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지역사회를 살릴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의제, 지역재생, 마을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 외국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다양한 방법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안적인 지역발전의 모습을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방법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허나 아무리 혁신적이고 대안적인 방법이라도 그것이 우리사회의 성격과 맞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1980년대에는 국가의 성격을 놓고 사회구성체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치열함이 없고 더더구나 지역사회에 관련해서는 아무런 논쟁도 없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한 방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프로젝트만 있지 장기적인 발전전략이나 비전이 없다. 지식인, 활동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단기적인 사례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새로 들여온 방법들도 이런 단기적인 프로그램을 짜는데 이리저리 짜깁기식으로 활용될 뿐이다.

장기적인 전략을 짜려면 우리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 나는 지난 100년 이상의 흐름을 봐야 지역사회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가령 동학혁명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자치·자립에 대한 욕구와 능동적인 정치행위는 두레와 동회, 계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들로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그런 조직들은 단지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삶까지 두루 헤아리는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 강력한 뿌리가 있었기에 일제 식민지, 군부독재 시기에도 다양한 형태의 조합운동과 저항운동이 가능했다.

그렇게 강했기에 일제 총독부와 해방 이후의 미군정, 군부독재는 그런 자치와 자립의 흐름을 파괴시키고 자기 내부로 흡수하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런 지배구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지배구조를 깨고 자치와 자립의 구조를 회복시킬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그런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재원과 사람만 구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꿈같은 얘기들만 오가고 있다. ‘모델만 만들면’ 어떤 지역에서든 똑같이 찍어낼 수 있다는 환상이 팽배해 있다.

그리고 그나마 얘기되는 대안적인 지역비전마저도 중앙집권화된 국가전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진보전인 전략, 산업화 노선을 위해 희생을 거듭해온 농민과 농업, 농촌공동체를 회복시킬 진보적인 지역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정부 주도의 경제발전전략을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지역전략마저도 중앙에서 구상된다. ‘우리가 집권하면’이라는 꿈같은 얘기에 다른 모든 걸 보류해온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또한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삶터와 일터를 철저히 구분했고 일터의 진보성이 때로는 지역생활의 보수성과 연결된다는 점은 회피되었다. 왜 진보세력은 언제나 지역사회에서 소수파를 벗어나지 못하고 강력한 연대의 관계망을 구성하지 못할까? 일상생활이 어떻게 체제와 촘촘히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지, 일상의 공간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참여를 가로막고 의식을 보수화시키는 방향으로 재생산되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 매달려’ 생활을 방관해온 지도 너무 오래 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에겐 기대고 싶은 희망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이 생각하는 진보적인 지역체제는 대체 어떤 것일까? 영국 노동당의 좌파시장 켄 리빙스턴이 이끌던 런던은 한때 대처 정부에 맞서는 양산박이 되기도 했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뽀르뚜 알레그리라는 도시를 자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만들었고 전 세계적으로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우리 진보정당의 그림은 무엇인가? 의정활동 우수의원을 꼽으면 대부분이 진보정당 의원들인데도 왜 선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까? 현안에 밀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지 못한다면, 진보정당의 전략은 모래성일 뿐이다.

 

진보정치의 ‘진짜 시험대’가 필요하다


6․2 지방선거가 끝났다. 선거 결과에 대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한나라당의 패배라는 사실 외에 진보정치의 성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무엇으로 판단해야 옳을까? 중요한 쟁점의 부각, 후보자 당선비율, 비례대표 정당지지율, 이런 기준들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런 기준들은 부르주아정치의 기준과 얼마나 다를까? 승리를 판단할 수 있는 진보정치의 기준은 아직 세워지지 않은 듯하다.

유권자들이 꿨던 꿈은 이번 선거를 통해 얼마나 현실이 되었을까? 4대강 사업이 중단되고 삼성과 같은 재벌이 해체되고 남북한의 긴장이 완화되는 꿈은 얼마나 실현되었나? 그리고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4년 후의 지방선거 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유권자는 얼마나 될까? 몇몇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정치혁명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니 진보정치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당선된 3곳의 구청이 진보정치의 미래에서 중요한 시험대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단일후보가 당선된 여러 지역에서도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실험을 진보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과거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단체장으로 선출되고 의회에서도 다수당을 구성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경험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공식적인 평가도 찾기 어렵다. 다른 무엇보다도 의원의 의정활동이나 구청장의 구정활동을 평가하는 기준이 없다는 점은 큰 문제점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경험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무엇이 진보적 지방자치의 걸림돌이고 그 걸림돌을 제거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공동정부 구성과 관련해서는 과거의 정치권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인수위나 주요한 몇몇 자리에 몇몇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특히 민주당의 지역조직은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묶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정부 구성에만 관심을 쏟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 진보정치의 시험대를 만들기는커녕 구태의연한 권력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 수도 있다. 그러니 밀실에서 타협을 하거나 정책을 만들지 말고 공개된 광장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진보정치의 파트너는 후보를 단일화한 정당이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이다. 그러니 주민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참여예산제도를 비롯해 이미 조례로 도입된 각종 제도들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복지관과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등의 시설들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작부터 진보정치는 뭔가 다른 점을 주민들이 실감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다. 주민들의 삶이 바뀌어야 진보적 지방자치가 가능하다. 그러니 주민들이 움직이는 동선, 주민들이 일하고 소비하며 쉬는 공간, 주민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한다. 특히 당선된 교육감들과 더불어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시민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중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과제들부터 하나씩 해결해가야 한다.


사실 이런 과제들을 4년 안에 모두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4년을 보지 말고 8년, 12년을 장기적으로 보면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면 주민들도 기꺼이 진보정치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 할 것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브이의 가면과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말한다. “그는 당신이고 저이기도 했어요. 그는 우리 모두였어요.”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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