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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12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와 시민사회의 자율성(사회적경제리뷰)
posted by 몽똘 2013.03.12 15:57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회적기업지원법, 협동조합기본법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국제협동조합의 해를 맞이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협동조합과 관련된 법령이나 조례를 제정하고 있고, 금융위기와 실업이라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할 해법으로 사회적 경제를 주목하고 있다. 제도화의 속도가 빠르면 더 빨라졌지 늦춰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언제나 제도화는 양날의 검이다. 제도는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기반이지만 반대로 운동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제한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제도는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받는다. 제도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 현실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수정될 때에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제도를 수정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 지금 처한 문제의 어려움과 심각성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불거진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가 반드시 사회적 경제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대공황과 경제위기에 등장했던 체제는 사회적 경제가 아니라 파시즘과 군사정부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성장했음에도 파시즘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시민사회를 강화시킬 방법은 제도화만큼, 또는 제도화보다 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율성과 힘을 강화시키는 실천적인 활동에 관한 부분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만 얘기되는 듯하다. 사회적 경제 규모의 성장이 먼저이고 그 내실을 다져줄 조직화와 관련된 사업은 뒷순위로 밀린다. 수단과 목적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그 둘이 분리되고 수단이 목적을 압도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멀지 않아 다양한 활동들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강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민과 관이 진정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를,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의 역량과 한계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제도화는 양날의 검이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존재한다. 이 글은 성찰을 유도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을 주로 드러낼 것이다.



1. 국가와 자본에 억눌린 시민사회


일제 식민지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일제 식민지는 한국에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식민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수직적인 권력구조가 만들어졌고, 중앙정부가 정책의 기획과 평가 역할을, 지방정부는 단순집행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수직적인 권력구조의 정착과 강화를 위해 강력한 경찰국가체계가 만들어졌고 공권력의 이름을 빈 국가폭력이 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정치와 노동영역만이 아니라 교육과 위생, 보건영역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국가폭력은 시민들의 존엄을 짓밟고 수동성을 내면화시켰다.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수동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중앙정부가 일상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각종 제도들과 폭력적인 개입이 지금도 제주도 강정마을이나 밀양, 삼척 등지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이후 미군정과 한국전쟁, 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현대사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일상사를 지배하게 했다. 영화 <풍산개>에 나오듯 반공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빨갱이’를 만들고 그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배제의 논리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빨갱이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들도 남이냐, 북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논리에 갇히게 되었고 어느 계파에 서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끊임없는 자기검열과 진영논리에 시달리면서 시민사회의 외부적인 자율성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자율성도 점점 사라졌다.

 

중앙집권형 국가가 가져온 또 다른 문제는 대부분의 지방을 ‘내부식민지’ 상태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방은 자치와 자급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재정자립도, 지역내 총생산, 지역문화/교육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지방의 능력치는 매우 낮다. 지금 당장의 역량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앎과 삶이 연결되는 과정이 살아있다면 그 역량을 서서히 회복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지역적인 앎과 지식이 평가절하될 뿐 아니라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정리하자면 중앙집권형 국가와 반공․규율사회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약화되었다. 현실적으로 농협을 비롯한 관제 협동조합이 가장 큰 규모의 협동조합이듯, 사회적 경제 또한 체제 내화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런 허약한 기반 위에 좋은 건물을 세우겠다는 건 허황된 생각이다.

 

국가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를 고려하면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더욱더 허약해진다.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한국경제는 재벌 중심의 발전전략을 강화시켜 왔다. 제 아무리 시장질서를 내세워도 관치경제가 실제 모습이고, 정부가 벌이는 대규모 토건사업에서 재벌들이 이득을 취해왔다. 한국 재벌의 성장기반은 관료와의 결탁과 부패였고, 브루스 커밍스의 말처럼 “한국의 재벌들은 남한에 거대한 가족경영의 세습 기업영지를 세우고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따라서 한국의 개혁가들에게는 이 재벌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 외에, 즉 이런 기업들과 국가, 그리고 거대 은행들 사이의 연계를 끊는 데 집중하는 것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 재벌들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제휴’나 ‘협력’의 명목으로 가로채 왔다. 비도덕적인 행위는 재벌들의 기술 가로채기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소기업들을 후려치는 납품단가 인하이다(재벌들은 매년 최소 20%이상의 단가 인하를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곽정수에 따르면, “회사의 연간 이익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에 맞춰 원가절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단가 인하 목표가 설정된다. 단가 인하는 분기별로 나눠서 시행하는데, 회사의 경영상황에 따라 연간 목표와 별도로 추가적으로 단가 인하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이니 2011년 10대 재벌의 매출액이 무려 국내총생산의 76.5%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독점을 고려하면 ‘기업사회’라는 말이 무색하고 ‘재벌사회’라 불러야 한다. 그리고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은 SSM만이 아니라 골목상권으로도 이미 침투하고 있다. 곽정수에 따르면, “CJ, 롯데, GS, 두산, 삼양사, 오리온, 매일유업, 농심, 남양유업, 빙그레, LG패션 등이 참여한 외식업은 일부 재벌이 먼저 진출한 분야에 다른 재벌들이 추가로 뛰어든 경우다. 여기다 와인 판매(LG, SK, 롯데, 신세계, 보광, 두산, 동원), 온라인 교육(SK, 삼성, KT, 이랜드), 차량 정비(SK), 사진관(SK), 소금 생산(CJ), 농산물 생산유통가공(현대차), 막걸리(CJ, 롯데, 진로, 오리온), 골판지(롯데, 농심, 한화, 삼양식품, 오리온, 애경), 웨딩사업(SK), 먹는 샘물(LG, 하이트), 장례업(삼성), 콜택시 사업(동부), 학원 사업(대상) 등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사례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대형할인점,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불거진 골목 상권 침해논란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사회적 경제의 영역과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영역이 현실적으로 겹친다.

 

국가와 자본, 시민사회라는 세 축을 고려할 때,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은 국가와 자본에 압도당해 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체적인 힘이 약하다보니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은 주로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데 활동의 초점을 맞춰왔다. 자연히 전문가 중심, 사무국 중심의 활동이 강화되었고, 엘리트 중심의 운동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앙집권형 국가 속에서 운동하니 운동조직들도 피라미드형의 위계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호명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식민지와 군사독재, 재벌에 억눌려온 시민문화가 시민사회운동을 통해 부활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힘이 강하다보니 노동과 농업의 의제들은 그동안 정치의 주요한 의제가 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 법적으로 자유로워진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도 실제로는 그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농민운동 역시 농촌의 파괴, 농민수의 감소, 농업의 쇠락과 더불어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기존의 노동․농민운동과 분리된 채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를 연계한 조직적인 역량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운동사회 내에 깊이 뿌리내린 정파간 갈등구조(거의 선악의 구조와 가까운)는 연대를 명목적인 연대로 만들어왔다. 통합진보당 사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곳곳에 그와 유사한 갈등들이 존재하고, 가부장적인 운동문화 또한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즉 시민사회운동의 자체적인 역량이나 의지도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율성을 논할 수 있을까?



2. 정책의 공동생산 또는 거버넌스 구조는 존재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제도화의 방식으로 거버넌스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거버넌스는 논의 이상의 실천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관이 주도하고 민간이 이를 보완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왜곡되고 있다. 사실상 한국사회에서 거버넌스가 자리잡기 어려운 몇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로, 관료주의의 문제이다. 중앙집권형 국가의 관료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권한을 누린다. 그리고 선발되는 관료들은 선거 등을 통해 선출되는 관료들과 때론 협력관계를 때론 긴장, 갈등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기도 한다. 관료들의 능력은 민주화의 효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업의 기획과 집행, 평가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규모 공공수요가 발생하자 관료들은 예산, 인력, 지침들을 일방적으로 확정하는 것을 관행으로 만들었다. 중앙의 부처들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입안하고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하거나 반대측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거나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까지 생겼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직접 사업대상을 선정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의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의 기획을 따를 수밖에 없고 공모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1991년 지방의회의 부활을 시작으로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된 지 20년이 넘었건만 중앙이 계획, 평가하고 지방이 집행하는 구조는 여전하다.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들이 ‘공공성’을 내세워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보통 정책집행단계보다 정책입안단계에서 이런 경쟁이 치열한데, 갈등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부처에 유리한 쪽으로, 즉 예산이나 인력규모, 기관의 법적․공식적 권한, 대통령의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부처(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검찰청, 중앙인사위원회,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교육인적자원부, 법무부 등)에게 더 유리하다. 조직의 이해관계가 강조되다보니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거버넌스도 부처간의 이해관계에 무력해지기 쉽다.

 

물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 이런 관료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개방형 공무원제도 등)가 있었지만 내부의 저항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관료들의 저항만이 아니라 개혁의 방향이 힘의 불균형이나 실제 조건을 무시하고 원론을 내세우는 경향도 있었다. 또한 한국의 관료조직은 지연과 학벌을 통해 단단한 연고를 다지고, 이런 연고들은 주무장관이나 단체장과 같은 임명되거나 선출된 관료들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관료주의 구조에서는 거버넌스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제도화의 과정은 정부의 의지만을 반영하기 쉽다.

 

둘째는 지금도 깊이 뿌리내려 있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문화이다. 시민은 정치의 ‘대상’이었지 정치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관은 계획을 구상하고 민은 그것을 따르는 철저한 역할분담만이 이루어졌다. 한국처럼 관존민비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곳에서는 정부가 주민이나 시민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러다보니 주민이나 시민은 정부의 의도를 믿지 않고 적극적으로 결정과정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는 당위적으로 참여를 강조할 게 아니라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들(예를 들어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자료집을 나눠주거나 자주 찾아가서 만나고 얘기할 기회를 가지는 등)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문화의 물질성은 공유자산에 대한 관의 ‘독점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이름을 바꾼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주민들이 그 공간을 쓰려면 공무원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점유하고 있는 공유자산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경제의 실현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들이 사회의 몫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정부의 손에 묶여 있거나 남용되고 있다.

 

셋째, 거버넌스에 필요한 정보와 자원의 불균형이다.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사안과 관련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협력하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신뢰하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토론해야 하고, 그리고 충분한 토론이 가능하려면 토론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가 많아야 한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혹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제공한 채 같이 논의해서 결정하자는 건 거버넌스를 형식적인 틀로 만드는 원인이다.

 

아울러 그런 정보를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도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적인 과정의 의미는 정보를 꼼꼼히 검토하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과 공간이 보장될 때에만 거버넌스가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질적인 부분을 꼼꼼히 챙기는 사례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행정이 편한 시간과 장소에서 제한된 정보와 짧은 시간 내에 아무런 권한도 없이 거버넌스를 내세운 협력이 이루어진다.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시간동안 업체수만 늘리려는 방식은 사회적 경제의 뿌리내리기에 독이 될 수밖에 없다.

 

넷째, 거버넌스의 실현방식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특정 주민들만을, 소위 ‘지역토호’라 불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 왔다. 뉴라이트의 권력기반이 강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세력들이 시민사회, 제3섹터라는 영역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버넌스는 이해당사자와 더불어 전문가들의 참여를 당연시하고 이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하곤 한다. 이명박 정부 이전의 정부들에서도 거버넌스는 주로 시민단체나 지식인들만을 파트너로 삼았다. 정부는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런 위원회에는 시민들보다 단체나 지식인들이 주로 참여했다. 더구나 이런 위원회들이 시민과 정부 사이를 매개했다기보다는 단체나 지식인들이 구상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현실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역할을 잡지 못했음을 뜻한다. 운동이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발맞춰 성격을 바꾸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거버넌스의 덫’에 걸려들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일정한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지역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경제를 실현함에 있어 전문가는 누구인가? 주민들은 지역에 관해 추상적이고 보편적 지식보다 구체적이고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적어도 지역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전문가의 전문적인 지식만큼, 또는 그보다 더 소중하다. 더구나 현재 그 지역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라 주민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나 요리사라 하더라도 좋은 집이나 음식을 만들려면 그 집에 살거나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욕구를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섯째, 거버넌스 이면에 깔린 민영화나 시장논리의 문제점이다. 설령 국가가 권한을 나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사회의 참여와 협력의 강화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중 구조가 아니라 국가, 시장, 시민사회라는 삼각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분권이나 역할변화는 시민사회의 강화가 아니라 시장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의 ‘탈규제’와 ‘민영화’, ‘위탁관리’만이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준다.

 

여섯째, 거버넌스가 논의되는 시점이다. 보통 거버넌스는 사안을 계획하는 단계에서가 아니라 그 사안을 진행하는 단계에서 갈등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제안되었고, 그렇기에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는 거버넌스를 주장하면서도 일반 주민이나 평범한 시민들을 중요한 논의대상이나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고 거버넌스를 논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라는 정책과제가 민주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현되려면 관과 민의 공동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구조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이런 초기의 제도화가 사회적 경제의 앞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논리이다.

 

지금 당장 제도화의 방향에 개입하지 못하더라도 내적인 힘을 기르고 있다면 이후에라도 시민사회운동이 제도의 틀을 바꾸는데 참여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



3. 운동과 사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자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나눔장터 등 사회적 경제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관련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첫째, 정부의 사업관행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은 없고,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관두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봄 직하다. 정부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사회적 경제 진영의 역할일까?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사회적 경제’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특히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을 사회적 경제 진영이 가지고 있지 않고,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한다. 따라서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맺고 확장하며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사회적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

 

그리고 정부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와 사회적 경제의 공고화나 확산에 도움이 될 것인가?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기획하거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업을, 소위 ‘뜨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가 사업만을 위한다면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보조금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관료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적 경제를 실행한다는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고 있다.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 곧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과정인데, 외부자원을 동원하려 애쓰다보니 불편하고 어려운 과정을 밟더라도 지속성이 담보되는 내부의 자원을 모으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공무원들은 바보가 아니고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온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된다. 더구나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사회의 밑바닥을 다지고 관계를 확장시키는 사회적 목적보다 앞서 나가게 된다. ‘왜 우리가 운동을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사회적 경제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면에서 생기는 고민인데, 요즘은 어딜 가나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왜 그럴까? 앞으로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만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그나마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기르지 않으면서 어떤 지속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까? 사람 없이는 제도가 지속될 수 없다.



4. 결론


이상의 비관적인 전망을 마치고 제도화 과정에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일단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역량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어느 부분의 힘을 더 강화시킬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특히 앞서 말한 여러 문제점들에 대처할 방법을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와 제도를 변화시킬 힘은 시민들이 자신의 권한을 되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운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분권국가, 연방국가로 해체할 방법을 여타의 시민사회운동, 정치운동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재벌과 국가, 수도권으로 집중된 권력구조를 해체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제의 전망을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리고 협동의 문화를 구성해야 한다. 거버넌스를 제도적인 협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계약의 실행을 요구하고 강요할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단체, 운동들이 함께 도모하는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접촉도 잦아져야 한다. 관료주의를 넘어설 방법은 똑같은 관료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관료주의의 특성상 일단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용역보고서로 시작되는 정책의 입안과정에 관심을 두며 참여해야 하고 겉으로 드러난 단기적인 사업만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사업에도 관심을 가지며 개입해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강화될 수 있도록 지식인들의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지식인의 자율성 자체가 정부나 자본의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을 비롯한 연구지원에 따라 연구방향이 주로 제도로만 맞춰지고 실질적인 삶이나 방향성과 관련된 부분들은 약화되고 있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이런 문제점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즉 지식인 사회가 사회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제도권력과 결탁하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각종 연구용역들이 그런 거래의 매개가 된다). 이런 폐해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강화되고 다양한 지적 활동이 시민사회의 생활을 매개로 벌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경제운동의 다양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 참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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