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명> 겨울호에 기고한 글이다.
'4대강 살리기'도 재난이지만 '행정구역개편'도 또 다른 재난의 계기가 될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공부를 강요(!)한다.
쇠고기, 대운하, 보, 미디어에 이어 이제는 행정까지...
다음에는 또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보통 행정은 그냥 행정구역이나 행정기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자치와 연관지으려 했다.
최근 글을 읽다 발견한 3-1운동과 관련된 재미있는 관점도 함께 소개했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전국적인 저항을 모색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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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체계라는 오래된 지배도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위기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1894년 부패한 탐관오리에 맞서 일어선 농민들은 나라를 바로잡는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다. ‘그물코를 바로잡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집강소는 잘못된 관행과 행정을 바로잡고 농민들의 자치를 지원하는 공간이자, 신분의 차별을 없애고 토지를 나누어 공평하게 경작해야 한다는 이념을 전하는 공간이었다. 비록 외세에 짓밟혀 무너지긴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전통적인 농민공동체와 정치적인 운동이 결합되어 자치와 자립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 사건은 풀뿌리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민중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반면에 첨단무기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자치와 자립의 기반이 식민지 통치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식민지 전략을 펼치기 전부터 자치공동체를 파괴하려 잦은 지방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행정체계를 바꾸는 것은 인위적으로 생활공동체의 경계를 나누고 합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가로막으려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대표적인 전략이다. 일제가 행정체계를 강제로 통폐합한지 약 10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행정구역 개편이 얘기되는 것은 이런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왜 억압적인 지배권력이 행정체계를 자꾸 바꾸려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제와 군사독재는 왜 행정체계를 바꿨나?

 

어릴 적부터 착실히 국사(國史)를 배워온 우리는 한국을 전형적인 중앙집권형 국가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가면 지방양반들만이 아니라 민중들이 공동체를 이뤄 자기 삶의 기반을 다져 왔다. 두레와 같은 공동체 노동이 활성화되고 계와 같은 상호부조가 발달하면서 민중들의 공동체는 자치와 자립의 힘을 강화시켰다(주강현, 2006; 하승우, 2008).

마을마다 모정(茅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같은 공간이 만들어져 마을의 제사나 회의를 준비했고, 이런 전통은 촌회(村會)나 향회(鄕會)와 같은 마을의 정치기구를 만들고 강화시켰다. 보통 양반들이 농촌공동체를 지배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농민공동체가 정부에 대항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철종 때 괴산에서는 수령의 자의적 결가책정에 대하여 반대하는 향회가 29차례나 열렸으며 각처에서 관의 부조리한 조처에 굴종하지 않고 통문을 돌려 향회를 소집, 단합된 여론을 배경으로 수령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읍소(泣訴)’를 감행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감영에 진정하는 ‘의송(議送)’에 나서는 등 향회는 점차 반관적 저항을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드디어 민란의 온상 구실을 하게 되었다.”(김용덕, 1992) 이처럼 마을에서 농민의 자치적인 정치원리가 봉건적인 지배원리를 서서히 극복해가고 있었기에, 이정은 박사는 “19세기 중앙정치가 60년간 세도정치의 부패와 난맥상을 보일 동안 지방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民亂이라는 형태로 중앙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民權의 성장과 面과 洞里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農民的 鄕村秩序를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이정은, 2009).

따라서 일본은 이런 자치체계를 무너뜨려야만 자신의 식민지 지배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한국정치에 개입하던 1906년 7월, 각의(閣議)에 ‘지방제도개정(地方制度改正)하는 청의서(請議書)’를 제출하고 345개 전국 부군(府郡)을 220개로 대폭 통폐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청의서는 많은 지역의 반감과 저항을 받았고 당시는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던 상황이라 이 제안은 축소된 형태로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이 안으로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의 역할이 폐지되고 군주사(君主事)로 대체되어 마을은 군수의 권력에 종속되었다. 이로써 중앙에서 지역사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배질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고 1914년 ‘도(道)의 치관할구역(置管轄區域) 및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名稱位置管轄區域)’에 관한 총독부령 제 111호를 내려 12부 317군 가운데 전체의 37%인 1부, 121군을 통폐합하고 새로 1부, 24군을 만들어 12부, 220군으로 조정했다. 그 뒤에도 지방행정통폐합은 계속되어 1910년도에 68,819개였던 동리가 1916년도에는 29,383개, 1918년도에 28,277개 동리로 줄어들었고, 이는 자치적인 동리가 행정적인 면으로 흡수되는 것을 뜻했다. 이와 더불어 각 마을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던 마을이름도 ○○동이나 ○○리로 획일화되었다. 또한 부군면을 통합할 때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을 면장으로 임명되었다(이정은, 2009).

당시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로 흡수하려 했다. 일제가 추진한 행정체계개편은 중앙의 총독부와 지방의 면단위 통치기구가 수직적인 질서를 이루며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처럼 일제하의 행정체계개편은 주민편의나 행정의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지배질서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 통합을 목표로 삼는 행정체계개편은 자치질서의 발전보다 그것의 해체를 목표로 삼아 왔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행정체계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바뀐 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부나 군사독재 하에서도 행정은 언제나 중앙권력의 이익에 봉사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하고 면단위 행정을 더 확장시켜 군 단위로 전환한 것도 그 점을 증명한다. 그런 과정에서 26개시 85읍 1,407면의 지방자치단체가 26개시 140군으로 개편되어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자치구역이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리고 1994년 말과 1995년 초의 시군통합 역시 43개의 시와 40개의 군을 통합해 41개의 시로 개편했다(이기우, 2009). 그동안 한국의 행정체계개편은 모두 중앙정부의 구상과 결정에 따랐고, 시민들이 이런 과정에 의견을 제시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자치행정과 주민들이 분리된 것은 공화국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자치의 이념을 담고 있지 않은 우리 헌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자치이념에 적합한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었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그런데 일본헌법 제 93조 2항은 ‘지방공공단체의 장, 그 의회의 의원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관리는,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고, 제95조는 ‘하나의 지방공공단체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의 투표에 있어서 그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국회는 이것을 제정할 수 없다’며 주민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주헌법 제 28조 1항도 ‘각 州의 헌법질서는 이 기본법에서 의미하는 공화적·민주적 및 사회적 법치국가의 제원칙에 부합하여야 한다. 州, 군(Kreis) 및 읍(Gemeinde)의 주민은 보통·직접·자유·평등 및 비밀 선거로 선출된 대표기관을 가져야 한다. 읍에서는 대표기관에 대신하는 읍회의를 도입할 수 있다’며 주민자치의 기본근거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하승우, 2005).

모든 법률의 기본이 되는 헌법이 자치의 이념을 담지 않고 있으니, 행정부는 시민을 언제나 통치의 대상으로 여긴다.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행정은 주민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주민 ‘위에’ 일하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전통을 지켜 왔다. 행정체계 역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따라 변하며 주민들의 삶을 침범해 왔다.

 

 

행정체계개편이 지역발전을 위한 방안인가?

 

2009년 행정체계개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이런 논의가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이미 김대중 정부 때부터 행정구역개편과 관련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역시 2006년 전국을 70개의 광역시로 개편하는 보고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전 정부가 논의에 그쳤다면 이명박 정부는 개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2 광역경제권’ 구상을 발표하며 행정개편의 기본구상을 지방자치보다 경제발전에 맞췄다. 이 구상은 “그동안 개별 광역자치단체별로 시행해 오던 지역전략산업 및 지역개발정책의 중복성 및 비효율성을 방지하고 자원배분 및 사용의 효율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정책”으로 제안되었다(임승빈, 2009).

그리고 2008년 10월 18일 이명박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행정구역개편, 특히 지방의 광역화와 행정계층 축소화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국정과제 역시 앞서의 경제권 구상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행정을 개선해서 지역경제발전을 촉진시킨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행정구역개편을 지역발전전략으로,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업의 유치, 창압, 확장, 보전”으로 접근하는 것은 광역화가 인프라를 구축하고 토지를 공급하며 도시를 재개발하는데 유용하리라 보기 때문이다(배득종 2008). 또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8․15 경축사에서 “100년전에 마련된 낡은 행정구역이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효율적인 지역발전을 가로막는 벽이 되고 있다”며 행정구역 개편을 주장했다. 8월 26일 행정안전부는 이 구상을 이어받아 ‘시․군․구 자율통합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은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이 계획이 자율적으로(?) 통합한 기초자치단체에 특별교부세 50억 지원, 추진사업 인센티브 지원, 기반시설 설치 등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교부금, 인센티브, 기반시설, 이런 내용은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이다. 부안방폐장이나 경주방폐장에서 그랬듯이 중앙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각종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정부가 주민들을 ‘거지’로 여기고 돈으로 유혹하는 이런 한심한 짓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밟아왔기에 현재 국회에는 지방행정체제 개편과 관련해 무려 8개의 법률안이 상정되어 있다. 기초지방자치단체간의 통합을 다룬 2개의 법안(노영민․이범래 의원안)을 제외하면 6개의 법률안 중 4개의 법안(권경석․우윤근․박기춘․허태열 의원안)은 시․도를 폐지하거나 국가기관화 시키고 시․군을 통합할 것을 주장하고, 나머지 2개안(이명수․차명진 의원안)은 도와 광역시, 도와 도를 통합해서 더 광역화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중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현재 광역-기초의 2계층제로 되어있는 자치계층을 단일화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학계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완규 교수는 행정구역개편이 규모의 경제를 이뤄 250억 원의 행정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①시장․군수 및 시․군 의회 선거비용 절감, ②시․군 의회비 절감(의원 정원 감축, 사무처 경비 감축 등), ③민간지원경비․행사경비 등 절감, ④공공시설 통합 설치․운영을 통한 절감, ⑤청사 매각 또는 재활용을 통한 재원 확충, ⑥주민의 경제적 부담 감소라는 부수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박완규, 2008). 그리고 곽상욱 오산자치시민연대 운영위원장은 광역행정이 ①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전자적 접근성 확대라는 서비스 수요의 광역화, ②지역클러스터, 혁신도시와 같은 행정수요의 광역화, ③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업무중복, ④행정의 책임성과 민주성의 확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곽상욱, 2009).

하지만 이기우 교수에 따르면, 지방행정구역만 개편하면 모든 지역발전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는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21세기 국가경영철학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왜냐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지적했던 지역주의를 없애는 방법은 중앙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권한과 재원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지방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지방분권의 강화에 있지 행정구역개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기우 교수는 현재의 방안이 ①소규모 기초자치의 포기, ②소지역주의로 지역공동체의 해체와 지역발전거점의 상실, ③실현가능성의 부족이라는 내용상의 문제점과 함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통합추진이라는 방법상의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본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를 추진하고 주민투표를 배제하는 것은 시기와 절차 모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이기우, 2009).

그리고 하승수 교수는 자치계층 단일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도를 폐지하고 국가지방광역행정청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중앙집권의 강화를 가져온다는 점, ②광역지방자치단체와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사무중복 문제는 사무배분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해결가능하다는 점, ③세계적인 지역간 경쟁격화 현상은 오히려 광역지방자치단체를 더욱 광역화하고 강화할 필요성을 높이고 광역지방자치단체의 폐지는 대도시의 경쟁력 저하를 초래한다는 점, ④단층제 입법사례는 외국에서도 드물다는 점, ⑤급격한 제도변화는 지역의 정체성, 지역발전의 정신적 에너지를 상실케 할 수 있다는 점, ⑥외국에 비해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인구규모가 큰 상황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인위적인 광역화는 생활자치의 포기가 될 것이라는 점, ⑦기초지방자치단체의 광역화는 새로 만들어질 지방자치단체의 명칭과 사무소 소재지 등을 둘러싼 소지역주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 등이다(하승수, 2009).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치계층을 단일화시켰을 때의 문제점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증명되었다. 즉 2007년 7월 특별자치도라는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일원화된 제주도의 경험을 보면 그 문제점은 분명해진다. 2002년에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도 행정개편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2005년 7월 27일 주민투표를 통해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4개의 기초지방자치단체가 폐지되고 1개의 광역자치단체로 통합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은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높았는데(점진안 찬성률 각각 56.4%, 54.9%) 이를 무시하고 전체투표 결과를 따져 통합을 진행했다. 그리고 행정 효율성이 나아지기는커녕 도본청과 의회, 행정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전체의 45%를 차지함으로써 행정의 반응성이 오히려 떨어졌다. 그리고 제주시와 도지사로 권한이 집중되어 지역간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는 반면 주민자치구위원회와 같은 주민자치기능이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행정개편 때보다 이전의 자치 2계층체제가 더 낫다는 응답이 높게 나오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행정체제를 개편하는 것만으로 효율성이 증가하거나 주민만족도가 높아질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하승수, 2009). 2009년 8월 제주도지사의 독단적인 행정을 문제 삼았던 제주도의 주민소환운동은 행정체계 개편이 가져올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행정체계 개편이 계속 주장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인 ‘지방의 재정불균형’과 ‘불균등발전’ 때문이다. 행정체계 개편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리는 “규모의 경제효과로 인한 세출 효율화를 통해 재정지출 증가압력을 제어하고 지자체간 재정력 격차를 줄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원윤희․심혜정, 2008) 이명박 정부는 정치보다 경제논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행정체계개편 역시 이런 경제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개발주의에 그대로 노출되어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모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하승우, 2007). 따라서 학계나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명박 정부는 행정체계 개편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그들만의 개발과 개편, 풀뿌리민주주의의 위기

 

진정 그런 구조적인 불평등을 해결하고 싶다면, 이명박 정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 현상과 그로 인한 ‘내부식민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지방재정이 빈약한 것이 문제라면 국세 비중을 낮추고 지방세 비중을 높일 일이지 행정구역을 통합하고 광역화시킨다고 해서 지방재정이 탄탄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행정체계개편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더욱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의 지방을 내부식민지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고, 더 나아가 지방 내에서도 패권주의가 발생하는 부조리를 지적한다(강준만, 2008).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 현상에 대한 지적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 집중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2009년 행정안전부가 국회에 제출한 지방자치단체 재정자립도 현황에 따르면, 서울, 인천, 전북을 제외한 모든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가 2008년보다 낮아졌고 가장 낮은 지역들은 자립도가 10%를 넘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대전개발연구원의 전국 지역내총생산(GRDP) 자료에 따르면, 1985년 수도권의 지역내총생산이 전체 지역내총생산의 43.3%였는데 2006년에는 전체의 47.7%를 차지해 수도권의 경제집중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지방 내에서 발생하는 지방자치단체들간의 갈등이 수도권-지방의 갈등과 갈수록 비슷해지고, 패권주의가 지방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2004년 기준 경남권 인구의 60.2%가 부산과 울산에 살고, 경북권의 58%가 대구와 포항에 살고, 전남권의 57.2%가 광주와 여수에, 전북권의 49.2%가 전주와 익산에, 충남권의 57.2%가 대전과 천안에, 충북권의 55.7%가 청주와 충주에, 강원도의 50.7%가 춘천․원주․강릉에 산다는 식이다. 이런 집중화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대기업과 서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대부분의 산업과 경제활동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방에서 경제적인 이익의 절반 이상은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강준만, 2008).

따라서 이런 불평등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 행정체계만 광역화한다고 해서 균형발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지금의 분위기를 볼 때 이명박 정부가 수도권을 해체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오히려 광역화를 통해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며 ‘생존논리’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중앙의 기득권 구조와 연결된 개발세력들은 막대한 개발 이익을 노리며 단합할 것이다. 이렇게 행정체계개편은 소수의 기득권층에게만 이로울 뿐 대다수 주민에게는 많은 부담을 안길 것이다.

또한 광역화를 지향하는 행정체계개편은 주민참여, 주민자치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사실상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관변단체가 대거 의회로 진출하며 지역의 공식적인 권력으로 승인을 받고, 여전히 지역의 중요한 의사소통과 정책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보다는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시민들에게는 더욱더 익숙하다(하승수, 2007).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라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의 도입에도 시민들의 참여환경은 결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외국의 좋은 참여제도들도 한국으로 오기만 하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옴부즈만같은 제도들이 이미 도입되어 있지만 전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하승우, 2006).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행정체계개편이 지금 당장은 마을 단위의 풀뿌리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풀뿌리운동의 뿌리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편은 풀뿌리운동이 필요로 하는 주체성장의 ‘과정’과 ‘여유’를 없앨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등장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행정체계개편은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려면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자신이 사는 세계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며 자기 내면에 뿌리내린 본성, 개인으로 고립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본성을 극복하는 여유를 제거할 것이다. 행정의 효율성과 비용절감만을 목표로 삼는 행정체계개편은 풀뿌리 주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행정체계개편이 은밀한 목표로 삼는 지역개발의 열풍은 풀뿌리운동이 준비해온 대안적인 지역사회발전전략을 파괴할 것이다.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내년 지방선거 때 수많은 개발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것은 분명하다. 이런 개발전략들은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의제로 만들어온 주거나 교육, 먹거리와 같은 생활정치의 의제들을, 자신의 삶과 괴리되지 않은 정치를 실현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선진화를 빌미로 삼는 지역간의 경쟁은 각각의 존재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망각시킬 것이다.

따라서 풀뿌리운동은 다소 전문적이고 생활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행정체계개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적인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민주주의의 비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공유지를 박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세금을 걷기 위한 관료체계와 내부의 반란을 막기 위한 공권력이 강화되면서 이제 국가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나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는 낙후되거나 봉건적인 유산으로 매도당하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듯이 행정체계개편을 마음껏 추진할 것이다. 강력한 반대가 없다면 자기 뜻대로 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부이니, 이런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작가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우리 사회를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는 “죽은 땅”이라 정의했다. 이 죽은 땅을 떠나는 탈출구는 달나라로 떠나거나 입주권을 긁어모으는 사나이를 처리할 앉은뱅이와 곱추의 공모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탈주하거나 맞서거나, 둘 중 하나이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H. Zinn)의 말처럼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다행히 우리 역사는 치열하게 맞서 싸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정은 박사는 1919년 3․1운동의 의미를 자치에서 끌어낸다. 최소한 두 달 이상 잔혹한 식민지 권력에 맞서 온 몸을 던지며 싸웠던 한반도의 주민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3․1운동 당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많은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항과 상품경제의 유입, 일제에 대한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일본 식민지 체제의 수립과 일본인들의 유입, 토지조사, 지방행정구역 전면 개편, 폭우처럼 쏟아붓는 각종 세금과 법령, 식민지 관권에 의한 억압과 침탈, 국가 위기가 고조되면서 진행된 천도교와 서양 개신교의 급속한 확장, 민족교육의 억압과 식민지 교육의 보급, 시대 변화에 따른 전통 향촌공동체의 해체 또는 온존 등” 지금 우리처럼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3․1운동은 그런 불안과 공포의 고리를 끊고 자치와 자립의 기반을 다시 바로세우려 했다. 행정체계를 바꿔 공동체의 기반을 허물고 자신의 지배전략을 뼈 속 깊이 심으려던 일제에 맞서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변화의 물꼬를 텄다(이정은, 2009).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3․1운동의 뜻을 이어받은 민중의 저항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 저항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그 저항은 죽은 땅을 다시 살리기 위해 기존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짜야 한다. 한 가지 이슈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대안적 전망을 구성하기 위해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 경쟁이 아니라 보살핌이, 대상화가 아니라 주체화가 그 방향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짐 아이프(Jim Ife)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아이프는 지역사회발전이 정치․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환경․인격(정신적)의 면을 고루 갖춰야 균형잡힌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이프는 산업을 유치하고 지역산업을 조성하며 관광사업에 매달리는 발전전략을 ‘보수적인’ 전략이라 부르며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은행, 신용조합, 지역통화(LETS) 등을 활용하는 ‘급진적인’ 발전전략을 구체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런 전략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동안 배제되어온 주민들이 그 과정에서 의식을 높이고 스스로를 조직화하며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는 정치적인 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문화와 지역문화, 참여문화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주민들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존중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안적인 지역사회발전전략에는 주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식과 욕구가 향상되어야 한다(아이프, 2005). 결국 목표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해야 한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정치모델이 아니라 치열한 운동의 과정이다. 저들이 행정체계를 바꿔 이익을 꾀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런 체계를 넘어설 대안을, 국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공동체를 모색해야 한다. 풀뿌리운동과 사회적 경제운동, 생활정치와 협동조합운동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고, 그 흐름에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자. 그것이 첫 걸음이다.

 

 

참고문헌

 

강준만(2008), 『지방은 식민지다』, 개마고원.

곽상욱(2009). 「광역행정 대두에 따른 한국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연구」, 『한국동북아논총』제 50권.

김용덕(1992), 『신한국사의 탐구』, 범우사.

박완규(2008), 「행정구역 재편의 필요성」, 『지방재정과 지방세』통권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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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윤희․심혜정(2008), 「행정구역 재편이 지방세출에 미치는 영향」, 『지방재정과 지방세』통권 제10호.

이기우(2009), 「시․군 통합 과연 바람직한가?」, 하남희망연대․새세상연구소 공동주최 토론회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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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2006), 『두레: 농민의 역사』, 도서출판 들녘.

짐 아이프 지음, 류혜정 옮김(2005), 『지역사회개발: 세계화 시대의 지역사회 대안 모색』, 인간과복지.

하승수(2007),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현실과 전망』, 후마니타스.

-----(2009), 「제주특별자치도의 경험으로 본 지방행정체제 개편논의의 문제점」, 탐라자치연대 서귀포시 발전전략 토론회 발표문.

하승우(2005), 「헌법이라는 틀은 자치를 담아낼 수 있나?」, 함께하는시민행동 주최 헌법 다시읽기 토론회 발표문.

-----(2006), 「정부의 주민투표제도 악용과 시민사회의 역할」, 『시민사회와 NGO』 통권 4권 제 2호.

-----(2007), 「한국의 지역사회와 새로운 변화전략의 필요성」, 『경제와 사회』 통권 75호.

-----(2008), 「삶으로서의 민주주의」, 『녹색평론』 통권 101호.


지난 토요일 서강대에서 열린 '한국사회체제론을 다시 생각한다' 심포지움에 다녀왔다.
체제론 블로그: http://socialsystem2009.textcube.com/

지금 한국사회의 상을 드러낼 치열한 장일 줄 알았는데, 논쟁은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낡은 주장의 반복에 가까웠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97년 체제', '08년체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 '신자유주의'라는 말만 귀를 맴돌 뿐, 지금 우리가 부딪치는 삶의 단면을 드러낼 수 있는 날카로운 사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체제론'의 탈을 쓴 '선거전략'에 가까웠다.

심포지움에 참여했던 발표자, 토론자들과 나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첫째, 그들이 맑스주의적 관점에 서 있다면, 나는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자 했다. 과거의 낡은 논쟁을 되풀이하자는 게 아니라, 심포지움의 주된 논지는 국가를 전제하고, 그걸 진보적인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한국의 중앙집중성과 산업화전략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만들어져온 구조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체시켜야만 진보적인 발판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공동체를 택한 건 그것이 작아서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만 국가를 해체하고 자치,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자치, 자립의 기반을 강조했던 건 불쌍한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변화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포지움에 참석한 사람들의 생각은 '민중과 함께'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불쌍한 노동자, 불쌍한 비정규직, 불쌍한 빈민을 위해서 진보정치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결코 진보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결국 자신들의 진보적인 구상으로 민중들의 삶을 끼워맞추는 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두 가지 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심포지움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한국사회를 분석할 거대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거대담론은 그냥 크기 때문에 거대담론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크기 때문에 우리 삶과 더욱 밀착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검사비용을 무료로 만들고 타미플루를 무상공급한다고 해서 '신종플루'의 공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주장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조류독감, 신종플루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병은 기존의 생태계 질서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구조적이면서도 개인적인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위기, 식량위기, 생태계위기라는 엄청난 해일 앞에서 왜 공동체가 희망의 대안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담론이 필요하다.
그 거대담론은 우리 삶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그 파괴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겨울방학이 오면 그 담론을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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