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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20 꿈에서 현실로, 역사 속의 농민공동체(녹색평론)
posted by 몽똘 2013.09.20 12:59

 이 국가와 저 국가의 사잇길


2008년에 때 아닌 논쟁이 건국 60주년 기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60주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했고, 60주년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의 실효성을 주장했다. 아주 식상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논쟁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배워왔기에 거의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질 기회를 마련했다. 도대체 우리에게 건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친일파를 몰아내기는커녕 친일파에 맞섰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고 기득권층의 배만 불렸던 대한민국이 언제 누구의 뜻을 받들어 세워졌는지가 왜 중요한가?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는 더욱더 본질적인 질문, 즉 우리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먹거리조차 자유로이 결정할 수 없는 나라에서 왜 우리는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국가가 내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 나는 계속 국민이어야 하는가? 국민으로 살지 않으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인가?

 

그동안 이런 물음을 던지지 못한 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국사(國史)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이다. 민족주의는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주의는 그들을 비판하며 노동자․농민의 세상을 주장했지만, 둘 다 자기 역사의 틀을 국가에서 찾았다. 각자가 자신의 국사를 기록하고 그 정당성을 고집해 왔기에, 우리는 국가가 아닌 다른 무엇을 통해 나와 우리의 행복을 그려본 적이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데 역사나 국가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내 옆의 가족, 친구, 애인조차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태극기를 흔드는 애국자로 변신한다. 평상시에 “왜?”라는 물음을 던져본 적 없기에 국가는 은근히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충성을 바쳤건만 국가가 내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내게 요구할 뿐 내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딱히 맞설 방법도 없고 대안도 없으니 무섭고 더러워서 참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은 더 불안하고 서글프다. 지금 우리가 서글픈 것은 역사를 트집잡는 뉴라이트의 억지보다 새로이 역사의 흐름을 짚을 좌표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공허하다 하더라도 이념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밤하늘에 뜬 별을 보고 사람들이 길을 찾듯이, 이념은 우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뉴라이트들이 지난 역사를 부여잡고 온갖 트집을 잡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제 갈 길을 잘 찾아가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이 아니라 국가나 재벌이 정해놓은 좌표를 보며 쫓기듯 삶을 산다.

 

그런데 조선, 일제 식민지, 미군정,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놓인 사잇길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국사의 틀을 벗어나 풀뿌리 민중들이 살아왔던 기록을 엿볼 수는 없을까? 설령 그런 기록 자체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그런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국가와 자본이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하던 시대를 돌이켜보려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당시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오래된 미래’라는 말의 참신함이 어느 정도 냉랭해진 지금이지만 저 곳의 얘기가 아니라 이 곳의 얘기라면 다시 온기가 돌 수 있지 않을까?



식민지 시대의 저항하는 농민공동체


1980년대 초 라나지뜨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인도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고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인식하기 위해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스스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에게 빌려온 개념이지만 이들은 이것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을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은 식민권력과 토착권력을 전복시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석하며 농민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발턴 개념을 빌려온 연구들이 제법 있지만 그 연구들은 주류 역사학을 비판하거나 탈근대/변경의 역사를 주장할 뿐 역사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며 농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재구성하지 않았다. 기존의 국사보다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권력의 결을 거스르며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거칠게나마 우리 농민들의 저항과 농민공동체의 형성을 살펴보려 한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이 제안했던 아나코-코뮨주의(anarcho-communism)라는 개념은 일제 시기 농민공동체의 의미를 되짚어보는데 유용하다. 아나코-코뮨주의는 그동안 《녹색평론》에 몇 차례 소개했는데, 농업과 소공업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마을공동체를 뜻한다. 외국말이라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농민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은 낯설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서로 돕고 보살피며 함께 꾸려가는 삶은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농민공동체가 지금처럼 낭만적인 향수로 얘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실제 현실의 버팀목이었다. 19세기부터 한국의 농민들은 민란(民亂)을 일으키고 면과 동리 단위로 모정(茅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과 같은 공간에서 촌회(村會)나 향회(鄕會)를 열며 자치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제는 한국의 마을공동체들을 파괴하려 들었다. 이미 동학운동을 경험했던 일제는 자신의 지배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반이 농민공동체임을 깨달았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을 폐지했고 1914년에는 부군면을 통합하고 면장을 임명했다. 마을이름도 ○○동으로 바꿔서 마을의 정체성을 없앴다. 그리고 경찰과 헌병의 수를 매년 늘리고 그들에게 범죄단속이나 첩보수집만이 아니라 모종심기와 토지측량, 위생검열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일제의 식민지 지주제 또한 농민들의 삶을 뿌리채 뽑으려 들었다.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다 일고(日雇)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을 만드는 비용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며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일제조차도 농민층의 붕괴를 보다 못해 1933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며 농가경제의 자력갱생, 건전한 농민정신 함양을 주장할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농민들은 이런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 초기부터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르는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주로 해산된 군대나 지방유림의 지도를 받았지만 많은 농민

들이 이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일어난 사건이고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씨의 역사”,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3․1운동을 민족이나 독립의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벌였다.

 

3․1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중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와 자급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농민들은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서류철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회의를 열고 공동체의 일을 함께 돌봤다.

 

일제가 3․1운동을 힘으로 짓누른 뒤에도 풀뿌리 민중들의 열망은 쉽게 식지 않았고, 1920, 30년대의 농민운동은 농촌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다.



농민공동체에서 싹튼 다양한 사상들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지주제에 맞서던 농민들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국사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을 기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역사관은 농민의 저항을 개량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했다. 기존의 역사관은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해방의 의미를 강조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며 해외의 독립운동을 주로 다뤘다. 그리고 사회주의 관점은 국내의 농민운동을 혁명과 개량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사회주의 계열만을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봤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관점은 천도교 계통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나 기독교계의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을 일제 농민개량화정책의 결과물로 보며 개량주의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을 개량주의로 재단할 수 있을까? 기독교계의 손정도(孫貞道)는 “우리가 時下를 쫏차 基督의 精神을 發揮하나니 朝鮮 內地나 滿洲나 基督敎的 新農村이 組織되여야 하겟고 압흐로는 네게 잇는 所有를 다 이 農村에 드리노켓느냐 하는 問答으로 그 이가 敎人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거시다”라고 말하며 소유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손정도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해 “無産農民으로서 金錢이 잇는 資本家들을 抵抗하고 스사로 生産하기가 不能할지니 不可不 貧者 貧者끼리 協同互助하는 것으로 生産의 資本力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이용도(李龍道)는 톨스토이를 스승이라 부르며 빈자와 연대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이용도는 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는 파문을 겪으면서도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만들려 했다. 또한 3․1운동 이후 점점 보수화되는 교회에 실망하던 이대위(李大偉)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YMCA를 중심으로 사회복음운동과 농촌협동조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유재기(劉載奇)는 협동조합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화하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평가하며 장로회 농촌운동을 이끌었다. 유재기는 독일 라이파이젠식 신용조합과 영국 로치데일식 소비조합을 만들어 소농의 자립과 협동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흐름을 모두 개량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자기 재산을 모두 공동체에 바치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는 개량주의자들일까? 빈부와 계급을 넘어 사랑과 협동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이 개량주의로 평가되어야 할까?

 

그리고 당시의 농민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으로 구분하는 것도 위험한 시각이다. 일제 시기의 농민운동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조동걸은 사회주의운동이 소작쟁의를 자신들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부러 사회주의자를 만들었던 경우도 허다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을 개량과 혁명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농민공동체에서 싹트던 다양한 사상들을 새로이 평가할 수 있다. 가령, 톨스토이가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자급하는 농촌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음을 생각하면, 앞서 얘기한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 아나코-코뮨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상에 맞춰서 현실의 농민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농민공동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상이 재구성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외국의 이론을 좇아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상을, 그리고 농민공동체 속에서 싹트는 자치와 자급의 이념을 볼 수 있다.

 

그 점은 천도교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천도교계의 김일대(金一大)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지만 동학당(東學黨)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로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겟다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가진 교정합일체(敎政合一體)라고 주장한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농민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얻고, 농민대중의 교양을 향상시키고 농민대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세우고 소비조합운동, 생산조합운동, 기술향상운동, 경제균형운동(經濟均衡運動)을 펼쳤다. 김일대에 따르면, 1930년 조선농민사가 천도교청년당과 통합하면서 불과 10개월만에 새로 들어온 사원이 3만명, 새로 만들어진 군단위 농민사가 50개소, 리단위 농민사 1,000개소라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일대는 조선농민사가 조선 전체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농민사는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공동노동조직을 공동경작계로 꾸리고 군단위마다 공생조합(共生組合)을 만들며 농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조선농민》과 《농민》등의 잡지를 발행하고 강연회를 열며 계몽운동과 농민야학에도 힘썼다. 《조선농민》은 야학의 교재로 사용될 〈농민독본〉, 〈농민과학 강좌〉, 〈위생강좌〉, 〈상식문답〉 등을 연재하고 농민야학과 귀농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농민》과 《농민》이 아나키즘의 경향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지만 국문학계에서 이런 논의가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조선농민사의 중농주의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보다 아나키즘에 기반한 자생적인 이념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 잡지에 글을 실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공동경작제를 통한 이상촌건설을 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허문일(許文日)의 〈自主村〉은 그런 이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얘기된다. 문학평론가 김택호는 허문일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를 강조했던 인내천주의가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거부하고 이상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소통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문학작품만이 현실의 노동조직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각 군의 농민사들은 공동경작에 관한 규약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공동경작계는 협동노동을 공동체의 규약으로 발전시키며 서로 돕고 보살피는 자급과 공생의 체계를 마련했다. 조선농민사만이 아니었다. 1926년 6월 전진한(錢鎭漢)이 일본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는 “①우리는 협동․자립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의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②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조합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방학 동안 경상북도 일원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고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래서 1928년 11월에는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

 

그런데 이 협동조합이야말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기대를 걸었던 삶의 양식이었다. 독일의 사상가 란다우어(G. Landauer)가 말했듯이 협동조합의 정신인 서로 돌봄(mutuality)은 빈곤-노예-노동-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바꾸고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서로 돌봄은 돈의 지배를 없애고 일을 하고자하는 모든 사람이 일하게 하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도 협동조합운동에 많은 노력을 쏟았을 뿐 아니라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노동조직에서 상호부조의 가능성을 찾았다. 따라서 이런 노동조직 자체가 아나코-코뮨주의와의 강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동학과 아나키즘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강조했던 바르게 이해하고 익히고 실천한다는 신경성(信敬誠)의 수행체계, 한울님이 네 몸 가까운 곳, 천지생명체에 모셔져 있으니 먼데서 구하지 말라는 인내천의 사상, 사물이 자기 속의 씨앗을 스스로 틔우며 조직해간다는 기화(氣化)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즉 몸소 겪고 부딪치며 현실 속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자기 밖의 본질에 갇혀버린 고대와 근대의 정신을 비판하며 참된 자아(ego)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 정신과 육체, 사물과 본질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동학과 유사하다(사상적인 면은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 더 자세하게 다루고 싶다).

 

이처럼 식민지 시기의 농민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농민들은 각 마을의 ‘촌계’, ‘동계’를 디딤돌로 삼아 민간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동회’나 ‘리회(里會)’같은 공동체적 연대를 이용하여 ‘면민대회’나 ‘촌민대회’를 열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했다. 농민들은 “상호부조의 원칙에 의하여 정의를 지지하며 이상에 資할 과학으로 호상부조의 원리 아래 생존권 확립을 期하는 ‘이상향’을 지향”하기도 했다. 이상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명식(金明植)과 김사국(金思國) 등이 활동했던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서울청년회와 교류했던 전라도 지역의 사회주의운동들은 농민공동체를 디딤돌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완도 근처의 작은 섬인 소안도(所安島)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조선농민사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여 함께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과 ‘살자회’도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하자는 강령을 결의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농민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상의 흐름을 놓치고 그동안 역사를 아주 좁은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다. 당시 농민공동체에서 움트던 사상을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농민들 자신이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고 공동체라는 기반이 그런 저항과 새로운 창조를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다만 일제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았으면서 미처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진 아나키즘 공동체


그렇다면 아나코-코뮨주의의 지향을 실현한 농민공동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일제 하의 한반도에서는 그런 이상촌을 찾기 어렵다. 춘천 신북면 천전리지역, 양주군 봉안촌지역, 북간도 어복촌, 안희제(安熙濟)의 발해농장 등의 이상촌 운동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그 이상촌과 아나코-코뮨주의와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 밖의 북만주에서는 잠깐 동안 아나코-코뮨주의를 따르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金佐鎭)이 김종진(金宗鎭),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가 만들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4년 4월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1927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1929년 7월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 했고 항일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려 했다.

 

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때 마침 당시 신민부는 무장투쟁노선을 주도하는 군정파와 일상적인 정착을 시도했던 민정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군정파를 주도하던 김좌진이 정착과 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심하고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1929년 여름에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고 이들은 상호부조와 자유연합이라는 아나코-코뮨주의의 조직원리에 따라 자치적인 농민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김종진은 “농민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상호단결하여 맺어져야한다는 것”이라고 봤고 한족총연합회를 지도자의 조직이 아니라 “농민자신의 자의적인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 김종진은 “주민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공동체로서 그들의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하는 농촌자치체”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북만주의 지배권을 다투던 화요파 만주총국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이후 한족총연합회의 핵심인 김좌진과 김종진,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등을 연이어 암살하고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한족총연합회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영향을 받아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이후에 농민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6년 3월 10일에 조선농촌자치연맹(朝鮮農村自治聯盟)은 “①오등(吾等)은 자주 자치적 생활의 실천으로 농촌의 조직화를 기함. ②오등은 농촌의 합리적 경영을 위하여 공동경작, 생산수단 및 시설의 공동화를 기함, ③오등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하여 농촌 실정에 적합한 공업 시설의 완비를 기함, ④오등은 농촌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협동조합적 기관의 철저 보급을 기함, ⑤오등은 비경제적 제 생활양식을 개선하여 생활의 과학화를 기함, ⑥오등은 우리의 교육급 문화기관의 완비를 기함, ⑦오등은 오등의 보건을 위하여 후생시설의 충실을 기함, ⑧오등은 상호부조적 윤리관의 실천에 의하여 국민도덕의 앙양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의 기원(祈願)은 그 강령을 이런 마음으로 노래했다. “사람살이의 터닦은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땀과 눈물은/ 온 사람의 겨레의 살터를 닦았다. 사람들의 온 겨레를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그들의 땀과 눈물은/ 온 세상을 입히고 먹이었다. 터닦고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이 자유의 씨를 그터에 뿌리고 가꿔라/ 온 세상의 겨레는 그 가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계속 좌절되고 말았다. 자치․자급의 농민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들이 계속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국가의 개입과 자본주의의 침투로 계속 좌절되었다. 그러니 공동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힘으로 파괴되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해 왔기에 지금 우리에게 공동체는 국가보다 훨씬 낯설 뿐 아니라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국가를 통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사유하지 못하고 국가를 통한 것만이 현실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진정 우리가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공동체는 결코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는 극렬하게 국가에 저항했고 그랬기에 국가는 공동체의 힘을 빼기 위해 새마을, 자유총연맹같은 끄나풀을 심고 토호들을 만들어 공동체 내부를 파괴했고 협동의 힘을 가로채기 위해 농협, 수협, 신협 등을 만들었다.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농촌과 농민공동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농민공동체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이중의 식민지라 얘기될 수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상과 이념의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시가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촌은 이중의 식민지이다. 이중의 식민지이기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손쉬운 과제일 수 없다.

 

이시백 작가의 소설 《누가 말을 죽였는가?》(삶이보이는창, 2008)를 읽으면 농민공동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색하다. 지금 우리 농촌의 실제 모습은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에 등장하는 낭만보다 한미FTA라는 종말을 눈앞에 두고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무기력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 인구의 7% 정도로 줄어든 농민들이 세상의 능동적인 주체로 나서기는 어려운 듯하고 그들이 꿈꾸던 세상 역시 이미 옛날 이야기로 변해버린 듯하다.

 

하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들만 농민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농민이었듯이, 지금 도시에서 뿌리를 잃고 헤매는 존재들은 ‘미래의 농민’들이다. 농촌이 몰락하면 그 다음은 소도시가, 식민지의 대도시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과거의 농민들이 협동과 관계라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미래의 농민들은 홀로 고립된 채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먹고 입고 자는 곳, 어느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우리가 직접 짓고 만드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안을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대안을 살아야 한다. 혼자서 살기는 어려우니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니 농민공동체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과거의 농민공동체가 저항의 기반이자 미래의 이념을 배양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온갖 위기를 헤쳐가려면 우리는 다시 삶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을 찾아야 한다. 무서운 속도로 식민화 과정을 밟아온 한국사회가 식민성에서 벗어나 자아를 되찾으려면 다시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공동체는 소비의 도시를 벗어나 자급과 자치의 기반을 갖춘 농민공동체이어야 한다.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며 서로 보살필 수 있는 든든한 공동체가 있다면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만일 닥쳐올 에너지와 식량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국가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녹색성장’에 포섭되고 있다(조력발전, 풍력발전 등 수많은 녹색성장이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공동체가 아니면 무엇이 중앙집권화된 국가에게 자치를 요구하고 빈곤과 비참함으로 내모는 시장을 통제할 힘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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