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 <지붕뚫고 하이킥>에 나오는 줄리엔이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탔는데, 양복입은 아저씨가 “더러워, 이 개새끼야. 이 냄새나는 새끼야. 너 어디서 왔어”라고 욕을 하며 시비를 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얀 피부와 긴 기럭지를 가진 줄리엔에게 시비를 걸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설령 시비를 걸더라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은 그런 모욕을 고스란히 당했다.


지금 한국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정신장애인과 그 가족을 내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작년 5월에 벌어진 사소한 갈등을 ‘정신질환자가 부녀자를 폭행하는 사건’으로 확대시킨 아파트 주민들은 떼를 지어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아파트 부녀회와 입주자대표회는 가족들에게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이사 가라. 사람들 보이지 않는 데로 숨어 살아라,” “정신분열증환자는 갑자기 뒤에서 사람을 칼로 찌를 수 있다. 그것도 모르냐?”라며 몰아세운다고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가족의 편에서 탄원서를 모으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을까?



관용, 참을만한 것만 받아들이는 통치술


이런 사건들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타인을 혐오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왜 우리는 이유 없이 타자를 혐오하고 몰아내려 하는가?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은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좋은 길잡이이다.


브라운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미국에서 더욱더 강력해진 편견을 본다. 차이를 관용하자는 목소리만 높지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소수자들은 차별을 겪고 있다. 그래서 브라운은 관용을 “흔히 생각하듯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원리․원칙․미덕이라기보다는, 목적과 내용, 행위주체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지리적 변형태를 가지는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소 어렵게 들리지만 쉽게 정리하면 관용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활용되는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는 얘기이다. “관용 담론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규범적이고 물질적인 힘의 작동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관용이라는 말을 쓰는지, 왜 어떤 것은 인정되고 다른 것은 거부되는지, 그런 관용이 목적으로 삼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브라운에 다르면 서구사회에서 관용의 대상은 ‘믿음’에서 ‘존재’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다른 종교나 신념이 관용의 대상이었다면 19세기부터는 그 대상이 특정한 인종이나 존재를 가리켰다. 대표적으로 19세기에는 유대인이, 20세기에는 공산주의자가, 21세기에는 무슬림이 관용의 대상이다. 브라운은 이런 변화가 관용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관용의 대상이 존재로 이동하면서 인종이나 성적 선호 등이 다른 가치와 행동을 낳는 근본적인 이유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던 보노짓 후세인이나 정신장애인이 모욕을 당하고 내몰리는 건 개인의 삶과 상관없이 인종과 장애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브라운은 관용이 지배전략으로 활용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브라운은 유대인과 여성을 예로 들며 관용이 어떻게 현재의 지배질서를 보호하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이성애자인 여성은 남녀평등의 대상이 되지만 동성애자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 이성애자는 현재의 사회질서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동성애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평등이 아니라 관용의 대상이다. 즉 동성애자가 현재의 질서를 더욱더 위협하기 때문에 지배질서는 그들을 정치적 평등이 아니라 관용의 대상으로 만든다. 유럽의 국가들이 유대인들을 관용의 대상으로 만든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운은 이를 ‘대리보충(supplement)’이라 부르며 “관용은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 등장한다”고 얘기한다.


국가는 부족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관용이라는 말을 필요로 하기에 언제나 관용의 대상을 만들고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관용의 뒤에는 언제나 폭력이 따라다닌다. 변화될 수 없는 차이를 타고난 관용의 대상들은 국가가 정한 선을 넘어서려하면 곧바로 폭력에 노출된다. 미국인으로 살려는 착한 흑인, 착한 무슬림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테러리스트에게 관용은 없다. 브라운은 얘기한다. “오늘날에도 개인은 예전 공동체에 대한 공적 애착과 충성을 버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충성을 바칠 때에만, 즉 하나의 민족주의를 다른 민족주의로 대체할 때에만,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국가를 넘어서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서구사회는 야만을 만들어 관리하고 관용해 왔다. 브라운은 미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가 관용의 통치술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관용에 스며있는 통치술을 부정하며 관용을 탈정치적인 가치로 만들지만 실제로는 ‘정치의 문화화(culturalization of politics)’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문화를 공공재나 공적 유대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삶을 향유하는 선택의 차원으로 보면서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자는 다문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은 자기 문화 외의 다른 문화들을 야만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문화를 교육하려 든다. 타고난 차이는 변하지 않으므로 관용의 정신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브라운은 다문화교육의 실상이 “과거 서구의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효과로 고통받는 이들이, 오히려 서구의 문명화 기획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상이 되어 버리는”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최종 목표는 “자유주의적 원리들의 보편적 지위에 도전하는 사회 내부의 집단과 초국가적인 비자유주의 세력을 연결․결합시키고, 이 둘을 동시에 길들이”는 것이라고 폭로한다.


따라서 브라운은 “관용이 유통시키고 있는 존재론, 정동, 에토스와 같은 반反정치적 언어에 맞서, 권력과 사회적 힘, 정의와 같은 언어들을 되살리”고 그런 언어들에 기반해 새로운 대항담론들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브라운의 얘기는 자유주의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타자를 배척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관용의 현란함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려는 실제 현실로 들어가야 변화가 가능하다.



좌파의 딜레마?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1995)가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이후 똘레랑스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예전에 『왜 똘레랑스인가』(상형문자,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필리프 사시에(Philippe Sassier)의 책이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이상북스, 2010)로 올해에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우리의 실제 현실로 들어가려는 몸짓이다.


그런데 브라운의 칼날은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를 전체를 겨눈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라고 얘기되는 유럽식 관용도 그 칼날을 피할 수 없다. 똘레랑스가 우리 현실을 드러내는 무기가 되려면 브라운의 물음에 답을 해야 한다.


똘레랑스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투쟁의 무기이고 사회정의를 위해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사시에는 “똘레랑의 문제는 견디는 것에 있기보다는 똘레랑스를 보존하기 위하여 어느 선에서 견디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미국식 관용과 달리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정의의 관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탈정치화를 경계하지만 관용의 대상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얘기하지 않고,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르는 제국주의 시선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양창렬과 이기라 등 프랑스의 한국 유학생들이 쓴 『공존의 기술』(그린비, 2007)에서 잘 드러나듯이 2005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방리유에서 이주민들이 일으켰던 폭동은 공화국의 숨겨진 실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프랑스만큼만 되어도 좋겠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프랑스의 꿈은 사라지고 있다.


브라운의 얘기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브라운도 언급하듯이 60년대에 마르쿠제(H. Marcuse)가 이미 그 속성을 폭로한 바 있고, 논리적으로 탄탄하진 않지만 나 역시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책세상, 2003)에서 똘레랑스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관용담론의 실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관용의 르네상스 배경에 좌파의 딜레마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브라운은 “관용 담론의 르네상스 배경에는, 통합이나 동화보다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던 좌파들의 시도와,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 요구를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것으로 매도하려는 우파들의 노력도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던 좌파들은 어느 순간 그 차이를 인정하며 따로 살자는 우파들을 만나고 있다. 이 땅을 이미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우파들은 그러려면 나가서 너희들의 나라를 따로 만들어 살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니 각자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서 살아남자고 얘기한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오늘부로 정리하고 쿨하게 끝내자고 얘기한다. 세계화의 시대이니 우리가 갈 곳은 많다고.


이런 주장들에 좌파는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까? 계속 함께 살자고 매달려야 하나, 아니면 깔끔하게 헤어져야 하나? 만일 헤어지려면 지금까지의 몫을 챙겨야 하는데, 관용은 그 몫을 쳐주지 않는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상대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내 몫을 받을 힘이 없기에 우리는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관용을 비판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이 딜레마.


이런 딜레마에 빠진 건 관용만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모욕을 당한 후세인과 곤경에 처한 장애인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네고 함께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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