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수와 선수,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할까?


고수와 선수는 다른 존재입니다. 보통 고수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낄 곳과 끼지 말아야 할 곳을 잘 가리지요. 그냥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합니다. 그래서 고수가 드러나는 계기는 아주 우연적입니다. 반면 선수는 잘 드러납니다. 드러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드러낼 만큼의 자기 역량을 잘 포장합니다(그런 역량조차 없으면 사기꾼이겠지요). 고수와 선수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고수와 선수 중 누구의 힘이 더 셀까요? 때로는 선수의 힘이 더 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수는 자신의 힘만을 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수는 주위의 힘을 모을 줄 알고 그러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힘을 누그러뜨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잘 드러나지 않죠. 한 사람의 힘만 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고 결과적으로 보면 고수의 힘이 더 센 거고, 고수는 세계와 사회를 조직합니다. 고수는 이해관계에 따른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장을, 협동의 관계망을 조직합니다.

 

현재의 협동조합운동판을 보면 선수들만 보이고 고수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저부터가 만나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전혀 없지는 않아 다행일까요?). 고수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럴 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베스트 키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성룡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는데요, 저는 원작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는 사부가 제자를 그냥 엄하게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써먹거든요. 밥하고 걸레질하고 빨래하고. 그런 일상의 동작 하나하나가 쿵푸의 초식이 됩니다. 이를 ‘도제(徒弟)’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시작하면 좋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면 몸에 익숙해지기(體化) 쉽다는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또 다른’ 고수가 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모두 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중간에 힘들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요. 고수가 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각’과 ‘성찰’입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처음에는 자기만 있다가 나중에는 ‘싸부’도 마음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함께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고수가 됩니다.

 

반면에 선수는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훈련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훈련은 생활에서 단련된 훈련이 아닙니다. 교사라 불리는 사람에게 학습된 것입니다. 영화에도 보면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겁니다. 생활과 잘 맞지 않고, 생활에 반하기도 하는 전문기술입니다. 나와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근육과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입니다. 더구나 그 기술을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 교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자각’이나 ‘성찰’의 과정이 없는 거지요. 당연히 누구누구 라인은 있겠지만 ‘싸부’도 없지요. 다른 사람은 대상일 뿐 자기 속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선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수가 여기저기서 마구 등장하는 상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수가 판을 주도하는 상황은 분명 어떤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선수는 자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활동과 영역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수는 자신이 고수인지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반성합니다. 자신이 고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도 않고 그 사람과 자신의 영역을 굳이 나누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그런 고수들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수가 되려는 걸까요, 선수가 되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가르침을 받을 자세, 고수를 찾아 접하려는 태도는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 없이 협동조합을 시작합니다. 정부가 홍보하듯이 협동조합이 기업체보다 나쁜 틀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기에 무조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리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준비 없이 시작된 협동조합은 한국 현실에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면 또 냉소로 바뀔 겁니다.

 

물론 협동이라는 것이 내 몸에 충분히 녹아들어 있기에 사업만 펼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단어는 협동이 아니라 무한경쟁, 승자독식입니다. 협동도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하고, 이기기 위해 내부의 갈등을 억지로 무마하는 것이 협동문화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의 악조건을 극복하려면 좋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내기 위해 안목을 기르고 그 사람들을 인정하며 내 일상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공부모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 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임을 만드는 순간 이미 스승이 우리 옆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책이나 자료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고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내가 뭘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전문가라 자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원주에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장일순 선생님이나 지학순 주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주의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보고 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역사와 사업, 조합원수를 따질 수는 있겠으나 그 속엔 ‘체화’의 과정이 없고, 자연히 ‘자각’과 ‘성찰’의 과정도 없습니다. 정말 깊이 활동을 하고 있다면 자기 속의 고민을 충분히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일상 속의 깨달음을 전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제를 악용해 청년들을 부려먹는 사람이나 제도들도 생깁니다. 고수인체 하지만 선수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활동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질문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과 그 질문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지식만 교류하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2. 나 없는 협동이 가능한가?


한국의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지금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많이 가지만 예전에는 일본엘 많이 갔습니다. 일본 생활클럽 생협은 ‘타자 속의 나’, ‘I among others’라는 개념을 쓰더군요. 저는 이 말을 처음 봤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는 이미 타자라는 말을 익숙하게 쓰고 있구나. 섬나라의 특성일 수 있겠지요. 제주도에 가면 육지 것이라는 말을 쓰듯이요. 섬에는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갑니다.

 

그런데 단지 새로운 사람을 타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는 타자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와 그 존재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거지요. 옛날에 유럽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타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죠. 그러니 그 사이에는 타자라는 관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타자로 부르려면 그 사람을 타자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타자에는 사실 나의 무엇도 포함됩니다.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 다른 존재가 되고, 나와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클럽 생협의 I among others는 좀 감동적이었습니다. 많은 타자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나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타자 역시 나를 타자로 여기는 나이다. 그걸 인정하자는 거죠. 그걸 인정할 때 협동의 힘이 생긴다고 보는 겁니다.

 

한국의 집단주의에는 일본이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처럼 원래 유교에는 없는 개념들이 일본과 한국에는 강하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식민지가 아닌 모국이었던 일본은 한국보다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극단적이기도 한데요, 어떤 때는 사무라이처럼 공을 위해 자신의 배를 가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거지요. 일본 만화책들을 보면 이런 경향을 느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무수한 타자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 관계망 속의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관계의 주고받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는 협동이라는 말로 다른 관계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협동인 것처럼, 고만고만한 형식적인 관계를 협동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요?

 

한국사회에서 많이 오해되는 말 중에 하나가 상호부조입니다. 상부상조, 상호부조의 삶이란 게 어떤 일방적인 이타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내 속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하며 우리가 되는 과정이고, 우리 속에서 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입니다.

 

협동조합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자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내 속에도 타자가 있지요. 때로는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하고, 때로는 정말 싫은 타자를 만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참고 목적의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협동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분명히 드러낼수록 협동은 더욱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드러냄의 방식이 문제인 거죠.

 

요즘 보면 울림, 공명(共鳴),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울림, 공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건 어떤 영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共感)의 문제입니다. 예전 드라마 대사처럼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공감의 시작인 거죠(물론 말로만 그러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계해야죠). 타자의 감정을 내 속에서 형성하게 될 때 우리는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협동조합을 통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려 하는 걸까요? 1980년대 초반 일본의 제4회 전국 유기농업대회에서 발표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방법'이라는 글의 발췌번역문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의 본질은 물건을 팔고 사는 관계가 아니고 사람과의 우호적인 만남과 사귐의 관계이다. 즉 양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돕는 관계이다. 그것은 생산자, 소비자로서의 생활을 새롭게 보는 데에 기초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는 소비자 측에서 사용되는 산지와 직거래라든가 생산자 측에서 사용되는 소비자에게 직접판매라고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사고 싶다.” 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고 싶다.”는 생각에서 중간단계를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고 목적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제창하는 것은 신뢰를 토대로 하여 상호부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제휴(서로 손을 잡음)이다.

생산물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제공되는데 대해서 소비자는 서로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대가와 사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상 금전을 가지고 하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물건과 금전이 교환되는 형식으로 본다면 팔고 사는 것이며 법률적으로는 거래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래의 성격은 상호증여적인 성질의 행위이다. 즉 물건을 교환가치로서 평가하지 않고 사용가치로서 평가한다. 금전을 주고받는 형식으로서는 물건의 대금이지만 실질은 대상(代償)과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액면도 시장에서 형성되고 항상 변동할 필요가 없고 당사자끼리 자유롭게 결정할 수가 있고 고정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쌍방이 상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어디까지나 대등의 자세를 흐트려서는 안 된다. 또한 전제로서 필요한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삶으로 해서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어온 습성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있어서 경쟁심리에 쫒기고 있으며 남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사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거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 즉 금전보다 생명이 중하다든가, 행복은 꼭 금전으로 살 수가 없다는 아주 분명한 사실을 잊기 쉬우며, 편리한 것보다 안전한 것이 중요하다든가, 물건에는 상품보다도 상품이 아닌 것에 치중한 물건이 많다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2. 생산자는 소비자와 상담하여 그 토지에서 가능한 한 소비자가 희망하는 것만큼 생산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생산자는 수확한 것을 확실하게 모두 소비자가 인수하게 하고, 소비자는 원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생산자가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산계획을 양자가 협의해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소비자는 원하는 작물의 품목과 수량을 생산자에게 제시하고 이것에 따라 생산자는 그 토지에서 생산 가능한 작물을 받아들여서 각각의 희망수량을 생산목표로 하는 농사를 계획한다. 이렇게 작성한 영농계획을 생산자는 충실하게 이행하고 수확을 볼 때까지 사이에 비배관리네 만전을 기한다. 그리고 그간에 소비자가 작황의 관찰이나 농사 일손을 돕기 위해 생산자를 찾는 것은 농민들에 의해 크게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수확량은 여간해서 목표대로 실현되지 않고 언제나 다소의 상이는 면할 수가 없다. 때로는 대풍작이거나 대흉작이 있다는 것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자가 계획대로 작물을 실수 없이 재배관리 하는 한은 소비자로서는 어떠한 불평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3. 소비자는 그의 희망에 따라서 생산된 것은 그 전량을 인수하고 식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전면적으로 이것에 의존한다. 일찌기 공동으로 세운 생산계획에 의해 수확된 농산물이 그 때에 그 양만큼 제공되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새삼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지만 항상 신선하고 가장 맛이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제공되는 가지 수와 양은 날짜에 따라, 계절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날그날에 원하는 가지 수와 양에는 과부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조리나 보존에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잘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가격결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생산자는 생산물의 전량이 인수될 것, 선별이나 묶음, 포장의 노력과 경비절약이 되는 것 등을, 소비자는 신선하고 안전하며 맛이 있는 물품이 되게끔 하는 등의 것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가격이라고는 하지만 물품대금이라고 하기보다는 행위에 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이므로 그것을 결정하는 데는 가격이론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양자가 납득이 되는 것이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상관없다. 상품의 질을 소비자가 생각할 때에는 마치 손으로 그린 그림과 복사한 그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5.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휴를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의 이해를 깊이하며 우정을 두텁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구성원들이 서로 접촉하는 기회를 많이 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접촉이 원만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특히 대도시의 주부들이 농촌을 방문하고 농가의 생활과 농사일에 대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접하는 것은 생산자의 환경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것 같으며 그것은 생산자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격려가 되는 것 같다.

 

6. 운반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제3자에게 의뢰하지 않고 생산자집단 또는 소비자집단의 손에 의해서 소비자 집단의 거점까지 운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 생산자, 소비자 집단 내에 있어서 소수의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이며, 될 수 있는 대로 전원이 책임을 분담해서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성원 개개인의 가정사정을 잘 파악하고 상호부조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8. 생산자 및 소비자의 각 집단은 소집단 내의 학습활동을 중시하고 단지 안전 식량을 제공, 획득하는 것만으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의 문제, 식생활전반에 관해서 눈을 떠야 할 문제가 많고, 자체의 운동이나 농약 등 환경오염 문제 등 학습하고 눈을 떠야 할 것이 많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주적인 학습에 의해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무수한 위험 가운데에 매몰되고 있다.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학습회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가요? 타자 속의 나가 어떤 말인지 좀 느껴지시나요?

 

저는 서로를 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디딤돌이 되려면 일단 만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만남이란 낯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낯설기에 익숙하지 않고 두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익숙한 것들만 접하는 것을 만남이라 부릅니다. 물론 익숙한 것들과의 관계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낯선 것을 접하고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에서, 억지로 나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서, 그러면서도 손을 잡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영글면 굳이 우리라고 칭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공감하고 손을 잡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가 성공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건 아닙니다. 협동조합의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실패를 통해 더 단단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성공하면서 무너지는 관계도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무엇을 지향하려는 걸까요? 우리는 왜 성공하려는 걸까요? 이런 물음을 던지며 강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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