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에 쓴 리뷰이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좋기도 하지만 걱정되기도 한다.
너무 말랑말랑해져서 무슨 차이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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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부흥기/혼란기?



요즘 들어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언론매체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협동조합의 부흥기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이런 분위기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사회의 기반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협동조합을 지역경제 발전모델로 고려하기도 한다.


왜 갑자기(?) 협동조합일까? 기념일 챙기길 좋아하는 한국인지라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더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국가경제는 재벌들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있고 수출 의존도가 높아 외부환경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그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하다.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주장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분위기가 반갑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런 관심이 협동조합‘운동’의 확대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국의 모델을 한국에 이식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협동조합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도 있고, 최근에 출간된 협동조합 관련 서적에서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신화일까, 위기일까?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이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다. 195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된 몬드라곤의 생산자협동조합 사례는 협동조합의 ‘성공신화’로 알려져 있다. 최근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으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역사비평사, 2012년)가 거의 20년 만에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그 책을 번역했던 김성오의 『몬드라곤의 기적』(역사비평사, 2012년)도 함께 출간되었다.


협동조합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연합조직)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몬드라곤의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기업인 현대중공업(2011년 기준 약 54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도 무려 8만 4천명에 달한다. 고용인원으로만 따지면, 몬드라곤은 SK나 롯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체제”인 협동조합이 이런 규모라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성오는 몬드라곤이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온 결과라고 이를 설명한다. 여러 차례의 위기와 유럽통합같은 커다란 조건의 변화를 겪었지만 몬드라곤은 생산자들의 복합체를 만들고 인력과 기술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며 힘을 키워왔다. 그런 점에서 김성오는 “몬드라곤의 경험을 완성된 본보기나 지고지순의 사례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사례’로 몬드라곤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얘기한다.


일단 변화하는 상황에 협동조합이 능동적으로 대처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섬으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바스크 지방이라는 특수성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강화시켰지만 경제위기와 유럽통합이라는 변화된 상황은 협동조합에게도 지역 차원을 넘어선 고민을 요구했다. 김성오는 몬드라곤 복합체를 만든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간의 연대가 당위적으로 강조되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몬드라곤에서는 그런 연대가 강력한 힘을 만들었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에서 드러나듯 몬드라곤의 성공 뒤에는 그런 연대를 가능케 한 정신적, 지적인 유대감이 존재했다. 몬드라곤의 신화를 만든 호세 마리아 신부가 있었기에 그런 변화도 가능했다. 이런 유대감 없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협동조합이 하나의 틀로 묶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몬드라곤은 그런 정신적, 지적 유대감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한국의 협동조합에 던진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 몬드라곤의 성공이 몬드라곤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몬드라곤은 더 이상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이 아니다. 몬드라곤에 소속된 노동자 중 러시아와 멕시코, 중국, 브라질,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고용된 인원이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약 1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몬드라곤에 협동조합만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몬드라곤은 1990년대부터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유통 부문의 자회사들은 상당수가 비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 몬드라곤에 소속된 260여 개 회사 가운데 대략 절반만 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조직형태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전체 고용규모는 늘어났지만 “이는 주로 해외 노동자들이 증가한 결과”이고 “국내시장에 더 신경을 써왔던 다른 두 부문은 직원 비용이 감소했다.” 에로스키를 비롯한 유통부문이 인수․합병을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체를 늘려서 “몬드라곤에서 최근 10년간 창출된 신규 고용의 70%가 바로 유통부문에서 이루어졌”지만 정작 금융과 유통 부문에서 조합원 노동자 비중은 전체 고용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규모는 커졌지만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이 증가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 앞으로 주식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노동자 조합원의 비중을 늘려나간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제조업 중심의 몬드라곤이 그 구상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커지는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상시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총이사회와 상임위원회, 사무국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김성오도 그 점을 지적한다. “몬드라곤의 경영권력은 총이사회, 중앙사무국, 그리고 각 부문조직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반비례하여 평조합원들의 직접민주주의적 성격의 참여는 약화되었다. 평조합원들과 경영조직 사이의 간극은 넓어지고 있으며,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외연 확대 과정에서 권력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복합체가 개별 협동조합을 규제하는 방식도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위 협동조합 총회에서 몬드라곤 가입을 결정한 경우에, 그 협동조합은 무조건 몬드라곤의 규칙과 규정을 수용해야 하고 또 부문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물론 복합체에 가입된 협동조합에게 탈퇴의 자유가 있다지만 그건 노동자에게 퇴사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협동조합의 7원칙 중에서 민주적 경영의 원칙이 흔들리면 다른 원칙들도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의 사유도 영향을 받는다. “노동자 조합원들은 몬드라곤의 소유자이고 또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참여 행위는 수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참여의 수준은, 그들이 회사에 노동력을 공급한 대가로 선급금(월급)과 배당금을 받고(물론 자신의 자본구좌로) 또 회사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조합원들은 점점 사업 이익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몬드라곤을 설립한 호세 신부는 연말에 지불할 배당을 미리 매월 지불한다는 선급금 제도를 통해 임금제도를 변화시키려 했는데, 최근 글로벌화와 고용형태의 변화는 역으로 임금제도를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를 협동조합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삼성처럼 이건희 개인이 기업의 노동자보다 수천, 수만 배의 돈을 가져가는 경우는 협동조합에서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협동조합이 좋은 삶을 실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좋은 삶은 일할 수 있느냐,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모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협동조합이 경제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목적을 가진 조직이라면 그 사회성을 실현할 방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협동조합이 대안적인 사회의 기반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사회적인 목적은 협동조합의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고, 협동조합의 사업 대상과 과정 자체가 그런 목적을 반영해야 한다.


사실 김성오나 몬드라곤을 소개하는 여러 언론매체들은 고용창출을 강조한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접근처럼 보이는데, 그런 접근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단지 고용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즉 단순히 일자리 창출로만 접근한다면 그것이 이명박 정부의 구호와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도 몬드라곤의 해외 지사의 노동자들이 스페인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외국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한 사례가 지적되는데, “보통의 다국적기업이 대주주들을 위해 하청 자회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몬드라곤 역시 스페인 바스크 지역 노동자 조합원들을 위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는 몬드라곤이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김성오는 이를 어쩔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는 듯하지만, 이 사실은 협동조합의 사회적 목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진행되는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대안사회를 꿈꾸는 건 불가능하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의 당의정(糖衣錠)일까?


사실 이상을 품은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협동조합이 급조된 전략이 아니라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삶의 형태임을 보여준다.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 프랑스의 노동협동조합, 독일의 신용협동조합, 덴마크의 농민협동조합,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의 형성과정과 현황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경제보다 더 깊은 차원에 “경제와 사회의 격차를 줄여 나가고 개인이나 집단이나 누구나 경제적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통합의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는” 시민시장(civil market)이 있음을 지적한다.


자마니 부부는 시종일관 협동조합이 낡은 모델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기업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개인 서비스 같은 특정 경제 영역에서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보다 효율성에서 더 뛰어”나고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축소하고 민주주의 공간을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사회적 자본, 즉 시민의 신뢰 네트워크를 강력하게 창출하는 역할을” 맡으며 “개발도상국 또는 국제투자가 미치지 못하는 분야나 지역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데 적합한 기업형태로 대두됐다”는 것이다. 가히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이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몬드라곤의 현실을 자마니 부부는 어떻게 볼까? 책에서 몬드라곤 사례가 직접 언급하기도 하는데, “몬드라곤의 성공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에로스키 소매 체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체들은 지역적으로 바스크 지방에 머물러 있다. 몬드라곤 그룹은 바스크 지역 생산의 8.3%, 고용의 14%를 차지한다. 관련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거나 이웃 지역으로 진출할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반영한 평가일까 의문이 들지만, 어쨌거나 자마디 부부도 몬드라곤의 변화를 지지하는 듯하다.


사실 자마니 부부의 관점에서 보면 몬드라곤의 확장과 글로벌화는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자마니 부부는 “작은 규모라야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나라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고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방식이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협동조합이 크면 클수록 그 정체성이 강해지고, 다른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업의 확장이 심각한 협동조합의 정체성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협동조합이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서 있겠다고 한다면, 필히 현실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 대기업은 1971년에 전체 대기업의 2.3%에서 2001년 9%로 비중이 커졌다. 고용 인력에서도, 협동조합 대기업 비중은 1.2%에서 8.1%로 높아졌다. 말하자면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경제의 전반적 추세와는 거꾸로 움직였다. 자본주의 기업의 평균 규모가 축소되는데 반해 협동조합 기업들은 규모가 커졌던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자마니 부부가 협동조합의 무조건적인 확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확장을 위해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협동조합의 특별한 정체성을 해치지 않은 채 어떻게 성장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해서, 스스로 충분한 자본을 조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노동자/생산자협동조합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장을 위해 협동조합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풀려나야 하지만 그럼에도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고 경영진은 민주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 영리기업과 다를 바가 없고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동조합과 시장경제를 화해시키려는 자마니 부부의 노력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면서도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기업 자체에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마니 부부는 이를 이탈리아의 전통이라 얘기하는데 “정치경제학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적 시장경제에도 휘둘리지 않은 전형적인 이탈리아학파에서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통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인간적인 사회와 우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시장경제와 접목하려는 노력은 높이 사지만 그 방향이 올바른지는 의문이다. 경제는 국가나 사회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얇은 책의 내용만으로 “시민 인문주의에 뿌리를 둔 시민 경제의 지적 전통”을 이해할 수 없지만 노동분업과 성장을 위한 축적, 기업의 자유를 특징으로 삼는 시장경제가 공화주의나 인문주의 전통과 결합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앞서 몬드라곤에서 봤듯이 대의원총회를 열고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협동조합 대기업의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조합원의 경제적인 관심은 높아지는 반면 정치/사회적인 역량은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경향이 장기적으로 볼 때 협동조합에게 유리할까?


사실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거스르기 어렵다. 하지만 사회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야 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을 넓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허황된 꿈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소명’을 협동조합이 버린다면, ‘협동조합’운동은 가능할지라도 협동조합‘운동’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협동조합에 가했던 비판이 옳았다고 손을 들어줘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가했던 비판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영하며 부르주아로 변신하려 한다는 점이 아니었다. 협동조합의 성장이 협동조합의 경제성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계급관계를 은폐시킬 것이라는 점, 그래서 협동조합이 혁명의 기반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자마니 부부의 협동조합 논의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자마니 부부의 주장에서는 이탈리아의 내부 문제,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던 남부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남부의 농민지대가 북부의 산업지대에 종속되고 노동자가 농민과 분리되어 농민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문제시했다. 그런데 책에 나온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지역별 고용 현황을 봐도, 남부의 협동조합 비율이 북부에 비해 낮고 남부에서는 주로 취약계층을 고용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발달되고 있다. 그동안 볼로냐나 이탈리아 협동조합을 찬양하는 글은 많이 봤지만 남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만일 남부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이탈리아의 모델은 국가경제모델이지 지역경제모델이 될 수 없다.


협동조합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로버트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박영사, 2000년)를 얘기할 수 있다. 퍼트남은 이탈리아 사회를 분석하며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상호유대의 결속관계와 종속과 착취의 수직적 결속관계 사이의 구분”이라고 표현했다. 남부의 정치적 후원관계가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를 설명해준 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퍼트남은 “경제상태가 시민성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성이 경제 상태를 설명해줄 것”이라며 유명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론을 주장했다. 설득력 있는 듯 들리지만 퍼트남의 시각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는 특정한 시민사회를 우월하며 보면서 사회운동과 계급갈등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자마니 부부의 주장도 비슷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의 노동운동과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운동이 협동조합운동과 주고받은 영향이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자마니 부부의 이론도 퍼트남과 비슷한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은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잘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합의 동력과 시장에서 제 구실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이것이 왜 협동조합 운동의 발상지가 유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유럽에서는(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15세기의 시민적 인문주의 이래로 또 계몽주의의 결정적 자극을 받으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자라날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이 유럽의 것일지는 모르나 협동의 다양한 양식은 전 세계 민중들의 삶에서 공통되게 발견된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자급관점(subsistence perspective)』(국내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다)을 보면 다양한 자급경제의 양식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자급경제의 다양한 양식들은 시장이 아닌 곳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외려 그것을 거스르면서 뿌리를 내려 왔다.  ‘따라잡기 개발’과 ‘따라잡기 소비주의’가 아닌 자급의 관점을, 노동분업과 임금체계가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을 강조하면서 미즈와 톰젠은 비서구 사회, 비근대의 협동양식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협동조합은 사회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고 한국의 정치, 사회구조가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없는 한국,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토건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무한경쟁구조에 갇힌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어떻게 자신의 전략을 만들어야 할까?


협동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기에 우리에게는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몬드라곤의 기적』과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이런저런 근거들을 제시하곤 있지만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근대적인 경제조직에서 찾고 있고 그런 경제적 관점을 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왜 다양한 협동행위를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까?



협동조합 논의에 대한 유감


『몬드라곤의 기적』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은 저자의 관점에 스며든 편견이다. 몬드라곤이 협동조합 방식을 해외의 기업에 적용하지 않는 이유로 “협동조합 설립에는 협동조합 문화에 익숙한 조합원들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협동조합 문화는 짧은 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식의 언급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보면, 이미 “중국의 1억 8,000만 명과 인도의 2억 1,000만 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정체성과 중국이나 인도의 협동조합 정체성이 다르다는 얘기일까?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오리엔탈리즘, 따라잡기 관점을 반영한다고 본다.


사실 그동안 생협의 활동가나 협동조합 연구자들이 한국의 협동조합 역사를 다루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이 전진한이다. 일본 유학생으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실제로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켰던 전진한은 자전적 기록인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년)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유협동주의’라 명명했다. “개인주의에서 독점성과 배타성이 止 즉 폐기되고 개성자유 즉 개성존엄성, 평등성, 창의성이 揚 즉 보존됨과 동시에 전체주의에서 강권주의와 기계주의가 止 즉 폐기되고 사회협동 즉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揚 즉 보존”되는 이념인 자유협동주의는 농어촌의 협동조합체계와 도시의 소비자/생산자협동조합체계를 결합할 뿐 아니라 임금제도를 철폐하고 이익을 균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협동조합조성법, 협동조합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전진한은 국가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민중의 자조적인 생활을 통해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그는 “국민경제가 일부 독점재벌이나 간상모리배 심지어는 탐관오리에게 농단됨이 없”도록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외국의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반면 이런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협동조합운동도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진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평가하면 잘못일까?


두 책의 관점에 협동조합의 관점은 있지만 대안이념으로서 녹색의 관점은 없다. 저자들이 수용하는 글로벌화와 성장전략은 녹색이념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세계에 뒤쳐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생명사상과 결합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이념은 시대를 앞서간 면이 많다. 지구의 생명을 알리는 시계는 불과 1분을 남겨두고 있는데 우리는 천하태평이다. 협동조합이 이런 시대정신에 민감해야 할 텐데, 외국의 협동조합은 외려 둔감하고 국내의 협동조합이 이런 민감성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그런 면을 살리려는 노력이 사회구조적인 변화에 가로막히면서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일상과의 접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자기 사업의 틀에 갇혀 사회의 전체 그림을 보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사회의 구조와 시민들의 일상을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협동조합 논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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