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국가와 자본의 능력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대안이라 비판한다. 우리는 그 비판에 옳다고 박수칠 뿐 그것을 반박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 없다. 콜린 워드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에서(원래 제목인 anarchism in action을 ‘대안의 상상력’이라 번역한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책이 번역될 당시의 ‘상상력 유행’ 탓인 듯하다), 자신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에서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즘은 역사의 낭만적 샛길이 아니라 인간 조직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이기에 “지금 아나키즘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태도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주장이다. 아나키즘은 정치변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결정 행동이다.”

워드는 국가를 없앤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수상직을 없애는 것과 다르다고 본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란다우어의 말처럼 국가는 “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하나의 인간관계이자 하나의 인간 행동양식”이기에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란다우어는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국가와 공존하는 것, 파묻히고 버려져 있는 것을 현실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워드는 이런 ‘오래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라는 현대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많은 예를 들며 이런 네트워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도시계획과 사회복지, 마을자치회, 스쿼터, 협동조합, 청소년의 집, 모험놀이터, 탈학교․탈대학운동 등 대중의 자발적인 질서가 만들어온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 이런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하는데도 왜 우리는 아나키즘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국가와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조직적으로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어왔고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힘을 상대할 만큼 강한 힘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가의 관료제와 자본의 자원동원력에 맞설, 폭력과 무한경쟁에 맞설 힘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소수의 전위정당이나 전위조직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그 힘을 만들 수 있을까? 전 지구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에 맞설 또 다른 힘은 구성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대항(counter)’을 생각한다면, 아나키즘은 대항과 더불어 그 강력한 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상층의 기득권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협력하지 않음’, ‘협조하지 않음’으로 그 힘의 기반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자급과 자치로 그들을 더 이상 ‘필요없게’ 만들려 한다. 그런 점에서 워드의 말처럼 “아나키즘의 접근방식은 분명하다. 제도들을 파괴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자조(self-help)와 상호부조(mutual support)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것이다.”

워드가 분명하게 강조하지 않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내포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지고 규정되는 ‘피동형’ 인간들은 성장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 부딪치고 깨고 파괴하는 능동적인 인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위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우두머리가 필요없다는 점을, 자신의 자아를, 자존감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국가와 자본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기성체제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들을 통해, 그 대안들을 더욱더 넓혀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한국의 백무산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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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기댈 곳

 

백무산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꿀렸다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
힘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맑스였고
희망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 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
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
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
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더렵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은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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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선을 넘지 못하는 자에게 꿈은 공상일 뿐이다. 꿈이 현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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