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신명호 지음, 한울 아카데미), 이 책의 주요한 상대는 두 가지 논리이다. 한 가지는 아이들의 개인적인 자질이 학력을 결정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학력격차는 개인의 타고난 자질이니 사회적인 문제일 수 없고 사회적인 대안도 필요하지 않다. 허나 계급차이가 학력의 차이로 드러나는 학벌사회 한국에서는 이미 설득력을 잃어가는 논리이다.

 

다른 하나는 부모의 사교육비 지출이 아이들의 학력을 결정한다는 논리이다. 언론에 간간히 등장하는 이 논리는 소득수준 상위 10%와 하위 10%의 사교육비 지출을 비교하며 교육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층도 활용할 수 있는 EBS나 인터넷 강의의 비중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 두 논리 모두를 비판하면서 ‘사회계층간 학력자본의 격차와 양육관행’에 주목한다. 학력자본과 양육관행이라는 두 가지 변수는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자녀 교육에 투여하는가?’가 아니라, ‘자녀교육에 왜 그리고 어떻게 돈과 시간을 투여하는가(또는 왜 투여하지 않는가)?’”라며 물음을 바꾼다.

 

왜 고학력 중산층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가?

 

고학력 중산층 부모들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아이에게 물려주려 하고 그런 지위의 상속에서 교육(학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교육열망이 일상화되고 자녀들에게 의식화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아이들 스스로 학습열의를 가져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알기에, 부모는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옥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할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자존심을 건드려야 한다. 소위 ‘엄친아’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산층의 아이들에게 공부의 목적은 부모의 지위라는 확고한 상징으로 드러나고 이를 일상적으로 되새기게 된다. 그런데 아이들만 노력해서는 이 세습과정이 완성되지 못한다. 한국의 입시교육은 전략과 전술을 요구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로 하여금 공부에 몰입하도록 자녀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주조하는 행위”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가 전략과 전술을 세워 “자녀의 나아갈 방향을 부모가 대신 판단하고 결정해주는 개입”도 필요하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야 신분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한다. 분명 개인적인 특성이 학업성취욕을 자극할 수 있지만 “저학력 저소득층 가정에서 명문대를 진학한 자녀들은 이러한 성향이 가정환경, 즉 부모에 의해서 형성되기보다는 타고난 성격으로 주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고학력 중산층 가정에서는 일찍부터 공부가 성인으로서의 성공에 가장 확실한 열쇠라는 믿음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교육제도에 순응하도록 습관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자녀의 학업열의가 높아”졌다. 아무리 좋은 자질을 타고나더라도 그것을 발전시킬 조건에 있지 않으면 자질은 사라진다. 이것이 정녕 공정한 조건인가?

 

왜 개천에서 용 나는 비율이 떨어지는가?

 

그래서 저학력 저소득층의 아이들의 열의는 계속 떨어진다. 용의 비율이 떨어지는 것은 아이들의 탓이 아니라 교육열망이 없는 부모들의 탓이다. 중산층들의 강력한 세습욕망이 저학년 저소득층에겐 없다.

 

이건 우리의 상식과 어긋난다. TV드라마와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술 취한 아버지들의 공부하라는 ‘꼬장’아닌가? 저자는 외려 그런 꼬장이 아이들의 학업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의 격차는 자녀의 학업열의와 교육열망에 영향을 주어 학업성적의 격차를 벌려놓는다”고 지적한다. 즉 저학력 저소득층이 공부를 강요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녀들의 몸과 마음 깊이 교육열을 심어 줄 수 있는 과정, 가령 “정신과 마음을 길들이는 것뿐 아니라 몸도 길들여서 어릴 때부터 공부 습관이 배도록…규칙적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도록 통제를 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 즉 컴퓨터, 텔레비전, 운동, 친구 등에 대한 접근을 선별적으로 제어하며 가능한 한 학습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유도”하는 과정이 없다. 중산층의 전략과 전술이 없다.

 

저소득층이 그런 전략을 고민하지 않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이고, 그 계층의 노동시장에서는 학벌보다 실적과 근무태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학력 노동자층은 설사 높은 학력자본의 가치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이동해야 할 ‘사회적 거리’”가 너무 길다는 점을 알고 있다.

 

격차를 해소할 방법은 있는가?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학력격차를 낳는 건 “굳이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압박하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자녀의 학업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양육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관적이다. “애석하게도 부모의 학력과 직업이라는 조건은 정책적 개입을 통해서 변화시키기 어려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학력격차를 낳는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확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제안을 한다.

 

결론도 좀 심심하지만 그보다 더 심심한 건 글의 형식이다. 박사논문을 크게 손보지 않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논문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더 깊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면 좀 다른 글쓰기가 필요할 듯 싶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성적이 부진하다는 잘 알려진 연구결과가 있고 그 부진에 어려 가지 ‘깊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천재라도 배고픈 상태에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얘기했다. 깊이 연구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실이고, 외려 그것에 관한 깊은 연구들이 이 명백한 사실을 다양한 ‘깊은’ 원인들로 감춘다는 것이다.

 

나는 교육과 관련된 한국의 연구들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학력격차가 신분을 세습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교육의 관점으로 보면 세습한 이나 배제된 이나,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나 온전한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의 경쟁에서는 절대적인 승자가 존재할 수 없다. 승자는 시스템을 짜고 자들뿐이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명백한 문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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