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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1.03.11 00:55
 

지금 서울시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제정하려는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 필요한 서명인 수는 만 19세 이상 유권자의 1%, 약 8만 2천명이다. 수치로만 보면 1%가 그리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8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고 서명을 받는 형식도 매우 까다로워 애써 서명을 받아도 무효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에서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동안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서울시에서도 2004년 3월 약 14만 6천명의 서명을 받아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서가 제출되었고, 2010년 3월에도 서울광장조례개정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었다. 가끔은 현실이 되기에 이런 사건은 불가능이 아니라 기적이라 불린다. 1999년 8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된 주민발의제도는 조례를 제정하고 개정할 시민의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참여민주주의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이 한창인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상급식을 반대하기 위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고, 실제로 2011년 1월 보수단체들이 본격적인 주민투표 청구운동에 들어갔다. 주민투표를 청구하려면 6개월 이내에 서울시 유권자의 5%, 약 41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에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보수세력이 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4년 7월에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이후 시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고 모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청구했다는 점에서 주민투표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허나 주민투표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결정사항에 관해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해서 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하기에도 애매한 닭갈비이다.


주민발의제도와 주민투표제도는 주민소환제도와 함께 참여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이 제도들은 선거에서 대표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선택을 넘어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시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참여민주주의의 역설


참여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모든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조직화된 세력이 선거과정에 개입해서 여론을 몰아가거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야합하면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나 약자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 자체는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문제삼기도 어렵다. 결국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중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지배를 당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처럼 참여가 민중의 권리를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득권층의 결정을 정당화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 1인 1표로 계산되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쪽수’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과정이 무시된다. 수능시험 한 번에 그동안의 노력이 판가름되듯이, 선거 당일의 투표결과에 따라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민주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역설이 한국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이다(이를 빌미삼아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진보를 가장한 보수학자들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일했던 캘리포니아주를 예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주지사를 주민소환제도로 소환해서 해직시키고 공화당의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미국에는 서명과 운동을 대신하는 전문회사들이 있을 정도이니 돈만 있으면 사적인 이해관계를 민주적인 여론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민관협력사업이나 마을만들기 등을 통해 시민참여가 시민동원으로 변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적인 제도가 ‘민중의’ 지배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면 인권의 의미가 뒤죽박죽되듯이, 참여의 성격을 가리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뒤죽박죽된다. 한 때는 신새벽에 남 몰래 쓰는 단어가 민주주의였고, 참여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되면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그리고 배반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현실을 비관한다. 허나 정말 현실의 문제일까?


이란의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참여를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라 부른다. 원래 참여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어울린다”는 윤리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상향식 참여를 강조하며 시민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전략은 참여의 의미를 대규모 공사나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집회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조작된 참여와 자발적인 참여는 구분되기 어려워졌다.


특히 라흐네마는 경제발전 영역에서 참여가 더 이상 정부에게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정치적․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구호로 변하고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더 큰 효율성을 낳는 수단”, “훌륭한 기금마련 수단”, “민간부문을 개발사업에 곧장 끌어들일”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은 참여민주주의제도가 처음부터 가진 한계였다. 왜냐하면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는 ‘정부=공권력, 민중=권력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자신의 권력을 쪼개어 시민에게 넘겨주는 것을 참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민주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있다. 제 아무리 억압적인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제도로는 잡히지 않지만 힘으로 느껴지고 사람들 사이에 울림을 가져오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가 있다. 이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왜 우리는 그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을까? 라흐네마는 이를 “유럽 좌파의 전통에서 나온 권력 관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참으로 문제가 있는 권력 관념이 전통적․향토적 권력관념을 밀어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참여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조차도 민중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거북해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상식을 가진 풀뿌리 민중이 선구적 지도자들이 내놓은 해법에 결국은 동의하지 않을 때 민중이 협조하지 않거나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직 의식이 깨지 않았거나 반혁명 세력에게 놀아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 어떤 명분을 대더라도 이런 모습은 민중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민주적인 태도이다.


그러니 참여민주주의라는 세련된 말에는 모순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제 몫을 다하려면 우리를 세뇌시킨 이런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 정부가 스스로 권력을 만들지는 못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민중의 지배를 보장한다면 그 사회의 법을 제정하고 바꿀 권리도 민중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법치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 인민주권을 전제하지 않은 법치주의는 기득권층의 기만적인 통치술일 뿐이다.



법에 가로막힌 주민발의, 정부에 가로막힌 주민투표


정부가 모든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근대국가에서 법을 제정하고 바꿀 힘은 민중의 손에 있지 않다. 민중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입법의 영역은 그나마 조례 정도이다. 미흡하지만 이런 점에 조례의 중요성이 있다. 주민이 발의할 수 있는 조례는 민중이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지역의 법인 조례는 입법자와 그 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의 법률과 다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드는 힘은 지방의회나 지방의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의 공론장과 시민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단순히 조례만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운동 과정에서 많은 소규모 공론장들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의 다양한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한국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에 강력한 금지조항을 달아두었다. 지방자치법 제 13조는 ‘법령을 위반하는 사항’, ‘지방세와 사용료, 부담금의 부과․징수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 또는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에 관해 주민발의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즉 시민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조례를 제정/개정하더라도 그 조례가 법률을 어기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우리농산물을 쓰도록 규정한 학교급식조례안이 세계무역기구(WTO)협정을 위반한다며 거부되거나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서 학생인권조례안을 막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태도가 계속 나타나는 건 조례가 중앙의 법률을 넘어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렵사리 주민발의를 통해 조례안이나 개정안을 제출하더라도 지방의회의 심의를 거치면서 그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주민발의된 조례들을 살펴보면, 발의된 원안대로 지방의회에서 의결되는 사례가 드물고 대부분이 수정되어 의결된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서명을 받고 조례안을 제출해도 지방의회를 거치며 빛바랜 개살구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한계는 주민투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은 법령에 위반되거나 재판중인 사항,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 예산․회계․계약 및 재산관리 사항,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 설치․변경, 공무원 인사․정원 등 신분․보수에 관한 사항, 동일한 사항에 대하여 주민투표가 실시된 후 2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사항 등에 대해 두루두루 주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투표를 쉽게 요구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투표를 청구하기는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서 주민투표제도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서도 자신을 민주적이라 포장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착각’을 유도한다. 이 제도들은 시민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커녕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해봐도 소용없다”는 회의주의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경험이다. 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제도들도 이런 경험을 바로잡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곤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제도의 변화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과정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제도는 언제나 악용될 위험을 항상 가진다. 그래서 직접행동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 제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야 제도가 원래의 취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행동은 제도 없이도 기적을 일으킨다.



왜 직접행동이 필요한가?


주민투표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이미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시작했다. 즉 제도 이전에 이미 정치행위가 있었다. 2000년에 고양시장이 백석동에 55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 하자 시민들은 이에 반대해 주민총회를 열고 자발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고양시에 사는 세대 중 43.3%가 투표에 참여했고(그 전해의 고양시장 보궐투표 참여율은 23.1%였다), 88.05%의 시민이 건물신축에 반대했다. 비록 법적인 효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도시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의 부안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에서도 주민투표가 정부의 근거없는 비방을 없애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정부가 온갖 강압과 회유, 속임수를 썼지만 시민들은 소규모 공론장을 형성하며 자기 목소리를 냈고 결국 외부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주민투표운동을 벌였다. 이 투표 역시 72.04%의 시민이 참여했음에도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지만 부안시민의 91.83%가 방폐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고양시와 부안의 사례에서 보이듯 제도 없이도 시민들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제도가 없었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제도가 없음’을 통해 그 제도의 정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안의 주민투표과정을 지켜봤던 한 활동가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주민투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민들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주민투표가 성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우편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2만 가구가 넘는 집들로 투표안내문을 일일이 전달했습니다. 투표에 필요한 투표함, 기표대도 모두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여의 폭과 열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연대했습니다. 40명의 변호사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성사를 위해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에서 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실무를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을 변화시키며 권력이 제도에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시민은 정치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참여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주민투표에서의 참여와 질적으로 다르고, 이런 참여야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력이다.


제도와 운동의 관계를 설명한 말 중에서 나는 함석헌 선생의 비유를 가장 좋아한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집이나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집이나 옷을 맞춰야 한다.


민주적인 제도를 얘기하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더불어 함께 시민을 만들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금방 생명력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져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을 가로막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직접행동을 벌이는 시민들 속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민주적인 제도는 그런 권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에만 참뜻을 실현할 수 있다.



※ 참고한 글


하승우,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 2004)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볼프강 작스 외, 『반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

김현․이호, “주민자치”, 시민의 신문 편집부,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1987~2002』(시민의 신문, 2004)

하승수, “생명과 평화, 자치의 공동체로”, 《빛두레》제 659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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