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지역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공적인 활동들이 벌어진다. 지역정치는 주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중요한 사안들을 의제로 만들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이지만, 한국에서 지역정치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체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역정치, 시민정치를 강조해도 그것을 실현할 주민, 시민이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나 정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봉건왕조와 식민지, 군사독재로 이어진 질곡의 한국 역사는 자기 뜻과 의견을 펼치려는 주체를 탄압해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주체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 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계속 제한되었고, 대안적인 정치나 경제에 대한 담론은 억제된 형태로 내면화되어왔다(특히 교육은 그런 억압을 내면화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중요한 지역 의제도 언제나 중앙 정치인을 통해 드러나야 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 권한은 중앙정부에게 있다. 1991년에 지방의회가 부활되고 1995년부터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았지만 정치무대에 올라설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되었다. 그리고 중앙권력만이 아니라 지역 내에 형성된 각종 이권구조는 지방자치제를 딛고 자신의 권력을 공식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지방자치제 부활 10년이 되어도 여전히 지역정치의 무대는 “기성정당의 원심력과 이권 브로커들, 지역 토호들이 판을 치는 아수라장”[각주:1]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10년이 더 지난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

런 구조에서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는 드러나기 어려웠고, 지방민의 목소리는 더더욱 반영되기 어려웠다. 지역정치 활성화의 전제조건이라 할 정치주체의 자존감이나 존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조였기에 정치는 언제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북돋우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지역정치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계속되었다.[각주:2] 마을축제를 열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공부방이나 대안학교, 도서관을 세우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시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지역의 주체임을 자각하며 공동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정치는 조금씩 부활했고, 그 토대가 되었던 공동체들은 규모만이 아니라 내부의 밀도에서도 그 힘을 쌓아왔다.

그럼에도 지역정치가 그동안 시민의 정치주체화를 가로막아온 정치구조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지역공동체의 대표적인 사례라 평가받는 곳에서도 지역정치는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고 자기만족적으로 진행되곤 했다. 그동안의 시도들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흐름을 무조건 긍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글은 ‘연대’의 관점에서 한국 지역정치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려 한다. 연대라는 말이 너무 자주 사용되고 그냥 시민단체의 명칭으로도 사용되는 한국인지라 때로는 연대의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권활동가 류은숙의 말을 빌면 연대는 호혜적일 뿐 아니라 기꺼이 나서려는 자세이다. 연대는 “‘내가 노동자요’ ‘내가 빈민이요’ ‘내가 채무자요’ ‘내가 바로 박해 받는 소수자요’라는 인식과 선언”이고 “‘나는 그런 처지가 아니지만’ ‘나는 다행히 빠져나가고 성공할 수 있지만’이라는 가정법을 버리고 모두가 걸려들어 숨막혀하는 그물망을 찢어보자고 달려드는 자세”를 뜻한다.[각주:3] 이 정의에 따르면, 연대란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인 관계를 대칭적인 관계, 우정의 관계로 만들려는 입장과 실천이다. 이 말에 지역정치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호혜의 관계가 연대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만남과 우정의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지역정치가 개별 공동체 내의 상호부조를 넘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1. 왜 지역정치가 등장했는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지역정치라는 개념을 조금 더 분명히 정의해야 할 것 같다. 지역정치는 제도정치로 구조화된 영역을 넘어 “경제, 문화 등 총체적인 지역의 ‘구조화’과정에서 발생”하고 “지역의 산업구조나 인구 및 계급구성, 그리고 역사문화적으로 형성된 총체적인 지역의 ‘맥락’에 있으며 그 맥락을 낳게 하는 메커니즘 속에” 있다.[각주:4] 지역정치를 이해하려면 국가정치의 눈[각주:5]에 잡히지 않는 지역의 맥락, 즉 지역성(locality)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크리스텐슨(T. Christensen)은 지역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다섯 가지, 즉 크기, 인구밀도, 주민구성의 다양성, 지역경제구조, 사회심리(social psychology)로 정리한다.[각주:6]

먼저 크기란 주민 수를 뜻하는데, 그것이 지역정치에 중요한 이유는 크기가 조직(organization)의 필요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다면 구성원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라 공동체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지만, 크기가 커져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볼 수 없으면 서로의 관계나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할 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크기가 커질수록 더욱더 많은 조직이, 그리고 더욱더 많은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크기는 지역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둘째, 지역사회의 면적과 인구밀도도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비교적 자급하며 서로 떨어져서 사는 반면, 도시는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설(시장, 하수처리장, 공원, 경찰서 등)이 필요하고, 교통난과 같은 사회문제나 이해관계의 충돌가능성(주차나 소음, 쓰레기처리, 사생활 침해 등)도 높아져서 그런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할 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구밀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고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해진다.

셋째, 주민구성의 다양성이란 인종, 계급, 문화, 직업, 나이, 성적 취향, 생활양식 등의 차이를 가리킨다. 크기가 같고 인구밀도가 동일해도 구성원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 비슷한 직업과 재산, 나이와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갈등이 비교적 적어서 지역정치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과 함께 살고 빈부격차가 아주 심하며 가치관과 연령대가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산다면 갈등의 빈도도 높고 갈등이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래서 크기와 인구밀도가 같다 해도 내부가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정치의 역할이 더 많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사회가 이런 다양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처럼 주거를 격리하는 것이다. 이런 격리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만일 다양성을 거부하는 정치인이 지방정부를 장악하면 공동체의 단일성과 동질성을 유지하려 할 테고, 그러면 공동체 자체가 격리주거지로 변해서 지역정치의 폭이 줄어든다. 반대로 다양성을 수용하는 정치인이 나서면 지역정치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도 지역정치의 중요한 변수이다.

넷째, 앞서 다룬 크기와 인구밀도, 다양성이 ‘주민’이라는 개념으로 다뤄진다면, 경제구조는 ‘계급’을 반영한다. 농촌의 경제활동은 계급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그래서 계급정치가 지역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는 농촌과 달리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고 경제활동이 전문화되어 서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해야만 한다. 농민이나 노동자만이 아니라 공무원, 자영업자, 도시빈민 등 다양한 계급들이 서로 의존하며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하기에, 도시에서는 지역정치가 농촌보다 활성화된다. 특히 부의 축적과 집중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계급에 따라 주거와 생활공간의 격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놓고 지역 내외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에, 경제구조가 지역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기업을 유치하거나 지역 내에 묶어두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단합하기도 하고 그런 기업을 위해 생태계나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도시경제의 전문화 정도와 상호의존도, 계급구조, 지자체의 경제상황과 목표 등이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사회심리는 주민이 지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는데, ‘지역정체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보통 이 사회심리는 가족과 친지 같은 1차 집단과 학교·직장·소모임 같은 2차 집단에 대한 소속감으로 드러난다.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은 농촌과 소도시에서 우세하고, 2차 집단에의 소속감은 대도시에서 더 우세하다. 1차 집단이 발달된 곳에는 공동체의식과 일체감, 온정과 친밀감이 존재하는데, 이런 감정은 긍정적이지만 때때로 이런 장점이 비공식적으로 억압하고 순응을 강요하는 단점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런 비공식적인 영향력이 강해지면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이 강한 곳에서는 지역정치가 활성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지역정치가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핵발전소나 핵폐기장, 송전탑과 같은 외부의 사안이 공동체를 자극할 경우 그런 소속감은 지역정치의 강력한 힘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가 도시화될수록 이런 1차 집단은 해체되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주민들은 2차 집단에 소속감을 느낀다. 도시민들의 2차 집단은 1차 집단만큼 강한 소속감을 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공동체를 추구하게 된다. 도시민들은 비공식적인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만 반대로 그것이 주는 보호나 소속감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주민들 간의 다양성을 배제하면 사회적인 격리로 이어져 정치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고 그 복잡성을 이해해야 지역정치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단지 몇몇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의식만으로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점칠 수는 없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지역정치가 온전히 설명되려면 여기에 중앙집권제와 서울/지역의 모호함에 관한 분석이 더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은 청와대와 중앙정부에 의해 내려지기 때문이다. 지방정부의 권한이 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정적인 권한인 예산의 면을 보면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은 여전히 8:2이다. 그리고 지방정부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1995년 62.5%에서 2012년 52.3%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예산을 중앙정부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자치는 허울에 그친다. 이것은 지역사회의 정치를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그리고 수도권의 지역사회가 지방의 지역사회가 동일한 조건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핵발전소를 비롯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이전시켰다. 수도권 주민들의 필요를 위해 지방민들의 욕구를 희생시키고,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예산을 놓고 복마전을 편다. 그래서 지역정치는 중앙정치, 지방정치라는 말과 더불어 사유되어야 하는데, 중앙정치/지역정치가 대비되는 키워드로 사용되는 반면, 지역정치와 지방정치의 연관성은 잘 논의되지 않는다. 좀 격하게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지방의 지역정치는 내부식민지에서 전개되는 일종의 해방운동이다.

또한 중앙으로의 집중은 지역성을 망각시킨다. 즉 수도권으로의 초집중구조는 지역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제임스 스콧(James Scott)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국가처럼’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지역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미 자신의 언어를 상실한 지역정치는 자신을 해명하거나 스스로 드러낼 수 없고 자신의 잠재력을 파악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문학평론가 염무웅에 따르면 1960년만 해도 서울의 느낌은 지금과 달랐다. “1960년 초봄 필자가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하여 처음 목격한 서울은 21세기인의 눈으로 본다면 여전히 농경시대적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도심에도 나비와 잠자리가 날아다녔고 번화가 뒷골목을 조금만 들어가면 텃밭에서 자라는 고추와 상추를 쉽게 볼 수 있었다.”[각주:7] 그때는 서울특별시에도 농촌의 특성이 살아 있었고, 그것이 시민의 심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역성을 상실하면서 서울은 모든 면에서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도시, 자급능력을 잃어버린 도시가 되었다. 반면에 서울과 수도권의 풍요와 그곳의 문화코드는 지방의 거주민에게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줬고 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대면하지 못한다. 타자의 상실이 자아의 상실로 이어지듯이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2. 한국 지역정치운동의 현재

한국의 급속한 도시화(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82%, 국토해양부 기준에 따르면 2011년 기준 91.1%), 수도권의 높은 인구밀도(2011년 기준으로 서울시는 16,567명/㎢이고, 인구밀도 최저인 강원도는 89명/㎢으로 무려 186배의 차이를 보인다), 주민구성에서의 다양성 증가(대표적으로 국내 거주 외국인 주민이 2011년 전체 인구의 2.5%로 2010년보다 11% 증가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는 요소이지만, 국가/도시정치체제의 비민주성과 억압성, 계급정치의 배제, 연고정치의 활성화는 지역정치의 활성화를 가로막았다. 여러 구조적인 한계들을 안고 있지만 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한국의 지역정치는 조금씩 활성화되어왔다.

어떻게 보면 여러 제한요인들에도 한국의 급속한 도시화는 지역정치의 활성화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호는 그동안의 도시공동체운동을 “근대적 도시화과정이 만들어낸 부작용들을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도시화가 만들어낸 조건과 바탕 위에서 공동체적 삶의 원리를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라 정의한다. 한국의 도시공동체는 단순히 전통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의 시대적 맥락과 조건에 맞는 공동체 모델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각주:8] 그러면서 정규호는 한국 도시공동체운동의 흐름과 특성을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도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 ‘적응형’ 도시공동체운동(1960~1970년대), 거주공간의 강제해체과정에 반발한 ‘저항형’ 도시공동체운동(1980년대), 도시민들이 스스로 생활세계를 지키고 가꾸려는 ‘방어형’ 도시공동체운동(1990년대), 국가나 시장과 다른 대안적인 모델을 만들려는 ‘창조형’ 도시공동체운동(1990년대 후반)으로 보고, 최근에 등장한 도시공동체운동의 성격을 ‘협력형’이라 정의한다. 이런 공동체운동에서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이 기계적으로 구분되기는 어렵고, 하나의 공동체 역사에도 다양한 기운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앞서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인 빠른 속도의 대도시 형성과 급속한 인구증가,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높은 인구밀도, 그에 따른 주민구성의 다양성의 증가, 농촌의 몰락, 1차 집단의 빠른 해체와 소속감의 상실, 수도권으로의 집중 등이 도시공동체의 형성과 지역정치 활성화를 자극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성미산마을을 비롯한 수도권의 도시공동체들이 지역정치에 개입해왔다.

반면에 농촌의 지역정치는 도시공동체운동의 그늘이라 얘기될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인구와 농업의 쇠락, 정체성의 상실, 농협이나 관변단체들의 지역사회 장악력 등은 지역정치의 활력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켰다. 반면에 이주민의 증가에 따른 다양성과 공동체의 쇠락이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기도 하고 지방정부가 지역정치를 자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진안군에서처럼 마을만들기운동이 활성화되기도 하고, 충청북도 옥천군처럼 주민들 스스로 지역언론을 만들고 지역비전을 세우며 삶을 기획하는 곳도 등장했다.

아울러 도시와 농촌을,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잇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소비자생협연합회로 ‘한살림’, ‘아이쿱생협연합회’, ‘여성민우회생협연합회’, ‘두레생협연합회’ 등이 활동하고 있고, 안성·원주·인천·대전 등지의 의료생활협동조합, 원주의 ‘밝음신협’이나 성남의 ‘주민신협’, 서울의 ‘논골신협’과 같은 신용협동조합 등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협동조합들은 지역사회를 근거로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지역정치의 주요한 주체이다.

이런 활동들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찾을 수 있지만 크게 세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지역정치는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구분,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을 극복하고 있다. 정치는 더 이상 정치인들의 독점물일 수 없고, 주민들은 지역의 전문가이자 지역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성장하며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주민/시민단체나 주민자치센터, 생협 등에서 활동하며 시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대의기구마저도 주민의 ‘대표자’가 아닌 ‘대리인’ 개념으로 변형되고 있다.

둘째, 지역정치는 추상적인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보다 구체적인 생활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기존의 국가정치가 대의(大義)를 빌미로 국민을 동원하려 했다면, 지역정치는 보육이나 청소년교육, 보행로, 미세먼지 등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해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이고 참여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주민들은 참여의 비용이나 불편을 감수하면서 지역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한국의 몇몇 지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의 경우, 합리적인 예산편성만이 아니라 주민참여를 자극하는 매개로도 활용되고 있다.

셋째, 지역정치가 국가정치의 변화를 이끄는 ‘정치의 역전현상’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98년에 시행된 정보공개법은 1991년에 제정된 청주시의 행정정보공개조례를 받아들인 것이다. 국가의 법률이 지역을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의 조례가 법률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단지 정보공개만이 아니라 학교급식조례나 주민소환조례, 보육조례, 청소년인권조례, 여성발전기본조례 등 국가차원에서 시행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조례들이 법률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런 지역정치가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거나 대표를 선거에서 당선시키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래빈(D. Levine)의 말처럼 지역정치의 “진정한 도전은 빈민을 위한 선택이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도전은 민중의 목소리에 힘을 싣고 그들을 신뢰하며 그들이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각주:9] 주민은 의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거나 서툴 뿐이었고, 기성체제에서 배제되어온 주체들(subaltern)이 지역정치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나 소득수준이 낮은 빈민계층이나 가정에 얽매여온 주부들은 경험적 지식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여러 구조적인 조건들이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해왔음에도 그 가능성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사회의 변화가 지역정치에 또 다른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3. 지역정치의 과제는?

사회학자 바우만(Z. Bauman)은 공동체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공동체주의 복음이 말하는 공동체는 큰 글씨로 쓴 집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인적 경험의 문제가 아닌 아름다운 동화에 더 가까운 그런 종류의 집이다. (…) 한마디로, 집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의 화폭에는 대체로 어두운 색깔이 없어야 한다.”[각주:10] 바우만은 공동체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섞일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적대를 제거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바우만은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생활정치가 사유화되고 있는 공적인 영역을 재점유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우만의 비판을 한국에 무조건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지역공동체가 이질적인 것이나 적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려 든다는 점, 제도정치와 공적 정치영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역정치를 방해하는 정치․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또는 아직 그만 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점)은 고민할 만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런 내용을 살펴보자.

서울특별시 마포구의 성미산마을은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의 모델이 되기 전부터 유명세를 탔다. 성미산마을의 주민이자 주요한 화자(speaker)인 유창복은 공동육아어린이집이 성미산을 지키는 주민운동으로, 마포두레생협, 성미산학교, 동네부엌 등의 마을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각주:11] 유창복의 설명에 따르면 성미산마을이라 불릴 수 있는 기관은 자체기관 2곳, 교육 9곳, 경제 12곳, 문화․동아리 11곳, 환경 3곳, 복지 1곳, 미디어 1곳, 기타 2곳, 그리고 함께하는 단체 18곳이다. 그러니 총 60곳의 기관들이 성미산마을이라 불리는 곳을 구성하고, 이 마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으로 집약되지 않고 촘촘한 관계망으로 구성된다.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할 다양한 기관들을 만들어온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특히 2007년 국토해양부의 시범마을사업으로 선정되고 ‘(사)사람과 마을’이 만들어진 뒤 성미산마을은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 이런 활동과 사업들을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의 결속력이 강해졌고 그만큼 지역정치도 활성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미산마을이 유명해지면서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1세대에서 3세대까지 세대가 구분될 만큼 다양성이 증가되었다. 그렇게 마을의 크기가 커지고 주민구성의 다양성이 증가하면 내부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세대가 구분되며 1세대가 지역사회의 주요한 결정을 이끄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외려 2차 집단의 정체성이 1차 집단의 정체성처럼 굳어지는 현상, 즉 비공식적인 의사결정절차가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마을이 외부자원의 의존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그런 1세대의 주도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성미산마을의 주요 자원이 정부나 공기업, 민간공익재단, 시민단체들의 프로젝트에서 들어오고 있다. 예를 들어, 성미산마을을 대표하던 공동체라디오 마포FM, 사람과 마을, 성미산마을배움터, 성미산마을극장 일자리, 성미산학교사회적일자리사업부 등은 외부자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각주:12] 그럴 경우 마을의 역사와 상황을 잘 아는 1세대의 발언력이 강해지고 화자의 역할도 1세대가 맡게 된다. 1세대가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외부 자원을 지원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런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는 능력들이 축적되면서 마을을 대변하는 주요한 화자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미산 마을의 외형이 커졌지만 그만큼 내부의 결속력이 커졌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미산마을의 주요한 기관 중 하나인 마포두레생협이 확장되면서 내부의 관계망보다 확장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그런 의문을 반영한다(대표적으로 두레생협서울이사회 구성과 관련된 논란).[각주:13] 그리고 세대 간의 차이가 불거지고 갈등하는 현상도 그런 결속력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지역정치의 원래 목적에 따르면 이런 경향이 바로잡혀야 하지만, 대표에 집중되는 한국사회의 특성 때문에 이 경향은 수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에서 마을과 공동체라는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상품화되는 현상도 피하기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공동체로 소문이 나면서 주거비용이 높아지는 현상도 피하기 어렵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의 또 다른 모범으로 소개되는 장수마을에서도 마을공동체로 소문이 나면서 집주인들이 세를 올려 세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각주:14] 이런 현상은 마을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도 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다. 주거불평등이 심각한 한국사회, 특히 수도권에서 공동체를 소비하는 현상은 공동체가 격리방식을 택하며 지역정치를 회피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성미산마을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한다’는 말은 연대의 관점으로 보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성미산마을이 이성애 가족 중심으로 관계망을 형성하여 마을사람이라는 느낌을 못 받는다는 지적에, 스스로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각주:15]고 답하는 것은 연대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가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다가서는 것이, 그리고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연대라면,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관점은 연대의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스스로의 변화’만 강조하는 것은 소수자들이 겪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구조를 ‘그들의 문제’로 만들거나 ‘공동체’로 ‘배타성’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증가가 새로운 형태의 격리를 낳는다면 그것은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이어도 그 역량이 고루 분배되고 새로운 정치주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정치의 힘은 축소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지역정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제도정치에의 관여나 공적 공간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성미산마을이 미래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2012년에 홍익대 재단이 성미산마을의 형성 계기인 성미산을 개발해서 학원을 이전한 것도 일종의 징후이고, 성미산마을이 관계망으로 이어진 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장악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마포 아 선거구에서 진보신당 의원이 당선되기는 했지만 성미산마을이 내세운 후보는 마포 사 선거구에서 떨어진 점도 그런 점을 반영한다.

이런 문제가 도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은 ‘위대한 평민’, ‘더불어 사는 평민’을 양성하는 풀무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풀무학교는 소규모로 게토화된 대안학교와 달리 지역과 학교의 연계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학교는 지역과 유기적 생활권을 이루는 곳입니다. 지역은 열려진 학교이고 또 학교는 지역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도 자주 했던 말 같습니다. 학교 안에 작은 사회를 만들자, 교육사를 보면 그런 주장을 한 이도 있었지만 제대로 실현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실제 사회에서 더 생생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지역과 유리되면 학교는 산 지식의 생동감을 잃고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지역의 교육력을 활용하고, 또한 학교를 움직이는 원리가 지역사회를 움직일 때, 지역과 학교는 서로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그 의지를 느낄 수 있다.[각주:16]

그래서 풀무학교는 단순히 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풀무신용협동조합’과 ‘풀무생협’을 만들어 지역경제를 뒷받침했으며, <홍성신문>이라는 지역언론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 정농회 홍성지부’, ‘지역사회연구회’, ‘갓골어린이집’, ‘풀무학교생협’, ‘밝맑도서관’, ‘지역센터 마을활력소’ 등을 만들어 마을거점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또한 풀무학교 출신들이 홍동면에 정착해 다양한 지역 활성화 실험들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을 주도할 ‘새로운 농촌’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품은 풀무학교의 실험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각주:17]

그런데 이런 작은 실험들을 구조적인 변화로 이어갈 방법은 50년을 넘긴 풀무학교 역사에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유기농산물을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여 생협을 통해 유통하는 체계가 마련되고 있지만,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물류체계가 농업을 살릴 방법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현행 식품위생법과 보건복지부령에 따라 유통되는 식품들은 법이 허가한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시설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들은 대부분 공장 중심의 기준들이다. 이웃집 할머니의 손맛이나 장맛도 공간과 시설이 받쳐주지 못하면 ‘공식적으로’ 유통되지 못한다. 농업이 아닌 농사의 관점에서 보면 농촌의 힘이 진정 강해지고 있는지, 풀무학교의 이상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 농민은 WTO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곧 아무리 노력해도 턱없이 값싼 수입농산물 가격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고, 더욱이 우리의 작은 농토는 대수출국의 1/100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수입농산물은 여기저기 범람하였고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를 피해 이 작목 저 작목으로 틈새를 찾아다녔지만, 그러나 항상 그 틈새에서 도망나온 다른 동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라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한국 농촌의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풀무학교의 힘이 강하지만 한국에서 섬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외부와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홍동면의 경우 외부에서 풀무학교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주민구성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그리고 농민이라는 계급이 붕괴되고 있기에 농촌은 지역정치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다양성 증가가 실제로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는지, 풀무학교의 이상이 지역사회로 스며들고 있는지 아니면 고립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점검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인구밀도가 낮고 1차 집단의 영향력이 강한 농촌사회는 지역정치가 활성화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점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점검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내부의 상황을 역대 선거에서의 지지율로 가늠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선거통계를 통해 홍성군의 선거결과를 살펴보면, 새누리당(舊 한나라당), 자유선진당(또는 국민중심당) 등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지난 10년 이상 꾸준히 70, 80%를 유지했다. 그래서 다른 정당들은 후보를 잘 내지 않는 곳이다. 비례대표 지지도를 봐도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2006년 지방선거 기초 80.84%, 광역 76.97%, 2008년 총선 73.84%, 2010년 지방선거 기초 76.77%, 광역 72.29%, 2012년 총선 64.75%이다. 보수정당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지방선거의 경우 홍동면의 지지율이고 총선이 홍성군 전체의 지지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홍동면의 지지율 변화가 홍성군의 변화를 앞지른다고 보기 어렵다.

대안적인 정치세력의 필요성 때문인지 2012년 ‘녹색당’이 창당할 당시 홍동면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당원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불렸다. 농민들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고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한다는 것은, 특히 혈연·지연의 연고가 강한 농촌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치적인 커밍아웃’이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총선 당시 녹색당의 득표율은 홍동면의 당원 숫자만큼도 나오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홍동면에서는 매달 정기적으로 당원모임이 열리고 일상정치활동을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지만,[각주:18] 좋은 담론이 적대적인 정치현실과 어떻게 충돌하고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내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풀무학교의 역사는 아직도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이다. 적대가 사라진 정치는 적당한 정치적 배분을 낳을 뿐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다.

지역정치의 한계가 단지 도시와 농촌이라는 공간의 문제는 아니고 협동조합운동 내부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한국의 생협들은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다. 일본 ‘가나가와 네토’의 경우 “의회에 보낸 사람을 의회 바깥에서 지원을 해주는 ‘공육共育(상호교육을 통한 상호성장) 시스템’”[각주:19]을 강조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간혹 생협의 이사나 이사장이 지방선거에 출마하거나 당선되는 경우는 있지만 제도정치 참여가 생협의 주요한 활동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특정 정당을 지지·반대하거나 특정인을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4조는 폐지되지 않았고, 2012년에 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에서도 공직선거 참여가 금지되었다. 생협의 주요무대가 지역사회이고 지방정부가 그 지역의 질서를 짜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조합원의 수가 이미 60만 명을 훌쩍 넘겼더라도 그 힘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생협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외부 권력의 결정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초기에 생협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각주:20] 생협의 비정치성은 정상적이지 않은 예외적인 것이라 얘기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생협의 대중적인 확산을 모색하는 생협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만으로 가입하는 조합원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생협 실무자들은 정치적인 개입을 할 경우 외부의 탄압을 받거나 내부적인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고, 우리가 현재 사는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세계화시대의 흐름은 점점 협동보다 경쟁과 독점을 향하고 있고, 나오미 클라인(N. Klein)은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을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라고 부르며 이 세력을 제어하는 것을 향후 정치의 주요한 과제로 지목한 바 있다.[각주:21] 이런 구조적인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생협운동의 정치적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재 소비자생협운동의 현실을 보면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7원칙 중 여섯 번째 원칙인 ‘협동조합 간의 연대’를 지키고 있는지조차도 의문이다. 대부분의 소비자생협들이 물류 중심의 경쟁구조를 갖춤으로써 매장의 입지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일이고, 기존의 협동조합이 새로운 협동조합의 구성을 돕고 지원하는 사례도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4. 연대는 불가능한가?

다양한 지역운동 사례들에서 드러나는 이런 경향들은 향후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독점하는 세력에게 맞설 힘을 결집할 연대를 가로막는다. 수많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한국에서 연대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학자 라이너 촐(Rainer Zoll)은 한국사회의 위기를 이렇게 진단한다. “생활세계를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상은 매우 긍정적”이나 “특정한 사회적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적대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자동차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잘 조직화된 남성 노동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 두 집단이 급진적 노동조합에 함께 속해 있으면서도 말이다. 한국에는 열심히 투쟁하는 두 개의 노동조합 연맹이 있고, 이 둘을 합쳐 정확히 노동자의 12%가 조직되어 있다. 그 외의 사례로는 사기업 노동자와 공무원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있다. 사회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연대가 대부분 ‘집단연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즉 사회집단이 서로 결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닫혀 있으며 다른 집단과 날카로운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22] 지역정치 역시 이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지역과 마을을 만든다 해도, 어느 누구도 이런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연대는 바로 이런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절망적인 노력이다. 그런 노력 없이 지역정치의 활성화나 대안을 논하는 것은 섣부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진보신당의 이재영은 2008년 5월, <시민사회신문>에 「‘풀뿌리’는 기만이다」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 칼럼에서 이재영은 “한국에 소개돼 있는 ‘풀뿌리’란 주로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에 다름 아니”므로 “풀뿌리라는 것이 이미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로 기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필자는 이 칼럼을 비판하는 「‘풀뿌리 없는 진보’야말로 기만이다」라는 반박기사를 <시민사회신문>에 실었다. 그 글에서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풀뿌리의 정치전략이 탈사회주의, 비정치라는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지, “오히려 그런 운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많은 지역단체 활동들이 중앙/지방정부의 프로젝트나 민간재단의 프로젝트에 의존하면서 그런 활동들은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풀뿌리 활동이든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자신이 가진 급진적 전망을 포기하고 다가올 파국을 막는 완충작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말했듯이 다가오는 파국이 사회성 형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각주:23] 한국의 지역정치는 파국을 피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는 듯하다.

상호부조와 연대는 정치적인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패한 국가 내에 건강한 지역사회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을과 공동체도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라는 장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소성이 중요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면 지역 내외부의 다양한 정치활동과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연대는, 타자가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내가 타자의 삶을 지탱하는 좋은 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나 계산능력만으로 맺어질 수 없다. 그것은 공통성을,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을 필요로 한다. 성장만을 강요하는 시대에 그런 감각을 회복하려면 건강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건강한 자기성찰 없이 지역정치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감각을 열어놓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 여전히 중요하다.

하승우

현재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에서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치학을 전공했고 풀뿌리민주주의, 아나키즘, 지역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쓴 책으로 <민주주의에 反하다>,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등이 있다.

  1. 최경송, 「대안정치의 씨앗 뿌리기」, 시민자치정책센터 지음,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갈무리, 2002, 199쪽. [본문으로]
  2. 한국청년연합회(KYC)가 발행한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시금치, 2005)은 서울시 도봉구의 ‘느티나무방과후’, 경기도 일산시의 ‘야호 어린이집’, 서울시 도봉구의 주부학습동아리 ‘즐멤’, 경기도 광명시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시 강북구의 녹색가게 ‘풀빛살림터’,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평생학습원’, 대전시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공동체, 경기도 의정부시의 ‘꿈틀자유학교’, 인천시 연수2동의 주민자치센터, 서울시 금천구의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등 11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이 발행한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2008)은 한국 주민자치운동의 모범지역을 경기도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수유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지금은 ‘녹색마을사람들’로 명칭 바꿈), ‘대전여민회’와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충청남도 천안시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남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 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원주시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지금은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강원도 사북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시 반송의 ‘희망세상’ 등 8곳으로 정리했다. [본문으로]
  3. 류은숙, <사람인 까닭에>, 낮은산, 2012, 177쪽. [본문으로]
  4. 김왕배, <도시, 공간, 생활세계>, 한울, 2000, 271~272쪽. [본문으로]
  5. 제임스 스콧, 전상인 옮김,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2010 참조. [본문으로]
  6. Terry Christensen, Local Politics: governing at the grassroots, Wadsworth Publishing Company, 1995. [본문으로]
  7. 염무웅, <자유의 역설>, 삶창, 2012, 173쪽. [본문으로]
  8. 정규호, 「한국 도시공동체운동의 전개과정과 협력형 모델의 의미」,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2호, 2012. 6. [본문으로]
  9. Daniel H. Levine, Popular Voices in Latin American Catholic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p. 370. [본문으로]
  10.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도서출판 강, 2009, 27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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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조정래, 「서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 추진방향 연구」, 입법담당관 정책보고서 제3호(2012. 4. 18). [본문으로]
  13. 마포두레생협 홈페이지(http://www.mapocoop.org/) 조합원 의견나눔 게시판 2010년 3월 부분 참조. [본문으로]
  14. 박학룡, 「위태로운 세입자」, <시사인> 2012년 12월 29일자(제276호). [본문으로]
  15. 기획대담 「횡단대화: 마포에서 듣는 새로운 실험」,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09년 11․12월호(제41호). [본문으로]
  16. 홍순명,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 이야기>, 내일을여는책, 1998, 55쪽. [본문으로]
  17.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궁리, 2002, 332쪽. [본문으로]
  18. 강국주, 「‘착헌 정치’란 가능할까?」, <지역과 학교> 통권 26호, 2012년 겨울호. [본문으로]
  19. 요코다 카쓰미, 나일경 옮김,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운동의 모델 만들기>, 논형, 2004, 200쪽. [본문으로]
  20. 염찬희, 「iCOOP생협 10년의 역사와 활동」, iCOOP생협연대 지음, <협동, 생활의 윤리: iCOOP생협 10년사>, 도서출판 푸른나무, 2008, 17~18쪽. [본문으로]
  21.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참조. [본문으로]
  22. 라이너 촐 지음, 최성환 옮김,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 한울 아카데미, 2008, 14~15쪽. [본문으로]
  23.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도서출판 펜타그램, 2012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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