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에 금속노조에서 나온 정책연구보고서 「산별노조시대: 금속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이 만들어질 때, 연구진과 2008년도에 지역운동을 설명하러 공식적으로 한번 만났고,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 간부들이 모인 발표회를 할 때 비공식적으로 한번 참여했다. 그날 발표회 자리는 내게 오랜 시간 동안 당혹스러운 자리로 기억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 대부분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개입할 현장, 현안이 많은데 생뚱맞게 웬 지역사회? 지금 한가해요?, 이런 분위기였다. 2015년이면 7년째인데, 이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는 어떤 구체적인 개입전략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발전된 전략을 고민하고 있을까?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 다음 과정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1. 풀뿌리운동이란?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 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앙집중성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다. 주민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自治)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 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2. 풀뿌리운동의 현재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년)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년)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지역/시민단체 내부의 열악한 노동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은 노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3. 지역과 노동운동의 만남은 가능한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노동권을 지키는 마을 어때요?”라는 발제문(<인천 제 2기 주민자치인문대학 2014년 10월 17일)에서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운동을 평가하며 “우리는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언론에 있었다. TV에서는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학졸업자도 다수 지원했다고 떠들면서 환경미화원의 일자리가 고임금에 좋은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미화원은 고임금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미화원의 해고저지투쟁이나 민간위탁 반대투쟁의 절박함과 정당성이 얼마나 지역주민들에게 전달되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아직, 시민과 노동자들이 만나서 청소업무 민간위탁으로 인한 예산절감효과를 분석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의 폐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지역사회 시민들과 함께 던져보고 싶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케이블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 C&M투쟁을 평가하며 “희망연대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해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하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는 사업의 지원비로 내놓는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기획안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에 제출하고 심의를 통해 사업지원을 받게 된다. 송파시민연대는 희망연대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PVC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캠페인을 지역에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이들이 노동조합 존폐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는 적극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파 강동 지역에서는 석촌호수에서 이들을 위한 문화제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여 개최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C&M 노동조합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지역에서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지자 인터넷 기사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여 회사에게 압박을 하는 등 최근에는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더 구체적인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보며 김신범 실장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간접고용의 문제를 마을이 파괴되는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영업으로 뛰어들지만, 이 들 중 대다수는 망하고 만다. 망하는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우를 해 줄 리 만무하다. 고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최종 피해자는 나의 이웃이며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박영길 사무국장은 “마을과 노동, 마을에서 노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2014년 11월)라는 팜플릿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이웃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을에서 보면 그냥 똑같은 마을주민이다. 이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마을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직업적 차원에서의 노동자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하나의 공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은 노동자체가 이슈화되기 힘든 구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마을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는 게 진정 마을에서 노동을 만나는 것일까? 지역의 어느 사업장에서 파업이 있을 때 지지방문 가고 연대하는 것만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노동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까?”라고 묻는다. 우리 사회가 마을공동체나 지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지역 내의 필요노동이나 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영길 사무국장은 “경비아저씨라는 노동자를 아파트 마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경비아저씨에게 친철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는 게 아니라 직접 면접보고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라는 일부 관리업체에게 맡겨놓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아파트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주민대표자들이 고용하고 그들의 삶과 업무들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을에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고용하는 방식, 학교에서 급식조리종사자들을 학교 행정실에 맡기는 게 아니라 면접보고 그들의 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들을 학부모의 의무이자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제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필요 노동자들에 한해서라도 아파트 관리업체에게 맡기지 말고, 급식업체나 학교 행정실에 맡기지 말고, 주민자치센터에 맡기지 말고, 수많은 필요노동을 대행업체에 맡기지 말고 직접 대면하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립과 자치의 첫 출발점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두 운동의 주체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운동을 펼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운동 이전에 필요한 건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동자,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청소노동자나 학교급식조리노동자, 경비노동자, 택배노동자, 사회복지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들의 알바노동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노동자와 주민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가격이나 비용이 아닌 다른 언어로 지역사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영길 사무국장이 지적하듯이, 지역의 필요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고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최소한 그 노동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공통의 세계 위에 서 있다는 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자각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더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또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자영업의 비중이 높고, 자영업 내에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이 아주 열악하다. 이것은 개별 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자영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2012년 12월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의 「생계형 자영업 실태 및 사회안전망 강화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 전체 151만 1,154개 사업체 중 무려 139만 6,743개 사업체가 자영업자이고, 이중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 이하인 영세 자영업자가 전체 자영업자의 44.6%이다. 2014년 5월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는 569만8천명이고, 그중 415만2천명이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로 추산된다. 그리고 자영업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랜차이즈화되어 ‘갑질’에 시달리는 이들 업자들에게 노동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영업자들이 알바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더불어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영역이 기존의 시장을 변형시킬 때 노동운동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가령 직영되던 노동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바뀔 경우 노동운동은 반대 이외의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가? 기업이 폐업할 경우 노동자들이 인수하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해 노동운동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업운영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4. 같이 고민하고픈 내용들


- 공장과 사무실을 나오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이다. 노동운동에서 지역의 지역화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벗어난 노동운동이자 공장과 사무실을 포위하는 노동운동이다. 성공한 지역노조의 싸움은 지역단체들을 조직화한 싸움,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고 조직화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의 경험들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공유되고 있나? 사업의 공유말고 경험의 공유와 그 경험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험은 이루어지고 있나?

그런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강력한 연대보다 느슨한 연대이다. 조직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지역사회전략은 대부분 산별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신속하고 강한 연대를 전제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데,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그리고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미리’ 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은 주민/노동자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은데, 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관청과 학교 내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연대전략을 모색한다는 건 사업 중심으로 활동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인데, 주민들이 사업을 원할까? 그리고 주민들에게 금속노조의 사업을 주민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활동가는 얼마나 있을까?

또한 지역의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노동운동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 앞서 말했듯이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역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성장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운동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노동운동의 기본입장이기도 하지만 방법론의 면에서 공장/사무실/일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삶터에서도 그런 성장의 방법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을 대상화시켜서 주민들을 위해 펼치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이 뒤섞여서 서로의 삶을 고민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일으키는 공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서로의 일상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하게 만나고 있나?

그리고 연대전략이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의 틀이 보통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과를 남기고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거점’이라 부르려면 정말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준비는 되어 있나?

- 민중의 집이 주요한 지역화 전략으로 이야기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말 효과적일지 따져봐야 한다. 거점을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지역사회를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 집을 만들면 정말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될까? 차라리 괜찮은 자영업 가게들의 단골이 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식사하고 토론하고 오락을 즐기며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공간, 노동자들의 고립감을 극복시켰던 공간인데, 한국의 민중의 집이 그런 공간이 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간을 다양한 관계들로 채워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을 만들고 확장시키는 활동에는 많은 사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과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가 알바청(소)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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