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글을 일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언어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만수산 드렁칡처럼 좀 얽혀 살아도 될 터인데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기 원칙을 지키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삶만을 말하기에 권정생의 글은 불편하다.

그래서 권정생의 사상을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도 몇 번이나 책을 펼쳤다 덮었다 했다. 몇 페이지 읽고 마음이 무거워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권정생을 자꾸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앎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권정생에 관한 이런저런 해석에 하나의 해석을 더 보태려 한다.

이 글은 권정생의 사상을 되짚어보려 한다. 「몽실언니」나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보다 「팥죽 할머니」의 작가 권정생에 주목하려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간애나 자기희생보다 모순을 드러내고 바로잡으려는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애국과 국가를 반대한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주목하려 한다. 그가 생전에 무엇을 불편해 했고 어떻게 반역하려 했는지를 말해야 권정생의 사상이 좀 더 온전해질 것 같다.

 

1. 사람의 사상

건강한 것이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권정생의 몸은 평생 고통을 겪었고,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잇따른 죽음도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글 어디서나 고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고통에서 무조건 벗어나려 하기 마련인데, 권정생이 택한 방법은 그 고통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고통을 짊어진 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고통을 같이 짊어질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그의 과제였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그 고통을 대면하고 살았기에 그를 보는 이의 마음은 한편으론 감동을, 다른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권정생 개인의 고통은 아니었다. 이 고통은 지금도 무수한 죽음과 고통을 대면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고통이기도 했다. 권정생 스스로도 이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고통은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함석헌의 글 중에 「하나님 발길에 채어서」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함석헌은 자신이 퀘이커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때는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스스로 나는 이상주의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 어느 의미로는 도리어 너무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에 어떻게 먼 것, 나와 남 사이가 어떻게 떨어진 것, 앞이 어떻게 될 것이 너무도 빤히 되어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 할 데로 가고야 말게 합니다. 가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한 것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은 하나도 실현해 본 것 없고 나간 것은 한 발걸음도 내가 내켜 디디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발길에 채인 느낌이 거기 있습니다. 두려움과 화평,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랑의 뒤섞인 것이”

권정생의 절판된 책 중에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 1986년)가 있다. 그 책에 실린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라는 글에서 권정생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개들에게 헌데를 핥이면서 부자가 먹던 찌꺼기를 얻어먹던 나사로였지만, 그는 하늘나라를 볼 줄 알았다. 그래,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된 것이다.” 권정생은 이 글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고, 루쉰을 인용해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어린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 그것이 권정생의 삶이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굴러가는 삶과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하늘나라를 보게 된 삶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숙명이다. 사실 분단과 내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퀘이커가 된다는 건 정치적인 자살에 가깝다. 그리고 폭력과 풍요로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걸 알면서도 사람을 찾아 나서겠다는 건 종교적인 순교에 가깝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 때문이다. “갈릴리 들판에서 그가 자기 민족의 수난사를 공부했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한 우리의 민족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칩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과의 공동작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함석헌이 수난사를 공부하며 씨알을 찾았다면 권정생은 그 수난사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공동작업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하느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할 씨알과 사람이지 제도나 기구 또는 제도나 기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다. 수난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복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제도는 반역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지금 20여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라는 권정생의 말은 그가 함석헌과 같은 꿈을 꿨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말에서는 당위를 넘어서는 어떤 절박성과 확신이 드러난다. 특히 권정생의 이야기가 ‘사람을 사랑하라’라는 당위를 넘어서는 것은 사랑할 사람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절박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절박성과 확신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존재함을 믿어야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는 그의 말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권정생은 이 절박성과 확신을 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정생은 하느님과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나사로 권정생은 그 나라를 몸으로 살아가는 나라로 묘사한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창세기의 하느님나라는 말씀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나라가 다시 창조되고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몸으로 살지 않고 수천 만번 주기도문만 외운다고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지 않는가.” 똥짐을 지는 목회자가 있는 세상, 부정을 규탄하는 용감한 시민이 있는 세상, 좀 더 춥게 좀 더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세상,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다가서는 방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몸을 쓰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고통을 주지만 그걸 받아들일 때 행복도 찾아온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노동에 있”고 “노동은 가난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한다. 가난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인간은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권정생에게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고, 가난은 떳떳한 삶이자 평화와 행복의 기약이자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었다. 마냥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 소박한 삶 속에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데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곳곳에 풍요의 성전을 세우는 우리가 가난한 그의 글을 읽으며 불편하지 않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권정생의 글들이 지금껏 그림책이나 동화로 널리 읽히는 걸 보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고를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며 책 소개 티브이 프로그램인 <느낌표>까지 거부했던 권정생인데 우리는 그 권리를 빼앗으며 권정생의 글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권정생이 강조한 건 몸으로 행복을 느끼는 건데 그걸 머리로만 느끼도록 만드니 모순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과 풍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회는 가난조차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진정 가난한 삶을 조롱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권정생의 불편한 이야기는 누구나 받아들이며 감동을 느낄 만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해석되고, 권정생이 고통을 견디며 찾아 나섰던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2. 애국자 없는 세상


권정생의 사상을 줄여 말하라면 주저 없이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시를 예로 들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평화로울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시는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라며 끝을 맺는다.이념은 버릴지언정 애국은 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권정생은 애국자가 될 시간에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라고 권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 국사와 국익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권정생은 자신이 겪었던 1944년 말의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들려준다. 그 전쟁의 포화 속에 누가 있었는지,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를. 전쟁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그였기에 국가에 대한 반대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고 한핏줄끼리 원수가 되라고 강요”하는 분단상황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원천인데, 권정생은 이를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란 “더러는 영웅도 되고 뜻밖의 횡재를 얻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비극의 인생을 살다가 끝마”치는 비극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침도 북침도 아닌 원격조정에 의한 약소국의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인의 해석일 뿐이다. 그 사건을 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은 “아비와 자식이 서로 총구멍을 맞대고 싸우는 전쟁도 전쟁일까? 공비가 되어 숨어 다니는 아비가 있고 그 자식은 멋도 모르고 공비토벌가를 목청껏 불러대는, 그런 잔인한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느 편에도 서지 말라고 권한다. 애국은 전쟁의 다른 얼굴이고, 마크 트웨인이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들려주었듯 전쟁의 깃발은 애국의 열광 속에 휘날리니까.

 

우리의 애국 깃발은 남과 북에서만 휘날리지 않는다. 우리 몸속에 DNA처럼 새겨진 반일감정에 대해서도 권정생은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여느 꽃나무처럼 벚꽃도 이 땅에 자라고 꽃피고 시들어 죽어가는 목숨일 뿐”인데 그것을 베어내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니냐고 묻는다. 국가주의에 물든 우리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 생명들이 그의 시선에 모습을 드러낸다.

 

권정생의 글 곳곳에서 생명을 파괴하는 국가를 거부하고 그에 맞서려는 반역의 의지가 드러난다. 예수의 입을 빌어 권정생은 자신의 사상이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의 세 가지가 갖춰진 나라”, “국경도 인종차별도 없는 나라”, “모두가 한 형제이며 평등하”고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법칙대로 사는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치 꿈에서 덜 깬 듯한 소리같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새누리당이 비정규직 차별금지를 외치는 세상이니 무정부만 실현되면 하늘나라는 멀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국가의 눈으로, 마치 국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권정생만큼 급진적인 사상가는 드물다.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이 우리 사회에 절실한 이유는 국가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어서이다.

 

국가에서 벗어난 권정생의 소망은 이웃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정의나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라는 명쾌한 논리는 교회를 세워도 뾰족탑이나 십자가, 간판을 없애고 오두막을 지어 맨마루 바닥에서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고 부처님 말씀, 점쟁이 할머니 말씀, 마을서당 훈장님 말씀도 듣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으로 드러난다. 교회가 사람을 찾고 사람에게서 배우는 공간으로 바뀌는 걸 그는 꿈꿨다.

그런데 권정생이 거부한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와 달랐다. 권정생에게 국가는 정부체계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국가는 우리의 생활공간 곳곳에 존재한다. 권정생에게는 교회도 국가이고 학교도 국가이고 농촌도 점점 국가로 변해갔다. “이젠 농촌은,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은 없다. 그냥 먹을 것을 생산해내는 식품생산단지로 변한 것”이라는 말처럼, 먹고 교육을 받고 생활하는 공간이 국가로 변할수록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권정생의 몸부림도 더 강해졌다. 그가 점점 더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변신했던 건 그의 탓이 아니라 그걸 강요하는 세상의 탓이었다.

 

그럼에도 권정생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우리들은 그 꿈을 ‘은둔자’로 가둬 놓고 그 삶을 소비한다. 가둔다는 표현이 거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꺼이 권정생의 편에 서고자 했다면 그가 세상을 계속 불편해 했을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왜 이다지도 내 곁엔 사람이 없을까? 모두 기계이고, 로봇트야. 가슴도 없는, 돌뭉치거나, 솜뭉치, 아니면 고무풍선들 뿐이야.”라고 한숨을 쉬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좀 더 편리하고 풍요하게 살기 위한 교육”이고, “일등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는 그가 숨을 쉴 곳이 없었다. 권정생이 보기 싫어할 만한 끔찍한 세상을 자신이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기 아이들에게는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아름다움을, 권정생의 삶을 얘기하는 건 ‘위선’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가 그를 가둬놓고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불편함을 제거한 착한 사람 권정생이 아니라 반역자 권정생이다. 국가에 반역하고 교회에 반역하고 풍요를 강요하는 경제에 반역했던 권정생이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3. 반역의 언어, 지방의 언어


권정생이 살아있었다면 지금도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약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강정마을, 두물머리, 밀양, 청도, 삼척, 영덕, 곳곳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그들이 곧 권정생이고, 농민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그의 동지이니까. 언제쯤이면 그들의 눈물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

 

권정생은 전통 이야기를 아이들의 동극으로 각색한 「팥죽 할머니」에 자신의 혁명론을 담았다.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아야지, 갚아야지 하면서도 호랑이 앞에서 “힘이 없구나, 차라리 잡아 먹어라. 날 잡아 먹어라”고 외치는 건 이 땅의 농민들이다. “농사꾼을 통째 잡아먹으면 너도 죽는다”는 말에 “난 안 죽는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바로 힘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목숨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면 그건 힘이 아니라 바로 악마”라는 권정생의 절규는 그들을 향한다.

 

할머니가 쒀준 팥죽을 먹고 호랑이에 맞서는 것들은 알밤을 제외하면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이다. 이 모든 것이 일하는 사람들의 도구이다. 팥죽을 먹고 힘을 낸 물건들이 함께 호랑이를 잡는다. 이제는 마음 놓고 농사짓고 무엇도 빼앗기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건 사냥꾼이 아니라 “하늘님은 언제나 농사꾼 편이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연대’이다.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쌍용자동차 문제해결을 요구하고 용산참사를 경험한 주민들이 강정평화대행진에 참여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연대이듯, 이 강력한 연대는 무서운 호랑이를 실컷 두드려 패고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것을 보면 권정생은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자와 억압자에게 반역하고 그를 제거하고 해방의 농악, 해방춤을 추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권정생은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외부의 힘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에서 도리어 권정생은 “하느님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주십시오. 지금은 깨어날 때인데, 하느님께서 도리어 정신없이 나쁜 곳에 이용만 당하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나쁜 사람들의 힘을 거둬 가 주십시오. 진짜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서러운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한다.

 

「김목사님께」라는 글에서도 권정생은 마냥 겸손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최고의 가치일 수 없고 겸손과 복종의 교리가 지배의 교리로 바뀌었음을 성찰한다. “사랑 사랑 하다 보니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사실까지 덮어 버리고 양가죽을 뒤집어쓴 이리 같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알량하고 비굴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복종만이 신앙의 도리로 알고 맹종하다 보니, 이젠 마귀의 명령에도 굽신대는 절대적인 착한 인간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현주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서라는 책을 맹신하지 말자. 아닌 것은 아니고,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분명히 말하자꾸나. 우리는 그래서 비굴하지 말자. 하느님이란 권력 앞에 아첨하는 못난 인간이 되지 말자. 우리는 천국엔 못 가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불의가 가득 찬 천국에 가느니보다 깨끗한 지옥에서 살자.”라고 다짐한다. 권정생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느님께 제대로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반역자였다.

 

그는 폭력을 바로잡고 농민 편을 대놓고 드는 알밤이 되기를,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가 되기를 원했다. 다만 “압제자를 향해 피를 흘리는 저항과 투쟁도 해야 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삶이 바로서야 한다”며 권정생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닌, 밑바닥에서의 진정한 혁명”을 꿈꿨다.

 

권정생은 평화를 추구했지만 억압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냥 겸손하게 복종하지도 않았다. 권정생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권정생은 시내의 한살림 식품가게에서 무공해식품을 산 뒤에 동네에서 자살한 농부를 떠올리며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사람끼리 서로 사고팔고 주고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먹는 것만 깨끗하게 먹는다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일까? 정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실컷 쓰고 편하게 살자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유기농이 무슨 의미일까? 제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기본적인 원칙을 되짚는 권정생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반역의 기반은 점점 사라졌다. “농촌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원천이며 정신적 고향”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미 농촌은 그런 고향이 아니다. 농촌의 언어였던 사투리는 사라졌고 “옛날 일본 식민지였을 때 우리는 말과 글과 쌀을 함께 빼앗겼듯이 이제 농촌의 말과 식량을 도시에 빼앗기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권정생이 주목했던 또 다른 반역의 방식은 언어, 즉 시의 언어를 살리는 것이었고, 중심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언어, 토착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구비문학이 ‘창작문학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문화라는 이물질이 전혀 없는 순수한 농민들의 감정과 생각과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에, 권정생의 작품은 풍부한 사투리를 그대로 옮겼다. 권정생은 매끄럽게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어딘가 거짓되어 보이는 표준어보다 아름다운 사투리를 좋아했다. 표준어는 지역의 자연에 맞춰진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표준화된 풍요를 강요했기에, 권정생에게 사투리는 의식적인 반역의 도구였다.

 

표준화된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삶 또는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삶들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토착의 언어였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는 반란과 저항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정생은 시의 언어를 시들게 하는 자연적인 삶에 대한 이런 부끄러움을 거부했다. 아이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건 교육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맛비”,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 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 “씨 한 톨 심어 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미 닭이 품은 알에서 병아리가 깨기를 기다리는 마음, 보리 이삭이 패고 씨알이 누렇게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느껴야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는 단지 몇 줄의 노래를 읊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언어라는 권정생의 말은 지금 시대에 반역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또 알려준다.

 

전쟁같은 경쟁과 획일화된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힘 없는 사람들의 세상,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지금 반역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반역의 언어를 살리고 반역자를 살리고 있는가?



4. 나오며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권정생의 책은 왠지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 새로 나온 『빌뱅이 언덕』보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가 훨씬 더 권정생답다(절판된 책이 다시 부활한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리고 새 책에서 예전 책에 실렸던 편지글이 사라진 건 참 안타깝다. 권정생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 이현주 목사에게 쓴 편지에서 권정생은 하나됨에 관해 되묻는다. “교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해 괴롭다니, 현주는 욕심꾸러기구나. 대체로 지도자란 분들은 하나 되기를 원하고 있지, 오해하지 말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금 총화란 말도 곧 지도자인 그 분의 뜻대로 하나 되어 달라는 뜻일거야. 백 미터를 뛰는데도 똑같이 출발해서 똑같이 꼴인하라는 지도자의 기대는 억지가 되지 않을까? 사람은 다 다르다. 달라야 된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 못 되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고 착한 지도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주장해 왔다.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미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나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을 게다. 물론 똑같은 것과 하나 되는 것은 다르겠지만 대체로 현주가 말하는 ‘하나’는 ‘나와 꼭 같기’를 원하는 것일 게다. 냉정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권정생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해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권정생에게 문학은 삶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대면하는 방식이었다. 삶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세상의 소식을 접하며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이를 대면하기 위해 여러 작품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성찰했다. 문학이란 “어느 시대나 착하면 잘 살 수 없”다는 점을 밝혀야 하고, “아동문학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가 착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쓰고 읽는 것으로 되”도록 하는 게 권정생의 생각이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애국과 풍요를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시를 노래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권정생과 그의 문학을 단순히 ‘착한 사람’, ‘착한 문학’으로 규정하는 게 불편하다. 외려 그의 삶과 문학은 편안하고 복종하는 삶과 문학을 뒤엎으려 했다. 권정생은 반역자였고 반역의 기운을 불사르다 숨을 거뒀다.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시대에 반역했다. 사건이 의례화되면 그 정신은 사라지고 불편한 진실은 적당히 버무려진 의례가 된다. 권정생은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길 원할까? 추모 5주년에 그 삶을 다시 생각하며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 세상에서는 평안하시길, 아니 그 세상에서도 반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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