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가 어느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자금을 폭로하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섰을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관심이 뜨겁다. 광고나 서평 하나 제대로 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판매고가 10만부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삼성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삼성특검이 어이 없이 끝나고 이건희 회장이 사면을 받고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으로 돌아다닐 때까지 10만의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용철 변호사가 배신자, 매국노로 욕을 먹고 그의 양심선언을 도왔던 신부님들이 한직으로 물러날 때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태안주민대책위의 성정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삼성반도체의 박지연씨가 23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지 금서(禁書)에 대한 유혹일까? 어떤 이유로 문제의 책이 잘 팔리는 걸까? 사람들은 삼성의 실체를 잘 몰라서, 그래서 그 실체를 공부하려고 책을 사보는 걸까?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읽는 걸까?



공화국을 꿈꾸는 왕국의 국민들


아직도 한국을 공화국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공화국이라 부르기에 이 나라는 너무나 불공평하다. 가진 놈들이 더 무섭다고 이 나라의 부자들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삼성그룹만 해도 CJ그룹, 새한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까지 따지면 대상그룹, LG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한 가족이다. 이런 가족관계는 삼성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게도 일상이다. 가족관계로 서로에게 보험을 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일이 생기면 즉각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정부가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상식이 될만큼 둘의 관계는 끈끈하다. 시민들의 관계가 평등해야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이런 부조리에 분노해야 할 터인데, 우리 사회의 풍경은 아주 차분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삼성의 성공을 시기해서 일부러 흠집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부패를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부패를 인정하더라도 그런 부패가 삼성만의 일도 아니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우려면 그 정도의 부패는 어쩔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는 ‘준비된 선수들’도 있다. 삼성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삼성을 비호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자문교수라는 은밀한 관계를 통해, 때로는 사외이사라는 공식직함을 통해, 때로는 기업의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의 돈을 받는 지식인들이 적잖이 많다(경향신문 취재팀이 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보면 그 점이 잘 묘사된다).

예를 들어, 서울대 사회학과의 송호근 교수는 어떨까? 그는 삼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한국인의 평등지향적 심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문화,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망이 “삼성전자를 세계 50대 기업에 진입하게 만든 경영 기법과 노력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하고, 다른 재벌들은 놔두면서 유독 삼성만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한다(송교수에게 이 책을 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냈는가라고 물으면 그것도 평등지향적 심성 탓일까?)(송호근,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심지어 삼성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나서서 삼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기도 한다. 삼성이 최고의 기업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 그래서 너무나 위험한 사람들이 삼성에 대한 공격을 막는데 앞장선다. 심지어 삼성에게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우리 기업’이라며 슬쩍 돌아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그 끈적끈적한 논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 방어하더라도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은 부패이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시민들의 덕성이 공동체에 생명력을 계속 공급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한 법과 규칙을 따르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공화국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부패는 시민들의 덕성을 타락시키고 법과 규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법을 피하는 방법이 ‘능력’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공화국은 부패한 왕정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공화국 시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왕국의 신민들은 자기 환상을 깨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위험한 경험주의


어떤 사안을 비판하다보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는 반박을 듣곤 한다. 어찌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면 어쩌란 얘기인가?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런 얘기는 심각한 폭력이기도 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미 현실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금 현실이 다른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사상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경험주의(ideological empiricism)라고 불렀다. 지금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런 경험주의는 새로운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상으로 만든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믿는 인간을 ‘일차원의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 부르며 이런 인간형을 벗어날 힘을 예술에서 찾았다. 긍정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부정의 언어,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는 시의 언어가 그 힘이다(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었고, 시의 언어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문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주는데 열중하고 때로는 가족이라는 낭만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래 이게 현실인데 어쩔 거냐’ 아니면 ‘엄마, 아빠, 가족찾기’이다. 현실을 뛰어넘어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통계자료와 조작된 언어들을 사용하는 세련된 글만이 경험주의의 승인을 받는다. 하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계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통계와 사회과학의 언어들이 표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접할수록 우리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불신하고 냉소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옛말이고 머리와 가슴 모두가 싸늘하게 식은지 오래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4월일이 되어서야 내부 게시판에 반박글을 올리고 그룹블로그(
www.samsungblogs.com)를 새로 만들어 공식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듯이 근거없음의 연속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충분한 입증자료가 있다”, “국가기관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다”라는 예상된 답변들이 나온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숫한 거짓말들이 뒤흔드니 누가 감히 도전하겠는가?


이계삼은 사상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현실주의를 질타한다. “오늘날 이 어이없는 현실이 현실로서 승인되는 것은 아마도 쇼조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인간성에서 본성(nature)의 영역,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천부의 감각이나, ‘상식’이라는 이성적 현실감각, 혹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감각,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분노’와 같은 자연스러운 야생의 정서가 거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거세한 이른바 ‘현실주의’의 압도적인 질주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모든 파행의 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계삼, '우리들의 현실주의, <녹색평론> 2010년 3/4월호)


삼성을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머리로 제아무리 삼성을 생각하고 삼성가의 비리를 추적해도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활이 삼성에 젖어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중요하다. 고작 불매운동으로 그 거대한 삼성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미 이 현실에 포섭되어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들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무모한 일로 보였는지.



삶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사상가 톨스토이(L. Tolstoy)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서 현재의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너는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네 생활을 폭력이 아닌 사랑 위에 세워야 한다."(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위대한 인생>)


그런 점에서 삼성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삼성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불매운동을 한다고 삼성딱지가 붙은 상품을 모두 버리고 다른 재벌가의 신상품을 살 필요는 없다. 새로운 상품을 사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도 불매운동의 한 방법이다.


현명한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삼성그룹의 비자금과 이건희 일가의 수입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삼성전자제품이나 삼성의 의류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실적을 보면 레저부문이 약화되고 급식 및 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사업부의 실적이 10.9%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푸드’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일이 몇몇 사람이나 몇몇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으로 노력할 때 재벌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GMO FreeZone만이 아니라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매를 넘어 자급(subsistence)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불매와 자급의 틈을 메우는 힘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소비자생협들이 대기업의 유통망을 벗어난 삶을 가능케 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삶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벌 없이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협동의 힘을 실현할 때 다른 삶은 현실이 된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꿈을 꾸자.

이건희 복귀 소식을 듣고 프레시안에 쓴 글입니다.
불매운동을 벌일 다양한 아이디어가 모아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삼성제품 리콜경연대회, 홈플러스 불매운동, [삼성을 생각한다] 독자 퍼포먼스 등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건희를 주저앉히는 즐거운 상상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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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경영 복귀, 반성은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복귀했다. 2008년 4월 22일 퇴진을 선언한 지 23개월 만에 다시 경영진으로 복귀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영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이 회장의 퇴진과 더불어 해체되었던 전략기획실이 부활한다는 것도 뜻한다. 삼성 사장단협의회가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건의했다고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사장단협의회란 핫바지요 얼굴마담일 뿐이니, 그건 영화 <왝더독>의 제목처럼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는 얘기다.

23개월이나 쉬었으니 그동안 충분히 반성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공식트위터에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23개월 동안 반성한 사람의 기운보다는 와신상담의 기운이 느껴진다. 비록 지금은 내가 저런 것들에게 밀려서 경영에서 손을 떼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귀하고 말리라. 그런 기운을 느낀 건 나뿐일까?

'징역 3년형' 받은 범죄자가 당당한 세상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동안 방송들이 토요타의 위기와 동계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를 열심히 떠든 건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토요타, 고마운 김연아, 고마운 금메달의 얼굴들이다. 아마도 이런 수순을 염두에 두고 방송사들은 그토록 열심히 토요타와 동계올림픽을 외쳤을 것이다. 이제 경영복귀 선물로 청년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만 좀 나눠주면 모두가 '올레'라고 외칠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복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 사회의 오래되고 서글픈 코미디를 다시금 재현한다. 말도 안 되는 재판으로 떼어낼 수 있는 죄를 다 떼어내고도 '징역 3년형'을 받은 범죄자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사면되고 이제는 다시 경영일선으로 돌아온다. 그나마 다른 범죄라면 또 모르겠다. 경영 과정에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세금을 몰래 빼돌린 죄를 지은 사람이 경제 위기와 경영 리더십을 핑계 삼아 복귀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정치 민주화에 정신 팔린 사이, 곳간이 털리고 있었다

▲ <나쁜기업>(한스 바이스·클라우스 베르너 지음, 손주희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프레시안
그런 점에서 김상봉 선생의 글은 매우 반가웠다.(☞관련 기사: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초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을 유도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나 한스 바이스의 <나쁜 기업: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를 보면 그들이 나쁘고 끔찍한 일들을 벌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 곳간 털리는 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김상봉 선생은 그들의 만행을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서 소신 있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대학 교수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불매 운동의 한계 : '자본주의 너머'도 보자

그렇지만 불매 운동을 벌이자는 얘기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 운동이 가진 힘은 크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자본도 소비자들의 힘이 모이면 자본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지라도 그것을 통제할 힘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는 작업이 불매 운동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것과 불매 운동은 다른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매 운동은 그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거나 다른 회사의 제품을 대신 구매하는 자본주의 속의 운동이고, 삼성을 해체하고 경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일은 자본주의 너머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정의로운 국가, 양립가능한가?

▲ <쇼크 독트린>(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살림Biz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점이 뒤섞이니 토지정의시민연대 이태경 사무처장처럼 불매 운동을 '구좌파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생긴다.(☞관련 기사: "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낡고 순진한 상상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강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찾는 건 논리적인 모순이고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역사적인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이건희 가신들이 불법 일삼을 때, 삼성 직원들은 무엇 했나?

그리고 삼성그룹을 이건희 일가나 그들의 가신 그룹과 구분할 수 있을까? 이건희 일가와 가신 그룹이 각종 탈법과 불법을 일삼을 때,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삼성이 그런 길을 걸을 때, 삼성그룹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주 사악한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착한 다수의 사람들이라는 구도가 그대로 삼성에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는 이건희 일가가 있겠지만 그 중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일가를 위해'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 그런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23개월의 공백 동안 삼성그룹 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정상적이라면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이 부패한 경영자의 복귀를 반대해야 옳은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은 '씨알'이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참된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강조했다.

"씨알아, 네가 스스로 눈을 감지 않는데 네 눈을 가릴 자가 누구란 말이냐? 네가 스스로 입을 다물지 않는데 누가 네 입을 틀어막는단 말이냐? 네가 참을 참대로 보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밖에 또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는 듯해 너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느냐? 그러나 속고 나면 속았구나 하는 것이 민중이요, 속았구나 하면 분하다 분하다 못해 내가 잘못이지 하는 것이 민중이다. 그러나 스스로 속였구나 할 때 속움직임이 있다. 거기서 새 역사의 걸음이 시작된다."

"지금이 삼성 불매 운동의 적기다"

불매 운동은 바로 이런 새 역사를 쓰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불매 운동은 다른 운동들처럼 운동의 목표를 분명하게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 삼성그룹 해체라는 목표는 사실 허깨비처럼 잘 잡히지 않는 목표이다.

오히려 삼성에 대한 불매 운동은 그룹의 해체보다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니 지금이 딱 좋은 시점이다. 이건희 회장과 그의 가신들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불매 운동을 벌여야 한다. 삼성의 해체 또는 삼성의 전환은 또 다른 과제이다.

불매 운동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경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삼성에 대한 불매가 그와 비슷한 처지인 다른 재벌가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운동이 거둔 성과는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재벌가들이 저질러온 범죄들을 보면 하나같이 경영자가 하지 말아야 할 범죄들이기 때문에 삼성만 해체한다고 한국경제가 바뀌지는 않는다.

"삼성이 견제받고, 다른 재벌도 눈치 좀 보게 하자"

한국 경제를 바꾸는 것은 구좌파적 상상력이 아니라 진정한 좌파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아니, 좌우를 넘어선 상상력을 요구한다. 인간이나 생명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하는 경제는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구조로 실현될 수 없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사회적 경제나 기본소득들을 우리 사회와 접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찾을 때에만 대안적인 경제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김상봉 선생의 말처럼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에 길게 보며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과제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은 삼성 제품을 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삼성 제품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얘기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런 논의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삼성이 견제를 받고 다른 재벌들도 덩달아 눈치를 좀 보게 해야 한다. 자신들의 실패를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단합하고 독점하며 소비자를 착취하는 재벌들을 우리 손으로 통제해야 한다.

삼성맨 아닌 삼성맨들오만한 삼성, 우리가 키웠다

그동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이토록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키운 것이다.

삼성은 그 사람을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삼성을 생각하고 챙기는 이상한 오지랖들(알바인지 모르지만)이 제법 많다. 삼성에게 10원짜리 한 장 받아본 적 없을 것 같고 앞으로도 받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마치 삼성맨처럼 얘기하며 삼성을 옹호한다.

그만큼 우리 삶이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이야기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우니 무작정 강자가 잘 되어서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오히려 지금 있는 곳에서 내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복고풍이 유행인 세상이지만 과거가 우리의 답이 될 수는 없다. 엉뚱한 사건들이 맞물리며 하나씩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복귀 역시 복고풍의 흐름을 타고 있다. 우리 뒷 세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삼성그룹의 노동자들이 진정 노동자로 살고 싶다면, 한국의 시민이 시민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바로 불매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김상봉 선생이 쓴 칼럼을 경향신문이 실지 않아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217155315&section=02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에 대한 서평 형식의 글이었다.
김상봉 선생은 경향신문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그 글이 인터넷 신문에 공개되고 맥락이 드러나면서 경향신문은 책임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경향신문의 사정을 고민해줄 필요는 없지만 경향신문에는 좋은 기자들이 있다.
아마도 김상봉 선생이 경향신문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한다.
삼성과 광고를 의논하고 칼럼을 막은 건 경영진이나 편집데스크의 생각이지 일선 기자들의 생각은 아닐 터이니...
왜냐하면 경향신문의 기자들이 재작년에 기획취재한 '지식인의 죽음'이 바로 그 사실을 드러낸 보도였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는 이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측할 수 없으나 현재 재정상황이 아주 좋지않은 경향신문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사인]이 [시사저널]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었던 길을 되밟는 건 현재의 상황으로 거의 불가능한 듯하고...
김상봉 선생의 지적처럼 삼성이 한국사회의 암적 존재로 굳어져 버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예기치않은 사건은 누구에게 더 상처를 줄지...

김용철 변호사의 비리폭로나 태안사건, 이건희 회장의 사면 등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김상봉 선생의 지적처럼 한국사회가 유독 삼성에 약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삼성을 피해 생활하는 게 쉽지 않다.
삼성재벌이 만드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들이 우리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그리고 삼성가족의 계열회사까지 포함하면 자본의 망은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망에서 벗어나지 않고 삼성을 비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어느 정도 비합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삼성과 관련된 것들은 피하고 있다.
삼성 래미안이 싫고, 삼성이 만든 제품이 싫고, 삼성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싫다(문자보내기가 쉬워 5년 전에 구입한 애니콜 휴대폰을 제외하면 거의 다 없앤 듯하다).
왜 싫냐고 물으면 내가 얘기하는 몇 가지 근거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이고 정경유착의 비리가 많은 기업, 기타 등등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삼성만 아니면 다 괜찮단 말이냐, 다 똑같은 독점재벌인데"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거기에 딜레마가 있는 듯하다.
삼성이 아니면, 국내의 독점재벌이 아니면, 초국적기업이 아니면, 도대체 우리는 무얼 먹고 쓰며 살 수 있는가?
나는 여성민우회생협 조합원이기에 먹을거리는 기존 유통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 외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결국 독점자본이나 초국적자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급, 자치의 구조를 갖춰야 그런 비판이 완성될 수 있고 그 전까지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고 불안하다.
언론 역시 그런 구조를 얼마나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김상봉 선생의 글이 경향신문보다 그 글이 정면으로 겨냥한 삼성에 초점을 두고 논의되어졌으면 좋겠다.
어느새 자기검열의 수준까지 도달해버린 우리 사회의 자화상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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