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나는 청년진보당 당우로 가입했다. 그때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이 청년진보당에 있었기에 가입했지만 신념을 바꾸고 당원이 될 만큼의 호소력은 없었다. 민주노동당도 있었지만 나는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 모두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만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한 듯 쉽게 다른 입장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비판하고, 좀 재수 없었다.

 

당원은 아니었지만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과 분당하기 전엔 가끔 민주노동당 당사에 들리곤 했다. 지방자치와 관련된 토론회나 회의에 참석했고, 그 때는 이런저런 관계로 아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진보신당으로 분당된 뒤에는 진보신당의 당우로 가입했지만 이 역시 적극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당원게시판에 들어갈 때마다 한숨을 쉬었고, 쪼개지고 갈라져도 언제나 적은 가까이에 있었다. 결국 선거 외엔 정치가 없다는 듯 통합논의를 진행하는 걸 보고 탈당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요즘은 정당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기억들은 거의 잊혀 졌는데 이번 통합진보당의 사건이 그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물음을 던지게 만들었다. 대체 진보정당이란 무엇일까? 진보적인 이념과 정책을 표방하는 정당이 진보정당일까? 그렇다면 정당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여야 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진보정당은 목적만이 아니라 그 수단적인 형식도 진보적이어야 할 텐데,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들의 형식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가? 그리고 기존의 보수정당들과 얼마나 다른가?

 

예전과 달리 이 물음이 밖에서 관전하는 입장에서의 고민은 될 수 없다. 나는 올 초에 창당된 녹색당에 당원으로 가입했다. 아마도 내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정당가입일 것 같다. 그러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 당에 승부를 걸어야 할 터인데, 아직까지 고민만 떠돈다. 그래서 고민을 같이 나누고 싶다.

 

 


정당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정당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한 정당 내의 문제보다 정당체계의 문제를 주로 얘기한다. 때로는 정당 내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리더십과 이념, 조직규율 등을 심각하게 약화시킨다고 얘기한다(아직 한국에서는 그런 정당이 등장하지 못했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조가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정당체계가 각 정당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체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판을 잘 짜도 인간사회의 움직임은 행위자들의 선택과 파장으로 이루어지고, 구조를 바꾸는 행위가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정치는 더더욱 그런 장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런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리고 정당체계의 문제는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게 논의하다보면 정당인이나 지식인 중심으로 논의가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냥 ‘닥치고 투표’나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리고 그렇게 투표했던 사람들이 통합진보당 사태로 겪는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라는 역동적인 장이 선거로 환원되고 제한되는 한국사회에서는 정당‘을 통한’ 정치도 필요하지만 정당‘에서의’ 정치도 중요하다(당연히 정당 ‘밖에서의’ 정치도 중요하다). 학교나 사무실, 공장, 지역사회에서 정치를 경험하거나 결정을 내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당은 중요한 실험실일 수 있고 그런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정당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당은 특정한 이념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 이념과 목적에 동의한 사람들이 그 목적에 맞는 형식과 수단으로 정당을 움직여야 한다. 다만 우리가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당을 만든다면 당연히 그 정당도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아직도 전위정당이라는 허상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정당이 어떤 도덕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이라는 잣대로 정당활동을 평가하는 데는 반대한다(그렇다고 권모술수가 난무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정당은 전략을 짜야하고 상황변화에 ‘적절히’, 때로는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의 반응에 따라 정치적인 효과와 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특정한 도덕원리에 갇히는 건 위험하다.

 

다만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기에 정당은 그만큼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까지 진보정당을 자처해온 정당들은 그런 책임을 져본 적이 별로 없다. 사고가 터지면 단식하고 엎드려 사죄한다는 제스처만 있었지 그 내용을 당내의 의사결정구조나 논의과정에 반영한 적이 없다. 모든 걸 사람의 문제로 몰거나 외부의 탄압을 빌미로 구조의 문제를 은폐해 왔고, 그런 역사가 지금의 파벌구조를 강화시켰다. 당은 무너져도 정파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논리, 당은 나를 버려도 정파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논리가 정파를 지탱해 왔다. 하나의 잣대에 맞춰 도덕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선택에 대해 자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지금껏 그런 윤리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정당들도 도덕적인 잣대를 시민들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보수정당을 찍었으니 보수적이고 우매한 사람들이라 매도할 권리가 정당에겐 없다. 우리가 진보이니 당연히 당신들은 우리를 지지해야 한다고? 미안하지만 정치에서 ‘당연히’는 없다. 정당은 자신의 당원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이념과 목적을 드러내고 효과적으로 선전해야 한다. 우리밖에 없으니 우리를 찍으라는 호소는 정당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 지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설득하고 타협하며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진보정당은 진보적인가?


그런데 그동안 진보를 자처했던 한국의 정당들은 보수정치의 중앙정치, 인물선거를 비판했지만 이를 대체할 지역정치, 정책선거를 그동안 만들지 못했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정당구조는 지금도 중앙당을 중심에 둔다. 정당법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고 소위 진보정당들도 이런 법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가 ‘갑’의 입장이 되면, 이 모든 게 자신들에게 유리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 기초의원선거제도가 정당공천제로 바뀔 때 진보정당의 관계자들은 잘 된 일이라며 희희낙락했다. 바로 직전까지는 풀뿌리단체들과 연대할 전략이 필요하다며 호들갑을 떨다, 법이 바뀌자 자기 당에 가입하라며 입을 싹 닦았다. 연대와 지역정치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신중해야 했을 일에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지키지 않았다. 정치보다 ‘집권’이 진보정당의 구호였다.

 

이런 생각은 당을 운영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가 꾸려지고 서울의 중앙당에 사무처와 정책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주요 당직을 맡을수록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당내의 공직선거가 치열하다. 정영태의 『파벌』(이매진, 2011년)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부터 2004년 원내 진출 때까지 “한편으로는 대중조직과 지역의 기반을 확장하고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진성당원제, CMS, 당원의 당직․공직 후보 직선제와 소환제, 지지단체와 부문 대상 대의원과 중앙위원 할당제 등의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당 안팎의 상황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3원적인 최고집행기구를 최고위원회의 일원적 지도체제로 정비하고 다수결 제도를 도입했으며, 신생정당에 흔한 정치 엘리트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직․공직 겸직 금지와 비례대표 국회의원 연임 금지제도를 시행했다.” 정영태의 평가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당내의 민중민주파가 민족해방파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제도를 설계했고, 결국은 이 제도들 때문에 민중민주파가 민주노동당을 떠나 분당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누구 탓만 할 이유는 없다.

 

사실 이번에 통합진보당에서 불거진 문제점은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불거졌던 정파셋팅선거와 비교할 때 그 규모만 다를 뿐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예전부터 쭉 그래왔기에 죄책감이나 문제의식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 권력을 관계로 보지 않고 실체로 파악해 ‘집권’하려는 싸움은 당을 구분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보수정당의 문제점이라 지적되는 비밀스런 당운영과 두목과 가신으로 대표되는 위계구조와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연계망이 보수만의 문제라 여길 현실적인 근거가 없었다.

 

나는 2010년에 울산지역 민주노동당 10년 평가심포지엄에 참여했다. 해마다 정파의 문제가 대의원대회 때 제기되어도 아무런 정치적 해결을 보지 못했고, 내부 싸움과 중앙당에서 떨어지는 사업에 바빠 울산지역의 변화에 관한 구체적인 비전조차 세우지 못했다. 구청장과 구의원, 시의원들이 배출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을 평가할 기준도 없었다. 자기 정파 사람이 공직을 맡는 게 중요하니 다른 정파는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 우리 정파는 무조건적인 옹호의 대상이다.

 

이런 내부정치의 과잉이 외부정치의 부재로 이어졌고, 심지어 구청장과 구의회 다수파인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책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울산의 대공장 노조들이 당의 운영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다보니 비정규직 문제가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천권의 책, 2008년)에 따르면 “2004년 비정규직지원센터는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위해 4,000만원의 예산을 올렸으나, 북구청에서 2,000만 원을 삭감했고, 북구의회에서 다시 2,000만 원을 삭감했다. ‘올린 예산이 실효성 있는 예산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라는 것이 북구의회의 한 의원의 말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대표가 구청장을 맡고 있고,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들이 구의회의 절반을 점하고 있던 북구의회는 예산 삭감 이후에 어떤 제안도 다시 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내세운 이념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민주노동당이 권력을 잡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통합진보당 비대위가 제안한 정파등록제나 정책실명제가 그다지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파를 드러내고 그 활동을 공개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드러나고 공개되어도 권력을 바라보는 기본입장과 운영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진정 진보정당은 권력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 또는 착각


이번 통진당 사태를 보며 느낀 또 하나의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왜곡 현상이다. 경기동부 정파의 입장은 ‘당원총투표로 결정하자’였다. 불리한 상황 때마다 등장하는 구원투수 ‘당원총투표’, 분명 수만 따지면 불리한 상황인데도 왜 그들은 당원총투표를 외칠까? 총투표로 가면 ‘자유투표’가 아니라 사실상 ‘정파투표’로 진행되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가 생긴다. 이해관계를 놓고 파벌끼리 단합하면 밖으로는 당원들의 의지로 드러나지만 사실상은 정파의 의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해관계의 타협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총투표가 아니라 충분한 정보의 공개와 다양한 소통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당원들의 민주주의, 정당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당의 하부조직이 발전해야 하는데, 진보정당의 지역협의회(지구당은 법적으로 해산되어 보통 당원협의회라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중앙정치의 이슈를 받아서 활동한다. 당의 일상활동이 지역의 활동과 연계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구호로만 혁신과 소통을 강조하는 건 보수정당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당의 구조를 분권화해서 지역적인 실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중앙당이 지원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또한 당직과 공직선거 후보자를 선출하는 과정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당원직선제는 당을 강화시키는 방안이고, 개방형 경선제도는 당의 영향력을 외부로 확대시키는 방안이다. 한편으로 개방형 경선제도가 민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제도는 당이나 당직자들보다 후보자들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유권자와 정당의 연계를 약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떤 제도가 더 올바를까? 분명한 판단이 어렵다면, 당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에 개방형 제도를 취하고, 공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에는 직선제를 적용하면 어떨까? 일반 시민이 아니라 정당과 연계되어 지역 내에서 활동한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과 관계를 맺을 당직자를 선출하고, 이런 당직자들이 당원들의 뜻을 모아 공직자를 선출하는 방안이다. 물론 이 제안도 그냥 실험일 뿐이다. 만병통치약은 있을 수 없다.

 

근본적인 면에서 다수결주의를 민주주의로 여기는 것도 문제이다. 다수결주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보다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다수결주의에서는 소수자가 설 곳이 없다. 실제로 《사람》2012년 5~6월호의 대담에서 한 활동가는 성소수자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실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는 인식의 충돌로 발전하는데 그런 충돌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문화가 정당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의사결정의 과정에서도 합의가 된 후에 결정이 되어야 소수자들의 설 자리가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소수자들에게 ‘합의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이나 방식이 있을 경우, 합의했다고 해서 소수자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연방’의 원리이다. 연방 하에서 각 단위는 참여권과 더불어 참여하지 않을 권리도 가진다. 한국의 정당도 이런 연방의 원리에 기초해서 움직이면 좋겠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시민들이 ‘닥치고 투표’의 씁쓸함을 제대로 맛본 것 같다. 이제 그 씁쓸함을 걷어내고 다시금 정치에의 열정을 불태울 때이다. 정당이 그런 열정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맡으면 좋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