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방자치제 ≠ 풀뿌리민주주의


정치는 단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적인 장에서 펼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주로 정치를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무대로 좁혀서 보거나 정치적인 사건을 흐름보다 인물로 본다. 그러다보니 실제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을 정치의 눈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정치인에게 의존하지 정치인을 활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 권력에게 감시나 탄압을 받은 경험들(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도 친지나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간접경험으로)은 정치의 장에 들어서는 걸 움츠리게 만든다. 제도정치, 생활정치, 삶정치, 여러 개념들이 떠돌고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리고 제도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제도를 원래 목적에 맞도록 운용할 사람과 문화가 필요하다. 목적에 맞도록 제도의 방향을 정하고 논의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치열하게 갈등하고 소통하고 합의하며 공존할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황은 사람을 지원하고 문화를 만드는 흐름을 부수적인 것들로 여긴다. 조례나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과정에는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힘이 집중되지만, 정작 그 제도를 운용할 사람을 교육하고 지원하며 문화를 만드는 과정에는 힘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도는 상당히 빨리 만들어지지만 정작 제도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가 1991년에 부활되었지만 자치를 실현하고 있는 지역은 드물다. 모범사례로 얘기되는 몇몇 지역들이 있지만 그 지역들도 꼼꼼하게 살펴보면 몇몇 인물이나 몇몇 단체가 밖으로 부각되는 것이지 지역사회 자체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고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공개적인 장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며 삶의 주체로 성장하고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결정들에 개입할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노력들이 끊임없이 제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때 풀뿌리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되고 정치를 경험하지 못하며, 제도를 활용하거나 참여문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풀뿌리민주주의가 공허한 가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뜻은 좋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한 가치. 그러다보니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보다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시장이나 군수같은 단체장들은 지역사회의 ‘제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왕이 있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으려면 먼저 지금 이곳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어떤 정책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지역사회 내의 평판이나 명망을 수집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면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라는 역사적인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만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의 지역사회지배구조를 분석하면 그 실체가 조금 드러난다. 일단 구조적인 면에서, 지역사회라 해서 중앙정부와 재벌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방정부로 많은 권한이 넘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정부가 돈줄을 쥐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입에서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이 7: 3이라면 지출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비중이 3: 7로 역전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여전히 중앙이 기획한 사업을 지방이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부가 기획한 사업을 지방정부가 대행하고 있기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부의 운영구조가 분권화되어 있지 않고, 지방선거 공천권이나 공무원 인사권은 정치인과 공무원의 활동범위를 통제한다. 그리고 소수의 재벌들이 한국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지방의 지사들이 거둔 수익은 수도권의 본사로 송금된다. 지역의 토착기업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고, 대형할인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편의점, 프랜차이즈산업이 지방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중앙언론이 한국사회의 여론을 지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도 한국은 여전히 중앙집권형 국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정부에 위임된 집행권을 단체장이 자기 마음대로 행사한다. 대통령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장은 지방정부의 예산을 쌈짓돈삼아 부패를 일삼기도 하고 재선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터무니없는 사업들도 집행한다. 지방정부의 예산집행권과 각종 사업의 인․허가권, 공무원 인사권 등을 가진 단체장에게 맞설 지방의회의 힘은 약할 뿐 아니라 단체장과 연관된 보수정당이 지배하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더구나 선거 때의 공약을 지켜야 하는 지방의원들은 그 권한을 가진 단체장과 어느 정도 결탁할 수밖에 없다. 지방공무원들(또는 그들의 관료주의)은 한편으로 인사권을 가진 단체장에 복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조직이나 개인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한다. 아무리 강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이런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런 대형사업들을 기획하는 건 어떻게 보면 지방선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자신의 임기 중에 자신을 대표할 만한 대형사업을 하려하고, 공무원들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단체장을 만족시키려 국내외의 사례를 짜깁기해서 사업계획서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이를 부채질하니 지방선거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이런 사업기획을 돕는 온갖 ‘업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권을 노리는 단체들도 많다.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권력을 뒷받침하는 각종 관변단체들이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각 동단위까지 뿌리를 내린 새마을운동협의회,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를 빼고도 대한노인회, 각종 보훈단체, 체육단체, 한국예총, 여협, 로타리, 라이온스, 청년회 등의 단체들이 지방정부의 사회단체보조금을 독점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지방정부의 각종 자문위원회와 주민자치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읍․면개발위원회 등 수십 개의 위원회들을 장악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상공회의소들도 정치인, 관료, 학계, 관변단체들을 연계해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로 건설업자들의 소유인 지역언론사들도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개발사업을 정당화시키고, 지역의 대학들도 지방정부의 각종 용역을 받아 지방권력을 비호한다(대학교수들이 공무원 다음으로 위원직을 많이 차지하고, 각종 재단과 시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의사, 약사, 각종 직능단체들의 지역조직도 지역사회에서 이익을 거래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다양한 사람과 집단들이 중앙에서 지역까지 다양한 권력망들을 구성하고 서로 이해관계를 타협하며 공생하고 있다. 한번 움직이면 수백에서 수천 명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공권력이나 자본이 그들의 뒤를 적극적으로 봐준다.

 

이렇게 서로 끈끈하게 결탁되어 있으니 비리가 잦을 수밖에 없다. 《경남도민일보》 2012년 7월 8일자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1년 사이에만 비리에 연관되어 징계를 받은 국가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의 수가 17,000명에 달한다. 그리고 2013년 5월 1일 감사원이 매년 발표하는 ‘지역 토착비리 기동점검’ 결과발표를 보면, 입찰 부정, 인․허가 및 채용 비리, 금품수수, 공금횡령 등으로 총 33개 기관에서 70건의 비리가 적발되었고 68명의 공무원이 고발 또는 징계처분을 받았다. 진천군, 단양군, 용인시, 부안군, 전주시, 가평군, 동두천시, 남양주시, 안산시, 서울시, 해남군, 강원도, 영광군 등으로 지역도 참 다양하다. 사회가 바뀌고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직사회의 정책기획이나 집행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지역주민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공무원도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몇몇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해를 입히는 것보다 공무원 몇 명이 입히는 해가 훨씬 더 크다.

 

그리고 문제는 관련된 공무원들의 개인비리만이 아니다. 2013년 6월 20일 감사원이 발표한 ‘지방자치단체 주요 투자사업 추진실태’ 감사결과는 “지자체에서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편법으로 민간업체의 대출을 채무보증하여 불필요한 금융비용을 부담하는 등 예산 낭비”가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예산을 낭비할 뿐 아니라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타당성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거나 지방의회의 승인조차 받지 않는 경우도 적발되었다. 또한 세부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타당성 조사를 일관성 없게 추진한 사례도 적발되었다. 감사원은 이 결과를 토대로 관련자 7명을 파면 등 징계하고 범죄혐의자 6명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총 69건의 조치를 요구했다. 이와 관련된 사업들을 보면 나주시의 미래일반산업단지(사업지 2,650억원)의 업무부당처리, 함평군의 동함평산업단지(사업비 711억원)의 업무부당처리, 음성군의 생극산업단지(사업비 451억원)의 부당지원, 충남개발공사의 청당지구 공동주택사업(사업비 3,497억원)의 채무보증 및 출자의 부적절함, 시흥시의 군자배곧신도시사업(사업비 2조 5,981억원)의 사업추진 부적정함, 경기도의 타당성조사 66건 중 15건의 경제성 조사 미실시, 9건의 타당성 조사 미실시였다.

 

또한 2013년 6월 4일 감사원이 발표한 ‘도서지역 개발사업 추진실태’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국고보조금을 받아 추진중인 도서개발사업 중 통영시와 완도군의 사업을 표본으로 감사한 결과 전체 317건의 사업 중에서 74.4%인 236건 1,280억원의 사업이 취소 또는 변경이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형식적으로 도서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해서 국보보조금을 지원받고, 특정업체의 부탁을 받고 부당한 수의계약을 체결하거나 부적격 업체와 부당한 수의계약을 맺는 관련자 16명에게 정직 등 중징계를 요구했다. 지방정부의 재정이 취약하다고 하지만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고 민간자본과 계약을 맺으면 그 액수가 이렇게 커진다. 중간에 사고가 나면 지방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니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국책사업이니 공적인 사업이라며 밀어붙이지만 정부의 사업이니 무조건 정당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또한 전국 검찰청이 2012년부터 2013년 6월까지 정부보조금 비리를 집중 수사한 결과발표에 따르면, 약 70여 개의 업체와 단체가 약 631억원의 보조금을 허위수령했고 이와 관련해 312명이 입건되고 이 중 93명이 구속되었다. 사회일자리창출 지원금, 시민․사회․종교단체 보조금, 사회복지시설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보조금을 부정수령한 사람은 대학 총장부터 농어민까지 다양했고, 이 돈을 생활비나 카지노 도박자금, 주식투자비, 변호사비용 등으로 사용했다. 정부에 붙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시민들의 생활을 위해 집행되어야 할 돈이 몇몇 사람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은 피해를 직접 입는 건 주민들이라는 점이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가리지 않고 정부를 운영하는 예산은 기본적으로 시민의 세금이다(기업에서 걷는 법인세도 있지만). 시민의 돈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쓸 건지는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에 그 부분을 반드시 물어보고 궁극적으로는 시민들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리자는 것이 풀뿌리민주주의이다. 지금은 그런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금이 낭비될 뿐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 되어야 할 것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부당한 사업들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고향을 잃는다. 마을이 파괴되고 뿔뿔이 흩어진다. 전국적으로 마을공동체가 유행하는 사업으로 되고 있지만 이미 마을인 곳들은 하나둘씩 파괴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있어도 풀뿌리민주주의는 여전히 과제로만 남아 있다. 그러니 지방자치제도의 실시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활성화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2. 지방권력의 민주화 = 주민의 자치역량과 공론장


가장 기본적으로 지방정부와 공무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지방행정이라는 건 중앙행정과 달리 주민들의 직접적인 필요와 연관되는 부분들이 많다.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진행되는 대부분의 사업들은 주민들의 필요와 무관한 것들이 많다. 중앙정부의 사업비를 따기 위해 이름만 거창하게 부풀리거나 다른 지역의 사례에서 이름만 따오는 사업, 주민들의 눈을 현혹시키려 규모만 키워놓은 사업들이 꽤 많다. 이런 사업들에 허투루 들어가는 세금을 주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에 쓰도록 해야 한다. 제 아무리 새롭고 흥미로운 일을 상상하고 기획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방치하면 상처는 곪기 마련이고 심각한 병으로 발전되어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 곪은 곳을 찾아 도려내고 상처를 치료해야 지역사회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官)과 민(民) 사이의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다. 거버넌스라는 말이 여기저기 사용되지만 민과 관의 ‘협력’은 아직 요원한 숙제이다. 협력을 논하기에 앞서 서로가 서로를 어떤 눈높이로 바라보고 있는지 현실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하고 서로 좀 부대끼며 서로의 역할을 생각하고 좀 맞춰보고 난 뒤에야 협력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지방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시민사회의 힘을 강화시켜야 관으로 기운 지역사회의 권력기반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그런 변화를 자극해야 한다. 그러니 시민사회의 감시와 비판의 기능은 제 아무리 민관협력과 거버넌스를 떠들어도 결코 사라지면 안 되는 중요한 기능이다.

 

특히 지방정부가 가진 예산이나 주요한 자산들은 정부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위탁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의 사용을 결정한 권한은 당연히 시민들이 가져야 한다. 단체장이나 지방의원, 공무원이 공공성의 대변자인양 행세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사적인 의견이라 무시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아무리 거버넌스를 떠들어도 ‘통치’의 관점이 ‘자치’로 바뀌지 않으면 풀뿌리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주민의 자치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주민자치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만들 방법은 쉽게 찾기 어렵고, 때로는 그 방법을 찾더라도 행정의 영향력과 개입으로 변질되곤 했다. 예를 들어, 주민참여예산제도처럼 자치역량을 강화시킬 것이라 기대를 받은 제도조차도 명목상의 제도로 전락해버린 곳들이 많다. 조례만 덩그러니 제정되고 예산위원회가 열리지 않는 곳도 많고 열리더라도 형식적으로 열리는 곳들이 많다. 더구나 민중권력을 구성하고 그 힘을 강화시킨다는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원래 취지는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창구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좋은 제도를 도입한다고해서 주민의 자치역량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치역량이 형성되려면 지역정치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여성이나 청소년처럼 기성정치에서 소외된 주체들이 지역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치를 경험하고 그런 관점으로 지역사회를 바라보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는 매우 중요하다. 지방정부의 위원회나 참여과정에 일정 비율을 여성과 청소년의 몫으로 할당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자격을 제한할 경우 대부분 관변단체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위원회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활성화되고 있지 않지만 수원시의 시민배심원제처럼 시민들을 무작위로 추첨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던 사람도 몇 번의 참여과정을 거치면서 지역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처음부터 잘 되진 않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민들을 자극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몇몇 시민사회단체들이 전문적으로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맡았다면 이제는 그런 기능을 대중화시켜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정보가 공개되어야 하고, 이런 정보를 가공해서 시민들에게 알려줄 매체가 필요하다. 자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시민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행정구역상 자기 동으로 분류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서울시나 경기도같은 광역자치단체 규모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중앙언론이 여론을 독점하는 상황이다보니 한국에서는 풀뿌리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지역언론사의 상당수는 지방정부에 기생하는 계도지나 지역여론에 영향을 미쳐 이권에 개입하려는 거짓언론이다. 지역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공론(公論)을 자극할 수 있는 풀뿌리언론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하니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 풀뿌리언론의 역할을 담당할, 지역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할 사람이나 단체가 필요하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옥천신문>처럼 지역의 여론을 만들고 공론장을 구성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인터넷이나 입소문을 통해서라도 여론을 만드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작은 모임이라 하더라도 지역의 소식을 나누고 고민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들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운동은 시민들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고 그런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하다못해 민원을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주민감사청구제도, 주민투표제도, 주민발의제도 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런 구체적인 방법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단체가 일방적으로 시민에게 방법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 시민이 알고 있는 지역의 문제나 현안을 단체가 함께 고민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시민은 지역의 기술이나 지혜를 알고 있고,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제도와 방법에 능하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만나야 문화와 제도의 힘이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개별적인 사안도 있지만 지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바로잡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거 때만 반짝 연대하지 말고 지역의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속적인 논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지역의제를 서로 선점하려 하지 말고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며 지속적인 논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를 고민한다면 정당과 지역단체들이 구체적인 연대방안을 마련하면 좋겠다. 단순히 선거연대만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 지역사안을 함께 논의할 과정을 미리 준비하고 합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리 신뢰관계를 만들고 서로의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다. 선거나 사업을 위해 만나면 목적이 너무 앞서서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것이 선거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광역자치단체 규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역단체들이 분석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14년 지방선거의 정당공천제도를 가지고 입씨름이 많은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단체장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방의회를 강화시키며 지역사회의 정책결정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런 제도의 변화는 지역사회의 힘만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중앙정치와 지역정치가 서로 매개되어 풀려야 하고, 장기적으로 연방구가 형태로 중앙정부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풀뿌리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만이 아니라 정당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약자들의 연대라는 말은 그 약자가 다수라는 현실의 구조를 은폐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오큐파이 운동에서 ‘1% 대 99%’라는 구호가 나온 건 약자가 다수임을, 다수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중앙정부나 국가에 비해 언제나 약한 곳으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공간은 지역사회라는 점에서 이곳은 세상변화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모두가 흐트러지듯이, 지역사회에서 시작하는 변화는 모든 사회변화의 기본이다. 물론 반대로 중앙의 변화가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지만 각 지역의 특수성에 맞게 그 변화를 적용하는 힘은 지역사회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지역사회의 힘이 중요하다.



3. 지역살림살이의 민주화 = 자급역량과 공공성의 강화


노동운동에서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나왔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의 뒤를 잇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것은 누구와 함께 살고자 하는가, 라는 부분이다. 시민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함께’만이 아니라 ‘살자’라는 얘기가 들어가려면 뭔가 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자는 건가? 노동운동이 다른 시민사회운동 또는 지역사회와 함께 살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 내부에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보수는 보수적이라서 노동조합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고 진보는 내가 진보인데 노동조합이 왜 필요해, 이런 식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가 조직화되고 사회적인 발언권을 얻는 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 뒤이다. 발언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서로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가.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 노동조합이 고민하는 사회변화가 시민들의 ‘지역발전’으로 여겨지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고려할 점이 많겠지만 일단 서로 소통이 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지역화라는 주제가 꽤 오래 논의되어온 것으로 안다. 그런데 어떤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것은 ‘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동운동이 지역사회를 대상화시키고 시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지역사회를 보수의 아성으로 전제하고 계몽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노동운동의 지역화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지역사회에 시설을 만드는 것으로만 보자면 노동조합보다 기업이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사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는 명목으로 쏟아지는 지원금들은 지역사회를 길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 같은 시절에는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는 결정만큼 지역사회를 협박하기에 좋은 일도 없다. 이렇다보니 노동조합이 쉽게 지역사회로 스며들기 어려운데 시혜적이거나 계몽적인 관점을 가지면 그런 스며듦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물론 진주의료원의 폐원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노동문제는 지역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학교나 병원같은 생활과 밀착된 의제를 제외하면 노동문제는 지역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연대에 앞서 먼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이 없다. 이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대공장의 노동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과 척박한 문화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지역사회 활동을 가로막는 면도 있지만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울산광역시와 같은 대공장 밀집지역을 가더라도 지역사회가 활성화되었다는 느낌은 받기 어렵다.

 

그런데 2013년 7월 24일 민주노총 부산ㆍ울산ㆍ대구 경남ㆍ경북본부, 전국건설노동조합 부산ㆍ울산ㆍ경남본부와 대구ㆍ경북본부가 밀양 송전탑 공사를 거부한다고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민주노총과 건설노조는 "주민의 생명권과 생존권, 재산권 등을 송두리째 빼앗고 주민을 전력난의 주범으로 내모는 한국전력공사의 송전탑 공사에 반대한다"며 송전탑 공사를 거부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설득해 밀양 주민들과 연대해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반대로 지역사회가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드물다. 노동조합과 지역사회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더 이상 당위가 아니다. 지역의 불확실한 미래를 고려할 때 서로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는 그나마 티라도 나지 구미나 수원의 불산유출사고처럼 공장에서 다뤄지는 물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활하는 지역주민들은 화약고를 안고 사는 셈이다. 발암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의 삶이 그렇게 발암물질을 포함한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법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 자치가 가능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송전탑이 들어설 밀양과 청도의 주민들,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유족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강정마을주민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현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지했던 SKY 액트나 ‘현대차 희망버스’는 좋은 사례이다.

 

이렇게 삶터와 일터를 연계시키려는 전략 속에서만 진정한 자치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생산과 소비가 연계되어야 하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면, 응당 노동운동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이 서로 만났어야 할 텐데,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솔직히 말해 운동의 연대에 앞서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나 있을까?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를 따져보면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틀은 협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협동조합과 무관할 이유는 없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로치데일 협동조합도 노동자들이 만든 조합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적당한 가격에 정직한 생활재를 거래할 수 있도록 매장을 만들고 노동조건이 좋지 않거나 실직한 노동자들이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일하며 좋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곳이 협동조합이었다.

 

그리고 생산과 소비를 따질 때 사회적 경제, 자급의 가장 기본은 먹고 사는 문제이다. 그리고 먹는 건 노동만이 아니라 먹거리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이 농민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과 무관할 수 없다. 노동운동 쪽에서는 시민들이 노동과 관련된 사안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지만, 노동만이 아니라 농민, 농적인 삶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더 무관심하다. 귀농, 귀촌이 한때 사회의 관심을 받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농민과 농촌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 농촌은 도시에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배후지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고, 귀농이나 귀촌은 도시민들의 목가적인 선택처럼 여겨지는 실정이다. 하지만 외국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농촌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농민이 살아날 방법, 더구나 농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어갈 방법은 먼 숙제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도시와 농촌이 서로의 삶을 지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농민회와 손을 잡고 농산물을 구입하거나 농활을 떠나는 예는 있었다.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 지부가 구례군 농민회와 함께 공동경작단을 운영하고 식당에서 쓸 쌀을 수매하는 건 좋은 사례이다. 이런 연계망도 매우 중요하지만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 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부산에서는 민주노총부산본부의 결의로 만들어진 노동자생협이 농민회와 연계해 활동하는 건 좋은 사례이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시도를 잘 살려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운동에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는 농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농민은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과정에 노동조합과 농민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들이 힘을 모은다면 더 큰 힘을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보육, 교육, 의료, 복지서비스 등 다양한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함께 살자’의 과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운동이 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그들과 연대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협동조합이 아무리 붐이라도 협동조합 한 두 개가 지역의 살림살이를 책임질 수는 없다. 다양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기업,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으고 서로의 존재와 역할을 이어갈 때에만 자급하는 살림살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지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들이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연계하는 연계망을 만들 때 서로의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실질적인 기반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생태계’는 지방정부가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는 지원이 끊어지는 순간 지속되기 어렵다.

 

서로 돕고 보살피는 과정(相互扶助)은 내가 남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남이 나에게 의존할 수 있도록 힘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 약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강해지는 과정이 상호부조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그런 상호부조를 통해서만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지역 내에서 중요한 자원이 공유되고 순환되며 지역의 자급역량이 강화되며 함께 쓰고 공유하는 것(公共性)이 확대될 때에만 자치도 가능하다.


<환경과 생명> 겨울호에 기고한 글이다.
'4대강 살리기'도 재난이지만 '행정구역개편'도 또 다른 재난의 계기가 될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공부를 강요(!)한다.
쇠고기, 대운하, 보, 미디어에 이어 이제는 행정까지...
다음에는 또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보통 행정은 그냥 행정구역이나 행정기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자치와 연관지으려 했다.
최근 글을 읽다 발견한 3-1운동과 관련된 재미있는 관점도 함께 소개했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전국적인 저항을 모색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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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체계라는 오래된 지배도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위기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1894년 부패한 탐관오리에 맞서 일어선 농민들은 나라를 바로잡는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다. ‘그물코를 바로잡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집강소는 잘못된 관행과 행정을 바로잡고 농민들의 자치를 지원하는 공간이자, 신분의 차별을 없애고 토지를 나누어 공평하게 경작해야 한다는 이념을 전하는 공간이었다. 비록 외세에 짓밟혀 무너지긴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전통적인 농민공동체와 정치적인 운동이 결합되어 자치와 자립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 사건은 풀뿌리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민중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반면에 첨단무기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자치와 자립의 기반이 식민지 통치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식민지 전략을 펼치기 전부터 자치공동체를 파괴하려 잦은 지방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행정체계를 바꾸는 것은 인위적으로 생활공동체의 경계를 나누고 합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가로막으려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대표적인 전략이다. 일제가 행정체계를 강제로 통폐합한지 약 10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행정구역 개편이 얘기되는 것은 이런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왜 억압적인 지배권력이 행정체계를 자꾸 바꾸려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제와 군사독재는 왜 행정체계를 바꿨나?

 

어릴 적부터 착실히 국사(國史)를 배워온 우리는 한국을 전형적인 중앙집권형 국가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가면 지방양반들만이 아니라 민중들이 공동체를 이뤄 자기 삶의 기반을 다져 왔다. 두레와 같은 공동체 노동이 활성화되고 계와 같은 상호부조가 발달하면서 민중들의 공동체는 자치와 자립의 힘을 강화시켰다(주강현, 2006; 하승우, 2008).

마을마다 모정(茅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같은 공간이 만들어져 마을의 제사나 회의를 준비했고, 이런 전통은 촌회(村會)나 향회(鄕會)와 같은 마을의 정치기구를 만들고 강화시켰다. 보통 양반들이 농촌공동체를 지배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농민공동체가 정부에 대항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철종 때 괴산에서는 수령의 자의적 결가책정에 대하여 반대하는 향회가 29차례나 열렸으며 각처에서 관의 부조리한 조처에 굴종하지 않고 통문을 돌려 향회를 소집, 단합된 여론을 배경으로 수령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읍소(泣訴)’를 감행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감영에 진정하는 ‘의송(議送)’에 나서는 등 향회는 점차 반관적 저항을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드디어 민란의 온상 구실을 하게 되었다.”(김용덕, 1992) 이처럼 마을에서 농민의 자치적인 정치원리가 봉건적인 지배원리를 서서히 극복해가고 있었기에, 이정은 박사는 “19세기 중앙정치가 60년간 세도정치의 부패와 난맥상을 보일 동안 지방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民亂이라는 형태로 중앙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民權의 성장과 面과 洞里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農民的 鄕村秩序를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이정은, 2009).

따라서 일본은 이런 자치체계를 무너뜨려야만 자신의 식민지 지배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한국정치에 개입하던 1906년 7월, 각의(閣議)에 ‘지방제도개정(地方制度改正)하는 청의서(請議書)’를 제출하고 345개 전국 부군(府郡)을 220개로 대폭 통폐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청의서는 많은 지역의 반감과 저항을 받았고 당시는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던 상황이라 이 제안은 축소된 형태로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이 안으로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의 역할이 폐지되고 군주사(君主事)로 대체되어 마을은 군수의 권력에 종속되었다. 이로써 중앙에서 지역사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배질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고 1914년 ‘도(道)의 치관할구역(置管轄區域) 및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名稱位置管轄區域)’에 관한 총독부령 제 111호를 내려 12부 317군 가운데 전체의 37%인 1부, 121군을 통폐합하고 새로 1부, 24군을 만들어 12부, 220군으로 조정했다. 그 뒤에도 지방행정통폐합은 계속되어 1910년도에 68,819개였던 동리가 1916년도에는 29,383개, 1918년도에 28,277개 동리로 줄어들었고, 이는 자치적인 동리가 행정적인 면으로 흡수되는 것을 뜻했다. 이와 더불어 각 마을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던 마을이름도 ○○동이나 ○○리로 획일화되었다. 또한 부군면을 통합할 때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을 면장으로 임명되었다(이정은, 2009).

당시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로 흡수하려 했다. 일제가 추진한 행정체계개편은 중앙의 총독부와 지방의 면단위 통치기구가 수직적인 질서를 이루며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처럼 일제하의 행정체계개편은 주민편의나 행정의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지배질서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 통합을 목표로 삼는 행정체계개편은 자치질서의 발전보다 그것의 해체를 목표로 삼아 왔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행정체계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바뀐 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부나 군사독재 하에서도 행정은 언제나 중앙권력의 이익에 봉사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하고 면단위 행정을 더 확장시켜 군 단위로 전환한 것도 그 점을 증명한다. 그런 과정에서 26개시 85읍 1,407면의 지방자치단체가 26개시 140군으로 개편되어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자치구역이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리고 1994년 말과 1995년 초의 시군통합 역시 43개의 시와 40개의 군을 통합해 41개의 시로 개편했다(이기우, 2009). 그동안 한국의 행정체계개편은 모두 중앙정부의 구상과 결정에 따랐고, 시민들이 이런 과정에 의견을 제시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자치행정과 주민들이 분리된 것은 공화국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자치의 이념을 담고 있지 않은 우리 헌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자치이념에 적합한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었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그런데 일본헌법 제 93조 2항은 ‘지방공공단체의 장, 그 의회의 의원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관리는,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고, 제95조는 ‘하나의 지방공공단체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의 투표에 있어서 그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국회는 이것을 제정할 수 없다’며 주민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주헌법 제 28조 1항도 ‘각 州의 헌법질서는 이 기본법에서 의미하는 공화적·민주적 및 사회적 법치국가의 제원칙에 부합하여야 한다. 州, 군(Kreis) 및 읍(Gemeinde)의 주민은 보통·직접·자유·평등 및 비밀 선거로 선출된 대표기관을 가져야 한다. 읍에서는 대표기관에 대신하는 읍회의를 도입할 수 있다’며 주민자치의 기본근거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하승우, 2005).

모든 법률의 기본이 되는 헌법이 자치의 이념을 담지 않고 있으니, 행정부는 시민을 언제나 통치의 대상으로 여긴다.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행정은 주민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주민 ‘위에’ 일하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전통을 지켜 왔다. 행정체계 역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따라 변하며 주민들의 삶을 침범해 왔다.

 

 

행정체계개편이 지역발전을 위한 방안인가?

 

2009년 행정체계개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이런 논의가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이미 김대중 정부 때부터 행정구역개편과 관련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역시 2006년 전국을 70개의 광역시로 개편하는 보고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전 정부가 논의에 그쳤다면 이명박 정부는 개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2 광역경제권’ 구상을 발표하며 행정개편의 기본구상을 지방자치보다 경제발전에 맞췄다. 이 구상은 “그동안 개별 광역자치단체별로 시행해 오던 지역전략산업 및 지역개발정책의 중복성 및 비효율성을 방지하고 자원배분 및 사용의 효율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정책”으로 제안되었다(임승빈, 2009).

그리고 2008년 10월 18일 이명박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행정구역개편, 특히 지방의 광역화와 행정계층 축소화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국정과제 역시 앞서의 경제권 구상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행정을 개선해서 지역경제발전을 촉진시킨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행정구역개편을 지역발전전략으로,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업의 유치, 창압, 확장, 보전”으로 접근하는 것은 광역화가 인프라를 구축하고 토지를 공급하며 도시를 재개발하는데 유용하리라 보기 때문이다(배득종 2008). 또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8․15 경축사에서 “100년전에 마련된 낡은 행정구역이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효율적인 지역발전을 가로막는 벽이 되고 있다”며 행정구역 개편을 주장했다. 8월 26일 행정안전부는 이 구상을 이어받아 ‘시․군․구 자율통합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은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이 계획이 자율적으로(?) 통합한 기초자치단체에 특별교부세 50억 지원, 추진사업 인센티브 지원, 기반시설 설치 등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교부금, 인센티브, 기반시설, 이런 내용은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이다. 부안방폐장이나 경주방폐장에서 그랬듯이 중앙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각종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정부가 주민들을 ‘거지’로 여기고 돈으로 유혹하는 이런 한심한 짓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밟아왔기에 현재 국회에는 지방행정체제 개편과 관련해 무려 8개의 법률안이 상정되어 있다. 기초지방자치단체간의 통합을 다룬 2개의 법안(노영민․이범래 의원안)을 제외하면 6개의 법률안 중 4개의 법안(권경석․우윤근․박기춘․허태열 의원안)은 시․도를 폐지하거나 국가기관화 시키고 시․군을 통합할 것을 주장하고, 나머지 2개안(이명수․차명진 의원안)은 도와 광역시, 도와 도를 통합해서 더 광역화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중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현재 광역-기초의 2계층제로 되어있는 자치계층을 단일화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학계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완규 교수는 행정구역개편이 규모의 경제를 이뤄 250억 원의 행정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①시장․군수 및 시․군 의회 선거비용 절감, ②시․군 의회비 절감(의원 정원 감축, 사무처 경비 감축 등), ③민간지원경비․행사경비 등 절감, ④공공시설 통합 설치․운영을 통한 절감, ⑤청사 매각 또는 재활용을 통한 재원 확충, ⑥주민의 경제적 부담 감소라는 부수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박완규, 2008). 그리고 곽상욱 오산자치시민연대 운영위원장은 광역행정이 ①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전자적 접근성 확대라는 서비스 수요의 광역화, ②지역클러스터, 혁신도시와 같은 행정수요의 광역화, ③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업무중복, ④행정의 책임성과 민주성의 확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곽상욱, 2009).

하지만 이기우 교수에 따르면, 지방행정구역만 개편하면 모든 지역발전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는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21세기 국가경영철학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왜냐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지적했던 지역주의를 없애는 방법은 중앙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권한과 재원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지방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지방분권의 강화에 있지 행정구역개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기우 교수는 현재의 방안이 ①소규모 기초자치의 포기, ②소지역주의로 지역공동체의 해체와 지역발전거점의 상실, ③실현가능성의 부족이라는 내용상의 문제점과 함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통합추진이라는 방법상의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본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를 추진하고 주민투표를 배제하는 것은 시기와 절차 모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이기우, 2009).

그리고 하승수 교수는 자치계층 단일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도를 폐지하고 국가지방광역행정청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중앙집권의 강화를 가져온다는 점, ②광역지방자치단체와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사무중복 문제는 사무배분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해결가능하다는 점, ③세계적인 지역간 경쟁격화 현상은 오히려 광역지방자치단체를 더욱 광역화하고 강화할 필요성을 높이고 광역지방자치단체의 폐지는 대도시의 경쟁력 저하를 초래한다는 점, ④단층제 입법사례는 외국에서도 드물다는 점, ⑤급격한 제도변화는 지역의 정체성, 지역발전의 정신적 에너지를 상실케 할 수 있다는 점, ⑥외국에 비해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인구규모가 큰 상황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인위적인 광역화는 생활자치의 포기가 될 것이라는 점, ⑦기초지방자치단체의 광역화는 새로 만들어질 지방자치단체의 명칭과 사무소 소재지 등을 둘러싼 소지역주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 등이다(하승수, 2009).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치계층을 단일화시켰을 때의 문제점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증명되었다. 즉 2007년 7월 특별자치도라는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일원화된 제주도의 경험을 보면 그 문제점은 분명해진다. 2002년에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도 행정개편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2005년 7월 27일 주민투표를 통해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4개의 기초지방자치단체가 폐지되고 1개의 광역자치단체로 통합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은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높았는데(점진안 찬성률 각각 56.4%, 54.9%) 이를 무시하고 전체투표 결과를 따져 통합을 진행했다. 그리고 행정 효율성이 나아지기는커녕 도본청과 의회, 행정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전체의 45%를 차지함으로써 행정의 반응성이 오히려 떨어졌다. 그리고 제주시와 도지사로 권한이 집중되어 지역간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는 반면 주민자치구위원회와 같은 주민자치기능이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행정개편 때보다 이전의 자치 2계층체제가 더 낫다는 응답이 높게 나오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행정체제를 개편하는 것만으로 효율성이 증가하거나 주민만족도가 높아질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하승수, 2009). 2009년 8월 제주도지사의 독단적인 행정을 문제 삼았던 제주도의 주민소환운동은 행정체계 개편이 가져올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행정체계 개편이 계속 주장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인 ‘지방의 재정불균형’과 ‘불균등발전’ 때문이다. 행정체계 개편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리는 “규모의 경제효과로 인한 세출 효율화를 통해 재정지출 증가압력을 제어하고 지자체간 재정력 격차를 줄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원윤희․심혜정, 2008) 이명박 정부는 정치보다 경제논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행정체계개편 역시 이런 경제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개발주의에 그대로 노출되어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모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하승우, 2007). 따라서 학계나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명박 정부는 행정체계 개편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그들만의 개발과 개편, 풀뿌리민주주의의 위기

 

진정 그런 구조적인 불평등을 해결하고 싶다면, 이명박 정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 현상과 그로 인한 ‘내부식민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지방재정이 빈약한 것이 문제라면 국세 비중을 낮추고 지방세 비중을 높일 일이지 행정구역을 통합하고 광역화시킨다고 해서 지방재정이 탄탄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행정체계개편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더욱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의 지방을 내부식민지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고, 더 나아가 지방 내에서도 패권주의가 발생하는 부조리를 지적한다(강준만, 2008).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 현상에 대한 지적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 집중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2009년 행정안전부가 국회에 제출한 지방자치단체 재정자립도 현황에 따르면, 서울, 인천, 전북을 제외한 모든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가 2008년보다 낮아졌고 가장 낮은 지역들은 자립도가 10%를 넘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대전개발연구원의 전국 지역내총생산(GRDP) 자료에 따르면, 1985년 수도권의 지역내총생산이 전체 지역내총생산의 43.3%였는데 2006년에는 전체의 47.7%를 차지해 수도권의 경제집중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지방 내에서 발생하는 지방자치단체들간의 갈등이 수도권-지방의 갈등과 갈수록 비슷해지고, 패권주의가 지방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2004년 기준 경남권 인구의 60.2%가 부산과 울산에 살고, 경북권의 58%가 대구와 포항에 살고, 전남권의 57.2%가 광주와 여수에, 전북권의 49.2%가 전주와 익산에, 충남권의 57.2%가 대전과 천안에, 충북권의 55.7%가 청주와 충주에, 강원도의 50.7%가 춘천․원주․강릉에 산다는 식이다. 이런 집중화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대기업과 서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대부분의 산업과 경제활동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방에서 경제적인 이익의 절반 이상은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강준만, 2008).

따라서 이런 불평등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 행정체계만 광역화한다고 해서 균형발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지금의 분위기를 볼 때 이명박 정부가 수도권을 해체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오히려 광역화를 통해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며 ‘생존논리’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중앙의 기득권 구조와 연결된 개발세력들은 막대한 개발 이익을 노리며 단합할 것이다. 이렇게 행정체계개편은 소수의 기득권층에게만 이로울 뿐 대다수 주민에게는 많은 부담을 안길 것이다.

또한 광역화를 지향하는 행정체계개편은 주민참여, 주민자치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사실상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관변단체가 대거 의회로 진출하며 지역의 공식적인 권력으로 승인을 받고, 여전히 지역의 중요한 의사소통과 정책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보다는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시민들에게는 더욱더 익숙하다(하승수, 2007).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라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의 도입에도 시민들의 참여환경은 결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외국의 좋은 참여제도들도 한국으로 오기만 하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옴부즈만같은 제도들이 이미 도입되어 있지만 전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하승우, 2006).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행정체계개편이 지금 당장은 마을 단위의 풀뿌리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풀뿌리운동의 뿌리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편은 풀뿌리운동이 필요로 하는 주체성장의 ‘과정’과 ‘여유’를 없앨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등장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행정체계개편은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려면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자신이 사는 세계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며 자기 내면에 뿌리내린 본성, 개인으로 고립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본성을 극복하는 여유를 제거할 것이다. 행정의 효율성과 비용절감만을 목표로 삼는 행정체계개편은 풀뿌리 주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행정체계개편이 은밀한 목표로 삼는 지역개발의 열풍은 풀뿌리운동이 준비해온 대안적인 지역사회발전전략을 파괴할 것이다.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내년 지방선거 때 수많은 개발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것은 분명하다. 이런 개발전략들은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의제로 만들어온 주거나 교육, 먹거리와 같은 생활정치의 의제들을, 자신의 삶과 괴리되지 않은 정치를 실현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선진화를 빌미로 삼는 지역간의 경쟁은 각각의 존재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망각시킬 것이다.

따라서 풀뿌리운동은 다소 전문적이고 생활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행정체계개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적인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민주주의의 비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공유지를 박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세금을 걷기 위한 관료체계와 내부의 반란을 막기 위한 공권력이 강화되면서 이제 국가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나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는 낙후되거나 봉건적인 유산으로 매도당하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듯이 행정체계개편을 마음껏 추진할 것이다. 강력한 반대가 없다면 자기 뜻대로 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부이니, 이런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작가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우리 사회를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는 “죽은 땅”이라 정의했다. 이 죽은 땅을 떠나는 탈출구는 달나라로 떠나거나 입주권을 긁어모으는 사나이를 처리할 앉은뱅이와 곱추의 공모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탈주하거나 맞서거나, 둘 중 하나이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H. Zinn)의 말처럼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다행히 우리 역사는 치열하게 맞서 싸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정은 박사는 1919년 3․1운동의 의미를 자치에서 끌어낸다. 최소한 두 달 이상 잔혹한 식민지 권력에 맞서 온 몸을 던지며 싸웠던 한반도의 주민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3․1운동 당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많은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항과 상품경제의 유입, 일제에 대한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일본 식민지 체제의 수립과 일본인들의 유입, 토지조사, 지방행정구역 전면 개편, 폭우처럼 쏟아붓는 각종 세금과 법령, 식민지 관권에 의한 억압과 침탈, 국가 위기가 고조되면서 진행된 천도교와 서양 개신교의 급속한 확장, 민족교육의 억압과 식민지 교육의 보급, 시대 변화에 따른 전통 향촌공동체의 해체 또는 온존 등” 지금 우리처럼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3․1운동은 그런 불안과 공포의 고리를 끊고 자치와 자립의 기반을 다시 바로세우려 했다. 행정체계를 바꿔 공동체의 기반을 허물고 자신의 지배전략을 뼈 속 깊이 심으려던 일제에 맞서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변화의 물꼬를 텄다(이정은, 2009).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3․1운동의 뜻을 이어받은 민중의 저항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 저항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그 저항은 죽은 땅을 다시 살리기 위해 기존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짜야 한다. 한 가지 이슈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대안적 전망을 구성하기 위해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 경쟁이 아니라 보살핌이, 대상화가 아니라 주체화가 그 방향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짐 아이프(Jim Ife)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아이프는 지역사회발전이 정치․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환경․인격(정신적)의 면을 고루 갖춰야 균형잡힌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이프는 산업을 유치하고 지역산업을 조성하며 관광사업에 매달리는 발전전략을 ‘보수적인’ 전략이라 부르며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은행, 신용조합, 지역통화(LETS) 등을 활용하는 ‘급진적인’ 발전전략을 구체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런 전략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동안 배제되어온 주민들이 그 과정에서 의식을 높이고 스스로를 조직화하며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는 정치적인 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문화와 지역문화, 참여문화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주민들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존중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안적인 지역사회발전전략에는 주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식과 욕구가 향상되어야 한다(아이프, 2005). 결국 목표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해야 한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정치모델이 아니라 치열한 운동의 과정이다. 저들이 행정체계를 바꿔 이익을 꾀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런 체계를 넘어설 대안을, 국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공동체를 모색해야 한다. 풀뿌리운동과 사회적 경제운동, 생활정치와 협동조합운동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고, 그 흐름에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자. 그것이 첫 걸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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