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 1, 2>은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학생 80만 명이라는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교의 한 반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무인도에 가두고 3일 동안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하는 ‘배틀로얄법’을 선포한다. 이 법의 목적은 한 가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에 복종하도록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탈출한 청소년들은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며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는 총이 아니라 미디어와 화폐를 들고 저항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다룬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미래를 맡기길 거부하는 중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터넷과 미디어를 기반으로 기업을 만들고 호텔을 인수해 자신들의 직업훈련소를 만들고 어른들을 고용한다. 어른들의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바는 미래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점과 기성세대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고, 과거의 지식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혼자 살아남는다는 게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같이 살아남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꿈꾼다. 영화와 소설에서도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조직화와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뭔가 과거의 공동체와 다른 느낌을 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과거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일까?

 

 

프랑스의 사상가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나 욕망은 근대적 경험에 나타난 가혹한 현실에 응답하기 위해 뒤늦게 창조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로 접어들며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기독교나 휴머니즘의 안타까움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공동체라고 믿는 것은 부족이나 제국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상이라 불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타인들의 공동체”이고, 일시적으로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공동체는 이미 규정된 것을 실현하는 관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관계이고, 사회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장소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그런 공동의 관계를 사는 삶이 훨씬 더 중요한 장이다. 낭시의 논리를 따르면, 무엇을 공동체라 부를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한 공동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닐 뿐 아니라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들을 위협하거나 지배하려는 위험한 도구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에서 “흔히 공통언어나 공통개념형식 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국가나 도시나 제도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립하는 다수의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합리적 공동체’가 타자를 배격한다고 비판한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길 거부하며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주변의 무수한 웅성거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소통이 필요한 이유이고, 우리와 다르다며 배척한 사람들이야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인데, 우리는 그 무거운 이유를 대면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 그들과 우리가 마주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만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타자를 마주할 때에만 우리는 공동체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기스는 우리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가 있다고 얘기한다. “병원들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라고 링기스는 묻는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 고향에서 내쫓긴 농민,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죽어가는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두 서양 사상가의 철학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집단적이고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집단인데, 이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건 공동체의 가면을 쓴 다른 무엇이라는 거다. 이런 해석을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동서양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와 우주의 전일성(全一性)은 이런 사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문제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실제 삶이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TV드라마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그리워 할 때도 있지만 실제 삶은 CCTV와 출입증으로 도배된 아파트촌에서 이루어진다. 마을공동체, 마을기업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으로 홍보되는 세상이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공동체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자연스러운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상상하고 있다. 공동체의 진위(眞僞) 여부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말 함께 살려는 준비를, 타자들을 환대할 준비를 하고 있나?

 

 


문턱있는 공동체의 번성, 환대하는 공동체의 소멸

 

 

안락하고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주로 그 공동체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지된다는 역설! 공동체에 사는 사람과 공동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의 공동체란 “그 내부의 모습보다는 울타리가 빈틈없이 경계된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문턱이 만들어지고 울타리가 세워진 곳에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공동체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경비원들을 고용한다.

 

“끊임없이 예측을 불허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나운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원들에게 안전한 항구, 꿈의 종착지를 약속”하는 공동체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수록 그 상상은 공동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어떠한 잡음이나 혼란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위험에 처한 몸 주변에 있는 분명한 위험들을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 욕구는 ‘외부’가 비슷한 것이 되도록, 외부를 거의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 ‘저 바깥’을 ‘이 안’과 비슷한 형태로 다시 만들고 싶은 욕구로” 번진다. 이 욕구가 강렬해질수록 공동체의 문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바우만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 매일매일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공동체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고 살만하지 않은 세상을 살만한 것으로 위안하는, 그래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정당화시킨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부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공동체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외려 그것을 심화시킨다.

 

 

이렇게 외부와 담을 쌓고 지내려는 공동체들이 있는 반면,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노숙자들이 맘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환대의 집’을 미국 곳곳에 세웠다. 도로시 데이에 관한 평전 《환대하는 삶》을 쓴 로버트 콜스는 환대의 집을 “복지국가라는 익명의 관료적 체계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으로 자선행위가 이루어지고 인정되는 곳”이라 설명한다. 환대의 집은 “창고 하나와 아파트 하나를 빌리고, 빵과 버터를 사고 커피를 만들고 수프를 준비하고 노숙자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옷가지를 구해 주고, 가능하다면 잠잘 곳을 마련해 주고, 가장 중요하게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우정과 애정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이런 환대의 집이야말로 낭시나 링기스가 말하는 공동체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곳에는 같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노동자신문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도로시 데이는 “누군가는 거대 기업과 싸우러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정부를 압박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을 옹호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워싱턴에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는 등 돌린 채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바보같은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로 동등하게 마주보려면 우리는 그런 마주침을 방해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마주보며 함께 살려고 결심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문제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늘어나는 반면 환대하는 공동체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고립된 공동체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면, 안에만 신경을 쏟지 말고 밖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 섞이면서 공동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위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며 존재를 이어간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바는 공동체를 가족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처럼 국가와 학교, 가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건 속성이 다른 모임을 하나의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시도이고, 우리가 지향할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공동체를 표방하는 곳들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 중심이다.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주로 보육이나 교육에서 생긴다는 점이 그런 특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한국의 전통 공동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묘사되듯이 공동체는 세상 만물을 품는 장소였다. 그리고 권정생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공동체는 가족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가족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 가족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고, 낯설고 찢어진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가족의 사랑을 강요할 수도, 친구와의 우정을 조작할 수도 없는 곳이 공동체이다.

 

물론 가족이라 불리지 않던 사람들을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이고 더불어 산다면, 송해성 감독의 영화 <고령화 가족>처럼 ‘새로운 가족’이 구성되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곳은 공동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얽혀 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자체가 대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떤 삶을 꿈꾸는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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