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0.01.07 00:02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

 

 

1919년 4월 1일 밤 11시, 경기도 화성시 수촌리의 주민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죽산 봉우리는 마치 산불이 난 듯 환했고 만세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개죽산만이 아니라 쌍봉산, 천덕산, 당재봉, 무봉산 화성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붉게 타올랐고 깜깜한 밤공기를 타고 만세소리는 사방으로 퍼졌다. 일본 헌병대가 총을 쏘며 산기슭을 올랐지만 도망을 치면서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인근 수원에서 위생검사와 도박을 핑계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 경찰 1명이 주민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칠흙같은 밤 수촌리 주민들의 마음은 산 위의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이대로 꿇고 사느니 서서 죽자, 굳은 다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같은 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 놈이 그놈이지만 일제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삶이 더 어려워졌다. 자기 땅을 짓던 사람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대부분이 높은 소작료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제는 일본 모종을 심어라, 뽕나무를 키워라, 매달 가마니를 몇 장씩 짜서 내라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82.9%가 소작농이던 칠곡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안성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었으며 우체국과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일본인의 상점도 부쉈고 심지어 다리나 철도까지 끊으려 했다. 심지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을 대비해 산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기도 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이날 경기도 안성의 만세시위를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이라 불렀다.

 

유관순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유관순 누나와 태극기, 만세 삼창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어린이, 거지, 기생들도 만세를 외치며 시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심지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 돌아다니는 전문 시위꾼인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데 누가 감히 운동을 이끌었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3월 1일만이 아니라 3월부터 4월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3.1~3.10

3.11~3.20

3.21~3.31

4.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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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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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21.4

78.6

34.6

65.4

 

<표>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점 수그러들었지만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그 기운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말과 4월 초는 시위의 정점을 이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거리에서 일제와 맞섰다. 때로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때로는 낫과 몽둥이, 호미를 들고 경찰, 헌병과 맞섰다.

그 엄혹한 일제 시기에, 나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헐벗은 삶에서도 저항은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려 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했고 을사조약 이후에도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는 민중의 삶 자체를 뿌리째 뽑아 그 삶이 외부의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제는 행정부, 사법부의 주요 관리들을 일본인으로 교체할 뿐 아니라 헌병과 경찰의 수를 대폭 늘리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과 경찰은 단순히 범죄를 단속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맡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과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1910년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결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12년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의 경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땅들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를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걷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비싼 소작료를 낼 뿐 아니라 일본 모종을 쓰고 일본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종자를 골라 모를 심고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을 매겼다. 또한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일제의 만행은 이렇게 개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저항의 힘이 자치공동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자치공동체인 동이나 구를 없애고 강제로 면으로 통합시켰고 대부분의 면장을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꿨다.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지배구조로 흡수시키려 했다.

3·1운동은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내몰리고 뿌리 뽑히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외쳤다.

이렇게 민중들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본의 간섭 없이도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음을, 그리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대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시는 헐벗은 삶으로 내몰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가 국가의 폭력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자기 목숨을 건 자발적인 정치의 운동이었기에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시위를 막아도 지방으로 들꽃처럼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만세시위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일제는 가늠하지 못했다.

 

직접행동과 전쟁상태

 

이런 민중의 의지를 보았기에 일제는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민중이 일제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향하자 일제는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위대, 소방대까지 동원해서 민중을 탄압했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위들은 민족대표들이 주장했던 평화시위를 따랐지만 일제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헌병이나 경찰이 총을 쏘고 주동자를 연행하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도 돌멩이, 죽창, 삽, 도끼 등을 든 시위로 변했다. 그래서 <표>에서 드러나듯 3월 말이 되면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은 계획적으로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고, 평안도 안주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3명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직접행동에 일제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맞섰다. 화수리의 경우 일제는 마을의 집 30채를 불지르고 마을주민들을 끌고가 갖은 고문을 다했으며 주모자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안성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과 함께 보병부대가 주민들을 검거에 나서 1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으며 9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 부대가 학교에 야영을 하며 한 달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권력에 맞섰던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고 적었다. 일제는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을 저지른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런 피의 전쟁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민중의 정치를 다시 치안의 틀에 가두기 위해 일제는 ‘문화정치’를 펼쳤다. 이 문화정치는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작가 이광수를 비롯한 거짓된 자치주의자들이 민중들의 자치의지를 대신하려 들었고 한국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피를 팔아 자신들의 이득을 꾀했다.

스스로 다스리며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기득권층의 국가는 역사를 왜곡해서 3․1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독립’이라는 국가주의의 목표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와 정치행동은 모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만 남아야 했다.

 

3·1운동과 촛불집회, 앞으로의 사회운동...

 

역사학자 이정은의 말처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이튿날 아침 각처의 집 대문 앞에서 광무황제 독살설을 알리는 격문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일제 경찰도, 이를 추진했던 민족진영에서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되어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청소년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건은 터진다. 이런 사건은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터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3·1운동은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패배라 여기지만 1920, 30년대의 운동을 보면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불납동맹’, ‘아사동맹’, ‘소작권상실 걸인단’을 만들어 싸웠고 ‘소작인조합’, ‘농민조합’은 전통적인 자치공동체를 이용해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키려 했다.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아나키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강연회와 야학, 독서모임에서 대중과 더불어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위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중앙의 지도부가 전국의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자기 동네에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민란과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쉽게 그 불길을 잡히지 않았고 민중의 삶이 그 운동과정과 방식에 반영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3·1운동은 스스로를 거름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의 불씨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곳은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를 돌아가며 심듯이 짓밟힌 곳은 잠시 숨을 죽였고 싹을 틔운 곳은 그 숨이 끊이지 않도록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사상’과 ‘자기조직화’로 맞섰다.

3·1운동은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들은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그러니 3․1운동은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2009년을 마감하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운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2010년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이념, 새로운 정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준비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참고한 책

 

이정은 지음,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국학자료원, 2009).

박환 지음,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200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청년사, 1989)

조동걸 지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함석헌 지음, 『생활철학』(서광사, 1966)

함석헌 지음,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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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09.08.04 00:17

식민지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해방이 되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었을까? ‘국사(國史)’를 배워온 우리들에게 그 사회는 그냥 민족‘국가’였고, 대학의 세미나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에는 민족이 사회주의로 바뀌었을 뿐 대안은 여전히 ‘국가’였다. 이호룡의 『한국의 아나키즘』(지식산업사, 2001)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지성사가 발전해온 과정을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국사를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호룡은 우리가 근대의 지성사를 파악할 때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사상 연구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시기와 수

용한 동기가 잘못 파악되었고, 사회주의의 조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알지 못했으며, 공산주의 수용의 사상적 배경을 놓쳤고, 1920년대 초 사상계의 분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리는 한국 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매우 편향되게 그 역사를 파악했다는 지적이다.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가 그동안 억눌려져 왔던 사상의 단면을 드러낸 것은 맞지만, 그 역시 빙산의 일각일 뿐 빙산을 드러내는 작업은 훨씬 더 많은 역사적인 추적과 분석을 요구한다. 이호룡은 이런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외의 사상을 그 아류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식민지 시기 한국의 민중에게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사상체계가 필요했고, 이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사회주의와아나키즘이 함께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동사상이나 사회개조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대체할 사회의 원리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호룡은 한국사회가 이미 1880년대부터 아나키즘을 접했고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호룡은 1910년대 사회주의의 주류가 아나키즘이었다고 주장한다. 1905~1920년 동안 일본,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이 활발했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자연히 아나키즘운동이 대세였다는 해석이다.

사실 내 관심은 1919년 3월 1일 이후 한국사회의 민심(民心)과 운동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이다. 닭이냐 달걀이냐, 아나키즘이냐, 사회주의냐를 떠나 어느 문헌에서건 3․1운동을 한국사회의 운동에서 핵심적인 변화의 지점으로 지적하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드러난 민중의 폭발적인 힘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학습하게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힘에 주목하며 의식화, 조직화의 길로 나서게 된다. 아마도 아나키즘이 그 과정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민중의 힘에 주목했던 사상이자 우리 몸에 익은 상호부조의 전통을 반제국주의 사상과 잘 결합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호룡은 책에서 “‘문화정치’가 시행됨에 따라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 등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자유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한국인에게도 주어졌고, 그 합법공간을 이용하여 아나키즘 선전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조금 더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듯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사건은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의 창설이다. 이호룡은 조선노동공제회의 주축이 아나키즘 세력이었다고 얘기한다. 이는 사회주의운동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그가 책에서 인용하듯이, 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에 아나키즘 관련 글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고, 보통 사회주의 계열로 분리되는 서울청년회의 김명식 등이 아나키즘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노동공제회의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추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이호룡은 일제 강점기에 아나키즘이 주된 사회운동의 흐름으로서 존재했음을 선언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겨누며 아나키즘은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이호룡은 얘기한다. “한국 사상계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좌우 대립으로 치달았다. 좌우 대립을 완충시킬 수 있는 제3의 사상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다.”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사상적 좌표가 상상력 없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아나키즘은 새로운 상상력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역사의 과정을 밟았다면 어땠을까라는 공상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상상에서 아나키즘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누구와 함께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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