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 없이 판도라 행성이 지켜질 수도 없었다.
자연을 지키려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공생하는 삶을 지키려는 그들의 강한 의지와, 그 의지에 울림을 받은 자연이 함께 판도라 행성을 지킨다.

신성한 나무의 신 에이와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지만 제이크의 간절한 부탁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구에는 더 이상 푸른 숲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파괴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도 그렇게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결국 이런 마음의 공명(共鳴)이 권력의 힘에 맞서 승리를 거둔다.

청와대가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도 이런 공명이 있다면 막을 수 있다.
지키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자연이 우리와 공명할 것이다.

몇 달이 지났건만 천안함이 침몰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고 남북한간의 긴장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긴장을 완화하는데 앞장서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이런 긴장을 부추기는 일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 김정일 추종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안함의 재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라며 천안함재건조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행히(?) <한기총>이 당장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침몰의 원인이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나더라도 무력응징만큼은 피해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무력응징을 제외한 모든 단호한 대응을 총동원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기총이 참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들은 공공연히 "김정일 단죄", "북한이 도발시 북한의 잠수정, 잠수함 기지를 공격", "한반도는 지금 총성없는 전시상황"이라고 외치고 있다. 평화의 사도여야 할 기독교인들이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이런 집회에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모순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간의 동서냉전이 한창일때, 미국에서도 종교인들이 '정당한 전쟁', '핵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곤 했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며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머튼 신부가 적극적으로 글을 쓰며 평화를 외치자 가톨릭 신부들이 머튼을 비판하기도 했고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대수도원장)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든 핵전쟁, 그리고 꼭 핵무기가 아니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도시와 인간과 국가와 문화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은 극히 중대한 범죄행위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상적인 도덕률에 의해서도 금지되는 행위"라고 믿었던 머튼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머튼의 평화론](분도출판사, 2006)은 그가 쓴 평화에 관한 여러 가지 글을 담고 있다.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한 머튼의 경고"라는 추천사처럼 머튼은 암울한 냉전 상황 속에서도 평화의 빛을 놓치지 않으며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무기를 써서라도 공산주의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어떤 무기가 있더라도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전쟁에서건 평화에서건 그리스도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머튼이 얘기하는 그리스도적 양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지닌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우리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말고 외부의 공산주의나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지만 우리 내부의 파시즘과 집단주의에도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파괴적인 전쟁무기가 아니라 "'성령의 칼'에 대한 믿음"과 "기도"이다. 이 양심과 믿음, 기도를 잃어버렸기에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에서 "예외적 폭력이 정상이 되었고 정상적 자비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머튼 신부는 짧은 17편의 글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이 전쟁을 지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요즘 한국에서처럼 전면전이 아니라 제한된 전쟁을 벌이면 어떠냐는 주장에도 머튼 신부는 전쟁을 소규모로 제한하는 것이 전쟁을 아예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제력을 필요로 한다고 꼬집는다. 그렇게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전쟁을 없앨 것이지 왜 제한전을 벌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
전쟁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려는 욕구와 태도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어떤 대가를 치뤄서라도 반드시 적국을 없애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머튼 신부는 이렇게 꼬집는다. "
우리가 자유와 권리와 인간적 진실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무책임한 행동과 흥청대는 삶과 돈벌이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게 무엇인가? 우리의 종교인가 우리의 물질적 부인가? 아니면 종교와 돈을 우리가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어서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한국의 종교계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 너머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튼 신부는 우리 속에 내면화된 "도덕적 차원에서의 거의 완전한 수동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사회적․정치적․군사적 영역에서의 악마적 능동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 당국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더욱 안이하게 판단하는 맹목적 믿음"을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머튼 신부는 신앙과 정치를 나눠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발언"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이 투표장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야만 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진리를 자기희생―오해와 불의와 비방과 심지어 투옥이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으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바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노동문제든, 인종 문제든, ‘제3세계 문제든, 국제문제든 간에 모든 영역에서 정의를 위해 쉴 새 없이 투쟁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은 우리 내면의 깊은 종교적 원칙과 부합되어야 한다. 신앙과 정치를 더는 별개의 영역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조금 위험한듯 보이지만 머튼 신부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랑과 평화라는 종교의 원리가 연대와 정의라는 사회의 원리와 무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머튼 신부의 뜻은 지금 한국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종교계의 입장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뜻은 한반도 전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 더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를 위협하는 다양한 흐름에 맞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켜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머튼 신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을 위해 아직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재빨리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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