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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5 더글러스 러미스의 래디컬 민주주의
posted by 몽똘 2010.06.15 00:53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의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 2002)라는 책은 도발적인 제목만큼 새로운 문제의식을 다양하게 펼쳐놓는다. 러미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현실주의에 메스를 들이댄다.


러미스의 말은 역사적이면서 논리적이고, 그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간결하게 자기 의견을 드러낸다. 가령 경제성장이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되리라는 현실주의에 이렇게 답한다.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선진화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래서인지 러미스는 경제를 얘기하면서 끊임없이 정치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책의 제5장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에서 러미스는 자유로운 공공영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러미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자세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0년)라는 책보다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1996년)라는 책을 먼저 썼다. 러미스가 잡지나 책에 실었던 글을 모은 책인데, 이 책을 지금 후배와 함께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도 먼저 번역된 책만큼 흥미로운 주장이 가득하다(녹색평론사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래디컬 민주주의

2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발전(Antidemocratic Development)

3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계(Antidemocratic Machines)

4장 민주주의의 잘못된 전통(Democracy's Flawed Tradition)

5장 민주적인 가치(The Democratic Virtues)


결론의 제목이 사뭇 의미심장한데 페르세포네의 귀환(Persephone's Return)이다. 지금 3장까지 초벌번역이 진행되었다(가을까지 마칠 수 있으려나).


번역하면서 눈에 걸리는 흥미로운 부분들을 미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이렇게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민주주의’는 한때 인민의 언어였고 비판의 언어, 혁명의 언어였다. 인민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정당성을 덧붙이기 위해 민주주의를 훔쳐갔다. 이제 그것을 다시 돌려받아 그 비판적이고 래디컬한 힘을 되찾을 시간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꽤 가치있는 것이다. 말이 올바른 곳에 사용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은 신선하고 깨끗하고 진실해진다. 그 말을 계속 사용하려는 습관이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말로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를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던 역사가 위선과 배신의 역사와 겹치지만 어쩐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는 순결한 정치적 이상이다. 래디컬하게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품고 있다.”


“‘인민’을 정의하기(a). 민주주의는 보통 인민에 의한 지배로 정의되어져 왔다. 이 의미의 래디컬한 의미를 제거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노예와 여성, 특정 인종, 빈민, 어떤 다른 집단을 배제해서 우리가 “인민”으로 뜻하는 바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나라에서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인민권력”을 지지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인민”으로 부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급의 사람들,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의존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를 요청하지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데모스(demos)는 원래 시민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을 뜻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도 원래 그 계급의 지배를 뜻했다. 중간계급이 지배를 잘하건 못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의 지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간계급의 지배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와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을 알려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유형의 지배에 다른 말을, 즉 “민중선동가(demagogy)” 썼다. 민중선동가는 인민을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대변하리라 약속하며 대중적인 지지(=권력)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주로 비난할 때 사용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특히 민중선공가가 적절한 상황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약속의 대가로 어떤 이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중앙집권주의이다. 중앙의 통제는 투쟁 중인 정파에게 이로울 수 있고 심지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 유용성이 그것을 민주적이라 부르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는 “뜨거운 얼음”이나 “각양각색의 통일성”과 같은 표현이다. 당신이 단어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보통 민주주의는 지방의 특색(localism)에 좌우된다. 지방의 지역들은 인민이 사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권력을 주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 철학의 올바른 이름이 래디컬 민주주의라는 점이 이 책의 입장이다. 톰 페인(Tom Paine)이 우리에게 알려줬듯이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good sense)이다. 양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이 주장은 분명하고 무난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분석적으로 따져보면 이 주장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이 똑같은 방식으로 일치된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인민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좋아할 수 있으나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에 관한 그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인민이 세계의 객관적인 구조나 인간 지각구조나 인식구조로 민주주의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태양이 열을 발산한다거나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직선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다. 민주주의는 선택할 수 있는 생활양식이고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개념이 단순하다는 것이지만 급히 덧붙이자면 단순하다는 것은 거짓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그러나 일상언어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일상언어는 보통 사회과학과 철학의 전문화된 언어보다 다른 방식으로 더욱더 복잡하다. 기술적인 용어들이 특수하고 분명하게 규정된 의미들만을 가리키리라 가정된다면, 일상언어의 단어들은 일상언어 사용법의 무질서한 역사의 엄청난 복잡성을 지고 있다. 어쨌건 일상언어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이고 따라서 우리 양식을 만드는 언어이다. 민주적인 담론은 그것이 민주적이려면 이런 언어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적인 담론은 높은 철학수준이나 책을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데 쓸 수 있는 전문가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되지 않아야만 한다. 이것은 지적 능력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불가지론이라 생각하며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사유의 기획이 양식의 수준에서, 그리고 양식의 언어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양식의 언어는 민주적인 사상을 만드는 기획을 진행하는데 적절한 수단이고 수단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면 민주주의자일까?”


종종 우리는 효율적인 것이 생산하고자하는 효과에 의존해서 달라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까먹는다. 최소의 노력이라는 원리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리고 소외된 임금노동처럼 우리가 목적을 사랑하고 수단을 증오하는 상황에 가장 잘 적용된다. 이것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랑을 나누고 춤추고 이야기를 하고 숲을 산책하는 것처럼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얽혀있는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친구들과 운동하거나 맛있는 식사를 먹는다면 그것을 가능한 짧은 시간에 끝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이런 것과 비슷한 많은 활동들이 있고 적절한 시간동안 적절한 노력을 들이는 경우에만 가장 효과적인 일들이 있다. 이런 활동들은 대체로 어느 한편 때문에 나빠진다.”


자물쇠처럼 산업생산의 기계화 역시 인간관계의 물화이다. 산업혁명이 생산설비의 혁명 이상이라는 점은 상식이다. 즉 산업혁명은 일의 조직화에서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단지 새로운 기계가 새로운 작업방식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이 혁명은 새로운 기계가 일을 새로이 조직하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감소시키려는 의도로 설계되었음을 뜻한다. 나는 노동분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산업혁명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천이었다. 한 노동자가 도자기를 굽고 다른 사람은 농사를 짓고, 또 다른 이는 고기를 잡고, 옷을 짓고 나무를 패고 대장장이 일을 하는 분업은 각 노동자 또는 노동자들의 공동체나 길드가 예술적인 수준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한다. 이런 류의 전문화는 제조업의 물건보다 더 많은 양의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전문화는 전통과 노래, 이야기, 예술적인 감성, 장인의 자부심을 가진 특정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 평생을 그런 일에 바친 노동자는 숙련된 농부나 전문 도자기공, 전문목공이 된다.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그 사물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가르치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다. 춤을 추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구분할 수 없을만치 서로 섞이게 된다.”


많은 맑스주의자와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모리스를 낭만적인 공상가나 비과학적인 사람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의 과학에는 잘못이 없다. 모리스가 기술결정론자가 아닌 점은 분명하다. 모리스에게 기계와 기술은 인과관계에서 그것이 구현될 사회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와 기술은 그 사회의 기능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고 그 사회의 에토스(ethos)에서 특징을 띠게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사회는 각기 다른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모리스에게 자유로이 일하는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노동의 기술을 선택할 것이고 이 기술은 노동자에게 최대한의 권한과 즐거움을 준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모리스를 공상가로 여긴다면 모리스는 분명히 맑스-레닌주의자를 어리석게도 핵심을 놓친 경제개발론자들이라 비난할 것이다.


정치는 인간이 그들의 집단적인 삶을 선택하고 함께 건설하는 활동이다. 이 선택이 선택이지 않다고 속이는 기술결정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자치수단 중 하나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반(反)정치적이고 반(反)민주적이다. 이런 물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치”는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정치적 환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즉 이 정치는 진정 중요한 선택―이 선택은 민중의 삶의 질과 그 공동체의 질서, 그들이 지배당하는 방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부차적이고 사소한 종류의 일들만을 결정하는데 집중한다. 이 정치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정치이고 전혀 정치가 아니다. 장소없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지금 세기에 우리가 계속 지불해온 정치적인 가격을 뒤흔들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진정 선택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선택할 시작할 것이다.”


기술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그 기술이 동반하는 정치를, 즉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량소비를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대량생산과 관리되는 일의 질서를 선택한다. 대공장을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관리되는 과두정치와 사회적 불평등을 선택한다. 다른 한편 관리자와 노동자를 분리시키는 불평등과 대가와 도제를 분리시키는 불평등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관리자/노동자의 관계는 (맑스가 지적했듯이) 군대에서 장교/사병의 관계와 아주 가깝다. 아주 드문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는 결코 관리자가 되지 못하고 관리자는 결코 일을 하지 않는다.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자동차의 대량생산은 하나의 선택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기술“진보”의 혜택과 불가피성을 강하게 믿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자동차가 문명에 강요했던 엄청난 변화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고, 그러했다(예를 들어 정부가 철도와 다른 공공교통수단에서 고속도로 건설로 재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를 알았다면,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오염물질이 대기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가 고속도로의 자동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석유전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았다면 사람들이 엄청난 고속도로 건설에 찬성했을까? 이 세기가 끝나면서 미시건 주의 디트로이트와 일본의 토요타에서 어떤 삶이 선호될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자동차를 선택했을까? 글쎄, 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안다.”


내가 일본에서 온 학생들과 핸포드 핵저장소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이 시설을 둘러보며 짧은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히로시마의 날에 방문하도록 여행시간을 잡았다. 안내인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을 만들기 위한 핸포드의 충돌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과 그 폭탄이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핸포드와 리치랜드에서 벌어진 축하의식을 건너뛰었다. 전쟁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안내인은 원자력의 안전성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했다. 핵폐기물이 안전하게 매장되지는 않을지라도 위험기동안 세심하게 관리된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손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폐기물이 2만 5천년 동안 위험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누가 관리하나요?”

물론 미국 정부죠.”

당신은 2만 5천년 동안 지속된 정부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안내인은 화를 내며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고 대답을 거부했다. 분명히 그는 내 질문에 애국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는 내가 바보와 얘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핵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씩 자신들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안들에 참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안내인이 약간의 상식도 없이 내 영역인 정치의 장에 간섭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농부들이 기술과 사회적 목적간의 수단-목적 관계를 바로잡는 방법에 주목하자. 그들의 구호는 “생산성”이 아니라 “자립”이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가장 발전된 하이테크 농기구라면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도입하고 이런 농기구들이 어떠한 생산관계와 사회적 틀을 만들든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싶은 유형의 공동체(자립 공동체)로 시작하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농사기술을 찾았다. 이런 입장은 정말이지 도구를 통제하고 도구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설탕노동자나 쌀농사를 짓는 소농이 진정한 토지개혁 없이 이런 목적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정부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땅을 주는 걸 거부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그들은 네그로스에서 이런 실험들을 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지주들의 정부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자립하는 농부들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가장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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