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1.07.20 08:56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시커먼 해일이 도시를 삼키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그냥 철렁하기만 했다. 허나 그 뒤를 이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심각한 재난을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에 이미 21개의 핵발전소가 있고 6개를 짓고 있고 2030년까지 핵발전소가 총 41개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불구경할 여유가 있을까?


사고소식을 들으며 이제 돌을 맞이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본다. 어느 순간 핵발전과 관련된 보도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안전한(?) 한국형 원자로가 전략적인 수출품목으로 떠오르는 걸 보며 머릿 속이 핑 돌았다. 이 아이를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전사로 키워야 하나? 보태줄 건 없더라도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남겨줘야 할텐데, 핵은 미래 자체를 파괴한다.



핵발전과 민주주의의 파괴


지금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우리가 쓸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미래를 팔고 있다. 핵발전으로 생기는 핵폐기물은 최소한 2만 5,000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물질이다. 이런 물질을 두고 누가 ‘안전’을 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연방사능이나 병원에서 순간적으로 쬐는 방사선과 달리 핵사고로 인한 방사능은 호흡기와 피부, 음식을 통해 체내에 흡수되어 몸 속에 축적된다(오염된 땅과 물은 반드시 인간에게 복수한다). 당장은 우리에게 해가 없다손 치더라도 체내에 축적된 방사능이 미래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위험하고 끔찍한 물질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왜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 하는지, 어디에 지을 것인지, 거기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와 관련된 정보들은 철저히 차단된다. 소수의 핵심관료들과 전문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사실 핵무기만큼 핵발전은 ‘비밀스럽고 비민주적인’ 기술이자 위험한 기술이다. 핵무기가 현재를 파괴한다면 핵발전은 ‘예고된 파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전(反戰)과 반핵(反核)은 함께 붙어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예고된 파괴가 중단되지 않는가? 북한의 핵개발을 막고 대량살상무기를 없애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왜 핵발전에는 이렇게 너그러울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이윤 없는 부패는 없다. 원전 1기당 건설비용이 대략 2조원을 넘긴다고 하니 이윤을 노리는 똥파리들이 어찌 꼬이지 않겠는가. 위험하고 끔찍한 핵발전이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여러 신문과 주간지들이 핵발전을 추진하는 한국의 핵마피아를 다뤘다. 대략적인 그림은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 현대건설, 두산중공업, 삼성물산, 대림산업, 대우건설의 5대 재벌기업, 이들과 어울리는 학계와 전문가 집단이 한국의 핵산업을 이끌고 있다. 즉 권력과 자본, 이들에 빌붙은 지식인들이 시민들의 참여를 막고 ‘중립’과 ‘전문성’을 내세우며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고 갖은 이권을 나눠먹고 있다. 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원전 건설과 관련된 핵마피아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제 3세계를 노리고 있다. 토다 기요시의 말처럼 “원자력개발은 전문가 지배, 관료 지배, 대기업 지배를 강화한다.” 핵발전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핵개발이 비민주적인 이유는 핵마피아가 나눠먹는 이권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중앙정부의 손에서 결정되고 전력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서울의 전력자급율은 1.9%에 불과하다). 핵발전소가 세워지는 지역들을 보라. 대부분 한반도의 외곽지역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못 사는 지역들이다. 핵마피아들은 지역발전을 빌미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터전을 파괴한다. 그래서 지방은 자신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전력을 생산해서 수도권에 ‘에너지 조공’을 바쳐야 한다(조공을 바쳐야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얻을 수 있으니). 에너지 조공을 계속 받기 위해 핵마피아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나 민주적인 지역발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라며 핵을 선전하는 원자력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핵발전소에서 일할 리 없고,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핵발전소의 연료봉을 갈 리도 없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청 노동자들이고 위험한 곳에서라도 일하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자발적 노동이라고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예노동인 셈이다. 나의 안락함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핵발전에 반드시 뒤따르는 핵쓰레기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도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1978년에 고리 1호기가 처음 발전을 시작한 이후 계속 쌓여가는 핵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는 비밀리에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동안 핵폐기장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곳도 역시 지방이다. 경북 영덕군과 영일군, 강원도 울진군, 충남 안면도, 경남 양산, 경기도 굴업도, 전남 영광, 전남 고창, 전북 부안 등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다.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핵폐기장을 몰래 지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계속 실패했고, 지금은 한수원이 많은 돈을 풀어 주민들의 여론을 내세워 신청을 하게 만들고 중앙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역시 민주주의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참으로 비민주적인 과정이다.


핵발전소와 마찬가지로 핵폐기장이 들어설 후보지에서 핵의 안전성 여부는 쟁점조차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후보지들은 ‘지역발전’을 내세워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고, 붕괴한 지역경제에 낙담한 주민들이 이에 동조하는 식이다. 허나 누가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이 있는 곳을 발전된 지역이라 여길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떠나고 지역은 더 뒤처지고 생활은 더 어려워진다. 승자는 중앙의 비민주적 권력과 주민의 이름을 팔아먹는 지역의 토호권력 뿐이다.



반핵운동과 주민들의 살아있는 민주주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싹트는데, 핵폐기장이 들어서려는 곳마다 주민들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평범한 주민들이 권력의 부당한 억압에 직접 맞설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핵운동의 역사를 봐야 한다.


1989년 3월 정부가 경북 영덕군을 핵폐기장 후보지 1순위로 정하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주민의 1/3 가량이 집회에 참여했고 국도를 점거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정부는 계획을 포기했고, 이에 힘을 얻은 반핵운동은 4월에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을 벌였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핵폐기장을 지으려는 곳마다 주민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그 중 광주항쟁 이후 최악의 주민시위로 꼽히는 안면도 투쟁은 눈여겨 볼 만하다. 1990년 11월 과학기술처가 안면도에 원자력 제2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핵폐기장을 건설하려 한다는 보도가 <한겨레>에 실리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의 간사가 안면도에 들어가 주민저항을 조직했고, 보수적인 단체로 분류되는 청년회의소(JC),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청년회들, 심지어 지역의 건달들까지 힘을 모아 <안면도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약 2만 여명의 주민 중 절반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힘을 발휘했다(최대규모의 집회로 불린 11월 8일의 집회에는 약 1만 5천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주민들은 한 가구당 한 명 이상을 반드시 집회에 참석시키고 참여하지 않는 가구에 5만 원씩 벌금을 물린다는 규약을 만들었다. 나아가 핵폐기장 유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고 동네 상여도 빌려주지 않는 징계를 내리기도 했으며 유치 신청자나 그 자식들을 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안면도의 주민항쟁은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청년결사대가 조직되고, 안면지서가 불에 타기도 했다. 주민들은 안면읍사무소를 접수하기도 했고 육지와 연결되는 하나뿐인 다리를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안면공화국 만세’라는 구호가 시위 도중에 등장하기도 했다. 만일 주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죽음의 평화가 안면도를 뒤덮었을 것이다. 안면도 투쟁은 주권을 회수한 민중들이 국가의 법치주의나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런 저항에 밀려 정부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을 돈으로 유혹하며 안면도의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들었다. 허나 이마저도 1992년 5월 주민공작을 일삼던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들이 묵던 여관을 마을청년들이 습격해서 서류를 빼앗고, 1993년 1월 유치를 찬성하던 주민의 양심선언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핵폐기장을 짓겠다는 계획은 포기될 수 없었다. 핵발전을 이미 시작한 곳에서는 포기가 불가능하다.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만큼 핵폐기물의 양도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경기도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 옆의 덕적도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고립된 섬에서 빠져나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반대시위를 벌였고 당시 액수로 5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겠다는 정부 발표에도 계속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의 시위가 1년을 끌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정부는 지반이 약해서 핵폐기장에 알맞지 않다는 지질조사 결과가 나와 스스로 계획을 접는다(이처럼 핵과 관련된 사업들은 상식을 거부한다).


표류하던 핵폐기장 건설은 2003년 5월 중앙정부와 전북 부안군수가 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부안군민의 의견을 뒤집고 위도 주민 80%의 서명을 받아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하자 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부안군민들의 반대집회가 이어졌고 180여 일의 눈물겨운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에게 현금보상을 하겠다는 산자부와 한수원의 거짓말 행진과 주민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정부는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합의를 유도하기는커녕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촛불집회를 막았다(인구 7만이 안되는 부안에 8천여명의 전경이 투입되었으니 정부는 주민들의 입을 공권력으로 꽁꽁 틀어막은 셈이다). 그리고 중앙언론들은 지역이기주의, 폭력사태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으며 부안주민들을 몰아붙였다.


결국 부안에서는 주민투표라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했다. 주민투표는 이렇게 돈과 공권력의 힘이 주민들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은 상황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그 주민투표마저 거부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었다. 그럼에도 부안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투표를 준비했고, 외부의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 변호사들이 투표진행을 위해 힘을 모았다. 주민투표 이전에 약 10개월 동안 방폐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지역사회 내에 퍼져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토론을 불러일으켰고, 부안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핵폐기장을 막아냈다.


핵폐기장 건설은 4개 지역 방폐장 동시 주민투표라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경주의 지반이 매우 약해 핵폐기장에 적합하지 않고 공사현장에 수맥이 흘러 방사능이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핵폐기장 사고’를 예약한 채 살고 있다. 다만 사고가 언제 터질지 알지 못할 뿐이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끔찍한 사고가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허나 미래의 누군가는 그 공포를 감당해야 한다.



재난자본주의를 넘어서


왜 끔찍한 재난이 반복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재난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자 이익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쑥대밭을 만들고 간 자리에서 누군가는 재건축과 재개발의 가능성을 본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없다. 앞서 주민들의 저항이 증명하듯 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재난 현장을 돌아보고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나오미 클라인은 위기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시킨다는 결론을 내린다. 가난하고 약한 대다수 사람들이 쓰나미나 지진, 전쟁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다면, 소수의 기업과 정치인들은 그런 재난으로 이득을 취하며 더욱더 배를 불린다. 심지어 경제공황이나 전쟁같은 재난을 의도적으로 일으키기도 하고 이를 위해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시민들을 고문하며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재난을 통해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이 바로 재난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도 힘으로 누르고 돈으로 유혹하면 일이 성사될 수 있고 그러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니 아무리 설득하고 요구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국가나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절망적인 재난을 막을 방법은 그들의 뜻을 대표할 대의제도나 공권력에 있지 않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야 가까스로 재난을 막을 수 있었다. 안면공화국이 선포되고 부안독립신문이 발간되어야 기득권층은 타협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수준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얘기들은 사람들의 착각을 부추길 뿐이다. 근본적으로 한 국가 내에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져 있고 민중이 사는 나라의 삶이 불안정하고 위험한데 어떻게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이 바뀐다고 재난자본주의가 무너질까? 민중을 대표하기는커녕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이나 진보적인 정책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진보정당들은 헛된 기대만 부추길 뿐이다.


따라서 민중의 힘을 드러낼 방법은 직접행동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중에게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이기에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토대이다. 이 민주주의에서 나라가 생기고 권력이 생긴다. 이 힘을 포기한다면 민중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반핵운동은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반핵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달리 ‘보편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핵운동은 제 1세계와 제3세계의 구분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민중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운동이다. 핵의 개발은 인류에게 공멸(共滅)이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핵의 위험은 국경을 넘어 퍼져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핵은 인류를 진정한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함께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생존할 것인가?


또한 반핵운동은 사회운동과 주민운동이 손을 잡을 기회를 마련한다. 과거 반전(反戰)과 반핵, 양키고홈을 함께 외쳤던 ‘반전반핵가’에서 잘 드러나듯이,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운동은 식민지에서 해방되려는 운동,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즉 반핵운동은 비민주적인 정부와 독점재벌, 토호세력에 맞서는 운동이다. 반핵운동은 주민운동이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인 이슈에 개입하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지옥문 앞에서의 피스몹


30년의 수명을 넘긴 고리 핵발전소 1호기는 지금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고장 난 시한폭탄이다. 그 폭탄을 해체할 생각은 않고 미래를 논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동차 사고가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겠냐며 핵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자동차와 원자력이 어찌 같을까?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에서 사고가 터지는 순간 그 곳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죽음의 재는 멀리 멀리 퍼진다. 미국의 쓰리마일,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고 있고 아직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고통이 이어질지 우리의 시야로는 가늠할 수 없다. 이를 자동차와 비교할 수 있을까?


원자력은 ‘근본적인 악’이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재앙이다. 저주받은 죽음의 물질을 대대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억압적인 권력보다도 더 무서운 유산이 바로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핵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현재와 싸워야 한다. 이 길고 긴 싸움은 이기기 위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의 삶에 있다. 라페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본성에 대한 이러한 움츠러든 관점은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기업광고에 의해서, 숱한 종교 압력에 의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과 기업광고는 우리를 경쟁적으로 자기 것을 축적하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고, 종교는 우리를 더러운 죄인이라고 강조하면서 더 나쁜 역할을 하고 있다.…지구의 생존은 그러므로 우리가 단절을 이루어 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풍요로움을 긍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우리는 지금 현재와 단절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참고한 책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녹색평론사, 2003)

녹색평론 좌담회, ‘핵발전, 무엇이 문제인가’, 《녹색평론》 2011년 5~6월호.

신동호, “안면도 반핵항쟁”, 《뉴스메이커》 제 684, 685, 686호.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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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1.03.11 00:55
 

지금 서울시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제정하려는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 필요한 서명인 수는 만 19세 이상 유권자의 1%, 약 8만 2천명이다. 수치로만 보면 1%가 그리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8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고 서명을 받는 형식도 매우 까다로워 애써 서명을 받아도 무효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에서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동안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서울시에서도 2004년 3월 약 14만 6천명의 서명을 받아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서가 제출되었고, 2010년 3월에도 서울광장조례개정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었다. 가끔은 현실이 되기에 이런 사건은 불가능이 아니라 기적이라 불린다. 1999년 8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된 주민발의제도는 조례를 제정하고 개정할 시민의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참여민주주의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이 한창인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상급식을 반대하기 위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고, 실제로 2011년 1월 보수단체들이 본격적인 주민투표 청구운동에 들어갔다. 주민투표를 청구하려면 6개월 이내에 서울시 유권자의 5%, 약 41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에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보수세력이 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4년 7월에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이후 시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고 모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청구했다는 점에서 주민투표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허나 주민투표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결정사항에 관해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해서 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하기에도 애매한 닭갈비이다.


주민발의제도와 주민투표제도는 주민소환제도와 함께 참여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이 제도들은 선거에서 대표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선택을 넘어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시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참여민주주의의 역설


참여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모든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조직화된 세력이 선거과정에 개입해서 여론을 몰아가거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야합하면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나 약자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 자체는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문제삼기도 어렵다. 결국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중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지배를 당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처럼 참여가 민중의 권리를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득권층의 결정을 정당화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 1인 1표로 계산되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쪽수’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과정이 무시된다. 수능시험 한 번에 그동안의 노력이 판가름되듯이, 선거 당일의 투표결과에 따라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민주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역설이 한국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이다(이를 빌미삼아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진보를 가장한 보수학자들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일했던 캘리포니아주를 예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주지사를 주민소환제도로 소환해서 해직시키고 공화당의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미국에는 서명과 운동을 대신하는 전문회사들이 있을 정도이니 돈만 있으면 사적인 이해관계를 민주적인 여론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민관협력사업이나 마을만들기 등을 통해 시민참여가 시민동원으로 변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적인 제도가 ‘민중의’ 지배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면 인권의 의미가 뒤죽박죽되듯이, 참여의 성격을 가리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뒤죽박죽된다. 한 때는 신새벽에 남 몰래 쓰는 단어가 민주주의였고, 참여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되면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그리고 배반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현실을 비관한다. 허나 정말 현실의 문제일까?


이란의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참여를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라 부른다. 원래 참여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어울린다”는 윤리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상향식 참여를 강조하며 시민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전략은 참여의 의미를 대규모 공사나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집회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조작된 참여와 자발적인 참여는 구분되기 어려워졌다.


특히 라흐네마는 경제발전 영역에서 참여가 더 이상 정부에게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정치적․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구호로 변하고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더 큰 효율성을 낳는 수단”, “훌륭한 기금마련 수단”, “민간부문을 개발사업에 곧장 끌어들일”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은 참여민주주의제도가 처음부터 가진 한계였다. 왜냐하면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는 ‘정부=공권력, 민중=권력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자신의 권력을 쪼개어 시민에게 넘겨주는 것을 참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민주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있다. 제 아무리 억압적인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제도로는 잡히지 않지만 힘으로 느껴지고 사람들 사이에 울림을 가져오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가 있다. 이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왜 우리는 그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을까? 라흐네마는 이를 “유럽 좌파의 전통에서 나온 권력 관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참으로 문제가 있는 권력 관념이 전통적․향토적 권력관념을 밀어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참여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조차도 민중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거북해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상식을 가진 풀뿌리 민중이 선구적 지도자들이 내놓은 해법에 결국은 동의하지 않을 때 민중이 협조하지 않거나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직 의식이 깨지 않았거나 반혁명 세력에게 놀아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 어떤 명분을 대더라도 이런 모습은 민중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민주적인 태도이다.


그러니 참여민주주의라는 세련된 말에는 모순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제 몫을 다하려면 우리를 세뇌시킨 이런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 정부가 스스로 권력을 만들지는 못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민중의 지배를 보장한다면 그 사회의 법을 제정하고 바꿀 권리도 민중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법치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 인민주권을 전제하지 않은 법치주의는 기득권층의 기만적인 통치술일 뿐이다.



법에 가로막힌 주민발의, 정부에 가로막힌 주민투표


정부가 모든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근대국가에서 법을 제정하고 바꿀 힘은 민중의 손에 있지 않다. 민중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입법의 영역은 그나마 조례 정도이다. 미흡하지만 이런 점에 조례의 중요성이 있다. 주민이 발의할 수 있는 조례는 민중이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지역의 법인 조례는 입법자와 그 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의 법률과 다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드는 힘은 지방의회나 지방의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의 공론장과 시민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단순히 조례만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운동 과정에서 많은 소규모 공론장들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의 다양한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한국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에 강력한 금지조항을 달아두었다. 지방자치법 제 13조는 ‘법령을 위반하는 사항’, ‘지방세와 사용료, 부담금의 부과․징수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 또는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에 관해 주민발의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즉 시민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조례를 제정/개정하더라도 그 조례가 법률을 어기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우리농산물을 쓰도록 규정한 학교급식조례안이 세계무역기구(WTO)협정을 위반한다며 거부되거나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서 학생인권조례안을 막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태도가 계속 나타나는 건 조례가 중앙의 법률을 넘어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렵사리 주민발의를 통해 조례안이나 개정안을 제출하더라도 지방의회의 심의를 거치면서 그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주민발의된 조례들을 살펴보면, 발의된 원안대로 지방의회에서 의결되는 사례가 드물고 대부분이 수정되어 의결된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서명을 받고 조례안을 제출해도 지방의회를 거치며 빛바랜 개살구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한계는 주민투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은 법령에 위반되거나 재판중인 사항,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 예산․회계․계약 및 재산관리 사항,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 설치․변경, 공무원 인사․정원 등 신분․보수에 관한 사항, 동일한 사항에 대하여 주민투표가 실시된 후 2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사항 등에 대해 두루두루 주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투표를 쉽게 요구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투표를 청구하기는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서 주민투표제도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서도 자신을 민주적이라 포장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착각’을 유도한다. 이 제도들은 시민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커녕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해봐도 소용없다”는 회의주의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경험이다. 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제도들도 이런 경험을 바로잡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곤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제도의 변화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과정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제도는 언제나 악용될 위험을 항상 가진다. 그래서 직접행동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 제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야 제도가 원래의 취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행동은 제도 없이도 기적을 일으킨다.



왜 직접행동이 필요한가?


주민투표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이미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시작했다. 즉 제도 이전에 이미 정치행위가 있었다. 2000년에 고양시장이 백석동에 55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 하자 시민들은 이에 반대해 주민총회를 열고 자발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고양시에 사는 세대 중 43.3%가 투표에 참여했고(그 전해의 고양시장 보궐투표 참여율은 23.1%였다), 88.05%의 시민이 건물신축에 반대했다. 비록 법적인 효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도시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의 부안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에서도 주민투표가 정부의 근거없는 비방을 없애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정부가 온갖 강압과 회유, 속임수를 썼지만 시민들은 소규모 공론장을 형성하며 자기 목소리를 냈고 결국 외부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주민투표운동을 벌였다. 이 투표 역시 72.04%의 시민이 참여했음에도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지만 부안시민의 91.83%가 방폐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고양시와 부안의 사례에서 보이듯 제도 없이도 시민들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제도가 없었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제도가 없음’을 통해 그 제도의 정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안의 주민투표과정을 지켜봤던 한 활동가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주민투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민들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주민투표가 성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우편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2만 가구가 넘는 집들로 투표안내문을 일일이 전달했습니다. 투표에 필요한 투표함, 기표대도 모두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여의 폭과 열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연대했습니다. 40명의 변호사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성사를 위해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에서 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실무를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을 변화시키며 권력이 제도에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시민은 정치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참여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주민투표에서의 참여와 질적으로 다르고, 이런 참여야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력이다.


제도와 운동의 관계를 설명한 말 중에서 나는 함석헌 선생의 비유를 가장 좋아한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집이나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집이나 옷을 맞춰야 한다.


민주적인 제도를 얘기하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더불어 함께 시민을 만들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금방 생명력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져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을 가로막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직접행동을 벌이는 시민들 속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민주적인 제도는 그런 권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에만 참뜻을 실현할 수 있다.



※ 참고한 글


하승우,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 2004)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볼프강 작스 외, 『반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

김현․이호, “주민자치”, 시민의 신문 편집부,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1987~2002』(시민의 신문, 2004)

하승수, “생명과 평화, 자치의 공동체로”, 《빛두레》제 659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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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0.06.22 13:02

 

정치적인 면에서 직접행동은 민중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방법이자 목표이다. 직접행동은 자신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공동체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직접행동은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의 건설이 나의 참여 없이 불가능하고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져도 새로운 부조리에 맞설 가능성으로 직접행동의 자리가 계속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목표이다.


직접행동은 근대사회가 분리시킨 주권과 민중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연결시킨다. 근대국가는 주권을 앞세워 민중을 국민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의지를 선거로 가둬버렸지만, 민중은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되찾고 주권자로 거듭날 수 있다.



직접행동과 주권


유럽의 정치이론들이 주권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지만 그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식민지가 아닌 서구 중심국가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예가 된 자와 노예일 수밖에 없는 자가 똑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즉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만든 ‘식민성’이라는 마음의 특성(心性)을 논하지 않고 권리나 제도, 운동의 차원으로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식민지 민중의 일상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이론을 위한 이론을 추구하는 추상적인 논의들은 그 자체로 타당하고 적절할 수 있지만 적어도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의 변화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도움을 줄만한 이론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세련된 이론이 아니라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발전된 이론들이다(파농F. Fanon이나 프레이리P. Freire, 라나지뜨 구하R. Guha, 마르코스Marcos 등의 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한 가지 간단한 예만 들어보자. 한국의 도서관들은 자유로이 책을 찾아 읽으며 정보와 지식을 서로 나누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이 교과서나 참고서를 들고 가서 보는 공부방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열람실 좌석표를 뽑으려 새벽잠을 설쳐야 하는 도서관, 뻔질나게 들락거려도 책 한권 찾아보지 않은 도서관, 이런 도서관을 유럽이나 미국의 국가들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왜 우리들은 도서관을 이렇게 인식할까?


도서관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일제는 지배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양민을 만들기 위해 사회교육을 실시했고 도서관 역시 그런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일제는 한편으로 자생적인 도서관 운동을 억누르면서 다른 한편으론 몇 안 되는 도서관을 (당시의 특권계급인) 소수 학생들의 시험준비공간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의 민중들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도서관에 놀러간다는 생각, 도서관이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도서관의 개수를 늘리고 사서를 많이 배치하고 책의 수를 늘린다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이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의식, 무의식, 일상의 경험 속에 스며든 지배의 논리를 바꾸지 않으면, 식민성을 제거할 충격을 주지 않으면, 삶은 쉽게 우리의 앎을 배반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수동적인 사람들이 직접행동을 스스로 포기한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스스로 행동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개화기로 불리는 시기에 민중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재일 역사학자 조경달은 이 시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한제국기는 개명한 지식인이라면 진지하게 백성이란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그것은 민民도 사士라는 지평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식인에게 그러한 사상적 작업을 강요할 정도로 민중운동은 고양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전개된 반일의병투쟁에서 고명한 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민의병장이 여럿 탄생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의적이 많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도적 또한 의적으로서 사의식을 갖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를 장식했던 갑오농민전쟁이나 수많은 민중반란들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이런 정치행동을 통해 민중은 서서히 자신을 주권자로, 변혁의 주체로 인식해 갔다. ‘사발통문沙鉢通文’(주모자의 이름을 사발과 같이 둥근 모양으로 빙 둘러 적은 연판장)을 돌려 민회를 열고 “여기에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전(罰錢, 벌금)’을 징수하거나 ‘훼옥(毁屋, 집을 망가뜨리는 것)’을 하는 식으로 참가를 강제”하며 “이른바 공동체 제제의 논리를 행사”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민중은 장이 열리는 날 토론판을 벌이고 산에 봉화를 피우거나 밤에 산에 올라가 수령을 욕하면서 산호(山呼)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5일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많은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러 도로에 피가 흥건하게 고이던 시절, 관원이 탄 수레를 끌던 수레꾼은 이렇게 그 관원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만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나는 비록 미천한 수레꾼이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차라리 개, 돼지를 태울지언정 너와 같은 무리는 태울 수 없다.”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는 가난한 수레꾼이 관원을 꾸짖을 정도로 사람들의 존엄은 강했다.


이토록 강했던 민중의 꿈과 자부심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확한 표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짓뭉겨지고 비틀렸다’이다. 일제 식민권력은 단순히 사람들을 지배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존엄함을 뿌리째 뽑아서 순종적인 인간을 ‘창조하려’ 했다. 당시 한국을 취재하던 미국 기자 페퍼는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이란 기사에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사람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고, 또 좌우를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는데, 품속에 서류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류는 한 조각, 한 장이라도 일본인에게 발각되면 6개월의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일본인이 일컫는 불령(不逞)한 무리가 아니며 또한 지식층도 아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순박한 소상인, 농부, 규중에서 생활하는 가정주부나 어머니들이었다.” 그리고 박은식에 따르면 일제는 ‘부랑자취체령(浮浪者取締令)’을 선포해서 일정한 직업이나 주소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체포했다. 서울과 각 도시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3주일 이상 3개월 이하의 징역에 처했다고 한다.


단지 정치적으로만 억압을 받은 게 아니다. 식민권력은 민중들의 살림살이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본국민의 이주를 책임지는 전형적인 식민지착취기구로 국유지와 공유지를 약탈할 뿐 아니라 한국 농민의 소작권을 빼앗아 일본농민에게 넘겨줬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민자 수는 100만명에 달했다(이들은 자치기구나 소방대를 조직해서 식민권력의 사조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일제는 땅만이 아니라 살림살이를 통째로 빼앗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인구조사를 핑계로 개인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청결검사를 한다며 물건을 뒤지고 사람들을 때렸다. 세금을 체납하면 집안의 솥과 식기 등의 세간을 경찰이 마음대로 뒤져서 팔고 심지어 굴뚝의 개조나 공사에도 개입했다. 일제는 이런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논리나 근대화의 논리를 내세웠다.


자기 주권 내의 국민이 아니기에 일제는 한반도의 민중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제한하거나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조장하고 묵인하며 존엄을 짓밟고 체념과 순종을 끌어내려 했다. 이런 끔찍한 폭력을 경험하며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존엄을 버리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근대화의 논리인) 약육강식의 경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각주:1]


해방 이후 군사독재는 이런 식민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시키려 했다. 반공주의는 일제의 사회지배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기득권층을 강화시켰다.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기득권층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도 완전히 훼손되지 않았던 민중의 마지막 존엄을 계속 짓밟았다. 일제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정책이 이름과 내용만 바꾼 채 고스란히 이어졌고 심지어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존엄은 자기 삶의 기반인 살림살이와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것인데, 거의 백여년간의 억압은 이런 존엄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 이런 지배의 논리를 찾아내고 존엄의 기반을 회복시켜야 한다. 푸코나 들뢰즈의 분석을 찬양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그런 시사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존엄을 되찾을 방법이 드러난다면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민중을 외치는 사람들조차 그런 회복에 관심이 없고 때로는 회복을 의식적으로 피하기도 한다.



직접행동과 선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성립시킨 것은 선거였다. 성별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성인에게 투표권을 줬다는 점에서 한국의 선거제도는 발전된 듯 보였지만 대표를 뽑는 선거는 근본적으로 민중에게 주권을 돌려주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진정 민중의 주권을 다시 회복시키려 했다면 선거가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의 민회를 복원하고 그들의 정치행위를 보장했어야 옳다. 하지만 미군정이나 기득권층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민중의 정치적 힘을 선거라는 장으로 ‘동원’하려고 했다.


사실 선거라는 제도는 서구의 것이다. 다른 제도들이 그러하듯 서구의 것은 이 땅의 전통과 문화를 뒤떨어진 것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민중은 기존의 방식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는데, 그런 새로운 것에 익숙한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많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선거를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활용했다. 민중들의 존엄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무지하고 쓸모없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조경달에 따르면 한국의 민중은 스스로를 변혁의 주체로 인식했지만 정치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했다. “갑오농민전쟁은 덕망가적 질서관을 전제로 국왕․왕부(王父)환상이 널리 퍼져가는 가운데, 중개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무력적 청원 형식으로 평균주의와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민중반란이었다. 여기에서 민중은 청원자의 역할만을 맡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철저한 민본주의를 표방했지만, 민중 자신의 일상적인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투쟁은 있을 수 없었다.” 즉 갑오농민전쟁이나 그 이후의 많은 민중반란들은 새로운 덕망가의 출현과 그들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민중의 심성, ‘일군만민(一君萬民)’사상을 강화시켰다. 식민지 시기의 농민조합이나 해방 이후의 인민위원회에서도 덕망가의 출현과 그들을 통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경향을 비판하며 민중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려는 운동의 흐름도 있었지만 선거는 이런 흐름을 가로막고 다시금 사이비 덕망가 질서를 확립했다.


이것은 선거의 정치적 중요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선거라는 장 자체가 민중의 정치 에너지를 동원하고 흡수해서 직접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얘기이다. 즉 선거를 통해 민중이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정치학자 러미스(D. Lummis)는 이 점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인민의 복지를 돌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와 다르다. 왕이 진심을 다해 자기 국민들을 돌볼 수 있지만 정부형태는 여전히 군주제일 것이다. 한 정당의 독재가 인민을 섬기는 정책을 채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정당독재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온화하거나 공정한 지배자들에게 은총을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민중선동가(demagogy)는 인민을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대변하리라 약속하며 대중적인 지지(=권력)를 얻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주로 비난할 때 사용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특히 민중선동가가 적절한 상황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약속의 대가로 어떤 이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이 아니다.”


선거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선거에 참여하는 걸 거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정치인이 나타날 수 없으니 모든 정치인을 없애자는 얘기도 아니다. 조금 더 민중의 이익을 고려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고 민중적인 정치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민중의 존엄이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민중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거혁명’, ‘선거승리’란 말은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다리없는 경주마’처럼 모순된 말이다.[각주:2]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흐름이 단절이라기보다는 연속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면 민중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또 한번 속임수에 넘어간 자신에게 ‘모멸감’과 ‘냉소’를 느낄 수밖에 없다.


여러 학자들은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촛불의 힘이 선거의 투표행위로 전환되었다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선거의 승리인가? 투표율, 득표율, 당선율로 정리되는 부르주아 선거판의 논리를 빼면 무슨 기준으로 승리를 논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국민의 생각이 선거결과로 드러났다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다(이미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재보궐 선거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건 자신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거결과나 여론을 무시하는 권력의 태도가 이명박 정부 때만 있는 특별한 일인가? 소위 민주정부라 불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국민의 상식이 얼마나 정책에 반영되었나?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서는 역사가 만들어져야 새로운 역사가 써질 수 있다. 그것은 지난 백 년 동안 민중이 꿔왔던 꿈이자 실현되지 않은 꿈이다. 직접행동은 민중이 뼈 속 깊이 스며든 식민성을 제거하고 존엄을 되찾으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연다. 직접행동이 실패한들 그것이 무슨 잘못인가? 성공하지 못한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고 존엄한 자는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할 수 있다.



참고한 책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알마, 2006)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이연옥, 『한국 공공도서관 운동사』(한국도서관협회, 2002)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

조경달 지음, 허영란 옮김, 『민중과 유토피아: 한국근대민중운동사』(역사비평사, 2009)

조동걸,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해냄, 2002)

D. Lummis, 『Radical Democracy』(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1. 파농의 말처럼 “이주민은 원주민을 악의 본질로 생각한다. 원주민 사회는 단지 가치관이 부재한 사회가 아니다.…원주민은 사악한 무의식이며 맹목적인 힘의 도구다…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마르코스와 사빠띠스따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듭 말하지만, 무기를 든 것은 저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대안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기를 든 것도 우리 얼굴을 가린 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멕시코의 민주적인 변화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더 많은 죽음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성직자라는, 전쟁광이라는 비난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를 비난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계로, 우리가 흘리는 피의 가치를 폄하하고 존엄 대신 명성을 주는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사이렌과 천사들의 노랫소리에도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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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0.01.07 00:02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

 

 

1919년 4월 1일 밤 11시, 경기도 화성시 수촌리의 주민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죽산 봉우리는 마치 산불이 난 듯 환했고 만세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개죽산만이 아니라 쌍봉산, 천덕산, 당재봉, 무봉산 화성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붉게 타올랐고 깜깜한 밤공기를 타고 만세소리는 사방으로 퍼졌다. 일본 헌병대가 총을 쏘며 산기슭을 올랐지만 도망을 치면서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인근 수원에서 위생검사와 도박을 핑계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 경찰 1명이 주민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칠흙같은 밤 수촌리 주민들의 마음은 산 위의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이대로 꿇고 사느니 서서 죽자, 굳은 다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같은 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 놈이 그놈이지만 일제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삶이 더 어려워졌다. 자기 땅을 짓던 사람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대부분이 높은 소작료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제는 일본 모종을 심어라, 뽕나무를 키워라, 매달 가마니를 몇 장씩 짜서 내라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82.9%가 소작농이던 칠곡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안성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었으며 우체국과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일본인의 상점도 부쉈고 심지어 다리나 철도까지 끊으려 했다. 심지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을 대비해 산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기도 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이날 경기도 안성의 만세시위를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이라 불렀다.

 

유관순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유관순 누나와 태극기, 만세 삼창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어린이, 거지, 기생들도 만세를 외치며 시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심지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 돌아다니는 전문 시위꾼인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데 누가 감히 운동을 이끌었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3월 1일만이 아니라 3월부터 4월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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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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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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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21.4

78.6

34.6

65.4

 

<표>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점 수그러들었지만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그 기운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말과 4월 초는 시위의 정점을 이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거리에서 일제와 맞섰다. 때로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때로는 낫과 몽둥이, 호미를 들고 경찰, 헌병과 맞섰다.

그 엄혹한 일제 시기에, 나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헐벗은 삶에서도 저항은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려 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했고 을사조약 이후에도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는 민중의 삶 자체를 뿌리째 뽑아 그 삶이 외부의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제는 행정부, 사법부의 주요 관리들을 일본인으로 교체할 뿐 아니라 헌병과 경찰의 수를 대폭 늘리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과 경찰은 단순히 범죄를 단속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맡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과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1910년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결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12년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의 경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땅들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를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걷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비싼 소작료를 낼 뿐 아니라 일본 모종을 쓰고 일본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종자를 골라 모를 심고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을 매겼다. 또한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일제의 만행은 이렇게 개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저항의 힘이 자치공동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자치공동체인 동이나 구를 없애고 강제로 면으로 통합시켰고 대부분의 면장을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꿨다.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지배구조로 흡수시키려 했다.

3·1운동은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내몰리고 뿌리 뽑히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외쳤다.

이렇게 민중들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본의 간섭 없이도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음을, 그리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대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시는 헐벗은 삶으로 내몰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가 국가의 폭력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자기 목숨을 건 자발적인 정치의 운동이었기에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시위를 막아도 지방으로 들꽃처럼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만세시위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일제는 가늠하지 못했다.

 

직접행동과 전쟁상태

 

이런 민중의 의지를 보았기에 일제는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민중이 일제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향하자 일제는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위대, 소방대까지 동원해서 민중을 탄압했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위들은 민족대표들이 주장했던 평화시위를 따랐지만 일제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헌병이나 경찰이 총을 쏘고 주동자를 연행하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도 돌멩이, 죽창, 삽, 도끼 등을 든 시위로 변했다. 그래서 <표>에서 드러나듯 3월 말이 되면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은 계획적으로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고, 평안도 안주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3명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직접행동에 일제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맞섰다. 화수리의 경우 일제는 마을의 집 30채를 불지르고 마을주민들을 끌고가 갖은 고문을 다했으며 주모자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안성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과 함께 보병부대가 주민들을 검거에 나서 1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으며 9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 부대가 학교에 야영을 하며 한 달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권력에 맞섰던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고 적었다. 일제는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을 저지른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런 피의 전쟁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민중의 정치를 다시 치안의 틀에 가두기 위해 일제는 ‘문화정치’를 펼쳤다. 이 문화정치는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작가 이광수를 비롯한 거짓된 자치주의자들이 민중들의 자치의지를 대신하려 들었고 한국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피를 팔아 자신들의 이득을 꾀했다.

스스로 다스리며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기득권층의 국가는 역사를 왜곡해서 3․1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독립’이라는 국가주의의 목표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와 정치행동은 모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만 남아야 했다.

 

3·1운동과 촛불집회, 앞으로의 사회운동...

 

역사학자 이정은의 말처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이튿날 아침 각처의 집 대문 앞에서 광무황제 독살설을 알리는 격문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일제 경찰도, 이를 추진했던 민족진영에서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되어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청소년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건은 터진다. 이런 사건은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터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3·1운동은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패배라 여기지만 1920, 30년대의 운동을 보면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불납동맹’, ‘아사동맹’, ‘소작권상실 걸인단’을 만들어 싸웠고 ‘소작인조합’, ‘농민조합’은 전통적인 자치공동체를 이용해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키려 했다.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아나키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강연회와 야학, 독서모임에서 대중과 더불어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위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중앙의 지도부가 전국의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자기 동네에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민란과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쉽게 그 불길을 잡히지 않았고 민중의 삶이 그 운동과정과 방식에 반영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3·1운동은 스스로를 거름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의 불씨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곳은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를 돌아가며 심듯이 짓밟힌 곳은 잠시 숨을 죽였고 싹을 틔운 곳은 그 숨이 끊이지 않도록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사상’과 ‘자기조직화’로 맞섰다.

3·1운동은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들은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그러니 3․1운동은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2009년을 마감하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운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2010년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이념, 새로운 정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준비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참고한 책

 

이정은 지음,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국학자료원, 2009).

박환 지음,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200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청년사, 1989)

조동걸 지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함석헌 지음, 『생활철학』(서광사, 1966)

함석헌 지음,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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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8.02 00:10

『축복받은 불안』(에이지21, 2009)이라는 책의 제목은 참 기이하다. 모두가 불안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시대에 저자인 폴 호켄Paul Hawken은 불안과 축복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불안』은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런데 책의 원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약간 드러난다. 보통 ‘blessed ignorance’라는 표현을 ‘모르는 것이 약’으로 번역하듯이, 원제목인 ‘blessed unrest’는 ‘불안한 것이 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호켄은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인류의 삶의 불안해지는 만큼 그 위기와 불안을 바로잡으려는 다양한 운동들이 자연스레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않거나 믿지 못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현실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지구를 살리는 아래로부터의 면역운동

 

불안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듯 호켄은 생태계 파괴에 맞섰던 브라우어와 카슨,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했던 파크스와 소로,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던 부족민과 이름 없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기업을 감시하는 ‘파수꾼 단체Keeper group’, 기업과 프로젝트, 제도, 지역을 감시하는 ‘감시 단체Watch group’, 현장에서 직접 환경을 보호하는 ‘친구단체Friends organization’,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방어꾼 단체Defenders’, 기업광고나 홍보기업의 숨은 진실을 폭로하는 ‘문화방해자Culture jammers’, 슬로우 푸드운동, 사회적 기업 등 수많은 운동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사용한다. 세상이 위기에 처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운동들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켄은 이런 운동들이 몸에 침입한 병균을 치료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면역체계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병에 걸리면 몸이 알아서 치료를 시작하듯이, 이런 다양한 운동들은 정치적인 부패나 경제적 질병, 생태계 파괴와 같은 지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몸이 하나이나 팔과 다리, 가슴 등의 역할이 다르듯이, 이 운동 또한 각자가 관심을 두는 중점적인 의제에 따라 지구상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러면서도 이런 운동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접속되어 불공정이나 부조리에 맞서는 힘을 더욱 늘리고 있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에 맞설 만큼 때로는 그 힘이 강력해지기도 한다.

과거의 경직된 운동과 달리 이런 운동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시민들의 필요와 지식에 의존해 삶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는 흐름,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흐름,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을 존중하고 그 흐름에 힘을 더하고 있다. 호켄은 이 운동이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모든 인간에 대한 공평함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형태가 제각각이지만 호켄은 이 운동들이 환경보호, 사회정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토착문화라는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얽혀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환경보호운동은 지구를 죽이는 병적인 정책에 대한 인류의 면역반응으로, 사회정의운동은 가족과 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제적/법적 병원균에 대한 면역반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유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만 자연과 사람이 함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기에 토착문화는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호켄은 이런 세 가지 큰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라고 본다.

운동의 형태가 작고 다양하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다. 호켄은 그런 회의적인 평가가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이런 운동이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고 사람들이 운동에 깔린 다양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미 수많은 운동이 실제로 활성화되고 있고 그러면서 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 고든 무어, 클린턴 같은 강자들도 기부금을 내거나 재단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면역체계가 강해져서 지구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호켄이 책 뒤에 붙인 부록은 이런 가능성이 단지 공상일 수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다만 호켄은 “면역반응이 현재는 아주 많이 불완전해서 많은 실패를 거듭할 것”이고 “어떻게 함께 작용해야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인정한다. 인간의 면역체계가 질병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듯이, 이 운동도 분명 실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켄은 이런 운동이 성공하려면 ‘자아인식능력’, 즉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함께 모여 행동해야만 인류는 불안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행동, 소비행태를 바꾸는 과정에서만 자치와 시민의 힘은 치료되고 복원될 수 있다.

 

 

대안은 무수히 많다!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위기들을 두려워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로 나서자고 주장하는 점에서 호켄의 얘기는 충분히 귀담아 들음직 하다.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호켄만이 아니다. 가령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는 『직접행동』(교양인, 2007)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을 소개하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에 주목한다. 호켄이 아래로부터 다양한 운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핀다면, 카터는 지구화라는 현상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이 어떻게 직접행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다룬다.

그리고 리처드 스위프트Richard Swift는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이후, 2007)에서 권력의 중앙집중화로 무기력해진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심각해진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한 방법이 바로 ‘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생태민주주의가 개인의 욕망과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단초가 될 것이고 남반구 전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중의 노력이 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을 것이라고 스위프트는 기대한다.

각기 다른 개념에 주목하지만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 모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불안을 벗어나려는 풀뿌리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과 그들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지구의 파괴를 막고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리라 기대한다. 허울 뿐인 세계화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에 매달렸던 헛된 꿈보다 지역의 고유성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삶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대안의 부재보다는 대안에 대한 냉소나 무관심이 우리의 삶을 더욱더 위태롭게 한다.

 

 

여전히 이념은 필요하다!

 

그런데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는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해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인다. 카터가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하려 하고 스위프트가 자유민주주의를 강한 민주주의로 대체하려 한다면, 호켄은 그 질서에 강하게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켄은 운동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토대를 다진 하이에크의 사상을 공진화coevolve의 관점에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부조리하고 왜곡된 정치/경제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다양성만 강조하는 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최상은 아니기 때문에, 자아인식능력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성장할 수 있다. 좋은 활동들의 리스트가 자동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피하려 하기에 호켄은 세계화가 작은 문화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다양성을 장려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가령 환경보호론자와 토착민이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맺어 “환경보호단체는 정치적 캠페인 조직경험이나 정부 및 언론동원능력 등 자원을 제공하고, 원주민단체는 조상들이 살아온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라는 명분을 제공한다”면 환상의 콤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 이런 국제적인 역할분업이 분명 초국적기업의 나쁜 영향을 가로막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분업은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끔 한 세계의 불평등한 지배구조 자체를 바로잡지는 못한다. 즉 지금 당장은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평생의 건강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축복은 아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고 불안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풀뿌리 민중의 투쟁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힘을 모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가권력과 초국적 자본의 힘을 없애고 생명의 힘으로 삶의 터전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듯하다. 가속화되고 있는 파괴의 흐름을,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삽질을 막으려면, 적절한 시간에 저항의 힘이 살아나야 한다. 호켄은 생태학적 복원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치워주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과정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사라진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듯이, 한번 파괴된 생태계는 쉽게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인간의 면역체계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념을, 전일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이데올로기에 집착해 다양성과 활력을 상실한 건 사실이지만 역사를 거치며 누적되어온 그 희망은 여전히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오래된 희망에 새로운 기를 불어넣고 살리는 건 단순히 낡은 틀을 부여잡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한다(한국의 경우도 맑스주의가 풍미했던80년대 이전의 다양하고 풍부했던 지적 전통과 다양한 운동들을 다시 평가하고 되살려야 한다).

물론 호켄이 이 점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호켄 스스로도 웬델 베리의 말을 인용하며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패턴을 위한 해결책solving for pattern’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는 축복의 길잡이가 될 좌표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념의 시대는 아직 가지 않았고 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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