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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2.05.01 22:57

총선이 끝나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헛된 기대를 품게 했던 SNS 세계를 잠시 떠났다가 복귀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봤다는 뒤늦은 후회(?)가 나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판단이 어려웠다면 이제는 정보가 너무 많아 판단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에 널린 텍스트들의 의미를 파헤치고 숨은 뜻을 드러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문화평론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문강형준이라는 문화평론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엄청난 성실성이다. 한때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한 달 동안 읽고 듣고 본 텍스트들을 정리해서 올리곤 했다. 그 리스트만을 보고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책과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 등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문화의 사정을 읽는다. 그 리스트만 보고 있어도 일정한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이다. 이념이 사라졌다며 방황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토대를 다시 다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냥 ‘말빨’만 난무하거나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는 푸념만 있다. 그 속에서 문강형준은 그 이념을 세우기 위해 현재의 무덤을 파는 사건인 ‘파국’에 주목하고 이 흥미로운 키워드로 세상을 해부한다.

 

더구나 문강형준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 차근차근 기본적인 초식부터 깊은 내공까지 다져 온 지식인이라 더 반갑다. ‘내가 진실을 알려 주마’, ‘내가 제일 잘났어’ 식의 수사는 이제 너무 지겨우니까.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강형준의 책이 마냥 쉽지는 않다.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나 이론가들의 이름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호흡도 좀 빠르고 여러 가지 텍스트들이 엉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보인다. “기대하고 있던 서사가 갑자기 뒤집히는 순간”을 뜻하는 파국이라는 그림이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진보든 보수든 지금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바뀐 세상이 자신에게 조금 더 나은 것이길 바라며,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우리는 변화를 요구한다. 문제는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다. 우리에겐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 없기에 변화는 언제나 우리를 배신하고, 변화의 빠른 속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우울과 좌절은 변화를 바라지만 정작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그리려면 나 자신이 드러나야 할 텐데, 나는 누구인가? 가장 기본에서부터 막히니,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사람들에게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삶이 생존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는 귀차니즘이 대세이다.

 

문강형준은 이 무기력한 주체를 ‘좀비’라 부른다. 오, 좀비라니. 서늘함이 가슴을 슥 가른다. 설명은 더 서늘하다.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이자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한 존재, 그가 바로 좀비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모순을 체화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핵발전소가 터지는 광경을 두려워하면서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착한 초콜릿과 착한 커피를 먹고 마시며 제3세계의 기아가 사라지길 기대한다. 모든 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 욕하면서도 TV에 나오는 각종 오디션‘쇼’를 즐긴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고? 좀비 영화들에 항상 나오는 장면. 좀비에 물린 사람들은 꼭 그 사실을 감추고 나중에 좀비로 변해 사람들을 공격한다. 좀비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이다.

 

물론 TV만 보고 있으면 아직도 여유는 있는 듯하다. 뭐든 한 가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런 신화를 부추기는 멘토들이 등장하니 말이다. 내게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며, 내 자신에게 얼마나 충분한 기회를 줘 봤냐며, 언젠가는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기대를 갖지만 모든 기대는 헛되다. ‘아직 인간’은 곧 좀비로 변신해 동료들을 공격할 예정이다.

 

문강형준은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와 포르노그래피에서도 같은 그림을 본다. “‘야동 폐인’과 ‘나가수 폐인’은 공히 중독자”로서 “포르노그래피와 엔터테인먼트는 창조 대신 중독을 통해 관람객을 확보하”고 “탈락자의 자리를 새로운 가수로 보충”하지만 결코 새로운 창조는 없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나가수〉를 보며 나누는 품평회는 화목함이 아니라 파국의 전주곡이다. 서로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은 사라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생존을 놓고 경쟁적으로 점수를 매기며 만족하는 장만 남았다. 그것은 치료제가 아니라 좀비에게 물린 상처를 감추는 위장막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대한 문강형준의 비평을 가장 거북해할 것 같다.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나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무한도전〉을 좋아하고 MBC 파업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무한도전〉의 결방을 꼽는다. 하지만 문강형준은 이 프로그램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연예인들의 몸과 일상을 쥐락펴락하며 ‘판을 깔아 준’ PD들은 방송 자막을 통해 이들을 진정한 ‘평균 이하’로 묘사하”고 “죽도록 일하라고 해서 죽도록 했더니 죽도록 했다고 비아냥”댄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점심을 주지 않아 바나나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런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조롱하는 제작진의 태도”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무책임함이다.

 

소위 ‘개념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무한도전〉에 이런 혹평을 하다니.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무한도전〉이 아무리 사회의식을 담아도,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담아도, 그것이 계속 TV에 방송될 수 있는 건 말랑말랑한 감동 때문이라는 점이다.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 이상으로 사회의식 같은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무한도전〉은 더 이상 TV에 방송될 수 없다. 혁명은 TV에 나올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과 쌍차,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 SNS를 헤매는 건 TV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희극적이고 말랑말랑한 즐거움만이 파국을 감추는 건 아니다. 때로는 강력 사건도 그것을 은폐한다. 문강형준의 ‘강단剛斷’이 가장 드러나는 비평은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악인’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좀 길지만 곱씹을 만한 내용이다. “‘나영이 사건’에 관해 들끓는 분노의 여론과 그것을 받아서 증폭시키는 언론들, 그리고 ‘이때다’ 하면서 범죄자의 엄정 처벌을 주장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참으로 구역질 나는 냄새가 진동한다. 소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면서 즐기는 대중과 그 소녀들을 데리고 돈을 버는 연예 기획사들, 구조적인 모순보다 사건의 선정성을 부각시켜 여론화하는 언론들, 사회를 생존 경쟁의 전쟁터로 만들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죽음들을 빚어내면서도 성폭력이나 연쇄살인만을 ‘강력 범죄’라고 부르며 사뭇 비장한 척하는 정치인들. 이들이 ‘공모’해 ‘술 취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50대 남자’ 한 명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면서 돌팔매질을 해 댄다. 가장 취약한 사람을 성폭행한 가장 취약한 남자. 이 둘이 가해자와 피해자 고리 속에 들어가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가진 알량한 편안함을 ‘축복’으로 알면서 또다시 더 큰 폭력의 질서 속에서 남을 짓밟고 이용하고 합법적으로 희롱하면서 ‘밥 먹고’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진짜 심각한 ‘사건’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상의 악은 악인 뒤에 숨고, 우리는 악인에게만 돌팔매질을 해 댄다. 좀비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무조건 좀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은 일단 저놈부터 조져 놓고 보자는, 나부터 살고 보자는 우선순위 뒤로 사라진다.

 

이렇게 세상이 끝으로 치달아도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멀쩡할 거라는 환상이, 우리는 안전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세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그 불만이 파국으로 터져 나오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파국의 원인인 자들이 어떻게든 파국을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파국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번 총선 때 소위 김용민 파동을 보며 문강형준이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김용민을 공천할 때부터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다. 한국에서 정치가 ‘인기투표’가 되고, 이명박 개인에 대한 복수의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후보를 감싸는 세력이 ‘진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김용민 막말보다 더 추악하다.” 이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다 착하다!

 

그렇다면 어떤 출구가 있는가? 좀비를 인간으로 바꿀 치료제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좀비 영화들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출구나 치료제는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조금 맘을 편히 먹는다면 좀비에게 물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냥 좀비가 될 뿐이다. 대다수가 좀비인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사냥을 당하니 좀비가 되는 것도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한때 팟캐스트 1위를 차지했던 〈나는 꼼수다〉도 그런 전략이다. 열광적으로 치료제를 찾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 주길, 내 목을 물어 주길 기다리는 전략이다. 닥치고 투표하고 닥치고 기다리라! “언뜻 신선해 보이는 〈나는 꼼수다〉의 새로운 미디어 실험과 직설적 언사들이 도달하는 ‘정치’적 비전의 장소란 결국 다시 ‘국회’이고, ‘시청’이고, ‘청와대’다. 바뀌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인물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아니면, 오세훈이나 나경원이 아니라 박원순이면, 이명박이 아니라 문재인이나 안철수면 ‘희망’이 있다는 식의 생각이 이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고 있다. (……) 언제나 우리를 들뜨게 하는 이 즐거움의 정언명령은 더욱 가혹해져 가는 자본주의와 더욱 공고해져 가는 대의제 정치라는 이 시대의 진짜 핵심을 세련되게 감춘다. ‘즐겨라’라는 명령이 잦아질수록 삶은 더욱 공허해지며, 그 공허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다시 즐거움을 찾는다.” 모순은 결코 해결되지 않고 그냥 미뤄질 뿐이다.

 

문강형준은 소위 ‘안철수 현상’에서도 비슷한 모순을 본다. “이명박에게 ‘당한’ 대중은 이제 안철수에게 이명박이 가지지 못한 정직, 신뢰, 부드러움, 소통 등의 이미지를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명박과 안철수가 동시에 구현하는 ‘행정, 관리, 성공, 경제’의 이미지 역시 함께 안고 가는 것이다. 대중은 여전히 ‘생존’의 법칙이 거의 유일한 삶의 법칙이 된 사회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보다는 ‘스스로 계발하고, 자기 관리를 하고, 즐거움을 좇으면서도, 동시에 기업을 성공시킨, 그러나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부드러운 사업가’를 대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 외에 안철수는 어떤 욕구를 대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착한 멘토들은 사실 ‘개판’이 되어 버린 시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쉽게 말하면 ‘착하게’ 이 고통을 견뎌 내고 승리하라고 조언”한다. 참고 견뎌서 세상이 바뀔 거면 이미 세상은 바뀌었어야 옳다. 그러나 아직도 이 모양인데 언제까지 착하게 살아야 할까?

 

이런 깨달음이 생겨도 파국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 인간으로 살며 공포에 떠느니 좀비가 되는 게 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멘토들은 그냥 좀비가 아니라 ‘착한 좀비’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멘토들은 좀비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싸움만 그만두면, 다시 인간이 되려는 욕망만 내려놓으면 계속 인간을 쫓는 자로 살 수 있다며 안심시킨다. 좀비가 되면 마음껏 인간을 사냥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쾌락이 아닌가.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간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고 사냥감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이 되려 하는가?

 

그리고 착하건 안 착하건 좀비의 가장 강한 본능은 생존 본능이다. 배가 고파지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좀비에겐 공통된 현상이다. 그리고 때로는 적절한 먹잇감이 없으면 좀비들끼리도 서로 뜯어먹는다. 이 세상에는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 없다. 먼저 공격해서 살아남는 자가 왕이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있기에,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좀비도 생명체이기에, 개판이 되어도 세상은 지속된다.

 

 


혁명의 지형학

 

우리가 단지 생존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다. 문강형준이 얘기하는 파국은 현실을 조롱하거나 절망하기 위한 키워드가 아니다. 외려 파국은 “위기와 절멸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근본적인 접근”이고 지금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푹신한 안락의 의자에서 일어나 “모순적인 현재에 개입하는 입구”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희소성과 폭력, 쾌락에 맞서 저자는 유토피아라는 카드를 꺼낸다.

 

허나 신자유주의는 유토피아마저도 가만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개입하고 현실을 강요한다. 그래서 문강형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게를 딛고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미친놈과 또라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뒤 재지 않고 무대포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좀비이길 거부하는 인간다움의 상징이다. 그런 미친 열광 속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사랑도 쿨하게, 정치도 ‘간지’나게. ‘핫’한 것은 오직 섹스에서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시대를 벗어날 수 있다.

 

사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체제를 지탱하는 사람이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체제에 ‘갇혀 있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미쳐야만 한다. “‘자기 신분도 모르고’ 반란에 나선 농노의 장인들을 가리켰던 또 하나의 말”이 “광신자”였듯이, 어느 시대에나 주류에 도전하며 파국을 불러오는 자들은 또라이일 수밖에 없다. 거리로 나서는 청소년들을 보며, 사랑을 나누는 성소수자들을 보며, 행진하는 슬럿 워크를 보며 민주주의나 사랑, 해방보다 ‘말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듯이, 이런 광적인 반란이야말로 파국과 맞닿아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까.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짓을’이라며 욕을 먹는 비동시성, ‘굳이 저렇게까지’라며 욕먹는 과잉된 행동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실천해 내는, 그럼으로써 가장 현재적이고 동시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는 토양”이다. 그래서 미치도록 사랑하고 가슴속 분노를 토해 내는 또라이들은 파국을 피하지 않고 파국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또라이는 누구인가? 문강형준은 그 모습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에서 찾는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이를 품어 줄 수 있는 이들, “이 서글픈 한국의 현실에서도, 오직 이 하층 계급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 그러니까 또 하나의 ‘모자란 아들’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일” 이들인 ‘아직 인간’이다. 언제 변해서 주변 사람들을 뜯어먹을지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진 게 없기에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니 이 체제의 붕괴에서 잃어버릴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파국을 준비하는 혁명가이다. 그러니 임금 노예의 사슬에조차 묶이지 못했던 인류의 가장 희망 없는 쓰레기들에서 혁명의 기운을 엿본 바쿠닌이, 토착적인 진보를 위해 산업 문명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일리치나 마르쿠제가 다시 부활한다. 문강형준이 외치는 최신 이론에서 나는 잊혀진 이론의 흔적들을 보기도 한다.

 

사실 나는 문강형준의 글보다 문강형준이라는 사람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더 그리워지는 건 글을 읽다 보면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 단지 그가 외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관객으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기 때문이다. 매체 비평은 매체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 둔감해서 글은 날카롭지만 깊이 감춰진 현실을 길어 올리지는 못한다. 자고로 문화란 게 같이 모여 앉아 쑥덕거리는 것이라면 그 해석 또한 쑥덕거리면서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다음 책보다 그의 귀국을 기다린다. 같이 먹고 마시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부대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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