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3.09.20 12:59

 이 국가와 저 국가의 사잇길


2008년에 때 아닌 논쟁이 건국 60주년 기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60주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했고, 60주년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의 실효성을 주장했다. 아주 식상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논쟁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배워왔기에 거의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질 기회를 마련했다. 도대체 우리에게 건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친일파를 몰아내기는커녕 친일파에 맞섰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고 기득권층의 배만 불렸던 대한민국이 언제 누구의 뜻을 받들어 세워졌는지가 왜 중요한가?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는 더욱더 본질적인 질문, 즉 우리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먹거리조차 자유로이 결정할 수 없는 나라에서 왜 우리는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국가가 내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 나는 계속 국민이어야 하는가? 국민으로 살지 않으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인가?

 

그동안 이런 물음을 던지지 못한 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국사(國史)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이다. 민족주의는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주의는 그들을 비판하며 노동자․농민의 세상을 주장했지만, 둘 다 자기 역사의 틀을 국가에서 찾았다. 각자가 자신의 국사를 기록하고 그 정당성을 고집해 왔기에, 우리는 국가가 아닌 다른 무엇을 통해 나와 우리의 행복을 그려본 적이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데 역사나 국가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내 옆의 가족, 친구, 애인조차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태극기를 흔드는 애국자로 변신한다. 평상시에 “왜?”라는 물음을 던져본 적 없기에 국가는 은근히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충성을 바쳤건만 국가가 내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내게 요구할 뿐 내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딱히 맞설 방법도 없고 대안도 없으니 무섭고 더러워서 참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은 더 불안하고 서글프다. 지금 우리가 서글픈 것은 역사를 트집잡는 뉴라이트의 억지보다 새로이 역사의 흐름을 짚을 좌표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공허하다 하더라도 이념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밤하늘에 뜬 별을 보고 사람들이 길을 찾듯이, 이념은 우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뉴라이트들이 지난 역사를 부여잡고 온갖 트집을 잡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제 갈 길을 잘 찾아가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이 아니라 국가나 재벌이 정해놓은 좌표를 보며 쫓기듯 삶을 산다.

 

그런데 조선, 일제 식민지, 미군정,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놓인 사잇길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국사의 틀을 벗어나 풀뿌리 민중들이 살아왔던 기록을 엿볼 수는 없을까? 설령 그런 기록 자체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그런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국가와 자본이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하던 시대를 돌이켜보려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당시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오래된 미래’라는 말의 참신함이 어느 정도 냉랭해진 지금이지만 저 곳의 얘기가 아니라 이 곳의 얘기라면 다시 온기가 돌 수 있지 않을까?



식민지 시대의 저항하는 농민공동체


1980년대 초 라나지뜨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인도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고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인식하기 위해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스스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에게 빌려온 개념이지만 이들은 이것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을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은 식민권력과 토착권력을 전복시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석하며 농민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발턴 개념을 빌려온 연구들이 제법 있지만 그 연구들은 주류 역사학을 비판하거나 탈근대/변경의 역사를 주장할 뿐 역사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며 농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재구성하지 않았다. 기존의 국사보다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권력의 결을 거스르며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거칠게나마 우리 농민들의 저항과 농민공동체의 형성을 살펴보려 한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이 제안했던 아나코-코뮨주의(anarcho-communism)라는 개념은 일제 시기 농민공동체의 의미를 되짚어보는데 유용하다. 아나코-코뮨주의는 그동안 《녹색평론》에 몇 차례 소개했는데, 농업과 소공업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마을공동체를 뜻한다. 외국말이라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농민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은 낯설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서로 돕고 보살피며 함께 꾸려가는 삶은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농민공동체가 지금처럼 낭만적인 향수로 얘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실제 현실의 버팀목이었다. 19세기부터 한국의 농민들은 민란(民亂)을 일으키고 면과 동리 단위로 모정(茅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과 같은 공간에서 촌회(村會)나 향회(鄕會)를 열며 자치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제는 한국의 마을공동체들을 파괴하려 들었다. 이미 동학운동을 경험했던 일제는 자신의 지배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반이 농민공동체임을 깨달았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을 폐지했고 1914년에는 부군면을 통합하고 면장을 임명했다. 마을이름도 ○○동으로 바꿔서 마을의 정체성을 없앴다. 그리고 경찰과 헌병의 수를 매년 늘리고 그들에게 범죄단속이나 첩보수집만이 아니라 모종심기와 토지측량, 위생검열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일제의 식민지 지주제 또한 농민들의 삶을 뿌리채 뽑으려 들었다.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다 일고(日雇)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을 만드는 비용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며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일제조차도 농민층의 붕괴를 보다 못해 1933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며 농가경제의 자력갱생, 건전한 농민정신 함양을 주장할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농민들은 이런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 초기부터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르는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주로 해산된 군대나 지방유림의 지도를 받았지만 많은 농민

들이 이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일어난 사건이고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씨의 역사”,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3․1운동을 민족이나 독립의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벌였다.

 

3․1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중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와 자급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농민들은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서류철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회의를 열고 공동체의 일을 함께 돌봤다.

 

일제가 3․1운동을 힘으로 짓누른 뒤에도 풀뿌리 민중들의 열망은 쉽게 식지 않았고, 1920, 30년대의 농민운동은 농촌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다.



농민공동체에서 싹튼 다양한 사상들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지주제에 맞서던 농민들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국사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을 기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역사관은 농민의 저항을 개량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했다. 기존의 역사관은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해방의 의미를 강조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며 해외의 독립운동을 주로 다뤘다. 그리고 사회주의 관점은 국내의 농민운동을 혁명과 개량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사회주의 계열만을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봤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관점은 천도교 계통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나 기독교계의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을 일제 농민개량화정책의 결과물로 보며 개량주의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을 개량주의로 재단할 수 있을까? 기독교계의 손정도(孫貞道)는 “우리가 時下를 쫏차 基督의 精神을 發揮하나니 朝鮮 內地나 滿洲나 基督敎的 新農村이 組織되여야 하겟고 압흐로는 네게 잇는 所有를 다 이 農村에 드리노켓느냐 하는 問答으로 그 이가 敎人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거시다”라고 말하며 소유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손정도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해 “無産農民으로서 金錢이 잇는 資本家들을 抵抗하고 스사로 生産하기가 不能할지니 不可不 貧者 貧者끼리 協同互助하는 것으로 生産의 資本力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이용도(李龍道)는 톨스토이를 스승이라 부르며 빈자와 연대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이용도는 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는 파문을 겪으면서도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만들려 했다. 또한 3․1운동 이후 점점 보수화되는 교회에 실망하던 이대위(李大偉)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YMCA를 중심으로 사회복음운동과 농촌협동조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유재기(劉載奇)는 협동조합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화하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평가하며 장로회 농촌운동을 이끌었다. 유재기는 독일 라이파이젠식 신용조합과 영국 로치데일식 소비조합을 만들어 소농의 자립과 협동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흐름을 모두 개량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자기 재산을 모두 공동체에 바치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는 개량주의자들일까? 빈부와 계급을 넘어 사랑과 협동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이 개량주의로 평가되어야 할까?

 

그리고 당시의 농민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으로 구분하는 것도 위험한 시각이다. 일제 시기의 농민운동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조동걸은 사회주의운동이 소작쟁의를 자신들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부러 사회주의자를 만들었던 경우도 허다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을 개량과 혁명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농민공동체에서 싹트던 다양한 사상들을 새로이 평가할 수 있다. 가령, 톨스토이가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자급하는 농촌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음을 생각하면, 앞서 얘기한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 아나코-코뮨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상에 맞춰서 현실의 농민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농민공동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상이 재구성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외국의 이론을 좇아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상을, 그리고 농민공동체 속에서 싹트는 자치와 자급의 이념을 볼 수 있다.

 

그 점은 천도교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천도교계의 김일대(金一大)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지만 동학당(東學黨)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로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겟다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가진 교정합일체(敎政合一體)라고 주장한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농민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얻고, 농민대중의 교양을 향상시키고 농민대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세우고 소비조합운동, 생산조합운동, 기술향상운동, 경제균형운동(經濟均衡運動)을 펼쳤다. 김일대에 따르면, 1930년 조선농민사가 천도교청년당과 통합하면서 불과 10개월만에 새로 들어온 사원이 3만명, 새로 만들어진 군단위 농민사가 50개소, 리단위 농민사 1,000개소라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일대는 조선농민사가 조선 전체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농민사는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공동노동조직을 공동경작계로 꾸리고 군단위마다 공생조합(共生組合)을 만들며 농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조선농민》과 《농민》등의 잡지를 발행하고 강연회를 열며 계몽운동과 농민야학에도 힘썼다. 《조선농민》은 야학의 교재로 사용될 〈농민독본〉, 〈농민과학 강좌〉, 〈위생강좌〉, 〈상식문답〉 등을 연재하고 농민야학과 귀농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농민》과 《농민》이 아나키즘의 경향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지만 국문학계에서 이런 논의가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조선농민사의 중농주의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보다 아나키즘에 기반한 자생적인 이념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 잡지에 글을 실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공동경작제를 통한 이상촌건설을 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허문일(許文日)의 〈自主村〉은 그런 이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얘기된다. 문학평론가 김택호는 허문일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를 강조했던 인내천주의가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거부하고 이상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소통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문학작품만이 현실의 노동조직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각 군의 농민사들은 공동경작에 관한 규약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공동경작계는 협동노동을 공동체의 규약으로 발전시키며 서로 돕고 보살피는 자급과 공생의 체계를 마련했다. 조선농민사만이 아니었다. 1926년 6월 전진한(錢鎭漢)이 일본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는 “①우리는 협동․자립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의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②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조합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방학 동안 경상북도 일원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고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래서 1928년 11월에는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

 

그런데 이 협동조합이야말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기대를 걸었던 삶의 양식이었다. 독일의 사상가 란다우어(G. Landauer)가 말했듯이 협동조합의 정신인 서로 돌봄(mutuality)은 빈곤-노예-노동-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바꾸고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서로 돌봄은 돈의 지배를 없애고 일을 하고자하는 모든 사람이 일하게 하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도 협동조합운동에 많은 노력을 쏟았을 뿐 아니라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노동조직에서 상호부조의 가능성을 찾았다. 따라서 이런 노동조직 자체가 아나코-코뮨주의와의 강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동학과 아나키즘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강조했던 바르게 이해하고 익히고 실천한다는 신경성(信敬誠)의 수행체계, 한울님이 네 몸 가까운 곳, 천지생명체에 모셔져 있으니 먼데서 구하지 말라는 인내천의 사상, 사물이 자기 속의 씨앗을 스스로 틔우며 조직해간다는 기화(氣化)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즉 몸소 겪고 부딪치며 현실 속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자기 밖의 본질에 갇혀버린 고대와 근대의 정신을 비판하며 참된 자아(ego)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 정신과 육체, 사물과 본질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동학과 유사하다(사상적인 면은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 더 자세하게 다루고 싶다).

 

이처럼 식민지 시기의 농민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농민들은 각 마을의 ‘촌계’, ‘동계’를 디딤돌로 삼아 민간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동회’나 ‘리회(里會)’같은 공동체적 연대를 이용하여 ‘면민대회’나 ‘촌민대회’를 열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했다. 농민들은 “상호부조의 원칙에 의하여 정의를 지지하며 이상에 資할 과학으로 호상부조의 원리 아래 생존권 확립을 期하는 ‘이상향’을 지향”하기도 했다. 이상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명식(金明植)과 김사국(金思國) 등이 활동했던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서울청년회와 교류했던 전라도 지역의 사회주의운동들은 농민공동체를 디딤돌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완도 근처의 작은 섬인 소안도(所安島)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조선농민사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여 함께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과 ‘살자회’도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하자는 강령을 결의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농민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상의 흐름을 놓치고 그동안 역사를 아주 좁은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다. 당시 농민공동체에서 움트던 사상을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농민들 자신이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고 공동체라는 기반이 그런 저항과 새로운 창조를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다만 일제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았으면서 미처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진 아나키즘 공동체


그렇다면 아나코-코뮨주의의 지향을 실현한 농민공동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일제 하의 한반도에서는 그런 이상촌을 찾기 어렵다. 춘천 신북면 천전리지역, 양주군 봉안촌지역, 북간도 어복촌, 안희제(安熙濟)의 발해농장 등의 이상촌 운동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그 이상촌과 아나코-코뮨주의와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 밖의 북만주에서는 잠깐 동안 아나코-코뮨주의를 따르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金佐鎭)이 김종진(金宗鎭),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가 만들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4년 4월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1927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1929년 7월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 했고 항일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려 했다.

 

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때 마침 당시 신민부는 무장투쟁노선을 주도하는 군정파와 일상적인 정착을 시도했던 민정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군정파를 주도하던 김좌진이 정착과 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심하고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1929년 여름에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고 이들은 상호부조와 자유연합이라는 아나코-코뮨주의의 조직원리에 따라 자치적인 농민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김종진은 “농민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상호단결하여 맺어져야한다는 것”이라고 봤고 한족총연합회를 지도자의 조직이 아니라 “농민자신의 자의적인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 김종진은 “주민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공동체로서 그들의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하는 농촌자치체”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북만주의 지배권을 다투던 화요파 만주총국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이후 한족총연합회의 핵심인 김좌진과 김종진,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등을 연이어 암살하고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한족총연합회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영향을 받아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이후에 농민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6년 3월 10일에 조선농촌자치연맹(朝鮮農村自治聯盟)은 “①오등(吾等)은 자주 자치적 생활의 실천으로 농촌의 조직화를 기함. ②오등은 농촌의 합리적 경영을 위하여 공동경작, 생산수단 및 시설의 공동화를 기함, ③오등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하여 농촌 실정에 적합한 공업 시설의 완비를 기함, ④오등은 농촌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협동조합적 기관의 철저 보급을 기함, ⑤오등은 비경제적 제 생활양식을 개선하여 생활의 과학화를 기함, ⑥오등은 우리의 교육급 문화기관의 완비를 기함, ⑦오등은 오등의 보건을 위하여 후생시설의 충실을 기함, ⑧오등은 상호부조적 윤리관의 실천에 의하여 국민도덕의 앙양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의 기원(祈願)은 그 강령을 이런 마음으로 노래했다. “사람살이의 터닦은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땀과 눈물은/ 온 사람의 겨레의 살터를 닦았다. 사람들의 온 겨레를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그들의 땀과 눈물은/ 온 세상을 입히고 먹이었다. 터닦고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이 자유의 씨를 그터에 뿌리고 가꿔라/ 온 세상의 겨레는 그 가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계속 좌절되고 말았다. 자치․자급의 농민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들이 계속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국가의 개입과 자본주의의 침투로 계속 좌절되었다. 그러니 공동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힘으로 파괴되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해 왔기에 지금 우리에게 공동체는 국가보다 훨씬 낯설 뿐 아니라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국가를 통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사유하지 못하고 국가를 통한 것만이 현실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진정 우리가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공동체는 결코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는 극렬하게 국가에 저항했고 그랬기에 국가는 공동체의 힘을 빼기 위해 새마을, 자유총연맹같은 끄나풀을 심고 토호들을 만들어 공동체 내부를 파괴했고 협동의 힘을 가로채기 위해 농협, 수협, 신협 등을 만들었다.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농촌과 농민공동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농민공동체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이중의 식민지라 얘기될 수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상과 이념의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시가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촌은 이중의 식민지이다. 이중의 식민지이기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손쉬운 과제일 수 없다.

 

이시백 작가의 소설 《누가 말을 죽였는가?》(삶이보이는창, 2008)를 읽으면 농민공동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색하다. 지금 우리 농촌의 실제 모습은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에 등장하는 낭만보다 한미FTA라는 종말을 눈앞에 두고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무기력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 인구의 7% 정도로 줄어든 농민들이 세상의 능동적인 주체로 나서기는 어려운 듯하고 그들이 꿈꾸던 세상 역시 이미 옛날 이야기로 변해버린 듯하다.

 

하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들만 농민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농민이었듯이, 지금 도시에서 뿌리를 잃고 헤매는 존재들은 ‘미래의 농민’들이다. 농촌이 몰락하면 그 다음은 소도시가, 식민지의 대도시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과거의 농민들이 협동과 관계라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미래의 농민들은 홀로 고립된 채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먹고 입고 자는 곳, 어느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우리가 직접 짓고 만드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안을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대안을 살아야 한다. 혼자서 살기는 어려우니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니 농민공동체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과거의 농민공동체가 저항의 기반이자 미래의 이념을 배양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온갖 위기를 헤쳐가려면 우리는 다시 삶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을 찾아야 한다. 무서운 속도로 식민화 과정을 밟아온 한국사회가 식민성에서 벗어나 자아를 되찾으려면 다시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공동체는 소비의 도시를 벗어나 자급과 자치의 기반을 갖춘 농민공동체이어야 한다.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며 서로 보살필 수 있는 든든한 공동체가 있다면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만일 닥쳐올 에너지와 식량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국가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녹색성장’에 포섭되고 있다(조력발전, 풍력발전 등 수많은 녹색성장이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공동체가 아니면 무엇이 중앙집권화된 국가에게 자치를 요구하고 빈곤과 비참함으로 내모는 시장을 통제할 힘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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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1.07.25 08:33
 

지금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수 있지만 상식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달리 민주주의 제도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 이미 도입되어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도 실시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들도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도입되어 있다. 이렇게 웬만한 민주적인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는데도,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할까?


민주주의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이렇게 추상적이었을까? democracy라는 단어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주의’로 번역되다보니 민주주의도 어떤 이념인 듯하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어원을 따지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그게 다이다. 다른 얘기는 없다. 민중이 권력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적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이런 상식에 따라 누구나 지배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지식인들만 아는 특별한 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몸으로 실행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양식이었다.


민본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민본주의(民本主義)는 군주나 대신들이 민중을 위하거나 위해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었다. 민본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니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자 삶의 태도를 가리켰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나 민본주의를 특별하고 복잡한 어떤 이념이라 여긴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관심을 둘 일이 아니라 여긴다. 민주주의는 학력도 높고 돈벌이도 괜찮은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그런 ‘자격’을 얻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미래의 과제로 미뤄진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면 민주주의의 모델이나 원론에 대한 책들은 제법 있지만 정작 내 삶이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말해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추상적인 권리목록을 나열하거나 시민권,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책들은 있지만 그런 권리를 내 생활에서 써먹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직도 무거운 단어이다. 민주주의는 골방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들,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학자들의 것이지 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내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미는 아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곁눈질하면서도 직접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당신들의 민주주의


이렇게 느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가 추상적으로 느끼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건 역사적인 경험과 의도적인 학습 때문이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인들이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민주주의는 ‘위험한 단어’였다. 한낮 대로변에서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치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지금 우리 현실은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에게 토마토를 던지고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장면은 남의 나라 일이지 무식하고 법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한때 ‘제3의 물결’이라 얘기되며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부흥을 얘기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물결은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를 제 3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이었을 뿐 그 사회의 시민들이 권력의 주인으로 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 아니었다(최근 중동과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재스민 혁명이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사회의 고유한 가치와 문화를 무시하고 서구식의 경제개발과 시장경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보급하는 과정이었다. 제도는 그렇게 도입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 제도에 맞춰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도가 시민들의 삶에 맞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이 제도에 맞춰야 하니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뒤바뀐 셈이다.


이렇게 지배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발전된 것으로 미리 정해놓고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을 민주주의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삶에 어울리는, 우리의 생활과 맞는 정치제도는 봉건적이고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시민들의 민주적인 열망과 생각이 ‘스스로’ 터져 나왔던 순간도 있었다. 봉건왕조와 일제 식민지, 미군정, 군사독재로 이어졌던 어둠의 시절에도 시민들은 자신의 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시간이 되면 거대한 힘으로 폭발했다. 시민들의 힘이 만든 ‘해방구’는 사람들이 공적인 분노와 공적인 행복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걸자 자신만의 삶을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분노와 뿌듯함이 가슴 속을 채웠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의 목소리는,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피땀 짜내는 독점 재벌 해체하라”라고 외쳤던 87년 노동자들의 꿈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였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외쳤던 80년 광주의 목소리, “더 이상 못 속겠다, 거짓 정권 물러가라”는 87년의 외침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2003년과 2008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에 개입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살아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뭔가를 바꾸었다고 느끼는 순간, 거리에서 물러나 집과 공장으로 돌아오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생명력을 잃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지식인들의 잘못도 크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배운 것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주인들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은 않고 민주주의라는 모델로 가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양, 마치 자신들만이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양 행세하며 사람들의 열정과 행동을 순화시키거나 길들이려 했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영미식 시장과 정치에 익숙한 엘리트들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이득이 아니라 소외를 경험했다. 적응하지 못함은 시민의식의 뒤떨어짐으로 설명되었고 사람들은 그 적응의 어려움을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소외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내 탓이요’를 외치거나 그 고통을 비슷한 다른 상대에게 쏟아냈다. 그래,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끼어든다고 될 일이 안 되나? 강한 자에게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약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우리는 ‘약은 삶’을 택해 왔다. 이런 삶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틀린 민주주의


‘산업역군’이나 ‘모범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과거의 군사독재는 시민을 경제발전을 위한 군대로 만들고 생활을 길들여왔다. 삶터와 일터를 철저하게 나눈 채 시민을 가정과 공장에 가두고 길들였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시민을 ‘~형 인간’에 가두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작업장 민주주의를 포기한 경제성장은 시민의 가면을 쓴 산업역군을 계속 강요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는 노동사회나 모범적이고 건전한 사회가 아니라 여가사회와 다양하고 생동력있는 사회인데, 우리는 여가를 사치로, 다양성을 불화로 비난하도록 배워왔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고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그나마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그런데 경제적 평등의 물꼬를 튼 건 정치의 민주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민주주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치 민주주의가 완성된 양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직장과 가정으로 돌려보냈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궤변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들도 이런 궤변에 힘을 실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정치를 위한 삶의 여유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지만 삶의 가치를 소득에 맞췄다. 소위 ‘중산층의 신화’는 적절한 주거와 생활수준 이상을 갖춘 중상층의 사람들만 정치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주제넘은 일이라 믿게끔 했다. 즉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무관심과 선거 때의 순간적인 투표를 모범적인 시민의 권리로 만들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공간적인 규모’만이 아니라 ‘삶의 규모’를 정하고 그 규모에 맞지 않은 삶을 후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이 농민들의 착취를 딛고 사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중산층이 아닌 사람, 중산층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만 허락되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만 시민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에 물음을 던져보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착취하지 않고 수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 3세계를 착취하지 않고 제 1세계(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제 3세계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들이 겪고 있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탈식민주의의 흐름과 무관할까? 나오미 클라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재난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많은 공유재산을 빼앗아 적은 수의 지배자들에게 몰아주면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다.


엄청난 쇼크와 고통을 겪으며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민주주의와 크게 상관이 없을 법한 내용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선거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은 민주적이고, 명확한 이념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을 팔아대는 정당도 민주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소비자 민주주의, 관객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행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뒤틀린 민주주의에 뒷돈을 두둑하게 대주며 이득을 챙기는 것이 바로 재벌들이다.


2009년의 용산참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뒤틀림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국가가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고 전쟁을 벌였다. 멀쩡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는데 아무도 이 상황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떼를 쓰면 ‘민주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플랑카드를 내걸고 주민들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4대강 사업은 자연과 생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회를 민주적이라 부른다면 대체 어떤 사회가 비민주적일까?


우리 현실은 왜 이 모양일까?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시민의 의견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우리에겐 믿음직한 지도자가 없다. 민주주의가 어떠한 대표도 용납하지 않는 체제는 아니므로 지도자는 중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허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소수의 독점물일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똑바로 듣지 않는다면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그런 지도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민의 정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정치는 시민들이 누리는 공적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바쁠 때 내 몫을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이 없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들을 보면 뛰어난 리더십에 알아서 맡기라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직업정치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직업정치인’의 수가 늘어난다고 정치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외려 정치의 장이 좁아지고 직업정치인들이 그 장을 독점하고 조작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다른 건 필요 없고 투표나 열심히 하자는 식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데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주장이 솔솔 새어 나온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이거나 ‘이미 망각된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에 존재했을지 모를 민주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오게끔 새로운 해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민주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피동의 정치에서 능동의 정치로


일찍이 “소유란 도둑질”이고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 선언했던 사상가 프루동은 『19세기 혁명의 일반이념』(1849년)이란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배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다. 이런 것이 정부이고, 정의이며, 도덕이다.”


150년 전의 가혹한 진실을 숀 쉬한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에서 오늘 상황에 맞게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국가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지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을 받는 보너스 카드화되고, 체계화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 접근통제 카드화되고, 신분증명 카드화되고,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인구조사 꼬리표가 붙고, 측정되고, 평가되고, 차례로 나열되고, 스캐닝되고, 돌려지고, 감정되고, 위계를 부여받고, 대상화되고”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의 굴욕적인 일상은 얼마 전에 알려진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따로 관리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고 매일 낭독시켰다. 우리는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나? 2003년 한 노동자가 쓸쓸이 죽음을 택했던 부산의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는 그의 추도식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며 탄식했던 또 다른 노동자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이런 사회에서 분노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지배하는 자들이 비상식적이니 우리 역시 상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해야 한다. 고대 아테네나 근대의 미국, 현대의 유럽을 모델로 삼을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경험과 문화, 열정이 민주주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 이론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토크빌이 본 미국의 민주주의도, 유럽식 계급타협에 기초한 복지국가 모델도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민주주의 이론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체인 민중이 바뀌면 그들의 열정과 사상을 담은 민주주의 이론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모습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오로지 우리의 현실만 고집하자는 건 아니다. 외국의 경험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배워야 한다. 가령 스위스의 민회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연방주의라는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 그리고 남미나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실험들에도 관심을 둘 만하다.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완성된 모델이나 이론으로 배우려 들지 말고 그 사회의 고민과 생활을 배워야 한다.


흔히 이론이라고 하면 지식인들의 과제인 듯 들리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을 ‘신봉’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론을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누가 ‘원전’을 가장 잘 해석하고 지도자의 말을 잘 ‘수용’하는지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론이 쉽게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허나 다른 영역의 이론들이 몇몇 지식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민주주의 이론은 결코 몇몇 사람의 두뇌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싶다면 말이다.


사실 대중과의 소통고리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끊어버리고 대학 속에 몸을 감춘 지식인들은 이미 지식인들이라 부르기 어렵다. 외려 김여진같은 연예인들이 바깥에서 대학을 파고들며 지행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고 그야말로 지식인답다. 지금은 지식인들의 ‘항변’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이고, 그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 이론 역시 반성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의 생활과 접목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얘기는 흥미롭다. 라페는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민주주의 사례들을 수집해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특징을 아홉 가지로 정리한다.


1. 시민들은 집중된 부의 손아귀에서 정치권력을 되찾아오고 있다.

2. 시민들은 정부를 시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3. 투자자, 저축가, 소비자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제적 선택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4. 시민들이 자치 테두리를 정하면, 기업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

5. 이제는 일부 거대기업들조차 기업이익과 지구의 이익을 일치시킨다는 기업이념을 새로 세우고 있다.

6. ‘지역의 살아있는 경제’는 지역산업이 경제권력을 분산시키고, 에너지 폐기물을 줄이며, 공동체 결속을 진작시키고, 지역시민들이 지역 산업을 지지하는 덕분에 생겨나고 있다.

7. 외부자본 통제 없이도 시장이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소유주와 노동자간 격차를 줄인 기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8. 수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

9. 공동체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고 ‘회복’을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법률을 시행할 때, 범죄율은 낮아지고 공동체는 치료된다.


이 아홉 가지 특징에서 드러나듯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나 경제 영역의 변화로 제한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고 우리가 생활을 바꾸려 결심할 때에만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다.


라페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가 변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우리가 네트워크의 두터운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모든 선택이 일정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페의 말처럼 우리의 결심이 이미 변화의 시작을 뜻한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이미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생활공간에서, 가정과 학교, 직장, 거리, 구청, 시청,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쓰면 쓸수록 더욱더 익숙해지고 강해지는 힘이다. 반면에 쓰지 않으면 움츠려들고 약해지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껏 그 힘을 약화시켰다면 그 힘을 강화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힘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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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0.03.19 12:04
예전에 한번 강의를 했던 청어람아카데미에서 강의 하나를 맡았다.
지속적인 강의는 아니고 일회성...
얼마 전 녹색평론에 글을 쓰면서 한국의 기독교사회주의 흐름을 잠깐 살펴봤는데, 얘기할 것이 제법 많았다.
공부를 조금 더 해서 그 얘기를 해볼 생각이다.
한국사회의 기독교인들은 톨스토이와 아나키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강사소개

 

1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꿈꾸다: 홍수전의 이상과 현실"

중국선교사들이 이러다 중국이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지켜보았다던 태평천국의 난과 이를 이끌었던 홍수전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한 밥상에서 밥을 먹는다는 구호가 전 중국을 일으켰던 사연의 기승전결을 만난다. 

 

강의 : 조영헌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2 "우리는 낙원을 잃어버렸다: 불굴의 존 밀턴"

영국 역사상 왕정이 끊어졌던 유일한 시기인 청교도 혁명기 전 유럽을 상대로 공화정의 등장을 알리는 유려한 라틴어 문장가이자 검열철폐를 주장했던 언론자유의 수호자, 40대에 눈이 먼 채로 불후의 역작 실락원을 남긴 문학가 존 밀턴을 소개하는 첫 기회.

 

강의 : 박상익 (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

 

3 "나는 산꼭대기에 서보았네: 마틴 루터 킹"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누구나 닮고 싶어하는 위대한 웅변가이자 설교자 킹 목사. 흑백인종차별이란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해서, 결국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동력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시대가 부를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생각해보는 시간.

 

강의 :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4 "혁명적 침묵: 토마스 머튼의 영성"

20세기 영성가들은 누구나 토마스 머튼의 거대한 영적자산에 자신들이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머튼이 노동자의 삶과 평화운동에 얼마나 깊게 헌신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영성 추구는 세상과 괴리가 아니라, 더 치열한 개입을 위한 헌신이다.

 

강의 :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5 "작은 성자들: 한국 기독교의 잊혀진 이름들"

역사는 영웅만 기억하지만, 성경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이름들을 잊지 않는다. 종교전문기자가 이 땅 곳곳에서 발굴한 우리가 잘 모르는 무명성자들 이야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아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였는지 찬찬히 만나는 시간.

 

강의 :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부 기자)

 

6 "폭력과 소유로부터의 자유: 톨스토이와 아나키즘"

기독교 역사 내에 언제나 소수파로 이어져 온 평화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되살린 근대의 대표적 인물, 톨스토이. 그가 당대의 동서양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를 최근 국내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아나키즘(anarchism)의 맥락에서 재평가하고, 재조명해본다.

 

강의 : 하승우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커리큘럼 소개
* 수강문의 : 319-5600 / bluelog@bluelo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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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0.03.14 23:26
전라남도 완도군에는 소안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작은 섬이지만 소안도는 일제 시기 경찰과 말도 섞지 말자는 불언동맹(不言同盟)을 조직했고, 1928년에는 약 4천 명의 주민 중 800명이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일제 시기 동안 섬 주민들이 감옥에 갇힌 기간을 모두 합치면 300년이 넘을 정도로 저항의 기운이 높았던 곳이다. 주민들은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 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 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라는 ‘옥중가’를 부르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과 만주 등지의 항일조직과 사람과 물자를 주고받으며 수많은 활동가를 배출했던 ‘해방의 땅’이었다. 지금도 작은 섬에 항일운동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자부심은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안도는 해방 이후 제주도 4․3항쟁과 같은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육지에서 분 국민보도연맹의 바람은 소안도에도 상륙해서 주민 700~800세대 중 270여 명의 목숨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 이후에도 경찰들은 소안도를 ‘모스크바’라고 부르며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저항의 역사는 해방 이후 쉬쉬 숨겨야 할 비밀이 되었다.


제주도 4․3항쟁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복원되었지만 이 작은 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왜 이 섬은 빨갱이섬이 되었을까? 이 섬의 주민들은 왜 그토록 극렬하게 저항했을까?



땅을 나누고 학교를 세우다


일제 시기 소안도에는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토지를 몰수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친일파, 일본이주민에게 팔아넘겼다. 당시 소안도에는 왕실에 세를 내던 궁방전이 많았는데, 친일파 이완용의 아들인 이기용이 토지조사 과정에서 이 땅을 가로챘다. 이에 주민들은 소유권을 반환받으려는 소송을 제기했고 무려 13년 동안 소송이 이어진 끝에 1922년 2월 14일 소유권을 되찾았다. 이것이 ‘소안도 토지계쟁사건(土地係爭事件)’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때로치면 엄청난 돈인 1만 4백원을 모아 기존의 중화학교를 발전시켜 1923년 5월 16일에 소안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일본노래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던 공립학교의 학생수는 30명에 그쳤지만, 소안사립학교에는 학생들이 넘쳤다. 1920년 중반에는 멀리 제주도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약 15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토지소유권의 확보와 학교설립은 소안도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궁방전의 소유권을 가짐으로써 소안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굴 땅을 얻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일제의 농장과 지주들이 높은 소작료와 갖은 부역으로 소작민들을 괴롭혔다면, 소안도에서는 땅을 가진 자작농이 늘어났다. 더구나 이 자작농들은 13년 동안의 오랜 소송을 통해 땅을 얻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달은 농민들이었다.


농민만이 아니라 어민들도 섬 지역의 특성상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바다에 경계선을 긋고 각자의 소유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어장은 공동체의 토의와 회의를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촌에서는 마을총회와 어촌계 총회를 통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결정되고 있다. 소안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김양식으로 유명한데, ‘단’이라는 특유의 공동어장을 운영했다. 자연산 톳이나 미역 등을 채취하고 공동분배하는 조직인 ‘단’은 한 마을 내에 같은 수의 가구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공동성은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것 역시 이런 공동체의 분위기를 반영했을 것이다. 공동의 이익을 활용하는데 있어 교육보다 중요한 사업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지금도 전 세계에서 공정무역을 통해 많은 학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소송을 이끌었던 4명의 면민(面民)대표들은 자신들의 송덕비를 대신에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고 주민들은 이에 찬성했다. 1913년에 설립되어 항일사상의 씨를 심던 중화학원을 발전시킨 소안사립학교에는 저항적인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도 완도의 근처 섬들만이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몰려들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미신타파, 조혼폐지, 언어평등, 남녀평등 등을 배운 학생들은 공동체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신간회의 간사였던 송내호,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정남국 등 많은 활동가들이 중화학원이나 소안사립학교를 졸업했다.


소안도가 일찍부터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은 지리적인 위치 탓도 컸다. 일본의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항로가 개발되면서 많은 전라남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자연스레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지식인들도 새로운 사회의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는 각종 강습회, 토론회 등이 열렸고 소안도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소안사립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부르던 ‘소년단가’는 그 정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과 학문으로 직업을 삼고/ 정의와 사랑으로 정신을 삼아/ 같이 먹고 같이 살자/ 평화세계는 우리들의 눈앞에 완연하구나.”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일본 경찰의 대응에서 읽을 수 있다. 1928년 소안도의 활동가 최평산 외 12명이 구속되었는데, 그 심리 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약 100명의 회원으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서울에 있는 모모 청년회와 모든 단체 등과 연락을 취해 소안도에다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그 섬 하나를 완전한 공산주의 이상향을 만들고자 계획하고 착착 그 운동을 실행하면서 한편 면장배척의 봉화로부터 경관에 대한 불언동맹을 조직 실행하고 또 소안학교를 설립하여 도민에게 공산주의적 교육을 실시하였는바 대정 13년에는 도민 거의 전부인 800여명을 회원으로 하고 그 후에도 남자는 청년회에서 여자는 여성회에서 공산주의의 역사상을 선전 실행하여 소안도 안에서는 경찰과 군의 행정이 잘 시행되지 않을 지경까지 되었던 사건이라는바 실로 근래에 드문 조직적 공산주의 운동”(《조선일보》1928년 10월 18일자)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에 맞서는 배움의 연대, 생활의 연대


소안도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취한 첫 걸음은 소안사립학교의 문을 닫는 일이었다. 많은 활동가들을 배출하고 섬 주민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기관이던 소안사립학교는 눈에 가시같았다. 호시탐탐 학교문을 닫을 기회를 엿보던 일제는 1925년 이 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공립학교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주민들은 면민대회를 열어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경일에도 일본 국기를 달지 않는다는 구실을 들어 1927년에 강제로 학교문을 닫았다. 작은 사립학교 하나를 폐쇄하기 위해 일제는 경찰병력을 소안도에 풀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3인 이상이 모이는 것과 곤봉같은 무기휴대도 금지되었다.


작은 사립학교 하나에 왜 이토록 일제가 많은 신경을 썼을까? 그것은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공간을 넘어 생활을 나누고 공동체의식을 기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한 명이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소안도 자체가 하나의 학교로서 함께 배우고 생활하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기운을 만들었다. 그런 장이었기에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운동을 이끌었다.


배움과 생활의 공동체가 가진 중요성은 소안사립학교 출신 활동가들이 조직했던 단체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4년에 송내호가 만든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는 완도만이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까지 조직망이 이어진 전국 조직이었다. 의를 지켜 서로 가까이한다는 그 이름부터가 공동체성을 반영하고, 계라는 전통적인 생활조직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수의위친계는 특별함을 지녔다.


1919년 3․1운동이 지난 뒤 1920년 4월에 송내호, 정남국 등은 마을주민 100명을 회원으로 모아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를 만들었다. 이 배달청년회는 마을자치단위였던 리(里)를 중심으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1924년에는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결성되어 공동경작계와 공동어장계를 만들어 공동노동에 힘썼다. 그리고 독서회와 강연회를 열고 생산조합방식으로 협동노동을 실시했다. 노동대성회는 당시의 사회주의노선과 달리 천도교 노선의 조선농민사가 추진하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렇게 소안도는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조직형태를 근대적인 사상과 결합하는 실험장이었다. 계급노선과 공동체노선이 서로 어울렸고 그 속에서 강력한 연대의 힘이 만들어졌다.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1925년 창립)와 ‘살자회’(1928년 창립)는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함”이라는 강령을 결의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이런 어울림과 연대를 반영했다. 그리고 전남 지역과 잦은 교류를 갖던 사상단체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함께 수용했던 서울청년회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배움과 생활의 공간이 일치했기 때문에 학교 폐쇄에 대한 저항도 거셌다. 심지어 전라남도 사람들이 조선 거주민의 절반을 차지하던 일본 오사카에서는 800명의 일본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4,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제폐교사건을 규탄하며 제국의 심장부에서 최초로 조선총독정치를 비판하는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소안도 사람들도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고 야학에 보내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공간의 일치를 지켜갔다.


이런 공동체에서 연대는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누가 회의했다’였다고 한다. 사실 회의는 사회주의자들의 특징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촌회나 동회, 계 등 여러 공동체 조직에서 회의는 일상화되어 있었고 서로의 삶이 얽혔다. 그 속에서 연대는 자연스러운 힘이었다.



공동체의 연대와 저항의 망


해방 이전 한반도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생활 속에서 연대했다. 농민들의 혁명역량은 의식적인 사상학습만이 아니라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노동관행과 공동체를 디딤돌 삼아 성장했다. 일본인 대지주에게 저항하고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마을의 집단적인 노력으로 가능했다.


소안도만이 아니라 전북지역의 농민운동은 ‘촌계(村契)’나 ‘동계(洞契)’같은 전통적인 자치조직들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런 계를 디딤돌 삼아 농민협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했다. 소작민, 자작농만이 아니라 지주들도 이런 조직에 속해 있었고, 마을학교를 세우거나 행사를 치르는데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계나 교육기관에서 제명되거나 쫓겨났다.


농민사회에서 연대는 공동체의 연대를 뜻했고 이는 강력한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 국가나 자본이 침투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려 해도 이런 연대의 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정부가 자치조직을 파괴하고 농협과 수협, 축협을 만든 이유는 이런 연대의 망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런 공동체의 연대가 계급간의 연대, 전 세계적인 연대라는 더욱더 보편적인 연대로 발전하는 건 당시도 운동의 과제였다. 허나 1923, 24년의 전라남도 무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공동체의 연대를 디딤돌 삼아 전국적인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던 소작민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不納同盟)을 만들고 목포까지 원정을 나와 시위를 벌이자 전국적인 지지가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연대의 틀은 의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확장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연대를 외치는 목소리는 높지만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틀이나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는 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생활, 공동노동을 가능하게 했던 과거의 공동체는 모두 파괴되거나 국가, 자본 내로 흡수되어 버렸다. 지금 농민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농협의 틀에, 노동자들은 자본이 관리하는 개별 공장의 틀에 갇혀 버렸다. 소안도도 다르지 않다. 외지의 사람들이 몫 좋은 곳의 땅을 대부분 차지했고, 소안도의 주민들도 대부분 농협이나 수협을 통해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대회의가 꾸려지고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해 연석회의가 꾸려지지만 그 힘은 약하기 그지없다. 관계망이나 공동체가 없으니 일상 속에서 서로 힘을 모으고 연대하는 게 아니라 연대 자체가 또 다른 일이 되어버렸다. 가뜩이나 바쁜 일상 속에서 따로 연대할 시간과 고민을 내야 하니 힘들고 어렵고, 그러니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2009년 9월 민주노총부산본부가 만든 노동자생협은 아직 그 미래를 낙관할 수 없지만 중요한 첫걸음이다. 노동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노동조합과 농민회가 관계를 맺고, 노동조합과 지역주민들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장을 통해 교육생협, 의료생협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지역 내에서 생산․소비가 순환되는 경제체제가 구성된다면, 그것은 국가나 자본이 쉽게 끊을 수 없는 강한 연대, 강력한 저항의 망을 만들 수 있다.


먹고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생겨나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며 함께 공유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런 곳에서는 옆집 김씨 아줌마가 부당하게 해고되고 박씨 아저씨가 전셋집에서 갑자기 쫓겨난다면, 마을 전체가 그 일에 관심을 둘 것이다. 고구마줄기처럼 한 마을이 엮어져 외부의 힘에 맞서려 들 터이니 누가 감히 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려 할까?


새로운 세상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더불어 사는 삶에 숨겨져 있다.



※ 참고한 자료


김준, “해방의 섬에서 빨갱이의 섬으로”, 《오마이뉴스》2005년 8월 17일자.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소안항일운동사료집』(瑞寶印刷株式會社, 1990)

송윤경, “소안도 항일운동사, 전설에서 역사로”, 《뉴스메이커》 737호(2007년 8월 14일자)

정근식․김준 공저, 『해조류 양식 어촌의 구조와 변동』(경인문화사, 2004)

현정길, “노동자생협을 통한 노동운동”, 《녹색평론》 제 110호(2010년 1~2월호)

홍영기, 『1920년대 전북지역 농민운동』(한국학술정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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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12.28 16:49

많은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국가와 자본의 능력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대안이라 비판한다. 우리는 그 비판에 옳다고 박수칠 뿐 그것을 반박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 없다. 콜린 워드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에서(원래 제목인 anarchism in action을 ‘대안의 상상력’이라 번역한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책이 번역될 당시의 ‘상상력 유행’ 탓인 듯하다), 자신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에서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즘은 역사의 낭만적 샛길이 아니라 인간 조직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이기에 “지금 아나키즘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태도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주장이다. 아나키즘은 정치변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결정 행동이다.”

워드는 국가를 없앤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수상직을 없애는 것과 다르다고 본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란다우어의 말처럼 국가는 “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하나의 인간관계이자 하나의 인간 행동양식”이기에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란다우어는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국가와 공존하는 것, 파묻히고 버려져 있는 것을 현실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워드는 이런 ‘오래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라는 현대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많은 예를 들며 이런 네트워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도시계획과 사회복지, 마을자치회, 스쿼터, 협동조합, 청소년의 집, 모험놀이터, 탈학교․탈대학운동 등 대중의 자발적인 질서가 만들어온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 이런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하는데도 왜 우리는 아나키즘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국가와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조직적으로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어왔고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힘을 상대할 만큼 강한 힘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가의 관료제와 자본의 자원동원력에 맞설, 폭력과 무한경쟁에 맞설 힘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소수의 전위정당이나 전위조직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그 힘을 만들 수 있을까? 전 지구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에 맞설 또 다른 힘은 구성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대항(counter)’을 생각한다면, 아나키즘은 대항과 더불어 그 강력한 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상층의 기득권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협력하지 않음’, ‘협조하지 않음’으로 그 힘의 기반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자급과 자치로 그들을 더 이상 ‘필요없게’ 만들려 한다. 그런 점에서 워드의 말처럼 “아나키즘의 접근방식은 분명하다. 제도들을 파괴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자조(self-help)와 상호부조(mutual support)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것이다.”

워드가 분명하게 강조하지 않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내포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지고 규정되는 ‘피동형’ 인간들은 성장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 부딪치고 깨고 파괴하는 능동적인 인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위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우두머리가 필요없다는 점을, 자신의 자아를, 자존감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국가와 자본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기성체제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들을 통해, 그 대안들을 더욱더 넓혀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한국의 백무산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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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기댈 곳

 

백무산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꿀렸다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
힘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맑스였고
희망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 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
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
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
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더렵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은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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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선을 넘지 못하는 자에게 꿈은 공상일 뿐이다. 꿈이 현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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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7.06 17:19

사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는 환경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조금씩 바꾼다. 사상의 본뜻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겠으나 그 뜻이 드러나는 방식과 강조점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이것을 ‘변화’라 얘기하기는 어렵겠고 일종의 ‘접목’ 또는 사상을 현실에 ‘접붙이는’ 과정으로 봐야 할 듯하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스트의 삶을 봐도 그런 접붙이기가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성장을 보며 반전평화운동을 강조했고 그런 군국주의 성장을 방치했던 무능한 의회주의를 반대하며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생디칼리즘을 자기 신조로 삼았다. 이런 성격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빠른 산업화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출현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개화에 앞장섰던 만큼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은 선진 제국의 문물과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사회의 봉건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령 왕조나 군벌, 보수적인 유교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노장사상이나 고대 사상이 강조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류스페이는 전통사상과 아나키즘을 뒤섞어 중국식 아나키즘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신세기파 역시 서구 문물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충(忠)이나 효(孝), 족(族)을 강조하는 중국 전통과 단절하려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아나키즘의 상호진화론을 수용했다. 민족주의는 한국 아나키즘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것을 한계짓는 요소이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대동사상을 비롯한 민족주의운동과 손을 잡으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국가나 민족을 부정하는 성격이 약화되기도 했다. 신채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 신채호가 뜻한 바는 분명 왕이나 특정 인물의 나라가 아니겠으나 조선의 의미는 우리가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렇게 조금씩 나라마다 그 특성이 다르기는 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으르렁 거리던 시절에도 아나키스트들은 국경을 넘어, 애국심이라는 틀을 넘어 서로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실천을 공유했다. 인상적인 구절을 소개하면,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일본 아나키스트의 활동, 일본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 혁명가들, 아나키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조직들, 상하이노동대학이나 푸젠성 농촌자위운동에 참여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활동 등이 그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초국가주의 연대의식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45쪽)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역사가 뒤엉켜 있기에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모색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이 있다. 식량, 에너지, 생태 등 식민지/제국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민중이 공동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아시아의 민중이 상호부조를 실현하며 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 방법은 있을까? 만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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