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가 쓴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의 '들어가는 말'(introduction)에서 강조되는 말은 민주주의의 급진성(radical)이다. 보통 러미스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대립관계를 설명한 사람으로 얘기되지만 이 책에서 러미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어야 하는 민주주의가 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렸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런 점에서 러미스의 얘기는 묘하게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중간계급이나 정당, 지식인, 엘리트들이 인민의 이름을 내세워 지배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러미스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 맑스주의나 자유주의 좌파가 이해하지 못한 그 혁명의 정치적 잠재력이 선거에 온 힘을 다 빼았겼기 때문에 급진성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선거로 몰아넣으려는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수많은 민중반란과 저항적인 사회운동에서 드러났던 많은 정치적 잠재력, 급진적인 민주주의는 지금 한국에서 선거의 틀로만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거에서 '소위 민주후보, 소위 좌파후보, 소위 시민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면, 인민들의 정치력은 '역시나' 어리석고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평가를 받아들인다면 인민들의 지배인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엘리트지배는 정당화된다. 러미스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한다.

또한 좌파/우파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 러미스는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지적한다. 러미스는 이 책을 필리핀에서 썼는데 자신이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필리핀에서 쓰는 것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러미스는 보수/진보가 과거의 합의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는 제1세계의 '현상유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의 민주화를 설명할 살아있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다루길 원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그 지역의 풍토나 문화와 무관한 제1세계식 민주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보급하려는 지식인, 엘리트들의 음모를 비판한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결국 제1세계를 본딴, 또는 제1세계 만큼의 경제발전을 이루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선진화 이후에나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풀고 난 후에나 정치를 얘기해야 한다. 이에 맞서 러미스는 민주주의가 삶의 양식이라는 점을, 일하고 생활하는 일상의 과정이 정치임을 주장한다.

아래의 글은 들어가는 말을 번역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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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980년대쯤 동료인 무로 켄지(Muro Kenji)는 가끔씩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Tsurumi Shunske)와 얘기를 나눈 뒤에 (여느 때처럼) 흥분에 들떠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참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 미국이나 소련, 일본,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남미, 어느 나라 어떤 시스템에서도 전복적이란 말야.” 민주주의에 대한 낡은/새로운, 단순한/복잡한, 확실한/모호한 생각은 나의 흥미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E. M. 포스터가 말했듯 두 번의 축배는 가능하지만 세 번은 불가능한 원리[민주주의]에 고취된 사람을 만나는 건 신기한 일이다.


거의 동시에 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잡지를 발간한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내용은 필자로 추천할만한 일본의 급진민주주의자를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급진민주주의자”에 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이웃집 소녀(혹은 소년)를 사랑하게 된 것과 조금 비슷한 경험이었다. 평상시에 알고 지내던 이 존재는 갑작스럽게 아주 새롭고 신선하고, 뭐랄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1960년대 초까지 미국과 일본 양국에서 결코 맑스주의자를 자처할 수 없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지만 맑스주의가 자유주의 국가나 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힘에 항상 의존했던 운동의 활동가였다. 이 시기의 운동정치에서 맑스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의 “좌파”라는 의미로, 즉 더욱더 “급진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 좌파 사이의 불편한 중간 지대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그래서 자유주의 좌파와 구별되기 어려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프랑스혁명에서 처음 사용된 좌파-중도-우파라는 공간적 은유는 말하자면 우리가 정치를 배열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이 둘 “사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분명한 정치원리가 없다면 타협이라거나 잡종이라는 평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쓰루미-무로 공식(“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은 이런 공간적인 이미지를 다시 배열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급진적인 입장 또는 급진주의 그자체로 여겨지면서 다른 모든 정치적 입장과 그 사이의 관계들도 새로운 조명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정치현실을 더욱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더욱더 비판적인 힘으로 민주주의 이론을 무장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구상한지 10년 이상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폴란드와 중국, 버마, 필리핀 같은 많은 나라들에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을 목격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동유럽의 정부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결국 소련정부도 무너졌다. 동시에 민주주의 이론의 영역에서도 새롭고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동안 제목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는 책들이 북반구 공업국가들에서 현상유지(status quo)의 미덕을 지루하게 반복하면서 호황기를 누려왔다면, 민주주의를 “급진적”
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세대의 이론가들이 등장했다. 조지 부시(George Bush)가 자신의 임기동안 민주주의는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레이건(Ronald Reagan)과 부시의 정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 관점에서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과 공유했던 이념적 틀을 비판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구성하거나 재발견하려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이 수년 만에 최초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논의를 도우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흥미롭게도 내가 필리핀의 제3세계연구센터에 있을 때, 미국과 일본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의 동료들에게조차 나의 연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필리핀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작업을 준비하러 필리핀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감춰진 선입견은 여기에서 작용한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면 아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배우리라는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나는 이런 식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요량으로 신중하게 필리핀 대학을 골랐다. 그러나 필리핀을 선택한 것이 결코 무작정 이루어진 선택은 아니었다. 1986년 2월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후 고작 1년이 지났다. “인민의 힘”은 역시 그리스어인 데모스(demos)와 크라티아(kratia)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인민의 힘, 즉 급진민주주의는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민들은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선거 결과가 존중받는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목숨을 걸었고, 부패하고 무장했으며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한 독재자를 나라밖으로 쫓아내고 권력을 빼앗았다. 나는 민주주의가 낡아 빠진 슬로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념이자 진정으로 중요한 원리, 인민의 열정과 헌신을 담은 원리로 자리잡은 공간에 가기를 원했다.


실제 상황은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질 즈음 공중의 분위기가 흥분과 급진적인 희망으로 불타올랐지만 1987년 봄까지 환멸에 빠졌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그러나 이런 환멸에도 민주주의에 관한 긴급하고 풍부한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무슨 일이 잘못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맑시스트들은 민주주의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해냈다는 데 놀랐고, 자유주의 좌파는 민주주의가 별일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관해 가졌던 생각이 약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이 시기는 행복하진 않았지만 지적으로 고무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예상하지 않았던 것을 배우게 될 거라던 나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필리핀 지식인들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발전(development)”이라 불리는 동일한 장벽에 부딪혔다.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의 갈등은 제3세계의 시각보다 북반구 공업국가의 시각에서 볼 때 더욱더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북반구의 공업국가에서 쓰인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제3세계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제3세계에 관한 언급은 정치이론과는 다른 “장”인 “지역연구”나 “발전경제학”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민주주의 이론이 전 세계의 문제라면 거센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제3세계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나는 필리핀에서 제3세계(혹은 자국 안에 제3세계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발전의 문제와 그것의 반민주주의적인 편견을 다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2장의 주제이다.


이 책은 어떠한 제도도 기획하
지 않는다. 내가 제도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기획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획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기획들은 정치적인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인간사(人間事)의 원리로 살펴보려 한다(이것은 사람들이 이 원리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만든 다양한 제도와 행위와는 다르다). 민주주의가 너무 자주 뒤섞이고 혼동되어 사용되다보니 우리는 마치 민주주의가 자유선거 혹은 인권의 법적보장, 노동자의 통제인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우리는 평화가 평화조약이고 정의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배심원 재판에 의해 보장되는 정의, 혹은 평화조약에 의해 지켜질지도 모르는 평화는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모든 경우가 아니라 몇몇 경우에만 진실로 증명되는 가설이다. 재판이나 조약과 상관없이 정의와 평화에 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가설의 상대적인 진실 혹은 성공을 판단할 수 있다. 비슷하게(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선거”, “법적 보장”, “노동자의 통제”도 가설들이다. 이들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원리들을 가능하다면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보자면, 이 책을 유토피아적인 이론에 관한 저작으로 의도하고 쓰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어떠한 기획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테이블 위에는 이미 많은 수의 훌륭한 민주주의 기획들이 있고 그것은 몇 년 전에 어떤 것은 수백년 전에 등장했다. 모든 대륙, 각 나라, 사실상 모든 형태의 제도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들 각각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요구하는 상이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북반구의 거대 자본 정치(big money politics)의 민주화는 남반구의 군부독재 혹은 플랜테이션, “사회주의” 관료제, 혈연 정치, 신권정치의 민주화와 다르다. 이러저러한 제도들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운동들은 제 나름의 방법들과 목적,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실제 현실에서 그 사람들이 투쟁해온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책이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단과 목적을 명료화하고 평가하며 비판할 몇 가지 기준을 제공하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운동들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작은 공헌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제도들보다 뛰어난 이유를 사실상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이 초래하는 결과를 연구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만약 누군가가 급진민주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 내가 가끔 사용하는 방법은 상상의 인물, 이상형의 급진민주주의자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은 연구주제들 중 하나이며 이후의 어떤 상황에서건 노련하게 증명하는 역할을 맡는 관계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이런 이슈와 관련해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이 되려 할까? 이 답에는 구속력이 없다. 누군가는 답을 알면서 다른 정치체제를 선택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논의가 성공한다면 다른 체제를 선택한 이들이 최소한 자신의 선택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의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 2002)라는 책은 도발적인 제목만큼 새로운 문제의식을 다양하게 펼쳐놓는다. 러미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현실주의에 메스를 들이댄다.


러미스의 말은 역사적이면서 논리적이고, 그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간결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낸다. 가령 경제성장이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되리라는 현실주의에 이렇게 답한다.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선진화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래서인지 러미스는 경제를 얘기하면서 끊임없이 정치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책의 제5장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에서 러미스는 자유로운 공공영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러미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자세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0년)라는 책보다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1996년)라는 책을 먼저 썼다. 러미스가 잡지나 책에 실었던 글을 모은 책인데, 이 책을 지금 후배와 함께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도 먼저 번역된 책만큼 흥미로운 주장이 가득하다(녹색평론사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래디컬 민주주의

2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발전(Antidemocratic Development)

3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계(Antidemocratic Machines)

4장 민주주의의 잘못된 전통(Democracy's Flawed Tradition)

5장 민주적인 가치(The Democratic Virtues)


결론의 제목이 사뭇 의미심장한데 페르세포네의 귀환(Persephone's Return)이다. 지금 3장까지 초벌번역이 진행되었다(가을까지 마칠 수 있으려나).


번역하면서 눈에 걸리는 흥미로운 부분들을 미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이렇게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민주주의’는 한때 인민의 언어였고 비판의 언어, 혁명의 언어였다. 인민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정당성을 덧붙이기 위해 민주주의를 훔쳐갔다. 이제 그것을 다시 돌려받아 그 비판적이고 래디컬한 힘을 되찾을 시간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꽤 가치있는 것이다. 말이 올바른 곳에 사용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은 신선하고 깨끗하고 진실해진다. 그 말을 계속 사용하려는 습관이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말로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를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던 역사가 위선과 배신의 역사와 겹치지만 어쩐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는 순결한 정치적 이상이다. 래디컬하게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품고 있다.”


“‘인민’을 정의하기(a). 민주주의는 보통 인민에 의한 지배로 정의되어져 왔다. 이 의미의 래디컬한 의미를 제거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노예와 여성, 특정 인종, 빈민, 어떤 다른 집단을 배제해서 우리가 “인민”으로 뜻하는 바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나라에서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인민권력”을 지지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인민”으로 부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급의 사람들,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의존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를 요청하지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데모스(demos)는 원래 시민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을 뜻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도 원래 그 계급의 지배를 뜻했다. 중간계급이 지배를 잘하건 못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의 지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간계급의 지배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와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을 알려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유형의 지배에 다른 말을, 즉 “민중선동가(demagogy)” 썼다. 민중선동가는 인민을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대변하리라 약속하며 대중적인 지지(=권력)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주로 비난할 때 사용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특히 민중선공가가 적절한 상황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약속의 대가로 어떤 이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중앙집권주의이다. 중앙의 통제는 투쟁 중인 정파에게 이로울 수 있고 심지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 유용성이 그것을 민주적이라 부르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는 “뜨거운 얼음”이나 “각양각색의 통일성”과 같은 표현이다. 당신이 단어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보통 민주주의는 지방의 특색(localism)에 좌우된다. 지방의 지역들은 인민이 사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권력을 주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 철학의 올바른 이름이 래디컬 민주주의라는 점이 이 책의 입장이다. 톰 페인(Tom Paine)이 우리에게 알려줬듯이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good sense)이다. 양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이 주장은 분명하고 무난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분석적으로 따져보면 이 주장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이 똑같은 방식으로 일치된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인민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좋아할 수 있으나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에 관한 그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인민이 세계의 객관적인 구조나 인간 지각구조나 인식구조로 민주주의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태양이 열을 발산한다거나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직선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다. 민주주의는 선택할 수 있는 생활양식이고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개념이 단순하다는 것이지만 급히 덧붙이자면 단순하다는 것은 거짓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그러나 일상언어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일상언어는 보통 사회과학과 철학의 전문화된 언어보다 다른 방식으로 더욱더 복잡하다. 기술적인 용어들이 특수하고 분명하게 규정된 의미들만을 가리키리라 가정된다면, 일상언어의 단어들은 일상언어 사용법의 무질서한 역사의 엄청난 복잡성을 지고 있다. 어쨌건 일상언어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이고 따라서 우리 양식을 만드는 언어이다. 민주적인 담론은 그것이 민주적이려면 이런 언어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적인 담론은 높은 철학수준이나 책을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데 쓸 수 있는 전문가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되지 않아야만 한다. 이것은 지적 능력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불가지론이라 생각하며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사유의 기획이 양식의 수준에서, 그리고 양식의 언어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양식의 언어는 민주적인 사상을 만드는 기획을 진행하는데 적절한 수단이고 수단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면 민주주의자일까?”


종종 우리는 효율적인 것이 생산하고자하는 효과에 의존해서 달라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까먹는다. 최소의 노력이라는 원리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리고 소외된 임금노동처럼 우리가 목적을 사랑하고 수단을 증오하는 상황에 가장 잘 적용된다. 이것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랑을 나누고 춤추고 이야기를 하고 숲을 산책하는 것처럼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얽혀있는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친구들과 운동하거나 맛있는 식사를 먹는다면 그것을 가능한 짧은 시간에 끝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이런 것과 비슷한 많은 활동들이 있고 적절한 시간동안 적절한 노력을 들이는 경우에만 가장 효과적인 일들이 있다. 이런 활동들은 대체로 어느 한편 때문에 나빠진다.”


자물쇠처럼 산업생산의 기계화 역시 인간관계의 물화이다. 산업혁명이 생산설비의 혁명 이상이라는 점은 상식이다. 즉 산업혁명은 일의 조직화에서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단지 새로운 기계가 새로운 작업방식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이 혁명은 새로운 기계가 일을 새로이 조직하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감소시키려는 의도로 설계되었음을 뜻한다. 나는 노동분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산업혁명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천이었다. 한 노동자가 도자기를 굽고 다른 사람은 농사를 짓고, 또 다른 이는 고기를 잡고, 옷을 짓고 나무를 패고 대장장이 일을 하는 분업은 각 노동자 또는 노동자들의 공동체나 길드가 예술적인 수준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한다. 이런 류의 전문화는 제조업의 물건보다 더 많은 양의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전문화는 전통과 노래, 이야기, 예술적인 감성, 장인의 자부심을 가진 특정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 평생을 그런 일에 바친 노동자는 숙련된 농부나 전문 도자기공, 전문목공이 된다.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그 사물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가르치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다. 춤을 추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섞이게 된다.”


많은 맑스주의자와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모리스를 낭만적인 공상가나 비과학적인 사람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의 과학에는 잘못이 없다. 모리스가 기술결정론자가 아닌 점은 분명하다. 모리스에게 기계와 기술은 인과관계에서 그것이 구현될 사회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와 기술은 그 사회의 기능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고 그 사회의 에토스(ethos)에서 특징을 띠게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회는 각기 다른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모리스에게 자유로이 일하는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노동의 기술을 선택할 것이고 이 기술은 노동자에게 최대한의 권한과 즐거움을 준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모리스를 공상가로 여긴다면 모리스는 분명히 맑스-레닌주의자를 어리석게도 핵심을 놓친 경제개발론자들이라 비난할 것이다.


정치는 인간이 그들의 집단적인 삶을 선택하고 함께 건설하는 활동이다. 이 선택이 선택이지 않다고 속이는 기술결정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자치수단 중 하나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반(反)정치적이고 반(反)민주적이다. 이런 물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치”는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정치적 환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즉 이 정치는 진정 중요한 선택―이 선택은 민중의 삶의 질과 그 공동체의 질서, 그들이 지배당하는 방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부차적이고 사소한 종류의 일들만을 결정하는데 집중한다. 이 정치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정치이고 전혀 정치가 아니다. 장소없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지금 세기에 우리가 계속 지불해온 정치적인 가격을 뒤흔들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진정 선택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선택할 시작할 것이다.”


기술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그 기술이 동반하는 정치를, 즉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량소비를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대량생산과 관리되는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공장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관리되는 과두정치와 사회적 불평등을 선택한다. 다른 한편 관리자와 노동자를 분리시키는 불평등과 대가와 도제를 분리시키는 불평등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관리자/노동자의 관계는 (맑스가 지적했듯이) 군대에서 장교/사병의 관계와 아주 가깝다. 아주 드문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는 결코 관리자가 되지 못하고 관리자는 결코 일을 하지 않는다.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자동차의 대량생산은 하나의 선택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기술“진보”의 혜택과 불가피성을 강하게 믿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자동차가 문명에 강요했던 엄청난 변화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고, 그러했다(예를 들어 정부가 철도와 다른 공공교통수단에서 고속도로 건설로 재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를 알았다면,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오염물질이 대기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가 고속도로의 자동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석유전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았다면 사람들이 엄청난 고속도로 건설에 찬성했을까? 이 세기가 끝나면서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와 일본의 토요타에서 어떤 삶이 선호될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자동차를 선택했을까? 글쎄, 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안다.”


내가 일본에서 온 학생들과 핸포드 핵저장소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이 시설을 둘러보며 짧은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히로시마의 날에 방문하도록 여행시간을 잡았다. 안내인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을 만들기 위한 핸포드의 충돌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과 그 폭탄이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핸포드와 리치랜드에서 벌어진 축하의식을 건너뛰었다. 전쟁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안내인은 원자력의 안전성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했다. 핵폐기물이 안전하게 매장되지는 않을지라도 위험기동안 세심하게 관리된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손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폐기물이 2만 5천년 동안 위험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누가 관리하나요?”

물론 미국 정부죠.”

당신은 2만 5천년 동안 지속된 정부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안내인은 화를 내며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고 대답을 거부했다. 분명히 그는 내 질문에 애국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는 내가 바보와 얘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핵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씩 자신들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안들에 참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안내인이 약간의 상식도 없이 내 영역인 정치의 장에 간섭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농부들이 기술과 사회적 목적간의 수단-목적 관계를 바로잡는 방법에 주목하자. 그들의 구호는 “생산성”이 아니라 “자립”이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가장 발전된 하이테크 농기구라면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도입하고 이런 농기구들이 어떠한 생산관계와 사회적 틀을 만들든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싶은 유형의 공동체(자립 공동체)로 시작하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농사기술을 찾았다. 이런 입장은 정말이지 도구를 통제하고 도구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설탕노동자나 쌀농사를 짓는 소농이 진정한 토지개혁 없이 이런 목적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정부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땅을 주는 걸 거부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그들은 네그로스에서 이런 실험들을 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지주들의 정부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자립하는 농부들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가장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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