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서강대에서 열린 '한국사회체제론을 다시 생각한다' 심포지움에 다녀왔다.
체제론 블로그: http://socialsystem2009.textcube.com/

지금 한국사회의 상을 드러낼 치열한 장일 줄 알았는데, 논쟁은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낡은 주장의 반복에 가까웠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97년 체제', '08년체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 '신자유주의'라는 말만 귀를 맴돌 뿐, 지금 우리가 부딪치는 삶의 단면을 드러낼 수 있는 날카로운 사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체제론'의 탈을 쓴 '선거전략'에 가까웠다.

심포지움에 참여했던 발표자, 토론자들과 나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첫째, 그들이 맑스주의적 관점에 서 있다면, 나는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자 했다. 과거의 낡은 논쟁을 되풀이하자는 게 아니라, 심포지움의 주된 논지는 국가를 전제하고, 그걸 진보적인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한국의 중앙집중성과 산업화전략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만들어져온 구조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체시켜야만 진보적인 발판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공동체를 택한 건 그것이 작아서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만 국가를 해체하고 자치,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자치, 자립의 기반을 강조했던 건 불쌍한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변화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포지움에 참석한 사람들의 생각은 '민중과 함께'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불쌍한 노동자, 불쌍한 비정규직, 불쌍한 빈민을 위해서 진보정치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결코 진보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결국 자신들의 진보적인 구상으로 민중들의 삶을 끼워맞추는 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두 가지 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심포지움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한국사회를 분석할 거대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거대담론은 그냥 크기 때문에 거대담론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크기 때문에 우리 삶과 더욱 밀착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검사비용을 무료로 만들고 타미플루를 무상공급한다고 해서 '신종플루'의 공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주장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조류독감, 신종플루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병은 기존의 생태계 질서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구조적이면서도 개인적인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위기, 식량위기, 생태계위기라는 엄청난 해일 앞에서 왜 공동체가 희망의 대안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담론이 필요하다.
그 거대담론은 우리 삶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그 파괴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겨울방학이 오면 그 담론을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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