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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1 3․1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
posted by 몽똘 2012.03.01 11:17

대안지식연구회 이름으로 <인문정치와 주체>라는 책이 지난 주에 나왔다.
거기에 실은 글인데, 3-1운동 기념으로 블로그에 올린다.
운동에 대한 기억과 인식이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구조를 바라보는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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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의 사건은 일제 식민지를 살아가던, 그리고 강압적인 권력에 억눌려 신음하던 많은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3․1운동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라 칭했다. 그리고 사상가 함석헌(咸錫憲)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우리는 3․1운동을 유관순 누나의 태극기 사건,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지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건,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사회운동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해석도 엇갈린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의혈(義血)은 조금도 막히거나 방해되는 바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비극을 겪었는데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자 씨의 역사를 알리는 사건이었을까?

 

 

1. 3․1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불리는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이미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화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첫번째 통감으로 부임했고, 각 부의 차관을 모두 일본인이 차지했다. 13도의 사무관도 일본인으로 대체되었고 한인 경찰 250명이 해임되고 일본인으로 대체되었다. 통감부가 모든 법관을 임명했고 사법권을 행사했다. 그러니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모두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일제에 대한 민중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해산된 군대의 군인들과 지방의 유림(儒林)들은 과거 외국군대가 침입하면 등장했던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라 무기를 들고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자 일본 통감부는 이런 저항을 철저히 억압했고 1909년 9월, 10월에는 호남지방에 보병 2개 연대를 파병하고 전함까지 동원해 의병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이처럼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은 매국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저항을 총칼로 억누르고 이루어졌다.

완전히 권력을 차지하자 일제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경찰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고 그들의 권한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헌병과 경찰의 수는 매년 늘어나 1910년 653개, 2,019명이던 헌병과 481개, 5,881명이던 경찰의 수는 1918년 9월 말이 되면 헌병대 1,048개, 8,054명, 경찰관서 738개, 6,287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그리고 그 수에서 드러나듯 일제는 경찰이 아니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다. 그러니 식민지의 일상은 치안이 아니라 전쟁상태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은 범죄를 단속하거나 첩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국경세관업무, 산림감시, 민적(民籍)업무, 검역․방역, 묘지단속, 노동자 단속, 일본어 보급, 농사개량, 도박 및 무속, 매음부, 풍속 단속 등의 업무까지 맡았다. 그러니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들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행정체계도 완전히 바뀌었다. 일제는 동학혁명, 의병봉기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자치적인 공동체가 식민지 통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각 도장관을 친일파로 임명할 뿐 아니라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지방제도도 바꿨다. 이미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는 마을 단위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의 역할을 폐지했고, 1914년 ‘도(道)의 치관할구역(置管轄區域) 및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名稱位置管轄區域)’에 관한 총독부령 제 111호는 12부 317군 가운데 전체의 37%인 1부, 121군을 통폐합하고 새로 1부, 24군을 만들어 12부, 220군으로 조정했다. 그 뒤에도 지방행정통폐합은 계속되어 1910년도에 68,819개였던 동리가 1916년도에는 29,383개, 1918년도에 28,277개 동리로 줄어들었고, 이는 자치적인 동리가 행정적인 면으로 흡수되는 것을 뜻했다. 이와 더불어 각 마을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던 마을이름도 ○○동이나 ○○리로 획일화되었다. 또한 총독부는 부군면을 통합할 때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을 면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로 흡수하려 했다. 일제가 추진한 행정체계개편은 중앙의 총독부와 지방의 면단위 통치기구가 수직적인 질서를 이루며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정체계만이 아니라 사법체계도 일제 권력을 위해 재편되었다. 1910년 12월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경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1911년도에 12,099건이었던 즉결처분은 1918년도에 71,279건으로 약 6배 가까이 증가했고, 처벌인원도 21,288명에서 94,640명으로 증가하여 4.5배 가량 증가했다. 그리고 1912년 3월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는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허용했다. 그러자 태형의 비중은 매년 증가하여 1916년에는 그 비중이 46%에 달했다. 이런 법률들에 따르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지배체제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 지배를 거스르는 학교나 언론은 모두 폐교되거나 폐간되었고, 일본을 칭송하는 어용신문인 경성일보 등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1913년의 ‘의생규칙(醫生規則)’은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 만들었고 의생면허도 20세 이상으로 2년 이상 의업에 종사한 자만을 대상으로 발급해서 상당수의 한의사들이 의료체계를 떠나게 했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대륙으로 진출할 정치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창 성장하던 일본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곳이자 일제의 상품시장 역할을 해야 했다. 무엇을 심고 기를 것인지도 총독부가 결정했고 한국의 공업은 억제되었다. 일제는 일본의 방직산업을 위해 ‘면화채종포(採種圃)’를 설치해 미국면화를 재배하게 했고 ‘종묘장관제(種苗場官制)’를 공포해 일본 종자를 강제로 배급했다. 모를 심을 종자부터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까지 매겼다. 뽕나무 재배를 강요하고 지세, 호세, 시장세,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이런 와중에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 사회에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했고 공유지를 박탈했다. 1919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했고, 많은 농민들이 소유권을 잃었다. 자기 땅을 농사짓던 농부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들은 그 소작마저 잃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었다.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땅을 빼앗고 부당하게 국유지로 편입시킨 땅을 1912년 10월 30일 ‘역둔토특별처분령(驛屯土特別處分令)’을 공포하여 동척(東拓)과 일본인에게 팔아 한국농민을 착취했다.

그리고 1910년 12월 ‘회사령’은 한국인이 “법률상·경제상의 지식·경험이 부족하여 복잡한 회사조직의 사업을 경영할 수 없고, 일본자본가 또한 한국 실정을 몰라 예측 못한 손해를 입을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즉 총독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사를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1912년의 ‘조선관세정률령’에 따라 수입상품에 대한 관세도 매우 낮았다. 1914년 5월에 공포된 ‘신농공은행령’과 ‘지방금융조합령’은 금융자본까지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17년부터 물가가 빠른 속도로 올랐고, 특히 쌀값은 1919년 1월에 거의 두 배로 올랐다. 이렇게 민생이 어려워지자 민중의 불만도 빠르게 늘어났고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한민족에게 자결권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황제가 1월 21일 갑작스레 서거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일제는 식민지를 수월하게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고 사람들의 일상을 철저하게 지배하려 들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단순히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해 조선왕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들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꿈꿨다.

 

 

2. 누가 어떻게 운동을 일으켰는가?

 

3․1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은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포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된다. 민족대표들은 마침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종의 장례식날인 3월 3일을 봉기일로 정했으나 일제의 눈을 피해 3월 1일로 그 날을 앞당겼다. 일본쪽 자료를 따라도 3월 1일부터 약 두달 동안 1,180회의 시위가 벌어졌고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내외의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정점을 이뤘던 3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는 하루에만 50~60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참여인원도 많아 서울에서는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지방에서도 만명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규모만큼 희생도 커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 경찰과 헌병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보통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의 노선에 따라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기록을 보면 아래의 <표1>에서 드러나듯이 폭력적인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표1> 각도별 투쟁양태(폭력․비폭력)(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6)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경북

경남

전북

전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3

14

2

2

 

 

2

 

 

 

 

 

 

 

2

8

4

3

1

10

6

 

3

1

3

 

3

1

18

48

35

13

1

 

3

 

3

 

2

6

 

1

4

 

2

7

3

1

3

 

 

 

10

2

2

 

 

 

2

1

1

1

6

1

10

3

7

15

7

8

19

2

8

38

15

 

28

3

4

2

6

10

 

 

5

 

9

2

 

13

24

4

2

1

4

2

1

 

6

 

2

1

 

39

90

3

8

5

7

24

11

7

11

5

10

2

8

 

23

10

19

11

1

15

1

1

14

1

13

1

2

 

9

8

9

4

5

3

1

 

12

 

10

 

 

 

23

15

17

34

10

25

4

13

26

5

17

1

9

 

2

1

1

1

 

3

 

1

 

 

 

 

 

 

 

 

 

 

 

1

 

 

1

 

 

 

 

 

2

4

 

7

4

2

2

13

9

1

1

 

4

 

 

 

 

 

 

 

 

1

1

 

 

 

 

 

 

 

 

 

1

 

 

 

 

 

 

 

 

1

 

 

 

 

1

6

 

3

 

 

 

 

7

0

56

14

27

14

9

34

1

4

27

15

26

12

5

14

38

12

11

6

19

8

4

0

21

8

18

5

2

51

127

23

38

50

32

72

27

45

83

61

71

54

44

21

20

142

31

22

 

69

60

230

112

61

199

9

2

 

2

1

18

244

166

778

비율

22.4

77.6

26.7

73.3

35.9

64.1

46.5

53.5

18.3

81.7

21.4

78.6

34.6

65.4

 

<표1>에서 드러나듯 3․1운동은 서울과 북쪽 지방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쪽의 운동은 잦아들고 남쪽 지방의 시위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그 운동의 형태는 각 지방의 상황에 따라 달랐고 때로는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를 불태우는 폭력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황해도 수안의 시위, 경기도 안성군 원곡․양성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의 시위를 ‘전국 3대 폭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시위에서 민중들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거나 경찰주재소를 방화하고 면사무소를 점거하거나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제 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다. 경기도에서만 경찰관서 17개소, 주재소 12개소, 군청․면사무소 35개소, 우편소 2개소 등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외에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경남지방에서는 경찰관서 15개소, 헌병분견소 7개소, 군청․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등이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81명이 사망했고 2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54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니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으로 3․1운동의 진행과정을 분석하기는 어렵다.

3․1운동이 시작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 고종의 사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작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계기였을 뿐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민중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이미 화약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가 3․1운동 이후 조사한 내용을 보면 그 불만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①일본인은 리비(理非)의 여하에 불구하고 즉시 구타하는 버릇이 있다. ②양반, 유생에 하등의 특권이 없음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③각종의 행정시설이 번잡한 일. ④산업의 장려는 민의(民意)에 반하고 또한 강제적인 점. ⑤제세(諸稅) 징수의 부담이 과중하고, 또 무엇에나 세를 과하는 그 고통은 오히려 한국시대의 폭정보다 못하다. ⑥부역(賦役)이 과중한 것. ⑦인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갖가지 공사를 하는 일. 관에서 멋대로 인민의 토지를 도로로 만들고 사후에 강제적으로 기부시키는 따위. ⑧공동묘지는 고래의 관습을 돌보지 않고 규칙을 발표하여 이행하였기 때문에 심적인 불평이 적지 않고 자연히 원망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⑨행정관리는 조선인을 대하는데 있어 압박으로써 임하고 오만, 불친절하며, 어쩌다 상응되는 사정에 대하여 의견을 말해도 흘려듣고 상관에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정상달(下情上達)이 전혀 불가능하여 민정을 개진(開陣)할 길이 없다. ⑩산업 장려에 대한 불평은 민도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일의 성공을 서두른 결과 일률적으로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인민의 고통이 심하다. 토지 없는 자에 뽕나무 묘목을 강제로 분배하고 대금을 받아내기 때문에 인민은 이것을 땔감으로 하여 대금을 지불하며, 혹은 죽은 묘목을 분배하고 대금을 독촉하거나, 가마니 제조를 강제하여 한 호(戶)당 1개월에 몇 매씩 만들어 내라고 엄명하여 독촉하기 때문에 인민 중 자기가 만들지 못하는 자는 부득이 매월 타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제납(提納)하고 있다. 이런 일을 호소해도 관리는 조선인의 말을 흘려듣는다. ⑪오늘날의 행정은 모두 규칙 뿐으로, 무슨 일에나 규칙에 위반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어 번루(煩累)를 느끼는 바 크다.”(이정은, 2009: 78). 따라서 3․1운동은 지도자에 이끌린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의지가 터져나왔던 운동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도 매우 다양했다. 식민지의 지식인만이 아니라 많은 농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했다. 아래 <표2>를 보면 그 다양함이 잘 드러난다.

<표2> 3․1운동 수감자의 계급․계층별 구성(3.1~5.31)(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38)

 

경기(서대문,인천)

강원

(춘천)

충남(공주)

충북(청주)

함남(함흥, 원산)

함북(청진)

평남(평양, 진남포)

평북(신의주)

황해(해주)

경북(대구)

경남(부산, 마산, 전주)

전남(광주, 목포)

전북(전주, 군산)

농민(일부지주포함)

884

(46.3)

81

(77.1)

325

(78.9)

119

(70.0)

502

(65.7)

54

(67.5)

761

(62.7)

289

(52.5)

623

(66.6)

698

(64.9)

408

(54.1)

80

(32.3)

145

(49.7)

4,969

(58.4)

노동자

125

(6.5)

1

(1.0)

3

(0.7)

1

(0.6)

20

(2.6)

2

(2.5)

47

(3.9)

13

(2.4)

12

(1.3)

59

(5.5)

25

(3.3)

12

(4.8)

8

(2.7)

328

(3.9)

지식인․청년학생

교사

학생

416

4

31

24

83

4

134

80

51

149

87

93

70

1,226

(14.4)

종교인

103

1

3

0

11

0

26

24

19

32

43

2

3

267

(3.1)

기타자유업자

57

1

12

8

21

3

30

20

40

23

40

12

16

283

(3.3)

576

(30.1)

6

(5.7)

46

(11.2)

32

(18.8)

115

(15.1)

7

(8.8)

190

(15.9)

124

(22.0)

110

(11.8)

204

(19.0)

170

(22.5)

107

(43.1)

89

(30.5)

1,776

(20.8)

상공업자

상업종사자

136

11

23

10

86

13

110

49

96

53

76

22

33

718

(8.4)

기타자영업종사자

31

2

2

1

9

2

31

27

38

10

8

5

7

173

(2.0)

공업종사자

98

2

9

3

26

2

19

22

29

36

22

7

8

283

(3.3)

265

(13.9)

15

(14.3)

34

(8.3)

14

(8.2)

121

(15.8)

17

(21.3)

160

(7.6)

98

(17.8)

163

(17.4)

99

(9.2)

106

(14.1)

34

(13.7)

48

(16.4)

1,174

(13.8)

무직자

61

(3.2)

2

(1.9)

4

(1.0)

4

(2.4)

6

(0.8)

0

(0.0)

55

(4.5)

27

(4.9)

27

(2.9)

16

(1.5)

45

(6.0)

15

(6.1)

2

(0.7)

264

(3.1)

1,911

(22.5)

105

(1.2)

412

(4.8)

170

(2.0)

764

(9.0)

80

(0.9)

1,213

(14.3)

551

(6.5)

935

(11.0)

1,076

(12.6)

754

(8.9)

248

(2.9)

292

(3.4)

8,511

(100.0)

 

<표2>에서 드러나듯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농민들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그 비율이 58.4%나 된다. ‘조선태형령’에 따라 감옥에 갇히지 않고 매를 맞고 풀려난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농민들의 참여비중은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지식인과 학생이 그 다음으로 20.8%를 차지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13.8%나 참여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비중은 3.9%에 불과하지만 당시 공장에서 노동하던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심지어 거지와 기생까지도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계급·계층적인 참여 외에 종교단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은 천도교와 기독교, 유림(儒林)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는 문중(門中)이 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따라서 3․1운동은 계급이나 계층, 종교의 구별 없이 전민중적인 저항을 조직했다고 얘기될 수 있다.

참여한 계층이 다양했던 만큼 시위의 방식도 다양했다. 길거리나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을 뿐 아니라 한밤중에 산봉우리에서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시위도 벌어졌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만세를 부르거나 인근 지역을 돌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세를 부르다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시위를, 학생들은 동맹휴학, 노동자들은 파업시위를 벌였다. 경남 창원의 경우 주도자들이 ‘십인장(十人長)’, ‘이십인장(二十人長)’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감고 시위 군중을 지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만세꾼은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어’ 원거리 시위에 참가하는 의도적인 시위군중인 동시에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봉기를 유도하거나 지역적 연계를 꾀하는 이른바 ‘바람몰이꾼’” 역할을 맡았다(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0). 그리고 시위만이 아니라 묘목을 버리거나 부역을 거부하고 납세 고지서를 받지 않고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일본인에게 식량이나 연료 판매를 거부하는 등의 일상적인 투쟁도 함께 벌였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고 ‘대한독립만세’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구가 나왔다. 거리 곳곳은 연설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연설했다(이정은, 2009: 301; 이지원, 1989: 344). 그리고 시위마다 태극기와 각종 선언문, 전단, 경고문, 격문, 포스터 등이 뿌려졌다.

어떤 곳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이 대표적이다. 화수리 주민들 중 1집마다 최소한 1명씩이 참여했고 장안면, 우정면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경찰 주재소에 불을 질렀으며 주민들을 모욕하고 괴롭히던 일본경찰을 때려죽였다. 이에 일본은 화수리의 마을을 비롯해 여러 마을의 집 30채를 불 지르고 주모자인 차희식, 이영쇠에게 징역 15년형을 내렸고 그 외에도 체포된 사람 약 20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특이한 점은 3․1운동의 시위들이 면사무소나 경찰․헌병주재소같은 공공기관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장터나 거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난 뒤엔 거의 대부분이 공공기관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그곳의 경찰과 헌병들이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몸을 다쳤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공서를 목표로 삼은 것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의지와 더불어 ‘자치(自治)’에의 강한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향촌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했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고, 그런 공격을 과거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구장(區長, 지금의 이장)들이 주도했다는 점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심지어 전남 순천군의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기도 했고, 평안도 의주에서는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민단 사무를 집행하기도 했으며,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미도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접수하고 면사무소를 인수해 약 20일동안 행정사무를 봤다.

일제는 이런 자발적인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때리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서야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민중들을 탄압한 것은 일제의 경찰이나 헌병만이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 소방대들이 도끼와 경찰용 총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들을 습격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제는 모든 힘을 동원하고서야 이런 흐름을 한풀 꺾을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잦아든 듯 보였지만 3․1운동은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을 서서히 형성하고 있었다.

 

 

3. 3·1운동의 발전

 

1890년 동학혁명 때 등장했던 민중(民衆)이란 개념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라고 한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가리킬 뿐 아니라 민족독립과 역사발전의 주체를 뜻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의 영향이라는 지적도 있다(장상철, 2007: 29).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고 이후 전국에 지부가 결성되기도 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농민문제도 중요하게 다루며 소작제도와 일제 수탈을 반대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에는 소작농민들이 <소작인조합>운동을 벌였고 이는 1930년대의 <농민조합>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당시까지도 촌계(村契)나 동계(洞契)같은 자치의 전통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런 연대를 기반으로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민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간의 자율적인 결사체인 계가 지역사회의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만세가 지나간 후에 일어난 것은 강연회였다. 난물이 한번 휩쓸로 지나간 다음에 시커먼 살진 땅에 무수한 싹이 터 올라오듯 삼천리를 뒤흔드는 격동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차차, “아니다, 배워야 되겠더라!”하게 됐다. 그래 일어난 것이 연달아 밀려오는 물결처럼 골짜기를 찾아 든 강연반이요, 그 뒤를 이어 일어서는 학원이었다.”(함석헌, 2002: 127) 실제로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며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1922년 11월말 경남 지방에는 14,115명의 학생이 223개의 야학회와 강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에서는 <혈복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대한독립애국단>과 연계해 활동을 펼쳤다.

농민들도 개별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에 반발하며 차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 이후부터 농민들은 <소작회>같은 조직을 만들어 ‘유보동맹’, ‘불납동맹’, ‘소작권 상실 걸인단’, ‘아사동맹’ 등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부지방에서는 소작권을 박탈당한 소작민들이 공동경작단을 만들어 지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논을 갈고 모를 심어 강제로 경작했다. 그중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농민들이 소요죄로 구속되고 목포로 원정투쟁을 떠나는 과정을 1년 이상 거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3·1운동의 자극을 받아 다양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만주지역에 이주한 백 수십만 한국인 농민들도 국내의 반일봉기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4월에는 이을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등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고, 이후 김좌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결성(1929년)하기도 했다.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만들어짐과 더불어 3·1운동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과거의 봉건왕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그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예를 들어 1916년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의 청년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은 3·1운동을 전후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로 갈라졌져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은 만주, 상해 등지의 민족운동세력과 연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이현주, 2003).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과거 민족주의를 따르던 지식인들도 이제는 아나키즘,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1920년에 만들어진 <사회혁명당>과 1921년 1월에 조직된 <서울청년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사회주의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런 사회주의 활동 속에는 아나키즘도 함께 수용되고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주요한 논거로 활용되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이나 김명식 등은 글과 연설에서 호상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1년에는 아나키즘을 널리 선전하고 실천하기 위한 조직인 <흑로회(黑勞會)>와 <흑색청년동맹(黑色靑年同盟)>이 결성되었다. <흑로회>는 일본에서 박열이 잠시 귀국하여 결성되었고, <흑색청년동맹>은 신채호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아나키즘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3․1운동이라는 민중의 저항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과 사회운동이 손을 잡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러니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판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국사(國史)에는 빠져있지만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들은 자신의 삶과 사회를 새로이 만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4. 3․1운동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동안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민족운동, 사회운동, 자치운동의 순으로 변화해 왔다. 과거 80년대까지는 3·1운동을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해석하고 계급적인 의미를 배제시키려 노력했지만, 80년대부터는 사회운동, 즉 사회주의운동의 시초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비록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 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후의 운동을 발전되었다.

그런데 기존 역사학계가 3·1운동을 일방적으로 찬양했다면, 8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관점을 따르는 평가는 그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조선공산당>의 관점을 따라 3·1운동이 “①일제의 무력적 탄압, ②소련 등 국제적 지원 역량의 부재, ③노동자계급의 미성숙, ④토착자본가의 중도 반단적․타협적 태도, ⑤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할 당의 부재(목적의식적, 조직적 지도의 부재), ⑥부르조아 민족주의자의 외세의존적 태도, ⑦민족해방투쟁과 토지투쟁의 결합 부재, ⑧무장투쟁 전술의 방기 등”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거나 그 운동의 교훈으로 “①민족해방운동의 전투적 참모본부인 ‘혁명적 전위당’이 필요하다는 것, ②민족 부르조아지의 지도는 믿을 수 없으며, 조선의 완전 독립은 전투적인 ‘노동자계급의 영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 ③외세의존의 망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독립은 우리 손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 ④농민의 요구인 토지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여 줌으로써만 전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에 동원시킬 수 있다는 것, ⑤민족해방운동은 광범한 인민대중을 동원하는 조직적․계획적․목적의식적인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 ⑥단순한 정의의 관점에 의한 무저항주의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고 희생성을 띤 전투적 지도이론만이 자주독립의 달성을 보장한다는 것, ⑦나라를 가장 사랑하는 애국적인 계급은 노동자, 농민, 학생, 소시민이라는 것 등”을 지적하곤 했다(지수걸, 1989: 21~22).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의 노선을 따라 농민운동의 보수성을 지적하고 노동자들의 투쟁경험이 지나치게 강조된 감도 없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관점을 넘어 3·1운동의 자치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정은은 다음과 같이 3․1운동의 의미를 평가한다. “3․1운동은 지방사회의 공동체적 힘이 중앙의 조선총독부라는 일원적 권력에 대해 마지막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의 지방사회는 식민지 권력의 강력한 중앙 집권정책에 의해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후 국내의 식민지 해방운동과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등과 같은 변혁운동은 학생층과 같은 조직화된 세력이나 비밀 지하조직 운동으로 전개양상이 전화되었다.”(이정은, 2009: 346) 즉 3․1운동은 지방의 자치적인 힘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맞서 저항했던 운동이라는 평가이다.

지방사회는 해체되었지만 함석헌이 얘기했듯이 지식인들은 이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인식을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층들은 민중을 두려워하며 일제와 결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의 기운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분열되었다고 본다. 1959년 3․1절을 기념하면서 함석헌은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함석헌, 2002: 121)고 지적한다.

3․1운동은 국사에 가려져있던 다양한 자치공동체의 역사를 드러냈고 민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민중의 의식적인 노력은 이후에도 활발히 이어졌지만 일제만이 아니라 내부의 기득권층과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민중의 정치적인 실천들은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고 힘으로 억눌렸다.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은 그 운동을 이끌었던 민중들의 저항이나 그 잠재력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축소시키며 민중의 정치를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저항의 잠재력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한다. 언젠가 억압되고 억눌린 자들은 다시 대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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