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완도군에는 소안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작은 섬이지만 소안도는 일제 시기 경찰과 말도 섞지 말자는 불언동맹(不言同盟)을 조직했고, 1928년에는 약 4천 명의 주민 중 800명이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일제 시기 동안 섬 주민들이 감옥에 갇힌 기간을 모두 합치면 300년이 넘을 정도로 저항의 기운이 높았던 곳이다. 주민들은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 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 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라는 ‘옥중가’를 부르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과 만주 등지의 항일조직과 사람과 물자를 주고받으며 수많은 활동가를 배출했던 ‘해방의 땅’이었다. 지금도 작은 섬에 항일운동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자부심은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안도는 해방 이후 제주도 4․3항쟁과 같은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육지에서 분 국민보도연맹의 바람은 소안도에도 상륙해서 주민 700~800세대 중 270여 명의 목숨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 이후에도 경찰들은 소안도를 ‘모스크바’라고 부르며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저항의 역사는 해방 이후 쉬쉬 숨겨야 할 비밀이 되었다.


제주도 4․3항쟁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복원되었지만 이 작은 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왜 이 섬은 빨갱이섬이 되었을까? 이 섬의 주민들은 왜 그토록 극렬하게 저항했을까?



땅을 나누고 학교를 세우다


일제 시기 소안도에는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토지를 몰수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친일파, 일본이주민에게 팔아넘겼다. 당시 소안도에는 왕실에 세를 내던 궁방전이 많았는데, 친일파 이완용의 아들인 이기용이 토지조사 과정에서 이 땅을 가로챘다. 이에 주민들은 소유권을 반환받으려는 소송을 제기했고 무려 13년 동안 소송이 이어진 끝에 1922년 2월 14일 소유권을 되찾았다. 이것이 ‘소안도 토지계쟁사건(土地係爭事件)’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때로치면 엄청난 돈인 1만 4백원을 모아 기존의 중화학교를 발전시켜 1923년 5월 16일에 소안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일본노래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던 공립학교의 학생수는 30명에 그쳤지만, 소안사립학교에는 학생들이 넘쳤다. 1920년 중반에는 멀리 제주도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약 15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토지소유권의 확보와 학교설립은 소안도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궁방전의 소유권을 가짐으로써 소안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굴 땅을 얻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일제의 농장과 지주들이 높은 소작료와 갖은 부역으로 소작민들을 괴롭혔다면, 소안도에서는 땅을 가진 자작농이 늘어났다. 더구나 이 자작농들은 13년 동안의 오랜 소송을 통해 땅을 얻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달은 농민들이었다.


농민만이 아니라 어민들도 섬 지역의 특성상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바다에 경계선을 긋고 각자의 소유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어장은 공동체의 토의와 회의를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촌에서는 마을총회와 어촌계 총회를 통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결정되고 있다. 소안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김양식으로 유명한데, ‘단’이라는 특유의 공동어장을 운영했다. 자연산 톳이나 미역 등을 채취하고 공동분배하는 조직인 ‘단’은 한 마을 내에 같은 수의 가구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공동성은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것 역시 이런 공동체의 분위기를 반영했을 것이다. 공동의 이익을 활용하는데 있어 교육보다 중요한 사업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지금도 전 세계에서 공정무역을 통해 많은 학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소송을 이끌었던 4명의 면민(面民)대표들은 자신들의 송덕비를 대신에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고 주민들은 이에 찬성했다. 1913년에 설립되어 항일사상의 씨를 심던 중화학원을 발전시킨 소안사립학교에는 저항적인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도 완도의 근처 섬들만이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몰려들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미신타파, 조혼폐지, 언어평등, 남녀평등 등을 배운 학생들은 공동체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신간회의 간사였던 송내호,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정남국 등 많은 활동가들이 중화학원이나 소안사립학교를 졸업했다.


소안도가 일찍부터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은 지리적인 위치 탓도 컸다. 일본의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항로가 개발되면서 많은 전라남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자연스레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지식인들도 새로운 사회의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는 각종 강습회, 토론회 등이 열렸고 소안도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소안사립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부르던 ‘소년단가’는 그 정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과 학문으로 직업을 삼고/ 정의와 사랑으로 정신을 삼아/ 같이 먹고 같이 살자/ 평화세계는 우리들의 눈앞에 완연하구나.”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일본 경찰의 대응에서 읽을 수 있다. 1928년 소안도의 활동가 최평산 외 12명이 구속되었는데, 그 심리 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약 100명의 회원으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서울에 있는 모모 청년회와 모든 단체 등과 연락을 취해 소안도에다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그 섬 하나를 완전한 공산주의 이상향을 만들고자 계획하고 착착 그 운동을 실행하면서 한편 면장배척의 봉화로부터 경관에 대한 불언동맹을 조직 실행하고 또 소안학교를 설립하여 도민에게 공산주의적 교육을 실시하였는바 대정 13년에는 도민 거의 전부인 800여명을 회원으로 하고 그 후에도 남자는 청년회에서 여자는 여성회에서 공산주의의 역사상을 선전 실행하여 소안도 안에서는 경찰과 군의 행정이 잘 시행되지 않을 지경까지 되었던 사건이라는바 실로 근래에 드문 조직적 공산주의 운동”(《조선일보》1928년 10월 18일자)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에 맞서는 배움의 연대, 생활의 연대


소안도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취한 첫 걸음은 소안사립학교의 문을 닫는 일이었다. 많은 활동가들을 배출하고 섬 주민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기관이던 소안사립학교는 눈에 가시같았다. 호시탐탐 학교문을 닫을 기회를 엿보던 일제는 1925년 이 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공립학교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주민들은 면민대회를 열어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경일에도 일본 국기를 달지 않는다는 구실을 들어 1927년에 강제로 학교문을 닫았다. 작은 사립학교 하나를 폐쇄하기 위해 일제는 경찰병력을 소안도에 풀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3인 이상이 모이는 것과 곤봉같은 무기휴대도 금지되었다.


작은 사립학교 하나에 왜 이토록 일제가 많은 신경을 썼을까? 그것은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공간을 넘어 생활을 나누고 공동체의식을 기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한 명이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소안도 자체가 하나의 학교로서 함께 배우고 생활하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기운을 만들었다. 그런 장이었기에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운동을 이끌었다.


배움과 생활의 공동체가 가진 중요성은 소안사립학교 출신 활동가들이 조직했던 단체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4년에 송내호가 만든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는 완도만이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까지 조직망이 이어진 전국 조직이었다. 의를 지켜 서로 가까이한다는 그 이름부터가 공동체성을 반영하고, 계라는 전통적인 생활조직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수의위친계는 특별함을 지녔다.


1919년 3․1운동이 지난 뒤 1920년 4월에 송내호, 정남국 등은 마을주민 100명을 회원으로 모아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를 만들었다. 이 배달청년회는 마을자치단위였던 리(里)를 중심으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1924년에는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결성되어 공동경작계와 공동어장계를 만들어 공동노동에 힘썼다. 그리고 독서회와 강연회를 열고 생산조합방식으로 협동노동을 실시했다. 노동대성회는 당시의 사회주의노선과 달리 천도교 노선의 조선농민사가 추진하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렇게 소안도는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조직형태를 근대적인 사상과 결합하는 실험장이었다. 계급노선과 공동체노선이 서로 어울렸고 그 속에서 강력한 연대의 힘이 만들어졌다.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1925년 창립)와 ‘살자회’(1928년 창립)는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함”이라는 강령을 결의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이런 어울림과 연대를 반영했다. 그리고 전남 지역과 잦은 교류를 갖던 사상단체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함께 수용했던 서울청년회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배움과 생활의 공간이 일치했기 때문에 학교 폐쇄에 대한 저항도 거셌다. 심지어 전라남도 사람들이 조선 거주민의 절반을 차지하던 일본 오사카에서는 800명의 일본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4,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제폐교사건을 규탄하며 제국의 심장부에서 최초로 조선총독정치를 비판하는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소안도 사람들도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고 야학에 보내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공간의 일치를 지켜갔다.


이런 공동체에서 연대는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누가 회의했다’였다고 한다. 사실 회의는 사회주의자들의 특징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촌회나 동회, 계 등 여러 공동체 조직에서 회의는 일상화되어 있었고 서로의 삶이 얽혔다. 그 속에서 연대는 자연스러운 힘이었다.



공동체의 연대와 저항의 망


해방 이전 한반도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생활 속에서 연대했다. 농민들의 혁명역량은 의식적인 사상학습만이 아니라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노동관행과 공동체를 디딤돌 삼아 성장했다. 일본인 대지주에게 저항하고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마을의 집단적인 노력으로 가능했다.


소안도만이 아니라 전북지역의 농민운동은 ‘촌계(村契)’나 ‘동계(洞契)’같은 전통적인 자치조직들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런 계를 디딤돌 삼아 농민협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했다. 소작민, 자작농만이 아니라 지주들도 이런 조직에 속해 있었고, 마을학교를 세우거나 행사를 치르는데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계나 교육기관에서 제명되거나 쫓겨났다.


농민사회에서 연대는 공동체의 연대를 뜻했고 이는 강력한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 국가나 자본이 침투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려 해도 이런 연대의 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정부가 자치조직을 파괴하고 농협과 수협, 축협을 만든 이유는 이런 연대의 망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런 공동체의 연대가 계급간의 연대, 전 세계적인 연대라는 더욱더 보편적인 연대로 발전하는 건 당시도 운동의 과제였다. 허나 1923, 24년의 전라남도 무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공동체의 연대를 디딤돌 삼아 전국적인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던 소작민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不納同盟)을 만들고 목포까지 원정을 나와 시위를 벌이자 전국적인 지지가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연대의 틀은 의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확장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연대를 외치는 목소리는 높지만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틀이나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는 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생활, 공동노동을 가능하게 했던 과거의 공동체는 모두 파괴되거나 국가, 자본 내로 흡수되어 버렸다. 지금 농민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농협의 틀에, 노동자들은 자본이 관리하는 개별 공장의 틀에 갇혀 버렸다. 소안도도 다르지 않다. 외지의 사람들이 몫 좋은 곳의 땅을 대부분 차지했고, 소안도의 주민들도 대부분 농협이나 수협을 통해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대회의가 꾸려지고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해 연석회의가 꾸려지지만 그 힘은 약하기 그지없다. 관계망이나 공동체가 없으니 일상 속에서 서로 힘을 모으고 연대하는 게 아니라 연대 자체가 또 다른 일이 되어버렸다. 가뜩이나 바쁜 일상 속에서 따로 연대할 시간과 고민을 내야 하니 힘들고 어렵고, 그러니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2009년 9월 민주노총부산본부가 만든 노동자생협은 아직 그 미래를 낙관할 수 없지만 중요한 첫걸음이다. 노동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노동조합과 농민회가 관계를 맺고, 노동조합과 지역주민들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장을 통해 교육생협, 의료생협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지역 내에서 생산․소비가 순환되는 경제체제가 구성된다면, 그것은 국가나 자본이 쉽게 끊을 수 없는 강한 연대, 강력한 저항의 망을 만들 수 있다.


먹고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생겨나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며 함께 공유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런 곳에서는 옆집 김씨 아줌마가 부당하게 해고되고 박씨 아저씨가 전셋집에서 갑자기 쫓겨난다면, 마을 전체가 그 일에 관심을 둘 것이다. 고구마줄기처럼 한 마을이 엮어져 외부의 힘에 맞서려 들 터이니 누가 감히 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려 할까?


새로운 세상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더불어 사는 삶에 숨겨져 있다.



※ 참고한 자료


김준, “해방의 섬에서 빨갱이의 섬으로”, 《오마이뉴스》2005년 8월 17일자.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소안항일운동사료집』(瑞寶印刷株式會社, 1990)

송윤경, “소안도 항일운동사, 전설에서 역사로”, 《뉴스메이커》 737호(2007년 8월 14일자)

정근식․김준 공저, 『해조류 양식 어촌의 구조와 변동』(경인문화사, 2004)

현정길, “노동자생협을 통한 노동운동”, 《녹색평론》 제 110호(2010년 1~2월호)

홍영기, 『1920년대 전북지역 농민운동』(한국학술정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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