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에 쓴 글입니다.
충분히 얘기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지금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좀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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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패배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1명, 진보신당 1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고, 경기도 시흥시장도 민주당 후보가 차지했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서울시 광진구에서 한나라당 후보 1명이 시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강원도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라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석도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했다.

그 전에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까지 고려한다면 집권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동안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결과만 보면 민심은 이명박 정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 점은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왜 투표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소를 찾았을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미 조직화된 표를 가진 여당 후보가 당선될 터이니, 이를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참여의 관심으로 변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으니 정치의 희망이 생긴 걸까?

작년 초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난 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촛불의 실패 또는 패배’를 얘기했다. 제도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촛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촛불의 목소리가 선거로 이어졌으니 이제 진보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걸까?

오히려 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지난 노동절 집회와 촛불 1주년 기념집회를 무참히 짓밟았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221명이 연행되었고, 용산철거민대책회의가 용산에 설치했던 천막도 기습 철거되었다. 선거결과로 드러난 민심에도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 5월 2일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발표한 대국민담화문은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날같으나마 도처에서 경제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폭력시위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우리는 지난해 무분별한 시위로 많은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이 재발된다면 정부는 부득이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우니 시위를 벌이지 말라는 논리가 참으로 터무니없지만, 실제로 연행된 사람들은 48시간을 꼬박 갇혀 있다 석방되었으니 단호한 법의 집행이라 하겠다. 앞으로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민심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정부는 민심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이 민심을 만들고 조작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점은 과거와 달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국민담화문에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그러난다. 왜냐하면 개정될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저작권법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이버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사이버 민심’을 조작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은 아예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을 없애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런 흐름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정부가 이명박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누르고 조작해 왔다. 그리고 좌/우를 떠나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과정에 동참하며 이득을 누려왔다. 언제나 민심은 민중의 가슴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통계수치나 지식인들의 전문용어,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정부보다 조금 더 노골적일 뿐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흐름을 계속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재보궐 선거에서 몇 번을 패배해도 3년 반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보다 박근혜라는 보수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즉 한국의 기득권층은 대표선수만 바꾸면 이권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민심 따위가 어찌 무섭겠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중의 가슴에서 민심을 끌어낼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자리에서도 나는 그런 대안들을 잘 찾을 수 없었다. 진보의 위기는 바로 그 점에 있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은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혀 왔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법의 잣대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형식적인 법적용이고 국민을 법의 적용대상으로만 보는 오만한 발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 편이 법에 따른 집행만을 강조한다면, 다른 편은 누가 법을 정하고 해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군사독재 시절의 터무니없는 말은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현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한미FTA와 관련된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던 정창수 씨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징역 9개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그리고 올 1월에는 삼성그룹의 ‘X파일’ 사건을 폭로했던 노회찬 씨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구형받았다.

응당 국민도 그 내용을 알아야 할 FTA관련 문건을, 그것도 공청회나 토론회에서 이미 드러난 내용의 문건을 유출한 것이 구속의 이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언론사와 대기업 간부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전․현직 검찰간부에게 떡값을 준 엄청난 비리를 폭로한 것이 처벌의 대상일까?

공공의 이익을 심하게 해치는 사건들을 폭로해서 사회적인 쟁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있다. 물론 법이 정한 과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그런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조차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행동은 사회에 이로웠다. 더구나 정치과정이 그 내용을 감추며 국민을 속이려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법부가 더러운 거래와 연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문제는 법치가 아니라 ‘법의 권위’인 셈이다.

그런데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검찰과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법을 앞세운 칼날을 겨누고 있다. 검찰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을 무리하게 구속해서 수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일 검찰은 조선․중앙․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말자는 운동을 이끈 혐의로 기소된 누리꾼 16명에게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구형했다. 시민이나 소비자로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고 운동을 펼친 것이 처벌의 대상이라니, ‘소비자운동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외친 랄프 네이더는 미국에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일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판결들이 권력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법부는 항상 ‘소신’을 강조해 왔지만, 그 소신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본으로 기울어졌다. 힘없고 약한 시민들이 냉혹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면,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국가나 경제에 기여해 왔다는 핑계로 후한 면죄부를 받아 왔다(영화 <공공의 적>의 강철중 검사처럼 권력에 맞서는 법관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일 뿐이다).

법은 강자와 약자가 같은 울타리 내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합의이다. 그런 법이 제 역할을 못하니 힘을 가진 자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이 무서워 자꾸 피하려 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조롱해서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에 약자들은 강자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품으며 법을 무시한다. 각자가 능력껏 자기 삶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곳에서 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법치주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의 권위를 더 빨리 파괴할 뿐이다. 법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검찰과 법원이니, 자기 집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외부의 혼란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가 법과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치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정의와 평등이다. 헌법이 보장하듯이 법의 권위가 시민으로부터 나오고 법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할 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법을 지킬 것이다. 법의 뿌리를 지키려는 법관들의 소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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