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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4 한국의 약자들 대나무숲에 끌리다(시사인)
posted by 몽똘 2012.10.14 17:24

인격을 뜻하는 영어 person의 어원은 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했다. 가면을 씀으로써 배우는 다른 인격을 가질 수 있고, 관객은 배우가 아니라 배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 점에 착안해 시민이 공개된 정치무대에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가면을 중요한 권리로 인정했다. 여기서 가면은 자신을 은폐하는 도구가 아니라 차별을 받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현실세계의 약자들에게는 강자와 동등해지기 위해 때때로 이런 가면이 필요하다.

 

한국의 트위터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열악하기로 소문난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편집자가 트위터에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라는 계정을 만들고 비밀번호를 공개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 비밀번호로 로그인을 해서 계정에 글을 남길 수 있다. 대나무숲이라는 명칭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듯하다. 그 이야기처럼 권력이 무서워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대나무숲은 들려준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한 출판사의 사재기 관행과 출판사의 비민주적인 운영, 기자와 저자에 대한 편집자들의 불만 등이 날 것의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고상한 척 행세하는 출판사 사장들에 대한 촌철살인(“북한도 삼성도 출판계도 가계 세습을 한다. 난 이 출판사가 좋았던 게 사모는 다른 일 하느라 출근을 안 하고 사장 자녀들이 어려서였다.”), 행사에 대한 불만(“곧 북페스티벌의 계절이 다가온다. 올해도 역시 주말수당 따위 꿈이겠지. 작년엔 밥값도 아까운지, 마감은 자기들이 하겠다고 생색을 내며 (배고파 죽겠는데) 8시 즈음 퇴근시켜 줬었지. 집에 가서 밥 먹으라며.ㅋㅋ”)도 이어졌다. 출판계는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리트윗이 폭발했다.

 

‘출판사 옆 대나무숲’의 성공에 힘입어 ‘촬영장 옆 대나무숲’, ‘연구소 대나무숲’, ‘병원 옆 대나무숲’, ‘공연장 옆 대나무숲’, ‘방송국 옆 대나무숲’, ‘IT회사 옆 대나무숲’ 등의 계정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급기야 ‘성형녀 대나무숲’, ‘시댁 옆 대나무숲’도 만들어졌다. 대나무숲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을 몇 개만 소개하자면, “수술대에 오를 때마다 세상이 열배씩 친절해진다” “시댁가서 첫 제사지낸다고 전 부치고 나물 삶는데 옆에서 눈치없는 시동생이 시엄마에게 한마디 ‘엄마, 원래 다 사서 했는데 왜 갑자기 집에서 해?’”, “니들끼리 연예정보 프로에서 웃으며 얘기하는 에피소드 ㅋ 우린 니들이 지랄 떤 게 에피소드다”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가면이 없다면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대나무숲이 인기를 누리자 알 수 없는 사건도 이어졌다. 올라온 트윗이 갑자기 삭제되거나 계정 자체가 사라지는 일(소위 계정폭파)이 생겼다. 비밀번호가 공개된지라 사장님이나 관련자들이 지웠다는 등의 괴담들도 떠돌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특성상 지우고 폭파당해도 금방 복구될 수 있기 때문에 대나무숲의 폭로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그런데 어떤 회사의 누가 올렸나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자 스스로 트윗을 삭제하는 일도 생겼다. 사실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은 없고, 가면을 써도 흔적은 남는다. 가면이 보장하는 조건은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배역을 맡을 것인가는 배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대나무숲은 어느 곳에서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피해를 볼 게 뻔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러니 대나무숲에서 어느 정도의 잡음은 피할 수 없고 원래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끄러운 것이다.

 

명절날 스마트폰을 들고 트위터에 접속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지어다. 어떤 얘기가 올라갈지 모르니. 그리고 ‘청와대 옆 대나무숲’이나 ‘법원 옆 대나무숲’이 등장할 날을 나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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