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실감없이 겉도는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만들려면 삶의 현장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리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다. 그런데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처하는 ‘민중의 정치’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선거로 제한했으며, ‘민중을 위한 정치’를 민중을 대상화하는 정치적 수사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처럼 매우 중앙 집중화된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권력과 화폐, 언론을 소유한 기득권층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고 민중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변질됐다. 기득권층에 맞서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그 열정이 정작 자신이 일하고 생활하는 지역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아 민주주의는 겉도는 말이 돼버렸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의 증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금 자신의 본래 의미인 ‘민중성’을 확보하고 실현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런 요구에 보내는 시대적인 응답이라 얘기할 수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체에 관련해서 보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민들을 삶의 주체로 세우려는 이론이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민주 대 반민주’나 ‘국가 대 시민사회’, ‘합리성 대 비합리성’이라는 대립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제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들이 양적인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지만, 여기에 발맞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증가하거나 시민사회의 구조가 내부적으로 탄탄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시민사회가 내부 구조 면에서 아주 취약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시민운동 단체들의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이나 의사소통 구조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도 계속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단순히 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민 주체를 부각하고 성장하게 하는 ‘과정’으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주목받고 있다.


또한 수도권 집중도가 매우 심각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역과 지방을 향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도권 문제는 단지 인구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간 불균등 발전과 지역 격차를 가져온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이 주장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 체계는 거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돼왔다. 해방 이후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가 박정희 정부 때 중단된 뒤 1991년에 부활하기는 했지만 중앙이 기획하고 지방/지역이 실행하는 구조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 자치와 자급을 향한 관심에도 맞닿아 있다.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대안적인 지역사회 비전을 만드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가 강조된다.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는 관심에 견줘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은 주로 진행 중인 지방자치 운동이나 지방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독자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진지한 이론적 고찰보다는 지역운동 사례를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풀뿌리민주주의가 거론되는 정도였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관점이나 시민사회 이론으로 풀뿌리민주주의를 설명하려 했지만, 개별 사례를 부각시키거나 부분적인 설명을 시도할 뿐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인 지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시기 측면에서도 기존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를 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시기에서만 찾고 한국 현대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고 논의 방식이 협소한 현실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논의들도 주로 지역 거버넌스local governance나 지역 정치local politics, 공동체 권력community power 차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다룬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작은 지역사회나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개념의 타당성을 주로 공동체운동 같은 실증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서만 증명하려 하고, 하나의 이념과 지향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론적인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운동은 1968년 이후 전세계에서,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삼은 풀뿌리 주민운동 단체나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가권력과 재벌의 억압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왔고,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뒤에는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참여예산운동, 학교급식이나 보육, 주민 참여에 관련된 조례제정 또는 개정 운동,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정보 공개와 주민참여운동 등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풀뿌리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운동의 경험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해졌지만 관련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서 이론과 경험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접근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책은 아나키즘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을 복원하려 한다. 보통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연구들은 1987년 이후 시기만 다루거나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된 이후의 시기만을 다룬다. 그 전까지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시기라 사실 민주주의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뿌리를 내리려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전통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 참여의 경우에는 그런 전통이 더더욱 절실하고 또 필요하다. 그런데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전통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레 같은 공동 노동 조직이나 계 같은 자조 모임들은 내부에 민주주의의 맹아를 품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회의하는 전통’이 두레나 동계, 촌회 같은 마을 단위 모임에 전해지고 있었고, 일터와 삶터에서 모두 협동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수용된 아나키즘은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사상이나 공자나 맹자의 원시 유교나 노자의 무치주의無治主義 등 한국의 전통사상하고 어울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1930년대까지 주요한 사회사상으로 자리 잡은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런 흐름은 직간접으로 풀뿌리민주주의에 연관된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해방 직후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우리는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건설을 기한다. 우리는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 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우리는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일가이상人類一家理想의 구현을 기한다”는 강령을 선포했는데, 이런 주장은 풀뿌리민주주의하고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일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한편 이론 연구하고 다르게 현실의 실천 운동은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을 민초민주주의民草民主主義라는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했다(민초라는 표현은 동학의 뜻을 이어받아 근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한 생명운동에서 주로 사용됐다). 1970년대 이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등이 시작한 생명운동은 그 뒤 한살림모임이나 생명민회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낭비와 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구로부터 가능한 한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자치적 ‘해방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장일순 2005)인 동시에 “민초들은 스스로 그 무의의 탁월한 자연 생명의 질서를 깨달아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여 나아간다”(김지하 2003)는 점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이 내포한 사회혁명의 문제의식 역시 이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은 훨씬 넓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것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내용을 2부에서 다루려 한다.


둘째, 아나키즘의 이론적 특징, 특히 분권과 연방주의는 풀뿌리민주주의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한다는 오해에 시달리고 무정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프루동P. Proudhon이나 크로폿킨P.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코뮌에서 권력의 존재를 인정했다. 프루동은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원리가 연방주의에서 자연스레 구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 지방의 자치를 보장하고 권력이 상향식으로 구성되는 연방주의만이 시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하고 시민이 대표/대리인들을 해임하거나 소환하면서 자신들의 일반의지를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로폿킨 역시 캐나다와 미국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는 소비에트의 연방화를 주장했다. 크로폿킨의 아나키즘은 권력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방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향식으로 강요당하는 국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민중의 의지를 거부하는 국가를 반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크로폿킨은 국가를 부정했지만 권력이 분산된 연방 공화국을 지지했고 실제로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 정부를 구상했다.


아나키즘의 이런 권력관과 정치 이론은 시민 참여의 활성화와 자치를 주장하는 풀뿌리민주주의하고 잘 어울린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한 지류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으로 다루려면 작은 지역 공동체뿐 아니라 국가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개별 정치 공동체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안의 국가’를 지향하는 연방주의야말로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할 사회 모델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풀뿌리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함께 다루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3부에서는 아나키즘의 권력관과 연방주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셋째, 아나키즘의 원리를 따르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대안 학교 등은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아나키즘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장려해왔다. 예를 들어 공동육아나 대안 학교를 만드는 실천, 생산협동조합이나 소비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과 도시의 ‘서로 살림相生’을 앞당기려는 실천, 농촌과 도시에 대안적인 마을 공동체를 세우려는 실천, 대안적인 의료 체계를 만들려는 실천 등 다양한 실천이 있었고, 아나키즘은 이런 삶의 변화를 통해서만 국가를 대신할 힘이,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크로폿킨은 협동조합의 ‘보편적인 복지와 생산자들의 복지’라는 특성이 사회적이고 건전한 정신을 기르는 중요한 기구라고 봤다. 이런 협동조합들이 사회의 계급 구조를 직접 해체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사회적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고 향상시킬 뿐 아니라 공통의 필요를 구성함으로써 생활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활동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활동으로 다져진 경험은 시민의 자존감을 높인다.


또한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임금 제도의 폐지 또는 개인이나 코뮌 간의 자유로운 협약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경제를 이해관계나 수익이나 화폐가치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와 호혜와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마땅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대안으로 얘기되지만 전체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치가 자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림살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다. 아나키즘은 이런 과제를 푸는 데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이런 내용을 4부에서 다루려 한다.


넷째,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에서 시작해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따라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것 자체가 변화의 목표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특정한 역사 법칙을 따르거나 특정한 세력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역사적 유물론이나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특정한 발전 법칙에 따라 실현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거부했다.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그려질 수 없다고 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란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 활력을 통해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정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 중심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특징도 이런 특성에 무관하지 않다. 최근 ‘오큐파이occupy 운동’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하는 아나키즘 운동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또한 자기의식을 되찾은 시민이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은 각각의 시민이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민운동이 일방적인 선동보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지향할 때만 가능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이 점을 늘 강조했지만, 당위적인 수준이었을 뿐 이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아나키즘은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다. 5부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려 한다.


마지막 6부에서는 아나키즘의 이념을 통해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아나키즘의 연방주의는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지방자치라는 다분히 형식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국가 구조를 고민하게 한다.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연합의 논리를 실현하는 연방주의는 다양한 풀뿌리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호혜와 자급의 경제는 풀뿌리운동이 협동조합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 노동 형식을 통해 살림살이의 사회성을 다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윤을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고, 상품이 아니라 생활재를 생산하면서 살림살이를 지키는 실천과 자급의 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바탕이다. 또한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사회적 개인과 주체성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다양한 주체들을 구성할 것이다. 이런 주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활성화는 다른 경제를 구현할 힘을 마련할 밑바

탕이 된다.


사실 모순되지만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대학을 떠날 준비를 했고,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대비 덕분인지 2012년부터는 대학 강의도 관둘 수 있었다(그 시점부터 지원이 끝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상근저자’를 모색할 정도로 글을 파는 처지라 이 책에 담긴 고민들은 내가 써온 여러 글들에서 조금씩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썼지만 지금 시점으로 끊어보면 내가 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 부분은 더 치열한 고민과 삶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부족한 면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런 마음을 지켜주고 삶을 살아가게 한다.


또 모순되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아이도 한 명 태어났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아나키즘을 얘기하는 사람으로선 분명하지 않은 삶이다. 어느 순간부터 흐릿한 경계인으로 사는 게 약간 몸에 익었다. 경계에 있기에 만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흐릿하게 살 것 같다. 그 삶의 과정에서 만난 각시, 솔랑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람들, 땡땡책협동조합 사람들, 협동조합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대안을 일구는 사람들, 독서회를 통해 만난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함에 가슴 졸이게 만드는 사람들, 여전히 지키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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