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왔지만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우리 각시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각시의 인연으로 글로만 접했던 인권운동 사랑방의 박래군, 류은숙같은 사람들과 만나 얘기도 나누고 술도 한잔씩 나누게 되었다. 마침 인권운동이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서로 얘기를 섞을 기회도 잦아졌다. 더구나 우리 각시는 박사모(박래군을 사랑하는 모임)의 주요회원이기도 해서 래군이형이 수배를 받던 중에 순천향대병원이나 명동성당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래군이형이 출소해서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420일간의 불복종과 세상살이'라는 제목의 토크쇼(?)이다. 제 2의 용산이라 얘기되는 신촌의 두리반에서 진행된다. 간간이 만나 얘기를 들어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얘기를 나눌지 기대된다. 막걸리 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자리이고 수익금은 전액 두리반에 기부된다니 한번씩 찾아서 얘기도 듣고 막걸리 한잔 나누면 좋겠다.



지난 6월 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 13회 인권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장소사용을 허가했다 취소하고 경찰이 무대설치를 방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화제는 개막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개막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용산만이 아니라 흑석동, 성남 등 전국 곳곳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4구역에서만 약 47조원의 엄청난 이윤을 볼 수 있으니 힘 있는 자들은 악착같이 개발을 하려 든다. 세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발계획, 그들을 위협하는 용역깡패, 용역의 불법적인 활동을 묵인하는 공권력, 한국사회에서 40년 이상 반복되어온 야만이다. 철거촌은 한국의 게토이자 수용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에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풍경을 기록한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이 살인마가 평범한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했다고 보면서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생각 없이 법과 명령을 따르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재판정에 세운 것이 일종의 정치쇼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비극의 책임은 아이히만만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과 그들의 이웃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와 협력해서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내고 심지어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과 이웃들이었다. 아렌트는 이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나치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나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을 보았다. 철거민들을 끌어내고 방패로 찍는 전경들, 6명의 죽음을 책임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찰과 그들을 사면한 검찰, 그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히만이고 우리 시대의 무사유를 대표한다.

그와 함께 나는 우리 각자의 아이히만도 발견했다. 그 이웃들이 유대인을 외면했듯이 우리 역시 함께 살던 주민들이 철거민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일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인하지 않았던가.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부조리를 거부할 인간 최후의 권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았던가. 아직 시신을 모시지도 못한 유족들의 절규에 귀를 막지 않았던가.

강력한 야만의 힘을 꺾으려면 우리 자신이 문명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희망이 우리 내부에서 싹틀 수 있도록 인간이길 포기하지 말고 고통받는 타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되묻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서울 시내 곳곳에는 광장이라는 이름을 단 공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시청 앞에 위치한 서울광장도 그런 공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요즘 많은 시민들은 그곳을 광장이 아니라 '차벽'으로 둘러싸인 공터로 여긴다.
사진에서 드러나듯이 차벽으로 둘러싸인 서울광장은 그냥 잔디가 깔린 공터일 뿐이다.
쥐새끼 한마리 지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히 쌓은 차벽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공터이다.
굳이 경찰청에 '광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줘야 할런지 모르겠으나 혹 모르고 그럴 수 있으니 설명하자면  광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브리태니커] 광장: 개방된 장소에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
[국립국어원] 광장: 1.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 터.
                           2.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이 모여 이용하고 뜻을 펼칠 수 있는 장이다. 그러니 광장에서 사람들이 추모제를 열거나 집회, 문화제를 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서울시와 경찰청, 정부는 폭력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서울광장 사용을 막아왔다.
경찰이 막지 않는다면 폭력시위가 벌어질 가능성 자체가 없을 터인데, 오히려 무리하게 시민들의 광장 진입을 막아서 폭력을 유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서울광장 앞에 설치된 노대통령 분향소까지 강제로 철거하는 만행마저 일삼고 있다.

시민들이 쓸 수 없는 공간을 광장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이제부터 서울광장은 서울광장이 아니라 서울공터라 부를 일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올해로 제 13회를 맞이하는 인권영화제는 내일인 6월 5일부터 3일간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불과 행사 이틀을 앞두고 불허 통보를 했다.
문장이 쓸데없이 길고 비문투성이인 것은 그냥 넘어가자(어차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길게 나열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사용을 불허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황당하다.
시민들이 쓰기 위해 광장이 있는 거지, 광장을 위해 시민들이 나가야 하나.
그러면 서울광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저 파란 잔디를 보호하기 위한 환경주의자 오세훈, 이명박씨의 마음인가?

아무래도 서울시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서울시는 "영화 상영작 다수가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영화제가 불법 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승인 취소 이유를 밝혔다.
당연히 인권영화제에는 정치적인 내용의 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아니 인권 자체가 정치적인 주제이니 당연히 인권영화제는 정치적인 내용을 다뤄야 한다.
인권영화제에서 정치적인 영화를 빼라고 하면 무슨 영화를 틀 것인가?

이 역시 솔직하지 못한 답변이다.
아마도 서울시나 정부의 마음은 또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제 13회 인권영화제의 개막작품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개발에 맞선 그들의 이야기"이다.
소위 용산참사에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유가족들의 고독한 싸움을 다룬 영화다.
자신들이 애써 잠재운 사건을 다시 물 위로 건져 올려 다루고 뉴타운과 재개발같은 삽질이 다시 공론의 장에 오르니 서울시나 정부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권영화제는 무료로 진행되어 누구나 그 영화를 감상할 수 있으니 무조건 영화제를 막을 수밖에.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용산은 잊혀지지 않고 서서히 정치적인 의제로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가 평화미사를 드려온 데 이어,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가 용산현장을 방문해 분향소를 찾았다.
종교계까지 움직일 정도로 민심은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광장을 가로막고 행사를 불허하는 것으로 이런 민심을 막을 수 있을까?
광장을 막을테면 막으라.
광장을 공터로 만들 수는 있어도 시민의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되살아난 정의의 불씨가 부조리한 권력을 무너뜨릴 날은 올 것이다.
 

지난 4월 29일은 용산참사 100일째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상황이 어떠했건 5명의 주민과 1명의 경찰이 무리한 진압계획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사업비만 28조원에 달하는 큰 사업에, 역세권 개발을 통해 수조원의 개발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대기업의 욕심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욕심에 빌붙은 용역회사와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정부의 욕심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욕심이 대화를 가로막은 상황에서 용산참사는 한국사회의 다른 개발사업들이 그렇듯이 ‘예고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건만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다. 잠깐 들른 용산참사의 현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참사가 일어난 건물에는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경계를 섰고, 뒷건물인 촛불미디어센터 레아에는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용산 유가족과 범대위 대표단은 사건현장에서 노숙농성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어떤 해결방안이나 소통의 지점 없이 농성은 22일을 넘기고 있고, 순천향병원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계속 안치되어 있다.


물론 그동안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용산 범대위의 김태연 상황실장이 구속되었고, 박래군 공동대책위원장은 사전구속영장을 받았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군포연쇄살인사건을 활용해 용산사건을 무마하라는 이메일을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보냈다. 용산제 4구역 재개발조합은 유가족과 전철연이 불법점거, 철거방해를 하고 있다며 8억 7천만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국민참여재판은 무산되었고, 변호인단은 검찰이 수사기록의 일부를 공개하지 않자 재판에 불참했다.


이명박 정부가 정말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정부라면 이런 극단적인 대립을 해소할 방안을 스스로 마련해야 옳다. 그리고 용산참사를 가져온 원인인 일방적인 재개발정책을, 거주민에게 불리한 개발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옳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전혀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용산참사를 불러온 제4구역만이 아니라 제 2, 3구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재개발정책이 강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타운으로 지정된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 세입자나 거주민들이 참여할 방법이나 재개발조합을 민주화시킬 방법, 폭력적인 철거를 막을 방법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집이 생활의 터전보다 재테크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용산참사는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태라면 용산참사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는 한국사회의 미래이다. 그런 점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지은 조세희 작가는 “곤봉이나 군대의 총만이 폭력은 아니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지 않고 놔두는 것도 폭력이다.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는데도 그냥 지나간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용산참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관련된 사람들을 힘으로 몰아붙여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다. 이미 철거가 진행된 폐허의 자리에 번지르르한 건물이 들어서면 시민들이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라 정부는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거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을 짓밟아 성공한 사람,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이 두 다리 쭉 펴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런 사람들이 성공의 모델로 보이지만, 그런 사회에서는 힘과 돈을 가진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도 맘 편히 살 수 없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고 이 사회가 제 갈 길을 찾으려면 용산참사라는 사건을 넘어서야 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이 편히 쉬고, 병원에 갇힌 사람들이 편히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세상, 돈을 내세운 개발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우리는 용산참사라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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