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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12.05 16:41
[오늘의 문예비평] 겨울호에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몇 편의 영화를 묶어서 감상을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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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택된 실화와 만들어진 판타지

지난 7월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전 국민이 국가브랜드에 대한 인식을 갖고 말 한마디, 활동 하나하나가 국가 브랜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국가도 상품처럼 잘 포장해 팔 수 있다고 믿어온 만큼 이 대통령은 상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립적인 노사문화와 불법시위가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한국인들만큼 국가의 이미지를 의식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국민들은 드물다. 외국인을 만나면 미소를 지으며 혹 길을 몰라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한일전같은 국가 간 경기가 벌어지면 한민족의 뜨거운 열정을 과하다 싶을 만큼 보여준다. 그리고 밉든 곱든 정치인들이 권좌를 떠나면 다 용서하고 잘한 것만 기억하려는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다. 갑자기 좌측보행을 포기하고 우측보행을 하라며 지하철 역사를 뜯어고치고 에스컬레이터의 방향을 바꾸어도 글로벌 기준이라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세계적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 정도면 전 국민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극장에서도 한국인들의 좋은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은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한국의 컴퓨터그래픽 능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겠다던 심형래 감독의 <디 워>는 842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올해에도 <킹콩을 들다>와 <국가대표>가 각각 130만 명, 8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 여세를 이어 갔다. 그리고 쓰나미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연출해낼 수 있는 민족임을 보여준 <해운대>는 1,134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

그 중 <우생순>과 <킹콩을 들다>, <국가대표>의 흥행은 다른 영화와 달리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세 영화 모두 인기없는 스포츠인 핸드볼과 역도, 스키점프를 소재로 삼았기에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방’에서 꿋꿋이 자기 힘으로 ‘성공의 신화’를 만들었던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이니 어찌 감동스럽지 않겠는가. 더구나 국가라는 브랜드가 걸려 있으니 애국심 강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감동을 느꼈겠는가. 열심히 노력하면 국가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적당한 웃음과 감동으로 버무려주니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이 감동을 준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허나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감동일까?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어떨까? 똑같은 실화이고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여자하키 국가대표팀 중 6명이 아제르바이잔에 집단으로 귀화한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수백만 한국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까? 그 사실을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그리고 故장진영이 주연했던 <청연>(2005년작)이라는 영화가 친일논란에 휩싸였던 사실을 보면, 또 “Korea is gay”라는 말을 썼다고 2PM의 재범이 한국을 떠난 것을 보면, 우리는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실화이지만 모든 실화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가대표라는 브랜드를 붙이지 않은 실화도 수백만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실화와 다르게 <킹콩을 들다>에서 올림픽 동메달 출신의 코치와 영자의 올림픽 금메달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감동에도 일정한 수준이 있는 듯하다. 아니, 우리의 감동은 실화라는 사실보다 국가라는 판타지를 통해 미리 준비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을 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국민가수’라는 호칭만큼 ‘국민영화’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 과연 음반판매량이나 관객동원수가 그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술이 소비의 양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디 워>를 보는 동안 내내 하품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앞서 얘기했던 영화들이 모두 국가브랜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이니 이런 비판이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영화들에서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대정서를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어떤 ‘코드’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2. 헝그리정신과 꽃남, 사라진 중간계급

흥미로운 사실은 흥행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우생순>의 미숙(문소리 역)은 올림픽 2연패를 하고도 팀이 해체되어 대형마트에서 박수치며 호객행위를 하고 남편 빚을 갚으려 아이를 데리고 대표팀에 합류한다. <킹콩을 들다>의 영자(조안 역)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할머니와 사는 고아이자 총을 사지 못해 사격부에서 쫓겨나는 가난한 학생이다. <국가대표>의 주인공 흥철(김동욱 역)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이고 칠구(김지석 역)는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소년가장이다. 300만의 관객을 기록한 <거북이 달린다>(2009년작)의 필성(김윤석 역) 역시 형사라지만 사는 건 시골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돈과 권력을 이미 다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이 특유의 헝그리정신으로 자기 삶을 일궈야만 성공신화를 그릴 수 있으니, 단연 그들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TV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들은 의외로 하나같이 재벌집 아들들이다. 고급자동차는 진부할 정도이고 자가용비행기에 요트를 타고 옆집 가듯이 외국여행을 하는 최고의 상류층들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도 헝그리정신은 등장한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금잔디(구혜선 역)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를 둔 학생이기 때문이다. 자기 가게가 있으니 다소 재산을 가진 중간계급이라 얘기할지 모르지만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이 호프집이나 복집을 운영하던 분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사회에서 자영업은 이미 중간계급에서 밀려났다(그렇다면 금잔디도 잠재적인 도심 테러리스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오는 주인공이 가장 극적인 매력을 가지지만 영화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중간계급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할 법도 한데 흥행하는 영화에서는 그런 주인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허리라는 중간계급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노동빈민(working poor)이 3백만 명에 이르고 실업급여 수급자가 1백만 명을 넘긴 나라에서 중간계급을 얘기한다는 것이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교육비의 규모가 연 20조원을 훌쩍 넘는 나라, 학벌이 신분인 나라에서는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막혀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냉혹한 경쟁의 사회에서 중간계급은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공모델이 아니기에 그 가치나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1970년대에 씌어진 조세희의 글에서 열심히 일해 중간계급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꿈은 이미 부정되었다. 난장이 아버지와 대학생 지섭의 대화는 그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일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 102~103쪽)

어떤 이는 집이 사라지고 공장에서 쫓겨나 달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는데, 다른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 집씩 살아도 약 3년을 버틸 수 있다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무슨 중간계급인가(『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의 저자 손낙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집을 많은 소유한 사람은 1,083채를 소유하고 있다). 소득만이 아니라 부동산같은 자산까지 포함하면, 몰락하는 중간계급의 허리는 휘다 못해 부러지기 직전이다. 이런 사회에서 더 이상 중간계급은 판타지를 줄 수 없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에서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차라리 귀한 집 자제들이 쿨하게 사는 법을 보여주거나 그들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헝그리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회학자 신광영은 이런 중간계급의 몰락을 민주화의 효과로 본다.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중간계급이 향유하였던 경제적 풍요와 중간계급이 선호한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이상 중간계급이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계급은 이를 막아낼 아무런 조직적,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의 중산층이 보여주었던 보수성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중산층이 스스로 만든 결과이자,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이전에 형성되었던 1987년 체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중략)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중산층의 불안정은 더욱 커질 것이고, 더욱이 보호막이 없는 중산층의 몰락은 전 사회적으로 ‘꿈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중산층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제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과제가 되었다.”(신광영,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 을유문화사, 2004, 266~267쪽).

87년 6월항쟁에서 승리한 중간계급들은 7~9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지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느라 바빴다. 경제적 풍요를 빌미로 정치적 자유를 포기했기에 중간계급은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다. 적절히 국가와 타협하고 경제적 이익을 꾀한 것이 결국 자신의 미래를 가두어버렸다. 중간계급은 자신이 우리사회의 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제 한국사회에서 헝그리의 성공신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키다리아저씨와 같은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는 아름다운 인연을 꿈꿔야 하는데 정녕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꿈을 꿀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건 너무나 우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판타지를 갈구하고 영화는 그런 판타지를 채워주고 있다.


3. 다시 뛰자, 대한민국: 공정하지 않은 팀플레이

가슴에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쓰나미라는 비극적인 재난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 <해운대>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마음들이 하나씩 모인다면 우리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만으로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을까?

<해운대>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영화 <투모로우>(2004년작)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몇 명의 영웅이 아름다운 행보를 보인다고해서 결코 전 지구의 재난을 막을 수는 없다. <슈퍼맨>이 아닌 이상, 지구를 역회전해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다. 우리 사회를 바꾸지 않고서는 파국적인 재난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투모로우>는 초강대국에서 제3세계에 몸을 맡기는 피난국으로 전락한 미국의 충격적인 자기고백, 바뀐 현실에 대한 자기선언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해운대>에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고백이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다.

물론 그렇다고 헐리우드 영화를 찬양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이야기도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구조대원이나 과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시민의 삶을 갉아먹는 저주받은 자본주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끔찍한 재난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린다는 사실은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에는 언제나 고만고만한 작은 악당들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에서는 가증스런 미소를 띤 큰 악당들이 노골적으로 이빨을 번쩍인다. 나오미 클라인(N. Klein)은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에서 과거의 군산복합체를 한층 능가하는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disaster capitalism complex)’라는 괴물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태풍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에서 자본가들은 고통보다 개발과 일확천금의 가능성을 보고, 쓰나미가 쓸고 간 자리에는 마을이 사라지고 호화 리조트와 관광시설이 들어선다. 사람들이 충격으로 혼란에 사로잡혀 있을 때 국가와 자본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기존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익을 꾀한다. 클라인은 얘기한다. “커다란 위기상황은 유권자들의 뜻을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경제기술관료’에게 국가를 넘겨준다.”(나오미 클라인(N. Klein),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20쪽)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도 자신의 책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상세히 묘사한다. “여기, 도심 한복판의 비즈니스 지구에, 유니온 가의 이제는 물이 마른 길바닥에…시체 한 구가 놓여 있다.…시간이 흐르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데도, 시체는 그대로 놓여 있다. 밤이 내리고, 다시 아침이 오고, 다시 낮이 된다. 그리고 또 다시 한낮의 땡볕이 크레센트시티의 죽은 시민을 내리쬔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미국의 주요 도시의 중심가 한복판에, 며칠 동안이나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결국 썩어서 냄새가 풍기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다. 뉴올리언스에 어서 오세요! 지금 막 종말이 닥친 뉴올리언스!”(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30쪽)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열심히 재난을 원한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몸을 던지며 생명을 구할 때, 자신들은 주판을 튕기며 이익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난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자신들이 세상을 장악할 것이라 자신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팀플레이’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한 팀으로 고통을 분담하자고 얘기하지만 그건 공갈빵처럼 속이 텅 빈 거짓말일 뿐이다. 기업소득이 증가하는데 개인소득은 감소하는 기이한 현상, 매출 상위 50대 기업의 순이익이 증가하는데 고용은 감소하고 비정규직은 확대되는 세상에서 고통분담을 얘기할 수 있을까? 현대자동차, 삼성, 두산, SK그룹의 회장들은 줄줄이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줄줄이 구속되거나 벌금형을 받는 나라에서 고통분담을 얘기할 수 있을까? 누구는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데, 인사청문회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장전입하는 능력을 자랑하는 곳에서 무슨 고통분담?

그런데도 우리 영화들은 여전히 팀플레이가 가능하니 다시 뛰자고 꼬드긴다. <우생순>에서 혜경(김정은 역)은 유럽식 핸드볼에 맞서는 ‘한국형 핸드볼’이 빠른 스피드를 기반으로 한 팀플레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전략 같지만 실제로는 선수 전부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악착같이 뛰어서 슛 찬스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단순한 전략이다. <킹콩을 들다>나 <국가대표>와 같은 영화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팀이라는 공동체의 환상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자신의 성깔을 죽여 가며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보이지만 집단을 강조하는 집단 승리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물론 서로 보살피고 돌보는 삶이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보살핌과 돌봄이 ‘최고’라는 목표를 위해 무조건 단결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구나 내 자신이 그런 목표를 정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내게 지워준 목표라면 어떨까? 그런 목표도 아름다운 승리를 위해 무조건 견디며 다시 뛰어야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 D. Thoreau)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강승영 옮김, 『월든』, 이레, 2001, 134쪽)


4.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

서로 보살피고 돌보는 삶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팀플레이를 나쁘다 매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방식을 우리의 것으로 맞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균동 감독의 <1724기방난동사건>(2008년작)은 3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실패했지만 흥미로운 영화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뻔하다. 사람 좋고 주먹 좋고 의리 좋은 것 하나로 마포의 명물이 된 천둥(이정재 역)이 우연히 만난 기생 설지(김옥빈 역)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가 하나. 설지가 속한 기방을 운영하며 조선 주먹을 통일하는 꿈을 꾸는 야봉파 두목 만득(김석훈 역)과 우연히 양주파 짝귀(여균동 역)를 맞짱대결에서 이기고 두목이 된 천둥의 대결이 또 다른 줄거리이다. 물론 천둥이 만득을 물리치고 설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조직도 모르고 싸움의 판돈도 한 냥밖에 내지 못하는 천둥이 많은 조직원을 거느리고 권력층까지 등에 업은, 186: 1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만득을 이길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천둥의 힘은 바로 자유로움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난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로움은 만득의 예상을 깨며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리고 <1724기방난동사건>에는 양념처럼 영조(백도빈 역)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는 세자라는 신분에도 천둥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자유롭기에 그들은 자유로이 규칙도 짠다. 싸움의 규칙을 짜기도 하고 치열하게 싸움을 하다 휴식을 하기도 한다.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하고 비겁한 승부에 대해선 부끄러워할 줄도 안다. 자유롭기에 천둥은 만득의 부하들의 공감까지 얻어낼 수 있다. 주먹밖에 없는 건달들의 싸움은 칼을 쥔 자들의 비겁함과는 다르다.

그런데 천둥의 자유로움은 그의 천성 탓일까? 자유로움은 어떤 사람의 타고난 취향일 수 있지만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 천둥의 옆에는 잔소리 해대는 할머니와 주책맞은 국밥집 기생, 마포 나루의 장사치들이 있다. 퉁명스럽고 거칠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씨 따뜻한 곰살맞은 사람들이다. 그런 관계의 가치를 알기에 천둥은 돈에 유혹되지 않고 집에 온 손님을 하늘처럼 모실 줄도 안다.

만득이 보낸 칼잡이에게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천둥이 다시 주먹 쥐며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관계가, 그를 보살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들도 떠나고 곶간 열쇠마저 빼앗겼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천둥은 만득과의 최후대결을 원한다.

이처럼 권력과 자본을 가지지 못한 변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권력과 자본의 은혜를 입거나 그 목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관계를 더욱더 강하게 다지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고 사회적 시장을 형성하면서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튼튼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국가’나 ‘착한 국가’가 과연 가능할까? 정권만 바뀌면 한순간에 국가의 성격이 바뀔까?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통령이나 국회로 상징되는 정치권력이 국가일까?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바뀌면 정말 우리의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정치를 실험실의 공학으로 여기는지 어떤 정책이 실시되기만 하면 다른 모든 조건이 자연스레 바뀔 것이라는 공상을 ‘소위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이 된 프랑크푸르트 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책만 뒤적거려도 서구의 복지국가 내에서 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왜곡되었는지에 관한 많은 얘깃거리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없이 서구의 복지국가가 가능했을까? 복지국가는 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났을까? 그런 점에서 짐 아이프는 복지국가가 사회의 대안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복지국가의 위기는 앞서 간단히 살펴본 네 가지의 정책전략[복지국가 옹호, 뉴라이트, 조합주의, 마르크스주의―인용자] 중 어떤 것을 사용하더라도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성장중심의 사회․경제․정치적 시스템―복지국가는 그 내부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은 한순간도 환경파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사회의 발전된 형태의 복지국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제 사회변동의 구조로서 (생태학적 관점에 기초한)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다른 구조, 다른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한다.”(짐 아이프(Jim Ife), 류해정 역, 『지역사회개발』, 인간과복지, 2005, 43쪽) 아이프는 복지국가의 장점이라 얘기되는 적절한 최저생계 보장, 사회적 불평등 감소, 공평성이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의 기밀성, 사회의 익명성, 관료주의 등이 강화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같은 책, 61쪽).

하지만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런 논의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국가에서 사는 시민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정책과 그 권력구조에만 관심을 둔다. 대중의 능력을 얕잡아 보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자비로운 시각이야말로 나쁜 국가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그냥 자신의 ‘목적 있는 삶과 가치’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리라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왜 그런 자신의 가치와 믿음이 우리의 미래이어야 할까?

<거북이 달리다>나 <국가대표>를 보며 어떤 이는 국가의 도움 없이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르치던 국민교육헌장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국가주의의 망령을 본다. 너무 노골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은밀해서, 그래도 국가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게 하는 그 망령.

그 망령을 떨치는 비법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국가나 시장이 정해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는 법을 익히는 것. 서로의 삶과 생활을 공유할 사람들을 모으고 스스로 대안이고 희망이 되고자 하는 삶.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고 타자와 더불어 그 희망을 키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풀뿌리의 힘이다.


5. 누군들 감동을 마다하랴

나도 사람인지라 영화를 보며 눈물을 지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되찾으며 승리를 따내는 감동의 드라마에 어찌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이 고아원 원장인가요?”라고 물으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식한 운동인 역도를 하겠다는 아이들을 보며 누군들 마음이 짠하지 않겠는가. 동메달 하나 땄지만 부상을 당해 무엇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사는 지봉에게 “선상님이 왜 아무 쓸모도 없데요. 이거 아무나 따데요? 열심히 운동해서 내 꺼 보란 듯이 내가 직접 딸랑께요.”라고 말하는 영자가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 제자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스승의 모습을 우리는 <킹콩을 들다>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4대 강을 살리겠다며 멀쩡한 유기농토를 물에 담그려 하는 삽질의 나라에서 우리의 감동은 지극히 위험하기도 하다.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를 인기종목으로 만들기 위해 집중투자를 하고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따지는 나라 한국에서 그런 감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전 국민이 비인기 종목 피겨스케이팅경기를 마치 야구경기처럼 기다리고 김연아 선수의 경기 후 인형이 비처럼 경기장으로 쏟아지는 광경을 보면, 세계신기록이라는 말에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다분하다. 팍팍 지원해주고 그래도 성과가 없다면 또 다시 나 몰라라 하는 곳이 바로 이곳 한국이 아닌가. 더구나 이제는 감동도 마케팅인 시대가 아닌가.

전 국민이 애청하는 TV 프로그램 <1박2일>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프로그램이 진정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복불복이여 영원하라,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강호동의 모습은 21세기의 한국판 『동물농장』이다. 이 농장에서는 남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으면 국가대표라는 위대한 호칭을 얻을 수 있다. 영화 <국가대표>는 아름다운 패배도 있다면 위로하지만, 그런 위로가 감동적인 것은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건 ‘아름다운’ 스키점프이지 아름다운 ‘패배’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이들에게 “13명 중에 13등을 해도 나는 네가 국가대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감동의 판타지에 갇혀 현실의 불이익을 받아들일 사람, 심지어 그 불이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려 하는 부모는 없다.

복불복 사회에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행복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도 여전히 공허한 느낌이 드는 건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거창한 논리는 필요 없다. 먹고사니즘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먹고사는 것만큼 신성한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처럼 한 그릇의 밥을 온전히 감사하며 먹고사는 행위는 그 속에 신성을 담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감동이 결코 채울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이 일상 속에 담긴 신성이다. 밥을 나누고 서로의 정을 나누는 삶이 없어도 국가대표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19세기 말에 이미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그 답을 슬며시 얘기했다. “인간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은 사랑도 심지어 동정심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대의식―본능의 단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이다. 이는 상호부조를 실천하면서 각 개인이 빌린 힘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각자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과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표트르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김영범 옮김, 『만물은 서로 돕는다』, 르네상스, 2005, 17쪽) 우리의 행복이 서로의 행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목표와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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