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수 있지만 상식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달리 민주주의 제도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 이미 도입되어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도 실시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들도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도입되어 있다. 이렇게 웬만한 민주적인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는데도,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할까?


민주주의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이렇게 추상적이었을까? democracy라는 단어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주의’로 번역되다보니 민주주의도 어떤 이념인 듯하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어원을 따지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그게 다이다. 다른 얘기는 없다. 민중이 권력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적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이런 상식에 따라 누구나 지배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지식인들만 아는 특별한 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몸으로 실행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양식이었다.


민본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민본주의(民本主義)는 군주나 대신들이 민중을 위하거나 위해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었다. 민본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니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자 삶의 태도를 가리켰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나 민본주의를 특별하고 복잡한 어떤 이념이라 여긴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관심을 둘 일이 아니라 여긴다. 민주주의는 학력도 높고 돈벌이도 괜찮은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그런 ‘자격’을 얻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미래의 과제로 미뤄진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면 민주주의의 모델이나 원론에 대한 책들은 제법 있지만 정작 내 삶이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말해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추상적인 권리목록을 나열하거나 시민권,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책들은 있지만 그런 권리를 내 생활에서 써먹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직도 무거운 단어이다. 민주주의는 골방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들,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학자들의 것이지 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내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미는 아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곁눈질하면서도 직접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당신들의 민주주의


이렇게 느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가 추상적으로 느끼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건 역사적인 경험과 의도적인 학습 때문이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인들이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민주주의는 ‘위험한 단어’였다. 한낮 대로변에서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치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지금 우리 현실은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에게 토마토를 던지고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장면은 남의 나라 일이지 무식하고 법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한때 ‘제3의 물결’이라 얘기되며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부흥을 얘기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물결은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를 제 3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이었을 뿐 그 사회의 시민들이 권력의 주인으로 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 아니었다(최근 중동과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재스민 혁명이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사회의 고유한 가치와 문화를 무시하고 서구식의 경제개발과 시장경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보급하는 과정이었다. 제도는 그렇게 도입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 제도에 맞춰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도가 시민들의 삶에 맞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이 제도에 맞춰야 하니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뒤바뀐 셈이다.


이렇게 지배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발전된 것으로 미리 정해놓고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을 민주주의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삶에 어울리는, 우리의 생활과 맞는 정치제도는 봉건적이고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시민들의 민주적인 열망과 생각이 ‘스스로’ 터져 나왔던 순간도 있었다. 봉건왕조와 일제 식민지, 미군정, 군사독재로 이어졌던 어둠의 시절에도 시민들은 자신의 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시간이 되면 거대한 힘으로 폭발했다. 시민들의 힘이 만든 ‘해방구’는 사람들이 공적인 분노와 공적인 행복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걸자 자신만의 삶을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분노와 뿌듯함이 가슴 속을 채웠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의 목소리는,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피땀 짜내는 독점 재벌 해체하라”라고 외쳤던 87년 노동자들의 꿈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였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외쳤던 80년 광주의 목소리, “더 이상 못 속겠다, 거짓 정권 물러가라”는 87년의 외침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2003년과 2008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에 개입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살아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뭔가를 바꾸었다고 느끼는 순간, 거리에서 물러나 집과 공장으로 돌아오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생명력을 잃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지식인들의 잘못도 크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배운 것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주인들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은 않고 민주주의라는 모델로 가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양, 마치 자신들만이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양 행세하며 사람들의 열정과 행동을 순화시키거나 길들이려 했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영미식 시장과 정치에 익숙한 엘리트들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이득이 아니라 소외를 경험했다. 적응하지 못함은 시민의식의 뒤떨어짐으로 설명되었고 사람들은 그 적응의 어려움을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소외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내 탓이요’를 외치거나 그 고통을 비슷한 다른 상대에게 쏟아냈다. 그래,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끼어든다고 될 일이 안 되나? 강한 자에게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약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우리는 ‘약은 삶’을 택해 왔다. 이런 삶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틀린 민주주의


‘산업역군’이나 ‘모범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과거의 군사독재는 시민을 경제발전을 위한 군대로 만들고 생활을 길들여왔다. 삶터와 일터를 철저하게 나눈 채 시민을 가정과 공장에 가두고 길들였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시민을 ‘~형 인간’에 가두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작업장 민주주의를 포기한 경제성장은 시민의 가면을 쓴 산업역군을 계속 강요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는 노동사회나 모범적이고 건전한 사회가 아니라 여가사회와 다양하고 생동력있는 사회인데, 우리는 여가를 사치로, 다양성을 불화로 비난하도록 배워왔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고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그나마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그런데 경제적 평등의 물꼬를 튼 건 정치의 민주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민주주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치 민주주의가 완성된 양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직장과 가정으로 돌려보냈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궤변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들도 이런 궤변에 힘을 실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정치를 위한 삶의 여유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지만 삶의 가치를 소득에 맞췄다. 소위 ‘중산층의 신화’는 적절한 주거와 생활수준 이상을 갖춘 중상층의 사람들만 정치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주제넘은 일이라 믿게끔 했다. 즉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무관심과 선거 때의 순간적인 투표를 모범적인 시민의 권리로 만들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공간적인 규모’만이 아니라 ‘삶의 규모’를 정하고 그 규모에 맞지 않은 삶을 후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이 농민들의 착취를 딛고 사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중산층이 아닌 사람, 중산층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만 허락되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만 시민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에 물음을 던져보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착취하지 않고 수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 3세계를 착취하지 않고 제 1세계(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제 3세계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들이 겪고 있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탈식민주의의 흐름과 무관할까? 나오미 클라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재난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많은 공유재산을 빼앗아 적은 수의 지배자들에게 몰아주면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다.


엄청난 쇼크와 고통을 겪으며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민주주의와 크게 상관이 없을 법한 내용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선거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은 민주적이고, 명확한 이념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을 팔아대는 정당도 민주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소비자 민주주의, 관객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행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뒤틀린 민주주의에 뒷돈을 두둑하게 대주며 이득을 챙기는 것이 바로 재벌들이다.


2009년의 용산참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뒤틀림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국가가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고 전쟁을 벌였다. 멀쩡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는데 아무도 이 상황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떼를 쓰면 ‘민주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플랑카드를 내걸고 주민들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4대강 사업은 자연과 생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회를 민주적이라 부른다면 대체 어떤 사회가 비민주적일까?


우리 현실은 왜 이 모양일까?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시민의 의견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우리에겐 믿음직한 지도자가 없다. 민주주의가 어떠한 대표도 용납하지 않는 체제는 아니므로 지도자는 중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허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소수의 독점물일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똑바로 듣지 않는다면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그런 지도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민의 정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정치는 시민들이 누리는 공적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바쁠 때 내 몫을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이 없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들을 보면 뛰어난 리더십에 알아서 맡기라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직업정치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직업정치인’의 수가 늘어난다고 정치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외려 정치의 장이 좁아지고 직업정치인들이 그 장을 독점하고 조작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다른 건 필요 없고 투표나 열심히 하자는 식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데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주장이 솔솔 새어 나온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이거나 ‘이미 망각된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에 존재했을지 모를 민주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오게끔 새로운 해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민주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피동의 정치에서 능동의 정치로


일찍이 “소유란 도둑질”이고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 선언했던 사상가 프루동은 『19세기 혁명의 일반이념』(1849년)이란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배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다. 이런 것이 정부이고, 정의이며, 도덕이다.”


150년 전의 가혹한 진실을 숀 쉬한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에서 오늘 상황에 맞게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국가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지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을 받는 보너스 카드화되고, 체계화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 접근통제 카드화되고, 신분증명 카드화되고,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인구조사 꼬리표가 붙고, 측정되고, 평가되고, 차례로 나열되고, 스캐닝되고, 돌려지고, 감정되고, 위계를 부여받고, 대상화되고”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의 굴욕적인 일상은 얼마 전에 알려진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따로 관리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고 매일 낭독시켰다. 우리는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나? 2003년 한 노동자가 쓸쓸이 죽음을 택했던 부산의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는 그의 추도식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며 탄식했던 또 다른 노동자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이런 사회에서 분노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지배하는 자들이 비상식적이니 우리 역시 상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해야 한다. 고대 아테네나 근대의 미국, 현대의 유럽을 모델로 삼을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경험과 문화, 열정이 민주주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 이론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토크빌이 본 미국의 민주주의도, 유럽식 계급타협에 기초한 복지국가 모델도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민주주의 이론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체인 민중이 바뀌면 그들의 열정과 사상을 담은 민주주의 이론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모습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오로지 우리의 현실만 고집하자는 건 아니다. 외국의 경험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배워야 한다. 가령 스위스의 민회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연방주의라는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 그리고 남미나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실험들에도 관심을 둘 만하다.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완성된 모델이나 이론으로 배우려 들지 말고 그 사회의 고민과 생활을 배워야 한다.


흔히 이론이라고 하면 지식인들의 과제인 듯 들리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을 ‘신봉’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론을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누가 ‘원전’을 가장 잘 해석하고 지도자의 말을 잘 ‘수용’하는지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론이 쉽게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허나 다른 영역의 이론들이 몇몇 지식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민주주의 이론은 결코 몇몇 사람의 두뇌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싶다면 말이다.


사실 대중과의 소통고리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끊어버리고 대학 속에 몸을 감춘 지식인들은 이미 지식인들이라 부르기 어렵다. 외려 김여진같은 연예인들이 바깥에서 대학을 파고들며 지행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고 그야말로 지식인답다. 지금은 지식인들의 ‘항변’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이고, 그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 이론 역시 반성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의 생활과 접목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얘기는 흥미롭다. 라페는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민주주의 사례들을 수집해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특징을 아홉 가지로 정리한다.


1. 시민들은 집중된 부의 손아귀에서 정치권력을 되찾아오고 있다.

2. 시민들은 정부를 시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3. 투자자, 저축가, 소비자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제적 선택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4. 시민들이 자치 테두리를 정하면, 기업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

5. 이제는 일부 거대기업들조차 기업이익과 지구의 이익을 일치시킨다는 기업이념을 새로 세우고 있다.

6. ‘지역의 살아있는 경제’는 지역산업이 경제권력을 분산시키고, 에너지 폐기물을 줄이며, 공동체 결속을 진작시키고, 지역시민들이 지역 산업을 지지하는 덕분에 생겨나고 있다.

7. 외부자본 통제 없이도 시장이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소유주와 노동자간 격차를 줄인 기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8. 수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

9. 공동체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고 ‘회복’을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법률을 시행할 때, 범죄율은 낮아지고 공동체는 치료된다.


이 아홉 가지 특징에서 드러나듯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나 경제 영역의 변화로 제한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고 우리가 생활을 바꾸려 결심할 때에만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다.


라페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가 변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우리가 네트워크의 두터운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모든 선택이 일정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페의 말처럼 우리의 결심이 이미 변화의 시작을 뜻한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이미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생활공간에서, 가정과 학교, 직장, 거리, 구청, 시청,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쓰면 쓸수록 더욱더 익숙해지고 강해지는 힘이다. 반면에 쓰지 않으면 움츠려들고 약해지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껏 그 힘을 약화시켰다면 그 힘을 강화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힘을 기르자.



인간에게 소유는 어떤 의미일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하려면 다양한 자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욕구 외에도 미래의 필요를 대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자원이 필요하다. 실제로 그 자원을 누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자원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만일 지구라는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골고루 나눈다면 모든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겠지만 현재의 조건은 그렇지 않다. 어느 한쪽에선 자원이 남아돌고 심지어 썩는데, 다른 쪽에선 빈곤과 궁핍이 판을 친다. 이는 지구의 자원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를 보면, 한국에서 집을 가장 많이 가진 30명이 9,923채를 소유하고 있다. 고작 30명이 약 1만 명이 살 수 있는 집을 소유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은지 오래건만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전세나 월세 등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말해준다.


불사신이 아닌 인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부를 축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니면 미래가 불안해서, 그도 아니라면 자식들을 위해서? 설령 그 이유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런 ‘과잉’이 권리로 인정되고 보호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법제도는 인간의 보편적인 행복을 파괴하는 소유라는 권리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법제도가 이렇게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보호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소유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소유권의 역사는 지극히 근대적인 발명품이다. 특히 인권을 확립한 1789년의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소유권의 배타성을 확립했다는 점은 혁명의 복잡한 내막을 드러낸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가진 자들의 정원에서 꽃을 피웠다.


법제도가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을 보호한다면 자치와 자급을 지향하는 직접행동은 그 권리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사실 여러 정치사상가들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내세워 사적 소유권을 보호해 왔기 때문에 직접행동은 소유권이라는 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소유와 소유권은 다르다



서구사회에서 자연질서는 인간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고 더구나 특정한 소수의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가난, 헌신을 강조한 성경이나 인(仁)과 의(義), 도(道)를 강조한 동양의 경전 어느 것에도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무제한으로 부를 축적해서 자기 것으로 삼으라고 권하는 얘기는 없다. 그 어떤 사회에도 개인의 사적 소유권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쿵족의 삶에서도 그 점이 드러난다. 땅에 대한 권리는 공동의 권리이고 그 지역의 주민이 아닌 방문객들도 주인의 허락을 구해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 “소유권이 배타적인 특권으로 변질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이는 실제로 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직․간접적으로 핵심 성원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 지역의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기에 “!쿵족은 위계질서가 없고 추장 또는 수장(headman)같은 공인된 권력자도 없다. 집단의 결정은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주로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적인 존경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배타적인 소유권이 확립되는 것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전의 역사가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론은 구체적인 역사보다 이론적인 논증에 바탕을 뒀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한 영국의 사상가 홉스(T. Hobbes)나 로크(J. Locke)가 ‘자연상태’라는 반(反)역사적인 가정에서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마련하고, 체제의 정당성이 개인의 생명과 그만큼 소중한 사적 소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자연상태에서의 불안정한 공유를 포기하고 장차 더 모을 개인의 소유를 확실하게 보호받으려면 국가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비록 홉스는 국익國益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소유권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다고 봤지만). 그 뒤 이런 논리는 정치법과 시민법을 구분하면서 정치적 자유와 소유권을 구분하고, 설령 국익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국가가 시민법의 지배를 받는 소유권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근대사회에서 ‘발명된’ 배타적인 소유권은 물리적인 힘을 독점하고 경찰과 군대로 자신을 보호하는 근대국가와 더불어 확산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이와 다를까?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고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보상해야 한다는 고대의 법령이 배타적인 소유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대의 법률 하에서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에 대한 권리가 무조건 보장되지도 않았고 그 권리가 자식들에게 무한정 상속되지도 않았다. 특히 땅이나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는 보통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개인은 자원을 소유할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이나 <속대전> 어디에도 배타적인 소유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땅에 대한 권리를 ‘입안(立案)’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그 권리는 배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3년의 기한을 정해놓고 땅의 소유자라도 땅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넘기거나 실제 경작자에게 땅의 권리를 줬다. 즉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권리는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이었고, 지주가 아니더라도 경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빌려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경국대전>은 임야를 개인이 점유하면 볼기 80대에 처한다고 밝히며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상 개화기가 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 배타적인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를 추종하던 개화파들은 자본주의 제도와 그 소유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예를 들어, 유길준은 개인의 재산권이 국가의 보호대상이라고 보면서 ‘재산의 권리’가 인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봤다). 그리고 1901년에 설치된 지계아문(地契衙門)은 전국에서 토지조사를 실시해 토지소유권 문서를 발행했고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보호하는 시장경제를 도입했다(그러면서 중앙정부가 세금의 징수권을 독점했다). 그리고 경작자의 권리(中畓主權)를 부정하고 소유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대지주들의 독점적인 소유권을 보장했다.


일본 총독부의 ‘토지조사령’(1912년)과 토지조사사업은 농민들의 점유경작권과 도지권(賭地權), 입회권(入會權)을 부정하고 지주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을 확립하면서 실제로 토지를 점유하고 경작해온 농민들을 소작농민으로 만들었다. 배타적인 소유권은 식민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었다.


경작권을 가진 소농(小農)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경제적인 조건이 나빠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의 기반이, 소농들이 함께 일하며 마련해온 공유지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제 개인의 삶은 철저히 그 사람이나 가족의 가진 것에만 좌우되었다.



소유에서 공유로



프랑스의 사상가 프루동(P.J. Proudhon)은 “소유란 도둑질이다”라는 주장으로 부르주아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프루동은 서구의 자연법사상 어디에도 소유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없다고 보면서 사회를 규율하는 원리인 권리가 사회성을 파괴하는 소유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것을 무력이나 교활한 짓으로 빼앗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사회성을 파괴하는 자”이고 “그는 강도이다.”


그리고 프루동은 생산물과 생산수단을 구분하면서 설령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한다 할지라도 생산수단의 소유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생산물에 대한 소유는 배타적이다. 요컨대 물 안에서의 권리jus in re이다. 반면에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는 공통적이다. 즉 물에 대한 권리jus ad rem이다.” 혼자 일하지 않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에서 생산수단은 평등하게 소유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생산활동에 따른 생산물도 공정하게 분배되리라 봤다.


프루동은 이런 자연적인 질서, 자연적인 사회성을 파괴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라고 봤다. 소유권과 공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프루동이 마련한 대안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상호주의와 인민은행, 연방국가였다. 노동자 각자가 자신을 위해, 모든 노동자들이 모두를 위해 서로 연대해서 일하는 조합(association)을 만드는 것, 그런 조합의 설립을 지원하고 민중들의 상호신용을 실현하는 인민은행,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끔 민중들이 아래로부터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연방주의, 프루동이 꿈꾼 세상이었다.


19세기의 프루동보다 훨씬 빠른 16세기에 이미 비슷한 주장을 펼친 사람이 한반도에 등장했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나오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정여립(鄭汝立)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정여립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선 사상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것이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은 당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왕의 권리마저 부정했다.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정여립은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외치며 “인민에 해 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고 주장했다. 정여립은 왕위세습이나 충군사상을 부정하면서 능력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했으니 그가 그 시대를 평화로이 살아갈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정여립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동계이다. 반상차별의 세상,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정여립은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이나 반상귀천, 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했다. 이율곡의 제자이기도 했던 정여립은 민중이 서로 도우며 공동체를 만드는 계조직에 주목하고 양반,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고루 계원으로 받아들이며 대동계를 호남 일대로 확산시켰다. 대동계는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했고, 1589년에는 전주부윤의 부탁을 받고 대동계가 왜구를 몰아내기도 했을 만큼 대동계의 힘은 강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조선왕조를 전복시키려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가 꿈꾼 대동세상,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 세상의 꿈은 후세로 이어졌다.


정여립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은 소유를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이나 스스로 조직된 의병들은 대지주나 부농에게 곡식이나 금전을 걷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의병들은 “우리는 도적이 아니다.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는 자이다. 고로 너희들은 나라를 위해 우(右) 물건을 빨리 제공하라”고 말하며 재물을 걷었고 협력하지 않는 지주들에게 강제로 재물을 뺏기도 했다. 활빈당같은 산적들도 부자의 돈과 곡식을 빼앗아 빈민에게 두루 나눠주며 낭비를 막고 자원을 나누려 했다.


배타적인 소유권이 확립된 일제 식민지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소유권의 벽을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났다. 농민들은 배타적인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식민권력에 맞서 소송을 벌이거나 소작쟁의를 일으켰고 때로는 공동경작단을 만들어 지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논을 갈거나 모를 심으며 강제경작을 시도했다. 그리고 생산자협동조합, 상호금고 등을 만들어 공생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동체의 힘으로 소유의 벽을 넘어서려 했다.


그리고 동학의 한 분파인 보천교는 자급자족의 종교공동체를 지향하면서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는 정전법(井田法)을 실시하고 토지의 개인소유를 폐지하려 했다. 기독교계의 손정도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하고 무산농민이 서로 도우면서 “생산의 자본력을 만들어 이상촌을 건설하자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리고 YMCA의 농촌협동조합운동, 천도교의 공생조합(共生組合) 등은 공동노동, 공동경작의 흐름을 다시 만들며 농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 했다.


이런 직접행동이 이루어지던 시대에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가 권리였다. 직접행동은 더불어 함께 살 공유를 민중의 권리로 요구했다.



소유권의 대안: 국유에서 공유(共有)와 공유(公有)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대표이념을 독점하면서 배타적인 소유권에 대한 대안도 국유화나 국가를 통한 관리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녕 국유화가 대안일 수 있을까?


고병권은 “공유(公有)란 사적 소유권에 대한 부정”이지만 “공유가 국유를 의미할 때, 즉 국가에 의한 배타적 독점을 의미할 때, 그 독점은 사적인 독점의 형태로 쉽게 전화될 수 있다. 국유에서 드러나는 국가권력의 독점성은 사적 소유권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사적 소유권의 기반이라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새만금간척사업이나 4대강사업처럼 국가권력이 사유지를 강제로 수용하고 처분하며 자본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고병권은 이런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국가에 의한 사적 소유권의 발생이자, 소유권 없는 대중들에 대한 추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유권을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은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령 평택 대추리에서 이루어진 대중들의 추방은 소유권 박탈의 형식을 띠었다.” 한국처럼 식민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국가에서 국유는 위험한 논리이기도 하다. 소위 좌파가 권력을 잡으면 국가의 성격과 역할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러시아혁명은 그런 변화를 일으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증명했다.


더구나 국유화는 민중과 그 공동체의 성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공유는 단순히 소유를 나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공유는 그 공유를 관리할 모임을 필요로 하고 그 모임은 구성원들에게 민주주의를 학습하며 세계관을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두레는 공동노동조직이자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다루는 의사결정기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유화는 민중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며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만 민중이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고 권리를 확장시킬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저항은 국유보다 공동의 소유(共有)와 공적인 소유(公有)를 지향해야 한다.


공동의 소유 면에서 노동자의 작업장 소유와 관리, 협동조합과 공유지의 확대, 작업장과 공동체 위원회들의 네트워크같은 민중의 자주관리, 직접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생산수단을 공유하며 협동노동하고 공동관리하는 일터와 삶터를 확대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지식의 공유를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지적소유권이라고 하면 음악이나 영화같은 저작물의 권리만 생각하지만 종자와 유전자,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들이 지적소유권의 대상이다. 최근 초국적자본들이 혈안을 들이는 영역도 바로 이런 지적소유권 부분이다. 왜냐하면 지적소유권들이 결국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몸과 생명의 문제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소유 면에서 보면 단순히 민영화에 도전할 뿐 아니라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자산을 다시 민중이 관리해야 한다. 2009년 기준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한 공유재산이 약 229조원을 넘어섰고, 중앙정부의 국유재산도 약 337조원에 달한다. 이 재산은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낭비되어온, 정확히는 기득권층이 나눠온 이런 재산을 통제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권리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를 통해 보호받고 확대될 수 있다.



● 참고한 책


고병권 지음, 『추방과 탈주』(그린비, 2009)

김동노 지음, 『근대와 식민의 서곡』(창비, 2009).

류은숙 지음, 『인권을 외치다』(푸른숲, 2009)

마저리 쇼스탁 지음, 유나영 옮김, 『니사: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 이야기』(삼인, 2008)

조경달 지음, 허영란 옮김, 『민중과 유토피아』(역사비평사, 2009)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지음, 이용재 옮김, 『소유란 무엇인가』(아카넷, 2003)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모반의 역사』(세종서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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