘목을 버리거나 부역을 거부하고 납세 고지서를 받지 않고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일본인에게 식량이나 연료 판매를 거부하는 등의 일상적인 투쟁도 함께 벌였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고 ‘대한독립만세’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구가 나왔다. 거리 곳곳은 연설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연설했다(이정은, 2009: 301; 이지원, 1989: 344). 그리고 시위마다 태극기와 각종 선언문, 전단, 경고문, 격문, 포스터 등이 뿌려졌다.

어떤 곳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이 대표적이다. 화수리 주민들 중 1집마다 최소한 1명씩이 참여했고 장안면, 우정면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경찰 주재소에 불을 질렀으며 주민들을 모욕하고 괴롭히던 일본경찰을 때려죽였다. 이에 일본은 화수리의 마을을 비롯해 여러 마을의 집 30채를 불 지르고 주모자인 차희식, 이영쇠에게 징역 15년형을 내렸고 그 외에도 체포된 사람 약 20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특이한 점은 3․1운동의 시위들이 면사무소나 경찰․헌병주재소같은 공공기관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장터나 거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난 뒤엔 거의 대부분이 공공기관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그곳의 경찰과 헌병들이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몸을 다쳤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공서를 목표로 삼은 것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의지와 더불어 ‘자치(自治)’에의 강한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향촌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했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고, 그런 공격을 과거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구장(區長, 지금의 이장)들이 주도했다는 점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심지어 전남 순천군의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기도 했고, 평안도 의주에서는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민단 사무를 집행하기도 했으며,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미도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접수하고 면사무소를 인수해 약 20일동안 행정사무를 봤다.

일제는 이런 자발적인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때리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서야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민중들을 탄압한 것은 일제의 경찰이나 헌병만이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 소방대들이 도끼와 경찰용 총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들을 습격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제는 모든 힘을 동원하고서야 이런 흐름을 한풀 꺾을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잦아든 듯 보였지만 3․1운동은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을 서서히 형성하고 있었다.

 

 

3. 3·1운동의 발전

 

1890년 동학혁명 때 등장했던 민중(民衆)이란 개념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라고 한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가리킬 뿐 아니라 민족독립과 역사발전의 주체를 뜻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의 영향이라는 지적도 있다(장상철, 2007: 29).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고 이후 전국에 지부가 결성되기도 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농민문제도 중요하게 다루며 소작제도와 일제 수탈을 반대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에는 소작농민들이 <소작인조합>운동을 벌였고 이는 1930년대의 <농민조합>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당시까지도 촌계(村契)나 동계(洞契)같은 자치의 전통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런 연대를 기반으로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민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간의 자율적인 결사체인 계가 지역사회의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만세가 지나간 후에 일어난 것은 강연회였다. 난물이 한번 휩쓸로 지나간 다음에 시커먼 살진 땅에 무수한 싹이 터 올라오듯 삼천리를 뒤흔드는 격동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차차, “아니다, 배워야 되겠더라!”하게 됐다. 그래 일어난 것이 연달아 밀려오는 물결처럼 골짜기를 찾아 든 강연반이요, 그 뒤를 이어 일어서는 학원이었다.”(함석헌, 2002: 127) 실제로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며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1922년 11월말 경남 지방에는 14,115명의 학생이 223개의 야학회와 강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에서는 <혈복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대한독립애국단>과 연계해 활동을 펼쳤다.

농민들도 개별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에 반발하며 차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 이후부터 농민들은 <소작회>같은 조직을 만들어 ‘유보동맹’, ‘불납동맹’, ‘소작권 상실 걸인단’, ‘아사동맹’ 등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부지방에서는 소작권을 박탈당한 소작민들이 공동경작단을 만들어 지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논을 갈고 모를 심어 강제로 경작했다. 그중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농민들이 소요죄로 구속되고 목포로 원정투쟁을 떠나는 과정을 1년 이상 거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3·1운동의 자극을 받아 다양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만주지역에 이주한 백 수십만 한국인 농민들도 국내의 반일봉기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4월에는 이을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등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고, 이후 김좌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결성(1929년)하기도 했다.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만들어짐과 더불어 3·1운동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과거의 봉건왕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그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예를 들어 1916년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의 청년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은 3·1운동을 전후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로 갈라졌져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은 만주, 상해 등지의 민족운동세력과 연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이현주, 2003).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과거 민족주의를 따르던 지식인들도 이제는 아나키즘,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1920년에 만들어진 <사회혁명당>과 1921년 1월에 조직된 <서울청년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사회주의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런 사회주의 활동 속에는 아나키즘도 함께 수용되고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주요한 논거로 활용되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이나 김명식 등은 글과 연설에서 호상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1년에는 아나키즘을 널리 선전하고 실천하기 위한 조직인 <흑로회(黑勞會)>와 <흑색청년동맹(黑色靑年同盟)>이 결성되었다. <흑로회>는 일본에서 박열이 잠시 귀국하여 결성되었고, <흑색청년동맹>은 신채호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아나키즘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3․1운동이라는 민중의 저항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과 사회운동이 손을 잡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러니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판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국사(國史)에는 빠져있지만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들은 자신의 삶과 사회를 새로이 만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4. 3․1운동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동안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민족운동, 사회운동, 자치운동의 순으로 변화해 왔다. 과거 80년대까지는 3·1운동을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해석하고 계급적인 의미를 배제시키려 노력했지만, 80년대부터는 사회운동, 즉 사회주의운동의 시초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비록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 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후의 운동을 발전되었다.

그런데 기존 역사학계가 3·1운동을 일방적으로 찬양했다면, 8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관점을 따르는 평가는 그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조선공산당>의 관점을 따라 3·1운동이 “①일제의 무력적 탄압, ②소련 등 국제적 지원 역량의 부재, ③노동자계급의 미성숙, ④토착자본가의 중도 반단적․타협적 태도, ⑤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할 당의 부재(목적의식적, 조직적 지도의 부재), ⑥부르조아 민족주의자의 외세의존적 태도, ⑦민족해방투쟁과 토지투쟁의 결합 부재, ⑧무장투쟁 전술의 방기 등”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거나 그 운동의 교훈으로 “①민족해방운동의 전투적 참모본부인 ‘혁명적 전위당’이 필요하다는 것, ②민족 부르조아지의 지도는 믿을 수 없으며, 조선의 완전 독립은 전투적인 ‘노동자계급의 영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 ③외세의존의 망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독립은 우리 손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 ④농민의 요구인 토지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여 줌으로써만 전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에 동원시킬 수 있다는 것, ⑤민족해방운동은 광범한 인민대중을 동원하는 조직적․계획적․목적의식적인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 ⑥단순한 정의의 관점에 의한 무저항주의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고 희생성을 띤 전투적 지도이론만이 자주독립의 달성을 보장한다는 것, ⑦나라를 가장 사랑하는 애국적인 계급은 노동자, 농민, 학생, 소시민이라는 것 등”을 지적하곤 했다(지수걸, 1989: 21~22).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의 노선을 따라 농민운동의 보수성을 지적하고 노동자들의 투쟁경험이 지나치게 강조된 감도 없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관점을 넘어 3·1운동의 자치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정은은 다음과 같이 3․1운동의 의미를 평가한다. “3․1운동은 지방사회의 공동체적 힘이 중앙의 조선총독부라는 일원적 권력에 대해 마지막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의 지방사회는 식민지 권력의 강력한 중앙 집권정책에 의해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후 국내의 식민지 해방운동과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등과 같은 변혁운동은 학생층과 같은 조직화된 세력이나 비밀 지하조직 운동으로 전개양상이 전화되었다.”(이정은, 2009: 346) 즉 3․1운동은 지방의 자치적인 힘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맞서 저항했던 운동이라는 평가이다.

지방사회는 해체되었지만 함석헌이 얘기했듯이 지식인들은 이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인식을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층들은 민중을 두려워하며 일제와 결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의 기운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분열되었다고 본다. 1959년 3․1절을 기념하면서 함석헌은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함석헌, 2002: 121)고 지적한다.

3․1운동은 국사에 가려져있던 다양한 자치공동체의 역사를 드러냈고 민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민중의 의식적인 노력은 이후에도 활발히 이어졌지만 일제만이 아니라 내부의 기득권층과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민중의 정치적인 실천들은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고 힘으로 억눌렸다.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은 그 운동을 이끌었던 민중들의 저항이나 그 잠재력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축소시키며 민중의 정치를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저항의 잠재력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한다. 언젠가 억압되고 억눌린 자들은 다시 대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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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3․1운동의 전개양상과 참가계층”.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 서울: 청년사.

조동걸. 1983(4판).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 서울: 한길사

지수걸. 1989.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교훈”.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서울: 청년사.

함석헌. 노명식 엮음. 2002. 『함석헌 다시 읽기』. 서울: 인간과자연사.

홍영기. 2006. 『1920년대 전북지역 농민운동』. 파주: 한국학술정보(주).


교육공동체 '벗'의 회지에 쓴 글이다.

총회에 강의를 갔다가 얼떨결에 조합원 가입을 했지만 어쩌면 그 얼떨결이 필연일 수도 있다, 필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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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원고마감 3일 전에, 그것도 주말을 낀 채, 전화해서 원고를 달라는 불친절한 사무국에 불만이 생깁니다. 하지만 잘 보이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소식지 글을 씁니다.ㅎㅎ


이런저런 일로 계속 바쁘기는 하지만 대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대학을 그만둔 이유는 카페 글을 참조해 주세요.^^). 아이랑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지요. 예전에도 아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매일 품고 사니 아이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자면서 쌔근쌔근 숨을 쉴 때 콩닥거리는 가슴도, 뭔가를 가리키는 작은 손놀림 하나도, 아빠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 하나도 이제는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빠들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해 배울 곳이 없습니다. 마땅한 책도 없구요. 그래서 지난 1․2월호에 실린 박찬희 선생님의 글을 아주 공감하며 읽었어요. 남자들이 겪는 ‘사회적 단절감’이라는 말, 무척 공감합니다. 동네 공원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눈에 남자는 무척 낯선 존재입니다.


그나마 저는 동네 도서관에서 주부들과 ‘사회과학강독회’라는 독서모임을 하기에 단절감은 적은 편입니다. 그리고 옷이랑 그림책이랑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시고 걷어 입히고 읽히니 돈도 거의 안 들고 참 좋습니다.^^ 단점(?)은 수다와 오지랖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


동네에서 주부들이랑 얘기를 나누다보면 역시 최고의 화두는 교육입니다. 경제나 정치 쪽 책을 읽을 때는 보통 2시간이면 모임이 정리됐는데, 교육 관련 책을 읽으니 2시간을 넘기가 다반사입니다. 이제서야 고교평준화가 되는 야만적인 동네라 그렇기도 하고, 학원가가 밀집된 동네라 그렇기도 합니다. 학원을 보내는 엄마들은 보내서 걱정, 안 보내는 엄마들은 안 보내서 걱정입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뒀다는 소식, 앞으로 새로운 대학을 만들겠다는 다짐에 주부들은 많이 공감합니다(물론 공감만!^^). 뭔가 다른 대안을 찾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많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쓰신 이계삼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얘기를 들어보자는 사고를 쳤습니다. 아마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회가 직접 저자를 모시고 강연회를 갖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이라 불안불안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큽니다.


저는 배움이라는 것이 꼭 학교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을 곳곳이,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현장들이 배움의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그런 공간들이 서로 엮이지 않고 모이지 않은 채 따로따로 존재하니 힘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힘들을 그냥 엮어주기만 해도 새로운 배움이 시작될 거라 믿습니다. 제가 앞으로 하고픈 일은 그런 일들입니다(벗 조합원들의 많은 격려와 지지를!^^).


예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생각했는데 아이가 어린이집을 들어가면서 생활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희 아이는 자존감이 강한 듯합니다(아이의 사주를 봐준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엄마, 아빠의 도움을 원할 때는 분명히 얘기하고 웬만하면 자기 손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20개월 된 놈이 밥도 혼자 먹고 옷도 혼자 입겠다며 나서는 걸 보면 대견한데요(물론 귀찮기도 하죠.ㅎㅎ).


문제는 어린이집에 보내니 그 체계가 걸립니다. 어린이집에 보낸 지 2주 정도 됐는데 아이의 눈빛이 쾡합니다. 혼자 밥 먹는 아이에게 밥을 먹여 주고, 혼자 물 마시는 아이에게 물을 먹여주고, 혼자 입으려는 아이에게 입혀주고.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오면 한 10분 동안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서 멍하게 있습니다. 그 어린이집이 나쁘지 않은 곳인데, 여러 아이들을 적은 수의 선생님들이 ‘관리’하다 보니 아무래도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런데도 왜 어린이집에 맡기냐구요? 엄마, 아빠도 살아야 하니까요...^^;;)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한정된 공간에 아이들을 두고 기르는 건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발상을 뒤집으면 어떨까?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을 성장의 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지금 제 고민은 그것입니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대안학교이 동네에 있지만 그다지 땡기지 않는 건 그곳 역시 닫힌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땅과 소통하지 않는(개인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공동육아나 대안학교는 대안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닫힌 체계에서는 대안이 나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 동네의 도서관, 복지관을 비롯한 공공시설, 동네 곳곳의 거리, 시민사회단체, 협동조합, 기타 등등의 공간들이 서로 엮여 아이들이 성장할 기반을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배움을 찾는. ‘아이 한 명이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아빠는 이런저런 고민하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데,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 걱정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보며, 한국에 있는 핵발전소들의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소리소문 없이 감춰지는 것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벗의 조합원들에게도 정당이 필요하다면 지금 녹색당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위 ‘안철수 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설마가 현실이 되니 온갖 예측이 난무하고,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당선은 기성 정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말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걸까? 허나 몇몇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제외하면 지금의 정치구도는 새로움을 논하기엔 여전히 낡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나는 꼼수다’의 성공이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듣고 즐기는 것 이상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소속 없음’도 하나의 소속이다. 왜냐하면 소속되지 않겠다는 것도 소속된 자들의 신념만큼 강한 하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무소속은 소속될 수 없는 사람을, 소속되기 싫은 사람을 뜻하기도 하니까.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속 없음을 ‘냉소’나 ‘무능력’의 상징으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정당법은 5개 광역시도 이상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거느린 전국정당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선거법은 정당에 소속된 후보자들에게 선거기호나 운동기간 등의 면에서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준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규칙이 소속 없는 사람들의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배제한다고 봐야 한다. 가령 2006년 지방선거 때 만들어진 <풀뿌리 옥천당>은 지역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정당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해산되었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았다. 자신이 속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소속을 갖지 않는 건 당연한데도 정당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선거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중앙/지방선관위는 어떠한가? 이 불필요한 조직이 온갖 유권해석을 독점하며 선거기간의 정치활동을 막는데도 이 기관을 문제 삼는 정당정치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그냥 닥치고 선거나 하란다. 이런 상황에서 소속 없음은 냉소나 무능력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닥치고 정치’가 ‘닥치고 투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권의 정치’도 필요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안철수의 등장이 흥미롭다. 준비 안 된 정치인이면 어떻고, 착한 자본가면 어떤가. 이 재미없고 갑갑한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 흥미로운 요소를 보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가 손쉬운 방식으로 명망가 정당을 창당하지 않으며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성 정당에 쓱 들어가며 권력을 움켜쥐지 않는 것으로도 나는 안철수가 반갑다.


물론 마냥 반갑지는 않다. 왜 우리는 정치를 ‘사건’이 아니라 인물로만 사유하는가?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당선도 마찬가지이다. 박원순이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거나 없다는 것보다 나는 그들의 등장이 일으킨 파장에 관심을 둔다. 그 사건이 한국사회의 정치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그런 흐름을 보려면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치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관점 말이다. 정치와 이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권력의 장(長)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정당이 아니면 선거가 의미없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풀뿌리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라는 큰 선거가 모든 정치 쟁점들을 삼켜버릴 2012년에 풀뿌리운동이 어떻게 다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려 한다. 기존의 풀뿌리운동이 선거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면, 최근 녹색당의 출현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 풀뿌리운동과 맞물릴 수 있는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녹색정치의 문을 열었다면, 한국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의 힘이 녹색정치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정치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1. 정치를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프레임들


학자들이 쉽게 쏟아내는 추상개념들이 지금 이곳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탈(脫)’이라는 접두어를 단 여러 개념들, 예를 들어 탈이념, 탈물질, 탈정치, 탈정당이라는 개념이 현실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철저히 기득권화되고 사유화된 정치에 대한 시민의 허탈함과 냉소를 어찌 탈이념, 탈정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탈정치는 타인에 대한 낙인이지 이해하려는 언어가 아니다. 즉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이런 낙인이 자주 찍히는 청년들을 엄기호는 이렇게 옹호한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계몽의 깊이가 이해나 공감의 깊이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계몽되어 냉소하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옳을까? 어찌 부르건 그것을 단순히 탈정치라 정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청년만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대해서도 기존의 정치해석은 탈이념, 탈정치라는 낙인을 자주 찍는다. 풀뿌리운동이 좌우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어느 편도 아니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정치 풀뿌리운동’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풀뿌리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풀뿌리운동은 일상을 바꾸는 정치운동이다.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운동세력은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에 문제가 있을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풀뿌리운동은 기성의 정치와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생활로부터 벗어난 변화가 아니라 생활과 연계된 변화를 꿈꿔왔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풀뿌리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주민자치운동,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참여예산운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당면한 쟁점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고 그것을 통해 의식을 바꾸고 확장시키는 주체형성의 정치를 실천해 왔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탈정치라는 말이 낙인으로 찍히거나 남용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현실이 과거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U. Beck)이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년)에서 얘기하듯이 “정치적인 갈등과 이해관계의 개성화는 또한 더 이상 탈참여도, ‘분위기 민주주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모순적일 정도로 다양한 참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고전적인 양극을 혼합∙조합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좌이면서 우로, 급진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민주적이면서 비민주적으로, 생태적이면서 반생태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무정치적으로 사고하며 그리고 행동한다.” 기성정치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은 다양하고 혼합된 참여형태들을 탈정치나 몰정치, 반(反)정치라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탈이념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념이 없는 진공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미 이념이 존재하고 어떤 이념에 서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입장을 뜻한다.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 현실을 지배하는 이념에 투항하겠다는 것인데,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유지시키려 노력하든 현실을 배반하든 그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는 불가능하다. 하워드 진(H. Zinn)이 얘기했듯이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다. 중립은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하다. 좌파의 이념이 온전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파가 기득권으로 변질된 우리 사회에서 중립은 무기력이나 냉소와 동의어이다(‘닥치고 정치’가 가진 장점은 바로 그런 환상을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점이다. 다만 ‘닥치고 정치’는 기차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개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들이다. 토미 더글러스(Tommy Douglas)가 ‘마우스랜드’라는 비유로 적절히 설명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검은 고양이에서 흰 고양이, 얼룩고양이로의 교체가 아니라 생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상황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년)에서 유럽의 전체주의운동이 성장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정당들은 선전에서 더욱더 심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되었고, 정치적 접근방식에서 더욱더 옹호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되었다. 게다가 정당들은 어느새 중립적 지지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떤 정당도 자신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럽정당체제 붕괴의 첫 신호는 옛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 당원을 모집하는 데 실패한 것과, 조직되지 않는 대중의 무언의 동의와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 대중은 갑자기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지금 한국의 정치를 정의하려면 탈정치나 탈이념이 아니라 정치가 벌어지는 ‘세계’의 파괴에 간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유물인 정부이다. 한국에서는 정당만이 아니라 정부기구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 이는 정부가 정치에서 벗어난 탓이 크다. 제주도 해군기지나 4대강 사업, 한미FTA처럼 정부가 정치의 틀을 벗어나 움직이고, 시민의 통제를 벗어나며 정치를 배반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점이다. 비판을 받지 않고 당연히 인정되어온 상식에 대한 부정, 정부를 중심에 놓고 정치를 사유하지 말고 정치를 중심에 놓고 사유해야 한다.


이제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화두가 핵발전과 탈핵(脫核)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우리는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핵이 폭발한 곳에 어떤 생명, 어떤 인간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치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이전의 인간들이 한 번도 부딪힌 바 없는 위기상황이고, 핵은 정치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절대악이다. 핵은 정치를 절대폭력의 장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탈핵은 단순히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정의와 환경정의,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탈핵은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불균등발전, 중앙집권형 국가에 대한 비판이자 그들과 결탁한 독점재벌과 언론,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고 기술과 정보를 독점하고 공개하지 않는 비민주적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점에서 탈핵은 반(反)자본주의, 반(反)국가를 선언하는 가장 정치적인 구호이고, 자치와 자급의 삶을 전제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다. 이것은 또 왜 정치나 이념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흐름을 탈이념, 탈정치라 부른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위아래가 뒤바뀐 사고방식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미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탈핵이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모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꼴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이념이 탄생할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념의 의미를 너무 완고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념은 좌표나 지표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총체적이고 전일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과제는 우리가 이런 고민을 현실로 소환하는 방법이다.



2. 세계의 위기: 정치의 어버이화와 청소년의 배제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사이』(푸른숲, 2005년)에서 현재란 단순히 과거의 연장이나 미래의 전단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지속적 투쟁, 즉 그가 과거와 미래에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속의 틈새”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의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의 토대를 세우는 만큼 과거와 미래가 나눠질 수 있다. 시간이라는 연속의 흐름을 분열시키는 이 힘이 어떤 사건의 시작이자 우리의 현재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서 정치활동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이런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소외되어온 시민이 직접 참여하며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왔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목적으로 치우친 정치행위를 정치과정으로, 권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에서 자율적이고 분화된 권력으로, 효율성에서 공감으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로 정치의 무게중심을 옮겨 왔다. 그동안의 모든 새로운 움직임을 풀뿌리운동의 힘으로 소급할 수는 없지만 그 역동성이 한국의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분명하다.


보통 풀뿌리운동의 의미를 지역공동체운동 정도로 제한하려 하지만 그것 역시 닫힌 프레임이다. 풀뿌리운동은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전략에 맞서 협동의 전략으로, 즉 “나도 그들이다.” “우리도 그들이다”이라는 자각을 일깨워왔다. 자기들끼리 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풀뿌리정치의 목표였고, 더불어 사는 관계망의 범위를 확장시켜 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이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안철수 현상의 긍정성은 우리의 정치세계를 꿀렁거리게 만들어 시민들도 함께 들썩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자 시민들을 쳐다보지도 않던 기성정당들이 시민들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안색을 바꾸겠지만 시민들도 매번 당해온 배신을 똑같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건은 이 답답한 정치의 시간에 틈새를 만들어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틈새를 만들지 못하면 현재의 사건도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틈새를 만들려면 새로운 정치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정치신인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라는 현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정치주체, 세계에 새로이 출현한 존재가 정치세계로 충원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존재가 없다면, 세계는 다양한 독특성을 흡수할 수 없어 파멸하게 된다(핵은 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청소년과 청년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기성정당의 청년위원회를 살펴보면, 청년위원회는 대부분 유명무실한 조직이다. 청년위원회는 청년답지 않은 45세 까지의 연령대를 포괄하고, 실제 청년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역할을 맡지 못한다. 조직만 있을 뿐 기능이 없다.


국회의원 연령대를 보면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례대표를 포함한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3.5세이다. 50대가 가장 많고, 40대, 60대가 그 뒤를 잇고 30대 당선자는 불과 7명이다(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 국회 홈페이지는 위원회나 소속정당, 당선회수, 당선지역별 현황을 두지만 연령별 현황을 두지 않고 있다). 적어도 국회 내의 정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정당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의 핵심은 20, 30대 활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포가 점점 변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려는 청년들의 수는 줄고 있고,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허리 역할을 맡을 활동가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보다 더 무서운 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어버이화’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틈새를 만들 청년들이 정치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


청년에서 청소년으로 내려가면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린다. 한국의 교육은 정치를 금기어로 만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청소년들이 정보를 구하지 못할 리 없는데, 학교나 정부는 청소년들이 정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게 한다. 2003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 때 좌우를 막론하고 반복되었던 폭력은 청소년들에게 입 닥치고 공부나 하라, 이제 알았으니 너희는 들어가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부장적인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식들이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가 정치의 장으로 바뀌는 것도, 교사가 정당활동을 하는 것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사회현상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입장’을 가진 청소년들이 등장하기 어렵다. 입장이란 건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생기는 체험을 바탕으로 삼는데,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청소년들이 입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똑똑하게 말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똑똑함을 삶으로 드러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갖가지 논리로 무장한 똑똑한 아이들이 정치에 냉소한다는 건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알면서도 그리 되지 않을 거라 미리 냉소하는 마음은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춰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시도들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등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6년 9월에 설립된 독일 해적당(Piratenpartei Deutschland)은 2011년 베를린 시의원 선거에서 8.9%의 득표율로 15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 5당이 되었다. 소통과 공유를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해적당의 평균연령은 30.2세로 녹색당의 평균연령 46.8세보다도 낮다. 더 놀라운 점은 16세 이상이면 당원이 될 수 있고 종교와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일 해적당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도입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처음 실시한 브라질에서도 16세 이상의 청년들이 투표권을 가진다.


이것은 특정 이념이나 정파를 위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치적인 판단력을 기르고 연습해야 좋은 정치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한다. 19세 이상의 정당가입과 만 20세 이상의 참정권만을 인정하는 한국의 법률은 과거의 정치세계를 그대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과거와 다른 정치가 불가능하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구태의연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풀뿌리정치는 대안적인 정치참여의 틀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1년 경기도 수원시에서는 청소년참여예산제가 진행되었다. 홈스쿨링을 포함한 15개 학교 만16세~18세까지의 학생 23명이 공개모집되어 방학 때 예산학교에 참여했다. 고등학생들이 모여 교육과 관련한 예산을 결정한다고 하니 그 수준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아주 독특한 제안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이 모여서 논의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제안들이다).[각주:1]

순위

주  제

내   용

1

진로상담도우미(MY WAY HELPER)

학교상담가배치, 진로체험

1

학습공간 확충(우리들의 공부하는 행복한시간)

도서관열람실, 독서실 조성

3

청소년 동아리 지원(날개달기 프로잭트)

학교동아리공간, 동아리지원금

4

학교셔틀버스(학교가기가 제일 쉬웠어요)

학교 셔틀버스 운영

5

청소년 프로그램 홍보(니가 나를 알아?)

청소년 시설 및 활동홍보

6

청소년 놀이문화공간(노릿길)

청소년을위한거리, 문화공간

7

학교급식개선(잘 먹고 잘 삽시다)

위생과 질개선

8

봉사센터 네트워크

자원봉사연계시스템

9

길거리 동물구조대(청소년 119)

동물구조 청소년 활동지원

10

학교내 모의법정(청소년 배심원제)

학생자치권보장

순위외

무상교육실시

중,고등학교 의무교육실시



그리고 서울시에 주민발의로 제출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모임이나 단체활동 및 정치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는 점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다. 또한 다양한 지역의 풀뿌리운동이 진행하는 청소년의회나 청소년활동도 이런 정치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풀뿌리정치와 징검다리 정당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만으로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양한 생활운동들이 활성화되어도 보수적인 정치기득권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흐름이 형성되는 건 긍정적이나 그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현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기존 질서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만드는 질서가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질서에 포획된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풀뿌리정치가 자율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꾸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끝난다면 그것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정치가 새로운 정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양한 정치주체를 성장시킬 뿐 아니라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협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부당한 정치․사회질서를 재편해야 자치하고 자급하는 공동체,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구조를 볼 때 정당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시민정치의 힘만으로 정치세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국가 내에서 국가를 배제하고 시장 내에서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자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처럼 권력보다 폭력의 논리가 앞서고 기득권이 거의 모든 사회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는 소수의 엄청난 헌신과 순교에도 성공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검열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정도의 능동적인 에너지를 많은 시민들이 지금 당장 드러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독일 녹색당의 탈정당정치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녹색당은 ‘장기적인 안목의 생태주의’, ‘사회적 관심’, ‘풀뿌리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원칙을 부각시키며 독일의 정치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독일 녹색당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지만, 녹색당이 독일 정치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녹색당의 기본원칙들이 독일과 유럽의 정치세계에서 차츰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치구조의 면에서 녹색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 경제의 독점과 중앙집권적 기구의 지속적인 성장 대신에 시민과 친숙하고 민주적으로 통제가능한 자기조정형태의 개발

• 행정업무의 단순화와 완전한 분권화

• 행정적 권한, 자치권, 그리고 주, 지역, 군, 자치단체, 이웃에 대한 재정세입 할당액의 증액

• 행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검열 없고 신속한 공개

• 행정기관과 국회의 청문회에 참관하고 각 부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시민단체와 결사체의 권리

• 시민으로부터 유리되고 직무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많은 자문 상담실을 일반적인 자문과 의사결정위원회로 대체. 자치단체, 군, 지역, 주, 연방의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계획과 결정에 대한 이런 위원회들의 발언권 보장

•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투표와 일반투표.[각주:2]


이런 내용들은 기성정당의 ‘집권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대표를 자처하며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가지려 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발상이,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시민이 정치세계를 활성화시킨다는 믿음이 여기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녹색당 덕분에 독일에서는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녹색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녹색당 홈페이지(http://kgreens.org)에 따르면, 녹색당은 “환경뿐 아니라 농업 살리기, 비정규직 문제, 소수자 인권, 방사능 먹거리 문제와 원전 폐기, 재생가능에너지, 동물권, 청소년 인권과 참여,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지속가능한 지역계획,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마을 만들기, 반전평화, 풀뿌리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의제들을 제기하고 이런 의제들을 “생태적 지혜와 사회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풀어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온 제안들을 녹색당이라는 틀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사무책임을 맡고 있는 하승수에 따르면,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anti-party party)을 지향한다고 한다.[각주:3]
기존의 정당정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라니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당정치가 가져온 폐해를 다시 정당정치로 돌아가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렇지만 사유화되고 독점된 정치구조를 외면한 채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민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정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징검다리 정당’이 필요하다. 누가 징검다리를 건너는가에 따라 구호와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징검다리 정당의 정체성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일 녹색당의 경험에서 드러났듯이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당의 속성과 권력을 해체하는 반정당의 속성을 하나의 조직 속에 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나 괜스레 기존의 정당조직을 모방해서 조직을 형식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계에 변이하지 않는 생명체는 없고, 환경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만이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정당을 인공적인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로 본다면, 정당도 그런 적응력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당원 한 명, 한 명의 의미와 실천이 정당의 조직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치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들이 직접 만드는 당헌, 강령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헌과 강령이 당원들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쓸모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당헌과 강령이 일상적인 언어로 술술 풀려야 하고, 당원들의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한다. 권력이나 집권이 아니라 당원의 욕구와 삶을 지지하는 정당은 생명력을 가지고 다양한 풀뿌리운동과 접속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들은 시민의 징검다리가 아니었다. 정치세계를 보존하고 활성화시킬 새로운 정당은 탈정당정치가 아니라 ‘비(非)정당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정치과정을 제도정치 속으로 제한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과정 자체를 넓혀 제도와 일상 속에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건들은 이런 정치가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4. 인공의 정치에서 번식하는 정치로


새로운 정치의 방식으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팟캐스트이다. 실제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나 여러 정치적인 사건에서 이런 매체들이 TV나 신문같은 언론매체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나는 꼼수다’를 본딴 MBC의 ‘나는 하수다’처럼 공중파 방송이 이를 모방하는 특이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정치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야 할까?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달라지면 그에 맞춰 정치의 방식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를 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치변화로 해석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소통기술의 발달은 현실의 닫힌 소통구조를 넘어서려는 욕망/열망과 맞닿아 있다. 현실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들이 사이버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강화시켜왔고, 현실세계에서 바이러스로 규정되고 금지된 담론들이 사이버세계에서 확산되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를 인터넷에 쏟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새로운 경향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흔히 인터넷의 구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수평으로 넓게 퍼지는 구조인 리좀(rhizome)을 닮았다고 얘기한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연계망을 통해 비조직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구조는 풀뿌리운동의 방식과 닮았다. 조양호는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이매진, 2010년)에서 인터넷정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터넷은 조직이 없이도 조직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세상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조직의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조직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조직관은 다양한 접속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런 조직관은 이미 풀뿌리운동에서 논의되던 바이다. 같은 책에서 이호는 풀뿌리운동이란 “‘권력에서 소외된 다수 대중’이 주체가 돼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회운동”이라 정의하면서 풀뿌리운동의 활동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일상의 공감대를 좀 더 많이 형성하는 과정”이라 지적한다. 인터넷정치처럼 풀뿌리운동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구조를 통해 다양한 주민/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호혜의 관계망을 맺으면서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지원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개인이 사회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운동은 경쟁과 생존투쟁을 극복하고 공생과 자율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내 삶의 경험이나 의식과 분리되지 않은 정치구조를 만드는 방법, 나와 우리의 삶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한국의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계로의 확장요구 앞에서 머뭇거려왔다. 이제 풀뿌리운동은 ‘번식하는 정치’를 요구받고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정치 말고 외부로 활발하게 접속하며 자신을 변형시키는 정치 말이다. 인터넷이 고구마나 감자 같은 식물의 구조를 닮았듯이, 정치세계도 자연세계를 반영할 수 있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년)에서 세균들의 증식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균류는 놀라운 지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특이한 자의식도 있다. 이것은 균사체 속에서 균사들이 꼭지에서 꼭지 또는 꼭지에서 측면으로 서로 연결하면서 경이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 혈액 체계나 뇌 속의 신경회로와 매우 유사하다.…생물을 포함하는 모든 복잡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균사체는 지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의 파이프라인과 달리 균사체는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균사체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세균 종들 간에도 의사소통을 하며 그 결과로 여러 종이 혼합된 군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혼합된 군집은 단일 종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세균의 화학적인 의사소통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 의사소통은 인간언어의 기본적인 문법구조와 유사한데,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제 세균의 통사론(統辭論)과 사회적 지성에 대해서까지 말하고 있다. 이 정교한 세균의 언어는 미생물 군집 내에서 다른 종들 간의 긴밀한 조정까지 가능하게 할 정도다.”


우리는 정치가 인위(人爲)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이나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은 타당하지만 인위적인 정치의 논리가 반드시 인공(人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공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핵발전과 같은 파괴의 정치를 불러왔다. 그동안의 인공적인 정치는 사람의 관계와 정치적인 힘을 만들려(工)했고 그래서 더욱더 강한 힘을 욕망했다. 그래서 정파와 조직이 중요했고 규율과 규범이 강조되었다.


이제는 인공적인 정치에서 자연의 정치로의 인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과 자원을 쓰고 버리는 근대적인 ‘소비의 정치’가 아니라 순환시키고 재활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균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맺으며 번식해야 한다는 것, 경험에서 배우며 향상시키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 지혜 말이다.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 풀뿌리운동은 공통의 과제를 찾고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각자가 추구해온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문법을 개발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소통하며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의제와 정책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관료제도와 자본의 저항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정치력도 형성해야 한다. 가령 핵발전을 추진하는 원자력마피아를 해체하려면, 부패한 학자와 관료, 독점재벌, 언론들의 강력한 동맹을 해체시켜야 한다. 엄청나게 강한 정치적인 힘이 없다면 이런 카르텔을 깨기 어렵다.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이런 힘을 만들 수 없다. 이미 기득권화된 정치구조에서 하나의 정당이 독자적으로 이런 힘을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풀뿌리운동이 구성할 새로운 정당은 다양한 정치적 힘이 접속해서 활용할 수 있는 허브여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사회운동이나 풀뿌리운동이 만든 의제와 정책을 정당이 받아들이는 과거의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독일 녹색당도 고민했던 바이다. 독일 녹색당은 지방의회와 연방의회에서 여러 시민사회운동단체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단체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도 정당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고 현실정치의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당이 풀뿌리정치의 허브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새로운 정당은 앞서 얘기한 균류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여러 종의 세균이 뒤섞여 군집해서 의사소통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떨어지며 한 종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듯이, 정당도 그런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강한 정치적인 힘을 만들며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뒤섞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 바로 ‘추첨제’이다. 추첨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이미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년),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년), 『추첨 민주주의』(이매진, 2011년)와 같은 책들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다. 민주적인 원리라는 점 외에도 추첨제는 권력을 순환시켜 전문가나 정파의 출현을 막는다. 그리고 추첨제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연합하게 만들며 아마추어가 가진 경험을 중요한 지식으로 만든다. 마치 균류의 체계처럼.


그렇지만 추첨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동적인 참여의지를 가진 시민 없이 추첨제가 저절로 자리를 잡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뿌리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당 안팎에서 풀뿌리운동은 다양한 사건들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 새로운 정당은 기득권화된 정치구조를 해체시키며 풀뿌리운동을 지원하고, 풀뿌리운동은 새로운 정당의 정치주체들을 발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때로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이질적인 대립이, 때로는 끈끈함 공감과 울림이, 때로는 화끈한 합의와 긴밀한 소통이 다양한 정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은 ‘공유지로서의 정당’이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번식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당이 아니라 우리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당원들이 당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자원과 기술, 사람이 접속하고 분화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공유지로서의 정당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공유는 시작된다. 나누는 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 물건, 공간 등 다양한 것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끈끈해지고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끈끈한 공유지가 정치의 힘을 발휘할 때 주권에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정치력이 발휘될 수 있다.



5.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


그동안 질기게 이어진 풀뿌리운동은 선거라는 제도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는 탈정치나 탈이념이라고 매도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풀뿌리정치는 기성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나 정당정치를 변화시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사건이기에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이 특정한 방향의 지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사건이 특정한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사건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고 예측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저항』(이후, 2003년)에서 말하듯 “사건은 늘 너무 조숙하게, 때맞지 않게 시간을 거슬러서 출현한다. 사건의 힘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건은 ‘자신의 미래에서,’ 자신이 창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서 의미 있게 된다. 사건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조건’을 자신 안으로 운반해 온다. 사건의 후예만이 이런 새로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건은 가능한 것들의 뿌리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건은 가능한 것들이 놓인 지평을 바꾸고 ‘시간의 혁명’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보며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풀뿌리정치가 믿고 따라갈 모범이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틀댈 뿐이다. 겨우내 움츠려 있으면서 꿈을 길러서 봄이 오면 꿈을 튼다는 것이 바로 꿈틀거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강조했다. 이 꿈틀거림이 정말 “무서운 꿈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나운 겨울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갇히는 민중의 꿈”이고,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오기 때문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이다. 내가 이름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각주:4]


그런 경계를 넘나드는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이 2012년에 만들어낼 사건을 기대한다.

  1. 김광원, “참여예산, 제도보다 중요한건 주민참여!”, 2011년 11월 22일 ‘좌충우돌 참여예산, 우리 동네를 발견해줘’ 발표문. [본문으로]
  2. 스프레트낙․후리조프 카프라 지음, 강석찬 옮김, 『녹색정치: 전지구적 위기에 도전하는 녹색당의 이념과 활동』(정신세계사, 1990년) [본문으로]
  3. 하승수, “지금 왜 녹색당인가”, 《녹색평론》 2012년 1~2월호. [본문으로]
  4.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년) [본문으로]
<내일을 여는 역사>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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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을 좀 두려 하면 어김없이 “왜 선거 나가게?”라고 묻는 한국사회, 자신이 뽑은 대표자 앞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질펀하게 정치인의 자질을 논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그럴 줄 알았다”는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정치현실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인식의 문제점은 부정한 정치현실을 바꿀 힘도 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정치의 의미는 소중하다. 생활정치는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꾼다. 즉 생활정치는 특정 정치인의 교체가 아니라 정치참여과정과 정치의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장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이라면 나는 더 이상 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는 선악의 기준이나 단순한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생활정치에서 정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2인칭’의 시점을 갖는다. 따라서 나는 또 다른 주인들과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치보스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하려면 먼저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어야 했고, 따라서 우리는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정치적인 사건들에 관해 시민들이 자유로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조중동같은 기득권화된 언론사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선거 때마다 색깔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에서 다양한 의제가 소통되면서 생활정치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 활성화를 위한 조건을 따져본다. 아울러 생활정치의 관점에서 중앙집중화된 복지국가 담론을 넘어서 분권화되고 지방화된 복지사회론을 전개한다. 또한 총선, 대선이 실시되는 2012년에 이런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살펴보려 한다.


1. 생활정치는 어떤 변화를 꿈꾸나?

한국사회에 생활정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총선 때였다. 이때는 단순히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미로 생활정치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기성정치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여성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1995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보육과 교육, 복지가 이루어지는 지역사회, 생활세계를 잘 아는 여성들이 지방의회로 진출하거나 그런 생활상의 의제들이 선거공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생활정치아카데미’나 ‘생활정치네트워크’를 결성해서 지방선거에 후보자를 낼 뿐 아니라 시민교육, 즉 민주적인 토론역량과 합리적인 갈등해결능력, 정치적인 의사표현능력 등을 키우고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극복하며 시민의 정치역량을 강화시키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운동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나 전문가들을 제도정치 속으로 보낼 뿐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의 역량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되려면, 다양한 정치의 장이 구성되고 각자 고유한 의제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중앙정치, 수도권정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방이나 지역사회의 주체나 의제들이 시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방선거 때에도 언제나 중앙의 정치바람이나 국가적인 사안이 후보자들의 당락에 영향을 미쳐왔고, 지역사회를 대변하는 후보자나 의제들은 선거에서 배제되었다. 생활정치를 내세운 여성운동이나 시민운동도 여성후보공천비율을 확대하거나 여성의 정치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했지만 국가 중심의 정치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주로 선거로 드러났고 선거를 준비하는 정당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표하지도 못한 채 보수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도정치와 생활정치의 거리는 좁혀지지 못했다. 선거 때가 오면 정당과 시민사회운동이 전술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의 의제나 정책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선거 이후에는 그런 연대가 이어지지 못했다. 즉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운동은 ‘정치개념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셋째,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뿌리를 내려온 지역의 토호세력들이 지방의회나 지방정부를 장악하며 지방자치를 보수화시키고 생활정치를 가로막았다. 사실상 기득권 세력들이 다수의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를 독점한 채 이권을 나눠먹어 왔다. 그러니 구청장이나 시장, 지방의원들이 부패하고 제대로 임기조차 마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경기도 시흥시나 성남시처럼 시장들이 몇 대째 계속 구속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넷째,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면서 생활정치의 의제는 노동의제를 배제하게 되었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되었듯이, 생활의제도 노동의제와 분리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이 협동조합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자연스레 결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노동정치가 생활정치를 무시하고 생활정치가 노동운동을 배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섯째,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들이 주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하고 정당의 빈 곳을 메워온 것은 맞지만 그들 역시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생활상의 문제로 접목시키지 못했다. 시민사회운동은 전문가나 활동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시민의 생활로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 역시 추상적인 가치로만 얘기되지 실제 생활을 바꾸는 운동으로서 논의되지 못했고, 생활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할 시민들은 관객은 아닐지라도 운동의 객체나 수혜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일본에서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가나가와네토’나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같은 정치모임을 구성해서 ‘생활자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은 일본의 ‘생활자운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을 펼치고 있지 않다. 한국의 생협법(제 4조)이 생협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탓도 있지만, 소비자생협들 스스로 정치활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소비자생협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스스로 정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라는 말은 자주 쓰이게 되었지만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고 시민사회 자체가 강화되지도 못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뀔 기미를 보인 것은 2010년 지방선거였다. 민선 5기를 맞이하는 지방선거에서는 중앙의 정치바람이 잦아졌고 공동지방정부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며 기득권세력의 독식현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상급식이나 마을만들기, 사회적 기업과 같은 생활의제들이 주요한 선거쟁점으로 떠올랐고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의 정치성을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비롯한 주민참여제도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시정(구정)공동운영위원회나 도정협의회같은 거버넌스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는 분명 생활정치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던 한국사회의 특징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여전히 정치는 관전이나 논평의 주제이지 내가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장은 아니다. ‘나는 꼼수다’처럼 주요한 현안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시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시도들이 생활정치를 강화시킬지 아니면 제도정치를 강화시킬지를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특히 중앙정부나 수도권이 주요한 정치의제를 독점하고 중앙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육, 문화, 경제 등 모든 사회자원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는 초집중화 현상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시선도 중앙에 집중되어 있지 자기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다.

생활정치가 꿈꾸는 변화는 내 욕구를 대신 해결해줄 ‘해결사’의 등장이 아니라 나의 욕구를 공통의 욕구로 만들며 함께 꿈꿀 ‘공동체’의 등장이다. 생활정치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을 정해주는 과정이 아니라 내 자신이, 우리 스스로 그런 필요와 중요성을 정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아도 좋지만 같이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그런 자립(自立)을 통해 자치(自治)의 힘이 강화되고 자존감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공생(共生)이나 공존(共存)도 그런 자립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복지국가와 복지사회의 큰 차이점

과거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권리’없이 ‘의무’만이 강조되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복지는 상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런데 복지국가가 곧 시민의 복지와 행복을 대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그것이 생활정치의 방식일지는 의문이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생활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른 개념이죠. 국가와 사회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니까요.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당장에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확실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틀입니다.”

김종철 발행인의 말처럼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르고, 생활정치는 복지국가보다 복지사회와 가까운 개념이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주장하는 주요 정책들에 공감하고 그것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리라는 점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변화일지는 의문이다. ‘보편적 복지’가 가진 장점도 분명히 있지만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라는 구도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종철 발행인은 “개인들의 자립적 역량과 자기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나라”인 덴마크의 아이들이 스스로 도시락을 싼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상급식이 필요하지만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장만하는 교육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대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어른들이 청소년의 판단을 대신하고 그들의 성장을 대신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필요를 예측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왜곡되기 쉽다. 모든 복지를 한꺼번에 실시할 수 없다면 우선순위가 필요한데 그 우선순위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의 관료조직은 그렇게 유연하지 않다.

그리고 복지국가에 관한 담론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의 모든 학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한다고 치자. 조그만 공터에도 아파트를 짓는 서울시는 그 많은 쌀이나 식재료를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 지산지소(地産地消)나 로컬푸드(local food)를 전제하지 않은 무상급식은 다른 지역사회의 복지를 파괴할 수 있다. 피크 오일(peak oil) 시대를 맞이한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력자급률이 1.9%에 지나지 않는 서울특별시가 에너지 복지를 실현하려면 다른 지역의 에너지를 빼앗아와야 한다. 많은 결정권한을 소유한 수도권이 주요한 사회자원을 배분하면서 전체적인 균형복지를 추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담론은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내부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복지국가 담론은 김종철 발행인이 지적하듯이 “복지국가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경제성장이 계속돼야 한다는 대전제”를 유지한다. 복지는 세금을 높이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야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의 잇따른 경제위기에서 드러나듯 성장은 ‘신화’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발행인의 얘기는 시사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덴마크 같은 사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제도 개혁 이전에 시민들 자신의 자주적․협동적 결사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자주적 결사체가 활발해져야 국가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어요. 원래 근대국가의 논리는 그대로 두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단, 개인들이 자신의 독자적 인격과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대하는 것이죠. 우선 나 자신이 강인한 인간, 실력있는 인간이 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단련을 해야 합니다. 타인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훌륭한 복지는 제도가 아닙니다. 풍요로운 인간관계입니다. 물론 그 인간관계는 민주적인 관계여야 하죠.”

따라서 복지국가와 생활정치의 방향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위로부터의 제도적 보장을 강조한다면, 생활정치는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활정치는 어떤 식의 복지를 구상할까?

복지국가를 얘기할 때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일정한 ‘기준’이다. 국가가 국민의 최저생활수준을 보장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처럼 다양한 기준을 통해 복지국가의 복지는 실현된다. 문제는 이런 기준들이 시민의 ‘실제 욕구’와 얼마나 일치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이다.


앞서 말했듯이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중앙정부가 모든 기준을 결정하는 것은 구조적인 비민주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가령 수도권의 기초생활수급자가 느끼는 불편과 어려움이 지방에서 생활하는 기초생활수급자의 불편이나 어려움과 똑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복지수준을 정하는 시빌 미니멈(civil minimum)이라는 기준을 활용하고 있다. 시빌 미니멈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생활환경기준, 예를 들어 보행로나 공원, 복지시설, 편의시설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하는지를 정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시빌 미니멈을 정하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실제 욕구가 이런 기준들에 충실히 반영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생활클럽생협>의 요코다 카쓰미는 이와 또 다른 커뮤니티 옵티멈(community optimum)을 제안한다. 내셔널 미니멈이나 시빌 미니멈이 필요하지만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에 의한 복지로 지역복지에 최적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지역사회의 복지를 최저수준이 아니라 ‘최적수준’으로 보장하려면 시민이 복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복지의 제공자이기도 해야 한다. 즉 “미니멈에 입각한 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기에 이러한 기준에 입각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사회에서 ‘최저 기준’에 입각한 복지 서비스를 창출해 그 수익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상부상조의 인간관계(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참가하는 것을 통해 미니멈보다 더 만족스러운 복지기준을 만들어내고 상호 활용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자 정치가 활성화되고 있기에 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논의가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정치가 소수의 정치인과 다수의 시민관객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양분되었듯이, 우리의 복지도 언제나 수혜자층이 누구인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허나 생활정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방적인 수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복지의 관점이 놓치는 것은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의 ‘처지’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라고 묻는다.
복지국가가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시키려면,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수혜관계가 아니라 호혜성이다.

근대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살리려 하는 것도 바로 그 호혜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 행동할 때 정치의 장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 민주적인 대표자 선출방식이라는 오랜 지혜처럼 낯설지만 손쉽게 가능한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해결책을 향해 가고 있을까?


3. 2012년은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싹트고 있다. 투표율이 올라가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세계에 들어가면 다양한 사회의제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얘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조건들이 생활정치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정치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의 세계를 정의하는 언어 자체가 분명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너무 어지럽다. ‘녹색성장’, ‘공정사회’, ‘공생발전’처럼 그 의미와 현실이 완전히 분리된 경우도 있고, 민주주의나 시민처럼 그 의미가 모호한 언어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는 우리의 언어 자체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대안용어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암시들

더 정확하고 힘있게

소통하게 하는 대안용어

행동가

선동가, 자신만의 의제를 지닌 극단주의자

참여하는 시민, 능동적 시민, 권리있는 시민

반세계화주의자

퇴행적이고 이기적인 고립주의자

민주주의 옹호자, 강력한 공동체 옹호자, 반(反)기업통제, 반(反)경제집중

시민권

부담, 의무, 지겨운 것

공적인 참여, 공동체 만들기

관행 농업

무해하며 오랜 경험으로 입증된 것(둘 다 사실이 아니다)

화학의존적 농업, 자연착취적 농업, 공장식 농업

보수주의자

환경과 공동체를 보존하는데 헌신적임을 암시

극우, 반(反)민주 우파(적용가능할 때)

민주주의

투표와 정부에 한정된 것

살아있는 민주주의: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

자유무역

정부통제의 부재, 자동 메커니즘 암시(자동 메커니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 우선의 불공정 무역

세계화

연결보다는 상호의존, 자유무역, 저가상품을 암시

세계적인 기업 통제, 세계적 기업주의, 경제 집중화, 경제 봉건주의, 임금 수준에 대한 세계적 하향 조정 압력

사회정의

급진좌파, 평등강요와 연결

공정성, 공정한 기회, 자유

자유선호의․자유당의

거대정부 선호

진보적, 민주적

최저임금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전달하지 못하는 용어

빈곤임금 vs 생계임금

일인당 국가 부채

대부분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것

출생 세금(2005년 각 신생아가 직면한 국가의 부채 액수는 15만 달러이다)

비영리조직

부정적인 뜻으로 정의됨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 시민의 조직

유기농, 저투입

화학살충제, 화학비료같은 물질의 부재에만 초점을 맞춤

생태 친화적 농업: 환경을 향상시키는 한편, 생태학을 생산성과 품질 향상에 사용하는 강력한 지식을 요하는 농업

선택 홍호

(낙태 합법화 옹호)

사소하게 들린다

양심 옹호

저항, 데모

제한적, 방어적

시민불복종: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

공적 삶

공무원과 유명인사에게만 한정된 것

구매자, 노동자, 고용주, 부모, 유권자, 투자자, 그리고 거대한 파문을 만들면서 매일 수행하는 모든 역할들에서 각자 하고 있는 것

동성 결혼권

성에 초점을 맞춘 것

결혼할 수 있는 권리, 동등한 결혼

세금

부담, “우리” 돈의 갈취

강력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구성원의 의무, 판사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가 이야기한 그대로, “문명의 비용”

복지국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는 체제, 거대한 관료주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언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할 세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는 우리가 함께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에 나의 가치를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처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의 언어와 감각이 요구된다. 생활정치는 그런 언어와 감각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신급진주의를 제안하고 그런 의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얘기한다.

• 신급진주의는 인간이 소통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에게 자기 내면에 자리잡은 정치적 욕망을 쫓아가라고, 선택한 현실이 무엇이든 창조하라고 주문한다.
• 신급진주의는 다른 현실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수용되고, 존중되고,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현실을 자유롭게 창조하게 해주는 사회체제를 수립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하려면 이 과정을 방해하는 사회체계가 무엇이든 그것을 탐구하고 대결하고 근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투쟁은 무한히 계속된다. 심지어 중심 없는 현실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해도 지속된다. 방해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힘이 다시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의 현대사는 힘없는 사람들이 주변을 잘 살피고 조용히 말을 하도록 내면화시켰다. 옳고 그른 것, 바르고 나쁜 것을 논하기 전에 사람들 각자가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을 장이 필요하다. “내가 한들 뭐가 바뀌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안이 없어요”라는 말이 아니라 내 속에 자리잡은 감정과 언어를 나눌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막아야할 사업과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는데, 그렇게 막연한 얘기를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허나 내 속의 언어를 끄집어내는 과정과 세계를 함께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없다면 제 아무리 급진적인 변화라도 기성체제 속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2012년 역시 수많은 정책과 사람들 속에서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목소리와 꿈을 공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2012년은 지나온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반복에 그칠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두고 안철수 씨의 등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런 평론 역시 지식인의 ‘전문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개운한 반응은 아니다. 왜냐? 아마추어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전문가들의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인들은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허나 그것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안철수 씨나 박원순 씨의 등장 자체가 생활정치의 성격과 맞을지도 의문이다.

특히 우리가 맞닥뜨린 근본적인 위기가 있다.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아스팔트에서 방사능이 검출되면서 두려움이 일고 있다. 그나마 서울에서 터진 일이기에 사건이 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미 2011년 2월에 경주시, 포항시의 아스팔트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방사능은 이미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했을 수 있다.

그렇게 검출된 방사능만이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원자력 클러스터를 만들고 전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핵발전 단지를 만들려 하고 있다. 일본 핵발전소 사고를 바로 곁에서 겪고서도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단지 30년 동안의 풍족한 에너지 소비를 위해 수만년의 부담을 후손들에게 떠넘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활정치를 아무리 떠들어도 부질없는 짓이다.

원자력만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의 핵심인 식량과 종자도 근본적인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한미FTA를 비롯한 협약들과 초국적기업의 침투는 농민들의 삶과 우리의 식량주권
을 위협하고 있다.

어떤 정당, 어떤 정치세력이 이런 예고된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2012년은 희망의 완결점일 수 없고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4. 결론

문강형준은 파국의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의 실존을 좀비와 비교한다. “좀비는 포스트-정치적 상황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가 날로 분명히 몰고 오고 있는 파국의 분위기에 최적화된 주체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인 것을 개인화하고, 이윤을 위해서 자원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구적 환경문제는 외면한다. 이로 인해 결국 사회적 갈등과 지구적 문제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상황을 파국이라 할때, 그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를 우리는 좀비라는 아이콘을 통해 발견한다. 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다.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이 모순적 존재는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모순이 터지는 날, 어쩌면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되어 파괴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좀비가 된 우리들에게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하나있으니, 파국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인간’이지 ‘좀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날카롭고 무서운 지적이다. 파국의 상황에도 ‘지금 당장의 식욕’만을 채우려는 일차원적 존재인 존비가 우리의 실제 모습일지 모른다.

좀비임을 한탄만 하지 않고 인간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생활정치를 펼치며 사람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기득권의 정치에 끌려다니며 좀비의 삶을 살 것인지. 2012년은 그 시작을 알리는 해일 뿐이다.


※ 참고하면 좋은 책

김종철, “우애의 경제를 위하여”, 《녹색평론》2011년 7~8월호(통권 제 119호)
요코다 카쓰미 지음, 나일경 옮김,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모델 만들기』(논형, 2004)
C. 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 지음, 박신규․엄은희․이소영․허남혁 옮김,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한티재, 2011)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자음과 모음, 2011)
이지원, “현대 일본의 자치체 개혁운동: 혁신자치체와 시빌미니멈을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1999년 박사논문.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
김홍우 외 지음, 『삶의 정치, 소통의 정치』(대화출판사, 2003)
오사무 우오토, 『현미 선생의 도시락 1~8권』(대원씨아이, 2009~2011)
하승우․유해정,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북하우스, 2010)


얼마전 옥천신문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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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지방은 식민지일까? 식민지라면 누구의 식민지일까? 서울공화국, 서울제국의 식민지? 그렇다면 지방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울공화국이나 서울제국에서 파견된 관리들이어야 하는데, 비틀거리긴 하지만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무조건 그렇게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지역의 토호들이 중앙권력과 결탁하지만 그 관계를 하나의 위계질서로 파악하긴 어렵다.


그리고  지역간 불균등 발전은 국가의 의도일 뿐 아니라 자본(재벌)의 의도이기도 하다. 자본은 새로운 시장과 자원, 노동력, 생산입지를 찾아 이동하고,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 나오듯 재벌들은 부동산 위기 때마다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겨왔다. 자본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조성하고 그곳을 개발하고 다른 곳을 뒤처지게 만들어 이익을 취해 왔다. 그러니 식민지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긴 어렵다.


그럼에도 ‘내부 식민지’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앞으로 진행될 방향을 보여주는 것보다 지금까지 흘러온 방향을 분석하는데 유용하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사람과 자원을 빨아들이며 지방을 황폐화시키는 블랙홀같은 수도권이 실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균형발전논리에도 아직 중앙집권형 국가와 소수 재벌의 결탁구조, 중앙과 지방의 기득권층이 서로의 뒤를 봐주는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식민성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을 쓸 때의 분명한 장점이 있다.


다만 식민지라는 표현을 쓰려면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와 식민지를 관리하는 주체, 식민지를 관리하는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 논의는 많지 않다. 이 글은 그것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




1. 식민지 경험은 사라졌을까?



일제 식민지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갔을까? 보통 ‘국권의 상실’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일본의 지배는 국권보다 더 중요한 삶의 권리를 앗아갔다. 그것은 바로 ‘주권의 상실’이다. 세금과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갖춘 근대국가 자체가 시민의 주권을 빼앗는다고 볼 수 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런 변화가 전통과의 ‘단절’로 나타난다.


과거 전통사회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킬 이유는 없다. 다만 단절이 정체성과 자존감의 상실을 가져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식민지 상황에서는 이런 단절이 폭력을 동반한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파괴, 사적 소유권의 폭력적인 강제, 법과 규칙의 강요가 바로 그 폭력이다. 한국의 농민공동체는 파괴되고 마을의 공유는 압수되었고 일상생활을 구속하는 온갖 법률이 강요되었다. 자연스럽게 관(官)과 민(民)은 분리되었고,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고방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중앙의 국가권력에서 가부장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런 위계질서 속에서 한국사회는 지극히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었다.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을 일본경제에 종속시켰다. 일본에 쌀을 공급하기 위해 벼농사가 강요되었고, 일본의 공장에 필요한 원료작물(면화 등)의 생산이 강요되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생산할지를 식민권력이 결정했다. 식민권력과 결탁한 자본만이 이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대다수 민중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식민지의 주민들은 대부분 강한 힘을 숭상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자연스런 원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폭력적인 감정을 주민들에게 심었다. 강한 것이 미덕이고 강해지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또 하나 식민지 권력은 주민들의 단합을 막기 위해 자신을 뒷받침할 단체들을 만들고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었다(이들이 지금 지역사회를 장악한 ‘지역토호’의 원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민 갈등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관-민 갈등인 경우가 많았고 이런 폐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식민지의 경험이 식민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식민지 국가들에서 검증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2001년)에서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가 “식민지배가 초래한 무기력과 상대적 후진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극복할 것인가”였다고 말했다.


허나 우리는 이 과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조건도 되지 않았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빈곤이라는 것이 현재의 조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이런 식민지의 경험은 과거와의 고리를 끊고 미래를 봉쇄해서 현재의 삶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년)에서 말했듯, “만약 우리가 소득의 빈곤에만 집중하지 않고 능력의 박탈이라는 더 포괄적인 생각으로 전환한다면, 소득 위주의 통계를 비롯한 상이한 정보적 기초를 가지고도 인간의 삶과 자유의 빈곤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소득과 부의 역할은 다른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박탈의 더 광범위하고 완전한 측면에 통합되어야만 한다.”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기회를 박탈당했다.




2.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형성



이념을 떠나 국가조직을 놓고 본다면, 미군정과 그 이후의 한국정부는 식민지 시절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즉 중앙의 소수권력층이 경찰과 헌병, 군대와 같은 폭력조직을 독점하고 전국을 힘으로 통치했다. 커밍스는 앞의 책에서 미군정이 해방 후 한국에 강력한 경찰국가를 존속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이런 경찰국가가 사적인 폭력의 사용을 눈감아주거나 조장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공권력의 폭력과 사적인 폭력이 약자들을 침묵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이런 폭력은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다른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왔다. 중앙의 권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무조건 ‘빨갱이’로 매도당했다.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빨갱이, 정부정책을 따르지 않아도 빨갱이, 국가에 성금을 내지 않아도 빨갱이, 한잔 걸치고 술김에 정부를 비판해도 빨갱이로 몰렸다(지금도 제주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기득권층은 빨갱이, 종북주의자로 부른다). 이런 분위기는 식민성의 영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욱더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수도권은 내부식민지를 만들고 지방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부식민지의 문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중앙집권형 구조를 갖춘 모든 국가에서 드러나는 문제이다. 연방주의에서는 그 문제가 조금 덜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문제는 있다.


역사학자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년)에서 국가가 지배를 위해 사회를 ‘급진적 단순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위생 프로그램, 사회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스콧은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한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스콧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콧의 분석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지방의 앎과 삶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표준말로 말하고 학교에서 훈련된 국민으로 생각하고 군대나 공장에서 명령받은대로 살아야 했다. 자연히 모든 눈은 국가에만 초점을 맞췄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 노선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재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수출전략은 대다수 지방의 희생을 담보로 가능했다. 재벌들에게 유리한 각종 정책이 추진되었고, 노동자/농민은 ‘산업역군’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토의 균형발전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으로 단순생산시설/환경파괴시설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재벌 중심의 정책은 중소기업의 영역으로 재벌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시장을 잠식하게 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말로는 시장경쟁의 규칙을 얘기하지만 그 규칙이 정해지고 실행되는 방식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정치권력이나 사법권력, 언론권력과 결탁한 재벌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의 생각은 ‘중앙집권화된 산업화 노선’을 여전히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있다. 어떤 산업화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개발독재를 넘어선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제 시기에 식민지 통치를 위해 이루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국가의 경제발전전략은 종속성의 늪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력한 ‘개발신화’를 형성했다. 국가가 경제 일반을 총괄하는 대표회사로 기능하며 무엇을 파종하고 심을지까지를 결정했고 농민들은 산업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런 중앙집권화된 산업화노선은 그것을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다른 뜻으로 부르든 지금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복지를 비롯한 사회서비스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한국에서도 여전히 국가이다. 시민사회나 제3섹터의 영역이라 불리는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책임 부분도 여전히 국가가 독점하고 있어 ‘관치경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97년 IMF로 외국자본이 대거 한국경제를 잠식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부분을 말하지 않고 체제를 얘기할 수 있을까? ‘녹색’마저 이명박 정부에 빼앗긴 ‘소위’ 진보세력이 지금의 체제논쟁에서 선진화를 넘어선 어떤 생태·분권·대안사회의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사회학자 고병권은 『추방과 탈주』(그린비, 2009년)에서 이런 우리의 삶을 ‘내부 난민’이라 부른다. “한미FTA를 추진한 노무현 정부의 ‘이것이 국민 모두가 살 길’이라는 식의 수사는 소위 비국민의 삶을 사는 이들의 ‘제발 우리를 살려달라’는 외침과 대칭을 이룬다. 국가권력이 적극적 육성대상으로 삼은 인구에서 탈락한 이들은 장기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이고 국가가 떠안아야 할 비용으로 인식될 것이다. 바로 자기 나라 안에 있으면서 사실상 자신을 보호해 줄 정부를 갖지 못하는 이들을 나는 ‘내부 난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내부 식민지’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정말 난민처럼 떠돌고 있지 않은가.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 지방민의 삶은 내부 난민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3. 빈곤과 자급, 자치



이란의 작가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년)에서 빈곤의 반대말이 부유함이 아니라 세도가라고 얘기한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pauper 곧 빈민의 대립항을 부자로 본 것이 아니라 potens 곧 세도가로 보았다.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은 자유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자유는 오직 세도가에 의해서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11세기의 평화운동 문헌을 보면 빈민은 inermis 곧 비무장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miles 곧 군인의 무력을 존경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이라는 말은 alleu 곧 면세 부동산이 조금밖에 없는 사람, 떠돌이 장사꾼, 심지어 호위받지 못하는 기사의 아내를 포함한 모든 비전투원에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대체로 빈자는 그저 ‘안전한 보금자리’를 잃었거나 잃을 지경에 놓인 사람이었을 뿐이었지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빈자가 사회 무대에 나타났다. 박탈당한 사람,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처럼 살아가리로 일부러 선택한 자발적 빈자였다.” 라흐네마의 말에 따르면,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이자 강요된 정체성이다.


라흐네마는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이 “
금욕주의나 수도사의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진정한 뜻에서 인간관계가 불가능한, 존재의 총체적이고 자비로운 차원을 모든 사람에게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 “공생의 빈곤이라는 더 높은 형식의 융성이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많은 존재’를 누리는 데서 기쁨을 얻는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마지막 희망으로 나타날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풀뿌리민주주의, 풀뿌리운동, 자치와 자급, 생활정치, 사회적 경제 등 다양한 우리말로 풀이될 수 있다. 라흐네마의 얘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관점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이 분리된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복잡한 이론의 과제나 강력한 세력의 과제라고 믿지 않는다. 이 과제는 지식인이나 정치인, 기업가의 몫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몫이다. 지금 당장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속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의 변화가 필요할까? 일단은 우리 몫을 되찾아야 한다. 국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라는 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지방정부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더 통제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활성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국세의 비중이 아니라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헛되이 사용되는 자산이 없도록 정보를 공개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과정을 밟아 예산이 집행되고 지방정부의 자산이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와 같은 제도의 시행이 중요하지만 이를 중간에서 매개하는 역할이 더욱더 중요하다.


쓰지 않고 버려지는 땅이나 건물 역시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이루, 2009년)은 시사적이다. 빈 건물의 공간을 개조해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재활용 가게를 운영하는 하지메는 이렇게 얘기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우리 가난뱅이, 얼간이, 오합지졸은 이제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결탁해서 무언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난뱅이 천지인데도 왠지 한 사람 한 사람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시시껄렁하게 뼛골 빼먹는 직장에서 일만 죽도록 하거나 중류 계급인 척하면서 번화한 중심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뱅이 제군!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 바가지 씌우려고 눈이 벌건 놈들이나 부자들이 덫을 쳐둔 장소에 갈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짱 좋은 것을 만들어보자구.…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공방(工房)이다. 무엇보다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이것저것 공구나 설비가 갖추어져 있으면 여간 쓸모가 없지 않다. 재활용 가게만 해도 가구를 수리하거나 개조하고 두들겨 부수어야 하므로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모두 공동으로 출자하여 만든 시설이므로 기본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까 돼먹지 못하게 쓸데없는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다. 게다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면 최고 아닌가.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공간에서 신나는 일을 벌인다면 동네의 문화 수준이 한층 올라갈 것이다. 하아, 좋다, 좋아!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공동시설을 마련할 때 문지방을 높여서 “출자자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음” 같은 규정을 내거는 일은 극력 말리고 싶다. 마치 컬트 종교집단의 시설처럼 되어버리면 재미가 없으므로 가능한 한 주변에 서성이는 놈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어 함께 이용하도록 하자! 출판과 인쇄에도 손을 대보면 참 재미있다…빈집을 찾아라! 물건을 찾아내라!! 바가지나 씌우는 부자 계급 주제에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척하는 당신! 남아도는 물건이나 공짜로 빌려줘!!…게스트 하우스를 만들어 얼빠진 놈들을 신나게 재워주자!…새로운 게스트하우스가 생기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딴 동네에 가더라도 “거기 게스트 하우스에는 재미있는 놈들이 모인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면, 그곳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도서관 작전, 목욕탕 작전, 장거리버스 작전 등등” 그의 말처럼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공공의 자산, 공유를 늘려야 한다. 생활정치든 사회적 경제든 이런 공유의 몫을 늘려야 국가와 자본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방지식과 지방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인문학을 많이 얘기하는데, 외부의 시선을 그대로 들여오거나 수도권 중심의 내용이 지방으로 파급되는 건 별로 좋지 않다.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 곳의 전통을 기반으로 지식과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이 중요하다. 커뮤니티 정보를 매개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공간으로 도서관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수 있지만 상식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달리 민주주의 제도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 이미 도입되어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도 실시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들도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도입되어 있다. 이렇게 웬만한 민주적인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는데도,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할까?


민주주의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이렇게 추상적이었을까? democracy라는 단어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주의’로 번역되다보니 민주주의도 어떤 이념인 듯하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어원을 따지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그게 다이다. 다른 얘기는 없다. 민중이 권력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적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이런 상식에 따라 누구나 지배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지식인들만 아는 특별한 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몸으로 실행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양식이었다.


민본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민본주의(民本主義)는 군주나 대신들이 민중을 위하거나 위해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었다. 민본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니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자 삶의 태도를 가리켰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나 민본주의를 특별하고 복잡한 어떤 이념이라 여긴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관심을 둘 일이 아니라 여긴다. 민주주의는 학력도 높고 돈벌이도 괜찮은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그런 ‘자격’을 얻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미래의 과제로 미뤄진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면 민주주의의 모델이나 원론에 대한 책들은 제법 있지만 정작 내 삶이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말해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추상적인 권리목록을 나열하거나 시민권,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책들은 있지만 그런 권리를 내 생활에서 써먹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직도 무거운 단어이다. 민주주의는 골방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들,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학자들의 것이지 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내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미는 아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곁눈질하면서도 직접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당신들의 민주주의


이렇게 느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가 추상적으로 느끼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건 역사적인 경험과 의도적인 학습 때문이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인들이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민주주의는 ‘위험한 단어’였다. 한낮 대로변에서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치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지금 우리 현실은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에게 토마토를 던지고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장면은 남의 나라 일이지 무식하고 법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한때 ‘제3의 물결’이라 얘기되며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부흥을 얘기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물결은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를 제 3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이었을 뿐 그 사회의 시민들이 권력의 주인으로 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 아니었다(최근 중동과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재스민 혁명이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사회의 고유한 가치와 문화를 무시하고 서구식의 경제개발과 시장경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보급하는 과정이었다. 제도는 그렇게 도입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 제도에 맞춰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도가 시민들의 삶에 맞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이 제도에 맞춰야 하니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뒤바뀐 셈이다.


이렇게 지배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발전된 것으로 미리 정해놓고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을 민주주의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삶에 어울리는, 우리의 생활과 맞는 정치제도는 봉건적이고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시민들의 민주적인 열망과 생각이 ‘스스로’ 터져 나왔던 순간도 있었다. 봉건왕조와 일제 식민지, 미군정, 군사독재로 이어졌던 어둠의 시절에도 시민들은 자신의 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시간이 되면 거대한 힘으로 폭발했다. 시민들의 힘이 만든 ‘해방구’는 사람들이 공적인 분노와 공적인 행복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걸자 자신만의 삶을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분노와 뿌듯함이 가슴 속을 채웠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의 목소리는,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피땀 짜내는 독점 재벌 해체하라”라고 외쳤던 87년 노동자들의 꿈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였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외쳤던 80년 광주의 목소리, “더 이상 못 속겠다, 거짓 정권 물러가라”는 87년의 외침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2003년과 2008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에 개입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살아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뭔가를 바꾸었다고 느끼는 순간, 거리에서 물러나 집과 공장으로 돌아오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생명력을 잃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지식인들의 잘못도 크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배운 것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주인들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은 않고 민주주의라는 모델로 가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양, 마치 자신들만이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양 행세하며 사람들의 열정과 행동을 순화시키거나 길들이려 했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영미식 시장과 정치에 익숙한 엘리트들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이득이 아니라 소외를 경험했다. 적응하지 못함은 시민의식의 뒤떨어짐으로 설명되었고 사람들은 그 적응의 어려움을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소외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내 탓이요’를 외치거나 그 고통을 비슷한 다른 상대에게 쏟아냈다. 그래,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끼어든다고 될 일이 안 되나? 강한 자에게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약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우리는 ‘약은 삶’을 택해 왔다. 이런 삶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틀린 민주주의


‘산업역군’이나 ‘모범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과거의 군사독재는 시민을 경제발전을 위한 군대로 만들고 생활을 길들여왔다. 삶터와 일터를 철저하게 나눈 채 시민을 가정과 공장에 가두고 길들였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시민을 ‘~형 인간’에 가두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작업장 민주주의를 포기한 경제성장은 시민의 가면을 쓴 산업역군을 계속 강요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는 노동사회나 모범적이고 건전한 사회가 아니라 여가사회와 다양하고 생동력있는 사회인데, 우리는 여가를 사치로, 다양성을 불화로 비난하도록 배워왔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고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그나마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그런데 경제적 평등의 물꼬를 튼 건 정치의 민주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민주주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치 민주주의가 완성된 양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직장과 가정으로 돌려보냈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궤변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들도 이런 궤변에 힘을 실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정치를 위한 삶의 여유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지만 삶의 가치를 소득에 맞췄다. 소위 ‘중산층의 신화’는 적절한 주거와 생활수준 이상을 갖춘 중상층의 사람들만 정치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주제넘은 일이라 믿게끔 했다. 즉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무관심과 선거 때의 순간적인 투표를 모범적인 시민의 권리로 만들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공간적인 규모’만이 아니라 ‘삶의 규모’를 정하고 그 규모에 맞지 않은 삶을 후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이 농민들의 착취를 딛고 사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중산층이 아닌 사람, 중산층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만 허락되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만 시민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에 물음을 던져보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착취하지 않고 수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 3세계를 착취하지 않고 제 1세계(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제 3세계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들이 겪고 있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탈식민주의의 흐름과 무관할까? 나오미 클라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재난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많은 공유재산을 빼앗아 적은 수의 지배자들에게 몰아주면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다.


엄청난 쇼크와 고통을 겪으며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민주주의와 크게 상관이 없을 법한 내용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선거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은 민주적이고, 명확한 이념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을 팔아대는 정당도 민주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소비자 민주주의, 관객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행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뒤틀린 민주주의에 뒷돈을 두둑하게 대주며 이득을 챙기는 것이 바로 재벌들이다.


2009년의 용산참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뒤틀림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국가가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고 전쟁을 벌였다. 멀쩡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는데 아무도 이 상황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떼를 쓰면 ‘민주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플랑카드를 내걸고 주민들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4대강 사업은 자연과 생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회를 민주적이라 부른다면 대체 어떤 사회가 비민주적일까?


우리 현실은 왜 이 모양일까?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시민의 의견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우리에겐 믿음직한 지도자가 없다. 민주주의가 어떠한 대표도 용납하지 않는 체제는 아니므로 지도자는 중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허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소수의 독점물일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똑바로 듣지 않는다면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그런 지도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민의 정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정치는 시민들이 누리는 공적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바쁠 때 내 몫을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이 없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들을 보면 뛰어난 리더십에 알아서 맡기라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직업정치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직업정치인’의 수가 늘어난다고 정치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외려 정치의 장이 좁아지고 직업정치인들이 그 장을 독점하고 조작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다른 건 필요 없고 투표나 열심히 하자는 식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데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주장이 솔솔 새어 나온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이거나 ‘이미 망각된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에 존재했을지 모를 민주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오게끔 새로운 해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민주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피동의 정치에서 능동의 정치로


일찍이 “소유란 도둑질”이고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 선언했던 사상가 프루동은 『19세기 혁명의 일반이념』(1849년)이란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배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다. 이런 것이 정부이고, 정의이며, 도덕이다.”


150년 전의 가혹한 진실을 숀 쉬한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에서 오늘 상황에 맞게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국가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지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을 받는 보너스 카드화되고, 체계화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 접근통제 카드화되고, 신분증명 카드화되고,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인구조사 꼬리표가 붙고, 측정되고, 평가되고, 차례로 나열되고, 스캐닝되고, 돌려지고, 감정되고, 위계를 부여받고, 대상화되고”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의 굴욕적인 일상은 얼마 전에 알려진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따로 관리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고 매일 낭독시켰다. 우리는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나? 2003년 한 노동자가 쓸쓸이 죽음을 택했던 부산의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는 그의 추도식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며 탄식했던 또 다른 노동자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이런 사회에서 분노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지배하는 자들이 비상식적이니 우리 역시 상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해야 한다. 고대 아테네나 근대의 미국, 현대의 유럽을 모델로 삼을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경험과 문화, 열정이 민주주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 이론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토크빌이 본 미국의 민주주의도, 유럽식 계급타협에 기초한 복지국가 모델도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민주주의 이론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체인 민중이 바뀌면 그들의 열정과 사상을 담은 민주주의 이론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모습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오로지 우리의 현실만 고집하자는 건 아니다. 외국의 경험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배워야 한다. 가령 스위스의 민회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연방주의라는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 그리고 남미나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실험들에도 관심을 둘 만하다.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완성된 모델이나 이론으로 배우려 들지 말고 그 사회의 고민과 생활을 배워야 한다.


흔히 이론이라고 하면 지식인들의 과제인 듯 들리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을 ‘신봉’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론을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누가 ‘원전’을 가장 잘 해석하고 지도자의 말을 잘 ‘수용’하는지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론이 쉽게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허나 다른 영역의 이론들이 몇몇 지식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민주주의 이론은 결코 몇몇 사람의 두뇌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싶다면 말이다.


사실 대중과의 소통고리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끊어버리고 대학 속에 몸을 감춘 지식인들은 이미 지식인들이라 부르기 어렵다. 외려 김여진같은 연예인들이 바깥에서 대학을 파고들며 지행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고 그야말로 지식인답다. 지금은 지식인들의 ‘항변’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이고, 그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 이론 역시 반성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의 생활과 접목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얘기는 흥미롭다. 라페는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민주주의 사례들을 수집해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특징을 아홉 가지로 정리한다.


1. 시민들은 집중된 부의 손아귀에서 정치권력을 되찾아오고 있다.

2. 시민들은 정부를 시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3. 투자자, 저축가, 소비자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제적 선택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4. 시민들이 자치 테두리를 정하면, 기업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

5. 이제는 일부 거대기업들조차 기업이익과 지구의 이익을 일치시킨다는 기업이념을 새로 세우고 있다.

6. ‘지역의 살아있는 경제’는 지역산업이 경제권력을 분산시키고, 에너지 폐기물을 줄이며, 공동체 결속을 진작시키고, 지역시민들이 지역 산업을 지지하는 덕분에 생겨나고 있다.

7. 외부자본 통제 없이도 시장이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소유주와 노동자간 격차를 줄인 기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8. 수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

9. 공동체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고 ‘회복’을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법률을 시행할 때, 범죄율은 낮아지고 공동체는 치료된다.


이 아홉 가지 특징에서 드러나듯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나 경제 영역의 변화로 제한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고 우리가 생활을 바꾸려 결심할 때에만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다.


라페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가 변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우리가 네트워크의 두터운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모든 선택이 일정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페의 말처럼 우리의 결심이 이미 변화의 시작을 뜻한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이미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생활공간에서, 가정과 학교, 직장, 거리, 구청, 시청,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쓰면 쓸수록 더욱더 익숙해지고 강해지는 힘이다. 반면에 쓰지 않으면 움츠려들고 약해지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껏 그 힘을 약화시켰다면 그 힘을 강화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힘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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