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로 제한된 정치적 상상력


올해로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지 20년을 맞이한다. 자치단체장선거가 1995년에 부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방자치제도는 16년이라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실험을 거쳐 왔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사춘기를 지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갈 단계인데, 아직도 우리의 자치는 너무나 허약하다.


올해의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선거는 다른 선거들처럼 ‘그냥 선거’일 뿐이지 정치의 새로운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한나라당이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말로만 ‘자치’를 떠들 뿐 자치의 실제 주인이어야 할 주민들을 정치과정에 참여시키고 그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려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5+4’라는 선거연합만 논의되고 있지 주민들이 자치의 주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개하고 함께 지역의 정책과 비전을 세우며 정치인의 권력독점을 무너뜨리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장은 선거가 중요하고 반MB, 반한나라당을 외치며 단결하자고 말하지만 전라도로 가면 그 구호는 반민주당으로 바뀐다. 그리고 당비를 내는 민주당 당원의 비율이 심지어 한나라당보다 낮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민주노동당이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8년 동안 집권했지만 자치의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시민단체들이 활용해온 시민후보 전술이 지역사회의 권력구조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은 어떻게 해명되어야 할까? 이런 물음에 충분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집권을 외쳐봐야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활성화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낡은 제도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선거에 좀 집중해 보자. 2004년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정당들은 정치개혁을 위해 지구당을 폐지하자고 합의했다. 지구당은 정당의 중요한 기관인데 왜 개혁을 위해 폐지되었을까? 보수정당들은 지구당을 유지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공천비리가 자주 불거지자 지구당을 폐지했고, 당시 민주노동당은 이런 결정에 반발했지만 실정법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구당이 폐지되고 시․도당만 유지되면서 각 지역의 당원조직들은 지역위원회나 당원협의회라는 애매한 기구들로 전환되었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정당은 공직자를 선출하고 다양한 지역의 이슈를 전국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사람을 뽑고 이슈를 제기하는 지구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지구당은 지역의 당원들과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치를 교육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는다. 따라서 지구당 없는 정당조직을 생각하기 어렵고, 민주적인 정당이라면 당연히 평당원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지구당을 중심으로 당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보수정당의 지구당이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모두 없앤다면 우리 정치에서 남겨놓을 것은 없다. 오히려 지구당이 없다보니 지역의 억울함과 분노가 공식적인 정치과정을 통해 중앙으로 전달되지 못한다. 중요한 결정들은 중앙에서 내려지고 사업들도 중앙의 이슈를 따른다. 중앙언론에서 보도되는 중앙의 이슈에는 민감하지만 당원들조차도 자기 마을의 상황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진보정당들조차 분권화된 정당구조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당장의 집권전략이 자치를 위한 정당운영을 가로막고 있다.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정당과 친하게 지내보려 해도 좀처럼 거리감을 줄이기 어려운 것은 이런 구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정당법은 지역정당의 출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현행 정당법은 로컬파티(local party)의 출현을 막고 있다. 정당법에 따르면, 정당을 창당하려면 중앙당을 서울에 두고 전국에 1천명 이상의 당원을 가진 시․도당을 5개 이상 둬야 한다. 그래서 2006년 지방선거 때 시도된 충청북도 옥천의 풀뿌리옥천당은 정당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해야 했다. 이런 정당법 하에서는 자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


그리고 정당을 끼지 않고 시민이 선거에 참여하면 여러 모로 불이익을 당한다. 선거기호에서 뒤로 밀릴 뿐 아니라 선거운동도 나중에 시작해야 한다. 또 선거에 참여하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평범한 사람이 그런 돈을 혼자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당장 후보자로 등록을 하려면 시도지사의 경우 5천만원, 자치구청장이나 시장선거는 1천만원, 광역의원 선거는 300만원, 기초의원 선거는 200만원의 기탁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실제 선거운동에 들어가면 더 많은 돈이 든다. 누구나 선거에 후보자로 나설 수 있다는 얘기는 뻥이고 제법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방자치가 발전하려면 뜻을 품은 사람들을 지원할 후원회가 조직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행 정치자금법 제 6조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특별․광역시장, 시도지사에게만 정치인 후원회를 허용하고 있다. 이런 법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뜻 있는 사람을 돕는 아름다운 전통을 파괴한다. 왜 아름다움을 가로막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지금의 공직선거법은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이 선거과정을 혼탁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시민의 정치참여는 포괄적으로 허용되고 특수한 경우에만 제한되어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트위터만이 아니라 UCC나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은 정치적인 생각을 자유로이 나누며 토론하고 나쁜 후보자들에 관한 정보도 교환해야 한다.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시민들에게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면 홍길동처럼 집을 나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밖에.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방문하는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제 106조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인이 집집마다 돈이나 물건을 뿌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과 집집마다 들려서 얘기를 나누고 자신의 정책을 알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뽀샵으로 손질한 얼굴 말고 실제 얼굴을 알아야 혹시 길거리에서 만나면 당당하게 유권자의 요구를 말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기초의원의 경우 그렇게 살갑게 만나야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진정 국민의 머슴이라면 집집마다 돌면서 품을 팔아야 옳으니 무조건 금지할 일이 아니다.


정치의 미래를 생각할 때, 공직선거법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제 60조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와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들의 투표권을 보장하지는 못할지언정 선거운동조차 가로막는 것은 이주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정치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라 어릴 적부터 경험해야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데 지금 법은 그 싹을 자르고 있다(최소한 교육감 선거에서라도 청소년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옳다). 풀뿌리의 우군은 이런 사람들인데 참여를 금지당하니 그 힘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책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정책을 결정할 사람을 뽑는 과정에 참여하거나 의견을 낼 수 없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한 정치만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민중의 정치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의견을 드러내고 그것의 실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법이 일일이 나서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권리를 막으니 이를 어쩌나.



제도를 넘어선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실 지방자치는 단순히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지역의 시민들이, 지방이 결정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어야 자치는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 삶의 기반이 너무 부실하다.


우리는 옛날보다 발전했다고 여기지만 적어도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은 더불어 살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정치문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19, 20세기에 이 땅에서 수많은 민란들과 저항들이 나타났던 건 자존심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정치문화, 자치와 자급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치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가 세대를 거쳐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현대는 이런 문화를 강제로 짓밟았다. 일제 식민지가 그러했고 군사독재가 그러했다. 사람들을 따로따로 떨어뜨려 놓고 경쟁의 법칙을 강요했고, 그 문화를 명령과 복종의 수동적인 문화로 대체했다. 예전에는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과정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문화가 없다.


그런 점에서 정치문화가 피어날 수 있는 공동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죽어버린 법조항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들이 필요하다. 그런 행동들로 자극을 받고 새롭게 해석되면서 법은 조금씩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꿈이다. 꿈은 완성된 법전이 아니라 몸부림이고 꿈틀거림이다. 조그만 꿈틀거림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싹틀 수 있다. 중앙의 정치바람보다 자기 마을의 꿈틀거림에 관심을 가져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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