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1.07.06 22:41

 

I. 들어가며


스콧의 『The Art of Not-being Governed』는 정치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국사(國史)를 배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의 역사는 허구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속된 국사’는 불가능하다. 더불어 국사책의 지도도 허구이다. 단일한 국가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판단도 가능하다. 홉스나 로크를 읽을 때 든 의문과 비슷하다. 누가 국가를 만드는데 동의했던가? 암묵적인 동의(tacit consent)가 실제 역사적인 개념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단일한 국가주권은 가능한가? 단일민족-단일국가가 근대가 만든 환상이라는 점은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인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 인정하지 않는가? 스콧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응용한다면, 국가를 구성한다는 영토, 국민, 주권 모두가 근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 국가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II. 2장 국가공간: 통치와 징발의 공간


스콧이 보기에 모든 공간이 국가공간일 수는 없다. 국가가 등장하려면 왕가가 주민과 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로 집중시켜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 국가공간의 등장에 단초를 제공한 것이 인도네시아벼(padi)이다. 벼는 적은 인구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했고, 이로써 국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최대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벼의 생산주기는 일정해서 국가는 수확량을 예측해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즉 벼는 국가의 가독성(legibility)을 높이고 징발될 수 있으며 수송하거나 저장하기에도 쉬웠다. 따라서 벼보다 더 이상적인 국가작물(ideal state crop)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사회에서 국가형성을 막은 기본적인 장벽은 바로 거리였다. 식료품을 수송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육지보다는 해상수송이 더 수월했다. 육지의 국가는 보통 120km를 넘지 못했지만 해상수송은 거리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육지와 해상을 똑같이 1km로 표시한 근대의 표준지도는 매우 잘못되었다. 육지와 해상은 매우 다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를 가진다. 육지 내부도 마찬가지이다. 평지와 산, 늪, 습지, 숲은 구분되어야 하고, 국가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역(state space)과 국가통제에 내심 저항하는 지역(nonstate space)이 구분되어야 한다. 근대의 표준지도는 지방의 관행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륙국가보다 해상국가가 곡식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성(stateness)’을 갖춘다. 좁은 해협과 같은 전략적인 위치의 해상국가는 핵심적인 무역상품에 대한 통제, 즉 세금, 통행세, 압수 등을 통해 자원을 확보했다. 허나 이런 이점이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육지의 농업국가보다 훨씬 적의 수의 주민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농업국가는 수의 힘으로 해상국가를 제압할 수 있었다(마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시라쿠사가 해상국가인 아테네를 제압했듯이).


그런 점에서 벼 재배는 국가형성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벼 재배는 주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하는 강가에서 잘 되었다. 벼를 재배하는 심장지대가 크고 이어진 곳에서 강대국이 등장했다. 반면 고지대의 농업지대에서는 소국가(statelets)가 등장했고, 이들의 연맹이나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벼를 재배하는 핵심지대가 존재하는 대규모 국가에서도 왕가의 통제권이 전체를 관장하지는 못했다. 습지나, 늪, 고지대는 왕실과 가까워도 정치적인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고 조공을 바쳐도 그건 예속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공간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주거양식, 친족구조, 인종적인 자기동일성, 자급관행, 종교를 가졌다. 즉 이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이중 주권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21세기 국민국가의 표준인 야심 없고 단일한 주권은 소수의 곡창지대의 핵심부 외에 드물었다. Beyond such zones, sovereignty was ambiguous, plural, shifting, and often void altogether. Cultural, linguistic, and ethnic affiliations were, likewise, ambiguous, plural, and shifting(61).



III. 3장 인력과 곡물의 집중: 노예와 물을 대는 논


인적자원을 중앙집중화시키는 것은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 정치권력의 핵심요소였다. 이것이 치국(治國)의 첫 번째 원리이고 이 지역에서 식민지 이전 왕국의 모든 역사에서 mantra였다. 그리고 그런 국가공간을 만드는 것은 평평한 땅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한 땅, 통행할 수 있는 수로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간이 있는 곳에서 가장 쉬웠다.


허나 이런 공간들이 국가형성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물을 대는 논은 주민과 식료품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에 가장 편리하고 대표적인 방식들을 가리키는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쌀을 재배할 핵심지대가 없을 경우, 중앙집중화는 다른 수단들로, 예를 들어 노예화나 무역로에 대한 통행세, 약탈 등으로 이루어졌다.


비교적 땅이 풍부했던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은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확보할 수 있고 가족에게 유리한 이동경작을 선호했다. 그래서 인구는 분산되었다. 반면에 물을 대는 논은 인구를 밀집시켰고 상당한 양의 잉여를 보장하는 강력한 심장지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논이 있는 땅으로 이주했을 것 같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얘기이고 전쟁, 전염병, 수확량의 변동, 기근, 미친 군조, 내전 등은 주민들을 동요시켰다. 국가가 없었던 사람들의 평화롭고 점진적인 군집이라는 왕가의 기록은 허구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주장은 전쟁과 노예제, 억압이 국가를 만들고 유지함에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The accumulation of population by war and slave-raiding is often seen as the origin of the social hierarchy and centralization typical of the earliest states(67). 많은 왕가의 칙령들은 주민들을 강제로 정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래서 보통 땅보다 인간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래서 전쟁은 피비린내나지 않았다. 이런 논리는 원거리 무역보다 핵심적인 농업생산에 더 많이 의존했던 내륙의 농업국가에서 가장 강력했다. 땅보다 인간이 중요했고, 이는 단지 곡식의 수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전투에서의 승리도 생존한 포로들의 수로 판정되었다(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데올로기나 인종이 아니라 공물을 놓고 싸웠고 에게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은 노예였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 내륙지방의 지배자들은 GDP보다 ‘국가가 접근할 수 있는 생산(state-accessible product, SAP)’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The state-accessible product had to be easy to identify, monitor, and enumerate (in short, assessable), as well as being close enough geographically(73). 경작자에게는 이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국가에는 많은 보상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벼-국가(paddy-state)’였다. The superior productivity of wet rice per unit of land permits enormous population densities, and the relative permanence and reliability of padi rice, so long as the irrigation system is functioning well, helps ensure that the population itself will remain in place(74).


주요한 단일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독성과 징발을 위해 필요했다. 단일작물은 동일한 생산리듬을 가지고 토지가치도 하나의 기준에 따라 정해질 수 있으며, 이런 농업환경은 가족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보기』에서처럼 스콧은 가독성을 강요하는 정책이 국가형성의 지름길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혼합파종을 권하며 새로운 땅을 주기적으로 개간하는 이동농업과 화전농업은 국가형성의 적이었고(스콧은 화전농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주장도 근대시기에 만들어진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국가공간 외부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시키려 노력했다.


허나 이런 국가의 성격이 문화적 동질성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크리올 중심(The Creole Center)을 형성했다. 즉 these padi states were ethnically plural, economically open, and culturally assimilationist(82). 특히 다른 지역의 관리와 작가, 왕족을 포로로 잡은 경우 새로운 혼종 왕실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인적 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쉬운 동화와 빠른 이동을 선호했고 매우 유동적이고 침투할 수 있는 인종적 경계를 만들었다. 남부 버마의 두 개 언어를 쓰는 지역에서 인종적 정체성은 혈통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 주거형태, 인종적 정체성도 변화했다. 어느 곳에서나 인적 자원이라는 절대명령은 차별과 배제를 거부했다. 왕국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주민들을 끌어들일 때 그 왕국은 부득이하게 점점 더 세계주의적이 되었다. 흡수된 사람들의 다양성이 커질수록 본국의 문화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고, 사실상 그런 문화적 혼종성이 성공의 조건이었다.


그래도 국가공간의 주요한 주민들은 노예로 확보되었고, 모든 국가들, 특히 해양 국가는 노예에 기반한 국가이다. 노예는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cash crop)’이었다고 말해도 옳다.


그래서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 외에 다른 많은 방식들이 정치체제에서 등장했다. 부채노예(debt bondage)가 일반적이었고, 아이들은 팔렸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문화적으로 다른 구릉지대(hill) 주민들이었고 전리품으로 노예사냥이 인정되었다(그래서 구릉지대의 사람들은 유괴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노예무역의 규모와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지(valley)의 주민들은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의 재정착과 더불어 상업적인 노예사냥을 통해 늘어났다. 버마와 타이 모두 ‘노예국가(slaving states)’로 불러도 옳다. 노예사냥은 관리와 군인들의 전략적인 투자, 연합무역사업(joint trading venture)에 가까웠고, 약탈자들은 포로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곡물과 주거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포로들은 대부분 왕가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이자 신분의 기호로 인정되었다.

허나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벼-국가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기획이었다. 첫째, 재정적 가독성 때문이다. 주민등록과 비옥한 땅의 측량지도가 가독성의 핵심적인 행정도구인데, 이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왕실은 인적 자원과 곡식을 놓고 관리와 귀족, 성직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내부와 경쟁하지 않고 외부에서 사냥할 경우 소규모 노예사냥은 위험이 적은 반면 확보할 인력의 비율이 낮았고 대규모 전쟁은 수천명의 포로를 확보할 수 있지만 질 경우 왕가의 파멸을 불러왔다.


둘째, 자멸로서 국가공간(state space as self-liquidating)의 성격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많은 주민들을 포획해서 집중시킬수록, 주민들은 멀리 달아나려 한다. The heartland or core region of the padi state is the most legible and accessible concentration of grain and manpower.…the greater the pressure exerted on it, the more likely it would simply flee out of range or, in some cases, rebel(95).



IV. 나오며


스콧의 설명을 한국역사에 적용하면 몇 가지 흥미로운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민심이 곧 천심이다라는 유교적인 명제 역시 인적 자원을 통제하려는 왕가의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민심, 즉 노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부랑자를 단속하고 강제로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농을 확대시킨 것 역시 한국의 국가형성에 특징적인 지점이 될 수 있다. 농업의 확산과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관점은 뻔한 관점과 결론을 반복하는 한국정치를 흥미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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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0.06.22 13:02

 

정치적인 면에서 직접행동은 민중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방법이자 목표이다. 직접행동은 자신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공동체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직접행동은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의 건설이 나의 참여 없이 불가능하고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져도 새로운 부조리에 맞설 가능성으로 직접행동의 자리가 계속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목표이다.


직접행동은 근대사회가 분리시킨 주권과 민중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연결시킨다. 근대국가는 주권을 앞세워 민중을 국민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의지를 선거로 가둬버렸지만, 민중은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되찾고 주권자로 거듭날 수 있다.



직접행동과 주권


유럽의 정치이론들이 주권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지만 그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식민지가 아닌 서구 중심국가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예가 된 자와 노예일 수밖에 없는 자가 똑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즉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만든 ‘식민성’이라는 마음의 특성(心性)을 논하지 않고 권리나 제도, 운동의 차원으로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식민지 민중의 일상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이론을 위한 이론을 추구하는 추상적인 논의들은 그 자체로 타당하고 적절할 수 있지만 적어도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의 변화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도움을 줄만한 이론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세련된 이론이 아니라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발전된 이론들이다(파농F. Fanon이나 프레이리P. Freire, 라나지뜨 구하R. Guha, 마르코스Marcos 등의 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한 가지 간단한 예만 들어보자. 한국의 도서관들은 자유로이 책을 찾아 읽으며 정보와 지식을 서로 나누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이 교과서나 참고서를 들고 가서 보는 공부방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열람실 좌석표를 뽑으려 새벽잠을 설쳐야 하는 도서관, 뻔질나게 들락거려도 책 한권 찾아보지 않은 도서관, 이런 도서관을 유럽이나 미국의 국가들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왜 우리들은 도서관을 이렇게 인식할까?


도서관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일제는 지배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양민을 만들기 위해 사회교육을 실시했고 도서관 역시 그런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일제는 한편으로 자생적인 도서관 운동을 억누르면서 다른 한편으론 몇 안 되는 도서관을 (당시의 특권계급인) 소수 학생들의 시험준비공간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의 민중들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도서관에 놀러간다는 생각, 도서관이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도서관의 개수를 늘리고 사서를 많이 배치하고 책의 수를 늘린다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이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의식, 무의식, 일상의 경험 속에 스며든 지배의 논리를 바꾸지 않으면, 식민성을 제거할 충격을 주지 않으면, 삶은 쉽게 우리의 앎을 배반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수동적인 사람들이 직접행동을 스스로 포기한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스스로 행동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개화기로 불리는 시기에 민중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재일 역사학자 조경달은 이 시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한제국기는 개명한 지식인이라면 진지하게 백성이란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그것은 민民도 사士라는 지평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식인에게 그러한 사상적 작업을 강요할 정도로 민중운동은 고양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전개된 반일의병투쟁에서 고명한 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민의병장이 여럿 탄생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의적이 많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도적 또한 의적으로서 사의식을 갖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를 장식했던 갑오농민전쟁이나 수많은 민중반란들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이런 정치행동을 통해 민중은 서서히 자신을 주권자로, 변혁의 주체로 인식해 갔다. ‘사발통문沙鉢通文’(주모자의 이름을 사발과 같이 둥근 모양으로 빙 둘러 적은 연판장)을 돌려 민회를 열고 “여기에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전(罰錢, 벌금)’을 징수하거나 ‘훼옥(毁屋, 집을 망가뜨리는 것)’을 하는 식으로 참가를 강제”하며 “이른바 공동체 제제의 논리를 행사”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민중은 장이 열리는 날 토론판을 벌이고 산에 봉화를 피우거나 밤에 산에 올라가 수령을 욕하면서 산호(山呼)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5일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많은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러 도로에 피가 흥건하게 고이던 시절, 관원이 탄 수레를 끌던 수레꾼은 이렇게 그 관원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만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나는 비록 미천한 수레꾼이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차라리 개, 돼지를 태울지언정 너와 같은 무리는 태울 수 없다.”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는 가난한 수레꾼이 관원을 꾸짖을 정도로 사람들의 존엄은 강했다.


이토록 강했던 민중의 꿈과 자부심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확한 표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짓뭉겨지고 비틀렸다’이다. 일제 식민권력은 단순히 사람들을 지배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존엄함을 뿌리째 뽑아서 순종적인 인간을 ‘창조하려’ 했다. 당시 한국을 취재하던 미국 기자 페퍼는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이란 기사에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사람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고, 또 좌우를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는데, 품속에 서류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류는 한 조각, 한 장이라도 일본인에게 발각되면 6개월의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일본인이 일컫는 불령(不逞)한 무리가 아니며 또한 지식층도 아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순박한 소상인, 농부, 규중에서 생활하는 가정주부나 어머니들이었다.” 그리고 박은식에 따르면 일제는 ‘부랑자취체령(浮浪者取締令)’을 선포해서 일정한 직업이나 주소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체포했다. 서울과 각 도시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3주일 이상 3개월 이하의 징역에 처했다고 한다.


단지 정치적으로만 억압을 받은 게 아니다. 식민권력은 민중들의 살림살이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본국민의 이주를 책임지는 전형적인 식민지착취기구로 국유지와 공유지를 약탈할 뿐 아니라 한국 농민의 소작권을 빼앗아 일본농민에게 넘겨줬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민자 수는 100만명에 달했다(이들은 자치기구나 소방대를 조직해서 식민권력의 사조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일제는 땅만이 아니라 살림살이를 통째로 빼앗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인구조사를 핑계로 개인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청결검사를 한다며 물건을 뒤지고 사람들을 때렸다. 세금을 체납하면 집안의 솥과 식기 등의 세간을 경찰이 마음대로 뒤져서 팔고 심지어 굴뚝의 개조나 공사에도 개입했다. 일제는 이런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논리나 근대화의 논리를 내세웠다.


자기 주권 내의 국민이 아니기에 일제는 한반도의 민중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제한하거나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조장하고 묵인하며 존엄을 짓밟고 체념과 순종을 끌어내려 했다. 이런 끔찍한 폭력을 경험하며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존엄을 버리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근대화의 논리인) 약육강식의 경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각주:1]


해방 이후 군사독재는 이런 식민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시키려 했다. 반공주의는 일제의 사회지배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기득권층을 강화시켰다.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기득권층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도 완전히 훼손되지 않았던 민중의 마지막 존엄을 계속 짓밟았다. 일제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정책이 이름과 내용만 바꾼 채 고스란히 이어졌고 심지어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존엄은 자기 삶의 기반인 살림살이와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것인데, 거의 백여년간의 억압은 이런 존엄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 이런 지배의 논리를 찾아내고 존엄의 기반을 회복시켜야 한다. 푸코나 들뢰즈의 분석을 찬양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그런 시사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존엄을 되찾을 방법이 드러난다면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민중을 외치는 사람들조차 그런 회복에 관심이 없고 때로는 회복을 의식적으로 피하기도 한다.



직접행동과 선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성립시킨 것은 선거였다. 성별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성인에게 투표권을 줬다는 점에서 한국의 선거제도는 발전된 듯 보였지만 대표를 뽑는 선거는 근본적으로 민중에게 주권을 돌려주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진정 민중의 주권을 다시 회복시키려 했다면 선거가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의 민회를 복원하고 그들의 정치행위를 보장했어야 옳다. 하지만 미군정이나 기득권층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민중의 정치적 힘을 선거라는 장으로 ‘동원’하려고 했다.


사실 선거라는 제도는 서구의 것이다. 다른 제도들이 그러하듯 서구의 것은 이 땅의 전통과 문화를 뒤떨어진 것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민중은 기존의 방식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는데, 그런 새로운 것에 익숙한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많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선거를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활용했다. 민중들의 존엄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무지하고 쓸모없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조경달에 따르면 한국의 민중은 스스로를 변혁의 주체로 인식했지만 정치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했다. “갑오농민전쟁은 덕망가적 질서관을 전제로 국왕․왕부(王父)환상이 널리 퍼져가는 가운데, 중개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무력적 청원 형식으로 평균주의와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민중반란이었다. 여기에서 민중은 청원자의 역할만을 맡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철저한 민본주의를 표방했지만, 민중 자신의 일상적인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투쟁은 있을 수 없었다.” 즉 갑오농민전쟁이나 그 이후의 많은 민중반란들은 새로운 덕망가의 출현과 그들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민중의 심성, ‘일군만민(一君萬民)’사상을 강화시켰다. 식민지 시기의 농민조합이나 해방 이후의 인민위원회에서도 덕망가의 출현과 그들을 통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경향을 비판하며 민중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려는 운동의 흐름도 있었지만 선거는 이런 흐름을 가로막고 다시금 사이비 덕망가 질서를 확립했다.


이것은 선거의 정치적 중요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선거라는 장 자체가 민중의 정치 에너지를 동원하고 흡수해서 직접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얘기이다. 즉 선거를 통해 민중이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정치학자 러미스(D. Lummis)는 이 점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인민의 복지를 돌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와 다르다. 왕이 진심을 다해 자기 국민들을 돌볼 수 있지만 정부형태는 여전히 군주제일 것이다. 한 정당의 독재가 인민을 섬기는 정책을 채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정당독재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온화하거나 공정한 지배자들에게 은총을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민중선동가(demagogy)는 인민을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대변하리라 약속하며 대중적인 지지(=권력)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주로 비난할 때 사용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특히 민중선동가가 적절한 상황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약속의 대가로 어떤 이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이 아니다.”


선거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선거에 참여하는 걸 거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정치인이 나타날 수 없으니 모든 정치인을 없애자는 얘기도 아니다. 조금 더 민중의 이익을 고려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고 민중적인 정치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민중의 존엄이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민중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거혁명’, ‘선거승리’란 말은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다리없는 경주마’처럼 모순된 말이다.[각주:2]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흐름이 단절이라기보다는 연속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면 민중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또 한번 속임수에 넘어간 자신에게 ‘모멸감’과 ‘냉소’를 느낄 수밖에 없다.


여러 학자들은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촛불의 힘이 선거의 투표행위로 전환되었다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선거의 승리인가? 투표율, 득표율, 당선율로 정리되는 부르주아 선거판의 논리를 빼면 무슨 기준으로 승리를 논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국민의 생각이 선거결과로 드러났다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다(이미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재보궐 선거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건 자신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거결과나 여론을 무시하는 권력의 태도가 이명박 정부 때만 있는 특별한 일인가? 소위 민주정부라 불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국민의 상식이 얼마나 정책에 반영되었나?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서는 역사가 만들어져야 새로운 역사가 써질 수 있다. 그것은 지난 백 년 동안 민중이 꿔왔던 꿈이자 실현되지 않은 꿈이다. 직접행동은 민중이 뼈 속 깊이 스며든 식민성을 제거하고 존엄을 되찾으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연다. 직접행동이 실패한들 그것이 무슨 잘못인가? 성공하지 못한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고 존엄한 자는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할 수 있다.



참고한 책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알마, 2006)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이연옥, 『한국 공공도서관 운동사』(한국도서관협회, 2002)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

조경달 지음, 허영란 옮김, 『민중과 유토피아: 한국근대민중운동사』(역사비평사, 2009)

조동걸,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해냄, 2002)

D. Lummis, 『Radical Democracy』(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1. 파농의 말처럼 “이주민은 원주민을 악의 본질로 생각한다. 원주민 사회는 단지 가치관이 부재한 사회가 아니다.…원주민은 사악한 무의식이며 맹목적인 힘의 도구다…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마르코스와 사빠띠스따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듭 말하지만, 무기를 든 것은 저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대안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기를 든 것도 우리 얼굴을 가린 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멕시코의 민주적인 변화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더 많은 죽음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성직자라는, 전쟁광이라는 비난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를 비난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계로, 우리가 흘리는 피의 가치를 폄하하고 존엄 대신 명성을 주는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사이렌과 천사들의 노랫소리에도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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