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옥천신문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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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지방은 식민지일까? 식민지라면 누구의 식민지일까? 서울공화국, 서울제국의 식민지? 그렇다면 지방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울공화국이나 서울제국에서 파견된 관리들이어야 하는데, 비틀거리긴 하지만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무조건 그렇게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지역의 토호들이 중앙권력과 결탁하지만 그 관계를 하나의 위계질서로 파악하긴 어렵다.


그리고  지역간 불균등 발전은 국가의 의도일 뿐 아니라 자본(재벌)의 의도이기도 하다. 자본은 새로운 시장과 자원, 노동력, 생산입지를 찾아 이동하고,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 나오듯 재벌들은 부동산 위기 때마다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겨왔다. 자본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조성하고 그곳을 개발하고 다른 곳을 뒤처지게 만들어 이익을 취해 왔다. 그러니 식민지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긴 어렵다.


그럼에도 ‘내부 식민지’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앞으로 진행될 방향을 보여주는 것보다 지금까지 흘러온 방향을 분석하는데 유용하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사람과 자원을 빨아들이며 지방을 황폐화시키는 블랙홀같은 수도권이 실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균형발전논리에도 아직 중앙집권형 국가와 소수 재벌의 결탁구조, 중앙과 지방의 기득권층이 서로의 뒤를 봐주는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식민성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을 쓸 때의 분명한 장점이 있다.


다만 식민지라는 표현을 쓰려면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와 식민지를 관리하는 주체, 식민지를 관리하는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 논의는 많지 않다. 이 글은 그것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




1. 식민지 경험은 사라졌을까?



일제 식민지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갔을까? 보통 ‘국권의 상실’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일본의 지배는 국권보다 더 중요한 삶의 권리를 앗아갔다. 그것은 바로 ‘주권의 상실’이다. 세금과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갖춘 근대국가 자체가 시민의 주권을 빼앗는다고 볼 수 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런 변화가 전통과의 ‘단절’로 나타난다.


과거 전통사회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킬 이유는 없다. 다만 단절이 정체성과 자존감의 상실을 가져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식민지 상황에서는 이런 단절이 폭력을 동반한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파괴, 사적 소유권의 폭력적인 강제, 법과 규칙의 강요가 바로 그 폭력이다. 한국의 농민공동체는 파괴되고 마을의 공유는 압수되었고 일상생활을 구속하는 온갖 법률이 강요되었다. 자연스럽게 관(官)과 민(民)은 분리되었고,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고방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중앙의 국가권력에서 가부장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런 위계질서 속에서 한국사회는 지극히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었다.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을 일본경제에 종속시켰다. 일본에 쌀을 공급하기 위해 벼농사가 강요되었고, 일본의 공장에 필요한 원료작물(면화 등)의 생산이 강요되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생산할지를 식민권력이 결정했다. 식민권력과 결탁한 자본만이 이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대다수 민중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식민지의 주민들은 대부분 강한 힘을 숭상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자연스런 원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폭력적인 감정을 주민들에게 심었다. 강한 것이 미덕이고 강해지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또 하나 식민지 권력은 주민들의 단합을 막기 위해 자신을 뒷받침할 단체들을 만들고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었다(이들이 지금 지역사회를 장악한 ‘지역토호’의 원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민 갈등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관-민 갈등인 경우가 많았고 이런 폐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식민지의 경험이 식민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식민지 국가들에서 검증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2001년)에서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가 “식민지배가 초래한 무기력과 상대적 후진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극복할 것인가”였다고 말했다.


허나 우리는 이 과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조건도 되지 않았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빈곤이라는 것이 현재의 조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이런 식민지의 경험은 과거와의 고리를 끊고 미래를 봉쇄해서 현재의 삶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년)에서 말했듯, “만약 우리가 소득의 빈곤에만 집중하지 않고 능력의 박탈이라는 더 포괄적인 생각으로 전환한다면, 소득 위주의 통계를 비롯한 상이한 정보적 기초를 가지고도 인간의 삶과 자유의 빈곤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소득과 부의 역할은 다른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박탈의 더 광범위하고 완전한 측면에 통합되어야만 한다.”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기회를 박탈당했다.




2.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형성



이념을 떠나 국가조직을 놓고 본다면, 미군정과 그 이후의 한국정부는 식민지 시절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즉 중앙의 소수권력층이 경찰과 헌병, 군대와 같은 폭력조직을 독점하고 전국을 힘으로 통치했다. 커밍스는 앞의 책에서 미군정이 해방 후 한국에 강력한 경찰국가를 존속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이런 경찰국가가 사적인 폭력의 사용을 눈감아주거나 조장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공권력의 폭력과 사적인 폭력이 약자들을 침묵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이런 폭력은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다른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왔다. 중앙의 권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무조건 ‘빨갱이’로 매도당했다.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빨갱이, 정부정책을 따르지 않아도 빨갱이, 국가에 성금을 내지 않아도 빨갱이, 한잔 걸치고 술김에 정부를 비판해도 빨갱이로 몰렸다(지금도 제주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기득권층은 빨갱이, 종북주의자로 부른다). 이런 분위기는 식민성의 영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욱더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수도권은 내부식민지를 만들고 지방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부식민지의 문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중앙집권형 구조를 갖춘 모든 국가에서 드러나는 문제이다. 연방주의에서는 그 문제가 조금 덜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문제는 있다.


역사학자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년)에서 국가가 지배를 위해 사회를 ‘급진적 단순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위생 프로그램, 사회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스콧은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한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스콧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콧의 분석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지방의 앎과 삶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표준말로 말하고 학교에서 훈련된 국민으로 생각하고 군대나 공장에서 명령받은대로 살아야 했다. 자연히 모든 눈은 국가에만 초점을 맞췄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 노선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재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수출전략은 대다수 지방의 희생을 담보로 가능했다. 재벌들에게 유리한 각종 정책이 추진되었고, 노동자/농민은 ‘산업역군’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토의 균형발전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으로 단순생산시설/환경파괴시설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재벌 중심의 정책은 중소기업의 영역으로 재벌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시장을 잠식하게 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말로는 시장경쟁의 규칙을 얘기하지만 그 규칙이 정해지고 실행되는 방식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정치권력이나 사법권력, 언론권력과 결탁한 재벌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의 생각은 ‘중앙집권화된 산업화 노선’을 여전히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있다. 어떤 산업화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개발독재를 넘어선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제 시기에 식민지 통치를 위해 이루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국가의 경제발전전략은 종속성의 늪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력한 ‘개발신화’를 형성했다. 국가가 경제 일반을 총괄하는 대표회사로 기능하며 무엇을 파종하고 심을지까지를 결정했고 농민들은 산업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런 중앙집권화된 산업화노선은 그것을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다른 뜻으로 부르든 지금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복지를 비롯한 사회서비스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한국에서도 여전히 국가이다. 시민사회나 제3섹터의 영역이라 불리는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책임 부분도 여전히 국가가 독점하고 있어 ‘관치경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97년 IMF로 외국자본이 대거 한국경제를 잠식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부분을 말하지 않고 체제를 얘기할 수 있을까? ‘녹색’마저 이명박 정부에 빼앗긴 ‘소위’ 진보세력이 지금의 체제논쟁에서 선진화를 넘어선 어떤 생태·분권·대안사회의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사회학자 고병권은 『추방과 탈주』(그린비, 2009년)에서 이런 우리의 삶을 ‘내부 난민’이라 부른다. “한미FTA를 추진한 노무현 정부의 ‘이것이 국민 모두가 살 길’이라는 식의 수사는 소위 비국민의 삶을 사는 이들의 ‘제발 우리를 살려달라’는 외침과 대칭을 이룬다. 국가권력이 적극적 육성대상으로 삼은 인구에서 탈락한 이들은 장기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이고 국가가 떠안아야 할 비용으로 인식될 것이다. 바로 자기 나라 안에 있으면서 사실상 자신을 보호해 줄 정부를 갖지 못하는 이들을 나는 ‘내부 난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내부 식민지’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정말 난민처럼 떠돌고 있지 않은가.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 지방민의 삶은 내부 난민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3. 빈곤과 자급, 자치



이란의 작가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년)에서 빈곤의 반대말이 부유함이 아니라 세도가라고 얘기한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pauper 곧 빈민의 대립항을 부자로 본 것이 아니라 potens 곧 세도가로 보았다.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은 자유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자유는 오직 세도가에 의해서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11세기의 평화운동 문헌을 보면 빈민은 inermis 곧 비무장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miles 곧 군인의 무력을 존경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이라는 말은 alleu 곧 면세 부동산이 조금밖에 없는 사람, 떠돌이 장사꾼, 심지어 호위받지 못하는 기사의 아내를 포함한 모든 비전투원에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대체로 빈자는 그저 ‘안전한 보금자리’를 잃었거나 잃을 지경에 놓인 사람이었을 뿐이었지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빈자가 사회 무대에 나타났다. 박탈당한 사람,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처럼 살아가리로 일부러 선택한 자발적 빈자였다.” 라흐네마의 말에 따르면,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이자 강요된 정체성이다.


라흐네마는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이 “
금욕주의나 수도사의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진정한 뜻에서 인간관계가 불가능한, 존재의 총체적이고 자비로운 차원을 모든 사람에게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 “공생의 빈곤이라는 더 높은 형식의 융성이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많은 존재’를 누리는 데서 기쁨을 얻는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마지막 희망으로 나타날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풀뿌리민주주의, 풀뿌리운동, 자치와 자급, 생활정치, 사회적 경제 등 다양한 우리말로 풀이될 수 있다. 라흐네마의 얘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관점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이 분리된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복잡한 이론의 과제나 강력한 세력의 과제라고 믿지 않는다. 이 과제는 지식인이나 정치인, 기업가의 몫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몫이다. 지금 당장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속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의 변화가 필요할까? 일단은 우리 몫을 되찾아야 한다. 국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라는 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지방정부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더 통제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활성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국세의 비중이 아니라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헛되이 사용되는 자산이 없도록 정보를 공개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과정을 밟아 예산이 집행되고 지방정부의 자산이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와 같은 제도의 시행이 중요하지만 이를 중간에서 매개하는 역할이 더욱더 중요하다.


쓰지 않고 버려지는 땅이나 건물 역시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이루, 2009년)은 시사적이다. 빈 건물의 공간을 개조해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재활용 가게를 운영하는 하지메는 이렇게 얘기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우리 가난뱅이, 얼간이, 오합지졸은 이제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결탁해서 무언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난뱅이 천지인데도 왠지 한 사람 한 사람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시시껄렁하게 뼛골 빼먹는 직장에서 일만 죽도록 하거나 중류 계급인 척하면서 번화한 중심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뱅이 제군!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 바가지 씌우려고 눈이 벌건 놈들이나 부자들이 덫을 쳐둔 장소에 갈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짱 좋은 것을 만들어보자구.…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공방(工房)이다. 무엇보다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이것저것 공구나 설비가 갖추어져 있으면 여간 쓸모가 없지 않다. 재활용 가게만 해도 가구를 수리하거나 개조하고 두들겨 부수어야 하므로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모두 공동으로 출자하여 만든 시설이므로 기본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까 돼먹지 못하게 쓸데없는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다. 게다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면 최고 아닌가.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공간에서 신나는 일을 벌인다면 동네의 문화 수준이 한층 올라갈 것이다. 하아, 좋다, 좋아!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공동시설을 마련할 때 문지방을 높여서 “출자자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음” 같은 규정을 내거는 일은 극력 말리고 싶다. 마치 컬트 종교집단의 시설처럼 되어버리면 재미가 없으므로 가능한 한 주변에 서성이는 놈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어 함께 이용하도록 하자! 출판과 인쇄에도 손을 대보면 참 재미있다…빈집을 찾아라! 물건을 찾아내라!! 바가지나 씌우는 부자 계급 주제에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척하는 당신! 남아도는 물건이나 공짜로 빌려줘!!…게스트 하우스를 만들어 얼빠진 놈들을 신나게 재워주자!…새로운 게스트하우스가 생기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딴 동네에 가더라도 “거기 게스트 하우스에는 재미있는 놈들이 모인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면, 그곳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도서관 작전, 목욕탕 작전, 장거리버스 작전 등등” 그의 말처럼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공공의 자산, 공유를 늘려야 한다. 생활정치든 사회적 경제든 이런 공유의 몫을 늘려야 국가와 자본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방지식과 지방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인문학을 많이 얘기하는데, 외부의 시선을 그대로 들여오거나 수도권 중심의 내용이 지방으로 파급되는 건 별로 좋지 않다.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 곳의 전통을 기반으로 지식과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이 중요하다. 커뮤니티 정보를 매개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공간으로 도서관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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