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권력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사회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간혹 불평등한 사회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지만 그런 시도들은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층은 덩굴처럼 얽혀 서로의 뒤를 봐주면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나 상식조차 무시하고 있다. 절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기득권층은 거의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기득권을 독점하고 강화해 왔다. 간혹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벌거벗음을 폭로하거나 당나귀 귀라는 소문을 퍼뜨려도 기득권층은 압도적인 힘으로 그 사실을 은폐해 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실을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이럴 수 있냐는 분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와 뒤섞인다. 그리고 한 명에 대한 분노는 곧 또 다른 이에 대한 분노에 밀려나고, 해결 없는 분노가 길어지면서 분노는 어쩔 수 없다는 냉소로 변질된다.



깃털과 몸통



우리 사회에서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몸통 찾기에 바쁘다. 기득권층을 위해 기꺼이 총대를 메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뒤를 봐주는 세력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사건이란 게 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건은 그런 관계가 폭로된 상황을 뜻한다. 사건이 터졌으니 부패의 고리가 끊어져야 할 텐데, 우리사회에서는 사건이 터지면 진실이 더욱더 은폐된다. 깃털이 몸통을 흔들고 거짓이 진실을 감춘다.


사실 깃털과 몸통을 나누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병든 현실을 반영한다. 한 사회에 살지만 그들과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 <공공의 적2>에서 검사 강철중(설경구 役)이 상대하는 한상우(정준호 役)는 대표적인 기득권층이다. 어릴 적부터 든든한 집안을 배경 삼아 승승장구해온 상우는 돈세탁, 협박, 뇌물, 살인을 일삼으며 5천억 원이나 되는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리려 한다. 자신을 잡으려는 철중에게 상우는 이렇게 얘기한다. “태생이 천한 것들이 좀 괜찮은 자리에 오르면 착각을 해. 자기들이 뭔가 대단한 걸 이룬 것처럼. 그래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 머리 위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 니들은 니들끼리 살란 말이야. 버러지같은 인생들끼리.”


영화는 강철중이 한상우를 구속시키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강철중처럼 “법이 뭔데요? 법, 그거 최소한입니다. 사람들끼리 살면서 정말 지켜야할 최소한인데, 그것도 안 지키는 진짜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못하면서 법같은 거 없이도 착하게 사는 사람들 억울하게 만들면요. 다시 못 돌아와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검사는 없다. 외려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벌가의 비리는 번번이 무죄판결을 받고 설령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금방 집행유예나 특별사면을 받는다.



근대의 법․제도와 기득권



21세기를 맞이해 독특한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화 <세기말>은 20세기말 한국사회의 풍경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천(이호재 役)은 이렇게 말한다. “돈 있는 이들이, 이대로, 왜 제발 이대로 하면서 건배하는 줄 아나. 참말로 이대로가 좋은 기라. 대한민국, 망해도 안 되고 더 잘 되도 안 되는 기라. 선진국, 그거 절대 사절이야. 선진국하고 후진국 결정적인 차이가 뭔 줄 아나. 투명과세라. 많이 번 놈 많이 내고 쪼매 번 놈 쪼매 내고. 가진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거 아이가. 내 돈 넘 주는 거. 내하고 룸살롱 같이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간 아가 있는데, 마, 학을 떼는 기라. 얼매나 세금을 때려 맞는지, 빨갱이 나라가 따로 없다 캐. 여서 얼매 안 냈거든. 그라이 여가 천국이제.”


모두가 약간의 불안감과 흥분을 느끼며 맞이했던 21세기에도 한국의 기득권층은 철저한 현상유지를 바랬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완성된 우리의 근대적인 법․제도는 기득권층을 처벌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입법, 행정, 사법 거의 모든 제도가 철저히 기득권층을 보호해 왔다. 아직까지도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하는 문제가 뉴스거리가 될 만큼 우리의 근대법과 제도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가로막아 왔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일단 한번 만들어진 권력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기득권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법과 제도의 잘못된 적용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 자체가 문제이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부패한 수령을 쫓아내거나 필요하다면 부잣집 곳간을 열기도 했는데, 근대의 법과 제도는 이런 해결책을 금지했다. 사유화된 공권력이 힘을 독점했고, 자력구제는 범죄가 되었다. 우리는 옛날보다 더 합리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야만적인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합리의 가면을 쓴 야만적인 사회에서 기득권층을 무너뜨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야만적인 억압의 형식은 조금씩 세련되게 변해 왔다. 과거에는 국가의 폭력이 기득권층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면, 지금은 돈의 폭력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차라리 노역을 살고 나오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에게 갖가지 벌금형이 내려지고 있다. 파업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손해배상압력이 노동조합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니 기득권층에게 ‘법대로 하자’는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법치주의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나의 공동체와 두 개의 세계



더구나 기득권층은 자기 입맛대로 법과 제도를 바꾸며 비밀리에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부정한 방법으로 특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대판 음서제도 논란이 벌어졌다. 한 사람의 문제인 줄 알았더니 제도 자체의 문제이다. 힘없는 이들이 신분상승을 꿈꾸는 3대 고시(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 모두가 기득권층을 특별대우하거나 그들에게 유리하다. 지난 10년간 신규채용 공무원 중 약 23%가 특채로 선발되었고, 로스쿨의 한 해 등록금은 1천만 원에서 3천만 원에 이르며, 외교관이나 고위 공무원의 자식들은 대학입학부터 인턴, 취직까지 온갖 특혜를 누려 왔다. 정부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기업에 취직할 때도 임원이나 사장단의 아이들, 고위 공무원의 아이들은 따로 관리된다.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기득권층을 위한 제도가 따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기득권층의 세계는 우리 세계를 착취하고 약탈해서 유지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그 세계의 비밀이 간혹 공개되기도 한다. 이번에 외교통상부 특채과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지적한 사람은 홍정욱 국회의원이다. 한때 『7막 7장』이라는 성공담을 팔아 유명해지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가, 지금의 조건만 보면 너끈히 상류층에 속할 그가 왜 다른 세계의 비밀을 폭로했을까? 어찌 보면 그의 ‘태생’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성공한 인물이지만 이쪽 세계에 속한 인물이기에.


하지만 이런 폭로로 그들의 세계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규칙을 정하는 건 여전히 기득권층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상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황새와 여우



물론 그동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건 아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기득권층의 헛발질이 줄을 잇고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우리 세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세계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 우기는 시기에 이뤄놓은 상식적인 업적들이, 글로벌 스탠다드와 선진화를 내세우기 위해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기준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들의 발등을 찍고 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새와 여우처럼 기득권층은 자기 꾀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사청문회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하거나 부동산 투기, 병역기피를 하면 안 된다는 ‘우리 세계’의 상식이 다른 세계에 사는 기득권층에게는 불공정한 억지논리이다. 땅을 사랑해서 많이 사놓는 것은, 학계의 관행을 따라 표절하는 것은, 능력껏 군대를 면제받고 이중국적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세계에서 지위를 증명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하다. 지금처럼 따로 살면 될 텐데,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자니 미칠 노릇이다.


이처럼 선진국, 선진화가 때로는 족쇄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기득권층은 ‘한국형’을 그토록 강조한다. 그들 세계의 상식을 한국이라는 상황으로 포장해서 유지하려 든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간섭을 귀찮아 할 뿐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여차하면 이 공동체를 떠나겠다며 우리를 협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힘이 우리 세계의 피와 땀임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이런 천국을 버리고 빨갱이 나라인 미국이나 유럽으로 떠날 수는 없기에 그들의 속내는 불안하다. 우리 세계로부터 그들의 세계를 보호해온 법과 제도가 무너질까봐 그들은 두렵다.



괴물의 등장과 기득권층의 불안



특히 기득권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합리적인 제도나 폭력적인 저항이 아니라 괴물이다. 아직까지도 기득권층이 가진 힘은 폭력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때로는 용산참사에서 드러났듯이 반(反)테러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은 기득권층의 힘으로도 막기 어렵다. 영화 <괴물>에서 드러났듯이, 그리고 미네르바 사건과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이, 기존의 권력은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시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떻게 나타났다 사라지는지 그 원인이나 과정을 알 수 없는 괴물을 처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런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한다. 그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회질서에서 벗어난 일탈자나 사이코, 쓰레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괴물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불안하다. 그들 세계만의 상식과 힘이 괴물의 탄생을 자극한다는 점을 알지만 분리된 세계를 통합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기득권층에 도전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한다. 각시탈을 쓴 이강토가 되든, 미래소년 코난이 되든,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가 되든. 그들의 불안이 우리에게는 기회이다.

한국사회에서 인사청문회는 평범한 시민들이 평소에 보기 드문 힘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 기회는 언제나 시민들에게 깊은 실망만을 심어줬다.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이후 아무런 의혹을 받지 않고 공직을 맡은 사람이 단 한 사람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의혹이 제기된 분야는 다양하지만 하나 같이 일반 시민들은 벌이기 어려운 일들이다.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자녀들의 병역이나 국적의혹, 편법증여 등 인사청문회장은 ‘위법과 탈법의 경연장’이 되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런 의혹이 문제일 수 있는데 하물며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사람들이 그 모양이니, 그걸 지켜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내성이 생겨서인지 사람들은 이제 크게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장관후보자를 여당이 감싸고 야당이 물고 뜯는 지겨운 광경을 봐도 이제 시민들은 원래 그러려니 한다. 장관들의 위장전입 정도는 눈감아 줄만큼 마음씨 좋은 시민들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그 옛날 공화국을 만들었던 시민들은 정치인의 부패를 가장 경계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말 큰 걱정은 그런 부패가 일반 시민들에게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공화국의 시민들이 법을 우습게 여기며 지키지 않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되뇌는 순간 그 나라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법치주의는 시민들의 상식이 아니라 무능한 사람들의 굴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인사청문회는 시민들이 부패를 학습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청문회장에서 공직자들은 자신의 부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사과만 하면 되는 사소한 일로 여긴다. 심지어 오리발을 내밀거나 그게 무슨 죄냐며 위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부패를 능력으로 여기거나 그것에 무감각해진다. 생중계로 목격하고 재방송으로 복습하면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혐오감을 배우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는 정치나 민주주의가 꽃을 필 수 없다.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인사청문회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얘기가 여러 정당들에서 솔솔 새어나오고 있다. 내세우는 명분이야 다양하지만 정당들의 속마음은 이제 웬만한 흠집을 덮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공직을 맡을 사람이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다. 나름대로 검증과정을 거치고 그나마 가려주니 이 정도이지 정말 모든 걸 공개하면 우리는 아사리판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만 가득한 사람들이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차지하고 있고 시민들이 이를 묵인하고 있으니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이럴 바에는 누군가의 말처럼 차라리 인사청문회를 없애는 게 미래를 위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거짓말로 일관하고 제대로 검증할 생각조차 없다면 말이다. 그러면 적어도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부패와 거짓말을 학습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일은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대신에 공직을 맡은 사람이 자리를 떠날 때 그 공로와 과실을 엄격히 따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직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책을 담당했던 사람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옛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에는 감사위원회가 있어 임기를 마친 공직자들의 정책결정을 법에 따라 엄격하게 평가하고 그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한 사실이 드러나면 축적한 재산을 몰수하고 엄하게 법적으로 처벌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인사청문회를 열든, 감사위원회를 만들어 사후평가를 내리든 과거와 달리 한국에서 고위공직을 맡으려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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