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간담회에서 우연히 황주석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분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만남 뒤에서야 황주석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 앞에서 뭐가 뭐라 떠든 것을 한참을 후회했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셔서 주워담지도 못한다. 지금 다시 황주석 선생님을 봬면 나는 여러 가지를 묻고 싶다. 그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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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서 생활하려면 다양한 서비스가 필요하다. 보통은 정부가 보육, 교통, 환경, 복지 등 다양한 서비스를 맡지만 관료주의가 생기면서 많은 예산에 비해 실제 주민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았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를 시장의 몫으로 넘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는 서비스가 지불능력에 따라 차별화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그래서 정부나 시장이 아닌 다른 영역이 사회서비스를 맡기자는 발상이 제3섹터의 출현을 불러왔다. 국가마다 그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제 3섹터는 민간기관이 비영리 활동을 펼치고, 공공부문이 영리활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중간지대’를 뜻한다.

 

발상은 그랬지만 그 이전부터 국가와 시장의 규칙에 지배당하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이런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3섹터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자치/자급조직의 입지를 강화시키자는 구상이기도 했다(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독점재벌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복지체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한국이다보니 1990년대부터 제 3섹터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외국사례를 소개하고 구상하는 수준에 머물다 자활사업과 사회적 기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2008년에는 한국노동연구원이 한국의 제3섹터를 경험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3섹터는 중간지대를 만드는 사회전략이고, 그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이야말로 사(私)와 공(公)의 중간에 있는 조직이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조직이지만 사회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바로 협동조합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이윤을 배분하기 때문에 비영리인 제3섹터에 속하기 어렵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하지만 외국과 달리 한국협동조합의 현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제3섹터의 성격과 충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협동조합운동과 제3섹터 논의가 다양하게 접목될 수 있다.

 

하지만 접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겹쳐지며 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글이니만큼 많은 논의를 하기는 어렵고 몇 가지 쟁점만 얘기해 보자.

 

첫째, 제3섹터는 권력과 화폐가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참여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성, 자발성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영역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영역에서 힘을 얻고 자존감을 회복한다. 이는 YMCA를 비롯한 다양한 생협운동, 협동조합운동이 목표로 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그런 제 3섹터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특히 한국처럼 정부와 시장의 영향력이 강할 뿐 아니라 그 둘이 결탁(정경유착)해서 사회를 지배하는 곳에서는 중간지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영향력 있는 몇몇 명망가나 단체들은 그런 영역을 개척할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로 그 영역이 확장될 수는 없다는 회의적인 비판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운동은 제3섹터로의 확장에 앞서 이런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을 넓혀왔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 정부와 시장의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규칙에 저항하며 그 영향력을 제 1섹터와 제 2섹터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가? 강정마을이나 삼성전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는가?

 

둘째, 협동조합운동이 제3섹터에서 활동하려면 자율적이어야 하는데, 정말 자율적인가? 물론 대부분의 협동조합이나 제3섹터가 그런 자율성을 유지한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정부와 국가는 좀 다른 개념이고 협동조합운동이 정부로부터 자율적일지는 모르나 국가로부터는 자율적이지 않다. 정부와 달리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다. 특히 한국의 국가는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통제체계를 만들며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방식을 관리해 왔다. 협동조합운동은 이런 국가로부터 자율적이고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관계와 삶들을 만들어 오고 있는가?

 

흔히 협동조합이 운동과 사업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고 얘기하는데, 수도권 문제, 국가규칙을 따르는 순응적인 삶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협동조합이 제 2섹터를 강화시키는 경제조직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거시적인 과제를 빼놓고 지역활동만 강조하다보니, 그보다 더 거시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제3섹터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여전히 관주도이다. 사회적기업 인증제도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국가는 대안적인 개념도 자신의 것으로 포획한다. 제3섹터의 활동을 ‘지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배’하려 든다. 그러니 대안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실제로 대안이라고 할 만한 사례가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동안 어떤 사례를 만들어 왔는가?

 

그런 점에서 <YMCA>의 협동조합운동이라면 좀 달라야 한다. 故황주석 선생이 이미 그런 틀을 닦아 놓았다.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에서 황주석 선생은 ‘시민생활나라’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시민생활나라는 참여와 자치, 자결과 협동을 중히 여기고 이로써 운영됩니다. 또한 시민생활나라는 연대를 중히 여깁니다. 나라 안의 연대, 나라 간의 연방을 형성하며 나라가 뻗어갑니다.” 중요한 말들이 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전략을 황주석 선생은 실천하셨다.

 

YMCA의 협동조합운동은 이 고민과 실천을 이어받아 지금 현실에 맞게 고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민 없이는 확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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